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난중일기[亂中日記] 여진[女眞].
“晩出登途 十里許川邊 李光輔與韓汝璟 佩酒來待 故下馬同話 安世熙亦到 暮到茂長
늦게 길을 떠나 10리쯤 천변에 이르니 이광보와 한여경이 술을 갖고 와서 기다리고 있기에
말에서 내려 함께 옛 이야기를 나누며 마셨다. 안세희도 역시 도착했다. 저물어서야 무장에 도착했다”
다음날 14일에 “又留(하루 더 머물렀다)
난중일기 병신년(1596년) 9월 12일 일기.[임진왜란 발발 1592년 4월13일]
9월12일 일기 여백 부분에 적힌 ‘女眞’과 ‘女眞20’이 적혀 있다.
여백 부분에 적힌 ‘女眞’은 기생이 아니라 숙여진족 대표가 와서 같이 숙박한 것을 말하고
‘女眞 20’은 그다음날 숙여진족 참전병 20명이 와서 함께 숙박한 것을 말한다.
다른 부분 일기의 30이라는 숫자도 숙여진족 참전병을 뜻한다.
[아군(내군)의 진영은 여진(與鎭/전장터에서 이전부터 적을 방어하기 위해 만들어진 아군의 성곽이나
고정 방어 진지)이라고 쓰거나,전투에 임하는 일촉즉발의 최전선에서 피아구분을 확실히 하기 위해
여진(予陳/군영을 수시로 옮길 수도 있는 내가 속한(함께하는) 군영의 진지/야영지/숙영지)이라고 쓰거나,
여진(余陣)-전투가 없는 일시 휴전이나 소강상태로 접어 들어갔을 때 내 진영에 남아있는 군사를 말하며
전투 중에 전사자가 다수 발생했기 때문에 보충병을 충당해야할 여지가 남아있을 때 주로 사용.
숙여진족 참전병 20(30)명이 내 진영(여진)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女眞20(30)으로 암호식 표기한 것].
조선시대의 일반기생은 엄연히 자본주의가 인정되는 조선이었기 때문에 관기와 구분된다.
관기는 역모죄나 반역죄를 지어 해당 관청에 소속되어 있는 관비로
해당 지역의 관청에 소속되어 그 지역의 수령 지휘 하에 움직인다.
만약 다른 지역의 문관이나 무관이 해당 관청의 허가 없이 관기를 취하면 바로 탄핵을 받아,
삭탈관직, 보직해임, 정직 등 사안에 따라 유배형까지 처해졌다.
모든 관청에 관기가 있는 게 아니고 극히 드물었다.
역모죄, 반역죄로 집안이 풍비박산이 되어 관기가 된 여인이 관청마다 있는 게 아니었다.
관기는 전주 감영이나 광주 목, 나주 목에 있었다.
전라 병마절도사 최원[종 2품]은 왜군이 한양을 점령하고 평양으로 북상하는 것을 막으라는 명령에 불복하여
강화도에서 탈영자가 속출한다는 명분을 대고 출정을 하지 않아 직급 강등당한다.
그후 휘하부대 2천을 이끌고 1593년 3월 영덕, 영해전투에서 남원부사 최경회와 승전하여
포로 200여 명을 잡아 개선하고 조정에 바치자, 상호군[정 3품 당상관]으로 다시 승진하여
여주 목사로 갔다가 여주 하급 관원을 발로 찼다는 이유만으로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다시 황해도로 좌천되었다.
[조선시대는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가 죄를 지었을 때 주로 좌천되는 지역이었음]
이정도로 엄격한 반상의 법도(법학), 강상의 법도(예학)가 적용되던 조선이었기 때문에
이순신이 여진이라는 기생과 잤다는 말은 잘못된 해석이다.
이순신은 난중일기 여백에 자신만이 알수가있는 암호 숫자를 적어 놓고
어떤 것은 이두식 한자로 적어 정보가 쉽게 노출되지 않도록 기록하여 놓았다.
다음날 숙여진[熟女眞]족 20명이 내 진영으로 들어와서 숙박했다는 것을 숙[宿-女眞20]으로
암호처럼 이어 붙이기 식으로 압축하여 적어 놓은 것이다.
기록에 남의 나라나 종족이 참전하였다는 사실이 왜군에 알려지면 문제가 되기 때문이었다.
왜군도 포르투갈 신부를 앞세워 참전한 국제전쟁이었으므로
아군 측에 참전한 외인부대가 적에게 알려지면 훗날 숙여진족이 침공받을 수도 있는 문제를
피해가기 위함이었다.
숙여진족은 함경남북도로 들어와 야인족으로 살고 있다가 평정되었고,두만강 길림성지역에도 남아 있었다.
숙여진[란주여진]은 감숙성 란주시에서 몽고에 밀려 요녕성 조양의 동단국을 점령하고
심양[선양]의 동진국을 점령하였다가 뭉케 황제(징기즈칸의 4남인 툴루이의 장남)와
쿠빌라이[징기즈칸의 4남 툴루이의 차남/ 몽고 제5대 황제이자, 원나라 초대 황제 세조]의
몽고군이 추격해오자 연해주로 달아나 동하국을 세웠다가 고려말 몽고,동진,고려 연합군과 조선초에
이성계에게 토벌되어 일본 동경으로 달아난다.
[쿠빌라이가 동북삼성 지역으로 거란, 여진을 밀어붙였기 때문에 가장 유리한 고지를 선점한 것이고,
고려로부터 후원을 받아 원나라를 건국하는데 유리하였던 것임.
원종의 왕세자 영녕공(왕준)이 몽고의 인질로 가면서 쿠빌라이에게 승산이 있다고 판단하여
쿠빌라이(홀필열한/ 고필열한)에게 붙어 원나라를 건국하는 것임.
왕준은 삼별초 항쟁 때 진도에서 고려 자주국을 세웠던 승화후 온(왕온)의 동생]
압록강을 넘어 단동[안동]지방에는 예허 여진이 흑룡강성의 생여진[누루하치/홍타이지/건주여진]과
만주에 남은 여진족 통일 쟁탈전에서 생여진에 밀려 예허 여진군이 패하여
위화도 일대로 피신처를 마련해 놓고 있었다.
위화도는 강화도 같은 곳이다.
만주에 남은 숙여진은 함경남북도로 들어온다.
광해군 때 명나라는 예허 여진의 요청으로 생여진(건주여진/ 감숙성 돈황지구에서 몽고에 밀려
요녕성 북부, 길림성 북부, 흑룡강성으로 밀려나서 수렵생활 영위)토벌을 요청하자
명나라는 조선에 출병을 요구하여 강홍립이 출병하였다가 패하자 요녕성 장하시 장해현과
압록강 단동(안동)지구, 위화도 일대로 밀려나 저항하고 있었다.
후금이 정묘호란을 일으킬 때 예허 여진은 위화도로 근거지를 옮겨 화를 피하게 된다.
생여진이 몽고의 수도 울란바토르에 있는 호르친부의 카사르후예 8기군과 동맹을 맺고
요녕성 심양에서 후금을 건국하고 정묘호란에 이어 청 태종 홍타이지는 청으로 개칭한 후
병자호란을 일으키며 북경을 점령한다.
1583년 일본으로 이주하지 않고 연해주 일대에 남은 동하국의 잔당인 숙여진족 니탕개의 난과
1585년 니탕개의 잔당 침공 때 이순신이 함북 경흥 종 4품 조산보 만호[대령과 준장사이의 직급]로
녹둔도 [연해주]로 출정했다가 패하여 책임을 지고 백의종군하여 1586년 니탕개의 잔당 토벌작전에 투입된다.
서인 주자학 원리주의 학파 이일이 도주하여 그 책임을 휘하부대였던 이순신에게 뒤집어 씌운다.
숙여진은 일부가 함경도에 남고 일부는 생여진에 복속되며 일부는 예허 여진으로 들어가고
대부분의 큰 무리는 몽고, 동진, 고려군, 조선 초에 일본 동경으로 달아난 바가 있었다.
이순신은 예허 여진이 아군측으로 참전한 것인지 숙여진족이 참전한 것인지를 구분하기 위해
숙박했다는 말과 함께 숙여진 20 또는 30명이 와서 함께 잤다는 말로 [宿女眞20 또는 30]이라고
적어 놓은 것이다.
다른 일기 기록에 기생이 등장하는데 기생은 관비인지 일반 기생인지를 구분해야 한다.
일반 기생은 돈을 주고 술과 안주 그리고 사랑까지 사는 경우도 있고
그냥 술과 안주만을 파는 경우도 있었다.
무조건 왔다고 해서 동침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근무 소홀로 탄핵의 대상이 될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동인 정권으로부터 배척을 받고 있었던 이순신이었으므로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어느 부대나 그 안에는 정부를 위해 잘못한 사실만 드러나면 바로 보고하는 비변사의 끄나풀들이
침투하여 정보를 수집한후 보내는 자들이 있었고 관복을 벗기기 위해 사헌부의 감시조가 숨어서 활동하였다.
동인 사간원의 대사간[정 3품], 사간[종 3품], 간원[정 4품 이하]들은 전쟁 중에도 조그만 법도를 어겨도
탄핵 상소를 올려 서인을 밀어 내려고 안달하고 있었다.
1593년 북인[대북, 소북]은 동인 주리학파 속으로 치고 들어가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하며
1597년 칠천량 해전 패전으로 결국 동인 주리학파가 분열하여 류성룡 등이 남인[나주~부산]으로 분파하여
약화되며, 정유재란 후 광해군 때 낙동강 서안의 대북[광해군지지] 정인홍, 이이첨 등은 낙동강 동안의
소북[영창대군 지지] 영수 유영경을 계축옥사로 사사하며 권력을 장악한다.
곽재우는 소북을 지지하는 상소를 올리고 은둔생활로 들어갔으나 대북파의 사헌부 감시속에서
평생을 살다가 생을 마감한다.
[곽재우가 대북 남명 조식학파의 창시자 조식의 외손주 사위였기 때문에 죽이지 못한 것임]
이순신이 정치,군사기록 이외에 별도로 첨부하여 남긴
1592년 임진년, 1596년 병신년 기록을 보자.
1592년 임진년 2/19일
妓生亦來
기생들도 왔다.
기생이 왔다고 해서 동침했다는 기록은 그 어디에도 없다.
1596년 병신년 3/9일
介與之共
개와 함께 했다(노비로 추정됨)
개와 더불어 함께 공했다는 말은 공물로 들어온 곡물, 곡식 등 음식물을 가지고 와서
함께 먹었다.
물론 여기에는 단둘이 먹었을 경우에는 그 이상의 일도 이루어졌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을 수 없다.
共[공]했다는 말에는 공물로 들어온 음식물을 바쳐 함께 먹었다는 뜻도 있지만
다른 것도 스스로 바쳐 와서 통했다 라는 의미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
이것을 공했다 라는 하나의 말로 압축시켜 놓은 것일 가능성도 있다.
실제로 공해서 다른 자손을 남겼다면 이것은 오히려 조선의 축복이 아닌가 한다.
현재 이순신 자손은 대가 끊길 판이다.
여기에서 노비는 일반 외거노비로 원래 노비의 주인과 함께 사는 솔거노비나 관청에
소속되어 있는 관노가 아니라, 주인으로부터 주거를 독립하여 단독으로 살아가면서 필요할 때만
집 주인의 가사를 돌봐 주고 살아가는 노비를 말한다.
양반들은 노비를 한명씩 전장터로 보내야했는데 솔거노비는 가사에 필요하므로 남겨두고,
그대신에 외거노비를 보낸 것이었다.
관노는 해당 관청에 소속되어 있어 자유로이 나다닐 수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함부로 취하면 소송 대상이 되기 때문에 마음대로 할 수가 없는 관계였다.
가장 활동이 자유로운 일반 외거노비를 의사에 반하여 고위 관료가 취하면
왕이 직접 의금부에서 조사와 수사를 진행하여 판결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정유재란에서 공을 인정받은 노비들이 면천하여 양인이 되었고,
양인은 양반이 될 수도 있는 길이 있었다. [그래서 솔거노비 대신에 외거노비를 보낸 것임].
-성적 자기 결정권은 하늘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개인의 절대적인 고유 권한이었음.
1596년 9월은
7월 한현, 이몽학의 난에 연루되어 반란 수괴 총사로 몰린 김덕령의 죽음으로 의병군 재편과
전장 정리를 하기 위해 말을 타고 전북 무장군[무주,진안,장수 일부 면을 떼어 만든 군]에 가서 남긴 일기.
김덕령 의병군은 전라방어사,경상방어사로 재편되어 전쟁의 주도권은 의병에서 관군으로 넘어 가는 시기]
9/19 崔女貴之來宿
최귀지가 와서 잤다.
잘 알고 있는 관료 광주목사 최철견의 딸 최귀지가 와서 잤다.
이 말은 알고 지내던 최철견의 딸 최귀지가 부대를 방문하여 자고 갔다는 말이다.
이 말을 동침하고 갔다는 말로 이해 해서는 아니된다.
잘 아는 동료의 딸과 잠자리를 하는 것은 강상의 법도를 어기는 일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며,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다면 유배형 이상 중형에 처해진다.
의병군 재편을 위해 광주 목사도 무장군으로 가야 했는데, 최철견이 위험한 전장터로 자신의 딸을
아무렇지도 않게 데리고 군영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너무나 무모하고 특이해서 기록해 놓은 것이다.
2/12 小者初更還歸
어린아이가 초경[初更]에 돌아갔다.
이 말은 어린아이가 부대로 들어와서 해질 무렵 이전 초경인 저녁 7~9사이에 돌아갔다는 말이다.
어린아이가 부대로 들어오는 일은 드문일이었기 때문에 경험상 특이해서 기록으로 남겨 놓은 것이다.
여자가 성년이 되기 위해 처음으로 월경을 시작하는 초경[初經]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순신은 전쟁중에 해질녘까지 병영안에서 천진난만하게 놀고 있는 어린아이를 보며
잠시나마 서정적인 감상에 젖었던 일이 특별하게 기억에 남아 일기로 남겨 놓은 것으로 판단된다.
전쟁이 없었다면 어린아이들이 저렇게 천진난만하게 놀고 있었을 텐데....하고 말이다.
3/5 女奴德今,漢代,孝代,恩津婢至
여종 덕금,한대,효대,은진이 왔다.
여종들이 음식물을가지고 도착했다.
이것을 향략을 즐기기 위해 도착했다고 말하는 자들은 조선의 강상의 법도를 전혀 모르는 자들임이
틀림없다.
김덕령의 의병군 재편중에
자신은 물론 시장한 군사들이 애타게 기다리던 음식물을 가지고 온 것이 기뻐서
일일히 여종 이름까지 공적에 올리려고 기록으로 남겨 놓고 전란후 포상이 시작되면
여종들에게도 그에 상응하는 포상 정도는 하려고 했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9/12 宿女眞
여진이 잤다.
여진족 참전병 [대표]가 와서 함께 숙박하였다.
9/14 女眞共 -20
여진과 함께 했다.
여진족 참전병 20명이 와서 함께 숙박하였다.
12일날 여진족 참전병 대표와서 이야기를 맞추고 끝내자, 이틀 후 20명이 와서 함께 잤다는 이야기다.
20명 자체가 공물에 포함된다고 본 것이다.
별첨에다가라도 적어 놔야 아군이 적으로 오인하지 않도록 기억해 두었다가
나중에 적절한 곳에 배치하여 오인 사고가 나지 않도록 배려하려 한 것으로 판단된다.
숙여진 숫자가 흑룡강성의 생여진 숫자보다 적었기 때문에 생여진의 만주 통일 쟁탈전에서
조선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는 숙여진인들이 그에 대한 보답으로 참전했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조선이 왜란을 겪고 있을때 여진은 생여진, 숙여진, 예허 여진이 만주 통일을 놓고 대립하던 시기였다.
광해군 때 흑룡강성의 생여진[건주여진/수렵생활]이 통일한다.
9/15 女眞共
여진과 함께 했다.
여진과 함께 하기로 결정했다는 말이다.
여진 참전병 대표와 20명이 참전하여 배신을 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조선군을 위해 참전한다는 결의를 보여주기 위해 본격적인 공물을 바쳤다.
숙여진이 공물을 바치듯이 참전을 해야 함경도로 들어온 숙여진족에 대한 배려를 해주게 되므로,
공물 관계로 보았다는 말이다.
[共했다. 라는 말은 개인 재산으로 바치는 것이 아니라, 국가 재산으로 바치는 것이라는 뜻임]
丙申年二月十一日 戊申(1596년 병신년12월 11일 무신)
金應綏簡幷持來。 晩長興與右虞候來。 又招樂安與興陽射帿。 初昏永登率其房人。 佩酒來勸。
小者亦來。 落歸。流汗。
[보성의 임찬이 체찰사(종1품)에게 소금 50석을 실어 보내고, 진주 제 2차 전투에서 전사한
해남 의병장 임희진의 아들 임준영, 임달영(진주 제2차 전투 참전/정 3품 첨지)중 임달영이
제주도에서 돌아오면서 제주 목사 이경록의 편지와 박종백, 김응수의 편지를 가지고 왔다는 내용을
서술하고 있다].
원문해석.
1596년 병신년12월 11일 무신
(..임달영)이 김응수의 편지를 가지고 병영으로 들어왔다.
장흥 부사가 적진을 염탐하고 늦게 돌아왔다.
보조해석.
(장흥 부사 우우후가 늦게 돌아왔다가 아니고 부산 쪽(右)에 있는 적진을 염탐하고 돌아왔다는 뜻임.
후(虞/근심할후, 헤아릴후)는 적진을 염탐하여 헤아린다는 뜻이고,
候(기후후,철후 염탐후,살필후,진찰후)는 적진을 염탐하여 날씨를 살피듯이 적진을 진단한다는 뜻임.
원문해석.
(그래서 안심하고) 또 순천 낙안군수와 고흥 흥양 현감을 불러 초대해서 활을 쏘았다.(帿/과녘후).
보조해석.
(이순신이 같이 활을 쏘면서 전략 전술을 어떻게 구사할지 의견을 물어보고 구상을 하려 했던 것임.
이 당시 이름을 바로 일기에 남겨놓지 않은 이유는 차후 왜군과 동인 주리학파, 북인 조식학파 등
정적으로부터 보호해주기 위해 밝히지 않은 것임).
원문해석
초저녘 무렵 영등포 우두머리가 방인을 달고 왔다.
어린아이와 술을 또 옆에 꿰어차고 와서 술을 권하였다.
(이전에도 그러더니 또 같은 짓을 반복했다는 뜻임)
보조해석.
초저녘때 영등포 우두머리(그 지역민의 부역과 세수까지 관리하는 대령급 종 4품 만호인데,
갑자기 이름이 생각이 나지 않거나 만호로 불러주기도 그 그릇의 크기가 작고 인격의 협소함을 말할 때
사용하는 한자가 우두머리/率(솔)임. 그래서 영등포 만호를 우두머리라고 표현한 것임).^^
초저녘에 통영의 영등포 우두머리가 그 옆에 방인(아랫사람)을 꿰어차고 술을 권하는데,
(그 아이는 그전에도 데리고 왔던) 작은 어린아이를 또다시 데려 와서 술을 권하였다.
(꿰차고 다니는 작은 어린아이가 영등포 우두머리에게 술잔을 권하면서 이순신에게도
술을 먹도록 강권한 것을 이순신이 술을 깨고 나서 그 이전에도 당해봤기 때문에
뒤늦게 알아차리고 그 다음 날에 기록해 놓으면서 비판하는 상황임)
원문해석.
(그래서) 돌아가서 골아 떨어졌다.[落歸].
땀을 마구 흘렸다.[流汗].
보조해석.
[영등포 만호가 작은 어린아이를 데리고 와서 자기들끼리 술을 마시면서 이순신에게도 술을 권해
어쩔 수 없이 한두잔 마시긴 했는데, 바로 돌아가 골아 떨어져서 12월인데도 땀을 마구 흘렸다는 내용임.
이순신이 부산 출정을 거부하고 있었기 때문에 동인 주리학파 계열이 미인계로 술잔에 무언가를
탄 것이 아니냐고 의심하고 있는 상황을 일기로 남겨 놓은 것임.
그래서 이순신이 곽란으로 음식이나 술을 마시면 자주 토하는 질병을 앓게 되는 것임.
곽란(霍亂)은 상한 음식 등으로 면역력이 떨어져 쉽게 더위를 먹거나
(어린아이)분변 등으로부터 감염되는 장염인 로타 바이러스, 음식물 설겆이 통의 구정물, 콜레라,
시궁창 오염된 물에서 발생하는 노로 바이러스(바이러스와 광물이 결합한 균)등 비위생적인 세균에
노출되었을 때 발생하는 급성 위장염으로 구토, 복통, 설사 등을 동반하는 질병이다.
이순신이 구토를 자주하여 곽란병 질병을 얻음].
丙申年二月) 十二日 己酉。晴。
早昌寧人歸于熊川別庄。 朝箭竹五十。 送于慶尙水使處。 晩水使到來同話。 夕射帿。
長興, 興陽亦同。 昏罷。 小者初更更還歸
병신년 12월 12일 기유. 맑음.
원문해석.
아침 일찍 창녕사람이 웅천별장으로 돌아갔다.
경상 수사 병영으로 화살대 50개 [화살통 전통(箭筒)에 들어가는 5순]를 탄식하며 딸려 보냈다.
저녘 늦게 경상 수사가 와서 같이 이야기를 나눴다.
저녘에 장흥 부사, 흥양 현감과도 같이하여 활을쏘았다.
어두워서 과녘이 보이지않을때까지... (활을 쏘았다).
어린아이는 초경에 돌아갔다.(경상 수사가 와서 수행 일행에 미리 경상수사의 병영으로 딸려 보냈다).
보조해석.
[여기에서 창녕인 웅천 별장이 돌아갔다.
경상 수사에 딸려 보냈다.라는 귀우(歸于),송우(送于) 한자에서 굳이 于를 쓴것은 하는 행동거지마다
마음에 썩 들지 않는다.라는 탄식하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어조사 한자임.
그런 확실한 이유가 바로 뒤에 나오고 있어 증명해주고 있다.
탄식하며 돌려보내고, 어린아이는 경상 수사가 머무는 병영안에 (지휘감독)아래 두게하였다.
저녘때 경상 수사가 도착하여 같이 대화를 나누고 해가 넘어갈 때까지 활을 쏘았다.
[두번을 당했는데 또 당하라고?? 죽을 줄 알았는데 안 죽어서 재 시도??).^^
(경상 수사와 활을 쏘며 웅천 별장 창녕인을 경상수사 지휘하에 두고
어린아이는 경상 수사 병영에서 관리하게 하였다. 라는 말을 남겨 놓은 것임)
때를 맞춰 장흥 부사, 고흥반도의 흥양 현감이 와서 또 (활쏘기)를 昏罷(혼파)/어두워서 과녘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함께하였다.
어린아이는 초경(초저녘)에 돌아갔다(돌려보냈다).
[창녕 사람인 웅천 별장이 영등포 만호처럼 어린아이를 달고 다니는 광경이 아주 마음에 들지 않아,
경상 수사를 불러서 화살을 하사품(경고품)으로 주면서 경상 수사 지휘 아래 두는 상황을
일기로 남겨 놓은 기사이다.
활을 쏘면서 경상 수사가 자기 아래 두겠다고 결정하자, 어린아이는 초경/초저녘에
경상 수사가 있는 병영으로 돌려 보내도록 하였다는 기사임.
이순신은 통영의 영등포 만호에 이어 창녕의 웅천 별장에게 같은 수법으로 당하지 않기 위해,
경상 수사를 진범으로 잠정 결론을 내리고 애초에 범행을 기획한 자를 불러 들여서
어린아이를 진범에게 다시 돌려보내는 과정의 기사이다.
장흥 부사, 흥양 현감은 이순신 옆의 우군으로 든든하게 그 뒤를 받쳐 주고 있는 상황이다.
과녘이 어두워서 보이지 않을 때까지 무언의 압력을 가하기 위해 활을 쏘면서 타이르는 과정은
언제든지 반격할 수도 있다는 무언의 경고였다.
화살대만 보낸 것은 화살대에 살촉을 장착하는 그날이 오지 않기만을 바란다는 뜻이었다].
-동인 주리 학파 정권 시기였으나, 북인학파(조식학파)가 1593년부터 전란 책임을 지우며
권력을 장악해 들어가는 시기.
방인(房人)은 아랫사람이나 첩을 말하는데 영등포 만호와 웅천별장이 번갈아 가면서 데리고와서
술을 권했으므로 바로 두번째 웅천별장과의 만남에서 첩이 아니라 관기였다는 의심을 할 수가 있었다.
관기는 감영이나 목(목사)에 존재하며 역모죄이상을 지어야하고 관기로 일했지만
관노는 일반 잡일을 하기 때문에 관기와 다르고 첩은 두명의 남편을 모시지않는다.
그러므로 어린아이는 경상감영이나 목이상의 곳에서 관기로 있어야만 데리고 다닐 수가 있었으므로
경상수사를 진범으로 단정할 수가 있었다.
감영과 목이 아닌 군, 현은 관기가 없었다.
그래서 일개 종3품이하 장수가 관기를 함부로 자신의 첩처럼 취하며 데리고 다닐 수가 없었으므로
경상수사를 진범으로 본것이다.
(아파 울었다)
이런 말은 그 어디에도 없는데도 보조 해석으로 끼워 넣어 이순신을 폄하하려는 수작에
치가 떨린다.^^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는 기록이라면 이 사실이 외부로 알려져 탄핵의 대상이 될수도 있었기 때문에
절대로 남겨 놓았을 리가 없다.
[류성룡도 정적이었던 서인,동인 기록은 남기지 않고, 남인 기록만 남김.
이순신은 서인 중 호남 주기학파로 있다가 남인지역에서 활동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남서인화 되는 것임.
(1597년 정유재란 원균의 칠천량 해전 패전 이후 백의종군하면서부터 남서인화)].
이순신은 임진왜란이 일어날 것을 예견하고 1591년 임진왜란 발발 이전부터
여진족의 참전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호남지방에서는 이미 임진왜란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1587년 정여립의 왜군 지리정찰대 토벌을 통해 널리 알고 있었던 사안이었다.
또한 1583년 니탕개의 난, 1585년 니탕개의 잔당 침공전과 1586년 잔탕 소탕작전에
참가한 경험을 토대로 여진족을 임진왜란에 투입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는 흔적들이
난중일기에서 발견되고 있는 것이다.
여진은 흑룡강성의 생여진, 길림성 연해주 일대의 숙여진, 단동 일대의 예허여진[해족지역]이 있었는데,
만주에 남은 여진족 통일 쟁탈전에서 흑룡강성의 생여진[누루하치]이 통일해가고 있었다.
이때 예허 여진은 조선에 도움을 요청하여 도움을 주고있었다.
숙여진은 함경도, 일부는 예허 여진, 나머지는 동경으로 마지막으로 달아난다.
예허 여진이 생여진에 코너로 몰리게 되자 명나라를 끌어들이고 명나라는 조선을 끌어 들여
광해군의 대북정권 때 1만 2~3천여 명으로 구성된 조선군을 이끌고 강홍립이 출병하였다.
[이때 호남 사병이 비율적으로 높게 출정함]
가장 중요한 것은 이순신이 정읍 현감으로 있을 때
이이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주기철학의 대부이자 , 정신적 계승자 중 한 명인
이항 철학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주기학파 사상철학의 근간인 이성주의, 경험주의, 현실주의, 합리주의를 깨우친 이순신이
전쟁 중에 여종들과 동침했다는 말은 절대로 사실이 아니다.
임진왜란은 감숙성, 신강성의 건주 여진과 감숙성 란주시, 내몽고 자치구의 란주 여진이
몽고의 뭉케 황제, 쿠빌라이에게 동만주로 쫓기다가 고려군에 막혀 건주 여진은 흑룡강성으로 들어가
수렵 생활을 영위하는 생여진이 되고, 란주 여진은 란주시에서 금나라를 세우고 살다가
말기에 분열하여 서하국을 세우고 거란에 이어 몽고를 식민지배하였다가 동만주로 쫓겨나
숙여진이 되며 연해주에서 동하국을 세운다.
거란국은 여진에 밀려 내몽고 동부 요녕성, 길림성으로 밀려나다가 몽고군이 추격해 오자
거란 황제, 승상 등 10여만은 고려로 난입하고,
대부분이 흑룡강성 제제합이[치치하얼], 합이빈[하얼빈] 등으로 달아난다.
몽고군이 추격해오자 일부가 함경도로 들어와 야인족이 된다.
란주 여진의 주류는 길림성에 남아 있었던 일부 거란 망인과 함께 모두 사할린을 거쳐
일본 동경으로 달아나 남북국시대를 이용하여 고구려, 발해 망인계를 동북지방으로 밀어내고
동경을 차지한다.
연해주에서 문명생활을 영위한 숙여진은 려말선초 최영, 이성계 등 조선 초에도 토벌되고
김종서에게도 토벌된다.
1583년 신립[황박, 정담, 김경로, 황진, 이복남, 송상현, 선거이, 이순신]의 니탕개의 난 때도 토벌되고
1585년 이일, 이순신 등 니탕개의 잔당 침공전과 1586년 니탕개의 잔당 소탕작전 토벌 때
일부가 마지막으로 일본으로 들어간다.
그 후 여진족, 일부 거란 망인 중심으로 전국 통일을 이룬후 정명가도를 외치며
조선을 침공하게 되는 것이다.
p/s
무장[茂長]-전북 고창군[무송(茂松),장사(長沙)]지방으로 663년에 사반주(沙泮州:영광 관할]
전북 무장군[茂長郡]-무주[茂州],장수[長水],진안[鎭安]안성면등 일부 면을 떼어 만든 무장군[茂長郡]
논개[論介]가 무장군 출신임.
1596년은 진주성을 지키던 김덕령의 의병군이 7월에 일어난 한현,이몽학의 난에 연루되어 옥사를 당하자
1596년 9월 병신년에 호남 동부지방과 경남 서부지방이 무주공산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김덕령 의병 군 재편과 전장정리에 참여하기 위해 전북 무장군[무진장]으로 말을 타고 간 것으로 판단된다.
[광주 목사 최철견이 의병군 재편을 위해 딸인 최귀지를 데리고 간 상황이 증명해주고 있다]
전북 고창군은 전장터가 아니었으므로 굳이 말까지 군선에 싣고 갈 이유가 없다.
1596년 동인 정권 시기는 강화시기로 왜군이 부산 성으로 퇴각하여 전쟁을 해서는 안되는 시기였으나
왜군이 남해안 함안, 고성, 통영, 사천까지 들어오자 김덕령은 곽재우 등과 연합하여 왜군을 토벌한다.
강화시기에 왜군을 토벌했다는 이유로 동인 정권에 의해 한현,이몽학의 난에 연루되는 것은 광의의 원인이고,
윤근수의 종이 탈영하여 아비를 취조하다 죽게 만들어 충청순찰사 신경행[부여]이 김덕령을 모함하는 것은
의병 지휘권을 신경행이 지휘하지 못하게 되자 한현, 이몽학의 반란 수괴 총사로 지목하게 되는 것이다.
[협의의 원인]
[왜군이 강화 협상을 해놓고 슬그머니 남해안으로 진출하는 전략을 펼쳐 김덕령에게 토벌하도록
만들어 놓고, 호남 동부, 경남 서부전선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골칫거리인 김덕령을 제거하기 위한
이이재이 전법에 당함.
호남 동부, 경남 서부전선이 무력화되면 수군이 무너지게 되고 호남 동부 전선이 무력화되어
수군은 강화도로 옮겨갈 수밖에 없는 군사구조가 형성되는 것임.
전라 좌수영은 고군산군도, 전라 우수영은 아산 태안반도, 삼도 수군 통제영은
강화도로 옮겨갈 수밖에 없는 군사전략구조임.
이순신의 어머니와 자식들이 아산에 있어 향수병이 도지게 하여 어떻게든지 이순신의 통제영을
아산 이북으로 밀어내려고 시도했었음.
그래도 이순신이 간계에 말려 들지 않자, 왜군이 아산을 침공하여 아들을 죽이는 것임.
어머니는 배로 피신하려다가 아들이 배를 놓치는 바람에 바다로 떠밀려가 사라짐.
이 여파로 1597년 정유재란 때 남원성,전주성이 차례로 점령되고, 호남군의 후방 공략을 차단하기 위해
진주성이 재 함락되며 직산(강경 직산~ 천안 직산)까지 왜군이 북상하는 원인이 되는 것임.
조명 연합군은 안성에서 왜군과 대치].
이런 시기에 이순신이 1596년 9월에 무장군으로 말을 타고 가서 난중일기 여백에 암호처럼
기록해 놓은 여종 이름은 전쟁터에서 식량을 조달하는 여인들의 이름으로 훗날 포상하기 위해
기록해 놓은 것이고,일부 숙여진족을 지상군으로 투입시키기 위해 일기로 남겨 놓은 것이다.
김덕령이 죽자 의병군은 전라 방어사, 경상 방어사 병력으로 배속시켜 전쟁의 주도권은
의병 군에서 관군으로 넘어간다.
이순신은 이때 호남 동부, 경상 서부를 방어하던 김덕령의 의병 군을 재편하기 위하여
말을 타고 무장으로 갔던 것이 분명하다.
서인 주자학 원리주의 학파(정철,윤두수,윤근수,신립,이일,원균>후일 양광도 서인 노론학파로 이어짐)중
윤근수의 종이 탈영하여 취조하다가 죽게 만들어 체포되었다가 풀려 난 바가 있었던 김덕령을
충청 순찰사 신경행이 한현, 이몽학의 반란 수괴 총사로 엮어 죽게 만들었기 때문에
경남 서부, 호남 동부전선이 무력화되어 있었으므로 호남 주기학파 세력은
서인 주자학 원리주의 학파와 동인 주리학파, 북인 조식학파에 대한 반감이 극에 달해 있을 시기였다.
더군다나 왜군은 동인 주리학파 정권이 강화를 주장하고 있었으므로 명군과 강화 협상을 해놓고
슬그머니 함안, 고성, 통영, 사천까지 침공해와 김덕령, 곽재우 등에게 토벌하도록 만들어 놓고
강화를 위반했다며 이이재이 전법으로 처리하게 하여 이순신은 의병의 관군화 정책 일환으로
김덕령 의병 군을 재편하기 위해 무장군으로 갔던 것이며, 김덕령의 죽음으로 눈엣가시가 사라지자,
이는 왜군이 정유재란을 일으키는 주요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이치, 웅치, 슬치에서 퇴각하는 왜군이 한때 무진장에 집결하여 득실거려 피아구분이 안되어
뒤섞여서 싸웠기 때문에 상투가 잡히면 아군이고 안잡히면 죽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으며,
무주 라제통문 주변을 근거지로 너무 설처댔기 때문에 설천이라는 지명이 나왔고,
사람이 너무 많이 모인 곳을 빗대어 "무진장 많다"라는 유행어가 현존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치,웅치,슬치에서 퇴각하는 무주 무풍대첩을 치루고 나서 무풍지대라는 말이 유래하게 되었다.
이성주의, 경험주의, 현실주의, 합리주의로 대표되는 호남 중심의 주기학파[근대 이성철학파]
이항[정읍]의 제자 [김천일,황박,황진,정담,이복남,김경로,송대창,송상현,고득뢰,선거이,이순신 등
40여 명]들이 임진왜란, 정유재란 때까지는 조총을 든 왜군을 상대로 날다시피 잘 싸웠으나
인조반정 후 주기학파가 유배로 소멸하자 명맥이 끊어져, 정묘호란, 병자호란을 맞으며,
훗날 동학 농민군은 일본군에게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대패한다.[부적을 붙여주고 싸우라고 한다.]
일본군 연대병력에 동학 농민군 2~3만 명이 허망하게 무너지는 가장 중요한 원인은
주자학 원리주의 노론학파와 주리철학 변종개혁파인 남인학파의 계속된 집권으로 폐쇠된 조선으로 이어져,
진보하는게 아니라 정신철학이 퇴보하는 철학을 하였기 때문에 주기학파의 사상철학이 단절되어
쉽게 패하는 원인이 된다.
[노론의 주리철학-정이학(무극론/음양오행론),정주학(태극론/태극설)>>역술/주역등 음양오행 사상으로
작명, 사술[사주,관상], 운세, 점, 복, 부적, 태극도설, 도술[도참설], 풍수지리, 토정비결, 주술, 저주의식 등
길흉화복을 보는 도교적인 학문.
남인학파의 주리학파 개혁철학- 노자의 도교철학, 장자철학, 제자백가[백이숙제]철학을
주리철학과 융합시켜 변종 개혁시킨 철학.
노장철학은 무위자연,만물일원론으로 인생의 무상함과 우주만물을 비관론적 사관으로 바라보는 시각철학으로
한평생 자신이 살고 싶은 대로 살아가도 언젠가 깨닫는 때가 온다는 철학.
제자백가 철학은 의리와 실사구시를 중시하는 철학으로 한번 주군은 영원한 주군으로 모신다는 철학.-
노장철학, 제자백가 철학은 조식학파가 숭상한 도교철학.(순장제도가 존재하게 된 근본적 원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