K사장님 !
오늘은 지난번에 약속드렸던 2세를 후계자로 육성하는 문제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2세에 대한 경영권 이양 문제는 재벌 지배구조 문제와 직결되어 있어 현재 우리사회의 뜨거운 감자로 떠오르고 있는 이슈입니다. 2세에 대한 경영권 승계문제는 통상 '세습경영', '불법상속' 등 부정적인 뉘앙스의 용어로 지칭되면서 이를 비판하는 시민사회단체와 그 과정의 합법성을 항변하며 대응논리 발굴에 급급한 재벌 간의 첨예한 대립으로 발전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 논쟁은 현재 누가 옳고 그른가를 따지는 단순 흑백구도로 진행되고 있습니다만 사실 이 문제는 다양한 관점에서, 여러 이해 관계자의 입장에 따라 깊이 생각하고 논의되어야 할 많은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또 경영권 승계에 수반되는 제 문제는 재벌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중소기업에서도 부지기수로 일어나고 있는 우리 기업 전반에 연관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경영권 세습의 적법성 여부를 따지기 이전에 이 문제에 직간접으로 관련이 있는 사람들의 다른 입장과 생각해봐야 할 논점들을 제시한 뒤 2세의 육성에 관해 몇 말씀 조언을 드리고자 합니다.
저는 2세 승계 문제가 사안 자체의 옳고 그름을 따지기 이전에 그것이 이해 당사자들에게 과연 이익이 되는 일인가를 먼저 계산해보는 철저한 기업가적 자세로 접근해야 할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이 게임에 직접 참여하고 있는 플레이어는 창업자와 그 2세, 그리고 주주와 종업원 등 4자입니다.
우선 이들 각자의 처지를 살펴보도록 하지요. 먼저 첫 번째 당사자인 창업자입니다. 창업자의 입장에서 자신의 피와 땀으로 이룩한 기업을 사랑하는 자식에게 물려주고자 하는 것은 인지상정이고 지극히 당연한 처사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이 과연 당연하고 잘 하는 일일까요?
만약 그 기업이 초우량 기업이고 가만히 내버려두어도 잘 굴러가는 기업이라면 부모 된 입장에서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러나 이 세상에 그런 기업은 없습니다. 잘 나가던 우량기업도 눈 깜짝 할 사이에 위기를 맞게 되는 것이 요즘의 경쟁 환경입니다. 바꾸어 생각해보면 2세에게 기업을 물려준다는 것은 사랑하는 자식에게 고생의 굴레를 씌워 주는 일 일 수도 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사업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잘되는 수도 있지만 잘못될 확률이 더 큰 것이 사업입니다. 성공한 부모님 덕에 비교적 풍족하게 살아 와서 세상의 어려움을 잘 모르는 2세에게 사업을 물려준다는 것은 고통을 물려주는 일일 수도 있다는 걸 생각해봐야 되지 않을까요? 그 자식이 경영을 잘 할 수 있다는 보장도 없는 상황에서 말입니다.
대안으로 경영권은 경영을 제일 잘할 수 있는 전문경영인을 엄선해서 맡기고 2세는 대주주로서 자신이 좋아하고 잘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인생을 여유 있게 즐기도록 하는 방안도 생각해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창업자들은 자기가 일으킨 기업을 자신의 분신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진정 자신의 기업을 사랑한다면 그 기업이 영속성을 유지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자식사랑도 마찬가지겠지요.
2세의 입장은 더욱 어렵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일반적으로 2세라고 하면 긍정적이기 보다는 부정적인 함의를 더 크게 느끼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2세는 "부모 잘 만나 능력보다 더 큰 일을 하고 실력보다 더 높은 직위에 가 있는 사람" 쯤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요. 시작부터 이러니 2세 경영자는 시쳇말로 남는 장사가 아닙니다. 잘하면 부모 덕이고 잘못하면 무능력자로 취급받는 그런 형편인 것이죠.
2세들은 사업이 적성에 잘 맞지 않는데도 집안 일이기 때문에 마지못해서 맡아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적성에도 맞지 않고 잘해야 빛도 안 나는데다 잘못하면 욕이나 먹는 일을 꼭 해야 될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대부분의 2세들은 능력도 있고 부모세대보다 교육도 많이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자신의 취향에도 맞고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일을 하지 못하고 부모가 짜놓은 틀 속에서 일을 해야만 한다는 것도 따지고 보면 불행입니다. 스스로의 인생과 무한한 가능성을 포기하는 셈이죠.
주주들의 입장은 더욱 딱합니다. 주주들은 자신이 그 기업의 주인이라 생각하며 자기기업의 주식가치와 배당이익의 극대화를 염원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기업에서 주식을 좀 많이 가졌다는 이유로 (상장기업의 경우 창업자가 50% 이상의 지분을 갖고 있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창업자가 능력도 채 검증이 안 된 자신의 2세에게 경영권을 물려준다는 것은 주주로서 용납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자신의 재산과 직결되어 있는 문제에 눈을 감을 사람은 없겠지요.
기업의 구성원들도 상당한 기회비용을 치르고 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기업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꿈은 열심히 노력해서 최고 경영자의 직위에 오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갈 사람은 이미 정해져 있고 그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그 위치에 오를 수가 없다면 얼마나 맥이 빠지겠습니까. 금메달리스트를 사전에 정해놓은 올림픽 경기에 출전하는 선수들의 심경이 그런 것이겠지요. 그것도 능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창업자의 자식이라는 이유만으로 2세가 그 자리에 오른다면 종업원들로서는 회사를 위해 열심히 일할 동기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종업원 입장에서는 2세 경영자가 마땅치 않은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경제학에서 정의하듯이 기업가가 위험을 택하는 사람(risk taker)이라면 종업원은 위험을 피하는 사람(risk averter)입니다. 종업원들은 위험 부담이 있는 기업가의 길보다는 안전한 취직을 택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안전하리라고 믿은 기업에 무능한 2세경영자가 입성해서 경영실패의 가능성이 높아지게 되면 그들로서는 난감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종업원들도 주주와 마찬가지로 능력 있는 경영자와 함께 계속 발전하는 회사에 근무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혼다 소이치로는 자유롭게 개성을 발휘할 수 있는 인재를 육성하고 사장에 대한 비판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내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서라며 자식을 회사에 들이지 않았고 또 회사는 개인이나 일족의 것이 아니라며 창업동지였던 자신의 동생을 퇴사시켰습니다. 혼다의 아들이 능력이 없는 인물이었나 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그의 아들은 지금도 자동차 부품 관련 중소기업을 성공적으로 경영하고 있는 유능한 인재입니다. 그는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자신이 택한 인생을 즐겁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2세에 대한 경영권 승계는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 경영자들도 자신이 일으킨 기업과 사랑하는 자식이 지속적으로 행복을 유지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 해 볼 때가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2세 경영이 문제점만 있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따지고 보면 2세만큼 창업자의 경영철학을 이해하고 창업정신에 충실할 사람도 없겠지요. 포드 2세처럼 난관에 처한 포드 자동차를 재창업해 오늘날 포드의 기반을 닦은 2세도 있고 경영성과만을 놓고 보면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삼성을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시킨 이건희 회장 같은 2세도 있습니다. 실력과 도덕성만 갖추고 있다면 2세가 리더십이나 조직 장악력 측면에서 나은 점도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도 대다수의 기업들이 친족경영을 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승계과정이 합법적이기만 하다면 결국은 역량이 문제인 것이지요.
지금까지 말씀드린 2세 승계와 관련된 문제점들을 생각해 보시고 그래도 자식만한 대안이 없다고 믿는 경영자들께는 2세의 훈육에 관해 몇 가지 유념해야 할 사항을 말씀드리는 것으로 긴 편지를 마무리 하고자 합니다.
최근의 한 연구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 부도가 난 기업의 실패 원인은 크게, 무리한 사업 확장과 방만한 자금관리, 그리고 독단적인 기업경영과 사업경험부족 및 족벌경영의 5가지로 요약됩니다. 이러한 사유들은 바로 2세 경영이 실패하는 원인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준비 부족으로 인한 실패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2세 경영자의 트레이닝은 기본적으로 혹독하게 이루어져야 할 것 입니다. 그것은 기업이나 2세경영자 자신의 장래를 위해서도 기꺼이 감수해야 할 조련과정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첫째, 2세도 다른 종업원과 마찬가지로 바닥에서부터 회사생활을 시작하게 해서 현장을 알게 하고 다양한 경험을 축적하게 해야 합니다. 둘째, 가능하면 기업경력은 타사에서 쌓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아버지의 회사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하게 되면 일찍부터 인의 장막에 둘러싸이는 폐단이 있습니다. 사람을 보는 안목이 생길 때까지는 다른 회사에서 일을 배우는 것이 다양한 경험을 위해서도 바람직합니다. 부득이하게 집안의 회사에서 근무를 시작하게 될 때는 가능하면 상급자를 능력 있고 공정하며 아부하지 않는 사람으로 선임해야 할 것입니다. 셋째, 자금관리에 대해서 철저하게 훈련시켜야 합니다. 대부분의 2세들이 일에 대한 의욕은 앞서나 자금관리가 방만하여 실패합니다. 넷째, 책임경영의 경험은 계열사가 있을 때는 작은 회사에서 시작하게 해야 하며,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가능한 한 독립적인 작은 부서나 프로젝트에서부터 시작하게 해야 합니다. 끝으로 크고 작은 난관에 봉착할 때마다 상의하고 자문을 구할 수 있는 조언자를 주변에 두도록 조처하여야 합니다.
세계적인 기업 듀퐁은 친족 경영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만 그 내부에는 경영세습에 관한 매우 엄격한 규정이 있다고 합니다. 그 규정에는 친족 중에서 최고 경영자에 오르는 사람은 경영 책임자로서의 적합한 능력을 갖추어야 하며 그 능력은 구체적으로, 후계자에게 경영권을 이양할 때 자신이 물려받았을 때보다 매출을 최소한 2배로 늘려 놓아야 하는 정도라고 명시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아무리 친족이라 하더라도 경영권은 능력 있는 사람에게 승계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겠지요.
2세 경영! 참으로 간단치 않은 주제입니다. 경영승계를 생각하는 경영자는 이와 같은 다양한 측면을 심사숙고하여 주주와 종업원, 그리고 자신과 2세가 모두 납득하고 공감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