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로등
이시영
밤늦은 시간 누가 홀로 공원을 가로지른다
어렵게 한 세계를 놓고 떠나는 자의 그림자가
뒤에서 한없이 자유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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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운(古寺韻)
이시영
산사는 졸고
노승은 방문을 활짝 열어둔 채
먼 토굴에 면벽하러 가고 없고
새까마니 그을은 툇마루에서 막 바랑을 풀던 객승 하나
낯선 인기척에 놀라 사방을 두리번거리다
쏘내기 소리로 딱! 이마를 치며 다가서는 커다란 앞산 그리메를 본다
잠시후 소나무 버텅 사이를 더텨 내려가는 곰의 발바닥 같은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노스님, 이놈 또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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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이시영
돌아가시기 전 어머니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내게 말했다
바다 건너 서양나라에 가 부잣집 딸로 다시 태어나고 싶다고
그래서 공부 많이 한 학생이 되고 싶다고
칠년이 지나도 그 말이 가슴에 걸려 넘어가지 않는다
어머니는 30년대 이 땅의 가난한 방직여공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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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에게
이시영
어느 날 내게 바람 불어와
잎새들이 끄떡끄떡 하는구나
내가 네 발 밑에 오줌을 누고 돌아설 때
수많은 정다운 얼굴로 알은체를 하는구나
그러나 오늘은 돌아서자
수많은 오늘 같은 내일의 날이 지난 뒤
내가 불현듯 참다운 네가 되어 돌아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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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우주
이시영
우주란 원래
소리가 없을 때
우주이다
누가 자신을 퍼가는지도 모르게
色도 미동도 없을 때
오늘밤
지상에는 한 귀뚜리가
더듬이를 제 숨결에 착 붙인 채
마지막 몸부림으로 울고
그러나
가을이 이내 가고
겨울이 깊어가도
우주는 푸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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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패배
이시영
어제 낮의 나의 패배,
어쩌면 오래 전부터 예정되어 있던 그것을
이제는 아무 두려움 없이 솔직히 인정하자
뉘우침 속에서 이렇게 밤의 고독과 함께 마주하고 있는 것이
오랜만의 나의 참모습 아니냐
그래, 나는 패배했다
그리고 이것은 건너뛸 수 없는 사실이다
밤이여, 커다란 밤이여
네가 나를 밟고서 가라
어둠은 나의 오랜 친구였다
그 속의 쓰라린 빛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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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언제
이시영
시인이란, 그가 진정한 시인이라면
우주의 사업에 동참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내가 언제 나의 입김으로
더운 꽃 한 송이 피워낸 적 있는가
내가 언제 나의 눈물로
이슬 한 방울 지상에 내린 적 있는가
내가 언제 나의 손길로
曠原을 거쳐서 내게 달려온 고독한 바람의 잔등을
잠재운 적 있는가 쓰다듬은 적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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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룩
이시영
몰래몰래 누룩이 익었다
숨죽인 싸릿골을
너 짊어진 애비의 지게는 뜨고
사무친 피고름을 고이 안에 숨키는 사람들
삽질을 멈추고
심지 박힌 팔뚝끼리 껴안았다
누가 노예의 딸을 버리기 시작했는가
우두를 맞고
무섭게 무섭게 식민지가 앓는다
죽어서 네가 마마를 벗어나도
용서할 수 없는 나라
돌에 눌린 관이 들리고
능욕당한 네 다리가 삼베를 씹는다
아직 한줌의 흙은 흐느끼지 않는가
애비 가슴의 퍼어런 문신에서
쇠꼬챙이가 뽑힌다
탱자울타리에 묻은 용솟은
징마저 사른 왜놈의 부지깽이가
콸콸콸 가슴에서 석유를 쏟고
애비가 꺼꾸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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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
이시영
헛간에 좀 늦게 들어온 호박이 쭈뻣거리다가 얼굴에
곧 환한 미소를 띄며 서로에게 등을 기대고 앉아 긴 얘기를 시작합니다
싹이 트던 봄날부터 무서리 내린 지난가을까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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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의 힘
이시영
밤새 내리던 비 그친 뒤
아침 땅이 내뿜는 저 하늘의 신성한 기운
그 땅에 엎드려 경배한 뒤
인간의 굵은 팔을 뻗어 심호흡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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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 산
이시영
돌산
꽃 하나 피지 않고
새 한 마리 날아와 울지 않고
세월의 검은 이끼들만이 붉게 탄 바위 너설을 안고
대낮 고요 속에 엎드린 산
돌산
내 마음의 유년 등성이에
단 한 번 솟구쳤다 아프게 가라앉은 산
지금은 없는 산
오늘은 젊은 탁발승 하나가
불꽃같은 마음으로 그것에 올라
돌산 내 마음 깊이 가득 환한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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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게
이시영
신록이여,
죽은 마음에 움트는 강철의 새 잎이여
나는 이제 어떤 이별도 껴안을 수 있다
저렇게 많은 사랑들이, 저렇게 많은 아픔들이
자기와의 투쟁을 통과하여 이제 막 연록 햇빛 속으로 걸어나온 사람들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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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슴 고타관씨
이시영
그는 왼손이었어 숫돌에 갈아
왼손으로 말하고 마늘내 나는
들판을 벗고 머슴들을 불러
미농지 위에 오른손을 잘랐어 갈대밭에서
돌아온 그의 낫은 일어서는
불꽃을 소리지르는 호박을 자르고
볏가리에 숨은 주인의 고요한 귀를 베었어
배추 같은 귀들이
소금 가마니를 뚫고 비쳤어
기름 새는 발동기가 끌려가고
정미소 창고에선 소문에 내리찍히는 송아지 뒷다리
몰래몰래 사발 같은 눈들이 열린 대밭에서
캐어낸 무릎
죽순들이 돋아 있었어 허옇게
뒤집힌 눈들이 뛰는 방죽 너머로
대창 높이 물에 빠진 여자 머리를 찔러
돌아오는 그
우렁눈에서 벌이 날고
밤이면 나팔보다 더 커진 귀로
청대 같은 바람을 쏟았어
석유빛 아침놀이 내리자 말뚝박힌 주인집 채마밭에
마을 사람들을 모아 느그들 !
하고 식식거리며 쳐든 왼손은
쇠시랑이었어 어느 쪽이여 ? 손을
들어 보랑깨로 얼른얼른 !
대가리없는 무우처럼 섬뜩섬뜩 손들을 뽑아들자
질그릇 푸른 이를 깨어 그가 웃었어
하하하하하
갑자기 그는 왼손을 거두고
지게와 젊은 아내를 끌고 뒷산 쪽으로 내달았어
산맥을 껴안고 헬리콥터가 떠오르고
송진을 뚫고나온 개들이 기슭을 짖었어
화염이 멎고 마을 사람들이 뒤쫓아 갔을 때
진달래 깎아지른 낭떠러지 끝에
쇠시랑손을 붙든 채 그의 아내가 기어오르고 있었어
벼랑 위에는 아내도 버린 채 지게만 동여메고
그가 불붙은 한쪽 다리로 달리는 것이 보였어
아직도 복사빛 환한 아내는
그의 녹슨 왼손과 함께 장터마을에 사는데
그의 한쪽 다리를 사로잡은
그때 그 순사를 따라 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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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에 관하여
이시영
산기슭 양지녘에 무덤 한 쌍이 새롭다
그러나 저 곳은 아직 네가 갈 곳 아니다
쉼없이 자기 길을 걸어온 사람만이
세월이 그에게 부과해준 온갖 책무를
올곧고 성실히 수행한 사람만이
다가가 잠시 쉴 수 있는 곳
그리고 역사 속에 다시 태어나는 곳
아무나 그곳에 가려고 하지 마라
먼저 너의 길을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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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결 앞에서
이시영
울지 마라
오늘은 오늘의 물결 다가와 출렁인다
갈매기떼 사납게 난다
그리고 지금 지상의 한 곳에선
누군가의 발짝 소리 급하게 울린다
울지마라
내일은 내일의 물결 더 거셀 것이다
갈매기떼 더욱 미칠 것이다
그리고 끓어 넘치면서
세계는 조금씩 새로워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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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루나무
이시영
간밤 눈보라에 시달렸을 미루나무에
오늘은 새로운 까치네 동무들이 가득 찾아와
그 작은 발바닥으로 뱃바닥을 누르고 귓볼을 간지럽히는 바람에
온몸에 웃음을 참지 못한 나무는
새빨갛게 타오르는 서녘 하늘을 향해 껑충한 키를 구부린 채
간들간들 간들간들 웃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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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인(美人)
이시영
너는 화사한 영혼,
어느 날 내게 앉았다가 날아간
내 자리에는 무게가 없다
너는 고뇌하지 않는 가벼운 정신
네 입술엔 꿀만 묻어 있을 뿐 피가 없었다
너만의 향기를 갖는 너의 숨결이 없었다
잠자리 날개 같은 투명한 옷자락을 끌고
너의 나라로 가라
가서 벼랑 아래로 추락하라
피를 흘렸을 때 너는 너 하나의 무게를 지닌
다른 영혼이 될 것이다 꽃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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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
이시영
밤새도록 파도는 밤섬머리를 들이받아
가장자리에 아름다운 세모래밭을 만듭니다
그러면 시베리아에서 날아온 자욱한 철새들이
거기에 매서운 첫 획들을 찍는데
그 중엔 아주 작은 아기 것도 섞여 있어
파도가 다시 와선 뺨 부비곤 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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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날
이시영
지구의 한 끝에서 한 끝으로
참새 한 마리가 포르르 내려와 앉는다
작은 눈을 들어 사방을 불안스레 돌아보는 것이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영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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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이시영
이 고요 속에 어디서 붕어 뛰는 소리
붕어의 아가미가 캬 하고 먹빛을 토하는 소리
넓고 넓은 호숫가에 먼동이 트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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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
이시영
찬 여울목을
은빛 피라미떼 새끼들이
분주히 거슬러오르고 있다.
자세히 보니
등에 아픈 반점들이
찍혀 있다.
겨울처럼 짙푸른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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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시
이시영
어서 오라 그리운 얼굴
산 넘고 물 건너 발 디디러 간 사람아
댓잎만 살랑여도 너 기다리는 얼굴들
봉창 열고 슬픈 눈동자를 태우는데
이 밤이 새기 전에 땅을 울리며 오라
어서 어머님의 긴 이야기를 듣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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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숲에서
이시영
노랗게 잘 익어 그 나무 밑에
곱게 떨어져 쌓인 솔잎을 헤치면
시커멓게 잘 익은 검은흙이 나오고
검은흙은 또 그 밑의 뿌리와 함께 큰 숨을 들이쉬며 내쉬며
이 다음에 올 커다란 세상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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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이시영
화살 하나가 공중을 가르고 과녁에 박혀
전신을 떨 듯이
나는 나의 언어가
바람 속을 뚫고 누군가의 가슴에 닿아
마구 떨리면서 깊어졌으면 좋겠다
불씨처럼
아니 온몸의 사랑의 첫 발성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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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쓰려면
이시영
시를 쓰려면
온몸에 저를 실어
산 같은 무게로 바위 같은 몸짓으로 활활 타오르는
넋의 푸른 숨결이 있어야 할 터인데
어느 날 만년필 끝에서 쉽게 풀어지고 씌어지는 나의 시여
너에게는 피의 냄새가 없다
말의 탐욕만이 있을 뿐
관념의 허상만이 있을 뿐
살아있는 사람의 노여움 긴 긴 입맞춤이 없다
그 몰아치는 폭풍 속의 서늘한 눈빛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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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록
이시영
고목나무에 꽃 피었네
지상에선 검은 흙을 뚫고 나온 애벌레 한 마리가 물 묻은 머리를 털고
이제 막 그것을 치어다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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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석양
이시영
동백꽃 꽃숲에 참새들이 떼지어 앉아
무어라 무어라 지저귀고 있었습니다
동백꽃 송이들이 알았다 알았다 알았다고 하면서
무더기로 져내리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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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생각
이시영
어머니 앓아누워 도로 아기 되셨을 때
우리 부부 외출할 때나 출근할 때
문간방 안쪽 문고리에 어머니 손목 묶어두고 나갔네
우리 어머니 빈집에 갇혀 얼마나 외로우셨을까
돌아와 문 앞에서 쓸어내렸던 수많은 가슴들이여
아가 아가 우리 아가 자장자장 우리 아가
나 자장가 불러드리며 손목에 묶인 매듭 풀어드리면
장난감처럼 엎질러진 밥그릇이며 국그릇 앞에서
풀린 손 내미시며 방싯방싯 좋아하시던 어머니
하루 종일 이 세상을 혼자 견딘 손목이 빨갛게 부어 있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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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시
이시영
옛 시에 집착치 말라
옛 시에는 옛 삶뿐,
부정해야 할 어제의 네가 있을 뿐
아직 태어나지 않은 내가 없다
수많은 다른 삶을 잉태한 채 아직 처음인 세계를 꽝꽝 여는
오늘의 설레이는 몸짓 발짓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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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밤
이시영
어느 해 봄, 원효로에서였던가
복국집의 복어국을 마시다가 어느 중이 불쑥 말했다
"봄 보지 가을 좆,
봄 보지 가을 좆"이라고
아 오늘밤 시퍼런 봄바다에 싸락눈 치겠다
물고기들 솟구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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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이시영
밤이 깊어갈수록
우리는 누군가를 불러야 한다
우리가 그 이름을 부르지 않았을 때
잠시라도 잊었을 때
채찍 아래서 우리를 부르는 뜨거운 소리를 듣는다
이 밤이 길어갈수록
우리는 누구에게로 가야 한다
우리가 가기를 멈췄을 때
혹은 가기를 포기했을 때
칼자욱을 딛고서 오는 그이의
아픈 발소리를 듣는다
우리는 누구인가를 불러야 한다
우리는 누구에게로 가야 한다
대낮의 숨통을 조이는 것이
형제의 찬 손일지라도
언젠가는 피가 돌아
고향의 논둑을 더듬는 다순 낫이 될지라도
오늘 조인 목을 뽑아
우리는 그에게로 가야만 한다
그의 이름을 불러야 한다
부르다가 쓰러져 그의 돌이 되기 위해
가다가 멈춰 서서 그의 장승이 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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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
이시영
나의 시는 마지막 숨을 몰아쉬는
지상의 어느 불안한 영혼 곁에 있어야 하겠지만
나의 시는 때로 공중을 차고 날아
머나먼 별의 별자리에 가 박혀 한 오십억 광년
숨소리도 불빛도 없이 엎드려 있어라
그러면 이슬이 내리기는 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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井蛙
이시영
저는 우물안 개구리입니다.
우물안 개구리는 하늘의 넓이는 모르지만
하늘의 깊이는 알 수 있습니다.
저는 많은 여자들을 알지는 못하지만
그녀의 깊이는 알 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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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별에서
이시영
가을이 깊어가고 있습니다
고양이 한 마리가 아파트 베란다에 일자로 엎드려
늙어 가는 지구의 시절을 망연히 바라보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낙엽 밟는 바스락 소리에 놀라
벌레들은 땅 밑에서 또 깜빡, 뜨거운 알을 낳다 죽어가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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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사랑
이시영
첫 사랑은 떨어지는 꽃잎과도 같고
첫 사랑을 원하는 제 마음은 떨어지는 꽃잎을 스쳐가는 바람과도 같으며
첫 사랑은 그저 먼 곳에서 바라보기만 하는 짝사랑은
지금 멀리서 떨어지는 꽃잎만 하염없이 바라보는 저와도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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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생각
이시영
급한 걸음으로 산길을 달려 내려오던 바위는
무슨 생각이 나서 거기에 딱 멈춰
두 귀를 쫑긋 세우고 한 손에 턱을 괸 채
무연한 표정으로 우리를 보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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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년
이시영
보리밭 속에 일렁이는 피
누나는 깜둥이에게 깔려 있었다
쪼코렛과 소총이
다붙은 입술을 열고
오디처럼 오래오래 마을에 터졌다
가을 밭갈이 때
쟁깃날에 머리가 으깨어진
깜둥이 한 쌍을
구호물자와 함께 늙발이 황소는
삼켰다 긴긴 해 황토밭엔 깜부기만 익고
땅을 벌리고 황소가 낳은
네 발의 흑송아지
누나는 건초 밑에서 목을 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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