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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1
내가 알고 있는 한 나의 절반은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의 비밀을 알게 되면서 그것은 확실한 해답이 되었다. 직장을 그만두고 혼자 방에서 누에처럼 꿈지럭거리고 있을 때 아버지의 비밀을 알게 되었다. 뚜렷한 직장도 다닌 적이 없는 아버지는 내 기억 속에서 돈으로부터 자유로웠다. 어머니와 나는 별다른 의심도 없이 그럭저럭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무엇이 사고 싶어 아버지에게 말만하면 곧바로 나의 손에 놓여졌다. 그것은 참으로 신기한 일이라기보다는 아버지의 존재가 그런 것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알게 되었다. 곧 아들이 무엇이 필요하면 그것을 만족시켜주는 존재, 그것이 아버지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아버지는 자신의 방에서 그리고 며칠씩 집밖에서 대부분의 시간들을 보냈다. 나도 무엇인가 일하기 싫고 사회로부터 조금 멀어지려는 생각이 굳어지면서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다. 나는 내일이 없이 하루하루를 방안에서 지냈다. 직장을 다니며 장만한 노트북으로 세상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 전부였다. 나는 얼마정도 예금한 통장이 있었고, 어머니가 적금으로 모아놓은 돈도 그대로 있었다.
나는 방안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다 문득 아버지가 누구일까, 라는 생각에 사로잡혔고 가끔씩 아버지 방을 기웃거렸다. 문틈으로 바라본 아버지는 누워있는 모습이거나 신문을 펼쳐놓고 안경을 썼다 벗어다 하는 다른 아버지와 별다를 것이 없는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나의 방에 들어온 적은 거의 없었다. 식사도 거실과 맞닿아 있는 부엌 식탁에서 각자 해결하였다. 식사하세요, 식사하거라, 라는 말조차도 생략된 상황이었다. 아버지는 말을 거의 하지 않는 분이었다. 대부분 어머니가 아버지의 말을 대신해왔었다. 이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라 우리 집의 상식이었다. 서로에게 부담도 주지 않으면서 상처도 주지 않는 아주 지혜로운 선택이었다.
나는 아버지가 보석 감정사나 어느 회사의 자문 회계사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 많이 일하지 않아도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정말 어느 날에는 아버지의 손에 제법 큰 다이아반지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어느 날에는 빳빳한 돈뭉치가 놓여 있었다. 그것들은 모두다 어머니에게 돌아갔고 나는 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눈과 손으로 이것은 이것, 저것은 저것 하는 아주 단순한 돈벌이를 상상해 보았다.
아버지의 비밀을 알게 된 것은 직장을 그만 둔지 거의 2개월이 지날 때쯤이었다. 나는 아버지와 함께 모처럼 찜질방이나 가볼까 하여 방문을 열어보았다. 혼자서 찜질방에 간다는 것이 좀 낯설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혼자 방안에 있을 아버지에게 마음이 끌린 것도 이유였다. 그러나 방안에는 아버지가 없었다. 조금 이상한 것은 방바닥에 흙가루들이 흩어져 있다는 것과 장롱이 조금 움직여져 있다는 것이었다.
2
맨 처음 흙가루들이 왜 이곳에 있을까를 생각하다 장롱이 옮겨져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흙가루는 장롱과 연결되어 있었고 장롱을 열어보자 장롱 안에는 아버지가 입던 옷들이 옷걸이에 걸려 있었다. 장롱 안은 특이한 점이 없었다. 장롱을 조금 움직여보니 방바닥에 구멍이 나 있었다. 장년 한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크기의 구멍이었다. 그 구멍 속에서 찬 공기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캄캄한 구멍 속을 바라보다 나는 구멍 속으로 들어갔다. 발을 내리자 사다리가 발끝에 닿았다. 나는 사다리에서 올라와 신발과 옷을 다시 차려입고 구멍 속으로 들어갔다. 손에는 손전등을 들고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동굴이었다. 어디로 이어져 있는지, 어디를 향하여 난 동굴인지, 누가 판 동굴인지, 아버지는 어디에 있는지 등등 수많은 생각들이 어둠속을 걸어가고 있었다. 한참을 걸어갔지만 여전히 어둠뿐이었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눈을 감은 채 무엇이 들리지 않을까 귀를 기울여 보았다. 어느 곳인지 모르지만 음악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나는 눈을 뜨고 그 음악소리를 찾아 걸음을 옮겼다. 음악소리가 점점 다가오면서 그것은 아버지가 즐겨 들었던 한 가요라는 것을 알았다. 누가 불렀는지 곡명은 무엇인지는 모르나 그것은 분명 아버지가 즐겨들었던 가요였다. 일요일이면 창문을 열어놓고 방에 누워 팔베개를 한 채 그 음악을 듣곤 하였다. 그것은 아버지의 취미인 듯 보였지만 그것은 아버지의 특별한 시간이었다. 일요일이면 성당에 나가 미사를 드리는 것처럼 그것은 하나의 의식 같았다.
“아버지를 찾으러 오셨군.”
어둠은 사라지고 천장에 매달린 붉은 불빛 아래에서 한 중년의 여자가 서서 말했다. 짙은 화장과 새빨간 입술, 그리고 젖가슴이 보일 듯이 차려입은 옷차림은 마치 술집의 마담 같았다. 그러나 추하거나 미운 얼굴이 아니었다. 누가 보아도 아름다운 부인이었다.
“누구에게도 들키지 말라고 그렇게 당부했는데……. 뭐 어쨌든 이렇게 찾아왔으니 그냥 돌아갈 수는 없지. 아버지를 찾으러 이렇게 먼 길을 찾아왔는데.”
부인은 술잔에 술을 따르며 나에게 내밀었다.
“아버지는 벌써 떠나셨네. 어디를 헤매고 있을지는 모르지만 이곳에 잠시 머물러서 내가 따라주는 술을 마셨지. 아버지의 인상이 몹시 쓸쓸해 보이던데. 가을 탓인가? 이곳에 들어오는 아버지들은 언제나 가을에 머물러 있지만…….”
부인이 따라준 술을 마셨다. 칵테일 같기도 하고 도수가 낮은 소주인 것 같기도 하였다. 한 잔으로는 부족할 것 같은 술이었다. 내가 술잔을 비우자 부인은 빈 술잔에 다시 술을 따랐다.
“이곳에 들어온 이상 아버지 박물관에는 꼭 가봐야 할 걸세. 그곳에서 아버지를 생각하다보면 아버지를 찾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자네 아버지는 이곳에서 썩 좋은 아버지로 평이 나있네. 항상 가족들을 생각하는 평범한 아버지지만 이곳을 죽 따라 가다보면 아버지에 대하여 많은 것을 알게 되겠지. 아버지를 찾아 들어온 사람은 오직 자네밖에 없네. 이것은 그리 좋은 징조는 아니지만 어쨌든 들어온 자를 가로막을 수 없다는 것이 이곳의 방침이니까.”
술기운인지는 모르지만 붉은 불빛에 물든 부인은 어머니처럼 느껴졌다. 나는 술잔을 비웠다. 나는 부인에게 아버지에 대하여 그리고 끝없는 동굴 세계에 대하여 물어보고 싶었지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내가 발걸음을 옮기려고 하자 부인이 말했다.
“아버지를 찾으러 온 것은 칭찬할 일이지만 아버지를 찾게 되면 아버지에게 달려갈 수 없을 걸세. 그저 멀리서 바라보는 것이 전부일 걸세.”
부인은 술잔에 술을 따른 후 단숨에 술잔을 비웠다.
3
아버지 박물관은 하나의 문만을 가진 거대한 공이었다. 지구를 닮은 구형이었는데 어느 곳으로도 굴러가지 않았다. 문 앞에 다가가자 아버지의 이름을 입력하라는 모니터가 나타났다. 나는 아버지의 이름을 입력했다. 그러자 아버지의 얼굴이 나타나면서 맞는 지 틀리는 지를 묻는 확인버튼이 나타났다. 나는 확인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문이 열렸다.
거대한 공 안에는 아버지의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아버지가 즐겨듣던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곧 주위는 캄캄해지고 천장에 거대한 스크린에 영상이 나타났다. 아버지의 탄생의 순간을 보여주는 거대한 영상이 둥근 천장에 나타났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갓난아이의 배꼽에 달라붙은 탯줄을 한 할머니가 가위질하였다. 두 주먹을 꼭 쥐고 있는 갓난아이의 울음소리가 박물관 안을 가득 채웠다. 거대한 박물관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거대한 공은 어디론가 굴러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았다.
내 앞에 나타난 아버지가 입었던 배냇저고리에서는 아직도 갓난아이의 향기가 남아있었다. 한 여자의 풍만한 가슴의 젖꼭지를 문 아버지는 입 밖으로 젖이 새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젖꼭지를 매몰차게 빨고 있었다. 젖 먹는 소리는 규칙적인 리듬을 타고 있었다. 거대한 박물관은 어디론가 굴러가고 있었다.
갓난아이의 머리는 새까만 머리카락이 덮고 있었다. 젖꼭지를 깨문 아버지는 할머니의 품에서 벗어나 방바닥에 펼쳐놓은 이불에 눕혔다. 아버지는 젖을 달라고 목 놓아 울었다. 더 이상 젖을 먹지 못하게 하려고 젖꼭지에 빨간 머큐로크롬이 발라졌다. 갓난아이의 얼굴은 조금도 아버지를 닮아있지 않았다. 그것은 한 인간의 첫 번째 가면을 쓴 것처럼 순수하고, 연약하고, 귀엽고, 아름다웠다. 아버지는 새벽마다 울었기에 아침 일찍 일터에 나가는 할아버지를 괴롭혔다. 달래고 달래도 아버지는 새벽이 끝나는 시간까지 울었다. 아침이 밝아오자 아버지는 스르르 잠이 들었다. 나의 절반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아버지의 과거가 거대한 스크린에서 펼쳐지는 가운데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거대한 공 안에서 나는 시간을 느낄 수 없었다. 박물관은 어디론가 굴러가고 있었지만 그것은 나에게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모르고 있었던 아버지의 세계가 나에게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첫 걸음마를 시작하는 아버지의 볼에 입맞춤하는 한 어여쁜 소녀가 있었다. 나는 그 소녀가 누구일까 몹시 궁금했다. 그때 스크린은 멈추었고 그 소녀에게 클로즈업 되었다. 소녀에 대한 정보들이 하나둘 스크린에 나타났다. 소녀는 옆집에 사는 마을이장의 막내딸이었다. 소녀는 음식을 들고 아버지 집에 왔다가 아버지를 본 것이었다. 아버지는 소녀의 입맞춤이 싫은 듯 얼굴을 찡그렸다.
어두워졌다 밝아지는 영상은 아버지에 대하여 하나도 빠짐없이 보여주었다. 그것은 지루하지 않았으며 순간순간마다 환희의 눈물을 두 눈에 맺히게 하였다. 어두운 골목길에서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라이터를 꺼내 담배에 불을 붙이며 입에 물었다. 어린 소년은 콜록거리며 자신의 주위에 맴도는 담배연기를 사라지게 하려고 손을 휘저었다.
어린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동전들을 자기가 보관하고 있겠다며 자신의 주머니에 넣은 다섯 살 난 아버지는 아이들이 노는 사이에 만화집으로 달려가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고 밤이 될 때까지 만화책을 보았다. 아버지는 밤하늘에 뜬 달을 바라보며 집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집에는 회초리를 든 할머니가 기다리고 있었다. 흐르는 강물처럼 흘러가는 영상은 조금도 멈추지 않았다. 빛과 어둠이 뒤섞인 영상을 바라보며 나는 나의 절반은 결코 사라질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4
쾌활하면서 똑똑하였던 아버지는 언젠가부터 말수가 적어지고 공부에 흥미를 잃어가고 있었다. 그것은 할아버지의 사업실패가 원인이기도 하였지만 무엇보다 할머니의 가출이었다. 할아버지는 술과 도박으로 집에 있는 시간이 적었다. 아버지는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가지고 노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창문에 셀로판지를 대고 방바닥에 나타난 빨갛고 노란 빛의 물결을 좋아했다. 그리고 노란 고무줄을 이빨로 살짝 물은 뒤 팽팽하게 만든 후 튕기면서 나오는 그 청아한 소리에 빠져 있곤 하였다. 어느 날은 할아버지가 먹다 남긴 막걸리를 컴컴한 부엌에서 마시다 술에 취해 술주정을 하였다. 노란 고무줄이 튕겨지는 소리는 방안에 홀로 앉아있는 아버지의 가슴으로 흘러들어가고 있었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슬픔의 진동을 느꼈다.
아버지가 콜록거리며 피우다 만 담배와 라이터 그리고 만화책과 셀로판지, 노란 고무줄 중에서 나는 노란 고무줄을 입에 물었다. 그리고 지그시 이빨로 물고서 한쪽 손으로 잡아당겨 팽팽하게 하였다. 아버지가 했던 것처럼 팽팽한 고무줄을 당기자 거문고나 가야금에서 들었던 그 울림이 이빨과 목안과 머리와 가슴까지 전달되었다. 나는 아버지가 마셨던 막걸리를 마셔보았다. 셀로판지를 눈에 대고 바라보았다.
문득 이 아버지 박물관은 누가 만들었을까, 하고 생각하였다. 그러자 스크린에 아버지의 얼굴이 나타나며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 박물관은 아버지들이 만들었단다. 잠들지 못한 우리들은 땅을 파다 어느 한 지점에서 만나게 되었고 술이나 마시며 노래나 들으며 시간을 보내다 지상으로 올라가곤 하였지.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게 되었단다. 우리는 수많은 보석들을 발견하였고 보석을 팔아 돈을 쌓아놓기도 하였지. 그러나 그것이 우리를 만족시켜주지 못했단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들의 세계를 만들기로 하였고 아버지 박물관을 만들게 된 것이다. 우리들의 과거와 우리들의 시간들을 추억하려는 것도 박물관을 만든 목적 중에 하나지만 무엇보다 우리 자신에 대하여 알고 싶었단다. 우리는 이 거대한 박물관에 들어와 자신들을 바라보았단다. 그리고 우리의 세계가 굴러가는 소리를 들었단다. 이 세계는 지금 가장 깊은 곳으로 굴러가고 있단다. 아주 고요한 강물처럼 가장 깊은 곳으로 흘러가고 있단다.”
아버지의 목소리는 멈추었다. 스크린에 나타났던 아버지의 얼굴도 사라졌다. 거대한 공도 멈추었다.
“아버지! 아버지 어디에 계시나요?”
나의 목소리에 아랑곳하지 않고 거대한 박물관은 다시 굴러가기 시작했다. 거대한 스크린에 아버지의 영상이 흘러갔다. 가출하였던 할머니의 손에 이끌려 기차에 오른 아버지는 점점 멀어지는 가을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버지는 할머니와 함께 도시의 작은 월세방에서 지내며 학교에 다녔다. 할머니는 이른 새벽시장에 나가 장사를 하였고, 아버지는 학교에 다녀온 후 빈 방에서 지내다 할머니가 장사하는 시장으로 달려갔다. 생선장사하는 할머니와 함께 늦은 밤 집으로 돌아오곤 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는 할머니에게 말했다.
“나는 빨리 어른이 될 거야.”
아버지의 목소리는 캄캄한 길바닥에 나뒹굴고 있었지만 나의 귀에는 생생하게 들렸다. 아버지는 열심히 공부했다. 상장을 들고 시장으로 달려가는 아버지의 얼굴은 무척 행복해 보였다. 이곳저곳으로 이사를 다니며 아버지는 중학생이 되었고, 자전거에 신문을 싣고 새벽길을 달렸다. 산동네로 이사 온 할머니는 두부를 만들어 팔았다. 새벽 4시에 일어난 할머니는 간밤에 물에 담가두었던 콩을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날카롭게 돌아가는 분쇄기에 집어넣었다. 흰 우윳빛 콩가루는 장작불에 달구어진 커다란 쇠솥에서 부글부글 끓어 넘쳤다.
할머니는 강했지만 여자였다. 아버지는 콩 가는 소리를 듣고 일어나 할머니를 도왔다. 할머니는 좀 더 자라고 말했지만 아버지는 마른 장작을 불붙은 아궁이에 집어넣었다. 이른 아침이면 할머니가 만든 우윳빛 두부를 팔려고 한 아줌마가 대야를 들고 나타났다. 아버지는 할머니를 위하여 진한 커피 한 잔을 탔다. 아버지는 마루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할머니를 바라보며 학교로 달려갔다.
5
거대한 공이 굴러가는 소리는 들릴 듯 말 듯 하였다. 어디를 향하여 굴러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내가 바라보고 있는 거대한 스크린의 세계는 두 눈에 맺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가슴에 맺히고 있었다. 아버지의 비밀은 나의 비밀이 되었고 나는 그 비밀을 하나하나 해독해 나갔다.
고등학교 3학년의 가을은 아버지에게 몹시도 힘든 시간이었다. 아버지를 위해 마련된 작은 골방은 늦은 밤까지 백열전구가 꺼지지 않았다. 산동네 사람들은 아버지에게 많은 기대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할머니의 기대는 침묵 속에 가려져 있었지만 아궁이의 불꽃은 더욱더 활활 타올랐다. 새벽하늘로 피어오르는 뿌연 연기는 마치 길 잃은 새들처럼 날아갔다.
학력고사를 며칠 앞둔 어느 날 할아버지가 나타났다. 술에 취한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만든 두부를 발로 으깨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학교에서 돌아온 아버지는 방에 누워있는 할아버지를 보았고, 할머니의 멍든 얼굴을 보았다. 할아버지는 변한 것이 없었다.
할아버지와 밥상에 앉은 아버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시험을 보러가던 날은 몹시 추웠다. 아버지는 마지막 시험까지 다 치르고 나왔지만 돌아오는 길에 쓰러졌다. 밤이 되자 눈이 내렸다. 병원에 입원한 아버지는 3일 동안 누워 있었다. 할아버지는 할머니의 통장과 도장을 들고 집을 나갔다. 아버지가 아궁이 옆에서 애지중지 기르던 새끼고양이를 술집에 판 뒤였다. 아버지는 산동네 사람들이 갈망하던 대학에 들어가지 못했다. 재수를 하라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아버지는 담임선생님이 추천하는 대학에 들어갔다. 학비는 담임선생님이 대신 내 주셨다. 아버지는 입학과 함께 과외를 했다. 그리고 사랑을 했다.
아버지가 사랑한 여자는 어머니가 아니었다. 그녀는 산동네 옆 아파트 단지에 사는 대학생이었다. 학교축제에서 만난 여자였다. 5월의 교정에 핀 벚꽃이 하나둘 휘날리는 밤에 아버지와 여자는 첫 키스를 하였다. 그리고 캄캄한 영화관에서 두 번째 키스를 하였다. 아버지는 행복해 보였다.
할머니는 두부를 만드는 동시에 종이봉투를 풀칠했다. 여자 두 명이 할머니를 도와 두부를 만들었다. 두부는 잘 팔려나갔다. 등산객들도 할머니 두부를 찾아왔다.
대학교 2학년 봄이 되자 아버지는 영장을 받았다. 입대하던 날 할머니는 아버지와 함께 강원도 춘천으로 갔다. 학과 친구들과 사랑하던 여자도 함께 동행 했다. 할머니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다만 사랑하던 여자가 눈물을 보였다.
아버지는 군에서 사회에 있을 때 사람을 죽이고 들어온 자를 만났다. 술에 취할 때마다 자신이 사회에 있을 때 한 일을 고해성사하듯이 고백하는 자였다. 아버지는 지오피에 올라 거의 1년 동안을 고요와 고독의 세계를 바라보며 살았다. 눈에 덮인 산은 무척 아름다웠다. 아버지는 30개월 동안 군에 있었다. 군에 있을 동안 아버지에게 도착한 편지는 사랑하는 여자가 보낸 것이 전부였다. 할머니는 글을 쓰지 못했다. 상병 휴가 때 아버지는 사랑하는 여자와 한 여관에 들어가 사랑을 나누었다. 아버지는 사랑하는 여자에게 미래의 반지를 손가락에 끼워주었다.
제대하여 집에 돌아온 아버지 품에 한 사내아이가 안겨졌다. 할머니는 아무 말 없이 아버지의 아들을 품고 살아왔다. 그 사내아이는 나였다. 아버지가 사랑하였던 여자가 할머니에게 남기고 간 선물이었다. 나의 어머니는 낙태를 생각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며 할머니에게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나의 어머니는 편지 한 통을 남기고 산동네를 떠났다. 나는 믿을 수 없었다. 나는 캄캄한 어둠에 사로잡혔다. 한 통의 편지가 내 손에 잡혀졌다. 나는 오래된 편지봉투에서 편지지를 꺼내 읽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해 미안하군요. 내 몸에서 자라고 있는 생명을 지워버리려고 하였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었어요. 가족들의 반대가 심했어요. 미혼모센터에서 아이를 낳았어요. 당신을 꼭 닮았어요.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되었어요. 저를 용서해 주세요. 당신은 좋은 아버지가 될 거예요. 저는 나쁜 엄마가 되겠지요.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나는 한참동안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스크린도 멈춘 채 더 이상 새로운 영상은 나타나지 않았다. 거대한 공은 어디론가 굴러가고 있었다. 내가 모르고 있었던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참으로 알 수 없는 공허 속으로 몰아넣었다.
스크린에 영상이 흐르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여자가 살았던 아파트를 찾아갔다. 그리고 며칠 뒤 눈이 내리는 밤에 또다시 찾아갔다. 아파트에는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아버지는 대학에 들어가지 않았다. 술을 마시며 하루하루를 살았다. 산동네 사람들은 아버지를 바라보며 혀를 찼다. 할머니는 아침에 만든 순두부를 술에서 덜 깬 아버지에게 먹였다. 아버지는 할머니 일을 도우며 살았다. 아버지는 아버지를 좋아하였던 산동네의 한 처녀와 결혼했다. 할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는 두부를 만들며 살았다. 아버지는 일요일이면 산에 올랐다.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다. 나는 아버지를 따라 산에 오르곤 하였다. 아버지는 나의 손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사랑은 이런 것이다.”
스크린은 멈추었다. 거대한 공도 멈추었다. 나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6
다시 거대한 공이 구르기 시작했다. 스크린에 새로운 영상이 비쳤다. 아버지는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두부 만드는 일을 그만 두었다. 아버지는 집보다는 밖으로 돌아다니며 내가 잠든 사이에 들어왔다. 아버지는 내가 사달라는 것은 모두 사주었다. 어머니는 점점 쇠약해져갔다. 아버지는 나를 누구보다 사랑했다. 어머니보다 나를 더욱더 사랑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싸우는 소리가 종종 들렸다. 나는 아버지가 사주신 장난감을 가지고 놀면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싸우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울고 있는 어머니에게 아버지가 사주신 장난감을 가지라고 말했다. 어머니는 나에게 화를 내며 장난감을 던졌다. 그러나 잠시 뒤 어머니는 나를 끌어안으며 자신을 용서해 달라고 울었다. 어머니가 던진 장난감은 부서져 있었다. 어머니의 몸은 병원을 들락거리기 시작했다.
나를 길러주신 어머니가 나의 어머니라고 믿었다. 이것은 내가 살아오는 동안 변함없는 진실이었다. 어머니는 내가 자신의 친아들이 아니라고 미워하거나 학대하지는 않았다. 어머니의 몸은 그리 썩 좋은 상태는 아니었지만 나에 대한 사랑은 식지 않았다. 나는 그럭저럭 사회에 잘 적응하였다. 대학에도 아무런 걱정 없이 들어갔고 직장도 얻게 되었다. 산동네가 재개발 지역으로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우리는 더 좋은 환경에서 살게 되었다. 아버지는 말이 없었다. 새 아파트에 들어가고 1년 정도가 지난 어느 날 어머니는 시름시름 앓더니 병원에 입원하셨다. 위암 말기라는 진단이 나왔고 시한부인생이 되었다. 나는 아버지에게 뭐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아버지에게는 말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며칠씩 집에 들어오지 않을 때가 많아졌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아버지는 더더욱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직장에 다니며 직장동료들과 어울려 지냈다. 아버지가 집에 들어오든 그렇지 않든 나는 상관이 없었다.
그 시간동안 아버지는 무엇을 하시며 살았는지 알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채 나는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스크린에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 곡괭이질 소리만이 들렸다. 누군가 헉헉거리며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누구인지 모르는 한 인간의 거친 숨소리는 거대한 박물관 안을 가득 채웠다. 한참을 듣고 있다 보니 그 거친 숨소리의 주인공이 아버지라는 생각에 다다랐다. 무엇을 위하여 왜 아버지는 그토록 어둠속에서 곡괭이질을 하고 있을까?
스크린은 오랫동안 검게 물들어 있었다. 그리고 한 인간의 끊임없는 곡괭이질과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검은 스크린 속에서 남자들의 노래 소리가 들렸다. 술을 마시며 노래를 부르는 남자들의 목소리는 광란에 가까웠다. 술병들이 깨지는 소리와 남자들끼리 치고 박는 소리 그리고 누군가 그만해! 라는 거칠고 커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촛불을 켰다. 촛불에 드러난 세계는 지옥과 같았다. 수십 명의 남자들이 검게 물든 작업복을 입고 얼굴은 검게 물들어 있었다. 그곳에 아버지가 있었다. 아버지는 코피가 흐르고 있었다. 손에는 부러진 곡괭이 자루를 붙잡고 있었다. 누군가 쓰러진 채 누워 있었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촛불이 어디론가 걸어갔다. 그러자 남자들은 하나둘 어디론가 걸어갔다. 스크린은 검게 물들었다.
7
거대한 박물관은 어둠으로 가득 찼다. 거대한 공은 굴러가고 있었다. 나는 쪼그리고 앉아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어디론가 굴러가는 소리만을 듣고 있었다. 아버지는 언제나 말이 없었다. 아버지가 나가고 들어오는 것에 나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나는 나의 일에만 집중했고 나의 삶을 즐겼다.
거대한 박물관이 서서히 밝아졌다. 그리고 스크린에 아버지의 얼굴이 나타났다. 아버지는 몹시 지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거대한 박물관이 어디로 굴러가고 있는지 나는 모른단다. 이 거대한 세계는 굴러가다 잠시 멈추었다 다시 굴러간단다. 왜 그러는지 나는 모른단다. 내가 아버지라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었단다. 그리고 내가 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내가 원망스러웠단다. 내가 사랑했던 여자와 함께 살 수 없다는 것은 슬픈 일이었다. 그래서 내 어머니가 싫었고 나는 너 또한 싫었다. 나는 나 자신을 찾기 위해 땅을 파고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아버지라는 세계에서 벗어나려는 것 같았지만 그것은 아버지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나는 아버지다. 나는 너의 아버지다. 그리고 지상이든 지하든 나는 아버지다. 아버지는 남자의 길이고 남자의 세계이다. 그러나 그 길은 그리 즐거운 것이 아니다. 네가 이곳에 들어와 나를 보고 있지만 나는 너를 만날 수 없단다. 나는 이제 이 아버지의 세계에서 영원히 살 계획이다. 다시는 지상으로 올라가지 않을 것이다. 지상의 삶은 그림자에 불과할 뿐 나에게 이곳의 삶이 중요하다. 아버지의 삶에는 어긋나는 짓이지만 나는 더 이상 지상으로 올라가고 싶지는 않다. 왜냐하면 나는 너를 믿기 때문이다. 너는 너의 진정한 어머니를 찾아 미국으로 갈 수도 있다. 나는 너에게 자유를 주고 싶다. 아버지가 없다하여도 너는 살 수 있을 것이다. 나를 더 이상 찾지 않아도 좋다. 나는 이곳 어딘가를 굴러다니고 있을 것이다. 너는 지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곳이 진정한 너의 삶이기 때문이다.”
거대한 공이 멈추었다. 그리고 문이 열렸다. 나는 한참동안 그대로 서 있었다. 그러나 나는 문으로 다가가 거대한 공에서 나왔다. 거대한 공은 다시 어디론가 굴러갔다. 거대한 아버지 박물관은 사라졌다. 나는 어둠을 따라 걸었다. 그곳이 지상으로 나가는 길인지 아닌지도 모른 채 어둠을 따라 걸어갔다. 나는 거대한 공이 굴러간 곳을 향해 소리쳤다.
“아버지!”
내가 소리친 목소리는 여러 가지의 메아리가 되어 되돌아왔다. 나는 걸었다. 아버지가 선택한 길은 아버지의 길인 동시에 그것은 아버지의 삶이었다. 나는 박물관에서 들었던 가요를 흥얼거렸다. 가사도 없는 흥얼거림이었지만 그것은 아버지가 좋아했던 노래였다. 노랫소리는 커졌다 작아졌다. 나는 웃었다. 노래는 멈추었다. 나는 아버지를 잃었다.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붉은 불빛이 보였다. 내가 이곳으로 들어올 때 만났던 부인이 보였다. 부인은 술잔에 술을 따랐다.
“아버지는 만났나?”
나는 말없이 술을 마셨다.
“엉뚱한 질문을 하였군. 아버지는 보았지만 다가갈 수 없었을 거야. 아니지. 아버지는 분명히 보이지만 그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지. 이곳의 아버지들은 더 이상 아버지들이 아니니까. 이제 이것도 마지막이 되겠군. 지상에 올라가면 아주 훌륭한 아버지가 되라고. 이곳에는 들어오지 마. 무슨 일이 있어도 이곳을 찾지 않는 것이 좋을 거야. 아버지가 되려면 이곳보다는 지상이 좋은 곳이지. 뭐, 할 말이라도 있나?”
나는 술잔을 비우고 다시 걸었다. 어둠뿐인 세계였지만 나는 그 어둠이 그리 슬퍼 보이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가 누웠던 방으로 올라왔다. 그리고 장롱을 있었던 자리에 놓은 후 아버지 방에 잠시 앉았다. 아버지가 누웠던 자리에는 이불이 깔려 있었다. 그리고 펼쳐진 신문과 신문 옆에는 안경이 놓여 있었다. 나는 안경을 끼고 신문을 바라보았다. 신문에는 한 아버지의 자살에 대한 기사가 실려 있었다. 고칠 수 없는 병든 몸으로 가족들에게 부담이 된다며 목매달아 죽은 기사였다. 나는 아버지가 누웠던 자리에 가만히 누웠다.
8
나는 직장에 들어가 열심히 일했다. 그리고 결혼도 하였다. 아들도 얻었다. 아들 녀석은 나를 닮았다. 일요일마다 우리는 산에 올랐다. 미국에 간 어머니를 만났다. 어머니는 다른 남자와 가정을 이루고 있었다. 어머니는 행복해 보였다. 어머니는 호텔에 머물고 있던 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시 한 번 더 보고 싶다고 어머니는 말했다. 나는 어머니에게 행복하게 잘 살라고 말했다.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건강하라고 말했다.
나는 열심히 살았다. 그 결과인지는 모르나 나는 승진도 하였다. 나는 아내와 아들에게 최선을 다했고, 아내와 아들은 나에게 훌륭한 아버지라고 크리스마스카드에 적어 주었다. 나는 아버지가 사라진 뒤로 좋은 아버지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어느 날 밤, 나는 쉽게 잠들지 못했다. 아내와 아들이 언어연수여행을 떠난 밤이었다. 나는 이리저리 뒤척이다 불을 켰다. 신문을 펼치고 이곳저곳을 잃어 내려갔다. 한 부분에 한 일용직 아버지의 자살 기사가 실려 있었다. 장애아들에게 복지혜택을 베풀어 달라는 유서를 남기고 목숨을 끊은 아버지의 기사였다. 나는 자리에 누워있다 방바닥에 귀를 대어 보았다. 무엇인가 굴러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아버지를 불렀다.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