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신석정辛夕汀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깊은 삼림대(森林帶)를 끼고 돌면 고요한 호수에 흰 물새 날고, 좁은 들길에 들장미 열매 붉어, 멀리 노루 새끼 마음 놓고 뛰어다니는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그 나라에 가실 때에는 부디 잊지 마셔요. 나와 같이 그 나라에 가서 비둘기를 키웁시다.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산비탈 넌지시 타고 내려오면 양지밭에 흰 염소 한가로이 풀 뜯고, 길 솟는 옥수수밭에 해는 저물어 저물어 먼 바다 물 소리 구슬피 들려 오는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어머니, 부디 잊지 마셔요. 그 때 우리는 어린 양을 몰고 돌아옵시다.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오월 하늘에 비둘기 멀리 날고, 오늘처럼 촐촐히 비가 내리면, 꿩 소리도 유난히 한가롭게 들리리다. 서리 까마귀 높이 날아 산국화 더욱 곱고 노오란 은행잎이 한들한들 푸른 하늘에 날리는 가을이면 어머니! 그 나라에서 양지밭 과수원에 꿀벌이 잉잉거릴 때, 나와 함께 그 새빨간 능금을 또옥 똑 따지 않으렵니까?
비현실적인 이상향을 설정한 현실 도피적인 시(일제 강점기의 저항적 시에 견준다면 더욱 그렇다)* 현실이 아닌 다른 '먼 나라'를 꿈꾸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당시의 억압적 상황에 대한 소극적 저항이다. →자연 친화적인 삶에 대한 서정적 자아의 낭만적인 동경이, 문명화되어 가는 현실 세계에 대한 거부 의지이며, 시적 화자가 꿈꾸는 세계는 일제 강점기에는 존재하지 않는 세계이므로 조국의 미래 즉 광복을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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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저 재를 넘어가는 저녁해의 엷은 광선들이 섭섭해 합니다.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켜지 말으셔요 그리고 나의 작은 명상의 새 새끼들이 지금도 저 푸른 하늘에서 날고 있지 않습니까? 이윽고 하늘이 능금처럼 붉어질 때 그 새 새끼들은 어둠과 함께 돌아온다 합니다. 언덕에서는 우리의 어린 양들이 낡은 녹색 침대에 누워서 남은 햇볕을 즐기느라고 돌아오지 않고 조용한 호수 위에는 인제야 저녁 안개가 자욱이 내려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늙은 산의 고요히 명상하는 얼굴이 멀어가지 않고 머언 숲에서는 밤이 끌고 오는 그 검은 치맛자락이 발길에 스치는 발자욱 소리도 들려오지 않습니다. 멀리 있는 기인 둑을 거쳐서 들려오던 물결 소리도 차츰 멀어 갑니다. 그것은 늦은 가을부터 우리 전원을 방문하는 까마귀들이 바람을 데리고 멀리 가버린 까닭이겠습니다. 시방 어머니의 등에서는 어머니의 콧노래 섞인 자장가를 듣고 싶어하는 애기의 잠덧이 있습니다.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켜지 말으셔요 인제야 저 숲 너머 하늘에 작은 별이 하나 나오지 않았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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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아사(餞餓詞)
포옹(抱擁)할 꽃 한 송이 없는 세월을 얼룩진 역사(歷史)의 찢긴 자락에 매달려 그대로 소스라쳐 통곡하기에는 머언 먼 가슴 아래 깊은 계단(階段)에 도사린 나의 젊음이 스스러워 멈춰 선다.
좌표(座標) 없는 대낮이 밤보다 어둔 속을 어디서 음악(音樂) 같은 가녀린 소리 철그른 가을비가 스쳐 가며 흐느끼는 소리 조국(祖國)의 아득한 햇무리를 타고 오는 소리 또는 목마르게 그리운 너의 목소리 그런 메아리 속에 나를 묻어도 보지만,
연이어 달려오는 인자한 얼굴들이 있어 너그럽고 부드러운 웃음을 머금고 두 손 벌려 차가운 가슴을 어루만지다간 핏발 선 노한 눈망울로 하여 다시 나를 질책(叱責)함은 아아, 어인 지혜(智慧)의 빛나심이뇨!
당신의 거룩한 목소리가 내 귓전에 있는 한, 귓전에서 파도처럼 멀리 부서지는 한, 이웃할 별도 가고, 소리 없이 가고, 어둠이 황하(黃河)처럼 범람할지라도 좋다. 얼룩진 역사에 만가(輓歌)를 보내고 참한 노래와 새벽을 잉태(孕胎)한 함성(喊聲)으로 다시 억만(億萬) 별을 불러 사탄의 가슴에 창(槍)을 겨누리라. 새벽 종(鐘)이 울 때까지 창을 겨누리라.
신석정은 첫 시집 {촛불}(1939)에서 식민 치하의 어둠과 절망의 시대 상황 속에서 어머니에 대해 느끼는 고립감과 낙원에 대한 동경(憧憬)을 노래하다가, {슬픈 목가}(1947)에서는 이러한 꿈들이 불가능함을 깨닫고는 목가적인 시풍으로 삭막한 현실과 대면한다.
해방공간과 6․25의 격랑(激浪)을 거치면서 신석정 시의 여성적 정조(情調)의 화자들은 남성적인 기개(氣槪)로써 역사와 현실의 부조리를 고발하고 부정을 깨우치려는 저항의 목소리를 드러내는데, {빙하}(1956)와 {산의 서곡}(1967) 등의 작품들이 이에 해당한다.
이 시는 관념적인 내용이라 쉽게 이해되지 않는 작품이지만, 감상의 실마리는 바로 제목 '전아사'에 있다. '전아사'의 '전(餞)'은 보내다의 뜻이며, '아(?)'는 맞이하다는 뜻이다. 즉, '송구영신(送舊迎新)'이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시인이 보내려고 하는 것은 밤이며, 맞이하려고 하는 것은 새벽이다.
그러므로 이 시는 '포옹할 꽃 한 송이 없는 세월'을 살아온 시인이 '밤'으로 표상된 고난의 역사를 보내고, '새벽'으로 표상된 새 역사를 맞이하겠다는 현실 극복 의지를 남성적 어조로 보여 주고 있는 작품이다.
대바람 소리
대바람 소리 들리더니 소소(蕭蕭)한 대바람 소리 창을 흔들더니
소설(小雪) 지낸 하늘을 눈 머금은 구름이 가고 오는지 미닫이에 가끔 그늘이 진다.
국화 향기 흔들리는 좁은 서실(書室)을 무료히 거닐다 앉았다, 누웠다 잠들다 깨어 보면 그저 그럴 날을
눈에 들어오는 병풍의 '낙지론(樂志論)'을 읽어도 보고 ……
그렇다! 그저 그럴 날을
눈에 들어오는 병풍의 '낙지론(樂志論)'을 읽어도 보고 ……
그렇다! 아무리 쪼들리고 웅숭그릴지언정 ― <어찌 제왕의 문에 듦을 부러워하랴>
대바람 타고 들려오는 머언 거문고 소리 ……
이 시는 서정의 세계로 다시 회귀한 그가 관조의 시작 태도로 직조해 낸 '유교적 은둔의 노래'로, 대나무의 곧은 기상과 굳은 절개를 시 정신의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 시에서 대를 흔드는 바람과 댓잎이 서로 부딪는 소리를 들으며 망중한(忙中閑)을 즐기는 화자의 세속을 초월한 듯한 선비의 기질이 '어찌 제왕의 문에 듦을 부러워하랴'라는 넉넉한 자세에서 나타난다.
"신석정은 적극적으로 현실을 개조하려는 지사(志士)로서의 기질은 아니지만, 멍든 역사와 얼룩진 현실을 거부하려는 선비적 기질을 가진 시인이었다."라는 평가와도 같이 이 시는 역사의 현장에서 한발 뒤로 물러선 신석정의 조용하고 차분한 관조적 자세를 잘 보여 주고 있다.
슬픈 구도(構圖)
나와 하늘과 하늘 아래 푸른 산뿐이로다. 꽃 한 송이 피어낼 지구도 없고 새 한 마리 울어줄 지구도 없고 노루 새끼 한 마리 뛰어다닐 지구도 없다. 나와 밤과 무수한 별뿐이로다. 밀리고 흐르는 게 밤뿐이오. 흘러도 흘러도 검은 밤뿐이로다. 내 마음 둘 곳은 어느 밤 하늘 별이드뇨.
이 작품은 그다지 긴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 작품의 분량이 적을 뿐만 아니라 비슷한 내용을 가진 구절들이 반복 또는 열거되면서 시 전체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작품의 내용은 단순하면서 표현이 뚜렷하다.
이 시는 어두운 시대 상황 속에서의 적 화자의 외로움과 절망감을 노래한 작품이다. '나와 / 하늘과 / 하늘 아래 푸른 산뿐이로다'에서 드러나듯이 외로움이 시 전편의 주조를 이룬다. 시인 스스로는 이 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도 역시 자연의 일부로 존재하면서 미쳐 날뛰는 일제를 되도록 멀리하고 싶었던 고달픈 작가의 심정을 절망과 암담은 가일층 박차를 가해 왔으니 끝내 나는 '슬픈 구도' 안에 묻히게 되었다.
봄을 기다리는 마음
우수도 경칩도 머언 날씨에 그렇게 차가운 계절인데도 봄은 우리 고운 핏줄을 타고 오고 호흡도 가빠도 이토록 뜨거운가? 손에 손을 쥐고 볼에 볼을 문지르고 의지한 채 체온을 길이 간직하고픈 것은 꽃 피는 봄을 기다리는 탓이리라. 산은 산대로 첩첩 쌓이고 물은 물대로 모여 가듯이 나무는 나무끼리 짐승은 짐승끼리 우리도 우리끼리 봄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것이다.
은방울꽃
나는 그때 외롭게 산길을 걷고 있었다.
그때 나뭇가지를 옮아앉으며 '동박새'가 울고 있었다.
어쩜 혼자 우는 '동박새'는 나도곤 더 외로웠는지 모른다.
숲길에선 은방울꽃 내음이 솔곳이 바람결에 풍겨오고 있었다.
너희들의 그 맑은 눈망울을 은방울꽃 속에서 난 역력히 보았다.
그것은 나의 꿈이었는지도 모른다. 너희 가슴 속에 핀 꽃이었는지도 모른다.
꽃덤불
태양을 의논하는 거룩한 이야기는 항상 태양을 등진 곳에서만 비롯하였다.
달빛이 흡사 비오듯 쏟아지는 밤에도 우리는 헐어진 성터를 헤메이면서 언제 참으로 그 언제 우리 하늘에 오롯한 태양을 모시겠느냐고 가슴을 쥐어뜯으며 이야기하며 이야기하며 가슴을 쥐어뜯지 않았느냐?
그러는 동안에 영영 잃어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멀리 떠나 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몸을 팔아 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드디어 서른 여섯 해가 지나갔다.
다시 우러러보는 이 하늘에 겨울밤 달이 아직도 차거니 오는 봄엔 분수처럼 쏟아지는 태양을 안고 그 어느 언덕 꽃덤불에 아늑히 안겨 보리라.
그의 첫 시집 '촛불'(1939)속에는 '이 밤이 너무나 깊지 않습니까'라는 시가 있다. 거기에는 '우리들의 태양이 / 지금은 어느 나라 국경을 넘고 있겠습니까?' 라는 구절이 보인다. 그리고 해방 후에 쓰여진 '꽃덤불'에도 '태양을 의논하는 거룩한 이야기∼'가 나온다.
'밤'의 어두운 상황이 그로 하여금 '태양'을 그리워하게 한다면, 일제의 사슬에서 풀려 난 후에는 태양을 이야기하는 것이 새삼스러울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리 단순치가 않다.
이 시의 후반부에는 '드디어 서른 여서 해가 지나갔다.' 다음에 이런 구절을 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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