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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임마누엘은 예수님의 탄생 때 그분의 이름을 짓는 기사로 등장하여, 성탄절에 주로 많이 인용되고 설교되는 본문입니다. “임마누엘”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려고 동정녀에게 잉태되어 장차 태어날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아이가 구원자로서 무슨 일을 할 것인지를 보충설명하려고 붙여진 이름입니다. 성탄절이 지나면 마태복음 1:18-23은 많은 신자들에게 잊혀지고, 교회도 이 본문을 설교하지 않지만, “임마누엘”은 마태복음에서 매우 중요한 주제이며, 예수님이 그의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구세주로서 그분이 어떤 방식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며, 어떻게 구원을 베푸시는지 알려줍니다. 마태가 그의 복음서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으로 시작하고(마 1:23), 복음서의 맨 마지막을 예수님이 그의 제자들과 “항상 함께 하리라”로 마친 것(28:20)은 우연이 아닙니다. 이것을 문학적으로 수미상관이라고 부르는 이 기법을 통해 마태는 그의 복음서의 주제가 “하나님이 함께 하심,” 즉 “임마누엘”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성경에서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어느 사람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약속하는 기사에 자주 등장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교제와 평화와 생명이 있고,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면 공허함과 저주와 사망이 있게 됩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 함께 에덴동산에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과 생명의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하지만 동산에서 쫓겨나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에서 단절된 순간부터 수고와 고통의 삶을 살고 반드시 죽게 되었습니다. 성경의 대체적인 내용은 인간 타락 이후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과 함께 하심으로 구원을 베푸시는 이야기입니다. 그 구체적인 예를 생각해보겠습니다.
야곱에게 약속된 임마누엘
첫 번째 예로 야곱에게 약속된 임마누엘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창 28:15). 이것은 야곱이 그의 아버지 집을 떠나 밧단아람으로 도망하던 중에 벧엘에서 노숙하고 있을 때 하나님이 약속하신 말씀입니다.
야곱이 아버지 집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은 형을 두 번이나 속이고 장자의 권리를 쟁취하고 그의 아버지에게서 축복을 가로챘기 때문입니다. 형 에서는 야곱을 죽이려고 벼르고 있습니다. 다급한 상황에서 형 몰래 밧단아람으로 도망을 치려는 순간에 이삭은 야곱에게 이런 내용으로 축복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시어 네가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가 여러 족속을 이루게 하시고,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복을 네게 주시되 너와, 너와 함께 네 자손에게도 주사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 곧 네가 거류하는 땅을 네가 차지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창 28:3-4). 민족 번성과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차지할 것이라는 아브라함의 약속을 야곱이 이어 발을 것이라는 복된 내용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아버지 이삭에게서 축복의 말을 들었지만, 살해 의욕이 가득한 형의 눈에 띄지 않도록 생면부지의 땅으로 목숨을 피해 도망가고 있는 중입니다. 이 약속에 언급된 가나안 땅에 있지 못하고 그곳과 거리가 먼 정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밧단아람이라는 곳에서 어떻게 지내야 하며, 아버지의 축복이 과연 이루어질지 모르는 두려움과 불안함에 휩싸인 채 아버지 집에서 제법 멀리 벗어났습니다. 야곱은 고향인 브엘세바를 떠나 하란으로 가는 중에 낯선 한 장소(나중에 “벧엘”이라고 명명된 곳)에서 노숙하고 있습니다. 땅을 요 삼고 하늘을 이불 삼고, 주변의 돌을 베개 삼아 잠을 자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이삭이 그에게 축복한 내용을 다시 말씀해주시는 것입니다.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 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창 28:13-14). 이 약속이 이루어져야 아브라함 언약이 성취되고,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습니다.
야곱의 현재의 모습만을 본다면, 이 엄청난 약속은 실현될 가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 약속은 어떻게 이루어질까요? 이 상황에서 야곱에게 확신을 주기 위한 임마누엘 약속이 창 28:15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이 그에게 이어지고 이루어질 것입니다. 야곱이 그러한 약속을 이루려고 돌아올 때까지 하나님은 그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에게 임마누엘은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이 성취되지 못하는 듯이 보이는 때에, 하나님이 그 약속을 반드시 이루신다는 확신입니다.
여호수아에게 약속된 임마누엘
두 번째는 여호수아에게 임마누엘의 의미입니다. 여호수아는 모세가 죽은 후 남자만 60만 명 이상 되는 이스라엘 백성을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출애굽을 마무리하며, 땅을 기업으로 얻으리라는 약속 성취를 눈앞에 두었지만, 여호수아는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아낙 자손과 같은 거인들이 사는 가나안 땅을 과연 차지할 수 있을 것인가? 목이 곧고 마음이 완악한 이스라엘 백성을 잘 인도할 수 있을까? 모세를 옆에서 지켜보았던 여호수아로서는 자신은 모세와 같은 인물은 되지 못하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았습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와 함께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니라(임마누엘).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라(수 1:5). 똑같은 내용이 반복되었습니다. 함께 하겠다, 떠나지 않겠다 버리지 않겠다. 그렇지만 여호수아에게 두려움은 쉽게 가시지 않았습니다. 두려워하는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은 “두려워 말라. 강하고 담대하라.”는 말씀을 연거푸 세 번 말씀하심으로 그에게 용기와 확신을 주셨습니다(6, 7, 9절).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사람들이 보기에 아무리 불가능해보이고 실천하기에 두려움으로 휩싸이는 것이라도 담대할 수 있었던 것은 여호수아가 어디로 가든지 그의 하나님 여호와가 그와 “함께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주겠다고 약속하신 땅이니, 여호수아가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루실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그 땅을 하나님 자신의 백성에게 줄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반드시 그 일을 이룰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와 함께 하심으로 가능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수아에게 임마누엘은 하나님에게서 받은 약속 성취를 이루려는 사명을 받았지만 스스로의 힘으로 그것을 이루기 어렵다고 생각하여 걱정과 두려움에 사로잡혔을 때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그 일을 이룰 것이라는 사명 성취의 보증입니다.
아하스에게 약속된 임마누엘
세 번째 예는 마태복음에 인용된 이사야 7:14에 나타난 “임마누엘”입니다. 이 말씀은 웃시아의 아들 아하스에게 주신 약속입니다. 아하스는 주전 735년에서 주전716년까지 20년 간 남 유다를 다스렸던 왕입니다. 이 기간에 북 이스라엘은 아시리아에 멸망당했습니다(주전 722년). 바로 그 즈음에 시리아의 왕 르신과 북이스라엘의 왕 베가가 합세해서 예루살렘을 공격해왔습니다. 이로 인해 남 유다는 위기에 휩싸였습니다. 풍전등화(風前燈火)라는 말이 이에 적합한 말입니다. 아하스 왕과 백성은 두려움에 떨었습니다(사 7:1-2)
이런 상황에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보내어 아하스에게 구원을 약속하셨습니다. 아람(시리아)왕과 북이스라엘의 왕은 모두 불탄 두 부지깽이에 불과하니, 두 나라가 아무리 힘을 합쳐 공격해도 하나님의 백성을 절대 멸하지 못할 것이라고, 그러니 왕은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아하스가 보기에 이것은 믿기지 않은 약속입니다.
의심하는 아하스 왕에게 이사야 선지자는 징조를 구하라고 말합니다. 아하스는 하나님께 감히 징조를 구할 수 없다고 짐짓 겸손한 척 말하지만, 사실 아하스는 불신앙에 빠져있었고 하나님의 약속도 미덥지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거대한 제국의 공격을 피할 수 있단 말인가.’ 이사야는 아하스 왕에게 하나님이 징조를 주실 것이니,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수 있다는 보증으로 어떤 징조든지 구하라고 한 번 더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자기 백성을 총체적 난국과 위기와 불안과 전쟁의 공포에서 구원하실 분은 이스라엘의 하나님뿐이십니다. 이스라엘은 아하스의 백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하스에게 이 약속이 사실이며 확실하다는 것을 보증할 징조를 친히 주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 내용이 바로 마태가 인용한 이사야 7:14입니다. “한 젊은 여자가 아들을 낳을 것인데 그 아이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지어라. 그러면 그 아이가 옳고 그름을 알게 되기 전에 유다를 공격해왔던 두 나라를 황폐하게 함으로써 유다를 보호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7:15-16). 하나님의 백성을 멸하러 왔던 두 나라가 오히려 멸망하게 되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 시대에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을 가진 아이가 실제로 태어났습니다. 그 아이는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무기의 강함과 군인의 많음이 하나님의 백성을 공격하는 데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라는 증표였습니다. 막강한 군대의 위협 속에서 하나님이 친히 자기 백성을 보호하고 구원하실 것입니다. 그 당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증거는 실존하는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을 가진 아이였습니다.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을 가진 아이가 백성 중에 실제로 존재한 것은 하나님의 구원이 어떠한지 보여주고 하나님의 구원약속의 참됨에 대한 증거였습니다.
그러므로 아하스 왕에게 임마누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원수에 의해 멸망 받을 위험에 처했다고 생각하여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을 때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다는 확실한 증거였습니다.
임마누엘로 오신 예수님
요셉과 마리아에게 태어난 아이의 이름을 “예수,” 즉 구원자라고 지은 것은 그분이 구약시대에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모든 위협과 어려움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의 구원을 생생하게 보여주려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이라고 부르는 그분은 하나님이 실제로 인간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신 “임마누엘”의 화신이십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이보다 더 실제적으로 생생하게 보여주는 증표가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걸어 다니는 임마누엘이시며, 하나님이 실제로 그의 백성과 함께 계심을 눈으로 보여주는 실제 모습이셨습니다.
예수님이 사람과 함께 사시고 그들 중에서 활동하시는 동안, 하나님이 구약시대에 오랫동안 그의 백성 개인이나 공동체 전체와 함께 하심으로써 그분의 구속의 약속을 이루시고 완성하시고, 그러는 과정에서 그의 백성을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셨던 것처럼, 똑같은 구원이 다시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사람으로 태어나 이 땅에 계시는 동안 과거에 하나님이 하셨던 그 구원의 일을 하실 것이며, 그보다 더 큰 구원을 이루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분은 인류의 근본적인 문제인 죄에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구원자”이십니다. 그래서 그분의 이름이 “예수”인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이라고 그분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우는 그분을 그의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는 유일한 “구원자”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우리와 몸으로, 인격으로 함께하는 “임마누엘”이시기 때문입니다.
마태는 예수님이 임마누엘로서 구원하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그의 복음서 전체를 통해서 보여주고 싶어 합니다. 그러므로 “임마누엘”은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생애 전체에서 보여줍니다. 복음서의 전체 이야기는 예수님이 하나님으로서 그의 백성과 함께 하시며 행하신 구원 이야기입니다.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하신 예수님
첫째로, 예수님은 당시 종교인들의 표준에 비난을 받으시는 것도 개의치 않으시고 구원할 대상과 함께 하셨습니다. 세리와 죄인들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마 9:10). 우리가 이 장면을 보고 자연스럽다고 느끼거나 예수님이 당연한 행동을 하고 계시다고 생각한다면, 당대의 정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그 기준으로 거룩함과 정결함 그리고 경건을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종교인들은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득달 같이 달려들어 예수님의 행동 두고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마 9:11). 그들 생각에 죄인과 세리는 구원에서 멀리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의인과 죄인은 어울릴 수 없다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당당하셨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구원하려면 그들과 함께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낮추고, 사람들에게 비방을 받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백성을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구원하러 왔노라”(마 9:13). 예수님은 죄인들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9:2). 예수님은 구원이 필요한 그분의 백성과 함께 하셨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세리와 죄인은 바로 우리들입니다.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하나님은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나타내셨느니라(롬 5:8). 임마누엘은 죄인들과 함께 하신 예수님으로 구원하고 화해하는 행위였습니다.
풍랑 속의 제자들과 함께 하신 예수님
둘째로, 예수님은 강한 바람과 높은 파도에 막혀 스스로의 힘으로는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여 그들의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하는 제자들을 구원하려고 함께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헤어지고 그들끼리 밤새 갈릴리 호수를 가로질러 건너편으로 건너가려고 애를 썼습니다. 하지만 맞바람을 만나 헛수고 하며 고생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제자들을 위로하고, 그들의 목적지로 인도하기 위해 그들에게 오셔서 풍랑에 요동하는 배에 오르셨습니다. 마태복음 14:32은 이 상황을 이렇게 핵심적으로 언급합니다. 예수께서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하시니 바람도 풍랑도 그쳤고, 제자들은 안전한 항구로 무사히 갈 수 있었습니다. 임마누엘은 우리의 외적인 어려움으로부터 그의 백성을 구원하고, 그들을 위협하는 요인들을 중단시키며, 제자들을 목적지까지 인도하셨습니다.
삶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예수님
셋째로, 임마누엘이신 예수님은 백성들과 함께 하여 그들을 보호하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삶의 필요를 채워주기도 하셨습니다. 오병이어 기적보다 더 여실하게 이 사실을 보여주는 예는 없을 것입니다. 사흘간 먹을 것을 얻지 못해 굶고 있는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신 우리 주님은 인간의 한계가 절정에 도달했을 때, 그분의 위대한 능력을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은 한 사람의 한 끼 식사밖에는 되지 않는 빵 다섯 개와 작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만 무려 5천 명을 먹이셨습니다(마 15:32). 누구라도 이것을 기적이라고 느낄 만한 주님의 능력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먹고 사는 문제, 경제적 어려움에 얼마든지 도움을 주실 수 있는 구원자 임마누엘이십니다. 복음서에서 이런 예를 들자면 이루 말할 수 없는 많은 예가 있습니다. 임마누엘이 구원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기에는 세 개의 예만으로도 충분할 것입니다.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시는 예수님
마태는 복음서 곳곳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다양한 상황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하심으로써, 여러 측면에서 구원하신 구체적인 예들을 제시합니다. 이 예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백성을 모든 상황에서 구원하실 유일한 구주이시라는 것을 믿고 확신을 가지기에 충분합니다. 그 절정은 그가 죄인들과 같이 되셔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구세주께서 죄인과 함께 하셔서 구원하신 임마누엘의 절정의 표현입니다. 과거 구약 시대에 함께 하시면서 용기를 주시고 사람들에게서 두려움을 쫓아내어 그분의 약속을 이루신 하나님이 함께 하신 것을 예수님이 이루셨습니다.
마태가 전하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의 절정은 마태복음 28:20b에 나타난 주님의 약속입니다. 예수님은 구원 사역을 다 이루시고 제자들에게 중요한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9-20a). 이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을 요즘 시대 사람들은 잘 압니다. 전도가 막히고 세상은 교회를 미워하는 시대에 예수님이 가르친 것을 그들에게 어떻게 다시 가르쳐 지키게 할 수 있겠습니까. 교회의 중차대한 사명이라고 부르는 이 말씀은 제자들도 우리도 지키기 힘든 말씀입니다. 요즘 세상에서는 실천하려고 했다가도 좌절을 겪기 일쑤입니다.
이러할 때 주님이 주신 약속이 임마누엘 약속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20b). 예수님은 실제로 그의 영이신 성령님을 보내셔서 그를 믿는 사람들과 늘 함께 하셨습니다(요 14:16). 모든 날, 모든 시간, 모든 순간에 예수님이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그 어렵다고 느껴지는 복음전도의 사명을 교회는 성취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임마누엘로서 교회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은 박해가 심한 로마 시대에 복음을 땅 끝까지 전했습니다. 예수님의 이 약속 이후 2천 년이 지난 지금, 우리에게까지 복음이 전파되어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로 믿은 것을 보면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는 예수님의 약속이 성취되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언제나 한결 같으신 우리 주님은 과거에 그랬듯이 앞으로도 임마누엘로서 교회가 이 일을 이루게 하려고 교회와 늘 함께 하실 것입니다. 신자들 개인과 교회 전체에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교회는 담대함을 가질 수 있습니다. 야곱에게 하나님의 구원 약속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약속하시고 그 약속을 이루셨듯이, 여호수아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고 그 땅을 정복하게 하셨듯이, 또 강한 나라의 공격에서 미천한 유다를 구원하셨듯이, 우리 주님 예수님은 자기를 믿는 신약의 교회를 보호하고 구원하실 것입니다. 구원자 예수님은 죄에서 구원하시고, 코로나19와 같은 전염병의 공포에서 구원하실 것이며, 심지어 경제적인 어려움에 불안해하거나 두려워하는 그의 백성을 삶의 어려움에서 지키시고 구원하실 것입니다. 교회가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일 등 교회의 사명을 감당하는 중에 늘 함께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임마누엘 하신 것처럼, “강하고 담대하라.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늘 함께 하시겠다는 우리 주님의 약속의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