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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석모도수목원’에서
― 청도김씨 교동파 김구보씨의 내력
양태부(향토사학자, 수필가)
올해 만 40세인 김구보씨는 강화도 ‘석모도수목원’에서 같이 일하는 짝입니다. 같이 한다고는 했지만 사실은 그가 주된 일꾼이고 나는 보조자입니다. 지난 1년여 동안 석모도 상봉산 중턱에 자연휴양림과 수목원이 조성된 내력과 원 내부 곳곳의 현장 상황들에 대해 다양한 지식과 경험을 가진 그와 참 많은 시간을 함께 했습니다. 내가면 황청리에서 석모대교를 건너면 바로 만나는 삼산면 석모리의 토박이로 태어나서 자란 그는 병역 의무를 마치고 한동안 자기 집에서 민박집 등을 운영하다가, 이윽고 사회에 발을 디딘 첫 직장이 여기 수목원이라는군요. 그렁저렁 청춘의 10년 세월을 꽃나무들을 심고 가꾸고, 물과 비료를 주어 키우고, 혹시 병충해를 입지나 않을까 식생(植生)들을 잘 보호·관리하는 것이 그의 오랜 임무이자 직업이 되었습니다. 이러하니 조금의 과장 없이 그를 수목원 역사의 살아있는 증인이라 말해도 되겠습니다.
정년을 얼마 남기지 않은 늙은 먹물의 일은 막냇동생 뻘 젊은 그의 뒷자리를 돕는 것입니다. 겨우내 그가 벌목한 통나무의 잔가지들을 옮기고, 물탱크의 물을 살피고, 살충제를 뿌리고, 예초기를 돌리고... 송풍기와 삽과 호미 등 농기구와 장비들을 챙기던 갖가지 일들은 세월이 지나면 구보 아우와의 좋은 추억이 될 것입니다. 그는 이러한 모든 일에 능란한 전문가입니다. 여러 꽃과 나무, 산나물들의 이름과 그들의 사계절의 삶도 나는 구보씨에게 배웠습니다. 복수초,원추리,노랑꽃창포,금잔화,수국... 상수리·떡갈·신갈·굴참·갈참·졸참들의 참나무 6형제와 은사시,물푸레,소사,용버들,수양단풍,오가피,생강,다릅,어름,개살구,엄나무들과, 봄 숲의 연한 엄나무 새순인 개두릅과, 돌단풍,산더덕,비비추,곰취,머위,싱아 등등등... 일하는 틈틈이 두런거리는 숲속의 이야기와 사연들을 그에게서 듣노라면 ― 나는 이 석모도의 햇빛과 바람 속에서, 흙과 풀들과 돌 틈에서, 뿌리와 가지와 열매와 이파리의 생명을 소중히 키워가는 것은 저기 보이는 저 꽃나무들만이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곤 하였습니다. 정녕 그렇습니다. 자신의 땀과 소망이 곳곳에 배어있는 수목원 숲의 생태환경을 누구보다 사랑하고, 석모리의 동네 이웃들과 직장 동료들 모두에게 밝은 성품과 성실성을 인정받는 김구보씨는 자기에게 맡겨진 일에 남다른 자부심과 보람을 가지고 오늘을 살고 있는 늘 잘 웃고, (하하하하~ 수목원의 맑은 대기 속에 퍼져나가는 그의 호탕한 웃음소리는 힘든 노동의 시간을 순식간에 잊게 해주는 청량제입니다.) 든든하고, 튼튼하고, 멋진 강화도의 남자입니다.
최근 김구보씨는 오랫동안 집안에 보관해오던 고문서와 전적(典籍) 등 가전 유물 일체를 ‘강화역사박물관’에 기증하였습니다. 『병산선생문집(缾山先生文集)』 (초고)필사본과 호구단자, 준호구, 교지, 무관흉배와 호패, 그리고 일제시대의 근대유물 자료까지를 포함하는 100여 점입니다. 나는 구보씨가 이런 ‘큰 마음을 낸 것’에 대해 경의를 표하며 진정한 우정을 전하는 바입니다. 기증에 앞서 집안의 장자(長子)로서 그가 느꼈을 무거운 부담감 속에는 바로 곁에서 이를 지켜본 나의 마음도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 가문의 가보였던 이 유물들은 강화군청 박물관 행정의 매뉴얼에 따라 가치를 평가하고 예산을 계획하는 등의 공적 절차가 진행되고 있으므로, 언젠가 멀지 않은 장래에 ‘기증유물전’이나 ‘연구책자 발행’ 등의 구체적인 성과로 이어지리라 기대합니다. 바라건대는 부디 눈 밝은 전문연구자들이 참여하여 1914년 통합 이전 옛 강화부(江華府)와 교동부(喬桐府)의 교류관계와 당시의 사회제도와 생활상 등을 알려주는 강화도 역사 연구의 기초자료로 잘 활용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다음부터의 이야기는 기증 전후의 수개월 간 이러한 김구보씨와의 관계에서 알게 된 그의 가문의 내력(來歷)에 관한 나의 ‘해석학(解釋學)’입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행정적 절차와 향후 보게 될 연구결과물과는 별도로, 나는 나의 방식으로 ― 이 모든 과정들에 대한 시말(始末)과 감상(感想)들을 잊지 않게 기록해두어야만 할 것 같은 의무감이 있습니다. 이는 또한 구보씨가 그동안 보내준 신뢰와 배려들에 대한 나의 작은 예의이기도 할 것입니다. 어쩌면 나도 이 이야기를 통해 지나간 세월의 인연(因緣)들과 공부를 반추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공부의 처음은 어느 날 그에게서 건네받은 한 문서의 단순한 텍스트(text) 읽기를 통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구보씨 집안의 역사 자료들이 점점 더 발견되자, 관련되는 여러 지인과 전문가들에게 조언과 자문을 구하는 과정이 병행되었습니다. ‘꽃 피는 봄 산처럼’ ― 역사로부터 온 뜻밖의 선물에 놀라워하며, 구보씨와 나는 우정 휴가를 내어 바다 건너 교동도 화개산으로 실제 현장답사와 탐문을 통해 이 사태에 대한 생각과 해석을 더욱 진전시켜 나아갔습니다. 그리하여 처음에 본 작은 이해가 우리가 기왕에 알고 있던 역사 지식의 전체 맥락(context) 속에서 다시 새롭게 이해되고 해석되어지는 ‘생각의 진화(進化)’와 ‘정신의 고양(高揚)’을 함께 느끼기도 했습니다. 아마도 이 이야기들에서 20세기 초 일제강점기시대 석모도 감리교회의 선교 역사와 기독교적 지평을, 더욱더 깊은 시간을 횡단하여 16세기 후반 조선의 성리학과 유교가치관적 지평 속을 살다간 선조들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역사를 생각하는 일은 ‘시간의 광부(鑛夫)’가 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마에 탐조등(헤드라이트)을 켜고, 손에는 드릴을 움켜쥔 노련한 광부처럼 캄캄한 시간의 지층(地層)과 그 단면을 파헤쳐 내려가다 보면, 어느 순간 여러분도 눈앞에서 번쩍! 하며 인사하는 한 눈부신 광맥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내가 그러하였습니다. 놀.랍.게.도! 나는 교동도 상룡리 화개산 중턱의 한 묘지 앞에서 퇴계 이황의 진적(眞迹)과 그의 정신을 마주하게 된 특별한 일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개인적으로 강화 향토사의 오래된 의문 하나를 풀게 되었으며, 김구보씨의 가전 자료들을 바탕으로 강화도 인문학의 전통에 ‘청도김씨 교동파(淸道金氏 喬桐派)’를 퇴계와 김봉상 형제들과 함께, 전윤서와 전순필과 함께 ― 보다 친밀하게 현재와 연결할 수 있는 한 스토리텔링(storytelling)을 구성하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병산선생문집』의 내용도 이미 발견되어 학계에 보고되어 있는 『선조강화선생일기(先祖江華先生日記)』와 함께 또 다른 맥락에서의 정독(精讀)이 필요한 듯도 싶습니다. 한 가문에서 100년 이상 보관해 온 40 점의 ‘호구단자’와 ‘준호구’도 특별한 경우라는데, 그중 강화도에서 가장 오랜 것으로 보이는 건륭3년(영조14년, 1738) 호구(戶口) 속 인물들은 과연 어떤 선조들인지 궁금합니다. 단자를 읽어보니 그들은 현재 수목원에서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삼산면 상리, 옛 교동부의 송가도(松家島)에 살았습니다. 아~, 그들은 어디에서 왔을까? 저 섬에서 어떻게 살았을까? 지금도 어디엔가 그들의 자취가 남아있을까...? 나는 이러한 옛날의 일들이 궁금해졌습니다. “하하하하~” 사람 좋은 웃음을 터트리며 구보씨가 누군가와 대화하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분명 구보씨의 선조이려니, 저기 저 성실한 ‘농촌 노총각’의 내력을 유심히 추적해 내려가다 보면, 어디선가 궁금한 옛사람들의 흔적을 발견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래서, 나는 이보다 더 오래고 먼 까마득한 태고(太古)의 이야기를 여기에 덧붙이게 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장면 #1, 김영진(金英鎭) ― 석모도 기독교 역사의 한 부분
지난 2월 어느 토요일 아침입니다. 며칠 전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등 4개 부문을 수상한 봉준호 감독의 고려(高麗) 때 원래 고향이 강화도 하점면이라는 이야기(봉씨는 모두 ‘하음봉씨’ 봉우의 자손입니다.)를 하며 둘이 시시덕거리며 함께 기뻐했던 바로 그 주말이었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 구보씨와 매표소 근무를 함께 하는 날인데, 근무 준비를 다 마치고 나자 그가 불쑥 나에게 물었습니다.
“형님! 혹시 한자(漢字) 좀 읽을 줄 아세요?”
“음~, 조금은 읽을 수 있는데... 무슨 일이 있나?” (나는 무슨 법률적인 문제가 있나 했습니다.)
조금 머리를 긁적이던 그가 금방 자기 차에서 한 문서꾸러미를 가져와서는 내 앞에 보입니다. 수료증, 졸업증서 등과 사진들이 포함된 꾸러미입니다. 옛 문서들을 한 장, 한 장, 소중히 펼쳐서 보여주며, 구보씨가 멋쩍은 듯이 말합니다.
“할아버지 때부터 집에 내려오는 문서들인데... 저희 세대는 한자를 제대로 못 배워서요.
이게 다 무슨 내용인지 알고 싶네요. 알아보고 쓸데없는 문서라면 정..리 해야겠지요?”
“정리..라니, 아니 왜? 집안 어른들의 졸업장 같은데... 잘 보관하다가 구보씨도 할아버지처럼 아들, 손자들에게 물려주어야지. 어디 한 번 아는 데까지 읽어봅시다. 난 일본어는 모르지만, 한자만 읽어도 대충은 알 수가 있겠네요. 문서의 주인공은 김정례이고, 대정(大正)12년...이면? 구보씨! 핸드폰에 대정12년이면 몇 년이 되는지 한 번 찍어 봐요.”
구보씨는 내 말을 듣자마자 잽싸게 검색해봅니다.
( ― 이럴 때, 스티브 잡스는 정말로 위대합니다. 내 손 안의 컴퓨터, 스마트폰!)
“대정12년? 1923년인가 본데요! 근데... 대정이 뭐죠?”
“일본 다이쇼(大正) 천황 시대의 연호라오. 왜 소화 몇 년이니 하는 말 들어보지 않았나? 대정은 메이지(明治) 천황의 아들이고, 태평양전쟁의 항복을 선언한 히로히토(裕仁)의 아버지이죠. 이런 건 솔직히 부끄러운 거야. 나라를 일제에 뺏겼으니 일본연호에 맞춰 몇 년 몇 년이라고 쓸 수밖에 없지 않았겠소? 김정례씨는 대정4년 8월생이니 서기 1915년생이 되는군요. 그리고 대정12년인 1923년 9살에 ‘사립부흥여학교’라는 곳에서 1년 과정을 마쳤다는 수업증서네요. (그런데 부흥(富興)여학교는 어디야? 부천(富川)인가? 석모도하고 부천하고 관계가 있나...?) 요즘의 무슨 학원수료증 같은 거네. 그런데 이 분은 구보씨의 할머니가 되시는가?”
“어? 우리 할머니들은 고(高)씬데? (잠시 생각하더니) 아~, 그러면 우리 할아버지 누이들 같은데요! 왕고모가 두 분 계시다는 말을 어릴 때 들은 적이 있어요. 맞아요. 김정례, 김순례는 고모할머니들이네! 죄송합니다요. 이름을 몰라서...” (다른 문서에는 김순례의 졸업장도 있었습니다.)
“죄송하기는, 할머니 성함 모르는 이들도 얼마나 많은데, 왕고모 이름까지야 누군들 알겠소?”
“그렇기는 하네요... 하하하하~”
나는 문서와 사진들을 들여다보며 그가 기억하는 여러 관계된 이야기들을 들었습니다. 증조부(金英鎭,김영진) 조부(金浩燮,김호섭) 아버지(金奎植,김규식)에 관한 이름 정보와, 이들 선조 3대와 그 일가붙이들이 석모도에서 뿌리내리고 살아오신 대강의 내력을 듣노라니, 돌아가신 내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추억이 자연스럽게 오버랩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는 일제강점기를 거치고, 해방과 6.25 전쟁, 이승만과 박정희 시대를 헤치고 살아온 우리 (할)아버지 세대들의 ― 때로는 신산(辛酸)스럽고, 때로는 행복하기도 한, 그 시대 어느 집안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일반적인 삶의 사연들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중에 특별한 것으로 증조부인 김영진님은 원래 교동에 사셨는데, 이곳 석모도의 고(高)씨 댁에 ‘데릴사위’로 오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연이 있었는지는 구보씨도 모른답니다. 다만 그 연유인지 선친과 조부께서 교동으로 시향(時享)를 모시러 다녔던 것을 기억하고, 자기 집안이 “‘청도김씨 교동파’로 불린다.”라는 점과 「대동여지도」를 만든 고산자(古山子) 김정호가 같은 청도김씨라는 것 등입니다. 선친께서 또 그 선친에게 들어 전하기를 증조부님은 엄청나게 부지런하셨답니다. 그런 성실함 가운데서도 깊은 신앙심과 문자(文字) 속이 있으셨던지, 늘상 한자로 된 성경책을 외우시며 논과 밭을 일구었다고도 합니다. 와~ 한문성경(漢文聖經)이라니! 불교, 유교, 기독교, 이슬람교 등 세상의 여러 종교들을 모두 ‘문화적 현상’으로 이해하고, 특별히 “믿음이 좋다!”느니 하는 기독교 신앙에 대해 깊이 알지 못하는 나로서는 김영진님이 과거에 ‘석모감리교회’의 장로 직책으로 오랫동안 교회의 살림을 맡으셨고, 그로 인해 김구보씨의 집안이 4대 120년 동안 기독교 모태신앙(母胎信仰)이라는 점도 무척이나 인상적인 대목이었습니다.
‘아~, 이런 부분들에 대해 잘 아시는 분이 계신데...’ 나는 김영진님이 초대 장로였다는 ‘석모감리교회’의 이야기에서 무언가 집히는 데가 있어, 바로 강화중앙교회의 ‘L장로’님께 전화를 드려보았습니다. 장로님은 ‘사)강화3.1운동기념사업회’의 이사장이고, 무엇보다 ‘강화기독교역사연구회’를 운영하고 계신 분이므로, 강화 기독교에 대한 보다 상세한 이야기에는 단연 전문가라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전화 드린 요지를 말씀드리고, 장로님이 요청하시는바 김구보씨 4대의 정보를 사진과 함께 문자로 보냈습니다. ― “뭐 다른 게 있나 한 번 살펴봐 주세요!”
(위는 이때 제가 찍어 장로님께 보내드린 여러 사진자료 중 하나입니다.)
2시간 여 후에 유선으로 들려주신 장로님의 답변은 대략 다음과 같았습니다.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전화를 받고 교회사의 옛 자료들을 찾아보니 반갑게도 김영진(1대), 김호섭(4대) 장로님의 이름들이 보이네요. 먼저 학교 이야기부터 합시다. ‘사립부흥여학교’는 석모교회에서 목회와 함께 운영한 요즘의 유치원, 초등학교 같은 곳이에요. 을사늑약(1905년) 이후 일제강점기 초기와 3.1운동기를 전후로 해서 강화도 전역에는 기독교 신앙으로 설립하고 운영하다가 사라진 많은 사립학교들이 있었어요. 대표적으로는 이동휘 선생이 설립한 ‘보창학교’(普昌學校) 같은 곳이죠. 수업증서를 보니 그런 사립학교인 것이 분명하네요. ‘석모감리교회’(1901, 3. 3 설립)에서 김영진 장로님은 (대정12년 전의 어느 해에) 윤희일 목사를 교장으로 모셔다가 초급학교의 과정을 교육하며, 자신의 두 딸들도 부흥여학교에 보냈으리라 생각됩니다. 우리는 그 당시의 학교 수료증과 졸업증서들을 알게 된 것이지요. 여기에서 석모감리교회와 ‘부흥여학교’의 관계는 강화읍에서 잠두교회(‘강화중앙교회’의 전신, 1900, 9. 1 설립)와 ‘제일합일여학교’와의 관계로 설명이 가능합니다. 거듭 강조하지만 당시의 교회들은 공립학교가 생기기 전 초급학교의 역할을 대신했습니다. 다음으로는, 사진 속 윤희일(尹希一) 교장의 이름에서 마지막 한자 ‘일(一)’이 중요합니다. 현재 합일초등학교 교명에서의 ‘합일(合一)’도 그렇지만, 이는 “주 안에서 ‘한 형제(一)’가 됨”의 의미에서 초창기 신자들이 자신의 본래 이름을 버리고 새롭게 지은 이름이에요. 내가 예전에 당시의 관련 자료들을 살펴보았더니, 박능일, 권신일, 윤정일, 김봉일, 정천일... 등 같은 ‘일자(一字)’ 돌림으로 개명하신 분의 숫자가 60여 명에 이른다는 걸 알고 매우 놀랐던 적이 있습니다. 이는 다른 지방 어디에도 볼 수 없는 강화도만의 특별한 케이스이기도 하지요. 이와 같은 독실한 기독교 신앙과, 교육을 통한 애국계몽운동의 저력들이 모여, 교회를 중심으로 1919년 기미 ‘3.1독립만세운동’이 온 강화도 전체로 들불처럼 퍼져나갔다는 점도 강화 기독교 역사에서의 큰 업적이자 자랑이기도 합니다. 이런 사실들로 상상해보면 김구보씨의 증조이신 김영진 장로님는 당시 석모리 지역사회의 선각자이자 ‘오피니언 리더’셨다고 짐작이 됩니다. 님은 교동에서 오셨다고 했죠? 제가 또 확인해보니 ‘교동감리교회’가 1899년에 설립된 걸로 나와요. 어쩌면... 김영진님은 교동에서부터 이미 신자였을지도 모르고, 만약 그렇다면 ‘석모감리교회’를 개척하신 분들 중 한 분임이 분명합니다. ‘한문성경’의 문제는 나도 잘 모르겠어요. 만약 그런 게 있다면, 참 귀한 자료가 될 터인데... 구보씨는 훌륭한 할아버지를 두셨어요. ‘강화 교회사’를 연구하는 나에게는 보여주신 사진과 이야기들은 귀중한 참고 자료가 되겠습니다. 언제 김구보 집사와 함께 석모교회를 한번 찾아보고 싶네요. 보통은 교회에서도 선대 신자들의 교회사 자료들을 잘 보관하는 법이거든요.”
김구보 집사는 L장로님의 설명에서 무척이나 감정이 고무되었나 봅니다. 아무렴~, 어린 시절 할아버지 손에 이끌려 다녔던 지금의 교회가, 장로님의 설명처럼 강화도의 초기 기독교 역사라는 큰 맥락에서 보니, 증조부님의 신앙과 집안의 옛 자취들이 더욱 새롭게 다가오는 것이겠지요. 잠시 묵묵하던 그가 또 한 기억을 끄집어내었습니다.
“아하~, 그랬었군요. 돌아가신 할머니의 말씀이 새삼 떠오릅니다. 교회에서 오는 손님들이 어찌나 많으시던지... 그 많은 손님들에게 따신 밥을 해서 모시느라고 무척 힘드셨다고 하셨어요. 하기야 교회가 바로 코앞이니, 장로님 집에서 식사를 할 수 밖에 없었겠군요. 지금처럼 식당도 없을 때이니... 나는 그 후손으로, 조부님들께서 그런 분이셨다는 게 지금의 제 부실한 교회생활을 돌아보게 해주는 것도 같습니다. 그런데, 그 ‘일자(一字)’ 돌림! 말인데요. 증조부님은 왜 ‘영진(英鎭)’ 이름을 그대로 쓰셨을까요? ‘영일(英‘一’)’로 개명하실 법도 한데 말이죠.”
“(직계 손자가 모르는 걸, 내가 어떻게 알겠소! 그래도...) 생각해보자면 아무리 기독교라는 새로운 이념이 들어와서 그걸 믿더라도, 바로 그 이전 시대의 가치관이나 전통을 아예 무시할 순 없지 않았을까? 철학적으로 모든 인간은 ‘세계―속의―존재’(하이데거)이고, 그에 따른 가다머의 해석학에는 ‘지평(地平)’이라는 중요한 개념이 있어요. 조부님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 이미 조선 사회에 쌓여 있었고, 또 그분이 성장하며 그 사회적 전통들을 내면화(內面化)하면서 배워온 어떤 지적 전통, 세계관, 가치관 등을 ‘그 시대의 지평’이라 부르는데, 처음 영진조부님의 그것은 주자성리학이라는 전통 ‘유교문화’의 지평이었겠죠. 그런데 그 시대는 이미 500년 조선의 유교문화가 서서히 쇠락(衰落)하는 시기였고, ‘병자수호조약’(1876년) 이후 인천이 개항(1883년)되자, 마침 강화도에는 외국 선교사들이 들어와 전도를 하며 ‘기독교적 세계관’이라는 전혀 새로운 지평이 막 열리고 있었던 것이죠. 이런 상황들에 위협을 느낀 구한말의 박은식 선생 같은 분은,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처럼 우리 유교계도 열정적으로 종교개혁을 단행하여 조선과 동양에 신문명의 길을 열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어요. 그런 주장이 「유교구신론(儒敎求新論)」 같은 글로 남아 있기도 합니다. 나의 상상이지만, 김영진 조부께서는 박은식의 소망처럼 망해가는 나라의 유교 전통을 새롭게 하느냐? (박은식은 그것을 ‘양명학’(陽明學)에서 찾았어요. 구보씨도 정제두를 비조로 하는 ‘강화학(파)’라는 말은 들어봤죠? 조선의 양명학 연구는 우리 강화도에서 처음 시작되었어요.) 아니면 새로운 가치관이자 세계관인 서양의 기독교문화를 받아들이느냐? 라는 경계에서 분명 남모르는 번민이 있었으리라고 봐요. 그러다 우리가 모르는 어떤 계기가 와서, 결국 새로운 세계관인 기독교 신앙을 결심하고 선택하신 것이었겠지.
이런 ‘역사적 관점’을 깔고 이 개명(改名) 문제를 추측해봅시다. 조부님이 청년으로 살았던 시대의 구한말(舊韓末) 사회는 ― 갑오개혁(1894년) 때 공식적으로 혁파되었다고는 하지만, 반상(班常)이라는 신분제의 차별이 여전히 잔존하던 시기였어요. 그런데 서양 선교사들이 말하는 “하나님 안에서는 빈부귀천 없이 모두가 ‘한 형제(一)’이고, 예수를 믿으면 누구나 영생(永生)을 얻는다!”라는 새로운 기독교적 가치는, 그야말로 불평등한 사회와 치욕의 역사를 바꿀 수 있는 새로운 대안(代案)이고 개안(開眼)으로 보이지 않았겠어요? 그래서 진보적인 사람들은 아예 개명까지 하면서, 자신이 열렬히 믿고 추구하는바 기독교적인 신앙의 가치를 끝까지 지켜 가신 것이겠지요. 청년 김영진은 이 부분에서는 보수적이지 않았을까...? 조부님의 입장에서는 항렬자(行列字)를 넣어 조상님이 지어주신 귀한 이름까지야 함부로 바꿀 수 없다는 생각을 가졌으리라고 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유교문화’의 전통시대에는 항렬자를 보고 형제(兄弟)와 숙질(叔姪)을 구분했어요. 우리는 여기에서 일단, 조부님께서 고민 끝에 ‘중도(中道)’를 택하셨을 거라 예상해보기로 합시다. 만약 이 추측이 맞는다면, ‘문화주의자’로서 나는 조부님의 길이 합리적이고 지혜로운 판단이었다고 봅니다. 왜? 굳이 개명까지 않더라도 신앙생활은 할 수 있는 것이고, 그것이 현실적으로도 석모리 지역사회의 기독교 전도에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보는 것이죠. 이것은 문화 ‘수용자’(consumer)의 경우이고, 반대로 문화 ‘전파자’(messenger)의 입장에서도, ― 코프(Corfe) 주교가 지은 강화읍의 ‘성공회 강화성당’(1900, 11. 15 건립, 사적 제424호)의 건축을 떠올려 봐요. 다른 무엇들보다 우선 교회의 외양을 한옥(韓屋) 형태로 만들었기 때문에, 영국 성공회가 유교문화의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는 강화도의 원주민 사회에 큰 거부감 없이 스며들 수 있지 않았을까요? 사람들은 대개 이질적이고 급격한 문화적 충격은 잘 받아들이질 못하잖아요. 이를 문화적인 용어로 ‘습합(習合)’이라고 합니다. 답변이 길었네요. 이 문제의 실체야 물론 영진 조부님만이 아는 일이겠지요. 나는 질문에 대해 나름대로 추론했을 뿐이랍니다. 사실 나는 L장로님의 말씀에서 당시 그 ‘일자(一字) 돌림’으로 개명하신 박능일, 권신일, 윤희일 등 기독교 성도들이야말로 정말로-, 굉장히-, ‘용감’한 분들이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어떻게 ‘이름’까지 바꿀 생각을 했을까? 이런 것이 내가 모르는 신앙의 힘일까?)
“지평이라...! 해석학이라? 문화주의라? 조금 이해가 되긴 하지만 어렵네요. 그런데, 우리 목사님이 형님의 그 ‘문화주의’ 말을 들으시면, 절대로 동의하지지 않을 것 같은데요! 하하하~”
“어찌 쉽게만 살 수 있겠어. 가끔씩은 어려운 문제도 생각해 봐야지요. 그리고 목사님이 말씀하실 것 같은 ‘믿음’과 내가 말하는 ‘문화’는 다른 ‘지평’이에요. 보통 직업적인 개신교 목사님들이 설교하시는 ‘계시’나 ‘기도’를 통한 기독교적 지평은 여타의 다른 지평들을 모두 자신의 지평으로만 빨아들이려고 하는 경향이 있어요. (구보씨 목사님이 그렇다는 건 아니니까, 오해하진 말고...) 나는 성경에서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섬기지 말라!’는 모세 율법은 ‘내 지평 외의 다른 지평은 생각지 말라!’는 타 지평의 금지규정과 다름이 없다고 생각해요. 근본적으로 ‘닫힌 구조’라고 할까? 문화는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여러 개의 지평을 갖고 말하는데, 종교(특히 일부 개신교)는 ‘믿는 만큼 보인다!’는 단 하나의 지평만을 가지고 세상을 이해하는 것 같습니다. 혹시 어떤 신자의 ‘믿음이 좋다!’라는 말이, 이와 같은 하나의 지평만을 용인하고 격려하는 것이라면, 나는 그것이야말로 독선(獨善)의 도그마(dogma)임이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지평’이야기를 하니까 말인데, 구보씨는 21세기 현재 ‘우리 시대의 지평’은 무엇이라고 생각해요? ― 나는, 현대는 ‘과학’(科學, science)의 시대이고, 자본주의의 공화정(共和政) 체제 속에서 시민들 개개인의 ‘차이’와 ‘다양성’을 존중하는 ‘민주주의’ 지평의 시대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강화도의 ‘일자(一字) 돌림’ 신앙도 100년 전의 지평에서는 분명 유효하고, 또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면이 있다고 봐요. 왜냐하면, 초기 신자의 입장에서는 성경 속 고난받는 유대 민족의 역사와, 당시 ‘식민통치’ 하 우리 조선 민족의 처지가 같다고 느꼈을 테니까... 그러나 21세기인 오늘날에도 일부 교회들이 자기들만이 세상의 중심이고, 나의 세계관만이 진리이니 ‘(나를 중심으로) 하나가 되자!’라고 강요하는 듯한 배타적(排他的) 선교방식은 재고해야 합니다. 『열린 사회와 그 적들』 (The Open Society and Its Enemies, 칼 포퍼) 이라는 책이 있어요. 자유로운 토론과 비판을 통한 ‘열린 사회’에로의 지향이 인류가 공존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가치라는 주장이죠. 현대는 다른 지평의 문화들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정말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강화백북스’에서 연전에 읽었던 『보살 예수』(길희성) 라는 책에서도 이런 성찰이 담겨 있었어요. 이런 걸 넓게 표현하는 ‘통섭’(統攝, consilience)이나 ‘똘레랑스’(tolerance, 관용:寬容)라는 멋진 말이 있답니다. (우~, 내가 꼭 ‘꼰대’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구만...) 그러나 우리가 책을 읽거나, 또는 지금처럼 상대방과의 대화를 통해서 ‘내 밖에 펼쳐져 있는 세계’를 이해하고자 할 때, 그 이해의 과정과 방법을 일깨워주는 가다머의 ‘해석학적 순환’과 ‘지평융합’의 개념들은 우리가 살면서 만나게 되는 수많은 다른 지평들을 존중하게 해주는 ‘생각의 나침반’ 같은 역할을 해준다고 봐요.” ‘google신’과 ‘internet의 은혜?’를 빌어, 원문을 한 번 찾아볼까!
「...이해의 과정이란, 서로 다른 두 지평이 만나 새로운 지평을 형성해 나가는 과정이다. 현재 지평은 역사적 지평과의 융합을 통해 상호작용하면서 끊임없이 수정되고 확장되어 나간다. 따라서 두 지평이 융합된 결과 형성된 지평은 주체가 기존에 가졌던 현재 지평과 다른 새로운 것이 된다. 이와 같은 이해의 과정으로서 ‘지평 융합’은 일회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이루어진다. 즉, 주체가 가진 현재 지평은 역사적 지평과 융합하여 새로운 지평이 되고, 이것이 다음 이해의 선이해로 작용하며 또 다른 이해로 이어지는 과정을 반복한다. 이와 같은 순환 과정을 고려할 때, 이해는 결과가 아니라 언제나 도상(途上)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세계에 대한 이해는 완성된 것이 아니라 과정에 있는 것이며, 고정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고 확장되어 가는 것이다.」
― 한스 게오르그 가다머, 『진리와 방법2』
그건 그렇고, 구보씨 집에 혹시 또 다른 문서들은 없던가? 나는 100년 전의 문서들을 보면서 구보씨랑 이렇게 ‘책 이야기’를 하는 게 참 좋네요. 나도 어쩌다 강화도로 들어와서 살게 되었지만, 그간 강화에서 제일 많이 생각한 게 이런 인문학 공부랍니다. 알다시피 ‘강화백북스’(Ganghwa 100Books) 라고 ‘한 달에 한 번 책 읽는 모임’의 총무를 하고 있고, 읍내 한 의사 선생님과 공부하고 토론도 하는 ‘과학책 읽기’에는 그대를 한번 데려가고 싶기도 해요.”
“오우~ (No), 나는 책 읽으려면 졸리기부터 하던데... 형님이 권하시니 한 번 생각해 볼게요. 집에 무슨 옛날 문서가 또 있기는 합니다. 온통 한자뿐이라 무슨 내용인지 알 수는 없지만... 뭐, 제 주변에 이런 걸 물어볼 사람도 없고, 이런데 관심을 가진 사람도 형님밖에는 없네요.”
대정년간의 수업증서를 앞에 두고, ‘석모감리교회’ 김영진 초대 장로님의 장손과 나눈 강화도 초기기독교 역사의 한 부분에 관한 대화는 여기에서 끝을 맺었습니다. 뉴스에서는 온통 ‘코로나19’의 전파 속도가 심상치 않다는 우울한 소식이 들려오던 주말이었습니다.
다음 주 어느 아침 이르게 출근하는 길에 나는 ‘석모대교’ 아래의 황청포구 물량장(物量場) 공터에 잠시 차를 세웠습니다. 봄이 오는 바다 멀리 북녘땅이 아스라하고,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눈앞의 석모도를 망연히 바라보고 있노라니, 문득 갈매기 나는 저 건너 상봉산의 야트막한 기슭에 그동안에는 알지 못했던 ‘석모감리교회’의 빨간 십자가 첨탑이 저절로 눈에 들어왔습니다. 한가로이 망둥이 낚시를 즐기는 조사(釣士)들의 초릿대 끝으로는 교동도와 송가도, 섬돌모루,미법,서검,거북섬들이 변함없이 그 자리에 떠있는데... 어느 순간부터 낯익게 보아 왔던 황청포구의 친숙한 풍경들이 새삼스레 정다워 보이는 마음의 굴절 현상(?) 같은 것이 점점 느껴져 오기 시작했습니다. ‘어~, 이게 뭐지? 왜 이러지?’ 잠시 당황하다가, 이내 나는 내 속에서 스스로 나오려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아~, 이는 김영진이라는 분 때문인 것이야...!’ 그렇습니다. 내가 그분의 내력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으니, 익숙하던 포구에서의 풍경도 다시금 이리 새삼스럽게 느껴져 왔던 것입니다. 그랬습니다. 이 바다는 한때 고(故) 김영진님의 삶의 터전이었던 바다였습니다. 내 마음의 눈에서는 ― 100여 년 전 교동부의 김씨 성을 가진 어떤 젊은이 하나가 석모도로 장가와서는, 자녀들을 낳고, 교회를 개척하고, 며느리를 맞고, 손자를 안고서 기뻐하던, ― 한 인간의 80년 동안의 삶이 저 풍경을 배경으로 그려지고 있었습니다. 석모도 섬사람으로 햇빛 속에 뜨겁게 살다가, 죽어서는 그 섬의 산그늘에 고요히 묻혀있는, 그의 한평생의 꿈들도 물결 위에 아른거리는 듯하였습니다.
(님이여, 평안하시라~ 샬롬^)
나중에 청도김씨 족보에서 확인해본 바, 그의 행장은 생몰년 밖에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김영진 1872년 임신 10월5일생 1952년 임진4월9일졸 묘는 席毛마근제先塋下
배제주고씨 1885년 을유 정월8일생 1954년 갑오2월22일졸 묘는 부군合窆
장면 #2, 김봉상 형제들과 이황
바다 한 조각을 빈손에 떠서 맛본 사람은 바다의 끝뿐만 아니라 바다 밑바닥까지 다 맛본 것이 된다. 만약 세계의 본바탕이 한 바다와 같다면 조개껍질 하나, 이슬 한 방울, 한 송이 꽃의 비밀을 맛보는 것이 전체를 한 순간에 다 아는 것이 될 것이다. 그것은 캄캄해진 자아의 대폭발로 터져 나오는 한 섬광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저자는 무수한 현(絃)을 지닌 텅 빈 악기, 돌멩이처럼 날아온 한 영감(靈感)에 얻어맞고 온몸이 진동한다.
― 최승호 「한 섬광」
다음 주 일요일 구보씨는 정말로 다른 고문서를 몇 점 들고 나왔습니다. 그는 집에 있는 잘 모르던 자료들을 나와 함께 해석해 보는 것이 재미있고 의미가 있는 일이라고 느꼈나 봅니다. 이번에는 오래된 한지에 해서체로 쓰인 긴 두루마리 형태의 한문 자료가 놓였습니다. 그리고 납폐(納幣) 문서 하나와, 월별로 집안 선조들의 생신과 기일(忌日) 등을 적어놓은 비망록(備忘錄) 같은 낡은 고문서가 또 한 권이 있습니다. 한자(漢字)는 그럭저럭 읽을 수 있으나, 한문(漢文)의 독해는 그저 어렴풋하게만 짐작할 수 있는 실력밖에 되지 않지만, 용기를 내어 두루마리 문서부터 조금씩 펴가며, 첫 문장부터 한 자 한 자 긴장하면서 읽어나가는 도리밖에 없습니다.
‘유사(遺事)’라는 형식의 이 글은 아마도 김호신(金虎臣)이란 분의 부인(之妻)인 고령박씨의 행장과 업적을 적어놓은 것이 아닌가? 짐작되었습니다. 그런데 호신의 아버지인 참봉봉상(參奉鳳祥)이라는 글자를 무심코 읽었는데... 바로 다음에 ‘퇴계선생(退溪先生)’이란 이름이 ‘툭~’ 튀어나오는 걸 보고서는, 앗! 이게 뭐지? 갑자기 무슨 섬광(閃光) 같은 것이 내 뇌리 속으로 박혀왔던 그때의 순간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이 상황을 표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제 돌이켜보자니, 그 순간이 이후 김구보씨와 나를 몇 달 동안이나 설레게 했던 ‘청도김씨 교동파’와 관련된 이 모든 이야기들의 시작점이었습니다.
옛 이야기를 먼저 해야겠습니다. 내가 10여 년 전(2006년) ‘강화문화원’에서 일할 때, ‘강화역사문화연구소’의 ‘K박사’님 팀과 함께 『강화금석문집(江華金石文集)』이라는 책을 만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제목 그대로 강화도에 산재한 여러 사적비·능묘비·송덕비·경고비 등의 비문과 종(鐘)새김글, 바위새김글 등의 금석문 195점을 조사·수록한 자료물입니다. (강화군의 예산으로 발행되었고, 여러 전문학자들의 노고가 결정된 성과물입니다. ‘강화도서관’에 비치되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고려산 「적석사비(積石寺碑)」의 탁본 작업에도 잠시 참여해보았고, 또 2009년에는 이 자료집 「권개묘비명(權愷墓碑銘)」의 해석 자료를 바탕으로 ‘강화학파(江華學派)’와 관련된 논문을 한 편 쓴 적도 있으므로, 내게는 매우 소중한 책이기도 합니다. 당시에 탁본(拓本)을 뜨고, 이윽고 책을 발간하려는 과정의 여러 회의들과 뒷 담화에서 다음과 같은 의문들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조사하고, 탁본을 뜬 많은 비문(碑文)들 중에 가장 오래된 것이 무엇이지?”
“「권개묘비」가 아닐까? 아니야, 「김봉상묘비」가 더 오래되었나?”
“사망한 해는 김봉상(1496~1545)이 먼저인데, 묘비건립은 권개(1530~1568)가 더 빠른 것 같아.”
“그런데 「김봉상묘비」의 ‘명(銘)’을 퇴계 선생이 쓰셨다는 건 정말 놀랍고 특별하지 않아요? 퇴계라면 조선의 대 석학인데, 이렇게 멀리 떨어진 서해의 교동섬에 퇴계가 직접 ‘찬서(撰書)’(글을 짓고 글씨를 씀.)한 묘가 있다는 것은, 어쨌거나, 그 자세한 연유를 잘 알아봐야겠어요.”
이런 말들이 오갈 때 나는 처음으로 ‘김봉상(金鳳祥)’이란 이름을 들었습니다. 봉황새 ‘봉’(鳳)에 상서로울 ‘상’(祥)을 쓰는 이름도 참 특이하여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옛날의 그 ‘김봉상’이란 이름이 ‘퇴계 선생’과 함께 나오는 문서라니! 여기에는 분명 오래전에 내가 가졌던 의문을 풀어주는 단서가 있을 것만 같습니다. 그런데, 유사의 다음 문장들부터는 도무지 해석이 잘 되지가 않았습니다. 내 한문 실력이 문제이지만, 고령박씨 ‘유사’ 내용보다 내게는 ‘퇴계’와의 관련이 더 중요하니, 마음이 울렁거려서 옥편을 찾아볼 생각도 잊어버렸던 것 같습니다. 혹시나? 하고 납폐문서와, 다른 ‘비망록’문서를 이리저리 뒤적거려 보다가, 또다시 두루마리 문서로 돌아와서 ‘이 문장을 누가 지었나?’ 하고 살펴보기도 하니, 이 문장은 ‘이광정(李光庭)’이란 분이 지은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집에 가면 ‘금석문집’ 책을 자세히 찾아보리라~’ 생각하면서, 우선은 급한 대로 인터넷을 여기저기 검색해가며, 무엇엔가 홀린 듯 혼잣말을 연신 중얼거리는 나를... 한동안 관찰만 하던 구보씨가 참지 못하고 물었습니다.
“아니~, 무얼 그렇게 열심히 찾고 계세요? 김봉상은 누구이고, 퇴계 선생이 여기서 왜 나오지요? 그리고 이게 ‘고령박씨’하고는 무슨 상관이 있는 거예요?”
“아이고! 미안합니다~. 내가 이 문서를 보다 보니, 결국에 ‘구보씨는 대체 어디에서 왔는가...?’ 라는 생각에 빠져있는 모양입니다. 이 문서에 의하면 김봉상의 아들이 김호신이고, 호신의 부인이 고령박씨입니다. 구보씨의 먼 할머니가 되시네요. 이 ‘유사’를 지은 ‘이광정’이란 분이 고령박씨 이야기를 시작하려니 그분의 시아버지인 김봉상 이야기를 하는 것이고, 또 김봉상의 이야기를 쓰려니 그의 묘비명(墓碑銘)을 찬(撰)하신 퇴계 선생이 나오는 것 같아요. 실은 지금 내게는 고령박씨보다 퇴계가 김봉상의 묘비를 쓰게 된 이유가 더욱 중요한데, 아마도 이 글에는 그게 없는 것 같네요. 퇴근하고 집에 있는 ‘강화금석문집’의 묘비명을 자세히 살펴봐야겠어요. 내가 기억을 못해서 그렇지, 거기에는 분명 나올 거예요. 그런데... 내가 진짜 놀라는 것은, 이런 문서가 ‘구보씨네 집에 있다!’라는 거예요. 이건 정말 굉.장.하네! 검색을 해 보았더니, 교동의 김봉상이 ’청도김씨!‘에요. 구보씨가 청도김씨 ‘교동파’!’라며! 그리고, 함께 가지고 온 비망록 문서에 ’고령박씨‘의 8세손 누군가가 박씨의 기일(忌日)을 기록해 놓은 것으로 추측해볼 때, 그 기록자의 9대조가 김봉상인 것이 확실하구먼요. 그리고 또, 이 문서들이 구보씨네 집에서 대대로 전해 내려오다 지금 여기에까지 왔다면...! 와~, 구보씨는 김봉상의 직계 자손일 가능성이 또한 분명합니다. 만약 이 문서들을 구보씨 선대의 누군가가 돈을 주고 샀다거나, 또 어디서 훔쳐 온 것이 아닐진대, (조선 후기에 ‘돈 주고 족보를 산다.’는 이야기는 역사책에 나오지만, 누가 이런 문서들까지 팔았겠어요?) 나는 오늘 정말 놀라운 자료들을 발견한 것 같은데요. 축하합니다! 자~, ‘청도김씨 교동파’ 김구보님! 우선은 나랑 악수나 한번 합시다요!”
잠시 놀라서 어리둥절 해하며, 얼떨결에 나와 악수까지 한 구보씨는, 나의 ‘김봉상’에 관한 오래전부터의 이야기를 모두 듣고 난 후에야 비로소 고개를 끄덕이며, 이 문서들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듯합니다. 나는 이야기를 더 이어 나갔습니다.
“난 책을 보거나, 또 TV 등 매체에서 퇴계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교동 퇴계의 김봉상묘비명’이 늘 궁금했거든요. 좀 과하게 표현하면 ‘목에 가시’처럼 내 무의식에 오래 걸려있었던 것 같네요. 그러면서 ‘한 번 연유를 찾아볼까...’ 하다가도, 이게 이제는 내 일이 아니니 시나브로 세월이 흘러갔어요. 역사 공부는 무엇보다 현장답사가 중요한데, 사실 김봉상의 묘를 한 번 찾아보지도 못했어요. 그런데, 누군가 ‘궁금한 일을 오래 간직하고 있으면, 어디선가 꼭 답이 나온다!’고 하더니만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인 것 같네요. 집에 가서 일단 ‘묘비명’ 내용을 확실히 찾아보고 나서, 이번 기회에, 교동에 가서 김봉상 묘지를 꼭 찾아보아야만 할 것 같습니다. 그러면 구보씨도 필수적으로 함께 가야할 것 같은데! 이제 이건 나보다도 구보씨에게 더 중요한 일이 되었어요. 그렇군요! 우리가 지난주에는 김영진 장로님의 기독교 이야기를 한참 했는데, 이제부터는 조선 시대의 유교 이야기가 시작될 것 같은 예감이 들기도 합니다. 그에 앞서서, 우선 내가 아는 전문가 두 분에게 자문을 구해보기로 합시다. 이제부터는 정말 나 같은 ‘얼치기’가 아닌, ‘프로페셔널’(professional)의 도움이 꼭 필요한 장면이에요!”
나는 곧 고려대학교 한문학과의 ‘S교수’님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교수님은 나와의 인연이 20년이 넘고, 앞서 잠깐 언급한 ‘강화학(파)’와 관련해서 나와 다른 여러분들과 그 묘지들을 함께 답사하기도 했으며, 수년 전에 내가 ‘강화학파 최후의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이건승(李建昇, 1858∼1924) 선생을 나라의 독립유공자로 서훈 신청하고자 할 때에는, (강화도! 를 위해) 당시 일제 조선총독부의 비밀 정보 문건을 애써 번역해 주시기도 한 분입니다. 또한 ‘강화문화원’에서 발굴한 불은면 ‘청송심씨’ 문중의 고문서 중, 「심태(沈㙂, 1698~1761) 선생의 문집 『무문재집(無聞齋集)』의 학술적 가치와 연구방향」 의 논문을 발표(2009)한적도 있으므로, 이런 부분의 자문에는 ‘S교수’님의 전문지식과 안목(眼目)이 무엇보다 필요한 상황이 온 것 같습니다. 자료들의 사진과 함께, 내가 미리 컴퓨터로 찾아본 사항들에 대한 설명을 다 듣고 난 후에... 이윽고, 교수님의 전문적이고 친절한 답변 자료가 도착했습니다.
“내가 이것저것 좀 찾아보았습니다. 우선 보내주신 그 두루마기 문서의 ‘숙인박씨유사’는 『눌은집』(訥隱集)의 권20에 들어있습니다. 사진 속의 문서가 ‘눌은’(이광정의 아호)의 친필이라면 귀중한데, 전사(轉寫)했을 수도 있으므로 필적감정이 더 필요하리라고 봅니다. 다음으로 퇴계 선생이 쓰셨다는 ‘명(銘)’과 관련해 눈여겨볼 사항은, 김봉상의 묘비명을 퇴계에게 부탁한 봉상의 아우 병산 김난상(甁山 金鸞祥, 1507~1570)의 행장(行狀)을 또한 이광정이 지었으므로, ‘눌은’과 ‘청도김씨’ 문중의 관계를 더 살펴보도록 하세요. 이광정(李光庭, 1674~1756)은 병산 선생과 150년 이상이나 시대 차이가 많이 나는데도, 김난상의 행장을 쓰고 또 형 김봉상의 며느리인 고령박씨의 ‘유사’까지 쓰셨네요. 이는 아마도 후대의 청도김씨 자손들 중의 누군가가, 가문의 선조를 현양(顯揚)하려고 ‘눌은’에게 병산 선생과 고령박씨의 ‘행장’과 ‘유사’를 부탁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어요! 그리고 다른 이야기지만, 내가 마침 우리나라의 중요한 묘비명 문장들을 모아서 책을 한 권 내려고, 지난주에 탈고(脫稿)까지 마쳤는데... 교동에 퇴계의 글이 있다는 것은 미처 몰랐네요. (지금이라도 조금 언급을 해야겠어요.) 집에 가시면 ‘김봉상묘비명’을 한 부 복사해서 보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퇴계가 남의 묘비명을 잘 안 써주었다는 것은 많이 알려진 일인데, 교동에 그런 묘비명이 있었다니! 과연 강화도는 ‘역사와 문화의 고장’임이 분명합니다. 관심을 가진 분들이 강화 ‘대사기표(大史記表)’를 상세하게 만들고, 발견되는 자료들을 계속 업데이트하며, 종(縱)으로 횡(橫)으로 크로스체킹(cross-checking) 해나가면서 더욱 넓고 깊은 연구가 필요하리라고 봅니다. 여러분들이 지혜를 모아 강화도의 역사와 문화 현양에 더욱 애써주시기를 강화도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진심 부탁드립니다.”
과연! 전문학자의 자문과 격려가 감사하기만 할 따름입니다. S교수님은 강화와 관련해서 오래전에 『강화학파의 문학과 사상』이라는 역작을 발표하기도 했고, ‘국문학’과 ‘한문학’의 여러 분야들에 걸쳐 책을 기십권이나 내신 분입니다. 언젠가 새 저서가 발간된 것을 뉴스에서 보고
“S교수님은 어찌 이렇게도 책을 많이 내십니까? 정말 대단하세요!” 라고 인사를 드렸더니,
“그게 다 공부가 부족해서 그래요. 책을 내고 나면 항상 부족하다고 느끼니까, 자꾸 새 글을 쓰게 되는 거죠. 공부하는 사람들은 다 그래요. 학문(學問)이 죽을 때까지 끝이 있겠어요?”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 감동! 그때 나는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Frost, 1874~1963)의 널리 알려진 시 한 편이 떠올랐는데, 그 마지막 구절을 교수님의 자문에 대한 작은 보답으로 올리며, 늘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교수님! 영시에서도 운(韻, rhyme)이 정말 멋지죠?)
숲은 무척이나 아름답고 어둡고 깊지만 (The woods are lovely, dark and deep,)
난 지켜야 할 약속이 있고 (But I have promise to keep,)
잠들기 전에 한참을 더 가야한다네 (And miles to go before I sleep,)
한참을 더 가야한다네 (And miles to go before I sleep,)
― 「눈 내리는 저녁, 숲가에 서서」 (Stopping by woods on a snowy evening)
(교수님은 내년 은퇴하시면, 오랫동안 미뤄놓았던 『강화학파, 실심실학의 계보』 라는 책을 준비하셔서, 정인보, 민영규 선생님의 학문적 은혜를 갚으려 계획하고 있답니다. 나는 그날을 기다립니다.)
다음으로 나는 제주대학교 사학과의 ‘J교수’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J교수는 2007년 『강화금석문집』을 만들 때 탁본 작업을 총괄 지휘했던, 탁본 뜨기의 드문 전문가입니다. 그때 고려산에서 내게 들려주었던, ― 그가 문경 봉암사의 ‘지증대사적조탑비(智證大師寂照塔碑)’를 탁본할 때의 에피소드가 지금도 쉬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적조탑비」가 엄청 크고 높잖아요! 사다리를 구해 어렵게 걸치고, 정말 힘들게 탁본을 했어요. 마지막에 종이를 걷어낼 때의 그 희열(喜悅)이란! 탁본을 안 해본 사람은 아무도 모릅니다. 글을 쓴 최치원의 정신과, 각자(刻字)한 혜강스님의 혼령과 접신(接神)하는 것 같다니까요!”
이랬던 ‘J교수’입니다. 이제 고향인 제주도에 자리를 잡았다는 소식을 들은 지가 한참 되었고, 그동안 안부 전화도 한번 못하였지만, J교수는 내 목소리를 반갑게 알아주었습니다. 나의 이야기들을 찬찬히, 흥미롭게 듣고 난 후 그가 들려준 말도 몹시 고무적입니다.
“와~, 형님은 지금도 여전하시네요. 교동의 ‘김봉상묘비’ 탁본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작업 중 하나입니다. 당시에는 교동 가는 다리도 없을 때라, 1박2일의 일정을 잡아 배를 타고 교동도로 건너가던 추억이 아련하네요. 탁을 칠 때는 여름 날씨가 몹시도 더워 묘소 앞에 ‘그늘막’을 만들어 걸고, 후배들과 땀을 뻘뻘 흘리면서 솜방망이를 두드렸어요. 다행히 탁본이 잘 나와서 기뻤습니다. 그리고, 형님이 궁금해하시는바, 봉상 묘비의 그 ‘날카로운 해서체’의 글씨는 분명 퇴계의 진적(眞迹)일 거예요. 제가 여기(餘技)로 서예 공부를 하는데, 서예를 하는 입장에서 봐도 그 글씨는 예사로운 글씨체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었고, 무엇보다 비석 옆면에 ‘이황찬서(李滉撰書)’라는 글자가 뚜렷하였으니, 세상에서 찾아보기 힘든 퇴계가 직접 쓴 묘비명 글씨임이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탁을 칠 때는 비석 돌의 재질도 중요한데, 그것이 일반 대리석은 분명 아니었고, 아마도 귀한 오석(烏石)의 한 종류가 아닌가? 추측했더랬습니다. 문화원이나 군청의 문화관광과 어딘가에 제가 뜬 탁본이 있을 테니 확인을 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네요. 제가 옛 파일들을 찾아서 그때 작업했던 사진들을 보내드리도록 할게요.”
한동안 이렇게 두 분 ‘S교수’와 ‘J교수’님들과 긴 통화를 하고, ‘유사’의 문서를 다시 들여다보기도 하고, 인터넷 검색창에 ‘청도김씨’ ‘김봉상묘비’ ‘눌은 이광정’ ‘퇴계 이황’ ‘김난상’... 등을 검색해보기도 하면서, 일요일의 봄날 하루가 다 지나갔습니다. 구보씨는 중간중간 통화들에서 전해들은 이야기들만으로도 가문의 프라이드가 뿌듯한지, 나에게 무언가를 계속 물어보고, 나는 나대로 그의 질문에 아는 대로 답변하면서도... 계속해서 솟구쳐 오르는 옛날의 기억들과, 과거의 인연들이 너무나 각별하게 느껴지기도 한 날이었습니다. 나는 그날 너무나 많은 의문들과 정보들과 기억들로 처리 가능한 뇌 용량을 꽉 채워버린 듯싶습니다.
“구보씨! 오늘은 이 정도로 대화를 마칩시다. 오늘만 날인가? 이제는 조금 쉬었다가 갑시다.
그런데... 혹시 구보씨 집에 ‘청도김씨 대동보’? 같은 족보 책이 있어요?“
“예~, 그럼요! 7권인가? 되는 족보 한 질이 제 방에 잘 모셔져 있습니다.
제가 특별히 들춰보지는 않았지만, 어린 시절 조부님이 살아계실 때부터 있었어요.”
“OK!~, 웬만한 집안에 족보 책 한권은 다 있기 마련이랍니다. 그리고 당신이 보통 집안인가?
오늘 확인한 바에 의하면, 그대는 유서깊은 대 ‘청도김씨 교동파’의 종손(宗孫)이 아니신가!
이제 다른 자료보다 족보를 한 번 살펴보는 것이 중요할 것 같네요. 내일 아침 부탁합니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니, ‘J교수’가 보낸 교동 탁본 작업 때의 사진이 벌써 도착해 있었습니다. (고맙기도 해라...) 사진들을 모두 확인하고 난 후, 나는 『강화금석문집』을 꺼내 ‘김봉상묘비명’ 부분을 자.세.히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리고 『강화사』 『강화인물사』 『교동지』 등의 향토지들도 검토한 후에 비로소 김봉상의 ‘묘비명’을 퇴계가 써준 이유를 분명히 알 수 있었습니다.
병산 김난상(金鸞祥, 1507~1570)과 퇴계(李滉, 1501~1570)는 소과에 동년(戊子, 1528년) 합격한 사마시 동방(司馬試 同榜)이었습니다. 특별하기로는 이 식년시에서 병산이 22살의 나이로 장원을 하였다는 점입니다. (지금으로 하면 대입 수능시험의 전국 1등이니 공부를 참 잘하신 분입니다.) 이후로 병산과 퇴계의 40여 년간 긴 우정이 이어지는데, 병산 39세 때인 1545년에 삼형제 중 맏형인 김봉상이 교동의 부친(金俔, ? ~1507) 묘에 성묘를 다녀온 후 돌아가시는 일이 생겼습니다. 그즈음부터 병산도 ‘양재역벽서사건’(1547년) 등에 휘말려, 이후 19년 동안 남해(南海)와 단양(丹陽)에서 기나긴 유배의 세월을 보냅니다. (유배지에 있을 때 퇴계가 병산을 위로하며 보내준 시 2편과 편지 17편이 『병산선생문집』에 실려 있습니다.) 해배가 되어 병산이 다시 환로(宦路)에 오른 나이는 이미 60이 다 되었으나, 기대승(奇大升, 1527~1572) 등에 의해 학행이 출중한 선비로 추천되어, 집의·응교·직제학 등을 지내고 또 성균관 대사성, 사간원 대사간 등을 역임하기도 했습니다. 병산은 태어나던 해에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맏형에게 글을 배우고, 또 그 형님의 훈도(薰陶)를 받으며 살아왔던바, 교동의 선산 화개산에 형님의 묘소만 남겨놓은 것이 몹시 죄스러웠던 모양입니다. 이에 젊어서는 성균관의 동기였고, 평생의 벗이며 또 스승이기도 한 안동의 퇴계 선생에게 형님의 묘비명을 지어주실 것을 수차례 간곡히 부탁하였고, 퇴계는 결국 병산의 청을 들어, 1570 경오(庚午)년 (아마 퇴계가 마지막으로) 쓴 묘비명이 바로 화개산에 있는 「통사랑영릉참봉김군묘갈명(通仕郞英陵參奉金君墓碣銘)」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퇴계 선생은 그해 12월 8일 세상을 떠나셨고, 병산 선생은 퇴계의 글을 받아 보관하다가 김호섭(金虎燮, 김봉상의 차남이었으나, 난상이 아들이 없어 양자로 들임.)에게 글을 전해주고는 그달 12월 25일 운명하였습니다. 김봉상의 묘에 ‘묘비’가 세워지는 것은 그로부터 또 12년 후인 만력 10년(萬歷十年, 1582년)의 가을입니다. 이는 김봉상의 사후(死後)로는 37년이 지난 후의 일이었습니다.
이상은 퇴계가 찬(撰)한 묘비명 (퇴계 선생이 쓴 ‘묘비명’을 글의 끝에 ‘참고자료’로 붙여놓도록 하겠습니다.) 에도 나오는 내용이고, 양자로 들인 김호섭의 부분과 퇴계가 병산에게 보냈다는 편지 등은 후에 족보와 ‘병산문집’에서 확인한 부분입니다. 강화의 향토지들에는 ‘봉·난·구 삼형제’(鳳·鸞·龜 三兄弟) 라는 표현이 있었습니다. 이는 ‘봉상·난상·구상 삼형제’가 유림(儒林)이나 ‘교동부’의 향촌사회에서 그 학문(學問)과, 효성(孝誠)과, 우애(友愛)에서 당시 모든 사대부들의 사표(師表)가 되었다는 의미로 널리 회자되었던 말이라고 합니다. 삼형제 중 봉상과 난상의 생애는 ‘묘비명’ 퇴계의 글에 상세히 나오므로, 둘째 김구상(金龜祥, 1497~1561)의 행적을 잠깐 언급하겠습니다. 김구상도 과거급제자입니다. 앞서 아우 난상이 사마시에 장원하던 그해(1528년) 김구상은 진사시 2등이었습니다. (지금 같으면 신문의 사회면에 특필될 만한 일일 겁니다. “형제가 놀랍다! 대입수능 1등! 2등!”) 구상은 음보(蔭補)로 ‘경산현령’ 등을 역임하고, 만년에는 교동에 돌아와 강마(講磨)하면서 여생을 보냈다고 합니다. 한 가지 더 ―, 『교동지(喬桐誌)』에는 <화산지령 독생삼현(華山之靈 篤生三賢)> 이라는 표현도 나오는데, 참으로 멋진 성어(成語)였습니다. 나는 이것을 글의 순서대로 읽어 “화개산(華蓋山)의 혼령이, 우애가 도타운 세 분의 현자를 낳았다.” 라고 해석해야 할지, 또는 역독하여 “세 분의 현자가 도탑게 여기에 사셨으니, (그들은 죽어) 화개산의 영혼이 되었다.” 라 새겨도 되는 것인지? 약간 고민이 되기도 합니다. 이런 성어가 만들어진 시간순서의 이치로 보자면 후자가 맞을 것 같은데... 아무려나 둘 다 좋은 해석이 되리라는 생각입니다.
나는 퇴계 이황의 ‘김봉상묘비명’에 적힌 내용들의 큰 줄거리를 파악한 후에, 『강화금석문집』 묘비명 관련 부분을 사진으로 찍어, 구보씨에게 발송했습니다. 내일 아침이면 다시 보게 될 책이지만, 퇴근할 때 그가 몹시도 궁금해하던 퇴계의 글이었습니다. ‘명(銘)’의 마지막 구절 여덟 글자는, 그대로 퇴계가 450년 후의 구보씨에게 보내는 귀한 선물처럼 느껴졌습니다.
往者奚憾 가신 분 무엇 한탄하랴
慶垂來昆 경사가 후손에 드리워지네.
(* ‘垂’(수)-드리우다, ‘昆(곤)’-자손,후손)
#2-1, ‘청도김씨 교동파’
다음날 출근을 하니 김구보씨가 가져온 『청도김씨 대동보(淸道金氏 大同譜)』 (1984년 갑자보) 한 질이 놓여 있습니다, 우리는 자투리 시간들을 이용해서 조금씩 들춰보았는데, 여기에도 궁금했던 많은 디테일한 정보들이 정리와 해석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먼저 5권에서 구보씨와 선조 3대(김영진-김호섭-김규식)가 나오는 부분을 함께 확인해 놓고, 다시 처음 1권부터 살펴보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에는 신라 알지(閼智)를 시조로 하는 ‘경주김씨’에서 갈려져 나온, ‘청도김씨’의 시조 영헌공(英憲公) 김지대(金之岱, 1190~1266)에서부터 27세손(世孫)인 김구보(金丘甫, 1980~ )까지의 800여 년 역사 속 수많은 이름들이 각 파별(派別)로 가득합니다. 이 대동보에서 특이한 점은 파명(派名)에 일반적으로 쓰는 이름이나 관직명(효령대군파, 덕천군파, 판서공파...)이 아니라, 후손들이 사는 주된 세거지명(世居地名)으로 계파(系派)를 구분했다는 것입니다. 즉 봉상의 손자인 경선(봉상―호신―慶先)부터는 ‘교동파’(喬桐派)이고, 난상의 손자인 효선(난상―호섭―孝先)에서는 ‘영주파’(榮州派)라는 식입니다. 그 외 풍덕파, 익산파, 개성파, 충주파... 등입니다. 아무튼 ‘청도김씨 대동보’에 의하자면 김구보씨의 ‘교동파’는 ‘참봉공(參奉公) 봉상손(鳳祥孫) 경선후(慶先后)’라는 가지에서 나온 갈래였습니다. 세와 대(世, 代)를 따져보니 우리의 김봉상(金鳳祥, 1496∼1545)은 영헌공의 12세손(孫)이 되고, 또 김봉상으로부터 구보씨의 증조부인 김영진(金英鎭, 1872~1952)까지가 또 12대(代)가 되었습니다.
청도김씨의 시조인 ‘김지대’와 강화도와도 일부 관련성을 생각하게 된 것도 의미 있는 일입니다. 그는 1217년(28세) 거란이 침입했을 때, 방패에 쓴 ‘순두시’(盾頭詩) 한 수로 원수(元帥) 조충(趙冲, 1171~1220)의 눈에 발탁되어 관직에 들었는데, 문무(文武)를 겸비했던 강직한 인물이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 역사에서 ‘강화도읍기시절’(1232~1270)로 불리는 시기에 주로 활동하였으며, 고종28년(1241년, 52세)에는 진주목사(晉州牧使)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이 시기에 ‘영남3루’(嶺南三樓)의 하나인 ‘촉석루’(矗石樓)를 처음 건립했다고 하고, 그가 지어서 「삼도부(三都賦)」로 유명한 상주목사(尙州牧使)인 벗 최자(崔滋, 1188~1260)에게 보낸 진주의 풍광을 노래한 시가 한 편 전하는데, 이는 진주에서 지어진 최초의 한시(漢詩)라고 합니다. 김지대는 이처럼 시를 잘 지어 서거정이 편찬한 『동문선(東文選)』(1478년)에 그의 시 7수가 실려 있고, 서거정은 그를 고려의 ‘10대 시인’으로 꼽기도 했다 합니다. 여러분들이 ‘시(詩)’와 ‘시인’(詩人)을 사랑하신다면, 나는 여기에서 우리 현대 시사(詩史)의 가장 빼어난 서정시인 중 한 분인 ‘김소월’(본명:金廷湜, 1902~ 1934)을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소월은 김지대의 9세손인 김의손(金義孫, ? ~ ?)이 파조(派祖)가 된 ‘공주김씨’의 후예인데, 김의손은 김봉상의 고조인 김점(金漸)의 아들 삼형제 중 둘째로, (첫째가 봉상의 증조가 되는 ‘김유손’입니다.) 사마시 합격 후 참판을 거쳐 공주백(公州伯)에 봉해졌습니다. 이후 그의 후손들은 김의손을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청도김씨’에서 분적(分籍)하였다는 것입니다. (‘파조’와 관련하여 약간의 이설(異說)이 있으나, ‘공주김씨’가 ‘청도김씨’에서 갈라져 나간 것은 분명합니다.) 김소월은 김의손의 아들 6형제 중 5자인 ‘용’(龍)이 평안도 정주 곽산에 자리를 잡은 것으로 보아, 거기에서 뿌리를 내린 ‘곽산계’(郭山系)의 한 갈래인 것으로 짐작되었습니다. 나는 ‘김지대의 시적 ‘유전자’(gene) 한 방울이 소월에게 전달되었을 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을 잠시 해 보기도 했습니다.
어제는 퇴계와 병산 김난상과의 깊은 우정과 인연을, 오늘은 족보에서 자신의 혈연적 정체성까지 확실하게 확인하고 난, ― 구보씨의 눈매와 걸음걸이가 왠지 달라진 듯합니다. 선비적 풍모? 라고 할까? 무사(武士)적 결기? 같은 것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퇴근 카드를 찍으면서,
“오우~, 공부 잘하던 선조 할아버지들을 두었다고, 오늘은 구보씨가 많이 달라 보이는 걸!”
하고 농담을 던졌더니,
“그러믄요! 이제부터라도 나.는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살려구요~, 어머니도 더 잘 모셔야지요.
그런데, 언제 김봉상 묘지에 함께 가보자고 않으셨어요? 시간을 내서 얼른 다녀 오시자구요.“
“묘소를 다녀오면 ‘사간원’(司諫院)에서의 김난상처럼, 혹시 나 일 못한다고 탄핵하는 거 아냐?
‘형님~, 이러시면 아니되옵니다!’ 라고... 하하, 아이고 그 눈, 무서워라. 좀 봐주시오!”
“뭐 잘못한 게 많으십니까? (내가) 그렇게 보이십니까! 그러면 안되지요! 하하하하~ ”
“그럽시다! 이번 주에 봄꽃 식재(植栽)가 끝나면, 다음 주에 반가(半暇)라도 한번 내 봅시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가문의 여러 궁금증들을 대략 해소하였으니, 이제는 교동 화개산에 있는 김봉상 묘지의 현장을 답사하는 마지막 일이 남아 있습니다. 구보씨도 그렇지만, 나도 궁금하기만 한 퇴계가 쓴 묘비명을 ‘사진’이 아니라,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와야 되겠습니다.
#2-2, ‘김봉상 묘지’에서
다음 주 오후에 우리는 휴가를 내고 교동으로 향했습니다. 문서와 이야기들과 사진과 컴퓨터 화면으로만 알아 왔던 그 장소를, 오늘에야 비로소 찾아간다고 하니, 김구보씨의 표정도 자못 기대와 흥분이 교차하는 것 같습니다. 그는 오늘을 위해 나름대로 ‘청도김씨 대종회’와 연락을 취해서, 익산(益山)에 사신다는 ‘김○○’라는 종중(宗中)의 한 어른에게, 보다 쉽게 묘소의 위치를 찾도록 미리 알아둔 상태였습니다. (사실 내가 지난 주말 따로 사전답사를 했었는데 ‘김현’ 묘역만 찾았을 뿐, 정작 ‘김봉상’의 묘는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보다 자세한 사항을 구보씨가 종중에 알아보았던 것이지요. 그래도 지난주에 묘지의 반(半)이라도 찾은 것은, ‘사)인천문화재보존사업단’의 ‘Y대표’님과, ‘교동사랑회’의 ‘I회장’님 덕분이므로, 여기에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교동대교를 건너고 상룡리의 화개산 중턱 ‘김현’ 묘가 보이는 곳까지 와서, 우리는 휴대폰으로 ‘김○○’님과 다시 연락을 취해 이제는 곧바로 봉상의 묘지를 찾아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묘답(墓畓)인 듯 보이는 논두렁의 끝까지 가서, 이제는 숲길을 헤치고 올라 드.디.어 ‘김봉상의 묘지’ 앞에 서니, 구보씨와 나는 벅찬 감개(感慨)만 있을 뿐, 막상 서로의 눈만 바라보며 별다른 말도 하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기다리던 이 순간을 위해 미리 준비했던 북어포와 술을 상석(床石)에 올리고, 우리는 마음을 가다듬어 정중하게 큰절을 두 번씩 올렸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구보씨는 재배(再拜) 후에도 두 손을 모으고, 한동안 기독교식의 묵념과 기도를 드리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아까부터 ‘묘비’ 주위를 빙빙 돌면서, 궁금하였던 퇴계가 찬한 육필 ‘묘비명’의 글자를 직접 읽으려고 한참이나 노력을 하였는데... 아뿔사! 김봉상 비문의 각(刻)된 글자 한 자, 한 자, 들은 이미 육안으로는 20~30% 정도도 파악하지 못할 만큼이나 스러지고 마멸(磨滅)되어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묘비도 결국 돌이므로 ― 400년 이상 ‘세필 가랑비/바람의 획/육필의 눈보라/세월 친 청이끼’ (함민복, 「돌에」 부분 인용)들의 오랜 세월 풍파(風波)를 견뎌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게요! 육안으로 묘비 글자를 제대로 확인하는 것은 어려워요. 그러니까 탁본을 하는 거죠! 탁본을 하려면 여러 준비 작업이 필요합니다. 무엇보다도 비석면을 깨끗이 닦아 내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나는 고려산에서의 ‘J교수’의 말이 불현듯 생각났습니다.)
우리는 묘소 주변의 쓰러지고, 부러지고, 널브러진 나뭇가지들을 말끔히 정리해 놓고 김봉상의 묘지를 떠났습니다. 김봉상 묘지에서 우측으로 산 능선을 400~500m 쯤 돌아 내려와, 이번에는 ‘김현’과 그의 아들(김구상), 손자(김경선), 며느리들이 모셔져 있는 묘역으로 이동하였습니다. 본디 김난상의 묘소도 여기 ‘김현’ 부친의 묘 바로 아래에 모셔져 있었으나, 1891년(고종28) 병산 선생 후손(‘영주파’)들이 와서 영주로 이장해 갔습니다. (묘를 이장해 간 흔적들이 아직 남아있습니다.) 구보씨는 이번에도 봉상 묘소에서와 똑같이 선조들의 묘에 술과 절을 올리고 있습니다. 나는 잠시 눈을 돌려 묘소 주변으로 이제 막 꽃망울이 터지기 시작하는 진달래꽃을 둘러보고 있었는데, “형님! 여기 좀 와서 보세요~” 라는 구보씨의 소리가 들립니다. 무언가? 하고 다가가 보니, 그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손자 묘소 앞 큰 상석의 옆면들을 돌아가며 많은 이름들이 한자로 적혀있습니다.
“여기에 아버지 이름이 있네요! ‘규(奎)’자! ‘식(植)’자! 요”
“그러네요, 이는 ‘교동파(喬桐派)’의 자손들이 추렴(出斂)해서 상석 등 석물 공사를 한 것이군요. 1992년 10월이니 28년 전이네. 아마도 그 전해부터 종중 후손들의 중요한 ‘시제 안건’이었겠어요. 김현의 묘소에 와 보니 구보씨 아버님의 흔적도 이렇게 남아 있네요. 아~! 선친뿐 아니라, 조부, 증조부, 고조부... 그리고 ‘묘비명’에 기록된바, 1545년에 ‘영릉참봉’을 하셨던 김봉상까지 다녀갔던 자리도 바로 여기이겠군요! 참으로 오~랜 세월입니다.”
“맞아요. 그해 3월입니다. 묘비명 글에 성묘 오신 달까지 적혀있더군요. 저도 그 부분을 기억합니다. 꼭 지금 같은 계절이었군요. 그런데, 형님이 글을 여러 번 읽어보셨다니, 퇴계의 ‘묘비명’ 글은 어떻게 보세요? 퇴계가 쓰셨으니... 명문(名文)인가요?”
“퇴계가 써서 명문이고... 뭐, 그런 것은 잘 모르겠어요. 나는 ‘묘비명’이라는 글의 형식(形式)이 참 좋았어요. 고인의 한 평생을 산문으로 요약하는 ‘서’(序)와, 또 운문으로 이를 집약한 ‘명’(銘), 그리고 ‘서’에서도 나름대로 글을 지어나가는 형식과 순서가 미리 정해져 있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묘비명’ 형식의 글들도 한 훌륭한 ‘문학 작품’이 될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어요. 물론, 퇴계 글의 문장에서도 ‘도학자(道學者) 퇴계’의 인품이나 정체성 같은 걸 느낄 수 있었죠. 특히 김봉상의 성품을 묘사하는 부분에서, ‘올바른 일 하기를 마치 즐거운 욕심같이 했다.’(爲義若嗜欲) 라는 표현이 지금도 기억에 남습니다. 여기에서 ‘의’(義)는 사단(四端)의 하나이고, ‘욕’(欲)이란 칠정(七情) 중에서도 선비들이 가장 기피하는 단어일 텐데, 주자가 말했다는 ‘존천리 멸인욕’(存天理 滅人欲 : 하늘의 이치를 따르면서 인간의 욕망을 없앤다.) 에서의 그 인간의 ‘욕’심을 ‘수오지심’(羞惡之心)인 ‘의’에다 붙여놓으니, 퇴계가 도달하고자 노력했던 철학적 높이와 깊이를 곰곰이 곱씹어볼 만한 내용이 되었어요. 나는 이게 김봉상이 아니라 만년(晩年)의 퇴계 자신이 지향하고자 했던, 어떤 ‘성리학적 가치’를 다른 이의 묘비명을 빌어 적어놓은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까지 들기도 했어요. 다음으로, ‘묘비명’을 읽으면서 유학의 역사에서 김봉상 형제들이 살았던 시대를 편린(片鱗)이나마 추측해 볼 수가 있었습니다. 중국의 ‘주자성리학’은 고려 말에 안향, 이제현, 이색 등을 통해 처음 들어와서는 (들어올 때, 여기 ‘교동’을 통해 들어왔다는 것 아니에요? 교동향교!), 조선의 퇴계·율곡의 시대에 ‘이기(理氣)’ 논쟁과 ‘사단칠정(四端七情)’ 논변들을 통해 마침내 ‘조선성리학’이라는 큰 이론적 완성을 보았다고 합니다. 나는 정도전, 권근, 조광조, 김정(김봉상의 스승) 등 조선 초기의 성리학과, 이 퇴·율(退·栗) 시기를 연결하는 가교 같은 시대가 바로 구보씨의 선조이신 김봉상, 김난상 형제들이 살았던 시대의 ‘지평’이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자연스러운 역사의 흐름이었겠지만, 나는 여태껏 그 시대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거든요. 어째... 좀 어려운 얘긴가?”
“아니요. 나도 강화인(江華人)인데, 안향이 공자님 초상을 여기 ‘교동향교’에다 처음 모셨다는 건 알고 있죠! 퇴계의 ‘주리론(主理論)’도 들어는 봤어요. 단지 그 ‘리(理)’ 가 정확히 무얼 말하는지는 잘 모르겠더라고요.”
“그렇죠? 대부분의 사람들이 ‘리(理)’에 대해선 대충 개념 정도만 짐작할 뿐이죠. 내가 팁(tip)을 드리자면, 이 ‘리’는 ‘개념’(concept)이 아니라 ‘구조’(structure)로 접근해야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아까 김봉상 묘에서 구보씨가 무언가 기도를 드리는 것 같던데... 구보씨의 기도를 받으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그 ‘성령(聖靈)’ 같은 것이 ‘리(理)’가 아닌가! 생각해보기로 합시다. (신자시니 ‘성령’이 어떤 개념인지는 잘 아시죠?) 소쉬르의 언어학 이론에 따르면, 어떤 개념인 ‘기의’(記意, 시니피에)가 있는데, 단지 이를 음성 등으로 표현하는 ‘기표’(記表, 시니피앙)만 다르다는 개념이 있어요. 즉, ― “하나의 ‘기의’를 표현하는 다양한 ‘기표’들이 있다.” 는 것이죠.
예를 들어 봅시다. 불교에서는 부처님이 깨치고 가르친 진리를 ‘불법’(佛法)이라고 합니다. 이를 범어(梵語, 산스크리트어)로는 ‘다르마’(dharma)라고 하지요. 민족들(인도, 중국, 한국)마다의 자연·인문적 환경과, 살았던 시대와, 또 어족(語族)에 따른 음성 언어(記表)들이 달라서 그렇지, ‘불법’이나 ‘다르마’로 표현하고자 하는 어떤 궁극의 원리나 실체(記意)는 똑같은 거라고 볼 수 있어요. 따라서 우리가 여기에서 이 ‘다르마’의 개념을 기독교의 ‘성령’이나, 주자학의 ‘리’, 또는 양명학의 ‘양지’(良知) 같은 개념들과 치환해서 생각한다고 해도 나는 큰 불편함을 느끼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아요. 플라톤의 ‘이데아’(idea)니,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이니, 헤겔의 ‘절대정신’... 서양의 정신들이 찾은 궁극의 ‘도’(道) 같은 것들도 결국 이와 같은 구조가 아닐까요? 내게 작곡(作曲)하는 오랜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가 그러더군요. “그런 것은 음악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 「‘리(理)’ 주제(theme)에 의한 다양한 변주(variation)」 라고 하지!”
다른 예를 봅시다. ‘어머니’라는 어떤 개념이 있는데, 이를 한국말로 ‘어머니’라고 발음하든, 또는 ‘mother'(마더, 영어)나 ‘Mutter’(뭇터, 독일어)로 발음하든 (중국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아랍어... 등에도 어떤 기표들이 있겠죠?), 그 표현하고자 하는 의미는 결국 같은 것이 되지 않겠어요! 저번에 내가 『보살 예수』 책 이야기한 것 기억합니까? 이 책의 주제를 내 나름대로 요약하자면, 예수님의 삶에서 중생을 구제하는 부처의 ‘보살행’(菩薩行)을 본다(보았다)는 의미라고 봐요. 이와 같은 구조로 나는 ‘퇴계 보살’이라는 표현도 성립된다는 주의에요. 퇴계 70년의 삶에서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 위로는 깨달음[리]을 추구하고 아래로는 중생[백성]을 구제하고자 노력한다.)의 가치를 발견할 수도 있다는 말이지요. 이렇게 불교나 유교의 가르침들이 “그 표현하는 방식이나 용어만 다를 뿐이지 결국은 같은 구조이다!” 라는 것을, “애초부터 알아차리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고 나는 생각합니다. 만약 퇴계 같은 분이 ‘불교적 지평’의 신라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아마도 ‘지증대사’(道憲, 824~882) 같은 큰 스님이 되셨을 거예요.”
“지난주에 ‘고령박씨유사’에서 시작된 김봉상 ‘묘비명’과 퇴계 선생의 이야기가 돌고 돌아서, 이제는 ‘지증대사’에까지 왔네요. 형님 말씀은 결국 ‘기독교도 불교나 유교처럼 ‘구조’적으로는 같다.’라는 거네요. 재밌어요. 그런데, 저번에는 ’차이‘와 ’다양성‘의 존중! 도 말했잖아요?”
“그랬죠, 구보씨가 예리한데요! 그것은 「결국 같은 구조임을 알아차린 사람들의 ‘차이’와 ‘다양성’의 존중!」 이라 말하면 되겠어요. 왜, 요즘에는 ‘부처님 오신 날’이나 ‘성탄절’에 사찰이나 교회에서 서로들 플래카드도 걸어주고 하잖아요? 내 기억으로 이런 아름다운 일들도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었어요. (모두가 자기들한테만 충성과 복종을 요구하는 면이 많았지요.) 이제 그만! (구보씨도 알겠지만) 종교 이야기는 오래하는 게 아니랍니다. 나는 오늘 ‘묘비명’을 보러 교동에 왔으니까...! 내가 읽어본 묘비명의 문장 중에서 진짜 감동적인 글이 두 구절 있어요. 지금까지 이야기 한 분들이고, 여기 ‘교동향교’에도 배향(配享)되어 있는 분들이랍니다. 들어볼래요?”
星回上天 오호라! 별들은 하늘나라로 되돌아가고,
月落大海 달은 큰 바다에 빠졌도다
- 최치원, 「지증대사 적조탑비」
有山嶷嶷 有水源源 산은 높고 또 높아라 물은 깊고 또 깊어라
乘化歸盡 復何求兮 조화 타고 돌아가니, 무얼 다시 구하랴
- 이황, 「자찬묘비명(自撰墓碑銘)」
장면 #3, ‘청도김씨 교동파’의 또 다른 유물들
교동 김봉상의 묘지를 답사하고 또 퇴계가 쓴 묘비명도 확인하였으니, 나는 이제 조금 마음이 홀가분해져서 이후 다음 주말까지는 조금 여유롭게 시간을 보냈던 것 같습니다. 가끔씩 ‘청도김씨’ 생각을 하게 되면 핸드폰으로 혹시 관련되는 다른 정보가 있나? 하고 조금씩 찾아보는 정도였습니다. 이와 연관되는 현재 후손들의 이야기로, 김봉상 형제들을 소개한 향토지들에는 ‘청도김씨의 후손들이 교동과 삼산에 흩어져 살고 있다.’라는 추상적인 정보만 있어, 이 부분을 구보씨에게 확인해 본 것이 있습니다. 구보씨는 교동의 일가는 그도 모르겠고, 삼산 석모도의 ‘청도김씨’라고는 가족으로, 동생과 현재 인천에 나가계신 작은아버지 한 분과 조카가 있을 뿐이랍니다. 증조부(김영진)의 형님들이 계셨다고 하지만 연락조차 되지 않는 상황이고, 족보에는 조부(김호섭)의 형님이 또 한분 계시지만 일찍 고향을 떠나셨는지 자신은 잘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다만, 어렸을 때 조부님을 따라 상리(옛 송가도)에 간 적이 있는데, 그때 조부께서 어떤 어른에게 인사하라고 하며, 그분이 우리 친척이라고 알려주셨던 걸 기억한다고 합니다. (이는 마음만 먹고 ‘면사무소’에 가서 추적해본다면, 충분히 그분의 후손 일가를 찾을 수도 있는 사항입니다.) 마지막으로, 현재 인천에 살고 있고 지금도 안부를 묻곤 하는 ‘항포’(석모3리)가 고향인 초등학교 동창 친구가 한 명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족보를 펴놓고 ‘교동파’ 후손을 추적하여, 어렵지 않게 그 친구의 이름을 찾을 수 있었는데, 내친김에 계촌(計寸)을 해보니, 그는 구보씨와 고조부가 같은 ‘4종형제’간으로 ‘10촌’이 되었습니다. 또한 족보에서는 ‘김정례’님처럼 다른 가문으로 시집간 ‘청도김씨’의 여인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만, 그 부분까지 알아보는 것은 한계가 있었습니다.)
각설(却說)하고, 이제 구보씨의 집에서 또 발견된 ‘호구단자’ 등 다른 유물들을 이야기하려 합니다. ‘그날’을 돌이켜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하려니, 다시금 마음이 울렁거리기 시작합니다. 구보씨의 조부님은 어떤 마음으로 그 유물들을 장롱 속에 비장(秘藏)해 놓고 계셨던지? 또 구보씨는 어떻게 그 유물들을 기억해 내었는지...! 만약 이 마지막의 유물들을 ‘그날’ 발견하지 못하였다면, 지금까지의 여러 이야기들도 어쩌면 한 가문의 작은 에피소드(episode) 정도로 끝나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날’은 구보씨가 고령박씨의 ‘유사(遺事)’ 고문서를 들고 온 이후로 3주가 지난 4월 초순의 월요일 아침이었습니다. ― 나는 생각합니다. 우리가 그간 읽었던 문서들과, 묘비명과, 족보와, 또 김현 김봉상 묘지을 찾아 교동을 다녀온 이후로, 구보씨의 의식은 (무의식에서 조차도) 늘 선조들과, 할아버지들과, 집안의 역사에 대한 생각들로 가득 차 있었다고요. 그것 밖에는 ‘그날’의 상황을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 월요일 내가 출근해서 옷을 갈아입기도 전인데, 잠시 눈이 마주친 구보씨가, 마치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 아침부터 기다렸다는 듯이, 애써 흥분을 감추며 말했습니다.
“형님! 어제 전화를 하려다가 ‘휴일인데...’ 하고 연락을 못 드렸습니다. 와~, 이제야말로 진짜 ‘전문가’를 여기로 한 번 ‘모셔야’ 될 것 같은데요! 뭐냐면요... 어제 집에서 제가 무언가를 ‘뭉텅이’로 찾았어요! 옛날 책들...하고, 서류들 하고... 글씨들, 또 도장이 찍힌 옛날 문서들, 그리고 ‘호패’ 같은 것도 있고요. 하여튼 많은... 유물들이에요. 저야 알 수가 없으니, 오늘 저녁에 저의 집에 가서 우선은 형님이 한 번 봐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아니~, 대체 뭐길래 저러지?) 저번에 ‘유사(遺事)’ 고문서를 본 이후에, 내가 ‘다른 거 또 없던가?’ 하고 몇 번인가 물어봤을 때도 ‘이제는 없다!’ 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뭐가 또 나왔어요? 대체 그걸 어떻게 찾았는데?”
“무슨 생각의 끝이었는지는 모르겠어요! 문득 떠오른 기억인데... 7년 전 아버님이 갑자기 돌아가신 후에, 지금의 ‘마금개’(‘석모리’ 마을들의 순우리말 지명, 공개,마금개,방개,동녘개 등이 있음.)로 이사 올 때 생각이 나더라고요. 그 며칠 전부터 동생과 둘이 이삿짐을 싸고 있었는데, 할아버지(김호섭)가 모아놓은 책장의 책들을 정리하고 보니, 가져가기에는 너무나 많은 양이었어요. 그래 그것들을 모아서 다 불을 태우고 왔어요. (소설 등 여러 종류의 책들이었는데, ‘어차피 짐만 되고 내가 보지도 않을텐데...’ 라고 생각했습니다) 불태우던 장면이 떠올랐는데, 그때 책을 태우면서, ‘할아버지가 장롱에다 넣어놓은 책들이 있었는데...’ 라는 기억이 났어요. 그래서 장롱에 가보니까, 그때까지도 자물쇠가 잠겨 있었어요. 그때 또 할아버지 생전의 말씀이 생각났어요. “구보야, 여기는 중요한 것들이 있으니까, 열어보지 말아라!” 라구요. 나는 절단기를 찾아서 그걸 양손으로 잡고는, 어찌 어찌 자물쇠를 해결하고... (부쉈는지도 모르겠어요.) 거기에 있던 ‘무슨 책들이랑 문서들을 꺼내서 분명히 여기로 가지고 왔다!’라는 생각이 갑자기 떠올랐던 거지요. 그래서 어제 ‘창고’로 쓰고 있는 방을 뒤져서 샅샅이 찾아보니... 세상에! 나는 그것들을 ‘사과박스’ 속에다가 넣어놓고는 지금까지 모르고 방치하고 있었던 거예요. (이사하고 나서 바로 정리하고 챙겨 놓았어야 했는데... 차일피일 미뤘고, 또 힘들게 민박집을 운영하다 보니까, 어느덧 가져온 장롱 속 할아버지 문서들의 기억을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죠. 먼저의 ‘수업증서’와 ‘유사’ 등은 아마도 그때 이사하면서, 따로 챙겨져서 보관했던 것 같습니다.)
어젯밤에 곰곰 생각해보니 조부님이 장롱 속에 문서들을 넣어놓으실 때는 아직 선친께서 살아계셨을 적인데도, 아마 ‘자꾸 열어보고 하면 어린 손자들이나, 다른 찾아오는 여러 손님들에게 알려지는 것이 좋은 일이 아니다.’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습니다.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자니... ‘아, 만약에 그 사이에 진짜 불이라도 나서, 이것들이 모두 없어져 버렸으면 어쩔 뻔 했나!’ 하고 두려운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장롱 속에 귀하게 보관해두신 조부님의 마음과 선조들의 유산을, 나는 한낱 ‘사과박스’에다가나 넣어두고는, 또 그것을 7년이 지나도록 까지나 모르고 버려두었다는 생각에 조부님과 증조부님께 (조부께서는 또 증조부님께 이것들을 인계받았을 것 아니겠어요?) 정말로 죄스러운 마음이 들어 (내가 ‘장손’이잖아요!) 찔끔, 눈물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하하하~, 그렇지만 지금이라도 찾았으니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해야죠?“
“그럼요! 정말 다행이네, 어제 그런 일이 있었구먼요. 과거와 대과거, 생각 속의 생각... 내가 저번에 고령박씨의 ‘유사’ 문서에서 ‘참봉봉상’과 ‘퇴계이황’이란 글자를 발견하고는 13년 전의 『강화금석문집』을 떠올렸을 때와 비슷한 상황이네요. 충분히 그 상황이 이해가 되요. 그래~, 과거로 가는 그 ‘자물쇠’를 열고 보니 어떤 자료들인 것 같던가?”
“아까 말씀드렸잖아요, 나도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조부님은 골동 취미가 있으셨으니... 혹시 ‘추사’(秋史) 글씨 같은 게 한 점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죠! 형님이 언젠가 ‘팔만대장경도 모르면 빨래판이다!’ 라 하지 않으셨어요? 그러니까 ‘전문가’가 오시면 좋겠어요. 나는 정말 형님 말고는 이런 쪽에 아는 사람이 없어요.”
퇴근 후에 나는 구보씨의 집으로 가서, 7년 전에 ‘자물쇠’를 열고 나왔다는 어제의 그 ‘사과박스’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구보씨는 박스 속의 서류와 유물들을 하나씩 펼쳐서 내려놓고, 나는 얼핏 보아도 70~80여 점이나 되는 그 문서와 유물들을 한 장씩, 하나씩, 검토하기 시작했습니다. 한 장씩 넘겨 가는 각각의 문서들마다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미지(未知)의 세계가 연달아서 자꾸만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그렇게 1시간여를 보내고 나니, (구보씨 말대로) 나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한문(漢文)’과 ‘유물’(遺物)들 임이 분명했습니다.
“구보씨! 일단 이것들을 내일 ‘수목원’ 우리 방에다 가져다 놓읍시다. 나도 천천히 더 읽어보고 싶고... 그리고 이것들은, 정말 ‘전문가’를 모셔서 전문적인 감정을 받아 보아야만 하는 유물들임이 분명해요. 이것들을 잘 아실만한 전문가가 멀리 있지도 않아요! 바로 강화읍에 계시거든... 내가 연락을 해 볼게요. 그 전에 지금 알게 된 것을 잠깐 말씀드리고 갈게요. 첫째, 구보씨가 내심 기대하던 그 ‘추사’ 글씨는 없네요! 나도 추사 글씨를 알아볼 만큼의 안목은 있답니다. 다음으로, 여기 올 때 혹시나? 하고 기대를 했던, ‘김영진’ 증조부님의 그 ‘한문성경’이 없다는 것이 좀 섭섭합니다. 대신 무슨 작은 ‘불경’ 한 권이 있기는 하네요. (이것은 조부님께서 무슨 ‘사서’나 다른 유교경전을 외우시며 일했던 것을, 그분이 장로님이시니까 주위에서들 ‘성경’(聖經)으로 지레짐작한 게 아닐까...? 읽고 외우시던 성경이라면 분명 여기에 남아 있을 만도 하잖아요!)
오늘 또 놀라운 일이 생겼군요! 역사를 전공하지 않은 일개 ‘향토사학자’가 이런 유물들을 처음으로 보았다는 것은 정말 큰 복이에요! 내가 이걸 만나려 여기 ‘석모도수목원’까지 왔군요!”
#3-1, 유물 감정(鑑定) 하던 날
‘강화역사문화연구소’의 ‘K박사’님과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연구원으로 일하셨던 ‘M선생’이 우리 ‘수목원’으로 김구보씨의 가전유물들을 감정(鑑定)하러 오신 날은 4월 15일(수) 이었습니다. 날짜까지 정확히 기억하는 것은 그날이 ‘21대 국회의원 선거일’이었기 때문이고, 그날은 ‘임시공휴일’이었지만 우리는 그날도 매표소 근무를 함께 하였으므로, 감정을 시작할 때는 하나가 빠져서 감정을 도와주기로 미리 계획을 세웠습니다. 오후 2시에 오신 두 분은 매표소 앞에서 김구보씨와 반갑게 첫인사를 나눈 후, 곧바로 나와 같이 수목원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유물 감정은 오후 2시 30분부터 약 3시간가량 이루어졌습니다. 수목원 별관의 근무자 휴게시설에 있는 식탁을 연결해서 길게 자리를 만들고, 그 위에 구보씨의 유물들을 깔아 놓으니, 이제는 궁금하기만 하던 이 유물들의 정체를 파악하는 일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나는 현재 사적(私的)인 ‘문화재감정’의 보조자로써 두 분을 도와주고 있지만, 혹시 여러분들께서 오늘 감정의 신뢰성을 의심할 수도 있을 것이므로, 여기에 잠깐 두 분 소개를 먼저 드려야겠습니다. ‘K박사’님은 이런 역사유물들의 감정에 대해서는 나라의 전문직 공무원으로 (‘문화재청 문화재감정관’) 20여 년 이상을 근무하셨기 때문에, 구보씨가 희망하던 ‘전문가’라면, ― 내가 나라의 가장 고급인력을 섭외해서 모신 셈이 됩니다. 박사님은 20여 년 전 동국대학교 ‘선원사(禪源寺) 발굴조사팀’의 연구원으로 처음 강화도와 인연을 맺으셨고, 나는 1999년 가을, 님께서 ‘강화역사문화연구소’를 시작하던 초창기부터 몇 년간 연구소의 총무 역할을 맡았던 세월이 있습니다. 아시는 분은 다 알지만, 님은 강화도의 ‘역사’와 ‘문화’를 화두(話頭)로 오랫동안 ‘정혜쌍수(定慧雙修)’ 해 오신 분이라는 점만 간략히 말씀드립니다. ‘M선생’에 대해서는 수년 전 ‘강화역사문화연구소’의 강독회 때, 나는 마침 조선 시대의 ‘행정제도’ 등에 관한 님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었는데, 과연!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연구원을 역임하신 분이라더니 한자와 한문의 해독에 탁월한 능력을 가진 분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은 ‘K박사’님의 청으로 특별히 함께 오셨으므로 ‘M선생’의 조언이 기대됩니다.
처음에는 유물들을 하나씩 들고 개별적으로 검토하기 시작하다가, 곧 우리들은 이들을 ‘자료의 성격’에 따라서, 대략 4가지로 분류부터 해 놓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1) 교지(敎旨), 호구단자, 준호구 등 나라와 강화부 등에서 발행한 공적(公的) 문서들
2) 김봉상 묘비명 탁본첩(拓本牒) 등 가문 내의 사적(私的)인 서류들
3) 『병산선생유고(缾山先生遺稿)』 관련 서책 및 기타 전적(典籍) 류
4) 무관흉배(武官 胸背)와 호패(號牌) 등 유형유물, 기타
이렇게 분류를 해 놓고 보니, 그중 가장 많은 문서가 ‘호구단자’(戶口單子)와 ‘준호구’(準戶口)로 40점이나 되었습니다. 사실 나는 이 ‘호적자료’ 문서들의 정확한 명칭을 이때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M선생’의 설명으로는 ― 고려 시대에 이 호적제도가 확립되었고, 3년에 한 차례씩 개수(改修)하는 것이며, 이 제도는 조선 시대에도 계속되었다고 합니다. 조선왕조는 호구 파악을 목적으로 매 3년, 자(子)·묘(卯)·오(午)·유(酉)로 끝나는 식년(式年)에 호적을 작성하였는데, 호적 업무를 총괄하는 ‘한성부’에서 매 식년 초에 이를 위한 매뉴얼을 마련하고, 이것이 ‘강화부’나 ‘교동부’로 내려오면, 민간에서는 이에 따라 각 호별(戶別)로 ‘호구단자’를 작성하여 제출하는 것이라 합니다. 일반적으로 2통을 제출하는데, 관에서는 지난 식년의 호적과 대조하여 1통은 작성자에게 돌려보내고 (이때 돌려받은 이 ‘1통’이 작성자가 보관하는 ‘호구단자’입니다)
다른 1통은 해당 식년의 호적자료로 ‘강화부’나 ‘교동부’의 관에서 보관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준호구’는 민간에서 가족관계나 노비소유권의 확인 등 여러 개인적 필요에 의해 관에 요청하는 경우 발급받는 것이랍니다.(이와 같은 ‘준호구’는 현대의 우리들이 군청 민원실에서 ‘주민등록등본’을 떼는 것과 같습니다. 위 사진에서 ‘가경12년’(1807)에 ‘강화부’에서 발급받은 ‘김화표’(金華杓)의 ‘준호구’를 볼 수 있습니다.) ‘M선생’은 이 ‘호적자료’들이 전사(轉寫)되어 ‘장예원’(掌隷院 : 노비의 부적(簿籍)과 소송에 관한 일을 관장하던 정3품 관청)으로도 1통이 갔다고 합니다. 이는 도망간 노비 등이 생길 경우 이를 둘러싼 분쟁 등을 처리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 위 ‘김화표 준호구’의 좌측 하단으로 노비의 이름들이 보이는 것이 각별하게 보였습니다) 이런 설명들만 들어도 ‘호구단자’와 ‘준호구’가 조선 시대의 신분제도, 가족제도, 노비제도 등 사회사나 생활사 등을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기초자료가 되겠다는 것을 잘 알 수 있겠습니다. 또한, 이것들을 작성하는 양식과 기재 순서와 내용 등을 파악해보는 것도, 조선 시대의 ‘지평’을 추정할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될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
“M선생! 내가 ‘호적자료’들을 처음 보니, 잘 몰라서 그러는데... 조선에서는 왜 이런 ‘호구단자’를 만들었어요? 갑자기 그게 궁금해집니다.”
“어떤 국가이건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재정(財政)을 확보해야 하지 않겠어요? 기본적으로 ‘호’(戶)에게는 조세(租稅)를 부과하고, 또 (인)‘구’(口)를 단위로는 역(役)을 부과했는데, 백성들에게 조세와 역을 부과하고 또 이를 수취하려면 기준이 되는 어떤 자료가 있어야 되겠죠! 중앙정부나 지방 군·현의 입장에서는 그 ‘기준자료’가 되는 것이 이런 ‘호구단자’인 거예요.” (생각해보니 나는 참 어리석은 질문을 했습니다. ― ‘국가란 무엇인가?’)
아까부터 ‘K박사’님은 다른 전적 유물들 중에서, 『병산선생유고(缾山先生遺稿)』 와 그것을 담은 ‘봉투’에 대해 말씀을 하고 싶어 합니다.
“나는 이 ‘유고’가 중요하게 보입니다. 우선 이 책이 ‘목판본’(木版本)이 아니고, ‘필사본’(筆寫本)이라는 것이 큰 의미가 있다고 봐요. 목판본이야 나중에 여러 부를 찍으면 되고, 그러자면 그 전에 ‘원본’(原本)이 있어야 하는데... (‘원본’은 기본적으로 필사를 해야 하지 않겠어요?) 여기 목차를 보면, 이게 맨 처음 누군가 책을 만들려고, ‘문집’에 실을 글의 순서를 초벌로 적어놓은 게 아닌가 싶네요. 또, ‘투’(套)가 같이 있으니 더 귀한 거예요. 무엇보다도 문집을 준비하려는 필사본 서책이 병산 선생 후손의 가문에서 발견되었으니, 더욱 가치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이런 식으로 개별 유물들 전부를 우리는 개략적으로 한 번씩 들춰 읽어보았고, 이들 모두에 대한 두 분의 전문적인 코멘트(comment)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위 ‘호구단자’류와 ‘병산선생유고’ 2점의 유물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가는 것에 대해 여러분들의 양해를 구합니다. 구보씨와 나는 ‘사적’(私的)으로 유물감정을 의뢰한 것이고, ‘K박사’님과 ‘M선생’도 어디까지나 개인의 자격으로 의견을 주신 것입니다. 이로부터 2주 후, 이 유물들은 공공기관인 ‘강화역사박물관’에 정식 기증되었으므로 ― ‘박물관’의 ‘공적’(公的)인 ‘연구결과’가 발표되기 전까지는 개별 유물들의 가치 등에 대해 서둘러 평가하는 것은 미루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이제부터는 김구보씨의 ‘유물기증’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구보씨가 근무를 마치고 합류한 후, 우리 4인은 그동안 보았던 이 유물들에 대한 느낌과 해설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저녁 식사에까지 이어진 자리에서, 먼저 ‘K박사’님의 소감입니다.
“다양하고 좋은 유물들을 잘 보았습니다. 선조님들께 물려받은 유품들을 잘 보관하였다가 이렇게 보게 해주신 구보씨의 조부님께 감사를 드려야겠네요. 특별히, ‘호구단자’ 등은 지금도 많이 발견되는 유물이기는 하지만 이처럼 <한 가문에서 - 250년 이상 오랜 기간을 보관해 온 - 많은 수량의 - ‘호적자료’>는 나도 오늘 처음 보았습니다. 이분들이 모두 구보씨의 선조들이 아니겠어요? 조선 초기부터 강화역사는 ‘안동권씨’, ‘영일정씨’, ‘창원황씨’, ‘청송심씨’, ‘전주이씨’, ‘평산신씨’... 등의 많은 양반 가문들과 관련이 깊은데, 이제 여기에다 ‘청도김씨’ 가문을 하나 더 추가해야 될 것 같네요. 김봉상 형제들의 학문과 삶도 새롭게 조명해야겠지요.”
‘M선생’도 솔직한 심정을 피력했습니다.
“나는 오늘 정말 ‘눈호강’을 실컷 했습니다. 말만 듣고 ‘K박사’님을 따라 왔지만, 이렇게 공부꺼리가 많은 유물들일지는 미처 생각을 못했어요. ‘한국학중앙연구원’에는 ‘호구단자’ 등 호적자료들만 연구하는 젊은 연구자들이 많아요. 만약에 ‘강화에 이런 자료들이 있다!’ 고 연락을 하면, 내일이라도 금방 뛰어올걸요!”
나는 먼저 구보씨와 눈을 한 번 맞추고 나서, 조심스럽게 두 분에게 질문을 드렸습니다.
“오시기 전에 먼저 구보씨하고 이 ‘유물들의 처리’에 대해 잠시 의견을 나눈 바가 있습니다.
오늘 ‘감정’을 하고 나면, 그다음 이것들을 어떻게 할거냐? 고요. 구보씨는 선생님들의 의견을 들어보고 결정하자고 했어요. 혹시 ‘한국학중앙연구원’ 같은 기관에서는... 유물들을 기증받으면 정말 연구를 잘해 줍니까? ‘인천시립박물관’ 같은 데는 어때요? 강화가 인천에 속하니까!”
“‘수증 기관’이 중요한 것이 아니에요. 어떤 기관이거나 이 좋은 유물들을 마다할 리가 있겠어요? (그래도 만약 연구를 위해 기증을 한다면,) 강화에서 나온 자료니까 ‘강화역사박물관’이 여러 면에서 가장 적절하겠지만,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김구보씨의 ‘마음’이라고 봅니다.” (‘K박사’)
“마음도 중요하지만... 제가 아주 현실적인 부분까지 생각을 해 보았는데, 찾아보면 이런 유물들을 사가는 곳도 있지 않을까요? ‘호패’나 ‘무관흉배’ 등은 값이 나갈 것도 같은데요!” (‘나’)
우리들은 삼산으로 오신 손님들이라고, 식사를 대접하는 구보씨와 이처럼 ‘유물들의 처리’에 대해서 여러 많은 의견들을 나누었습니다. 오래지 않아 구보씨가 ‘마음’을 내었습니다.
“저는 ‘강화역사박물관’에 기증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 집에서 나왔지만, 모두 ‘교동’과 ‘강화’의 자료들일 텐데 연구를 하더라도 강화에서 연구를 해야 제대로 할 것 같습니다. 이것들이 소중한 선조들의 유품인데, ‘돈을 주고 판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것이고요. 그렇다고 집에 다시 보관한다고 하면, 이것을 찾기 전하고 조금도 다를 바가 없겠네요. 어머니하고, 삼촌, 동생이 있지만 모두 제 결정에 따를 거예요. 사실 저는 ‘청도김씨 종중’에서 뭐라고 할까 봐 제일 걱정이 되는데요! ‘문중의 유물이기도 한데, 왜 마음대로 기증을 했냐?’ 고 하면 뭐라고 하죠? 그런 일이 없기를 바라지만, 세상일은 모르잖아요. 여기 계신 분들이 저를 변호해주실 것으로 믿고... 하하하~ ‘강화역사박물관’에 기증할 수 있도록 조처를 취해 주십시오!”
#3-2, ‘강화역사박물관’으로
‘K박사’님의 연락을 받고, 박물관의 ‘K’와 ‘S’ 두 분 학예사가 수목원에 와서 다시금 김구보씨의 유물들을 확인하고 간 것은 그 다음 주입니다. 오래전부터 나도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학예사들은, 구보씨가 보관하고 있는 유물들의 수량과 내용들을 보고는 매우 만족해하고, 또 김구보씨의 확실한 ‘기증’ 의사를 확인하고는 더욱 흡족한 표정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곧, 다음 주인 4월 29일을 ‘청도김씨 교동파’ 김구보씨의 가전유물들을 ‘강화역사박물관’에서 기증받기로 하는 날로 정했다고 구보씨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날자를 정해 놓으니, ‘D-day’는 금방 돌아왔습니다. 박물관의 ‘S’학예사는 유물 보존처리 담당 직원 2명과 오전 10시 30분에 도착했습니다. 유물들을 확인해서 사진을 찍고, 고문서들을 분류하고, 일일이 치수를 재고, 이들을 다시 전문 보관 상자들에 담는 시간들을 예상하면 오후 늦게나 되어야 작업이 끝날 것 같다고 합니다. 우리는 ‘숲 해설가’ 선생님들의 쓰는 교육장을 임시로 마련해서는, 우리 방에 있던 유물들을 그리로 옮겨주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구보씨와 내가, 떠나가는 유물들을 위해 한 마지막 일이 되었습니다.) 그날 ‘청도김씨 교동파’의 유물들은 자신들이 가서 있어야 할 가장 적절한 자리로 옮겨가는 좋은 날이었지만, 나는 한편으로 그날을 섭섭하게도 기억합니다. 구보씨가 이 유물들을 가져와 ‘우리 방’에서 보관하던 이후 한 달 가까이를, 나는 이들을 매일 틈나는 대로 들춰보며 무언가를 생각하고, 또 무언가를 찾아보곤 하였습니다. 기증하기 전까지의 소유자는 김구보씨이니, 아우님의 양해를 구해 『병산선생유고(缾山先生遺稿)』 필사본을 집으로 가져와서는, 밤늦게까지 혼자서 읽어보기도 했던 것입니다. 이 사치스러움! 책을 읽는 것도 ‘e-book’의 컴퓨터 화면으로 읽기도 하는 이 첨단 ‘기술복제의 시대’(발터 벤야민)에 ― 인쇄된 현대의 책도 아니고, ‘지필묵’(紙筆墨) 원본의 이 감촉과 향기라니! 나는 조선 선비정신의 ‘아우라’(aura)를 나 혼자서만 몰래 느껴보기도 했던 것입니다.
이제 내 이야기가 아니라, 그날 김구보씨의 모습과 행동을 내가 본 그대로 여기에 기록해 놓아야겠습니다. 그날 그의 모습은 내가 잘 아는 평소의 그 낙천적이고, 든든하고, 씩씩한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본인은 어제와 똑같이 일을 한다고 생각했겠지만, 무언가 허둥대고, 초조해하는 느낌 같은 게 분명히 눈에 보입니다. 오죽하면 ‘최반장’님(선친인 ‘김규식’님과 친구였던)께서, “구보야~, 너 오늘 어디 아프냐? 왜 하루 종일 기운도 없고 그러냐!” 까지 했을라구요.
다음은 나만 알고 있는, 구보씨와 나누었던 그날의 대화들입니다.
“박물관 학예사는 왜 아직 안와요?” (아직 시간이 안됐잖아. 조금 기다리면 오겠지요.)
“‘S’학예사는 점심을 어떻게 한대요?” (아까 자기들이 알아서 먹는다고 했잖아. 신경 안 써도 돼요.)
“그러면, 내가 간식 같은 거 좀 사다줘도 될라나요?” (그건 구보씨가 알아서 해요. 좋아하겠지.)
“오늘 일하기가 왜 이리 힘든지 모르겠어요. ‘기’(氣)가 온통 다 빠져나가는 것 같아요. (...)
구보씨는 점심을 먹고는 밖에 나가더니, 빵과 음료, 과자 등의 간식거리를 잔뜩 사 가지고 왔습니다. 덕분에 박물관 손님들뿐만 아니라, 수목원 현장에 같이 일하는 반장님과 여러분들이 쉬는 시간 맛있게 간식을 먹었습니다. 나는 구보씨가 오늘 왜 이러한지를 진즉부터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내가 저 입장이면~’ 하고 그에게 감정이입(感情移入)을 해 보시면, 그의 오늘의 마음을 조금은 짐작하시리라 여겨집니다. 그는 보람되고, 기쁘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고, 선조님들께 고맙기도 하고, 할아버지가 보고 싶기도 하고, 아버지가 그립기도 하고... 이 복잡한 마음을 자기 혼자서만 감당하는 일이 외롭고 두렵기도 한 것입니다. (왜 안 그렇겠습니까?)
아마 내가 구보씨보다 인생을 조금 더 살아서인지, 아주 먼 훗날에 구보씨가 오늘을 추억하는 날이 있을 때, 그래도 조금이나마 아쉽지 않게 이 복잡한 심정들을 ‘카타르시스’(catharsis)하는 한 방법이 떠올랐습니다. 그가 기독교회의 집사인 것이 조금 우려가 되었지만, 구보씨가 이 일에서 나를 신뢰하는 것을 알기에, 나는 한 가지 일을 슬쩍 권유해 보았습니다.
“구보씨! 이제 조금 있으면 선조님들의 유물이 영영 떠나는 거네요. 그래도 멀리 가지 않고 가까운 우리 강화의 하점면으로 가니 섭섭하게 생각지는 맙시다. 어떤 사람들이 볼 때는 이런 게 특별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우리의 지난 2월부터 4월까지는 정말 화려하고 특별했어요. 공부도 많이 했고... 아~, 어떻게 이런 선물들이 우리에게 왔을까? 모두가 김현, 김봉상, 김난상... 이런 선조님들 덕분이에요. 그분들이 있어 증조부님, 조부님, 선친이 계셨던 것이고, 또 김구보씨가 이 세상에 나게 된거죠. 이럴 때 어떻게 하는 건지는 잘 모르겠는데... 나중에 학예사가 유물들을 차에 싣고 떠나기 전에, 유물들을 모아놓고 구보씨가 마지막으로 ‘큰절’을 한 번 하는 게 좋겠어요. 그렇게라도 ‘예’(禮)를 표해 놓아야 나중에 후회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내 생각이 어때요? 구보씨가 교회 다니니까 좀 뭣하기는 하지만...”
구보씨는 조금 생각하더니, 바로 쿨(cool)하게 대답했습니다.
“그럴게요! ― 좋은 생각이십니다. 저번에 교동에 가서도 제가 절을 했잖아요! 저는 이런 문제는 목사님이나 하나님도 다 이해해주실 거라 믿습니다. 저희 유물들이 다 ‘유교문화의 지평’에서 생겨난 것이잖아요? 잠시 그 지평으로 다녀온다고 생각할게요. 재배(再拜)를 하면 되겠죠?”
(이런 분명하고 소탈한 의사표시는 그의 큰 장점입니다.)
오후 4시에 유물 분류 작업이 다 끝나고, ‘S’학예사가 만들어 놓은 ‘기증서류’(총 108점)에 김구보씨가 자필서명을 함으로써 모든 ‘기증’의 절차는 완결되었습니다. 차에 유물을 싣고 떠나기에 앞서, 우리는 잠깐 시간을 빌려 계획했던 ‘예’(禮)의 의식을 치루었습니다. 구보씨가 유물을 앞에 놓고 큰절을 두 번하고 엎드려 있을 때, 나는 그가 뭐라고 혼자 웅얼거리는 소리를 알아듣고는,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아이고~, 우리 할아버님들...”
#3-3, 남겨 두는 이야기
매일 함께 보던 유물들이 모두 떠나간 후, 구보씨와 나는 며칠 동안 ‘청도김씨’와 ‘유물’들에 관한 이야기는 일절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수증자’(受贈者)인 박물관 측에서는 미리 정해져 있는 ‘기증유물관리’에 관한 나름대로의 매뉴얼이 있을 터이니, 이제 ‘기증자’(寄贈者)의 입장에서는 우리 박물관을 온전히 믿고, 행정 절차에 따라서 앞으로 진행되는 사항들을 보고 기다리는 일만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김구보씨는 처음 부흥여학교의 ‘수업증서’와 또 ‘두루마리 문서’ 이후에 일어난 모든 다른 고문서들의 해석과 관련하여, 자신의 생각 이상으로 파생되며 꼬리를 물고 연결되어 간 지난 2개월 여의 여러 새로운 사실들과 만남들에 대해 매번 놀라움과 자부심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나의 ‘해석학’ 공부가 시작되었을 때부터, 출근하면 꼭 나에게 습관처럼 물어보던 말이 있었습니다. “형님! 뭐 새로운 게 있습니까―?” 그만큼 그도 이 사안에 대해 늘 관심을 가졌다는 것이고, 나는 나대로 지난밤에 품었던 어떤 의문들과, 새로이 찾아낸 정보와 느낌들을 그와 토론하며, 재차 함께 확인하면서 이 공부를 진행해 왔던 것입니다. 나는 이제 구보씨가 물어보았던 ‘새로운 것’이었으나, 다른 것들에 가려 미처 언급하지 못했던, 몇 가지 추가적 사항들에 대해 간략히 말씀드리며, ‘청도김씨 교동파’ 에 관한 이 이야기들을 마무리할까 합니다.
첫째는 김구보씨의 계보입니다.
족보 책과 또 유물에 있던 ‘준호구’ 등을 정리해본 바, 그의 세계(世系)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김지대(金之岱, 시조 1세) ··· 점(漸, 8세) → 유손(裕孫, 9세) → 영우(靈雨, 10세) → 현(俔, 11세) → 봉상(鳳祥, 12세) → 호신(虎臣, 13세) → 경선(慶先, 14세) ··· 정성(井星, 17세) ··· 화헌(華憲, 20세) → 만욱(萬郁, 개명 상모[尙謨], 21세) → 규희(圭熙, 22세) → 시철(時喆, 23세) →영진(英鎭, 24세) → 호섭(浩燮, 25세) → 규식(奎植, 26세) → 구보(丘甫, 27세)>입니다.
22세 ‘규희’님의 ‘준호구’까지는 내가 확실히 보았고, 그의 부친인 21세 ‘상모’님의 ‘호패’(號牌)와 ‘교지’(敎旨), ‘무관흉배’(武官 胸背) 등을 또 유물에서 확인했으므로, 최소한 ‘규희’님의 시기 어디쯤에서부터 구보씨 가문이 교동과 강화에서 살고 있었다는 것은 정확히 추정할 수 있습니다. 이는 먼저의 ‘비망록’ 문서에서, ‘고령박씨’(김호신의 처)의 8세손이 ‘상모’인 점으로도 유추할 수 있는 사항이기도 합니다. 이 계보에서 한 가지 고려해야 할 사항은 (김난상이 아들이 없어 형님 봉상의 2자인 호섭(虎燮)을 양자로 들인 것은 이미 말했지만,) 호섭 이후로도 2번을 더 김봉상의 가계에서 대를 이었다는 점입니다. 족보상, 호섭의 아들은 또 형님댁 호신의 4자인 효선(孝先)입니다. 그러므로 결국 ‘영주파’도 핏줄로는 ‘교동파’에서 갈려 나간 것으로 파악되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40점의 ‘호구단자’와 ‘준호구’를 ‘청도김씨 대동보’와 대조하면서 보다 상세히 검토한다면, 거기에서는 또 얼마나 많은 새로운 사실과 정보들을 찾아낼 수 있겠습니까? 단지 구보씨의 가계뿐만이 아니라, 이와 연관되어있는 조선 후기 ‘강화부’와 ‘교동부’의 생생한 사회상과 생활상들을 추적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나는 이러한 앞으로의 과제들을 ‘강화역사박물관’의 ‘K’와 ‘S’ 두 분 학예사님들게 남겨서, 넘겨드립니다.
다음은 묘비명의 ‘퇴계 이황’의 글씨에 관한 것입니다. 교동 ‘김봉상묘비명’에는 ‘萬歷十年十月 日 崇政大夫 判中樞府事兼知經筵春秋館事 李滉 撰書’ (1582년 10월 일 숭정대부 판중추부사겸지경연춘추관사 이황 글을 짓고 글씨를 쓰다)라고 되었으나, 알다시피 퇴계가 사망한 해는 1570년이었습니다. 퇴계는 묘비건립 일자를 알 수 없었을 것이므로, ‘萬歷十年’(만력10년)인 1582년에 ‘李滉 撰書’(이황 글을 짓고 글씨를 쓰다)라고 쓰여 있는 것은 시간적 논리에 부합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 부분의 의문을 탁본을 한 ‘J교수’에게 물어보았던 것입니다. 그저 ‘李滉 撰書’라는 글이 비명에 쓰여 있다고 이황의 친필이라 말하는 것은 찜찜한 구석이 있다는 것이었지요. 이 의문에 대해 ‘K박사’님이 답을 주셨습니다. 퇴계가 쓴 친필 글씨는 12년 후 비석을 건립할 때 ‘딱 한 번’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 원본의 글씨는 가위로 오려져서 준비한 비석의 돌에 붙여지고, 묘비명을 새기는 각수(刻手)는 그에 따라 퇴계의 글씨를 원본 크기 그대로 돌에다 새긴다는 것입니다. 실수를 방지하기 위해 전체 비면의 크기를 고려하면서 5자씩, 10자씩, 잘게 오려 붙여서 각(刻)을 하는데, 그러므로 퇴계의 원본 글씨는 돌에 새겨지면서 동시에 돌 속으로 사라져버리는 것이겠지요. (물론 그 전에 퇴계의 묘비명 문장을 김봉상의 후손들이 미리 전사해 놓은 과정이 있을 겁니다.) 이것은 옛사람들이 ‘撰書’한 글을 비석에 새기는 지혜라고 할까요? 나는 현판에 새겨진 ‘추사’의 글씨나, 어디 바위에 새겨진 누구누구의 글씨들도 다 이런 방식으로 조각되었음을 이제야 알겠습니다. 그러하니 ‘팔만대장경’의 그 많은 경판들도 이와 같은 방법으로 ‘단 한 번’ 쓰여지고 ‘단 한 번’ 판각된 것임도 새삼스럽게 알겠습니다. 아마도 ‘김봉상묘비명’에서는 ‘萬歷十年十月 日’의 부분만 다른 이의 글씨체이고, 나머지는 모두 퇴계의 친필로 보면 될 것 같습니다.
다음으로는 교동의 ‘안동전씨’(安東全氏) 가문에 관한 내용입니다.
퇴계의 묘비명에 기록된바 김현이 안동전씨 전윤서(全允序)의 딸과 결혼하였으므로, 김봉상 형제들에게 안동전씨 가문은 외갓집이 됩니다. 나는 ‘퇴계’와 ‘김봉상’과 ‘청도김씨’들의 생각에 휩싸여 있다가, 어느 때인가 문득, ‘퇴계가 병산과의 친분과 우정으로 ’묘비명‘을 써준 것은 이제 알겠는데... ‘청도김씨’들의 선산(先山)은 왜 교동에 있을까?’라는 의문이 생겨난 적이 있습니다. 그런 생각이 들자, 예전에 내가 ‘강화학파’와 관련해서 하곡 정제두의 묘가 강화도에 있는 이유를 추정했던 논문이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곧 내 생각의 결론은 ― “김현이 장인 전윤서의 ‘안동전씨’ 땅을 상속받은 것이 화개산의 선산이겠구나!” 라는 것이었지요.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이제 ‘안동전씨’와 관계된 정보들을 찾아보기 시작했습니다. 인터넷을 검색하다 보니 놀랍게도! 교동에 ‘안동전씨’들의 집성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과거 교동에서 부면장으로 근무했고, 이런 부분을 잘 알만한 오랜 지인(知人) ‘M’국장을 통해, 교동의 전씨 성을 가진 한분의 성함과 전화번호를 소개받았습니다. ‘M’국장의 말씀 ― “나도 그분이 ‘안동전씨’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전화를 해 보시면 알게 되겠죠.” 그의 말대로 통화를 해 보니, 이게 웬일입니까! 마침 그분이 ‘안동전씨 교동종친회’의 회장을 역임하셨던 분이었음은 ‘M’국장과 나의 ‘일 궁합(宮合)’이 잘 맞았다고 볼 수밖에는 없을 것 같습니다. 나는 ‘전○○’ 회장님께 나의 궁금증을 정확히 확인하고자, ‘안동전씨’ 족보에서 ‘전윤서’가 나오는 부분을 어렵게 부탁드렸는데, 이에 회장님이 흔쾌히 찍어 보내주신 사진에는 그 부분을 확인하는 정보는 물론이고, ― 뜻.밖.에.도 전윤서의 손자가 ‘전순필’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또 한 번 놀랐습니다.
나는 이 ‘전순필’이란 이름을 알고 있었습니다. 전순필(全舜弼, 1514~1581)은 1574년(선조 7)부터 ‘강화도호부사’를 역임하며 『선조강화선생일기(先祖江華先生日記)』라는 기록을 남기신 분입니다. 이 일기기록은 ‘임진왜란’(1592년) 이전인 선조 즉위 초반기에 작성된 지방관의 ‘관직일기’(1574 1.1~1577, 4.15 까지의 40개월)로써 조선 초·중기 강화도 지역의 생활상을 연구하는데 있어 중요한 사료로 인정받고 있는 강화도의 대표적인 고유 문헌 자료 중 하나인 것입니다. 이제 전순필과 조부 전윤서의 사위인 김현과의 관계를 알아보면, 김현은 전순필의 고모부가 되고, 김봉상형제들은 전순필과 ‘고종사촌’간이 되는 것이니, 이들은 아주 가까운 친척이었던 것이지요. 나는 뒤에 ‘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에서 역주(譯註) 발행한 동명의 책을 구해서 읽어 보았는데, 거기에는 더 상세한 전순필의 가계가 이미 조사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김난상 『병산선생문집』 의 번역집을 구해서 확인해 보니, 거기에는 또 김난상과 전순필 두 사촌형제가 주고받은 편지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안동전씨’와 ‘청도김씨’와의 친족관계 등은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사항이니, 내가 모두(冒頭)에 『선조강화선생일기』와 『병산선생문집』을 비교하며 자세히 읽어보자고 한 이유가 되겠습니다. 『선조강화선생일기』의 주석을 읽어보니 ‘안동전씨’는 현재 강화에 적을 둔 가문 중에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문중의 하나임이 분명했습니다. 김봉상 형제의 외조부인 전윤서는 ‘교동향교’를 중수(重修)하신 분이었습니다. 또한 전윤서의 증조가 되는 ‘전사안’(全思安)은 이제현의 문인으로, 이성계가 개국하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성으로 교동으로 낙향하였으며, 그의 묘가 교동면 지석리에 있다고 합니다. 나는 언젠가 ‘전○○’ 회장님과 교동의 ‘안동전씨’ 묘지들을 답사해보려고 합니다.
조선 초기 양반가의 유산상속과 관련해서, 아들과 딸의 구분 없이 ‘1/n’로 균분 상속하였다는 것은, 이제는 ‘외손봉사’(外孫奉祀)의 기록들과 ‘분재기’(分財記) 등을 통해 많이 알려진 역사적 사실인 것 같습니다. 내가 읽어본 책에서는 ‘퇴계’가 그랬고, ‘율곡’이 그러했으며, ‘서애’와 ‘학봉’ 가문도 외가와 처갓집 덕을 많이 보았다는 것입니다. ‘정구응’이라는 분은 ‘안동권씨’ ‘권개’(권율 장군의 형)의 사위가 되었는데 권개가 일찍 죽자, 그의 유산을 ‘1/n’로 물려받은 땅이 지금 양도면 하일리의 ‘하곡 정제두’ 묘역으로 추정한다는 것이 제가 옛날에 쓴 ‘강화학파’ 관련 논문의 주요 골자 중 하나였습니다. 정제두는 ‘정구응’의 현손(玄孫)이었습니다. 나는 ‘청도김씨’와 ‘안동전씨’의 관계도 이와 같다고 추정합니다. (그렇다고 ‘안동전씨’가 ‘청도김씨’에게 뻐길 이유도 없습니다. 전윤서의 어떤 선조는 ― 마찬가지로 그의 외갓집 덕을 보았을 수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강화군에서 조성을 계획하고 있는 ‘화개정원’과 관련한 제안입니다.
보도에 의하면 강화군은 교동도의 관광인프라 확충을 위해 화개산 일원 20만㎡ 규모에 사업비 270억 원을 투입해 북한 연백평야 등의 조망이 가능한 ‘스카이워크형 전망대’ 공사를 지난 5월에 착공했다고 합니다. 또한 화개산성, 연산군 유배지, 교동향교 등 역사문화 자원과 연계한 ‘화개정원’ 조성공사도 착공하는 등 교동도를 대한민국 민통선의 대표 관광지로 육성한다는 계획입니다. 나는 기왕 준비하고 있는 계획에 이 ‘김봉상묘지’를 추가로 넣어서 ‘교동향교’와 이를 연계하는 ‘조선 유교문화 탐방로’(가칭)를 조성한다면 이를 교동의 새롭고 특별한 ‘역사·문화 콘텐츠’로 소개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교동향교’는 조선에 ‘주자성리학’이 처음 들어온 곳이고, 이 새로운 학문을 받아들여 이를 세계적인 ‘유교철학’으로 완성시킨 분이 퇴계이므로, 퇴계가 찬서한 비명이 있는 ‘김봉상묘지’는 설명하기에 따라 좋은 관광자원이 될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중국의 유학이론을 퇴계와 연결하는 가교의 역할을 한 시기가 김봉상 형제들이 살았던 시대이고, 또한 <화산지령 독생삼현(華山之靈 篤生三賢)> 같은 화개산이 들어가는 ‘고사성어’(故事成語)도 매력적인 슬로건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를 위해 ‘김봉상묘지’를 ‘향토유적’으로 지정하는 등의 강화군의 문화 행정 노력이 더해진다면, 교동의 역사문화 ‘관광지도’에도 이를 첨가하여 배전(倍前)의 관광 유인 효과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다.
에필로그 ― 별 그대
생각하자니 김봉상 형제들만 외갓집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세상 모든 남자들의 처음 여행지는 외갓집이 아닐까...? 생각해 보곤 했습니다. 이제는 모두 돌아가셔서 하늘의 ‘별’이 되신 사랑하는 외할머니와 어머니의 추억입니다. 어린 시절 7~8세 즈음? 어머니와 경주의 외갓집에 갔던 일이 떠오르곤 합니다. 반겨주시던 외할아버지와 할머니와 이모님들... 그 얼굴과 표정과 목소리들이 맥락도 없이 떠오릅니다. 월성군 천북면에 있는 외갓집 작은 마을에는 아직 전기가 없어, 밤이 되면 사랑방 시렁에 남폿불이 켜있었고, 마당에다 평상을 깔아 놓고, 옥수수를 삶고 계란을 까주시던 외할머니의 옆모습이 마치 어제인 듯 눈에 선하기도 합니다. 마른 쑥으로 모깃불을 피우던 할머니 옆에 누워, “할매요~ 옛날이야기 하나 해 주소!” ― 외손자가 보채면 할머니는 무슨 ‘여우’이야기도 해주시고, ‘곶감’이야기도 해주시곤 했던 것 같습니다. 사방은 온통 깜깜하기만 한데, 누워서 보는 한쪽 켠엔 달이 둥실 떠 있고, 멀고 높은 밤하늘에는 뿌우엿게 별들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저기이 은하수라는 기다!” 할머니는 옛날이야기 중에 어린 손자에게 ‘은하수’라는 단어를 처음 가르쳐주었습니다. 할머니가 가리키는 밤하늘의 그 은하수에서는 가끔씩 길고 흰 꼬리를 흔들며 별똥별이 솨악 솩 피었다 사라지곤 했습니다. “저거는 별이 죽는 거란다...” 할머니 말씀을 듣다가... 나는 그만 까무룩 잠이 들었습니다.
“엄마, 아아 데리고 가서 잘란다. 인자 이야기 고마하고 엄마도 가서 자소!”
(잠결 속에 어머니가 나를 안고 가며 하시던 말씀이 떠오릅니다. 나는 그 당시 우리 엄마가 엄마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다는 게 이상스런 일이라고 생각했나 봅니다. 그래서 엄마한테 물어본 기억이 납니다.)
“엄마, 엄마가 엄만데, 엄마가 할매한테 와 엄마라고 부르노?”
“나를 낳아준 사람을 엄마라 카는기라, 엄마는 옛날에 할매가 낳아주따 아이가.
그래서 엄마한테는 할매가 엄마인기라.”
“그라먼 또 할매를 낳아준 사람도 있을끼이 아이가? 그 사람도 엄마가?”
“그래, 할매가 엄마를 낳고, 그 엄마가 늙으먼 다 할매가 되는기라.”
“그런기 어딨노! 엄마먼 엄마지 엄마가 와 할매가 되노”
“니가 안죽 어리서 그렇다. 니도 나중에 크므는 다 알게 된다 아이가”
(약 50년 전 쯤의 위 경상도 모자(母子)간의 사투리 대화를 알아들으시는 분이 있을 줄 압니다. 남존여비가 아직도 심했던 당시 영남에서는, 어린 아들이 어머니에게 이렇게 반말 비슷하게 말을 했습니다. 어쨌든 그때 그 어린아이는, ‘관계’는 모르고 ‘존재’만 알아, ‘할머니’라는 종족이 따로 있는 줄 알았습니다.)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노래로 만들어지기도 한 김소월의 한 ‘시’에는, 옛날 어머니가 한 말씀과 비슷한 구절이 있습니다. ‘나는 어쩌면 생겨 나와/이 이야기 듣는가?/묻지도 말아라, 내일 날에/내가 부모 되어서 알아보리라’(김소월, 「부모」 中) 나는 이 부분을 대할 때마다, 밤하늘에 ‘은하수’가 가득했던, 유년 시절 외갓집에서의 그날 밤이 떠오르곤 했습니다.
대학시절 20대 초반 『코스모스』라는 책을 알게 되었는데, ‘칼 세이건’은 거기에서 ‘나는 어떻게 생겨났는가?’의 물음에 대한 답변을 구체적이고, 간명하게 설명하고 있어 놀랐습니다. 「인류는 우주대폭발의 아득히 먼 후손이다!」 ― 교회의 ‘창세기’는 아무래도 지어낸 이야기인 듯싶고, 북송(北宋)의 유자(儒者)들이 말하는 ‘태극’(太極)이니 ‘태허’(太虛)니 하는 말들도 어쩔 수 없어 만들어낸 공허하고 추상적인 개념인 것 같다고 짐작하던 때였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이보다 더 놀랐던 것은, 이 문장이 생겨나기까지의 과정에 있었습니다. 과학자들은 ‘가설’을 세우면, 이를 입증하기 위해 정확한 ‘관측 결과’와 ‘정황 증거’들을 제시하여 그 결과를 우리에게 확증(確證)케 한다는 것입니다. ‘우주대폭발’(빅뱅, Big Bang) 이론이 받아들여지기까지에는, ‘르메트르’ ‘허블’ ‘펜지어스’ ‘윌슨’ 등의 ‘관측’과 데이터 수집의 노력들이 뒤따랐습니다.
이러한 검증(檢證) 가능한 ‘과학의 방법론’으로 바라보면, 과학이 종교나 ‘문사철’(文史哲)의 인문학보다 인간과 세계를 더 잘 이해하고 있는 면이 분명히 있는 것도 같습니다. <우주→태양계→지구→생명→생물→인류→한국인>이란 더 광범위한 공간적 계통(系統)과, <물리학→화학→생물학→인류학→인문학→동양학→한국학>이란 더 넓은 학문의 계보(系譜)를 상정할 수 있겠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계통과 계보가 (불교에서 말하는) ‘중중무진’(重重無盡)의 ‘인드라망’(因陀羅網)으로 촘촘히 엮여있는 것이 우리가 매일 만나는 세계의 모습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역사’도 기존의 ‘역사’(History)에 대한 정의를 ‘인류’나 ‘우주’ 전체의 경과에까지 넓게 확장하는 ‘대역사’(Big History)의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나는 기왕에 탐구한 ‘김구보씨의 내력’을 ‘김지대로부터 현재까지’의 800년으로 한정하는 것에 대해 미흡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김지대까지의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두겹’으로 말씀드려도 될 것 같습니다.
“137억년 전 ‘빅뱅’이 있었고, 수소(H)와 헬륨(He)을 기초로 만들어진 물질들이 모여서 우주에는 수많은 별들이 생성되었다. 태양계에 속한 작은 ‘지구’(地球) 별은 약 45억년 전에 탄생하였는데, 38억년 전 화학작용으로 물(H2O)이 만들어지자 지구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영겁(永劫) 의 시간에 걸친 생명의 진화가 시작되었다. 진화는 『이기적 유전자』(selfish gene)의 자연선택이었다. 모든 유기물과, 또한 수많은 종의 동·식물들이 생장하고 번식하였으며, 먼 인간의 조상(호모 에렉투스)은 180만년 전에 지구상에 나타났다. 인간종 진화의 마지막 단계인 현재의 ‘사피엔스’(Homo Sapiens)가 출현한 것은 30만년 전이었다. (그러므로, 내 몸을 만든 제1의 제조창은 ‘빅뱅’이었고. 제2는 ‘수소’, 제3은 ‘물’이다.) ··· 한국인의 먼 조상은 아프리카를 떠나, 홍해를 건너, 유라시아대륙의 끝인 한반도에 터를 잡았다.” (대역사)
“한반도에는 처음 고조선이라는 나라가 있었고, 후에 고구려, 백제, 신라의 고대국가들이 패권을 다투었으나 최종승리자는 신라였다. ‘한민족’은 이후 신라 하대에 후삼국(신라, 후고구려, 후백제)으로 다시 분열하였는데, 궁예의 부하였던 왕건이 ‘고려’를 개창(918년)했으나 아직 혼란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신라 경순왕(‘김부’)이 군신회의를 소집해 고려에 귀부하기로 결정함으로써(935년) 왕건이 민족을 재통일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김부는 왕건의 딸 ‘낙랑공주’를 아내로 맞이하고 정승에 봉해졌으며, 경주를 식읍으로 받아 사심관에 임명되었다. 경순왕과 낙랑공주 사이의 넷째아들 ‘김은열’의 8세손이 ‘청도김씨’의 시조인 ‘김지대’이다.” (역사)
김구보씨는 지난달부터 내가 자신이 포함된 ‘청도김씨’의 ‘내력’을 글로 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어제 사흘간의 늦은 여름휴가를 다녀와서는 나에게 물었습니다.
“형님! 쓰신다는 글은 잘 되고 있습니까?”
“응, ‘역사’는 그럭저럭 썼는데, ‘대역사’에서 힘에 많이 부치는군요.”
(나는 역사와 대역사의 관점을 그에게 설명했습니다.)
“그럼 역사야 아는 내용일 테고, 대역사로 미리 들어보죠! ― 나는 어디에서 왔습니까?“
(나는 ‘빅뱅’이나 ‘수소’(H)나 ‘물’이... 너무 메마르고 산문적이 아닐까? 란 생각을 합니다.)
“당신은―, 그리고... 나도, <별>에서 왔다오.”
(은하수의 별들이 생겨난 이야기를 합니다. 그 별에까지 가니
우리는ㅡ, 우리 수목원에 있는 꽃나무들도ㅡ, 모두 '공통의 내력'이 됩니다. )
“하하하하~, 그 별은 어디 있는 별이에요?
오늘 밤에 내가 한번 찾아보게요.”
“구보씨는 ‘소행성 B612’라고 들어봤나? 거기에서 왔어!
그걸 찾는 비밀을 알려드릴게. 아주 간단해요.
‘마음’으로 보아야만 그 별은 볼 수가 있어.
중요한 것은 눈에는 보이지 않아요.”
Here is my secret. It's quite simple:
one sees clearly only with the heart.
Anything essential is invisible to the eyes.
[참고자료]
「통사랑 영릉참봉 김군 묘갈명 병서」
나의 벗인 이조참의 김군 계응(季應)이 그의 백씨인 고 영릉참봉군(英陵參奉君)의 행적을 차례로 엮어 묘갈명을 황(滉)에게 부탁한 지가 여러 해 되었다. 황은 늙고 병들어 있었기에 즉시 응하지 못하였는데, 계응은 간곡히 요청하기를 더욱 게을리 하지 아니하였다. 황은 진실로 군의 인품을 일찍부터 알고 있으니, 계응의 부탁을 무슨 말로 사양하겠는가. 삼가 상고하건데, 군의 휘는 봉상(鳳祥)이며 자는 백응(伯應)이니, 청도현 사람이다. 고려조에 평장사를 지내고 시호가 영헌공인 휘 지대(之垈)는 먼 선조이다. 그 뒤에 오산군 한귀(漢貴) 이하 4대가 모두 현달하였으니, 벼슬이 좌참찬에 이른 휘 점(漸)이 휘 유손(裕孫)을 낳으니, 가선대부 나주목사에 추증되었다. 목사는 휘 영우(靈雨)를 낳으니 첨지중추부사를 지냈으며, 첨지가 휘 현(俔)을 낳았으니 강의습독관인 바, 이 분이 군의 선고(先考)이시다. 선비(先妣)는 의인 안동전씨로 생원 윤서(允序)의 따님이다.
군은 홍치 병진년(1496) 7월에 출생하였다. 어려서 부친을 여의었는데, 능히 스스로 학문에 힘써 재주와 학업이 일찍 성취되어 뛰어난 명성이 있었다. 임오년(1522) 사마시에 합격하여 반궁에 있었는데, 모든 문예의 시험에 언제나 선두에 있어 훌륭한 소문이 더욱 드러나면서 모든 과거에는 유사(고시관)에게 맞지 않아 억울하게 낙방했다고 칭해온 지가 오래되었다. 무술년(1538)에 모친상을 당하였는데 집상에 있어서 애훼함이 예로 극진하였다. 신축년(1541)에 태학생으로서 사재감참봉으로 천거되었으며, 계묘년(1543)에 선원전참봉으로 옮겼는데, 이때 향시의 선발에 또 강경을 끝냈으나 다시 낙방하였다. 갑진년(1544)에는 또 다시 영릉 참봉으로 옮겼으며, 을사년(1545) 3월에 교동에 있는 선영에 성묘하러 갔다가 병을 얻고 돌아와 마침내 별세하니, 향년이 50세였다. 5월에 선영의 곁에 장례하니 교동현 남쪽 우동이었다.
군의 사람됨이 영민하고 공손하며 기국이 넓고 평탄하였다. 그리고 진실되어 거짓으로 꾸밈이 없으며,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함이 천성에서 나왔다. 올바른 일 하기를 마치 즐거운 욕심같이 하고, 지조를 지켜 권세와 이익에 빼앗기지 않았으니, 그 의지는 높고 높아 옛 것을 사모하고 절의를 숭상하였다. 일찍이 김충암등 여러 선배들에게 종유하여 도의의 훌륭한 말씀을 얻어듣고는 개연히 스스로 분발하여 이 학문에 종사하였다. 그리하여 탐구하고 실천함이 모두 과정이 있었는데 기묘사화(1519)가 일어나자 충주의 보련산 아래에 은둔하여 주경야독하면서 일생을 마치려고 하였으나 집이 가난하고 어버이가 늙었으므로 끝내 실행하지 못하였다. 군의 두 아우는 구상(龜祥)과 난상(鸞祥)인데, 군과 함께 모두 효성과 우애가 돈독하였다. 모부인께서 일찍 과부가 되어 질병이 많으셨는데, 형제들이 어머니의 뜻의 봉양으로 몸소 의원과 약을 공급함에 있어 마음과 힘을 다해 보통 사람들이 미칠 수 없는 점이 많았다. 어머니 옆에서 뜻을 공손히 받들고 온화하게 하였으며, 옷과 이불과 반찬을 반드시 맞게 하고 반드시 제 때에 하였다. 약물을 친히 맛보아 올렸으며, 약은 희귀한 당재가 많았으므로 구비하기가 어려웠다. 이에 붕우와 친지들은 이것을 보고 민망히 여겨 서로가 보조하였으며, 혹은 몸소 산으로 가서 향재를 채집하도록 해 주었다. 그리고 군의 형제들은 또 산사에 가서 손수 솔잎을 썰어 송엽주를 만들어 오래 보관해두었다가 계속 올려 기어이 효험을 보려고 하였다. 모부인의 병환이 위독해지자 날마다 몸소 방아 찧는 도구를 마련하여 가묘에서 기도하였으니, 어버이를 섬김에 정성을 다함이 모두가 이와 같았다. 일찍이 형제가 분가하여 살지 않아야하는 의리를 가지고 모부인에게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가문의 쇠박함이 이와 같사온데, 만일 다시 형제들이 떨어져 살아 굶주리고 배부름과 춥고 더움을 함께 하지 않는다면 천륜의 의를 어떻게 다하겠습니까. 더구나 우리 집안은 자매가 없고 형제 셋만이 진심으로 서로 믿고 있으니, 함께 거주함이 어찌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이에 모부인은 기뻐하여 한 치의 천이나, 한 알의 콩도 나눌 수 있다는 동요를 가지고 더욱 권면하고 경계하였다. 이에 형제들이 서로 약속하고는 한 집에서 함께 밥을 지어 먹는 계획을 세우고 일상 생활하는 온갖 씀씀이를 모두 서로 균등히 하였으므로 한 집안 사람들은 감히 한 물건이라도 독차지하여 스스로 사사로이 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윤리가 바르고 은혜와 사람을 돈독히 함은 이미 옛날 장진의 물려준 뜻이 있어 사람들이 모두 칭찬했는데, 어찌하여 하늘은 선한 자에게 복을 내리는 것과는 어긋남이 많아, 군의 재주와 기국으로 훌륭한 뜻을 품은 채 일찍 세상을 마쳤는가? 군의 막내아우는 이미 현달하였으나 곧 침체하여 해도에서 19년 동안 귀양을 살고 말았다. 그러다가 은혜를 받고 조정에 돌아오니, 중씨께서 하세한 지도 이미 여러 해였다. 형제간에 서로 즐거워함을 오래하지 못하고 영원히 잃었으니, 그 슬픈 감회가 마땅히 어떠하겠는가? 그러나 군이 품고 있던 모든 뜻과 한 집안의 유법을 막내아우인 계응이 능히 따라 회복하여 잘 지키고 있으니, 군은 구천에서도 유감이 없을 것이다.
군은 양천인 충순위 김중진(金仲珍)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후손이 없으며, 계실은 수안 김씨로 전 부장 언광(彦光)의 딸이다. 부장은 안동 권씨 장흥령 흠(欽)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무진년(1508) 8월에 의인(宜人)을 낳았다. 의인은 부인의 도리에 부족함이 없어 육친에게 칭찬을 받았으며 공보다 9년 뒤에 별세하니 향년 47세였다. 군의 묘에 부장하였다. 아들 둘을 두었는데, 장남은 호신(虎臣)이고 차남은 호섭(虎燮)이다. 장남 호신은 6남 1녀를 두었으니 남은 진선(振先), 경선(慶先), 계선(桂先), 효선(孝先), 기선(起先), 현선(顯先)이고 여는 김종계(金宗繼)이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顯顯金君。英憲雲孫。孝友天畀。才行世聞。誠以事親。義以持門。筍因泣生。荊豈私分。鴻羽靑冥。共期騰騫。胡柰數奇。事多邅屯。壽僅中身。官止寢園。季復遐謫。飛急鴒原。仲也踽踽。遠宦羇魂。理極必反。終被王恩。季始來歸。幽明載欣。迺追迺述。慰歿收存。宛如君在。合堂同飧。君志不墜。君門以芬。往者奚憾。慶垂來昆。
훌륭하고 훌륭한 김군 (顯顯金君)
영헌공의 후손이라오. (英憲雲孫)
효성과 우애 하늘에서 내려주었고 (孝友天畀)
재주와 행실 세상에 알려졌네. (才行世聞)
효성으로 어버이 섬기고 (誠以事親)
의로써 가문을 유지하였다오. (義以持門)
죽순이 눈물로 인해 나왔으니 (筍因泣生)
가시나무 어찌 사사로이 나누겠는가. (荊豈私分)
청운의 길에 고상하여 (鴻羽靑冥)
현달한 것을 모두 기약하였는데, (共期騰驀)
어찌 운수가 기구하여 (胡奈數奇)
일에 어려움이 많았던가? (事多邅屯)
수는 겨우 중년에 그치고 (壽僅中身)
벼슬은 침원에 그쳤으며, (官止寢園)
막내아우는 멀리 귀양가니 (季復遐謫)
급히 나르는 척령과 같았네. (飛急鴒原)
중씨는 외롭고 외롭게 (仲也踽踽)
멀리 벼슬하다가 혼을 부치었네. (遠宦羈魂)
이치는 극에 달하면 반드시 돌아오는 법 (理極必反)
끝내는 왕의 은혜 입어, (終被王恩)
막내아우 비로소 돌아오니 (季始來歸)
유명에서 모두 기뻐하였네. (幽明載欣)
이에 유지를 따르고 계승하여 (迺追迺述)
죽은 이 위로하고 생존한 자 거두니, (慰歿收存)
완연히 군이 생존했을 때처럼 (宛如君在)
한 집에서 함께 밥 지어 먹네. (合堂同飱)
군의 뜻 실추되지 않았으니 (君志不墜)
군의 가문 향기롭네. (君門以芬)
가신 분 무엇 한탄하랴 (往者奚憾)
경사가 후손에 드리워지네. (慶垂來昆)
萬歷十年十月 日 崇政大夫 判中樞府事兼知經筵春秋館事 李滉 撰書
(1582년 10월 일 숭정대부 판중추부사겸지경연춘추관사 이황 글을 짓고 글씨를 쓰다)
(2020, 8, 23)
첫댓글 매우 긴 글입니다. 처음 ‘강화도 이웃사촌’ 카페에 올렸었는데.. (어떻게 잘못 만져서 날아간 걸) 여기에 다시 올립니다. 기회에 작은 몇 부분을 수정했습니다. 내용 중에 ‘강화백북스’ 이야기도 나오니 의미가 있습니다. *아래의 동영상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