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과 고뇌 3
5. 예방적 고통(Preventative suffering)
하나님은 사람으로 하여금 보다 진지한 영적 문제에서 그를 지켜 주시기 위해 육체적 고통을 허락하실지도 모른다. 바울은 그렇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自高)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의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하려 하심이니라”(고후12:7)라고 말했다. 이 연약성 때문에 바울은 더욱 더 완전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해야 했다. 가장 어려운 조건하에서 활동적인 봉사를 하는 중 그러한 은혜가 넘침을 그는 발견했다. 그는 자신이 약할 때 주 안에서 강했다(고후12:8-10). 고통은 또한 육체적인 위험을 경고하는 신호일 수도 있다. 만약 고통이 없다면 사람들은 많은 재앙들에 굴복했을 것이다.
런던에서 어떠한 고통도 결코 느껴보지 못한 14세의 한 소녀는 베인 흔적, 데인 흔적, 그리고 찰과상들로 덮인 상처 투성이의 소녀였다. 영국의 의료연구 위원회에 의하면 그녀는 다른 여러점에서는 정상이었다. 그녀는 자기의 혀 끝을 물어 뜯었으며 손가락을 깨물어뜨리고 넓적다리를 부러뜨렸지만 이 모든 것을 고통없이 치루었다. 어렸을 때 어떤 동무가 그녀의 머리 한 웅큼을 잡아 뽑았다. 너무 늦어 맹장염을 수술할 수 없을 때가 된것도 모르고 넘어가곤 했다.
타락한 세상에서 어떤 고통은 보다 위험한 비극적 위험의 가능성에 대한 유익한 경고이기도 하다. 정신의학적 질병에 대한 한 의사의 글은 “고통이란 당연히 일어날 행동의 정표이다. 만약 행동이 일어나지 않으면 유기체의 살아 남을 가능성은 점점 감소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고 했다. 이러한 징후들에 대하여 우리는 정말 감사해야 한다. 때때로 육체적 고통은 영적 요구의 신호가 된다. 만일 몸져 누운 어떤 사람이 구주를 우러러 보기 시작한다면 여기 또한 감사할 이유가 있는 것이다.
6. 교육적 고통(Educational suffering)
그리스도인의 생활 중 최대의 선은 고통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닮는 그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그의 아들의 형상을 본 받게 하기 위하여 우리 주위의 모든 상황을 가지고 합력하여 모든 일에 선을 이루게 하신다(롬8:28,29). 그리스도의 생활은 악과 싸우시는 전적 환난의 생활이었다. 그 때 그를 따르는 자로서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내려 함이라”(고후4:8-10)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위안보다 자기 백성의 성품에 훨씬 더 큰 관심을 가지신다. 무엇이 그 성품을 낳게 하는가?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성품을 낳는다(롬5:3,4).
KJV Romans 5:3 And not only so, but we glory in tribulations also: knowing that tribulation worketh patience;
NAS Romans 5:3 And not only this, but we also exult in our tribulations, knowing that tribulation brings about perseverance;
[롬5: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롬5: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KJV Romans 5:4 And patience, experience; and experience, hope:
NAS Romans 5:4 and perseverance, proven character; and proven character, hope;
우리가 참지를 못할 때 어린아이들에게 하는 것처럼 징계가 필요하다.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징계를 하시는데 이리하여 우리는 그분의 거룩함에 참여케 된다.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의 열매를 맺는다(히12:10,11).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징계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누구나 “사생아”다.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을 하심이니라”(히12:5,6). 주를 따르는 자는 수동적으로 징계를 받을 뿐 아니라 능동적으로 자신을 징계해야 한다. 훈련 받는 운동선수처럼 바울은 절제를 연습했다. 남에게 전파한 후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바 그는 그의 몸을 쳐 복종시켰다(고전9:25-27).
성경은 극도의 고행주의와 자기 학대를 미덕으로 지지하지 않으며 자기 방종을 그리스도인의 자유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그리스도와 같은 성품(인격)을 개발하기 위해 죄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자유가 있다. 그 자유를 고대하면서 많은 사랍들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을 알고 그의 고난에 참예하며 그의 죽음 가운데서 그와 같이 되기”(빌3:10) 위하여 그 밖의 것들을 거절하는 것이다. 루이스 바우어(Louis Bouyer)가 설명한 기독교는 어떤 비건전한 고통음락증(苦痛淫樂症: Algolagnia)을 권하는 것이 아니고 반대로 기독교는 우리에게 죽음 그 자체처럼 고난으로 하여금 열매 맺게하는 가능성을 제공해 준다. 루이스(C.S. Lewis)는 보통정화(purification)는 고난을 내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자기 생애를 돌아다 보면서 그는 대부분의 참된 유익은 고난을 내포해왔다라고 깊이 묵상했다. 타락한 세상에서 더 높은 가치를 성취하려는 것은 징계적인 고통을 필요로 한다. 성숙치 못한 사람은 불평하고 울부짖는다. 그러나 성숙한 사람은 그 사실을 받아들이며 은혜에 의해서 스스로를 징계할 것이다. 요약하면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고통의 경험이 심판적인 것인지 감정이입(感情移入)적인 것인지 대속적인 것인지 판단할 하나님의 지혜가 필요하다.
저주와 끊임없는 교만, 불신, 불순종 때문에 오는 영원한 고뇌와 저주가 있을 가능성은 회개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인 것이다. 심판이 떨어지기 시작할 때까지 기다린다는 것은 순전히 어리석은 것이다. 지금 바로 오늘이 구원의 날이다. 죄의 유죄판결을 괴로와하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연민(empathy)을 고려하게 된다. 하나님은 경건치 않은 자를 심판할 필요성을 기뻐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들이 구원받기를 그토록 심히 원하셨기 때문에 갈보리에서 저들대신 형벌을 받도록 하기 위해 자기의 아들을 주셨다. 그러한 대속적 고난으로 인하여 모든 믿는 사람들은 그분에게 찬양을 돌린다. 더 나아가서 그들은 불의에 대항하는 전투에 주님과 함께 고난받을 자격을 얻게 된 것을 감사하고 있다. 기쁨을 갖고 우리는 고난의 한 가운데서 우리의 결단의 신실성을 증거하자. 우리는 신체적 고통의 경고를 받아들이고 예상되는 위험을 피하도록 한다. 우리는 스스로 징계하고 그리고 우리 하늘의 아버지의 징계를 받아들인다. 어떤 경험은 이러한 범주에 맞지 않을지 모른다. 현재의 제한된 전망에서 그 누구도 모든 답을 얻을 수는 없다. 그러나 알려지지 않은 것은 우리가 이미 아는 것들이 무의미하다고 하지는 않는다. 알버투스 피에터스(Albertus Pieters)가 논한대로 “우리가 아는 것은 거의 없다. 그 적은 것은 우리가 모르고 있는 많은 것보다 세계를 해석하는데 더욱 유효하다.”
[출처= 「성서대백과사전」 제1권 pp.350~355 기독지혜사 1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