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정리:2002.1.6(일)
09:20음정마을주차장-10:00벽소령길-10:50연하천갈림길-11:40벽소령산장-12:40중식-13:00벽소령산장출발-13:40형제봉-14:20삼각봉-14:40벽소령길갈림길-15:25망바위-15:50도솔암-16:30영원사-16:55두트굴-17:20음정마을주차장
며칠 전 처남에게 지리산에 가자고 했더니 매우 반가워한다. 지리산행은 화엄사 노고단 산행 이후 1년 만이다. 이번 산행은 고3 수험 생활을 마치고 서울의 명문 S대 컴퓨터공학과에 합격한 조카 녀석도 함께 참여하기를 원하여 더 의미 있는 산행이 될 것 같다. 어젠 처남과 신년 들어 처음 만나 술잔을 나누었고 산행 준비물을 챙겼다. 조카 녀석은 산행 경력은 없으나, 고2 때까지는 매주 무등산을 오른 경험이 있어 이번 산행에 크게 무리가 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다만 걱정스러운 것은 녀석이 거구에다 발이 커서 맞는 등산화를 구할 수가 없어, 부득이 운동화를 신고 산행을 하게 되었다.
마천면 음정 마을의 지리산 휴양림 갈림길에 커다란 주차장이 있는데 그곳에 주차하고 벽소령 산장을 향한다. 오늘의 오름 코스는 다소 심심하지만 걷기 좋은 벽소령 산판도로를 따르기로 한다. 지리산은 이미 순백의 세계이다. 나무들은 모두 흰 눈을 뒤집어쓴 채 서로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영원사로 가는 포장길을 버리고 휴양림으로 가는 길에 제당 좌측 좁은 길로 들머리로 잡아 산행을 시작한다. 곧 염소목장을 지나 오르다 보면 벽소령 길을 만날 거라 생각했는데 눈길에 찍힌 발자국을 무심히 따라 걷다가 앞을 거세게 막고 있는 잡목 밭을 만나 난감해진다. 하지만 우측에 낯익은 소나무 동산이 있는데 그곳에 벽소령 지름길이 있으니 방향을 잃지 않고 따라붙는다.
다시 잡목과 한바탕 싸움을 치르고 땀깨나 흘리고 오솔길을 찾아 한숨을 돌린 후 벽소령길에 합류를 한다. 이제 이 산판도로를 따라 벽소령 산장까지는 쉬엄쉬엄 올라도 2시간이면 족할 것이다. 그동안 지리산에 반복해서 눈이 내렸고 북쪽 자락인 이곳은 많은 적설을 보인다. 햇볕이 없는 응달은 여지없이 많은 눈이 있으며, 오르내리던 산님들의 발자국이 끊임없이 이어져 있다. 벽소령길에서 연하천으로 직등하는 갈림길에서 휴식을 취한다. 아직 조카 녀석은 그런대로 꾸준하게 잘 따라준다.
문득 옛날 장O봉에서의 군 생활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내가 군 생활을 했던 곳은 강원도 화천의 칠O부대였다. 주O령 넘어 서O골에 중대본부가 있었고, 장O봉에 분대 OP와 대공초소가 있었다. 근무가 없던 낮에는 장O봉에서 마O리 대대본부에 내려가서 매일 부식을 수령하기도 하였다. 왕복 서너 시간이 걸리는 산길이었지만, 산을 좋아하고 걷기를 좋아하는 내게는 즐거운 시간이었다. 사람의 인연이란 알 수 없는 것. 지금 옆에 있던 처남은 그 대대본부에서 군의관으로 근무를 했었다니 이 정말 절묘한 인연이 아니겠는가. 그 시절로 돌아가 군에 대한 추억으로 대화를 나눈다.
이젠 우측의 사면을 두어 바퀴 휘감아 돌면 벽소령 안부가 나타날 것이다. 이곳에는 고도가 높은 만큼 적설량도 더 많았고 내린 눈이 잘 보존되어 스키나 썰매를 타고 하산을 하면 재미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어제 천왕봉 신년 산행은 맵고 차가운 날씨였지만 오늘은 매우 포근하다. 걸을 때마다 뽀드득거리는 소리를 들으니 기분도 좋다. 벽소령 산장으로 오르는 샛길을 만나 구벽소령 길을 버리고 정오가 조금 못되어서 벽소령 산장에 도착했다.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벽소령 산장은 조용하다. 지난 산행 때 만난 김O기님이 벽소령에 혹시 머무를까 생각되어 취사장과 산장 안을 뒤졌으나 없다. 아마도 노고단이나 세석으로 떠났을 것이다.
산장 앞마당에서 퍼질러 쉬다가 따듯한 취사장 안에 들어가 점심준비를 한다. 처남에게 요리를 맡긴다. 언제나 그럴듯한 잡탕 찌게. 그 어떤 산해진미보다 맛난 성찬이다. 해장술로 소주 한 병을 따서 절반씩 나눈다. 처남은 자타가 공인하는 두주불사의 술꾼이지만 특히 지리산에서의 한잔은 더욱 맛날 것이다. 곧 뱃속에서 후끈한 열기가 치밀어 오른다. 겨울 산행에 있어서 소주는 꼭 필요한 존재. 특히 지치고 체온이 떨어졌을 때 한두 잔은 추위를 이기게 해주니 비상약으로 준비해도 좋다. 식사를 마치니 종주 산행을 하는 노년의 남녀 산님들이 취사장 안으로 들이닥쳐 자리를 내주고 밖으로 물러 나온다. 겨울답지 않은 포근하고 따사로운 햇살에 몸을 맡긴 채 조망을 취하며 휴식을 취한다. 하늘은 파랗고 바람 한 점 없다. 어제 가혹하게 추웠던 천왕봉 날씨와 오늘은 이렇게 다르니 신기하지 않은가. 처남은 오랜만의 산행에 피곤한지 잠시 졸며 단잠에 빠진다.
오후 1시가 넘어서 벽소령 산장을 떠나 우리의 하행 기점인 삼각고지로 떠난다. 주능길은 이미 잘 나 있다. 벽소령 산장을 떠난 지 40분 만에 형제봉에 올랐다. 형제봉은 지리산 주능의 중간 지점으로 지리산을 두루 조망하기에 가장 좋은 위치이다. 바로 아래는 험준한 빗점골이 있고, 저 멀리 당재를 넘어 왕시루봉과 느진목재, 문바우등으로 이어진 돼지령과 노고단이 보이고. 반야봉, 토끼봉, 명선봉으로 이어지는 주능과 연하천 산장의 모습도 가물가물 보인다. 오던 길을 뒤돌아 바라보니 남부 능선과 삼신봉 그리고 촛대봉 너머로 이어지는 천왕봉과 중봉과 하봉이 돋보인다. 단연 주능에서 조망은 형제봉이 최고다. 우리가 하산할 삼각봉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주능 길은 따사로운 햇살에 눈이 녹아 질퍽거린다. 조카는 형제봉을 넘는 동안 체력을 다했는지 힘들어하는 표정이다. 자꾸만 뒤처지는 행보에 마음이 쓰인다. 하지만 삼각봉부터는 계속되는 내리막길이 이어지니 괜찮을 테지.
연하천 길을 버리고 우측의 갈림길로 들어서자 곧 응달로 바뀐다. 이 길을 이용한 산님이 있었던지 산죽밭 사이로 길은 잘 나 있다. 이 중북부 능선을 따라 계속 가면 삼정산. 우리는 영원령을 거쳐 영원사로 빠져 음정 마을로 내려선다. 좌측에는 와운골이 보였으며 명선봉 너머로 반야봉과 심마니 능선 그리고 만복대의 서북 능선이 성삼재를 향하여 북쪽으로 길게 이어진다. 선두에서 계속 길을 찾으며 하산을 한다. 곧 갈림길을 만난다. 우측의 소로는 오전에 올랐던 벽소령길로 직접 빠지는 길이다. 출입통제 안내판을 넘어 직진 길을 택한다. 이곳부터는 무릎까지 눈에 빠져 러셀을 해나간다. 중북부 능선의 산죽도 쉽지 않은데 그동안 많은 적설에 키를 숙이고 있다. 3시 30분 영원령 직전 망바위에 올랐다. 동편 우측으로는 천왕봉과 중봉이 형제처럼 다정스레 모습을 드러냈으며, 북쪽으로는 삼정산이 가깝고, 그 아래 상무주암의 모습도 선명하다.
영원령 가는 길을 눈 덮여 찾지 못하고, 발자국이 뚜렷한 도솔암 쪽으로 하산을 한다. 도솔암까지는 아기자기한 눈 덮인 산죽 길이 이어지는데 도솔암 요사채의 파릇한 지붕이 보여 선행 산님의 발자국을 따라 내려선다. 지리산의 북쪽 자락인 이곳은 눈이 전혀 녹지 않아 한겨울의 심설 산행이다. 도솔암에 들렀으나 스님의 기척이 없어 혹시 수행에 방해가 되지 않을까 하여 쉼 없이 바로 길을 떠난다. 도솔암에서 영원사로 가는 길은 아기자기하고 아름답다. 영원사에 들른다. 명당의 영원사 넓직한 마당에서 바라본 천왕봉이 근사하다. 영원사에서 두트굴로 하산을 한다.
샛길에 접어들자 산죽 비트에서 파르티잔 인형 2개가 총구와 수류탄으로 위협한다. 함양군의 빨치산 전시 정책에 따라 새로 만들어진 관광 상품이다. 파르티잔의 무장투쟁과 혁명정신은 반세기가 지난 요즘 관광자원이 되었다. 곧 두트 굴을 만난다. 두트 굴 안에도 또 다른 파르티잔 인형 2개가 경계하며 총을 겨누며 노려보고 있다. 혹시 야간 산행 때 만난다면 놀랄 수도 있겠다. 누구의 발상으로 이런 사업이 추진되었는지 조금은 답답하다. 음정 마을에 내려설수록 천왕봉도 차츰 낮아지며 모습을 감춘다. 비탈면 너덜을 지나자 음정 마을이 보이고 영원사와 광대골 휴양림이 갈리는 주차장에 다시 왔다. 음정마을은 한국전쟁때 빨치산의 해방구였다. 주차장 자리가 인민재판 장소였다고 전한다. 이미 땅거미가 내린다. 긴장이 풀리면서 갑자기 허기를 느낀다. 마천면에 나가 맛난 저녁을 먹고 광주로 향한다.
지리산에 다녀온 후 2주가 지났습니다. 게으름에 산행기를 쓰지 못하고 있다가 어젯밤 꿈결에서 그리운 사람을 지리산에서 만났습니다. 반야봉도 어렴풋이 보였거든요. 꿈에서 깨어난 나는 기억을 더듬어가며 산행기를 얼른 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2002.1.19
첫댓글 벌써 두 해 전부터 짓기 시작한 변소령대피소는 지금쯤 말끔한 새로운 집 일겁니다.
아~
그리운님 뵙고 싶고 걷고싶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