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교구 대사 수여 교령에 나와 있는
‘Ⅰ.순례’ 장소 중 ‘교구 직권자가 지정한 성당이나 거룩한 장소’
나. 희년 순례 지정 성지(8곳)
순번 | 성 지 명 | 주 소 | 비 고 |
1 | 김제순교성지(요촌성당) | 김제시 신풍길 253-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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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개갑장터순교성지 | 고창군 공음면 선운대로 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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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나바위성지 | 익산시 망성면 나바위길 1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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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여산순교성지 | 익산시 여산면 영전길 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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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전주숲정이성지 | 전주시 덕진구 공북로 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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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천호성지 | 완주군 비봉면 천호성지길 1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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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 치명자산 성지 | 전주시 완산구 바람쐬는길 1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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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 초남이성지 | 완주군 이서면 초남신기길 122-1 | |
1.김제순교성지(요촌성당)
복자 한정흠 스타니슬라오(1756-1801)는 전라도 김제의 양반 출신으로, 유항검 집에서 자녀들의 스승으로 생활하면서 천주교를 접하게 되었고, 세례를 받고 난 뒤에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의 가르침을 받은 유항검 아우구스티노의 자녀인 유중성 요한과 유문석 요한, 조카 유중성 마태오 등이 믿음을 충실히 지키며 순교하고 다 같이 복자품에 오른 것으로 보아, 한정흠이 누구보다도 더 하느님께 충실했음을 알 수 있다.
신유박해 때 유항검과 함께 체포되어 전라 감영에서 혹독한 고문과 심문을 받았지만 어떠한 형벌과 회유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아울러 당시 같은 감옥에 있었던 최여겸 마티아, 김천애 안드레아와 서로 용기를 북돋웠다고 전해진다. 그 뒤 한양으로 압송되어 포도청과 형조에서 문초를 받았지만, “죽는 것이 사는 것이다.”라고 말하며 목숨을 구걸하지 않았다. 1801년 음력 7월 13일 그들 세 사람은 천주교를 고집한다는 죄목으로 사형 선고를 받은 뒤 처형하도록 고향으로 보내졌다. 고향인 김제에 도착한 한정흠 스타니슬라오는 음력 7월 18일에 45세의 나이로 참수당했다.
순교터는 옥터 주변으로 추정되며, 옥터 근처인 요촌성당에 성지가 조성되어 있다.
2.개갑장터순교성지
1763년 무장현 공음치면에서 태어나서, 1801년에 순교한 최여겸 마티아는 윤지충을 따라서 천주교를 알게 되었고, 이존창을 통해 천주교 신앙을 충실하게 실천했으며, 특히 선교 활동에 헌신했다. 그래서 최여겸에게 천주교 신앙을 배운 사람이 공식적으로 28명이나 되고, 복음을 전파한 지역으로는 흥덕, 고창, 무장, 영광, 함평 등이다.
1801년 박해 때 체포된 최여겸은 전라 감사에게 끌려와 “왜 사학을 따르느냐?”는 질문에, 자신은 ‘유일한 참 종교를 따른다.’고 말한 다음, 천주교 교리 중 상선벌악을 고백함으로써 당시 불의한 조선의 사회 구조에 경종을 울리는 신앙 고백을 하였다. 또한 최여겸은 “합법적인 결혼에서 갖는 부부 관계 이외에는 그 어떤 관계도 가질 수 없다.”고 말함으로써 남녀평등을 언급했고, 남자도 부부간의 의리를 지켜야 하기에 첩을 끊어야 함을 강조했다.
형조에까지 끌려간 최여겸은 1801년 8월 21일, ‘해읍정법’의 사형을 선고받고, 무장읍성 감옥에서 마지막 밤을 보낸 후, 1801년 8월 27일, 38세의 나이로 개갑장터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현재 개갑장터 순교성지는 ‘고창군 향토 문화유산 제1호’로 지정되었다.
3.나바위성지
나바위성지는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 김대건 신부와 조선 교우 11명이 1845년 10월 12일 밤 조선에 도착해 첫발을 내디딘 축복의 땅이다. 또한 박해로 성직자를 잃은 조선교회에 처음으로 입성한 최초의 한국 사제와 선교사들의 복음 선포에 대한 강한 열망과 열정을 만날 수 있는 성지이다. 베르모렐 신부가 이곳에 성당을 세울 때는 김대건 신부 일행을 기념한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였기에, 이곳에 성당이 자리 잡은 것은 하느님의 특별한 섭리라고 생각할 수 있다.
1907년에 완공된 나바위성당의 첫 모습은 한국인의 정서에 맞게 한옥 형태를 취하였다. 그러나 1916-1917년에 개보수를 하면서, 흙벽은 서양식 벽돌로, 성당 입구는 고딕식 벽돌조로 종탑을 세웠으며, 외부 마루는 회랑으로 바꾸었다. 건축 양식이 특이하여 국가 사적 제318호로 지정되었다. 특히 전통 관습에 따라 성당 내부를 칸막이로 나누어 남녀 자리를 구분하였는데, 그 기둥이 그대로 남아 있다. 성당 제대 주변에는 중국 남경의 성 라자로 수도원에서 제작한 세례대와 벽 제대 등이 옛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4.여산순교성지
여산은 병인박해 2년 후인 1868년 무진년에 많은 천주교인이 목숨을 바쳐 신앙을 증거한 순교 성지이다. 기록으로만 보아도 이곳에서 순교하신 분은 25명에 이르며, 전하는 바에 따르면 적어도 40여 명이 이곳에서 순교한 것으로 추정된다. 1983년 전주교구는 믿을만한 구전을 토대로 김성화 야고보 등 여산 순교자 열 분의 유해를 발굴하여 천호성지의 묘역에 안장하였다.
여산의 천주교 박해는 다른 어느 지역보다 끔찍하고 혹독했다. 많은 신앙 선조가 여산 감옥과 숲정이, 장터, 기금터, 여산교에서 일정한 형장이나 형벌이 없이 마구잡이로 죽임을 당하였다. 천주교인들은 매질이나 교수형(絞首刑), 백지사(白紙死)형(얼굴이 하늘을 향하도록 하고 그 위에 물을 뿌린 후 백지 여러 장을 붙여 질식시킴) 등의 참혹한 죽음으로 순교하였다. 그들은 감옥(현재 시장 부근)에 갇혀 있는 동안 모진 고문과 실로 참기 힘든 굶주림을 견디며, 함께 기도하고 서로 격려하면서 신앙공동체를 이어 갔다.
이곳에서 천호성지까지 8km, 나바위성지까지 14km로 도보순례도 가능하다.
5.전주숲정이성지
숲이 칙칙하게 우거져 있어 숲정이로 불렸던 이곳은 조선시대 군사훈련장이었다. 이 근처에는 피 묻은 칼을 씻을 수 있는 전주천이 있었기에 사형장으로도 사용되었다.
신유박해(1801) 때 ‘호남의 사도’ 유항검의 가족의 일부(신희, 이육희, 이순이, 유중성)와 동료(김천애 등)가 순교한 이후로 천주교인들의 피가 마르지 않았던 곳이다.
기해박해(1839) 때는 12년간 전주옥에 수감되어 있던 5명(이일언, 신태보, 이태권, 정태봉, 김대권)과 많은 신자(홍재영, 최조이,이조이, 오종례 등)들이 순교했다. 병인박해(1866) 때는 6명(이명서, 손선지, 정문호, 한재권, 조화서, 정원지)이, 1867년에도 많은 신자들(김사집 등)이 참수형을 받아 순교했다. 숲정이 순교터는 후에 이명서 성인의 후손이 매입해 순교자비를 세웠다.
숲정이 순교터는 도지정 기념물 제71호이다.
6.천호성지
천호성지는 병인박해(1866) 때 전주 숲정이에서 순교한 여섯 성인 중 이명서, 손선지, 정문호, 한재권 등 네 명과 그해 충청도 공주에서 순교한 김영오 등이 묻혀있고, 또 2년 뒤여산에서 순교한 열 명의 순교자가 묻혀 있다.
아직도 종적을 알 수 없는 수많은 순교자들이 천호산 자락에 묻혀있다.
천호는 기해박해(1839) 이후로 박해를 피해와 숨어살던 신자들이 이룬 유서깊은 교우촌이다. 또한 성지 인근에는 1845년 김대건 신부가 체포된 후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가 숨어서 미사를 드리던미사굴과 1867년 블랑 신부가 처음으로 정주하여 사목한전라도 최초의 사목지 어름골이 있다. 또한 이웃사랑을 실천한 박준복의 삶을 생각할 수 있는 낙수골이 있다. 천호성지에는 피정의 집과 세상을 떠난 영혼을 모신 봉안경당, 그리고 성물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다.
7.치명자산성지
치명자산 성지에는 신유박해(1801년) 때 순교한 호남의 사도 복자 유항검 아우구스티노와 그의 가족 6위가 합장된 가족 순교자 묘가 있다. 이분들은 순교한 뒤 본가인 초남이 바우배기에 매장되었다가, 전동성당을 완공한 보두네 신부가 1914년에 승암산 정상에 모심으로써 치명자산 성지의 역사가 시작되었다(전라북도 지방 기념물 제68호). 이 묘지에는 성 다블뤼 주교가 ‘한국 순교사의 가장 찬란한 진주’라고 칭송한 동정 부부 순교복자 유중철 요한과 이순이 루갈다도 합장되었다.
보두네 신부가 해발 300여 미터의 산정에 순교자들을 모신 것은 우리가 그분들의 위대한 신앙과 고결한 덕을 높이 기리고, 산을 오르며 흘리는 수고의 땀으로라도 순교자들의 신앙을 본받자는 뜻이 담겨있다. 치명자산에는 파티마성모동산, 요안루갈다 십자가의 길, 1994년 건립된 기념성당과 기념관, 성직자 묘역이 조성되어 있다.
산 아래 요안루갈다 광장에는 2021년 완공된 평화의 전당과 순례자성당, 옹기가마 경당과 기도숲이 조성되어 있다. 평화의 전당은 피정센터와 복합 문화공간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개인피정과 순례자들을 위한 숙소도 마련되어 세상을 향해 열린 사랑의 성지로 자리 잡고 있다.
8.초남이성지
초남이성지는 복자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가족의 생가가 있던 곳이다. 호남 최고 갑부인 유항검은 1784년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은 후 적극적 나눔을 실천하고 종들을 형제처럼 대하며 복음을 전했다. 아들 유중철 요한과 며느리 이순이 루갈다는 이곳에서 4년 동안 동정부부로 살았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유항검은 전주 남문 밖(현 전동성당)에서 능지처참형을 받았으며, 집터는 파가저택되었다. 아들 유중철과 유문석은 전주옥에서, 이순이와 조카 유중성, 부인 신희와 제수 이육희는 숲정이에서 순교하였다. 이들 7명의 유해는 바우배기에 묻혔다가 1914년 치명자산 묘지로 이장되었다.
교리당은 유항검이 교리를 가르치고 논하며 숙식을 제공한 장소이다. 이곳을 기점으로 전주, 김제, 금구, 영광 등에까지 천주교가 전해졌다. 1795년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이곳에서 한 주간 머무르며 미사와 고해성사를 거행하였다.
바우배기는 1791년 신해박해 때 참수치명된 한국 최초의 순교자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 신유박해 순교자 복자 윤지헌 프란치스코의 유해가 순교한 지 230년이 지난 2021년 3월 11일 발견된 곳이다. 세 분의 유해는 교리당의 순교자 묘소에 안치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