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왕건(877~943)은 고려의 태조(재위 918~943)가 되어 왕위에 오르자
고려국의 건설은 불법(佛法)의 가호(加護)에 의한 것이라고 믿어
불교에 귀의하게 되었다.
따라서 국운의 번영을 위해 많은 사탑(寺塔)을 세우고 불사를 크게 일으키며
불교 옹호에 힘썼다.
불교의 의식과 법회에 의해서 나라를 보호하려는 태조의 염원은
고려불교의 성격과 방향을 개국 초부터 굳혀버린 것이다.
고려조 전체를 통하여 이와 같이 고정화되어 버린 속신적(俗信的)
기복(祈福)의 저속성은 국민사상을 구제하지 못했고,
그로 인해 시대정신을 선도할 역량을 교단에서도 잃어버렸다.
태조는 불교를 외호하는 데 있어서 종파에 차별을 두지는 않았으나,
자신의 무인적인 성격에서 자연 선종을 좋아하여 선승(禪僧)에게 귀의하였고,
왕사(王師)와 국사(國師) 제도는 이때부터 시작됐다

<대각국사 의천>
고려시대에는 왕자들의 출가가 많았는데,
의천(義天: 1055~1101, 대각국사(大覺國師))은 문종의 제4왕자로 11세에 출가하여,
영통사의 왕사 난원(爛圓)에게서 화엄을 배웠다.
그는 송(宋)에도 유학하였으며,
그때 천태학(天台學)을 전수받고 귀국 후에는 천태교관(敎觀)을 널리 강설했다.
대각국사 의천은
교종(敎宗)과 선종(禪宗)을 융통하되 교종의 입장을 떠나지 아니하였고,
보조국사 지눌(知訥: 1158~1210)은 선(禪)의 입장에서
선(禪) · 교(敎)의 일치(一致)를 제창함으로써 이 두 사상이
양종(兩宗)의 대조적 선풍을 이루게 되었다.
그는 또 교장도감을 설치, 국내외의 논저(論著)를 널리 수집하여
《속장경(續藏經)》을 출판했다.
대각국사가 국청사에서 천태교학을 강의한 뒤부터 천태종이 성립(1097)되었다.

< 보조국사 지눌 (조계종 중흥조)>
고려는 초기부터 선(禪)이 성하였으나 천태교학이 들어온 뒤부터
중기에는 재래의 선종(6조 혜능의 영향을 받은 조계종)은 심히 부진하게 되었다.
이때 고승 지눌(知訥: 1158~1210)이 나와
조계선종의 중흥을 이루었다.
많은 선승이 끊이지 않고 배출되어 고려불교의 후기는 선종 일색이 되었는데,
지눌은 9산선문의 교리를 종합하여
한국 불교의 정통인 조계종을 확립하기에 이르렀다.
지눌과 조계종지의 성립
조계종(曹溪宗)이란 말이 정확하게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조계종지(曹溪宗旨)가 성립된 것은 지눌(1158~1210)에서부터였다.
고려 불교의 특기할 만한 사상가는 보조국사 지눌인바
한국의 독자적 선(禪) 사상을 개발하여 조계종을 중흥하고
새로운 면목을 세웠으며, 그 후 혜심(慧諶) · 진각(眞覺) 등 16국사(國師)가
사자상승(師資相承)하였다.
지눌은 일찍이 《육조단경(六祖壇經)》과 이통현(李通玄)의 《화엄론(華嚴論)》에서
체용(體用)이 곧 정혜(定慧)라는 것과 화엄원돈지(華嚴圓頓旨)와
선지(禪旨)가 다르지 않음을 깨달았고
《대혜어록(大慧語錄)》에서 힘을 얻은 바가 있었다.
이와 같이 그는 화엄 · 천태 · 선학 등을 정혜겸수(定慧兼修)로써 포괄하고,
그 위에 돈오점수(頓悟漸修)를 제창하였다.
당시 9산선문은 모두 이 종지(宗旨)의 영향을 받아 한국
선종사(禪宗史)에 획기적인 비약을 가져왔다.
지눌은 또 선(禪)의 입장에서 염불문(念佛門)을 흡수하여
자심미타(自心彌陀)의 도리를 밝혔다.
선과 교가 저마다의 주장에 치우친 편견을 시정하여
선교일치(禪敎一致) 사상을 주장하고,
정혜겸수를 제창하여 조계산 수선사(修禪社)를 창설하고
종풍(宗風)을 수립했다.

보우와 구산선문의 통합
고려 말(高麗末)에는 태고(太古) 보우(普愚: 1301~1382)가 9산선종(九山禪宗)을 통합(統合)하였으니 이 점에서 선계의 모든 스님들은 태고(太古)에 맥(脈)을 댔었다.
고려 말에 이르러 승려가 타락하고 사원의 규범이 무너져 승단(僧團)은 부패하기 시작했다.
이 기회를 타서 유신(儒臣)들은 배불(排佛)하기 시작하였다.
보조국사 지눌(知訥: 1158~1210)에 의해 조계종지로의 내면적 통일은 되었다 하지만,
9산의 문파(門派)가 열립(列立)하여 각각 자기의 산문(山門)을 자부(自負)하고
피차의 우열을 논하기를 능사(能事)로 삼았다.
그때 태고 보우(太古普愚: 1301~1382)는 9산선문(九山禪門)의 병폐를 우려하고
서로간의 우열을 없애기 위하여
조계종이란 이름으로 9산을 통합하고자 그 취지를
공민왕(재위 1351~1374)에게 헌언(獻言)하였다.
공민왕은 광명사(廣明寺)에 원융부(圓融府)를 설치하고
9산을 통합할 것을 허락하였다.
이렇게 하여 보조국사 지눌에 의하여 한국 특유의 종지가 확립되어 내면적인 통일이 되었고,
공민왕 5년 태고 보우에 의하여 외면적으로 통일된 조계종이 이루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