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성, 청주의 효자(孝子)
5世 신우(申祐) 父 : 윤유(允濡) 祖父 : 득창(得昌)상계(上系)☜
11世 신원록(申元祿) 父 : 수(壽) 祖父 : 준정(俊禎) 읍파(邑派) ☜
13世 신흥효(申興孝) 父 : 몽희(夢姬) 祖父 : 수징(守澄) 읍파(邑派)관동파(館洞派)☜
14世 신지효(申之孝) 父 : 몽득(夢得) 祖父 : 응규(應奎) 귀파(龜派)응암공파(鷹巖公派)☜
14世 신지익(申之益) 父 : 로(櫓) 祖父 : 천령(千齡) 귀파(龜派)직장공파(直長公派) ☜
15世 신심(申鐔) ) 父 : 지익(之益) 祖父 : 로(櫓) 귀파(龜派)직장공파(直長公派)☜
15世 신협(申鋏) 父 : 지인(之仁) 祖父 : 로(櫓) 귀파(龜派)직장공파(直長公派)☜
15世 신내석(申乃錫) 父 : 준(埈) 祖父 : 흠도(欽道) 읍파(邑派)정은공파(靜隱公派) ☜
17世 신정모(申正模) 父 : 덕일(德溢) 祖父 : 문석(文錫) 읍파(邑派)호계공파(虎溪公派) ☜
13世 흥효(興孝) 父 : 몽희(夢姬) 祖父 : 수징 (守澄) 읍파(邑派)관동파(館洞派)☜
- 신흥효(申興孝 1574∼1658)
字: 행초(行初). 號: 계월당(桂月堂), 官職: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부모를 지극한 효성으로섬겼으며, 부친의 환우를 당하자 손가락을 끊어 피를 입에 흘러 넣어 다시 소생시켰고, 기일에는 꿩이 부엌에 스스로 날아들어서 이를 정성껏 공양하였는데,사람들은 효성에 감응하였다고 하여 사림에서는 여러 차례 정려 할 것을 논의하였으며, 이 사실은 밀성지에 실려 있다.
父母至孝 親患斷指 復甦忌日 雉入廚 以供需 人稱孝感 士林累發 褒閭之議 事載 密城誌
부모지효 친환단지 부소 기일 치입주 이공수인칭효감 사림누발 포여지의 사재 밀성지
[정의]
경상북도 의성 지역 출신이거나의성에 연고가 있는 사람으로서 부모를 효성으로 극진하게 봉양한 자녀.
[개설]
우리나라에서 효(孝)의 관념은매우 오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널리 알려져 있는 화랑의 세속오계에서도 효를 강조하고 있고, 『삼국유사(三國遺事)』의 효녀 지은 설화에서도 고대에효를 중시했음을 보여 주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국가에 의한 적극적인 교도(敎導)로 서민에게까지 이른 것은 성리학을 국가의 이념으로 한 조선 시대부터이다.조선 시대에 이르면 전국 어느 곳을 막론하고 효자가 배출되지 않은 마을이 없었으며, 그것을 그 지역의 자랑으로 여겼다. 의성 지역에서도 두 개의마을이 ‘효자리(孝子里)’로 불릴 정도로 많은 효자를 배출했다. 의성 지역이 배출한 효자에 대한 기록은 『교남지(嶠南誌)』, 『영남읍지 (嶺南邑誌)』,『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삼강행실록(三綱行實錄)』 등에 남아 있다.
[의성의 효자들]
의성은 수많은 효자를 배출하였다.그들이 어버이를 섬기는 방식이 다양했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효성이 만들어낸 이적(異蹟) 또한 수없이 많다. 어떤 효자는 어린 나이에 어버이를여의고 맏형을 어버이처럼 모셨고, 어떤 효자는 어버이를 생각하는 마음에 평생을 나물 반찬으로만 지냈고, 어떤 효자는 불길 속에 갇힌 어머니를 구하기위해 주저 없이 그 속에 뛰어들었고, 어떤 효자는 정신이 혼미한 아버지가 자신의 아이를 닭으로 알고 끓는 물속에 삶아 죽이자 이 사실을 아버지가알고 충격을 받을까 염려하여 죽은 자식을 감추었고, 어떤 효자는 11년간 병든 노모를 한결같은 마음으로 보살폈고, 어떤 효자는 몸소 흙을 져다날라 아버지 묘소의 봉분을 쌓았고, 어떤 효자는 시묘 3년 동안 아버지를 생각하며 흘린 피눈물이 상석(床石)을 붉게 물들였고, 어떤 효자는 홀로된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연친곡(宴親曲)을 짓기도 하였다. 또한 성묘할 때의 애달픈 울음소리가 묘소 아랫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안쓰럽게 하여 눈이오면 앞 다투어 눈을 쓸고 효자가 오기를 기다리게 하기도 하였다.
기록에 따르면 이처럼 지극한효성은 넘쳐나던 냇물을 줄어들게 하고, 호랑이가 보호하고, 한겨울에 참외를 찾아내고, 갑작스런 바람이 불길을 돌려 어머니를 구하고, 꿈 속의 신령이처방전을 내려 주고, 묘소에 백학이 날아와 서식하고, 맑은 샘이 솟아나게 하였다는 전승으로 이어지기도 하였다.
의성이 배출한 효자들을 지역별로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의성읍 출신 : 오천송(吳千松),오철업(吳哲業), 이탁영(李擢英), ☞신원록(申元祿), ☞신내석(申乃錫), 김호영(金鎬榮),☞신정모(申正模),박윤(朴閏) 등.
2. 단촌면 출신 : 도금동(都今同),마근(馬謹), 마노화(馬魯華), 김기봉(金起鳳) 등.
3. 점곡면 출신 : 권호인(權好仁)등.
4. 옥산면 출신 : 권영모(權寧模),이도술, 김윤산(金允山), 김학순(金學淳) 등.
5. 사곡면 출신 : 김락재(金洛載),이종건(李鍾健), 이억선(李億善), 손상언(孫相彦) 등.
6. 춘산면 출신 : 박하륜(朴河倫),김창운(金昌雲), 김성순(金性舜), 서명식(徐命植), 손양남(孫亮南) 등.
7. 가음면 출신 : 박장춘(朴長春),박상천(朴祥天) 등.
8. 금성면 출신 : 신연(申淵),파평 윤씨의 아들, 이관재(李寬在) 등.
9. 봉양면 출신 : 임석호(任錫鎬),임순호(任純鎬), 임제호(任齊鎬), ☞신지효(申之孝), 신홍(申烘)
10. 비안면 출신 : 김유인(金有仁),김기호(金基浩) 등.
11. 구천면 출신 : 변세린(卞世麟),이효건(李孝騫), 김영배(金榮培), 송홍운(宋鴻雲), 유포(柳砲), 남치수(南致洙), 변용(卞勇), ☞신우(申祐) 등.
12. 단밀면 출신 : 김형석(金衡錫),임성무(林盛茂), 구민학(丘敏學), 신복성(申福誠), 장복례(張福禮), 구세직(丘世稷), 신흥효(申興孝), 김형석(金炯石), 정악(鄭岳), 김종숭(金鍾崇),권상두(權相斗), 김동문(金東文), 강준형(姜峻馨) 등.
13. 단북면 출신 : 손극창(孫克昌)등.
14. 안계면 출신 : 장문서(張文瑞),정시교(鄭時敎), 김진국(金鎭國), 장재규(張在奎), 김옥진(金玉鎭) 등.
15. 다인면 출신 : 김제균(金濟均)등.
16. 신평면 출신 : 김주건(金疇鍵)등.
17. 안평면 출신 : 최경석(崔慶碩),최경순(崔慶淳) 등.
[의성 효자들의 유적]
의성 지역에는 효자들을 추모하는다양한 기념물이 남아 있으며, 주로 사당·누각·비석·비각의 형태이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의성읍 상리 1리에 있는 이탁영의 사당인 충효사, 의성읍도동 3리에 있는 신원록의 정려각, 의성읍 팔성 2리에 있는 신원록의 부조위 사당(不祧位祠堂)과 신정모의 유허비각, 의성읍 팔성 3리에 있는 오천송의누각인 소원정, 단촌면 관덕 2리에 있는 김기봉의 사당 덕천사, 옥산면 금학리에 있는 김윤산의 효자각, 춘산면 사미리에 있는 김창운의 숭효각,금성면 도경 3리에 있는 파평 윤씨 아들의 효자비각, 금성면 개일 2리에 있는 신연의 사당 금난재, 봉양면 사부 1리에 있는 도금동의 정효각,구천면 용사 2리에 있는 신우의 효자비, 단밀면 용곡 1리에 있는 신복성의 효자비, 단밀면 위중 2리에 있는 임성무의 정려각, 단밀면 주선 1리에있는 정악의 숭효각, 단밀면 주선 2리에 있는 신우의 효자리비, 단밀면 생송 1리에 있는 김종숭와 권상두의 정려각, 단밀면 생송 2리에 있는 김동문의효자각, 안계면 위양 1리에 있는 변용의 정려각, 다인면 송호리에 있는 김제균의 효자각, 신평면 덕봉리에 있는 김주건의 효자비각, 안평면 석탑2리에 있는 최경석·최경순 형제의 쌍효각 등이 있다.
[청주 효행사례]
청주지역에 전하는 효행에 관한 사례로 다음과 같은 얘기가 있다. 청주지역의 효행사례서는유난히 부모님 변환에 손가락을 베어 피를 드린 일이 많은 것으로 보아 영양이 부족한 시기에 자기 몸을 희생하면서 까지 부모님에게 효성을 다한 것을추앙하였던 사실을 알 수 있다. ☞신지익(申之益)은 모친의 병환에 목욕재계하고 북두칠성에빌었으며 손가락을 베어 피를 입에 넣어드리고, 정성을 다하였다. 초상 때 애통함이 지나쳐 울며 곡하다가 기절하였으며 질대를 풀지 않고 상례를 치렀다.숙종(肅宗) 때에 정려되어 청원군 미원면 화창리에 삼효각(三孝閣)이 현재 있다. 그의 아들 ☞신심(申鐔)은병자호란 때 적병을 만나게 되어 몸으로써 부모를 막아 지키며 부모에게 해치지 못하도록 애원하니 청나라 병사도 차마 해하지 못했다. 또 모친의 병환에손가락을 베어 구한 일도 있어 숙종 때에 정려되었다. 신지익의 조카인 ☞신협(申鋏)은모친의 병환에 손가락을 베어 피를 드리고. 효성을 다하여 효종 때에 정려되었다. 이긍익(李肯翊)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가운데 인조 때의『고사본말(古事本末)』에는 또한 효자 집안 얘기가 전하고 있다. 이를 요약하면 이기설 (李基卨)은 20세에 부친상을 만나서는 7일이나 미움도 들지아니하였다. 향교 구동(鄕校舊洞)에 사는 여러 명사들이 공의 지극한 행실을 조정에 아뢰어 인조대왕이 특명으로 표창하여 효자문이라고 정문(旌門)을내렸다. 공의 할머니인 절부(節婦) 안씨와, 아버지인 효자 참봉(參奉) 지남과, 어머니 절부 정씨와, 형 효자 수재(秀才) 기직과, 누이동생 효녀이씨가 모두 표창을 받으니, 한집에 여섯 정문으로써 세상에 아직 없던 바이므로 영광을 온 세상이 칭찬하고 탄복 하였다. 임금이 효자삼세 (孝子三世)라는편액을 내렸다고 한다.
[여막(廬幕)생활 풍속]
효자의 전형적인 행위는 아마도 자기희생적인 정신으로죽을 지경인 부모를 구출하여 낸 효자들과 3년 상 기간 중 여막(廬幕) 생활을 해낸 효자들인 것 같다. 즉, 상복을 입는 3년 동안 부모의 무덤옆에다 임시 거처로서의 움막을 지어 여막이라고 하였다. 샤를르 달레(Dallet, C, C)는 그의 『조선교회사서설』 에서 여막방의 풍습에 대하여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우선 시체를 두꺼운 나무관 속에 넣고 그것을 특별히 이 목적을 위하여 차리고 꾸며 놓은 방에 몇 달 동안 둔다. 시체를둘만한 방을 가지지 못한 평민은 집 밖에다 두고, 비를 가리기 위하여 짚으로 엮은 거적으로 덮는다. 이 시체가 있는 방에는 하루에 적어도 네 번은곡(哭)을 하러 가며, 그 방에 들어가려면 특수한 옷차림을 한다.” 달레가 여막방이라 는 용어는 쓰지 않았지만 그것을 가리키고 있음이 분명하다.또한 여막방을 갖추지 못한 평민들이 하는 관습으로 초분(草墳)의 관습이 있었다. 이 초분의 관습은 남해의 도서지방에서 비록 드물기는 하지만 아직도행해지고 있다. 생명을 부지할 만큼 최소한의 음식만을 들면서 매일 상을 올리고, 곡을 하면서 생활하였다. 이 여막살이를 하는 기간에는 일체의 정상적인생활을 할 수 없었다. 혹시 관직에 있던 상주라도, 죄인으로 간주되어, 그 관직도 버리고 삼년상을 치러야 하였다. 관직에 있는 사람이 부모상을당하면 조정에서 특별히 그의 재능을 필요로 하는 경우 이외에는, 관직을 그만두는 것이 통례였다. 효자의 또 한 가지 예로서 변경복(卞景福)은1593년(선조 26) 임진왜란 때, 그의 노모를 업고 피난하여 화를 면하였고, 모친이 돌아간 후에 삼년간 묘를 지켰고, 한결같이 가례(家禮)에 의하여 제향하였다. 선조(宣祖) 때에 효행이 알려져 정려되었고, 국계서원(菊溪書院)에 배향되었다.
[참고문헌]
『교남지(嶠南誌)』 『영남읍지』『동국여지 승람(東國輿地 勝覽)』 『삼강 행실록(三綱 行實錄)』 『의성 군지』(의성 군지 편찬 위원회, 1998)
『삼강오륜(三綱五倫)』,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 샤를르 달레(Dallet, C, C) 저, 안응렬·최석우 역, 『조선교회사』(분도출판사,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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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2), 『청주시지(淸州市誌)』(충북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청주시, 1997)
· 『한국고전용어사전』5(세종대왕기념사업회,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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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