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6차시)
하나
“오늘 저 친구 장로가 죽었어, 조시마 장로, 그 성자 말이야.”
“조시마 장로께서 돌아가셨다고!” 크루셴카가 소리를 질렀다. “맙소사, 난 그것도 모르고 있었어!” 그녀는 경건하게 성호를 그었다. “맙소사, 내 이게 무슨 짓이람, 지금 이 사람의 무릎에 앉아 있다니!” 그녀는 깜짝 놀란 듯 소리를 지르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무릎에서 내려와 소파로 옮겨 앉았다. 알료샤는 놀라워하면서 오랫동안 그녀를 바라보았는데, 그의 얼굴이 어쩐지 환해진 것 같았다. (중략) “나는 네(라키친)가 절대로 가진 적이 없는 그런 보물을 잃어벼렸고, 따라서 너는 지금 나를 이러쿵저러쿵 판단할 수 없는 몸이야. 차라리 여기 이분을 봐, 이분이 나를 얼마나 가엾게 여겨 주는지 봤지? 나는 사악한 영혼을 찾기 위해 여기로 왔어---- 내가 저열하고 사악했기 때문에 나 자신이 그런 쪽으로 이끌렸던 것이지만, 정작 나는 여기서 진실한 누나를 발견했어----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보물 같은 영혼을···. 이분은 지금 나를 가엾게 여겨주었어. 아그라페나 알렉산드로부나, 나는 지금 당신 얘기를 하는 거야. 당신은 지금 내 영혼을 회복시켜 줬어. (152쪽-153쪽)
나의 생각: 6차시 독서 분량 중에서 가장 감동적인 부분이다. 우선 부정적이었던 크루셴카에 대한 선입견이 벗겨지면서, 값비싼 향유로 아낌없이 예수님의 발을 닦아주던 성경 속 막달라마리아가 떠올랐다. 조시마 장로의 죽음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행동은 그저 자신들의 신념을 확고부동하게 만들어 줄 기적이 일어나기를 소망하거나, 아니면 성자라는 칭호가 한낮 위선에 불과한 것을 증명하기 위해 시체가 빨리 부패한 것에 의기양양했다. 알료샤조차도 이러한 상황을 허락한 신의 세계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절망할 때 창녀와 같은 크루셴카만이 장로의 죽음에 진정한 조의를 표하고, 알료샤가 무엇 때문에 슬픈지를 알아주었다. 크루셰카의 위로는 절망한 알료샤의 영혼을 회복시켜 주었을 뿐만 아니라 훗날 확고한 믿음을 지킬 수 있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이 부분을 읽고 난 후 한참 울컥해서 멍하게 앉아 있었는데, 오늘 글로 정리를 하려다 보니 왜 그런 기분이 들었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쩌면 상상만 해도 끈적거리는 요부같은, 그래서 갈등의 원흉쯤으로 무시하며 읽어 왔던 크루셴카에게서 나 역시 알료사처럼 진심이란 것을 발견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둘
“ 이런 우화야, 알료샤, 내가 바로 이 아주 못된 아줌마이기 때문에 달달 외웠지. 라키트한테는 양파를 준 적이 있다고 으스댔지만, 당신한테는 달리 말하겠어. 평생 동안 기껏해야 무슨 양파 한 뿌리를 주었을 뿐이고, 이게 내가 한 착한 일의 전부이다, 하고. 그러니 나를 칭찬하지도 말고, 알료샤, 나를 착한 여자라고 생각하지도 말아 줘.”(155쪽)
내 생각: 크루셴카야말로 지금까지 등장한 인물들 중에 가장 겸손한 사람이었구나!
“ 화 내지마, 이분 때문에 기분이 상했어도 화는 내지 마. 지금 이분의 말 들었지? 인간의 영혼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면 안 되는 법이야, 좀 더 자비로워야 된다고······.” (160쪽)
내 생각: 이 구절을 읽었을 때, 나도 모를 해방감과 신의 충만한 자비를 느끼며 한참을 평화롭게 널부러져 있었다. 아마도 난 늘 사람들의 시선도 모자라서 신의 눈치를 보며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 마땅히 해야 할 의무들로 자신을 속박해 왔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 구절을 읽는 순간 ‘신은 자비로운 존재지. 그래, 한 번도 나에게 무엇을 요구한 적이 없었는데 나는 굳이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을까?’ 하는 회의가 들었다. 신은 이렇게나 자비로운데, 이렇게나. 그냥 존재하면 되는 것을.
셋
“나는 이렇게 무질서한 난장판을 정말 좋아하지 않았어.”
“아니, 그런 걸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나! 농군들을 위해 세 상자나 사다니, 이런 걸 보고 속이 뒤집히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나.”
“그 얘기가 아니야. 드높은 질서를 말하는 걸세. 나의 내부에는 질서가 없어, 드높은 질서가 없단 말이지.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끝났으니까 괴로워할 것도 없지. 늦었다도, 젠장! 내 인생 자체가 무질서한 난장판이었으니, 질서를 부여해야 돼.(263쪽)
내 생각: ‘8편 미챠’를 모두 읽지는 못했지만 읽는 내내 그의 불안에 동화되어 나도 호흡이 불안해졌다. 작가의 심리 묘사가 탁월하다는 것을 다시금 느끼면서, 이런 불안정한 인간 부류에 대한 연민과 거부감이 동시에 느껴졌다. 그것은 미챠가 느끼는 질투와 열등감, 분노와 절망을 내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건 크고 작게나마 경험했기 때문이며, 그 경험이 얼마나 불쾌하고 속수무책인지 알기 때문이다.
나의 지인은 이 부분을 에리히 프롬의 ‘소유적 삶의 방식’과 ‘존재적 삶의 방식’으로 간단히 정리해 주었다. 즉, 미챠가 추구해 온 것은 늘 소유적 삶의 방식이었다. 인간은 어쨌든 ‘너’라는 존재와 끊임없이 연결되려고 한다. 그런데 그 ‘너’가 물질이거나 명예이거나 사람과 같은 것일 때는 표도르나 미챠처럼 끊임없는 갈증을 느끼며 삶을 무질서한 난장판으로 만들고 말 것이다. 하지만 그 ‘너’라는 대상이 ‘존재’ 자체라면, 미챠가 원하는 ‘드높은 질서’라면 우리의 삶은 진정으로 평화로울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첫댓글 (하나)
내가 저열하고 사악했기 때문에 나 자신이 그런 쪽으로 이끌렸던 것이지만, 정작 나는 여기서 진실한 누나를 발견했어----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보물 같은 영혼을···. 이분은 지금 나를 가엾게 여겨주었어. 아그라페나 알렉산드로부나, 나는 지금 당신 얘기를 하는 거야. 당신은 지금 내 영혼을 회복시켜 줬어. (152쪽-153쪽)
(질문)
알료샤는 왜 그루셴카가 자신의 무릎에서 내려와 성호를 긋는 모습을 보고 “당신은 지금 내 영혼을 회복시켜 줬어”라고 말할까요? 그루셴카의 행동에서 그는 무엇을 발견했으며, 그 발견은 자신과 타인을 바라보는 방식을 어떻게 바꾸었을까요?
(둘)
화 내지마, 이분 때문에 기분이 상했어도 화는 내지 마. 지금 이분의 말 들었지? 인간의 영혼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면 안 되는 법이야, 좀 더 자비로워야 된다고······.” (160쪽)
(질문)
그루셴카는 왜 자신을 “착한 여자”라고 생각하지 말아 달라고 할까요?
이 말은 자신의 선함을 부정하는 말일까요,
아니면 작은 선행 하나로 자신 전체가 평가되는 것을 경계하는 말일까요?
이를 알료샤의 “인간의 영혼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면 안 된다”는 말과 연결해 봅시다.
(셋)
“나는 이렇게 무질서한 난장판을 정말 좋아하지 않았어.”
“아니, 그런 걸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나! 농군들을 위해 세 상자나 사다니, 이런 걸 보고 속이 뒤집히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나.”
“그 얘기가 아니야. 드높은 질서를 말하는 걸세. 나의 내부에는 질서가 없어, 드높은 질서가 없단 말이지.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끝났으니까 괴로워할 것도 없지. 늦었다도, 젠장! 내 인생 자체가 무질서한 난장판이었으니, 질서를 부여해야 돼.(263쪽)
(질문)
“나의 내부에는 질서가 없어”라는 말에서 ‘드높은 질서’는 무엇을 뜻할까요?
그는 자신의 삶에서 무엇이 무질서했다고 느끼며, “늦었다”고 말하면서도
왜 다시 “질서를 부여해야 돼”라고 말할까요?
삶에 질서를 부여한다는 것은 욕망을 없애는 일일까요,
서로 충돌하는 욕망에 우선순위를 정하는 일일까요,
아니면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는 일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