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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0장입니다.
머피의 법칙(Murphy's law)이란 것이 있습니다.
비슷한 말로 평행이론(parallel life)이란 말도 가능할 것입니다.
불행한 일은 예측한대로 진행이 되거나 이루어진다는 논리입니다.
이상한 일이고 기막힌 반복입니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내인 사라를 누이라고 속인 것이 한 번이 아닙니다.
그 때는 순례자의 삶을 살기 시작한 초기의 일입니다.
최고의 문명국가인 이집트에서 아내를 빼앗깁니다.
그냥 빼앗긴 것이 아니고 바로의 왕비로 간택이 되었습니다.
얼마나 예뻤으면 사라를 모두가 칭송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았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또 다시 그런 불상사가 일어납니다.
아브라함은 조카 롯에 대한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네게브(Negev) 땅으로 옮깁니다.
영적 변화의 삶을 살지 못한 롯이 못내 미웠습니다.
아브라함은 굳이 그의 행방을 수소문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은 의인 열 명이 없다는 증거였기 때문입니다.
그곳에 거주하고 있던 롯도 그들과 함께 멸망했으리라고 짐작할 뿐입니다.
아브라함은 더 이상 롯을 위해 염려하지 않습니다.
잊고 살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헤브론을 떠나 남방으로 내려갑니다.
이외에도 아브라함이 그랄로 내려간 이유에 대해서 몇 가지 견해들이 있습니다.
이상근 박사는 그의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① 가축을 위한 목장을 구하기 위해(Keil),
② 헤브론에서의 이웃들의 적대 때문에(Calvin),
③ 소돔과 고모라 멸망의 참상을 잊기 위해(Murphy),
④ 더 많은 사람들과 사귀기 위해(a Lapide),
⑤ 가나안에서 그가 나그네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Kalisch),
⑥ 흉년 때문에 등으로 설명합니다.(이상근, 『창세기』 p.210)
아브라함은 잠시 머물 요량으로 그랄(Gerar)이란 곳에 장막을 칩니다.
역시나 그곳에서도 사라의 미모는 입소문을 통해 퍼져나갑니다.
아브라함은 그 사라를 자기의 누이라고 여전히 말합니다.(2절)
얼마 전에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네 아내 사라”라고 말씀하셨는데도 말입니다.(창 18:9)
그랄 왕 아비멜렉(Abimelech king of the Gerar)이 사람을 보내어 사라를 데려갑니다.(2절)
그랄은 이집트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입니다.
이집트에서는 왕비의 간택 과정이 매우 신중합니다.
기간도 오래 걸립니다.
그러나 그랄은 자그마한 도시국가에 불과합니다.
그런 만큼 왕후로 간택했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그러므로 사라의 신변에 위급상황이 발생한 셈입니다.
아브라함은 꼼짝없이 아내를 빼앗길 상황입니다.
이런 지경까지 초래하게 된 근본적 원인은 틀림없이 아브라함의 속임수입니다.
아비멜렉 왕은 아브라함의 말을 그대로 믿고 사라를 데려왔습니다.
사태의 심각성을 아는 만큼 아브라함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습니다.
소돔에만 유황불이 떨어진 것 아닙니다.
알고 보면 아브라함의 가슴에 불이 떨어집니다.
아브라함은 가슴을 치며 소리도 없이 통곡을 합니다.
그렇게 속수무책으로 아내를 빼앗길 위기에 직면합니다.
의인이 어떻고 하면서 다른 이를 위해 간구했던 아브라함입니다.
그러나 돌아보니 자신은 의인의 축에도 끼지 못합니다.
소돔의 멸망을 멀찍이 바라보며 롯의 부족한 신앙을 아쉬워했던 그입니다.
그러나 지금, 아브라함에게서 부족한 신앙의 몰골이 드러납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이어갈 이삭의 어머니로 사라를 약속하셨습니다.
이삭은 다른 그 어떤 여자가 아닌 오직 사라의 몸을 통해 태어날 아이입니다.
그 하나님의 언약마저 까맣게 잊고 사라를 빼앗기고 맙니다.
아브라함은 죽을 맛입니다.
밤은 점점 더 깊어만 갑니다.
아브라함의 심장은 타들어갑니다.
아브라함은 그렇게 깊은 기도의 세계로 들어갑니다.
자신이 저지른 거짓말의 대가를 기억하며 참회의 눈물을 흘립니다.
부족한 신앙은 참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짓말이 들어간 포장된 신앙은 참을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내인 사라를 누이라고 말한 것이 새빨간 거짓말은 아니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아비멜렉의 추궁에 아브라함은 틀림없이 그렇게 변명합니다.
사실은 누이가 맞는데 아내가 되었다고 말합니다.(12절)
“하얀 거짓말”이란 말도 있습니다.
아무래도 거짓말은 거짓말이지만 다른 이에게 위해가 되지 않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세상에 그런 거짓말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더구나 아브라함이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인 것은 그런 하얀 거짓말도 아닙니다.
물론 아브라함의 말 모두가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누이보다도 더 소중한 관계가 아내의 위치입니다.
더구나 아브라함의 거짓말은 자기의 목숨 부지를 위한 묘책이었습니다.
이집트에서 아내를 빼앗겼던 이후 무사히 지나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랄에서 아내를 빼앗기는 수모를 또 다시 겪습니다.
거짓말이 길어 지다보니 아예 생존의 수단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는 당당하게 자기의 아내라고 밝힐 숱한 기회를 놓쳤습니다.
어쩌면 그런 아브라함을 위해 하나님께서 “네 아내 사라”란 말씀을 주셨는지 모릅니다.
아무튼 아브라함의 노년에 또 다시 위기가 닥칩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은 까맣게 타들어갑니다.
그 어디에도 하소연할 수 없고 바로 잡을 수도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루 종일 하나님께 간절하게 부르짖었을 것입니다.
틀림없이 자신의 형편없음을 토로하며 회개의 기도를 했을 것입니다.
회개는 분명 아픔의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아내를 빼앗긴 못난 남편이 아브라함입니다.
이 밤이 지나면 아내인 사라의 정조는 어찌됩니까?
그 절박함으로 하나님께 다가섭니다.
그 밤에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꿈을 통해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아비멜렉이 생생하게 기억하고 되돌릴 수 있도록 확실하게 말씀합니다.
“네가 데려간 여자”는 사라를 가리킵니다.
빼어난 미모의 여인, 나이는 들었지만 신비한 느낌이 드는 여인입니다.
그 여인 때문에 아비멜렉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그는 남편이 있는 여자라는 것입니다.
아비멜렉이 망설이는 것은 남편이 있는 여자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여자를 가까이하게 되면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 말씀 때문입니다.
그래서 서둘러 아비멜렉은 그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았음을 밝힙니다.
그런데도 데려왔다는 이유만으로 죽어야 하는지 묻습니다.
다행히 아비멜렉은 사라를 가까이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사라를 위한 배려였다고 보입니다.
함께하던 식구들과 갑작스레 헤어진 불안함을 다스릴 안정의 시간을 준 모양입니다.
생활환경이 한 순간에 확 바뀐데 대한 보살핌이었다고 보입니다.
사라에게 마음을 추스를 시간적 여유를 주었다고 보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아브라함의 제안대로 누이라고 했다가 또 다시 위기에 빠집니다.
사라 역시도 하나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을 것입니다.
지난 번 위기를 극적으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간섭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자신에게 닥친 위기를 벗어날 길 역시 하나님의 개입뿐입니다.
사라는 처절한 심정으로 하나님께서 건져주실 것을 기도합니다.
그 모습이 아비멜렉의 눈에는 초조함으로 비춰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심리적으로 안정할 수 있도록 시간을 준 것이 아닌가 보입니다.
그렇기에 그 밤에 아비멜렉은 사라와 동침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 밤에 아비멜렉의 꿈에 하나님께서 나타나 말씀합니다.
너무도 생생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심지어 그 하나님과 대화를 주고받습니다.
자신이 그 여인을 가까이하지도 않았는데 죽는다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와 맞는지 따져 묻습니다.
18장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의를 말하며 중재안을 내놓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비멜렉도 하나님의 의를 말합니다.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창 18:23)
“주께서 의로운 백성도 멸하시나이까?”(4절)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의를 말할 때는 어떻습니까?
그런데 지금 아브라함 때문에 하나님의 의를 말하는 아비멜렉의 말은 어떻습니까?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의 허물을 분명하게 말합니다.
그가 내게 자기 누이라고 했고 그 여인 역시 자기 오라비라 했다고 밝힙니다.
잘못은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에게 있는데 애매하게 내가 죽어야 하는지 묻습니다.
자신은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이렇게 하였다고 항변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서나 나올 법한 이 말이 아비멜렉의 입에서 터져 나옵니다.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은 아비멜렉이 아닌 아브라함에게 어울리는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 모든 말들이 아비멜렉에게서 나옵니다.
더구나 하나님께서도 그 아비멜렉의 말을 모두 인정합니다.
이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아비멜렉은 온전한 사람이란 말입니다.
반면 아브라함은 온전하지 못한 마음입니다.
아비멜렉은 깨끗한 손이고 아브라함은 더러운 손입니다.
이 얼마나 치명적인 상황입니까?
소돔을 위해 중재안을 내놓던 그 온전함과 깨끗함은 어디에 있습니까?
아비멜렉의 말에 하나님께서 순순히 인정하십니다.
그 순간 아브라함은 깨끗함과는 거리가 멀어집니다.
그렇게 꿈에서 깨어나면 아브라함은 천하에 몹쓸 사람이 되고 맙니다.
아내를 지키기는커녕 자기 살자고 거짓말로 모두를 기만한 자가 됩니다.
하나님은 아비멜렉의 항의성 변명을 인정합니다.
그래서 여인을 가까이하지 못하도록 서둘러 나타났음을 일러줍니다.
하나님은 분명하게 사라를 취하는 그 일이 범죄임을 밝힙니다.
이제 그의 아내를 돌려보내라고 명령합니다.
돌려보낼 그 사람, 아브라함이 문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아브라함을 선지자라 말씀합니다.(7절)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선지자란 도대체 어떤 사람입니까?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보내지 아니하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반드시 죽을 줄 알지니라.”(7절)
하나님의 말씀 속에 선지자의 모든 것이 들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선지자는 누군가를 위하여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그 기도의 성격이 어디까지입니까?
살고 죽는 문제가 다 그의 기도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면 살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죽을 것입니다.
선지자의 기도는 이만큼 위력적입니다.
하나님은 놀랍게도 형편없는 남편으로 전락한 아브라함을 이렇게 높입니다.
살고 죽는 문제를 틀어쥔 진정한 기도의 사람으로 아브라함을 내세웁니다.
가장 고전적인 선지자의 유형이 드디어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선지자는 사람의 생명과 직결된 기도의 문을 여닫는 사람입니다.
최고의 권력자인 왕에게 하나님은 살고 죽는 문제를 말씀합니다.
생명을 박탈할 무기를 소지한 왕에게 선지자의 입을 말씀합니다.
왕이 지니고 있는 온갖 무기보다도 더 강력한 무기가 선지자의 입입니다.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반드시 죽을 줄 알지니라.”
이 말씀은 선지자의 기도가 지닌 위력을 단적으로 드러낸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구겨진 아브라함의 자존심을 되살리기 위해 선지자의 카드를 내미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지자로 인정하신 것입니다.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정하셔야 선지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셨기에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께서 높여주실 때에 빛이 나는 법입니다.
아비멜렉은 아침 일찍 일어납니다.
긴급한 사안이 발생하였기에 시간을 미룰 입장이 아닙니다.
아비멜렉은 모든 종들을 부르고 그 모든 일을 말해 줍니다.
사라는 아브라함의 누이가 아니라 아내임을 밝혀줍니다.
또한 그녀의 남편인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선지자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란 말에 그의 신민들은 심히 두려움에 떱니다.
이제 남은 일은 사라를 아브라함의 아내로 원상복귀 시키는 일입니다.
이 일을 위해 아브라함을 부릅니다.
얼마든지 추궁할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선지자라 일러주셨습니다.
선지자를 함부로 심문하다가 오히려 화를 자초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더욱 조심스럽게, 그러나 정곡을 찌르는 질문을 던집니다.
아비멜렉은 정색을 하고 아브라함에게 묻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느냐?
내가 무슨 죄를 범하였기에 네가 나와 내 나라가 큰 죄에 빠질 뻔하게 하였느냐?
네가 합당하지 아니한 일을 내게 행하였도다.”(10절)
아비멜렉의 질문은 더 이어집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란 사람이 무엇 때문에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을까 궁금해집니다.
분명 아내를 빼앗길지도 모르는데 그런 거짓말을 한데는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아비멜렉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선지자가 두려울 것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브라함의 궁색한 변명을 들어보십시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순례자로 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주변 민족들을 두려워하는 겁쟁이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를 선지자로 높이 치켜세웁니다.
하나님은 그의 입에 권세가 있음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란 말이 그렇습니다.
선지자인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위해 기도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아비멜렉만 아니라 그의 백성들 모두가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들려주신 선지자의 능력은 한 나라의 운명을 좌우할 만큼 강력합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의 궁색한 변명을 들으면서도 그를 무시할 수 없습니다.
누가 아브라함의 배후에 크신 하나님이 계심을 알겠습니까?
주변을 두려워하는 나그네에 불과한 아브라함에게서 하나님의 돌보심을 어찌 볼 수 있겠습니까?
사실 아비멜렉도 아브라함의 소유를 일부 강탈한 것으로 보입니다.(14절)
그 모두, 곧 양과 소와 종들을 이끌어 아브라함에게 돌려줍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아내인 사라도 돌려보냅니다.
그냥 돌려보내면 사라가 부끄러운 비난을 받을까 싶어 배려도 합니다.
사라의 실추된 명예를 회복시켜 주기 위해 은 천개를 보상금으로 줍니다.
아비멜렉의 이러한 행동은 사라의 순결을 보증하는 방편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이 상황에서 억울한 이는 아비멜렉입니다.
그 시대에는 억울한 일을 당한 자가 자신의 억울함을 공식화하는 조치로 예물을 내놓습니다.(송병현, 『창세기』p.371)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은 천개를 준 것은 억울한 자가 아비멜렉임을 입증하는 행위입니다.
아비멜렉이 억울하다는 것은 사라의 순결을 보증하는 행동이기도 합니다.
아비멜렉은 또한 그랄의 땅 가운데 아브라함이 원하는 곳에 거주하도록 허용합니다.
아비멜렉이 신속하게 모든 일들을 처리한데는 다른 사정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왕에 아브라함의 일로 아비멜렉의 집의 모든 태를 닫으셨기 때문입니다.
모든 일들이 원만하게 해결되었습니다.
그러자 아비멜렉의 아내와 그의 여종들에게도 출산의 기쁨이 주어집니다.
하나님께서 강력하게 개입하신 관계로 일은 아브라함은 수모를 면했습니다.
그리고 더욱 하나님을 신뢰하는 영적 각성의 기회도 얻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면 하나님께서 이루시고 채우실 것을 체험한 것입니다.
묵상을 위한 질문
1. 아브라함은 왜 네게브로 이동한 것일까?
2.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지자로 소개하신다. 선지자의 역할은 무엇인가?
3. 아비멜렉이 사라의 수치를 가리기 위해 준 것은 무엇인가?
4. 진짜 은혜는 하나님의 간섭이요 보호하심이다. 나도 아브라함처럼 답답한 대책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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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내가 무언가를 하려 말고 먼저 주님께 아뢰고 기다리면 주님은 주의 방법으로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하신다. 하나님의 임재가운데 늘 승리하는 삶을 사는 우리모두가 되기를 기도해요~~~말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