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병갑은 고부군수로 부임하기 앞서 1882년 10월부터 29개월 간 천안군수로 재임했다. 이 비를 발견한 향토사학자 김종식(52)씨는 “천안지역 금석문을 책으로 내기위해 조사하던 중 찾았다”며 "이 곳에는 예전 천안에서 공주로 넘어가던 도로가 있었다”고 말했다.
이 선정비는 가로 45cm, 세로 120cm 크기로 전면에 13자의 한자가 새겨져 있다. 비문 중 '애민(愛民)선정비' 글자는 명확하나 비문 상단부는 수(守)와 갑(甲)자를 제외하고는 글자가 훼손돼 알아보기 힘들다. 발견자 김씨는 "조선시대의 지방수령들 선정비는 의례적인 설치물로 주인공의 선정 여부와 관계없이 세워졌다”고 말했다. 김해에서도 조병갑 선정비가 발견된 바 있다.
김씨는 “천안과 직산에서 활동한 조선시대 군수중 이름 끝자로 갑(甲)이 들어가는 군수는 조병갑이 유일하다”며 “더 이상의 훼손 등을 막기 위해서라도 천안박물관으로 옮겨 보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병갑은 고부군수로 재직하면서 주민들에게 물세(水稅)를 무리하게 징수, 착복한 전형적 탐관오리로 1894년 동학농민전쟁을 불러 일으킨 장본인이다. 향토사학자 임명순(62)씨는 "조병갑은 천안군수 시절(1883년) 호송 중인 범인을 놓쳐 한 등급이 떨어지는 징벌을 받은 적 있다”고 말했다.
조한필 기자
◆조병갑(1844~1911)=본관은 양주(楊州). 충청도관찰사 조병식과 사촌간이다. 전북 고부군수 재직 중 무고한 사람에게 죄목을 씌워 재산을 착취하는가 하면 태인군수를 지낸 부친의 비각을 세운다고 금품을 강제 징수하는 등 온갖 폭정을 저질렀다. 동학혁명 때 전봉준의 습격을 받았으나 전주로 달아났다.
첫댓글 동학혁명의 원인제공자 탐관오리 조병갑을 이어받은 그 직계증손 잘난척하는 조기숙 생긴대로 구는구려? <설 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