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30일, 아버님께서 선종(善終)하시고 나서 성님들이 보여준 우의에 얼마나 고마운지 달리 표현할 길이 없네. 성님들 덕택에 어제 삼우제를 잘 끝내고 저녁 늦게 상경했네. 아버님은 하느님의 자비와 평화 속에서 편안하게 천국으로 가셨으리라 믿네.
누구나 흐르는 시간 속에서 다만 나그네일 뿐이라지만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네. 당신이 누워계시던 안방 침대며, 혼자 쓰시던 화장실이며, 장롱 속 옷 가지며, 서랍 속 각종 약 봉지며, 이동식 변기를 비롯한 여러 복지기구며, 손때 묻은 지팡이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생생한 모습으로 아버님을 떠올리게 하네.
지상에서 떠나간 사람들은 비록 육신은 사라질지라도 남은 사람들에게 어떤 형태로든 이렇듯 흔적을 남기게 마련인 모양이네. 가슴 저미는 회한으로, 그리운 추억으로, 따뜻한 불빛으로, ...어제 삼우제를 모셨으니만큼 아버님의 그런 흔적을 조금쯤 지워낼 수 있을지 모르겠네.
그러니까 벌써 1년 6개월의 시간이 흘렀네. 시골에 계시던 아버님께서 식음을 전폐하는 일이 생겼었네. 물 한 목음 넘길 수 없는 상황인데 시골 병원에서는 대수롭지 않게 보는 것이었네. 사정없이 쏟아지는 빗속을 뚫고 강진에서 광주 공항으로 김포 공항에서 다시 서울대형종합병원으로 급히 모시고 와 입원을 시켜드렸제. 신경과와 소화기 내과의 협진 속에서 아버님은 그런대로 예전의 건강을 되찾으셨네. 다만 치매 말기 판정이 내려진 가운데 한 달에 한 두 번씩 통원치료를 받으셨고, 그리고 주간보호센터와 집을 오가는 일상이 계속되었다네.
돌아가시기 전 2~3개월의 대소변 문제를 제외하면 그야 말로 “예쁜 치매”로 당신의 삶을 마감하실 수 있겠다 싶었네. 주위에서는 요양원이나 요양병원을 권장했지만 자존과 인권의 사각지대로 알려진 그런 시설은 절대 안 된다는 게 우리 식구들의 결론이었네. 더욱이 KBS에서 요양시설의 이면에 대해 적나라하게 방송한 내용을 직접 시청했던 터라 요양병원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우리 식구들 사이에 알게 모르게 많이 작용했을 것이네.
그러던 중 천주교 수원 교구에서 작년에 개설한 ‘성루카병원’을 알게 되었네. 원래 성직자들을 위해 세워진 시설이었지만 남은 자리가 있어 신부와 수녀의 직계부모님을 모실 수 있었던 것이네. 수녀동생이 같은 수원교구인 시흥 장곡성당에 봉직하고 있어 아버님에게는 다시 없는 기회였네.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요양시설이 아니고 천주교에서 직접 운영하고 있는 곳인지라 모든 면에서 만족스러웠네. 요양병원 특유의 냄새도 없고 분위기도 참으로 평화스러워 우리는 이런 곳이라면 마음 놓고 아버님을 모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네.
그런데 결정적인 순간 아버님은 피부병을 앓고 있는 중이어서 병원 측으로부터 인근 동수원 병원 피부과에서 집중치료를 받고 다시 입원하라는 권장을 받았네. 결국 그 동수원 병원에서 뜻하지 않게 급성폐렴을 앓게 되셨고 그것이 아버님의 마지막이었네.
아버님은 돌아 가시 전 주말마다 아들 딸들과 조카들 보는 재미로 행복하셨네. 시골집에 대한 그리움만 없었다면 아버님의 서울 생활은 지극히 만족스러웠을 것이네. 시골집은 당신이 낳고 자란 곳이면서 당신 손으로 직접 지으신 집이라네. 시골집에 애착이 클 수 밖에 없는 이유일세. 서울에 오셔서 처음 3개월여 동안은 정신이 조금이라도 드시면 “오늘 시골에 좀 갔다 와야 쓰것다야.”고 입버릇처럼 되풀이 하셨네. 그런 애틋한 모습을 보면서도 아버님의 건강 때문에 선뜻 장거리 여행의 용기를 낼 수 없었네. 우리 자식들은 아버님 건강이 좋아지면 꼭 한번 시골집에 모시고 가자고, 그때 형제들 모두 고향집을 거쳐 제주 여행도 함께 하자고 다짐했지만 그 뜻을 펴지도 못한 채 아버님과 이별하고 말았네.
아버님은 생전에 당신을 위해 돈 쓰는 것을 무척 싫어하셨네. 내핍과 절약이 몸에 벤 분이셨네. 그러나 자식들을 위해서는 하나라도 더 해 주시지 못해 항상 안타깝게 생각하셨네. 아버님이 생전 마지막으로 참석하신 조카 결혼식에도 당신께서 직접 큰 도움을 주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생각하셨네. 자식들이 새 옷을 사줄 때도 왜 돈을 낭비하느냐는 책망이 먼저였다네. 막내 조카 결혼식 때 새 양복을 입으시고 어린 아이처럼 좋아 하시면도 이렇게 비싼 옷에 왜 돈을 낭비하느냐며 불편한 기색을 보이기도 했네.
그런 아버님의 임종을 지켜보면서 죽음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해보네. 당하는 죽음이 아니라 맞이하는 죽음을 위해 평소에도 외로움에 대한 연습을 해야겠다는 다짐을 하네. 죽음은 모든 것을 버리고 혼자 떠나는 처음이자 마지막인 외롭고 외로운 여행이라는 점에서 사람이 느낄 수 있는 고독의 극한(極限)이기도 하니까 말일세. '공수래 공수거’(空手來 空手去)라는 말도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가는 것이 인생이라는 뜻이제. 여기에는 죽음에 대한 허무함이 담겨 있지만, 그 허무함의 내용도 처절한 고독일 수밖에 없네.
아버님을 천상으로 보내드린 후 장례식장을 찾아 주신 분들의 고마움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네. 아직까지 세상살이는 늘 바쁘고 각박한 현실의 연속이네. 바쁜 분들께 내 개인적인 일로 더 번잡하게 만들어 죄송할 뿐이었네. 창졸간에 당하는 큰일을 겪고 나자 주위 분들 덕택에 힘든 시간을 제대로 견딜 수 있었다는 사실을 절감했네. 인연을 맺은 분들이 내게 얼마나 크고 귀한 울타리였는지 또한 제대로 알게 되었네. 직접 조문을 해주신 분들은 물론 이런저런 경로를 통해 마음을 전해 주신 분들의 모습이 바로 공동체의 아름다운 본질이라고 생각했네.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이었네.
바쁘신 중에도 문상을 위해 직접 찾아 주신 분들, 한 번도 모자라 두 번, 세 번 오신 분들, 발인하는 날 이른 새벽에까지 오셔서 도움을 주신 분들, 그분들을 제대로 모시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아직까지 예를 갖추어 인사도 못했네. 특히 광고 13회 친구들의 깊은 우정을 이번 기회에 절절히 느꼈다네. 성님들께 고맙고 고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