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기가 얼마나 정확한지를 잘 보여주는 기록이다
삼국유사 > 紀異第一 > 太宗春秋公
신라 김유신이 소정방과 당군을 죽이고 구덩이에 묻었다고 기록
又新羅古傳云 “定方旣討䴡濟二國又謀伐新羅而留連. 於是庾信知其謀饗唐兵鴆之皆死坑之.”
今尚州界有唐橋, 是
校勘 369
其坑地 按唐史不言其所以死, 但書云卒何耶為復諱之耶. 郷諺之無據耶. 若壬戌年高䴡之役羅人殺定方之師, 則後緫章戊辰何有請兵㓕高䴡之事. 以此知郷傳無據. 但戊辰㓕䴡之後有不臣之事擅有其地而已, 非至殺蘇·李二公也..
校勘 369
서울대규장각본과 만송문고본, 순암수택본은 판독하기 어렵다.
또한 신라고전(新羅古傳)에 이르기를 “소정방이 이미 백제와 고구려를 토벌하고 또 은밀히 신라까지 토벌하려 계속 머물렀다. 이때 유신이 그 음모를 간파하고 당나라 병사들에게 잔치를 베풀고 독주를 먹여 모두 죽이고 그들을 구덩이에 묻었다.”고 하였다. 지금의 상주(尙州)
註 705
외곽에 당교(唐橋)
註 706
가 있는데 이곳이 그들을 묻은 땅이라 한다 당사(唐史)를 살펴보면 정방이 죽은 원인에 대해 말하지 않고 다만 ‘죽었다’라고 되어 있는 것은 어떤 이유인가? 역시 [당나라에서] 꺼린 것일까? 향언(鄕言)이 근거가 없는 것일까?
만약 임술년(壬戌年)에 고구려의 토벌이 있었는데, [이때] 신라인들이 정방의 군사를 죽여 버렸다면 이후인 총장 무진년(戊辰年, 668)에 어떻게 [당나라에] 병사들을 청하여 고려를 멸망시킬 수 있겠는가.
이로서 향전이 근거가 없음을 알 수 있다.
다만 무진년에 고구려를 멸망시킨 이후 신하로서 섬기지 않고 고구려의 땅을 멋대로 점령하였을 뿐이지 소정방과 이적 두 사람을 죽이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았다.
註 705
현재 경상북도 상주시 일대를 지칭하는데, 사벌국(沙伐國)이 신라에 복속된 뒤에 사벌주, 혹은 상주로 개편되었는데 소백산맥 이동 지역의 교통상의 요충지에 해당하는 곳으로 신라의 대외적 팽창의 전진기지 혹은 배후기지 역할을 수행한 지역이다(이용현, 「삼국시대의 상주 -중고기 신라 경영의 시점에서」, ≪상주 영남 문물의 결절지≫, 국립대구박물관, 2003).註 706경상북도 문경시 모전동과 상주시 함창읍 윤직리의 경계인 모전천(茅田川)에는 있었다는 다리인데, 김유신이 소정방과 당의 군사를 죽여서 묻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9 경상도 함창현 교량조에서도 당교와 관련하여 ≪삼국유사≫와 유사한 기록을 전하고 있다.
https://db.history.go.kr/item/compareViewer.do?levelId=sy_001_0020_0360_0190
https://m.blog.naver.com/bogirang/222039821531
[윤용섭의 신삼국유사]
삼국유사는 말한다. 또한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총장(總章) 원년(668년)에 당군(唐軍)이 평양 교외에 주둔 하면서 서신을 보내어 급히 군수물자를 보내달라고 했다. 왕이 여러 신하들을 모아놓고 묻기를, “적국에 들어가서 당병이 주둔하여 있는 곳으로 가기에는 지세가 험하여 극히 위험하다. 그러나 당나라 군사의 식량이 떨어졌는데도 군량을 보내지 않는다는 것은 역시 옳지 못하니 이를 어찌하면 좋겠는가?”하였다.
김유신이 아뢰었다. “신 등이 능히 군수물자를 수송하겠으니 청컨대 대왕께서는 심려치 마시옵소서.”
이에 유신과 인문 등은 군사 수만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국경 안으로 들어가 군량 2만곡을 수송하여 주고 돌아오니 왕은 크게 기뻐하였다.
또한 군사를 일으켜 당군과 합세를 하고자 먼저 연기, 병천 등 두 사람을 보내 회동할 날을 묻자 당나라장수 소정방이 종이에 난새(鸞)와 송아지를 그려 보내 주었다(紙畵鸞犢二物).
사람들이 그 뜻을 몰라 원효에게 청해 물으니, 해석하여 말하기를., “군사를 속히 돌이키라는 말이다. 난새와 송아지를 그린 것은 두 반절(反切)을 이른 것이다.”라고 풀이하였다.
즉, 원효는 송아지와 난새의 그림을 ‘화독화란(畵犢畵鸞)’의 반절음으로 읽고 ‘속환(速還)’의 의미로 해석했다. ‘화독(畵犢)’의 반절음은 ‘혹’이 되고, ‘화란(畵鸞)’의 반절음은 ‘환’이 된다. 합하면 ‘혹환’이 되는데 ‘속환’과 음이 비슷하다. 물론 ‘혹’과 ‘속’은 음이 다르나, 당시 신라 음에는 ‘혹’과 ‘속’이 통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튼 원효가 암호를 해독해 주었기에 많은 신라군이 위기를 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에 유신은 군사를 돌이켜 패수를 건너려 할 적에 군령으로 나중에 강을 건너는 자는 베리라 하였는데, 군사들의 반이 강을 건너갈 적에 고구려 군사가 와서 미쳐 건너지 못한 병사들을 죽였다. 다음날 유신은 고구려 병사들을 추격하여 수만 명을 죽였다.
『백제고기(百濟古記)』에 이르길, “부여성 북쪽 모서리에 큰 바위가 그 아래 강물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서로 전하여 이르기를 의자왕과 여러 후궁들이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차라리 자진을 할지언정 남의 손에 죽지 않겠다. 하여 서로가 이끌고 와서 강물에 몸을 던져 죽었으므로 속칭 타사암이라 한다.” 고 했으나, 이것은 속설이 와전된 것이다. 다만 궁녀들은 그곳에서 떨어져 죽었으나 의자왕이 당나라에서 죽었다는 것은 당사(唐史)에 명문으로 전한다.
또한 『신라고전(新羅古傳)』에 이르기를, 소정방이 백제와 고구려를 치고 또 신라도 치려고 머물러 있었다. 이 때 유신이 그 모의를 알고 당나라 병사들을 초대하여 향연을 베풀고 독약을 먹여 죽이고는 구덩이에 묻었다. 지금의 상주 경계에 당교(唐橋)가 있는데 이것은 그들을 묻은 땅이라고 전한다.
당교에서 김유신이 소정방을 죽인 사실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29 경상도(慶尙道) 함창현(咸昌縣) 교량(橋梁)조에도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당교(唐橋). 현의 북쪽 6리에 있다. 신라고기(新羅古記)에, “소정방이 이미 고구려와 백제를 치고 또 신라를 치려고 여기에 머물렀을 때, 김유신(金庾信)이 그 계획을 알고, 당의 군사에게 잔치를 베풀어 취하게 하고 모두 여기에 묻어 죽였다. 뒷날 사람들이 그것으로 당교라고 이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