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외환위기 사태는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바꿨다. 그만큼 충격적이고 고통스러웠다. 절대 발생할 수없다고 생각한일이 발생했다. 수많은 가장들이 직장을 잃고 거리를 떠돌았다. 다니던 직장에서 짤려나와 어쩔수 없이 산을 오르는 사람도 많았다. 집에는, 가족들에게는 말을 할 수 없었다. 해가 바뀌고 김대중대통령이 새로운 대통령으로 취임하게 되었다. 새로운 마음으로 IMF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국민들이 힘을 합쳤다. 금모으기 운동이 지속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은행에선 금모으기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매일 사람들이 줄을 서서 집 장롱에 깊숙이 보관중이던 금을 은행으로 가져왔다. 금을 판별할 수 있는 전문가들이 은행에 배치되었고 저울등도 비치되어 금무게를 달고 현금으로 바꿔 예금통장에 입금했다. 온 국민이 서로서로 힘을 모아 이 위기를 벗어나고자 힘을 모았다. 금반지, 돌반지, 금목걸이, 행운의 열쇠 다양한 금붙이 들이 매일같이 지점으로 들어왔다. 이처럼 많은 금들을 집에 보관하고 있을것이라고 생각지 못했다. 금모으기 운동은 외환위기를 조기 졸업하는데 원동력이 되었다. 주택은행은 동남은행과 평화은행을 인수하게 되었다. 그래서 지점직원들 여러명이 인수팀에 합류게 되었다. 그러지 않아도 일이 많아 손이 달렸는데 직원 5~6명이 출근을 하지 않게 되자 업무량이 대폭 늘게 되었다. 매일이 야근이고 도떼기 시장이었다. 나도 업무 강도가 나날이 커져갔다. 특히 서무일을 맡고 있던 나는 지점장의 호츨이 점점 많아졌다. 지점장은 차장이 두명이나 있었으나 지점관련 모든 일을 나에게 시켰다. 차장과 지점장 관계가 서로 좋지 않았다. 차장들도 지점장과 관련된 결제사항 이라던지, 지점 애로사항을 나에게 얘기했다. 나는 인수팀에 출장간 다른 직원의 일도 부담하고 지점 살림, 지점장 심기, 차장들의 업무 지시까지 몸이 열개라도 모자랄 지경이 되었다. 은행 출근하는것이 도살장에 소가 끌려가는 느낌이었다. 그때 마침 명예퇴직 신청을 하라는 문서가 날아왔다. 주택은행은 국민은행과 합병을 할 예정이었다. 합병하기 전 직원의 숫자를 줄여 원활한 합병을 꿰하고자 했다. 그전까지 명예퇴직을 하려면 나이가 어느정도 찼어야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합병건이 있어서인지 나이 불문 원하는 직원은 누구나 퇴직을 신청할 수 있었다. 거기다 지금까지 없었던 명예퇴직금으로 2년 연봉을 더하여 지급한다고 했다. 주택은행과 국민은행이 합쳐지면 중복되는 지점도 여러개가 생겨 상당수의 직원이 퇴직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남자직원들은 퇴직을 하지 않으려 했다. 여직원들 중 같은 은행을 다니던 직원은 이번 기회에 퇴직금도 더 많이 받을 수 있어 좋은 기회로 삼아 퇴직자가 많았다. 특히 부부가 모두 은행을 다니는 경우 진급에 악영향을 준다는 소문이 있어 퇴직신청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남 직원들은 명예퇴직을 신청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나는 집사람에게 퇴직을 해야겠다고 말했다. 집사람은 미쳤냐고 했다. "남들은 지금 직장을 찾지 못해 죽네사네 하는데 배부른 소리하네" 그러나 나는 정말 은행을 가기 싫었다. 나는 출근할때마다 인상을 구기고 쌩하니 집을 나섰다. 어떤날은 아이고,아이고 앓는 소리를 내며 집을 나섰다. 나는 은행을 다니기가 너무 힘들다고 집사람에게 계속 징징 거렸다. 마침내 집사람은 내 고집을 꺽지 못하고 허락해줬다. "죽이됐던 밥이됐던 그렇게 가지 싫으면 그만둬" 나는 명예퇴직 신청 마감일 명예퇴직서를 팩스로 발송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무슨 깡다구로 그런 일을 저질렀는지 알 수가 없다. 만약 다시 그 순간으로 돌아간다면 퇴직신청을 하지 않을까? 아마 퇴직신청을 했을것으로 생각이든다. 퇴직을 결정하는 계기는 있었다. 은행일이 처음부터 나하곤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누군가의 지시사항에 따라 업무를 하는것이 내 취향에 맞지는 않았다. 매일 똑같은 시간에 똑같이 출근해서 똑같은 직원들과 똑같은 업무를 하는것이 정신적으로 점점 힘들어졌다. 어려서부터 사업을 해보겠다는 생각도 있었다. 직장생활보다는 사업이 내 성향과 맞다고 생각했다. 두번째로 1년전 집사람도 퇴직을 해서 퇴지금으로 1억원 정도를 받았다. 이번 명예퇴직금이 2억원은 되는것 같았다. 그때 당시 목동아파트 20평형대가 1억2천 ~ 3천만원 정도 했다. 현금 3억원 정도가 확보된다면 퇴직을 해도 무서울것이 없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업무강도가 너무 힘이들었다. 같이 근무하는 직원과의 관계도 스트레스가 많았다. 결국은 업무를 이겨내지 못하고 중도에 포기하고 만것이다. 고교동창 친구들은 거의 다 은행정년 퇴직을 했다. 그런데 나만 조기 퇴직을 했으니,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점점 은행생활에 실패했구나 느끼게 되었다. 나는 은행 생활을 18년 정도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아무것도 모른채 은행생활을 시작했다. 힘이 드는 날도 있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즐거움이 더 많았다. 은행을 다니며 결혼도 하고 집도 사고 애도 낳았다. 내가 만약 은행원이 아니었다면 인생 살이가 더 힘이 들었을것이다. 그만큼 은행은 내 경제적 살림살이에 큰 도움이 되었다. 지금은그것을 알지만 은행을 퇴직할 당시엔 정말 몰랐다. 은행을 퇴직하고 어떤일을 해도 다 잘될것이라고 생각했다. 남들은 은행원이라면 좋은 직장에 다닌다고 부러워했다. 그러나 평양감사도 제 싫으면 싫은것이다. 너무 틀에 박혀 똑같은 일만 되풀이 해가며 살아가는것이 나를 매너리즘에 빠지게했다. 배부른 소리하고 있다. 남들은 직장에서 강제 해직 당해 길거리를 전전하고 심지어 목숨줄을 놓는데, 나는 정말 무모하고 아무생각이 없이 인생을 산것 같다. 명예퇴직서를 내기전 담당 차장이 저녁이나 먹으러 가자고 했다. 퇴직신청서를 낼 수 있는 마직막 날이었다. "퇴직을 하면 무슨일을 하려고 하나, 그래도 은행생활이 좋지 않겠어" "글쎄요, 아직까지 무슨일을 할까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퇴직을 하겠다고, 이 친구야 세상이 만만치 않아 다시 생각 해보라고" 나는 누가 어떤 말을 해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저녁을 먹으며 생각했다. 만약 저녁을 다먹고 지점에 들어가 퇴직신청서를 팩스로 발송할 수 있다면 나는 퇴직신청을 하리라,
저녁을 먹고 지점에 들어오니 직원들은 전부 퇴근했다. 나는 퇴직신청서를 팩스에 집어 넣었다. 징하고 팩스로 퇴직신청서가 발송되었다. 그걸로 내 퇴직신청은 받아들여졌다.직원들은 하나같이 나에게 무슨일이 있냐고 물었다. 퇴직 후 어떤일을 할것인지도 물었다. 나는 지금부터 준비하겠다고 말했다. 퇴직신청 접수 후 약 한달정도 인수인계 기간이었고, 퇴직이 확정된것은 한달정도 지나서였다. 나는 퇴직하는 그날까지도 은행에 빠짐없이 출근했다. 퇴직신청을 한 직원들은 출근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나는 퇴직을 하는 날까지 출근을 했다. 그리고 마지막 날 내 직속 담당 행원들과 저녁을 먹었다. 내가 은행을 그만둔다고 해도 나의 뿌리, 기반은 은행이었고 은행에 근무하는 동료직원이었다. 내가 무슨일을 하든 그들이 내 최고의 고객이 되고, 내 최고의 후원자가 될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끝나는 날까지 최선을 다해 내일을 했고, 업무 인수인계를 절처하게 아무 문제없이 끝내고 싶었다. 이런 내 행동은 은행을 퇴직하고 사업을 시작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내가 은행을 퇴직했을 때 나이가 38세였다. 너무 젊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