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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 1984
박용래 시인의 ‘강아지풀’을 기억하시나요? “다 두고 이슬단지만 들고간다 (…) 녹물이 든 오요요 강아지풀”로 끝나는 애잔하고 슬픈 시. 산책 중에 강아지풀을 보게 되면 “오요요”라고 말해 보게 됩니다. ‘강아지풀’과 함께 제가 사랑한 시입니다. ‘월훈’은 달무리라는 뜻이지만, 뜻을 몰랐다 해도 상관없습니다. 한겨울 외딴 마을 고독한 노인의 저녁 즈음. 시인이 펼쳐놓는 단어들을 구절구절 귀 기울여 따라가다 보면, 말이 가진 아름다움이란 게 풍경을 고독히 오래 들여다본 이의 세심한 필사에 다름 아니구나,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풍경을 낭비하며 사는가, 생각하게도 됩니다. “첩첩 산중에도 없는 마을이 여긴 있”다고 할 때 ‘여기’는 어디일까요. 거기는 아마도 시인의 마음 속. 오랜 옛날이야기가 살아있는 따뜻하고 고독한 마음 저 깊은 곳의 마을. 2연과 3연을 거듭 읽어봅니다. 적절한 쉼표와 반복이 만드는 가없는 음악. 직설로 말하면 ‘독거노인’의 처량이 되겠으나, 시어의 가없는 음악 속에 독거하는 노인은 존재의 고독이 가진 어떤 품위랄지, 신비랄지 하는 것을 불러일으킵니다. 애잔하고 따스한 이런 환상성이 때로 저를 위로합니다. 오요요― 위로합니다. / 김선우 시인
갱(坑) 속 같은 마을의 외딴집 노르스름하게 익은 '모과(木瓜) 빛' 창문 안에서는 노인이 혼자 '기인 밤'을 견뎌내고 있다. 밤중에 홀로 깨어나 무나 고구마를 깎는 노인의 기침 소리와 겨울 귀뚜라미 소리는 사멸을 향한 이중창이다.
'모과 빛' 창문에 짚오라기의 설렘과 이름 모를 새들의 온기가 따뜻하게 어룽거리고, '월훈(달무리)'이 지고 함박눈이 들이친다. 서울로, 서울로, 향했던 우리 농촌의 뒷모습이고 매일을, 매일을, 정신없이 달려왔던 우리 노년의 풍경이다.
독거·기다림·기침 소리의 '늙음 3종 세트'에 더해진, 월훈·함박눈·귀뚜라미 소리의 '겨울밤 3종 세트'가 깊고 그윽하다. 1970년대 유행했던 영사운드의 '달무리'라는 노래가 떠오른다. 적막한 밤하늘에 빛나던 달이~. / 정끝별 시인ㆍ이화여대 교수
연민의 시인 박용래의 시편입니다. 월훈의 우리말은 달무리. 첩첩산중, 깊은 골짜기, 모과빛 등불, 창호지 문살…. 옛날을 떠올리게 하는 이름들이지요. 시 속의 풍경은 달무리가 어리는 시공간. 세상 모든 만물에 “귀를 모으고 듣”는 이가 여기 있습니다. 하물며 인간의 역사를 다 듣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마음이 필요할까요. 함부로 말할 수 있는 인생이란 없는 것.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숨을 죽이고 생각하”는 일. 또는 마음의 가장 안쪽까지를 고요하게 들여다보는 일. 새해 “밖에는 눈발이라도 치는지, 펄펄 함박눈이라도 흩날리는지, 창호지 문살에 돋는 월훈(月暈)”. 가만히, 저만치 들려오는 새로운 소식에 귀와 마음을 기울이는 나날.
/ 이은규 시인
첩첩 산중에도 없는 마을은 지문처럼 찍어놓은 마음의 등고선을 따라가야만 나오는 마을이다. 마음이 산과 계곡을 이룬 령에 침 넘어가듯 꼴깍, 해가 지면 그 해를 받아 집집이 불을 켜는 마을. 이슥토록 켜진 모과빛 등불도 따듯하고, 처마깃을 파고든 새들의 겨울나기를 걱정하는 노인의 마음도 따듯하다. 새들이 놀래 달아나지 않도록 숨을 죽이고 귀를 모으는 노인처럼 나직나직 함박눈이 내리고 달그림자가 진다. 여기서 아무도 찾지 않는 산골의 고독은 찾아가야 할 아늑한 어떤 풍경으로 바뀐다. 참된 고독은 짚오라기 같이 보잘 것 없는 것을 통해서도 나를 둘러싼 세계와 설레이며 교감할 줄 아는 것. 그런데, 동거해온 귀뚜라미만 유난스레 울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벽이 무너져라 떼를 지어 통곡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아무래도 마음의 지도를 밝혀주던 불이 한 등 까무룩 꺼져버렸나 보다. 아는지 모르는지 기침 소리도 나지 않는 지붕 위로 무심한 함박눈만 쌓인다.
/ 손택수 시인
박용래의 시에 나타나 있는 자연은 있는 그대로의 자연이 아니라, 시인의 정서와 유기적인 관련을 맺고 있는 관념적인 것이다. 이 시의 배경도 현실 속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이라기 보다도 다분히 시인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는 인상이 강하다. 그러나 그러한 관념의 세계가 시인의 애상적 정서와 결합하면서 또 그것을 향토적 서정으로 노래하면서 우리에게 매우 친숙하고도 생생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첩첩 산중에도 없는 마을이 여기엔 있다는 서두부터 독자를 환상의 세계로 인도한다. 그러나 그 세계는 아름답고 휘황찬란한 동화 속의 세계가 아니라, 현대 문명과 동떨어진 우리의 옛 고향의 모습을 상기시키고 있어서 전혀 낯설지 않다. 허방다리를 들어내면 보이는 조그맣고 갱 속 같이 파묻힌 마을, 그 곳에서도 시인의 시선은 홀로 사는 노인의 고독한 삶에 집중된다.
외딴집에 홀로 사는 노인은 깊은 밤에 잠이 깨어 무나 고구마를 깎지만, 실제로는 누군가 찾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리며 바람 소리에 귀를 귀울리는 데 신경을 모은다. 이러한 정서는 마치 '오마지 않은 이가 일도 없이 기다려 진다'는 시조의 그것과 적절히 부합되는 것이다. 노인의 청각은 짚단과 짚오라기의 서걱거림에서 처마깃의 이름 모를 새의 자그마한 움직임에까지 이어지지만 자기를 찾아올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에 문득 통곡한다. 이러한 청각의 집중은 노인의 외로움과 그리움의 깊이를 더욱 증폭시켜 주는 한편, 시인의 섬세한 감각을 알려 주는 징표로 기능한다.
마지막 연에 등장하는 겨울 귀뚜라미가 벽이 무너지라고 우는 것을 노인의 통곡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특히 벽이 무너지라 우는 귀뚜라미를 겨울 귀뚜라미라고 표현한 데서 동료들과 헤어져 외톨이가 된 귀뚜라미의 신세와 가족과 떨어져 홀로 사는 노인의 처지가 교묘한 일치를 이룬다. 그러니까 '떼를 지어 웁니다'라는 표현의 의미는 실제 떼를 지어 운다는 것이 아니라, 밤이 정적을 뚫고 울리는 귀뚜라미의 소리가 그만큼 크게 들린다는 것을 뜻하며, 그것은 참고 참았던 노인의 내면적 고독과 그리움이 단숨에 터져 나온 통곡과도 같은 것이다.
/ 김태형ㆍ정희성 엮음, 『현대 시의 이해와 감상 1ㆍ2』, 문원각, 2003
향토적인 생활 정서에 뿌리박고 있는 박용래의 시는 문명의 때[垢]가 묻지 않은 토속 세계를 통하여 삶의 무상함을 정지적(靜止的) 언어로 표현한다. 형식면에서는 주로 시각적이거나 청각적인 비유에 의존하고 있으며, 대상을 형상화시키는 데 그가 즐겨 사용한 방법은 '소묘법'이다. 비록 단조로운 단색이기는 하지만, 그 속에서 간결하고 날카로운 소묘는 회상물의 대상을 객관화시키는 데 성공하고 있다. 그의 많은 시가 정상적인 구문(構文)보다 명사나 명사형 어미로 시행을 끝맺고 있는 것도 그의 소묘적 방법의 한 특색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행간의 여백을 중시하는 것도 바로 그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이 시는 겨울 산촌의 외딴집에서 홀로 사는 노인의 고독과 그리움을 노래하고 있는 작품이다. 한자어를 배제한 토속어와 경어체 구문의 사용, 그리고 명사 종결 어구를 삽입하는 등 다양한 표현 방법을 통해 산촌의 적막함과 노인의 고독감의 깊이를 더해 주는 한편, 향토적 정서에 바탕을 둔 비유와 다양한 감각의 이미지, 쉼표와 의태어의 적절한 사용은 이 시의 주제를 효과적으로 형상화시키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특히, 끝 부분에서 나타나는 귀뚜라미로의 감정 이입은 노인의 고독을 심화시키는 기능을 갖고 있다. 또한, 이 시는 연 구분이 없는 산문시 형태로, 화자는 원경에서 근경으로 시선을 이동하며 시상을 전개시키고 있다.
이 시는 먼저 '첩첩 산중에도 없는 마을이 여긴 있'다는 다소 환상적인 세계로 시작하고 있다. 그러나 그곳은 단순히 아름답고 신비로운 동화속 같은 세계가 아니라, 현대 문명과 동떨어진 원시적 토속 세계이다. 노인이 살고 있는 그 곳은 '허방다리 들어내면 보이는' 조그맣고 갱 속같이 파묻힌 마을로, 노루꼬리만큼 짧은 겨울해가 저물면 각 집들은 봉당에 불을 매단다. 그런 마을의 한구석에 위치한 노인의 '외딴집' 창문에 이슥토록 켜진 불빛은 마치 잘 익은 '모과빛' 같이 싱그럽기만 하다.
깊어가는 겨울밤, 노인은 문득 잠에서 깨어나 시장기를 느끼고는 무나 고구마를 깎으며 행여 누군가 찾아 주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다림으로 바람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노인은 짚단과 짚오라기의 서걱거림에서부터 처마깃의 이름 모를 새의 작은 날개짓에 이르기까지 청각을 집중해 보지만, 자기를 찾아 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그 외로움에 절망해 버린다. 노인의 이러한 행위는 그의 외로움과 그리움의 깊이를 증폭시켜 주는 동시에, 시인이 가지고 있는 섬세한 감각을 드러내는 징표로서의 기능을 갖는다.
한동안 계속되던 노인의 밭은 기침 소리가 끝나자, 기다렸다는 듯 벽 속에서는 겨울 귀뚜라미가 떼를 지어 벽이 무너지라고 울어 댄다. 여기서 '겨울 귀뚜라미'는 동료로부터 떨어져 나와 외톨이가 된 귀뚜라미를 일컫는 것이며, 떼를 지어 벽이 무너지라고 우는 것은 겨울밤의 고요를 깨는 귀뚜라미의 울음 소리가 그만큼 크게 들린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외톨이가 된 귀뚜라미와 가족과 떨어져 홀로 살고 있는 노인의 처지가 교묘히 일치하게 됨으로써 결국은 귀뚜라미는 노인의 감정이 이입된 사물임을 알 수 있다. 그토록 서럽게 울어 대는 귀뚜라미처럼 노인도 당장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은 고독감과 함께 산촌의 적막함이 잘 나타나 있다. 이 때, 문밖에선 가는 눈발이 치는지 또는 함박눈이 한바탕 뿌려주는지, 어디선가 희끄무레한 달무리가 떠오르는 풍경을 제시하면서 시상을 끝맺고 있다.
/ 양승준ㆍ양승국 공저, 『한국현대시 400선-이해와 감상 1ㆍ2』, 태학사, 1996
박용래 시 모음 박용래 시인(1925년 ~ 1980년). 충남 강경. 강경상고 졸업. 1955년[현대문학]으로 등단. 현대시학 작품상 수상. 시집 [싸락눈] [먼 바다] [백발의 꽃대궁] [강아지풀] 등 다수. 박용래는 '눈물의 시인'이라고 할 만큼 그 의 시 편 편마다 눈물이 흡뻑 배어 있다. 그 를 세상에 존재케 했던 것이 눈물이었던 만큼 눈물은 박용래 자신의 존재성이었던 것 이다. 그러므로 그의 작품에서 '눈물'은 삶의 과정을 시적으로 형상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 저녁 눈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말집 호롱불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조랑말 발굽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여물 써는 소리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변두리 빈터만 다니며 붐비다 이 시의 배경은 농촌의 겨울 저녁이다. 농촌의 겨울 저녁은 유난히 빨리 찾아오는데 그것도 늦은 저녁때 눈이 온다. 1, 2, 3연의 구체적인 공간은 농촌의 마구간이다. 마구간 안에 서도 "말집 호롱불", "조랑말 말굽 밑", "여물 써는 소리"에 우 리의 시청각적 감각은 모아진다. 그런데 그 감각은 대체로 바 백게 다가온다. 늦은 저녁때 마구간에 '호롱불'이 켜져 있다 는 것은 무엇인가 아직도 할 일이 남아 있다는 것을 의미한 다. 뒤의 문맥으로 보아 그 할 일이란 말의 저녁을 준비하는 일이다. ▶소나기 누웠는 사람보다 앉았는 사람 앉았는 사람보다 섰는 사람 섰는 사람보다 걷는 사람 혼자 걷는 사람 보다 송아지 두, 세 마리 앞세우고 소나기에 쫓기는 사람 이 시는 사람들이 소나기에 쫓기는 상황을 점층법을 사용하 여 작품화하고 있다. 소나기에 쫓기는 상황이기 때문에 전체 적으로 시상의 전개가 빠르고, '보다'라는 비교격 조사를 사 용하여 "앉았는 사람", "섰는 사람", "혼자 걷는 사람", "송아 지 두, 세 마리 앞세우고 쫓기는 사람"의 순으로 점층적 대비 를 보여주고 있다. 시인은 이러한 부류의 사람들을 시상이 전 개될수록 더 다급하고 쫓기는 것처럼 설정하고 있다 ▶ 풀꽃 홀린 듯 홀린 듯 사람들은 산으로 물구경가고 다리밑은 지금 위험수위 탁류에 휘말려 휘말려 뿌리 뽑힐라 교각의 풀꽃은 이제 필사적이다 사면에 물보라치는 아우성 사람들은 어슬렁 어슬렁 물구경 가고 이 시는 자연과 인간의 불화(ㅈ)를 잘 보여주고 있다. "위 험수위"의 다리 밑에는 지금"탁류에 휘말려" 뿌리 뽑혀 죽기 직전인 '풀꽃'이 생명에의 집착으로 "아우성" 치고 있다. 이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할 사람들은 무관심한 채, 무엇에 "홀 린 듯" "어슬렁 어슬렁 물구경"을 갈 따름이다. 그것도 풀꽃 이 살려달라고 필사적으로 외치는 다리 밑 쪽이 아니라 그와 정반대의 방향인 산으로 가버린다. 이것은 무분별한 산업화로 인해 풀꽃 즉, 자연이 심각하게 파괴되고 있는데도 사람들 은 무관심한 채, 넘쳐 나는 산업 문명의 물질을 즐기고만 있 다는 것이다 ▶ 점묘(點描) 싸리울 밖 지는 해가 올올이 풀리고 있었다. 보리 바심 끝마당 허드렛군이 모여 허드렛불을 지르고 있었다. 푸슷푸슷 튀는 연기 속에 지는 해가 이중으로 풀리고 있었다. 허드레, 허드레로 우는 뻐꾸기 소리 징소리 도리깨 꼭지에 지는 해가 또 하나 올올이 풀리고 있었다 ▶ 그 봄비 오는 봄비는 겨우내 묻혔던 김칫독 자리에 모여 운다 오는 봄비는 헛간에 엮어 단 시래기 줄에 모여 운다 하루를 섬섬히 버들눈처럼 모여 서서 우는 봄비여 모스러진 돌절구 바닥에도 고여 넘치는 이 비천함이여. ▶ 산견(散見) 해종일 보리 타는 밀 타는 바람 논귀마다 글썽 개구리 울음 아, 숲이 없는 산(山)에 와 뻐꾹새 울음 낙타(駱駝)의 등 기복(起伏) 이는 구릉(丘陵) 먼 오디빛 망각(忘却). ▶ 제비꽃 부리 바알간 장 속의 새, 동트면 환상의 베틀 올라 금사(金絲), 은사(銀絲) 올올이 비단올만 뽑아냈지요, 오묘한 오묘한 가락으로. 난데없이 하루는 잉앗대는 동강, 깃털은 잉앗줄 부챗살에 튕겨 흩어지고 흩어지고, 천길 벼랑에 떨어지고, 영롱한 달빛도 다시 횃대에 걸리지 않았지요. 달밤의 생쥐, 허청바닥 찍찍 담벼락 긋더니, 포도나무 뿌리로 치닫더니, 자주 비누쪽 없어지더니. 아, 오늘은 대나뭇살 새장 걷힌 자리, 흰 제비꽃 놓였습니다. ▶ 해바라기 단장(斷章) 해바라기 꽃판을 응시한다 삼베올로 삼베올로 꽃판에 잡히는 허망(虛妄)의 물집을 응시한다 한 잔(盞) 백주(白酒)에 무우오라기를 씹으며 세계(世界)의 끝까지 보일 듯한 날. ▶ 천(千)의 산(山) 댕댕이 넝쿨, 가시덤불 헤치고 헤치면 그날 나막신 쌓여 들어 있네 나비 잔등에 앉은 보릿고개 작두로도 못 자르는 먼 삼십리 청솔가지 타고 아름 따던 고사리순 할머니 나막신도 포개 있네 빗물 고인 천(千)의 산(山) 겹겹이네. ▶ 설야(雪夜) 눈보라가 휘돌아간 밤 얼룩진 벽에 한참이나 맷돌 가는 소리 고산 식물처럼 늙으신 어머니가 돌리시던 오리오리 맷돌 가는 소리 ▶ 울타리 밖 머리가 마늘쪽같이 생긴 고향의 소녀와 한여름을 알몸으로 사는 고향의 소년과 같이 낯이 설어도 사랑스러운 들길이 있다 그 길에 아지랑이가 피듯 태양이 타듯 제비가 날듯 길을 따라 물이 흐르듯 그렇게 그렇게 천연(天然)히 울타리 밖에도 화초를 심는 마을이 있다 오래오래 잔광(殘光)이 부신 마을이 있다 밤이면 더 많이 별이 뜨는 마을이 있다 ▶ 겨울밤 잠 이루지 못하는 밤 고향집 마늘밭에 눈은 쌓이리. 잠 이루지 못하는 밤 고향집 추녀 밑 달빛은 쌓이리. 발목을 벗고 물을 건너는 먼 마을. 고향집 마당귀 바람은 잠을 자리. ▶ 그 봄비 오는 봄비는 겨우내 묻혔던 김칫독 자리에 모여 운다. 오는 봄비는 헛간에 엮어 단 시래기 줄에 모여 운다. 하루를 섭섭히 버들눈처럼 모여 서서 우는 봄비여. 모스러진 돌절구 바닥에도 고여 넘치는 이 비천함이여. ▶ 연시 여름 한낮 비름잎에 꽂힌 땡볕이 이웃 마을 돌담 위 연軟으로 익다 한쪽 볼 서리에 묻고 깊은 잠자다 눈 오는 어느 날 깨어나 제상祭床 아래 심지 머금은 종발로 빛나다. ▶ 첫눈 눈이 온다 눈이 온다 담 너머 두세 두세 마당가 마당 개 담 너머로 컹컹 도깨비 가는지 ‘한숨만 참자’ 낮도깨비 가는지 ▶ 보름 官北里 가는 길 비켜 가다가 아버지 무덤 비켜 가다가 논둑 굽어보는 외딴 송방에서 샀어라 성냥 한 匣 사슴표, 성냥 한 匣 어메야 한잔 술 취한 듯 하 쓸쓸하여 보름, 쥐불 타듯. ▶ 잔(殘) 가을은 어린 나무에도 단풍 들어 뜰에 산사자(山査子) 우연 붉은데 벗이여 남실남실 넘치는 잔 해후(邂逅)도 별리(別離)도 더불어 멀어졌는데 종이, 종이 울린다 시이소처럼 *산사자山査子 : 아가위나무 ▶ 밭머리에 서서 노랗게 속 차오르는 배추밭머리에 서서 생각하노니 옛날에 옛날에는 배추꼬리도 맛이 있었나니 눈 덮힌 움 속에서 찾아냈었나니 하얗게 밑둥 드러내는 무밭 머리에 서서 생각하노니 옛날 옛날에는 무꼬리 밭에 채였나니 아작아작 먹었었나니 달삭한 맛 산모롱을 굽이도는 기적 소리에 떠나간 사람 얼굴도 스쳐가나니 설핏 비껴가나니 풀무 불빛에 싸여 달덩이처럼 오늘은 이마 조아리며 빌고 싶은 고향 ▶ 쓰디쓴 담뱃재 - 유고시 아무리 굽어보아도 보이지 않는 헤아리면 헤아릴수록 헤아릴 수 없는 이러한 깊은 층층계에 나는 능금처럼 떨어져 있다. 이제 어머니의 자장가는 잃어버렸고 세정(世情)은 오히려 감상(感傷)이었다 벗은 나무처럼 서서 모호(模糊)한 인생(人生)이 너무 시를 쉽게 묶는가보다 오늘밤도 소복이 쌓이는 ▶ 별리(別離) 노을 속에 손을 들고 있었다, 도라지빛. -그리고 아무 말도 없었다. 손끝에 방울새는 울고 있었다. ▶ 월훈(月暈) 첩첩 산중에도 없는 마을이 여긴 있습니다. 잎 진 사잇길, 저 모래 둑, 그 너머 강기슭에서도 보이진 않습니다. 허방다리 들어내면 보이는 마을. 갱(坑) 속 같은 마을. 꼴깍, 해가, 노루꼬리 해가 지면 집집마다 봉당에 불을 켜지요. 콩깍지, 콩깍지처럼 후미진 외딴집, 외딴집에도 불빛은 앉아 이슥토록 창문은 모과(木瓜)빛입니다. 기인 밤입니다. 외딴집 노인은 홀로 잠이 깨어 출출한 나머지 무를 깎기도 하고 고무를 깎다, 문득 바람도 없는데 시나브로 풀려 풀려 내리는 짚단, 짚오라기의 설레임을 듣습니다. 귀를 모으고 듣지요. 후루룩 후루룩 처마깃에 나래 묻는 이름 모를 새, 새들의 온기(溫氣)를 생각합니다. 숨을 죽이고 생각하지요. 참 오래오래, 노인의 자리맡에 밭은 기침소리도 없을 양이면 벽 속에서 겨울 귀뚜라미는 울지요. 떼를 지어 웁니다, 벽이 무너지라고 웁니다. 어느덧 밖에는 눈발이라도 치는지, 펄펄 함박눈이라도 흩날리는지, 창호지 문살에 돋는 월훈(月暈). ▶ 곰팡이 진실은 진실은 지금 잠자는 곰팡이 뿐이다 지금 잠자는 곰팡이 뿐이다 누룩 속에서 광 속에서 명정(酩酊)만을 위해 오오직 어둠 속에서... 거꾸로 매달려 ▶ 소나기 누웠던 사람보다 앉았는 사람 앉았는 사람보다 섰는 사람 섰는 사람보다 걷는 사람 혼자 걷는 사람보다 송아지 두, 세 마리 앞세우고 소나기에 쫓기는 사람. ▶ 코스모스 곡마단이 걷어간 허전한 자리는 코스모스의 지역 코스모스 먼 아라스카의 햇빛처럼 그렇게 슬픈 언저리를 에워서 가는 위도 참으로 내가 사랑했던 사람의 일생 코스모스 또 영 돌아오지 않는 소녀의 지문 ▶ 종소리 봄바람 속에 종이 울리나니 꽃잎이 지나니 봄바람 속에 뫼에 올라 뫼를 나려 봄바람 속에 소나무밭으로 갔나니 소나무밭에서 기다렸나니 소나무밭엔 아무도 없었나니 봄바람 속에 종이 울리나니 옛날도 지나니 ▶ 꽃물 수수밭 수수밭 사이로 기우는 고향 가까운 산자락 보릿재 내는 사람들 귀향열차 뒤칸에 매달린 노을, 맨드라미 꽃물. ▶ 먼 바다 마을로 기우는 언덕, 머흐는 구름에 낮게 낮게 지붕 밑 드리우는 종소리에 돛을 올려라 어디메, 막 피는 접시꽃 새하얀 매디마다 감빛 돛을 올려라 오늘의 아픔 아픔의 먼 바다에. ▶ 꿈속의 꿈 지상은 온통 꽃더미 사태인데 진달래 철쭉이 한창인데 꿈속의 꿈은 모르는 거리를 가노라 머리칼 날리며 끊어진 현 부여안고 가도 가도 보이잖는 출구 접시물에 빠진 한 마리 파리 파리 한 마리의 나래짓여라 꿈속의 꿈은 지상은 온통 꽃더미 사태인데 살구꽃 오얏꽃 한창인데 ▶ 구절초 누이야 가을이 오는 길목 구절초 매디매디 나부끼는 사랑아 내 고장 부소산 기슭에 지천으로 피는 사랑아 뿌리를 대려서 약으로 먹던 기억 여학생이 부르면 마아가렛 여름 모자 차양에 숨었는 꽃 단추 구멍에 달아도 머리핀 대신 꽂아도 좋을 사랑아 여우가 우는 秋分 도깨비불이 스러진 자리에 피는 사랑아 누이야 가을이 오는 길목 매디매디 눈물 비친 사랑아. ▶ 자화상 3 살아 무엇하리 살아서 무엇하리 죽어 죽어 또한 무엇하리 겨울 꽝꽝나무 꽝꽝나무 열매 울타리 밑의 인연 진한 허망일랑 자욱자욱 묻고 '小寒에서 大寒사이' 출가하고 싶어라 싶어라. ▶ 학鶴의 낙누落淚 세상 외로움을 하얀 무명올로 가리우자 세상 괴로움을 하얀 무명올로 가리우자 세상 구차함을 하얀 무명올로 가리우자 세상 억울함을 하얀 무명올로 가리우자 일 년 열두 달 머뭇머뭇 골목을 누비며 삼백예순날 머뭇머뭇 집집을 누비며 오오, 안스러운 時代의 마른 鶴의 落淚 슬픔을 모른다는 듯 기쁨을 모른다는 듯 구름 밖을 솟구쳐 날고 날다가 세상 억울함을 하얀 무명올로 가리우자 세상 구차함을 하얀 무명올로 가리우자 세상 괴로움을 하얀 무명올로 가리우자 세상 외로움을 하얀 무명올로 가리우자 ▶ 모과차 앞산엔 가을비 뒷산엔 가을비 낯이 설은 마을에 가을 빗소리 이렇다 할 일 없고 기인 밤 모과차 마시면 가을 빗소리 ▶ 고향소묘 푸른 강심 배다리가 내려다보이는 고향땅 여관집 뒷담은 치지 않고 마당가 군데군데 마른 꽃대 풀대 등을 대고 있었다. 저녁상에 나온 상수리 묵접시 갈밭을 나는 기러기, 그림 들어 있었다. 들길 따라 찬 비는 오고 있었다. ▶ 강아지풀 남은 아지랑이가 홀홀 타오르는 어느 역 구내 모퉁이 어메는 노오란 아베도 노란 화물에 실려 온 나도사 오요요 강아지풀. 목마른 침목은 싫어 삐걱 삐걱 여닫는 바람 소리 싫어 반딧불 뿌리는 동네로 다시 이사 간다. 다 두고 이슬 단지만 들고 간다. 땅 밑에서 옛 상여 소리 들리어라. 녹물이 든 오요요 강아지풀. *나도사 : 떠돌아다니는 사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