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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간재의 가계
간재의 본관은 永川으로, 시조는 고려초 平章事를 지낸 高鬱君 文漢이고, 중시조(1세)는 克仁의 후손 영양군 대영이다. 그의 5대손 군기시 소윤 헌이 고려말에 벼슬을 버리고 영천에서 예안현 汾川(부내)으로 이거하면서부터 그의 자손이 안동 예안 지방을 중심으로 세거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안동(예안)입향조인 셈이다. 다시 5세를 내려와 훈련원 습독을 지낸 현우가 분천의 상류 川沙(내살미)에 卜居하였는데, 이 분이 곧 농암 현보선생의 동생으로 간재의 조부이다. 결국 간재는 농암 선생의 종손이 된다. 습독공이 살았던 내살미는 바로 퇴계 선생이 살았던 토계촌과는 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는 곳이다. 그의 아들인 영해 교수를 지낸 충량(간재 선생의 부친)이 다시 천사에서 오천(옛 녹전 외내)으로 이거하였다(아래에 간략한 세계도 참조).
예안 부내 및 외내에 정착한 이래 영천 이씨는 농암 및 간재를 전후하여 안동지방의 有數한 世家로 정착하게 되었고, 또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다. 특히 농암과 퇴계는 다같이 안동부 예안현의 사족으로, 그들의 조상은 고려말 영천, 진보로부터 각각 이주해 와서 관의 비호, 묵인 아래 토지를 개척하고 노비를 늘려서 가세를 이루어 1), 선점한 토성인 광산 김씨, 봉화 금씨와 더불어 이른바 禮安 鄕內의 四大家門을 형성시켰다. 『도산급문제현록』에 등재된 인물들을 성씨별로 정리하면, 특히 퇴계의 자질이 많이 포함된 진성 이씨를 제외하고는 영천 이씨가 15명으로 가장 많다. 이는 물론 지역적으로 매우 가까운 탓도 있겠지만 퇴계와 농암, 나아가 진성 이씨와 영천 이씨 간의 누대에 걸친 세의에 힘입은 바 또한 크다고 본다. 따라서 간재는 지역적으로도 퇴계와 아주 가까웠을 뿐만 아니라 인근의 유수한 가문과 중첩적인 인척관계를 맺고 있었던 당시의 사정을 고려해 볼 때 퇴계를 만나 학문의 길로 나아가기에 다른 여느 사람보다 비교적 우월한 위치에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겠다.
2. 간재의 생애
간재의 생애는 대체로 4기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는 生長期로, 출생하여 퇴계에게 급문하기 전까지의 약 18년간이다. 간재는 중종 36년(1541)에 榮川(영주) 外宅에서 출생하였다. 조금 자라서는 뜻을 가다듬어 글읽기에 열중하였고, 18세 때에 琴蘭秀로부터 『古文』을 배웠다. 둘째는 퇴계에로의 급문 수업기로, 퇴계에게 급문한 때로부터 퇴계가 하세하기까지의 약 12년간이다. 간재는 19세(명종 14년, 1559)에 퇴계 선생께 급문하여 30세 때 선생이 돌아가실 때까지 12년간을 질병이나 사고가 없는 날에는 언제나 시측하여 수업을 하면서 2) 학문뿐만 아니라 스승의 말씀과 행동까지도 독실히 배웠다.
셋째는 스승 추모와 동료간의 학문 교류기로, 퇴계의 사후부터 천거로 관직에 나아가기 전까지의 약 7년간이다. 간재는 퇴계 선생이 서거하신 후 3년 동안은 「輓章」, 「墓誌敍」, 「墓誌銘」, 『溪山記善錄』, 「祭文」 등을 짓고 다른 제자들과 의논하여 尙德祠를 건립하는 등 주로 선생을 추모하는 사업에 전력하였다. 그 후 33세에서 38세까지의 약 5년 동안은 동료학자들과 서신을 통한 학문적 교류와 토론을 활발히 전개하고 저술도 하였다. 마지막은 사환기로, 천거로 관직에 나간 뒤로부터 하세할 때까지의 약 18년간이다. 간재는 38세 때 천거로 집경전 참봉에 제수된 뒤부터 56세로 1596년 모부인 박씨의 廬所에서 서거할 때까지는 거의 대부분의 기간을 관직생활로 보내면서 적극적으로 직무를 수행하면서 틈틈이 저술 활동을 하였고, 임진왜란 중에는 왕세자와 선조 임금께 왜적을 격퇴하기 위한 자세한 전술을 건의하는 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사후인 광해군 을묘(1615)년에 衛聖一等功臣으로 錄勳되어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에 추증되었다. 1665(현종6)년 10월에 榮川(현 영주) 사림에서 위판을 오계정사에 봉안하고 묘호(廟號)를 ‘道存祠’라 하였다. 1691(숙종 17)년에 오계서원으로 승격되었고, 1711(숙종 37)에는 서원을 옛터에서 서쪽인 釜谷 3) 午向으로 이건하였다. 4) 우암 송시열과 갈암 이현일이 行狀을 짓고, 대사간 이당규가 墓碣銘을 지었다. 배(配)는 정부인 영양남씨(1545~1631)로 진사 應乾의 장녀이다.
3. 『간재집』의 간행경위와 내용 『간재(본)집』은 1752년 처음 활자로 印行하였고(이 초간본은 傳存되지 못하는 것으로 보임), 초간본의 미흡한 점을 보완하여 1766년 8권 4책으로 재편하고 목판으로 중간하였다. 그리고 後刷本에는 「묘갈명」과 「행장」이 추각되어 있다. 『간재속집』은 1829년 5권 3책으로 재편하여 목판으로 간행하였다. 1985년에는 기존의 목판본은 물론 필사본으로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던 간재의 저술 등을 영인하여 『간재집』 상·하 2권으로 간행하였다. 이 책이 지금까지 간행된 책 중에서 간재와 관련된 가장 많은 자료를 담고 있다. 『간재집』 상에는 유정기의 「간재집 해제」에 이어 목판본 본집·속집이, 하에는 이인영의 서문에 이어 필사본 8책·부록이 수록되어 있다. 본집은 모두 8권인데, 권8은 年譜 등 부록이므로 저자의 시문은 모두 7권으로 편차되어 있다. 속집은 모두 5권인데, 『사서질의』·『주역질의』·『심경질의』(이함형과 합록)·『고문질의』·『가례주해』이다. 필사본은 모두 8책인데, 『계산기선록』·『사서질의』·『주역질의』·『주서절요강록』·『주서절요기의』·『심경강록』·『심경표제』이다. 끝의 부록에는 기존의 문집에 빠져 있는 간재와 관련된 자료를 첨부하였다. 『간재집』을 당대의 주요 계문의 문집과 비교해 보면 그 특징이 확연히 드러난다. 『간재집』에는 성리학적 내용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또 대부분 이황에 관한 문장이다. 5) 특히 주석서가 많은 양을 차지하여 『간재집』의 반이 넘는다. 물론 『간재집』에도 다른 문집과 마찬가지로 시나 부가 있지만 분량도 비교적 적은 편이고, 대부분 도학적인 내용들이다. 또 『간재집』에도 만사·제문·묘지서·묘지명이 있지만 오직 이황에게 한 것뿐이고, 서기(序記)·발·찬·상량문·묘갈명·애사·행장 등은 아예 없다. 조목의 『월천집』의 경우에도 전체적으로 분량이 적음에도 불구하고 성리학적 내용은 비교적 많은 편이다. 6) 이에 비하여 김성일의 『학봉집』이나 유성룡의 『서애집』의 경우에는 그들의 방대한 저술량에 비하여 성리학에 관한 내용은 비교적 적은 편이고 대신에 문학이나 정사·외교·국방 등에 관한 내용이 압도적으로 많다. 이는 김성일이나 유성룡이 비교적 일찍 벼슬길에 들어서 생애의 대부분을 관직생활을 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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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이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李樹健의 『嶺南學派의 形成과 展開』,
一湖閣, 1995, 165~168쪽 및 239~269쪽을 참조.
2.『간재집』 상, 33~34쪽, 「간재집서」(이광정 찬),
“自童丱 至老先生易簀之日 十二年之間 非有甚疾病大事故 未嘗不在老先生之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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