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류산 유람록을 따라 /진주-사천 쾌재정 남명이 두류산 유람을 하기 위해 배를 탔던 곳이 바로 사천 장암이다. 지금은 상상이 안되겠지만, 예전에는 사천에서 배를 타고 곤양, 서포를 거쳐 섬진강으로 가는 뱃길이 널리 이용되었다. 이 뱃길은 나라의 세금을 나르던 길이기도 했다. 1558년 4월 11일 삼가 계부당을 출발한 남명은 13일까지 진주 금산에 있는 자형 이공량의 집에서 머물다, 14일 자형과 함께 사천으로 길을 나섰다. 남명이 삼가를 출발하기 전 진주목사 김홍과 사천에서 배를 타고 떠나 섬진강을 거슬러 쌍계로 들어가기로 여정을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진주를 출발한 남명 일행은 사천에 도착하자마자 이정의 집에 여장을 풀었다. 이정은 1512년(중종 7년) 사천군 구암리에서 이담(李湛)의 장남으로 태어난 사천사람이다. 이정은 1555년 청주목사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다 건강이 좋지 않아 1년만에 사임하자 청주의 백성들이 선정을 세워주기도 했다. 청주목사를 사임하고 고향에서 요양을 하던 중 1557년 부호군에 임명되었지만, 노모의 봉양을 위해 집을 떠나지 않고 조정의 봉급도 사양하였다. 이정이 이처럼 벼슬을 사양하고 모부인을 봉양하기 위해 고향에 머물고 있을 때 남명이 집을 방문한 것이다. 이정의 집은 구암리에 있었다. 본래 사천군 북면지역으로 거북처럼 생긴바위가 있다 하여 ‘자래바위’ 또는 ‘구암리’라고 한 곳이다. 지금 사천에서 금곡 쪽으로 시내를 조금만 벗어나면 구암리라는 마을이 있는데, 바로 구암이 태어난 곳이다. 평소 구암은 남명을 스승같이 섬기고 따랐다. 구암은 남명 일행을 위해 칼국수, 단술, 생선회와 흰색과 노란색 경단, 푸른색과 붉은 색 절편 등을 만들어 융숭히 대접했다. 요즈음은 흔히 먹을 수 있는 음식이지만, 당시로서는 먹기 힘든 음식이었다. 청주목사까지 지낸 구암이 선비 남명을 위해 이같이 대접한 일은 권력과 돈을 앞세우는 요즘 사람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남명은 구암 이정의 집에서 하루를 묵고 다음날인 4월 15일 구암과 함께 사천강과 길호강이 합쳐지는 사천만 안쪽의 장암(場巖)으로 향했다. 남명은 장암에 도착해 먼저 고려말 이순이 건립했다고 전해오는 쾌재정(快哉亭)에 올랐다. 기자는 남명이 하룻밤을 묵었던 구암 마을을 출발하여 축동면 배춘리-길평리를 거쳐 장암을 찾아 길을 떠났다. 길평에서 곤양 쪽으로 차를 타고 5분 정도 가면 축동면 구호리가 나오는데, 옛날 장암이 있었던 마을이다. 지금 장암의 흔적은 찾을 길없지만, 쾌재정 언덕 아래에 있던 바위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남명은 장암과 쾌재정이 같은 장소에 있었다. 기자는 마을 이장 김용준씨(64.구호리)의 안내로 쾌재정이 있었던 곳에 올랐다. 400여년전 남명이 올랐던 그 쾌재정이다. 쾌재정은 고려 말 홍건적이 쳐들어왔을 때 이를 물리쳤던 고려 시대 장군 이순이 지은 정자다. 지금 쾌재정은 없지만 그 흔적은 찾을 수 있었다. 지금 쾌재정 터에는 수령 약 500년으로 추정되는 정자나무가 외로이 서있다. 김용준씨는 “우리 어릴 때까지만 해도 배가 바로 이 밑까지 들어왔습니다. 목포 등 전라도서 새우젓을 싣고와 여기 내려놓으면 상인들이 다시 산청 함양쪽으로 가져가곤 했습니다” 쾌재정 바로 밑까지 바다였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그도 그런것이 바로 앞에는 남해안 고속도로가 뚫여 차들이 무서운 속도로 질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해안 고속도로 뿐이 아닙니다. 이 앞의 사천 비행장도 옛날에는 바다였습니다. 비행장 조성으로 지형이 예전과 너무 다릅니다.” 옛날 배가 무시로 드나들었던 장암은 지금 남해안 고속도로와 비행장으로 인해 옛모습을 상상하기 조차 힘이 들었다. 옛날 세미선(稅米船)이 드나들던 포구였던 곳이 그야말로 상전벽해가 되어버린 것이다. 쾌재정이 있던 자리도 학교로 변했다가 지금은 그것조차 없어졌다. 옛날 선비들이 낚싯대를 드리우고 시를 읊조렸던 쾌재정엔 황폐한 풀만이 남아 옛 풍류를 전하고 있다. 남명도 이곳에 들러 시 한수 쯤은 남겼을 법한데 애석하게도 전하는 시가 없다. 옛날 사천에 들른 퇴계 이황도 쾌재정에 쉬어 갔다고 한다. 조선시대 영남의 대표적 유학자 남명과 퇴계가 머물고 간 유서깊은 곳이다. 이 고장 사람들은 지금 쾌재정 복원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 선인들의 유풍을 후손들에게 길이 전해주고픈 고향 사랑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리라. 남명이 쾌재정에 있을 때 김홍의 중씨 김경과 김홍의 아들 김사성(金思誠)이 잇따라 왔다. 김홍은 맨 뒤에 왔다. 잠시 뒤엔 사천 현감인 노극수가 고을 수령의 자격으로 찾아와 작은 술자리를 베풀어주었다. 남명 일행은 곧 큰 배에 올랐다. 사천 현감은 술과 안주 및 음식을 실어준 뒤 배에서 내려 돌아갔다. 충순위 정당이 물건 챙기는 일을 감독하였다, 기생 열 명이 피리 생황 북 나팔등 악기를 모두 벌여 놓았으나, 이날은 성종의 왕비인 공혜왕후 한씨의 기일이었다. 그래서 음악은 연주하지 않고 채식만 하였다. 그때 백유량이라는 젊은이가 배 위로 올라와 일행에게 인사를 했다. 남명은 배를 타고 섬진강으로 가면서 그 정경을 두류록에 다음과 같이 남겼다. “이날 밤 달빛은 대낮같이 밝고 은빛 물결은 잘 닦은 거울처럼 빛났다. 사공들이 번갈아 뱃노래를 부르니 이무기가 사는 굴까지 메아리가 울려 퍼지는 듯했다.” 남명 일행은 살랑살랑 불어오는 샛바람에 서둘러 돛을 펴고 노를 걷은 뒤 바람을 타고 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배는 곤양 땅을 지나 유유히 섬진강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때 남명 일행은 배에서 잠들었는데, 세로로 누운 사람도 있고 가로로 누운 사람도 있었다. 이때 김홍이 편 담요와 겹이불이 폭이 매우 넓었는데, 남명이 처음 이불 한쪽에 끼어들어 자다가 김홍을 밖으로 밀어내고 혼자 독차지 하였다. 김홍은 이불을 빼앗긴 줄도 모르고 계속 잠만 자고 있었던 것이다. 배는 달빛의 안내를 받으며 섬진강으로 향하고 있었다.(계속) /강동욱기자 kdo@gnnews.co.kr
♣남명이야기:쾌재정을 복원하자
선인들이 남긴 얼과 슬기로서 오늘의 우리를 확인한다. 그들이 읊은 한시 한 수가 삶을 돋보이게 한다. 삭막한 생활 현장에서 부른 자연의 노래였기에 더욱 값진 문화유산이 된다. 려말(麗末) 이순(李珣) 장군이 왜구를 물리친 뒤 이곳 어딘가에 있었을 호수 가에 대장기(大將旗)를 세워두고 지은 정자가 아호정사(牙湖精舍)였으니 그 곳에 갑옷을 풀어놓고 한 시름 잊으면서 주민들과 더불어 즐거워(快哉)했을 것은 짐작이 가고도 남는 일이다. 그래서 이름 붙여진 쾌재정(快哉亭)이다. 그 옛날 세미선(稅米船)이 드나들던 포구에는 공장이 들어앉고 갈매기 날던 하늘로 여객기가 은빛 날개를 번쩍이며 솟아오른다. 고기 낚던 장암(場巖)은 고속도로에 묻혀 흔적조차 찾을 길 없다. 두루마기 벗어 걸던 언덕에는 수풀이 우거졌다. 흔적조차 사라진 쾌재정 터엔 기와조각만 어지러운데 이순이 심었다는 포구나무 한 그루가 7백년의 찌든 세월을 알려주기라도 하듯 갈라진 나무 속에 파랗게 이끼가 끼인 채 가지마저 잃고 외롭게 서 있다. 모습을 알 수 없는 쾌재정을 복원할 길은 어렵거니와 그 자리에 따로 정자 하나라도 따로 세워서 선인들의 높은 뜻을 기릴 사명이 우리에게 남아 있다. 아름답게 가꾼 자연을 후손에게 물려줄 일이 우리가 할 일이다. 그것이 문화며 우리는 문화시민이다. /박동선·사천시 축동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