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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0호 알곡과 가라지
죠 크루스
성경에 기록된 원칙들과 그것을 범하는 범죄자에게 가해지게 될 형벌에 대하여 불만스럽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그러한 제재들과 위협적인 형벌이 우리의 순종을 더욱 힘든 것으로 만들고 있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가상 인터뷰를 생각해 보도록 하자. 의사가 환자에게 검진 결과를 보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하자. “선생님, 저는 아주 좋지 않은 소식을 전할 수 밖에 없습니다. 건강진단 결과 선생님은 제가 시키는 대로 정확히 따르지 않을 경우 죽게 될 것입니다. 선생님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는, 제가 지금 말하는 것을 그대로 따라야 하며, 남은 생애 동안 매일같이 제가 드리는 처방과 지시대로 살아야 합니다. 선생님이 살아있는 한 매일같이 이것을 실행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선생님은 죽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의사가 환자를 위해서 준 처방은 그것을 어길 경우, 무서운 형벌이 따라오는 엄한 규칙들임에 틀림 없다. 그러나 환자가 그 명령들을 따르는 것이 무척 어려운 일인가? 물론 아니다. 신체의 법칙들은 규칙적으로 식사와 운동을 할 것을 요구한다. 제 시간에 먹고 운동하는 것은 환자 자신의 유익을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환자는 의사가 자신을 위하여 최선의 처방을 내렸다는 사실을 신뢰하는 믿음을 가지고 아무런 불평없이 의사의 지시를 따를 수 있게 된다. 문제는 의사에 대한 환자의 신뢰(믿음)이다! 의사에 대한 신뢰가 부족한 사람은 의사와 그가 내리는 제재에 대하여 불평하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과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는 신뢰와 사랑의 법칙으로 이루어져야만 한다. 성경의 계명이나 형벌에 대하여 전혀 불평하거나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계명과 원칙을 주신 분은 바로 우리의 구원과 영생을 위하여 십자가에 매달리신 분인 예수 그리스도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최선의 유익을 위하여 계명과 원칙을 준수하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그들의 행복을 더 높은 차원으로 승화시킬 것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형벌에 대한 두려움에서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사랑하는 분께 순종하는 것이 최고의 기쁨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또 다른 예화를 생각해 보도록 하자. 만일 내가 한달 동안의 전도집회 때문에 집을 나서려 하고 있는데, 아내가 심각한 표정을 보이면서,“여보! 당신은 한달 동안 집을 떠나 있을거죠. 당신이 여행하고 있는 동안에는 월급 봉투가 당신에게 우송될지도 모르는데, 떠나시기 전에 이 문서의 내용을 잘 읽어보세요. 이것은 새로 개정된 법규 329조의 내용인데, 만일 가장이 가정에 매달 생활비를 보내주지 않으면, 30일 구류를 당하게 될 것이라고 씌여 있어요. 유치장에 들어가고 싶지 않으면, 월급을 받는 즉시 생활비를 저에게 보내주세요.”라고 말했다고 가정해 보자.
아내가 읽어준 법조문 때문에 내가 어떤 위협을 느낄 필요가 있는가? 천만에! 왜냐하면 사랑하는 가족들을 돌보고 싶어하게 만드는 더 높은 사랑의 법이 내 마음 속에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사랑은 의무를 즐거운 특권으로 바뀌게 해준다. 아내와 교제하던 시절, 나는 사랑하는 그녀를 만나기 위해서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를 맞으면서 3마일이나 걸어갔던 때를 지금도 기억한다. 지금까지 그 일을 한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 그녀에 대한 사랑이, 힘든 일도 이길 수 있게 해주었다. 우리의 마음이 어떠하냐에 따라서, 아무리 작은 것도 무거운 짐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잘못되어 있으면,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은 매우 무거운 짐이 될 수 밖에 없다.
좁은 길은 힘들고 불행한 길인가요?
어떤 사람들은 종종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여러가지 제재가 많아요” 그 말은 사실이다. 그러나 결혼 생활은 신앙 생활보다 훨씬 더 많은 제재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제약들이 사랑하는 부부의 결혼생활을 불행하게 만드는가? 서로 뜨겁게 사랑하는 신랑 신부가 주고받은 약속과 원칙들에 대해서 불평하는 것을 보았는가? 갓 결혼한 신혼부부들은 그들이 서약한 신성한 약속들에 대해서 불평하지 않는다. 그들은 상대방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치겠다고 약속하면서도 마냥 기쁨에 충만해 있다.
누군가가 새 신부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고 생각해 보도록 하자. “오, 저런! 넌 이제 정말 큰일났구나. 생각해 보렴. 매일 아침마다 신랑을 위해서 음식을 준비해야 돼. 또 집을 늘 청소해야 하고, 신랑의 옷을 손질해야 하며, 신랑의 깔끔하지 못한 습관들을 참고 지내야 해. 너의 결혼 생활은 정말 지겨운 것이 될거야.” 새 신부가 어떻게 반응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녀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래도 나는 너무 너무 행복해요. 남편을 위해서라면 그것보다 더 힘든 일도 하고 싶어요”.
침례받는 것은 예수님과 “결혼”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누군가가 새로 침례받는 한 그리스도인 여인을 실망시키기 위해서 애쓰는 모습을 가상해 보자. “얘, 너 이제 큰일났다. 생각 좀 해봐라. 넌 더 이상 술집에 가서 춤추지도 못한다. 또한 여러명의 남자 친구들과 사귈 수 없게 되었단다.” 새로 거듭난 그 그리스도인 여인은 밝은 미소로 말할 것이다. “그래도 좋아요. 오히려 그것이 저에게 큰 기쁨인걸요!”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 14절에서 그리스도와의 사랑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사랑은 사람들을 움직여서, 자신을 위해 죽으신 분을 기쁘시게 할 일들을 행하게 한다. 그러한 봉사와 순종의 길을 가는 자들에게는 어떤 것도 무거운 짐이나 멍에가 될 수 없다. “그 계명들을 행하는 자들에게 복이 있나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계 22:14. “복이 있다”는 말은 실제적인 행복을 의미한다. 계명들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제약과 규제를 가져다 줄 수 있지만, 우리를 가장 사랑하는 예수님이 주신 제약이라면 그것은 우리에게 기쁨과 행복을 주지 않겠는가?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시여, 여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복음의 기쁜 소식이 있는데, 저는 모든 독자들에게 그 소식을 전해주고자 한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의로움을 주시고, 거룩하게 될 수 있는 다이너마이트와 같은 능력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다. 우리는 죄책감과 죄의 세력으로부터 넉넉히 해방될 수 있다. 값없이 예비된 복음을 단순히 받아들임으로써, 구원이 우리 그리스도인 경험의 세 시제(과거, 현재, 미래) 가운데에서 보장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녀된 우리들 모두에게 주시는 측량할 수 없는 부요함과 권능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도록 하자.
실패의 원인을 아시나요?
금연을 결심하는 어떤 흡연가가 담배갑을 선반 위에 올려놓으면서 이렇게 중얼거린다면 그가 금연을 위한 투쟁에서 승리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난 이제 다시는 담배를 안 피우기로 노력할거야. 그러나 잘 안될 때는 담배를 놔둔 장소를 내가 아니까 언제든지 참지 못할 때에는 다시 피울 수 있어.” 이러한 방법은 실패로 돌아갈 것이다. “믿음”의 방법 하에서는 인간의 연약함에서 비롯되는 실패를 미리 염려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승리는, 인간의 힘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실패할 수 있으나, 그분께서는 결코 실패하지 않으신다. 담배를 끊기 원하는 흡연가는 담배갑을 내동댕이 쳐야 하다. 어떤 종류의 타협도 일절 없어져야 하다.
하루는 철수가 어머니의 명령을 어기고 수영하러 갔었기 때문에 꾸중을 듣게 되었다. 왜 어머니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대해서 그는, “전 유혹을 받았기 때문이예요”라고 대답했다. 어머니가 물었다. “나는 네가 아침에 수영복을 가지고 가는 것을 보았다. 왜 아침에 수영복을 가지고 갔지?” 철수는,“유혹받을 것을 예상했기 때문이예요”라고 대답했다. 승리를 쟁취하는 일에 있어서, 어떤 사람들은 투쟁이 시작되기 전부터 타협을 시작한다. 그들은 실패할 경우을 위해서 미리 대책을 세웁니다.
“그런데 유혹에 져서 승리하지 못하면 어떻게 하죠?” 라는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베드로도 물에 빠졌잖는가? 승리가 계속되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심이 흔들려야 하는가? 아니다. 베드로가 물에 빠진 것은 하나님의 능력의 부족과는 상관없는 문제였다. 베드로가 물에 빠졌다고 해서, 그에게 물위를 걸으라고 명령하신 그리스도의 뜻이 바뀐 것은 아니다. 베드로의 실패가 주님의 뜻을 바꿀 수는 없다. 베드로는 단지 자신의 연약함을 더욱 더 절감해야 하며, 더욱 더 많이 그리스도를 의지해야 할 필요성을 깨달아야 한다. 베드로는 더욱 더 큰 믿음을 가지고 주님의 명령을 수행해야 한다는 현실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능력에 온전히 의존해야 된다는 진리를 기억해야 한다. 베드로와 우리의 실패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통하여 승리와 능력을 나누어 주고자 하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계획을 변경시키지는 못한다. 받는 자의 편에 믿음이 없다면, 비록 하나님의 약속일지라도 사용될 수 없다. 승리와 실패의 분명한 한계선이 예수님의 말씀에 명시되어 있다. “너희의 믿음대로 되리라”마 9:29.
형제자매들이시여! 승리는 단순함에 있다. 그리고 그것은 실제적인 것이다. 여러분이 기꺼이 구원받고자 한다면, 그것은 이루어질 것이다. 죄를 기꺼이 버리고자 하지 않는 자는 어떤 도움도 받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것을 원한다면, 그것은 이미 준비되어 있다. 승리, 능력, 구원은 믿음만 있으면 얻을 수 있는 여러분의 소유물이다. 믿으라. 그리고 요구하라. 지금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 모두가 자유롭게 되기를 원하신다.
2.권두언
지난 주에 한국에서 방문한 조카가 플로리다 주에 있는 케네디 우주 센터에 갔다 오면서 선물로 모자를 사다 주었습니다.
저는 그 모자를 보면서 여러 해 전에 우주 센터에서 보았던 감동적인 기록 영화가 생각났습니다. 거대한 대형 스크린에 펼쳐지는 그 영화는 과학자들이 한 우주선을 발사해 올리기까지 수고하고 애쓰는 장면들을 기록 영화로 찍은 것이었습니다. 여러 기계들을 시험한 후 실패를 통하여 문제점을 수정하고, 우주선 조종사들을 훈련시키며,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는 모습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드디어 우주선을 발사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수십명의 과학자들이 컴퓨터 앞에 앉아서 긴장된 모습으로 계기들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안절부절한 마음으로 왔다 갔다 하면서 서성거리고 있었습니다. 카운트 다운이 시작되었습니다. “10,9,8,7,6,5,4,3,2,1,0” 육중한 쇠덩어리가 불을 내뿜더니 하늘을 향하여 치솟아 올라가기 시작했습니다. 성공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주 공간 속으로 사라져 올라가는 로켓트의 모습을 올려다 보며 박수를 치면서 환호성을 지르는 과학자들의 눈에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감동적인 장면이었습니다. 저는 그 기록 영화를 보면서 하늘의 하나님과 천사들을 생각하였습니다. 죗된 인간들을 변화시켜서 하늘에 데려기기 위하여 불철주야 애쓰시는 하나님과 천사들의 봉사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에 대한 이해에 치명적인 문제가 생겼습니다. 성경에 있는 지침서를 떠난 엉뚱한 다른 이론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늘로 치솟아야 할 성도들의 마음이 혼돈과 세속으로 인하여 어둠의 세력에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여러 도시들에서 열리는 생애의 빛 세미나를 참석한 그리스도인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성경적으로 구원에 이르는 길이 무엇인지 몰라서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호에서는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류를 위하여 세워 놓으신 구원의 계획이 어떠한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왜 기독교회 안에 이렇게 혼돈된 가르침들이 들어오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유를 파헤쳐 보았습니다. 이번 호를 읽으시는 독자 여러분의 마음에 하나님의 충만하신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3.알곡과 가라지1부-구원과 멸망, 어느 것이 더 쉬울까?
죠 크루스
“다이너마이트” 라는 단어는 헬라어의 “두나미스”에서 유래된 말로서, 그 원어의 의미는 “능력”이다. 그런데 이 “능력”이라는 단어는 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묘사하기 위하여 성경에서 자주 사용하는 수식어 중의 하나이다.
바울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두나미스)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롬 1:16.
여러분은 성경이 그토록 자주 말하는 복음의 폭발적 능력에 대하여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가? 바울의 말이 사실이라면, 복음을 소유한 그리스도인은 놀라운 능력으로 가득차 있어야 하다. 그러나 현실에 있어서 그러한가? 불행히도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이 무기력하고 나약하며 타협적이다. 힘찬 능력 대신에 실망과 패배가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그 사람들이 정말로 복음을 믿고 있는가? 아니면 믿지 않고 있는 것인가? 왜 그들의 생애 속에 그토록 능력(Dynamite, 다이너마이트)이 결핍되어 있는가?
그들은 자신들이 공언하는 바를 진실로 믿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거짓 복음을 받아들임으로서 능력을 잃어버렸음이 틀림없다. 오늘날 기독계 안에 있는 가장 큰 문제는 복음을 잘못 이해하는데에서 기인한다. 슬프게도, 수백만의 사람들이 복음을 통하여 그들이 받는 것이 무엇이며, 그 복음이 그들을 위하여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해서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복음 속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너무도 자주 넘어지게 되며, 자신들의 연약한 믿음으로 해낼 수 있는 것들만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주님의 은혜의 잔치상에 펼쳐져 있는 성찬을 즐기는 대신에, 상밑에 떨어져 있는 부스러기들을 긁어모으고 있는데, 그것으로는 능력있는 그리스도인의 생애를 영위하기 어렵다.
구원과 멸망, 어느 것이 더 쉬운가? 이제부터 이 문제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도록 하자.
1. 누구의 능력이 큰가?
하나님과 그분의 복음 안에 담겨져 있는 놀라운 “능력”(다이너마이트)을 모르는 그리스도인들은 사단이 주는 두려움 때문에 겁장이가 되어 버리고 만다. 오늘날 사단은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놀라운 특권에 대하여 잊어버리도록 그들을 유도하는데 성공하였다. 우리는 그 악한 자의 가면을 벗겨서, 그가 주장하는 거짓을 폭로시킬 필요가 있다. 사단은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마음대로 해할 수 있다는 사상을 교회 안에 주입시키기 위해서 열심히 일하고 있다. 그러나 사단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다스릴 권세가 없으며, 성도들을 해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그리스도께서 거하시는 곳과 그분께서 다스리시는 곳에서는 항상 사단이 꼼짝 못하고 벌벌 떨면서 피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사단의 능력보다 훨씬 크기 때문이다. 이 영광스러운 진리는 그리스도인의 마음을 항상 확신으로 가득차게 만든다.
물론, 사단도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사단이 죄인들의 생활 속에 역사해서, 그들을 자기의 노예로 만들어 버리는 놀라운 영향력을 많이 보아왔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그 죄인 속에서 사단을 다시 쫓아내시고, 영혼을 다스리실 때에는, 선의 능력이 악의 능력을 지배하게 되다. 사단보다 그리스도의 능력이 훨씬 더 크다는 것이 진리이라면, 죄의 세력보다 은혜의 능력이 훨씬 더 크지 않겠는가?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성령의 능력은 우주에 있는 어떤 존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위대한 것이다.
이러한 진리를 근거로해서 생각해 볼 때, 멸망당하는 것보다 구원받는 것이 훨씬 더 쉽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아마도 지금까지 말씀드린 이 사실은, 어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매우 충격적인 것이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은 희생과 자아부정의 힘든 길이라고 생각하다. “그것은 쉬운 길이 아니라네”라는 옛 찬미의 가사는 옳은 일을 행하기 위하여, 내적, 외적 원수와 싸워야 되는 그리스도인의 심정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한 그리스도의 분명한 가르침을 살펴 보아야 하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간과하지 말아야 하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마 11:28~30.
예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것이 쉽다고 선언하셨다. 그분께서는, 그리스도인 생활에 따르는 여러가지 제약이 가져오는 무거운 짐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불행하게 될 것이라는 암시를 전혀 주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 짐이 쉽고 가벼울 것이라는 약속을 주셨다. 예수께서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그분을 핍박하던 사울을 만나셨을 때, 그에게“가시채를 뒷발질 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의 의미는 분명하다. 그분께서는 성령을 거역하는 일이 어려운 일이라는 사실을 말씀하셨던 것이다. 범죄자의 길은 양심의 가책으로 힘겹지만, 순종하는 자의 길에는 마음의 평화와 안전과 확신이 있다.
2. 죄가 왕노릇하는 것처럼, 은혜도 왕노릇을 한다!
우리는, 사단이 자신의 능력을 거짓으로 과장함으로써, 우리를 세뇌하려고 하는 기만을 막아야 한다. 죄의 지배 하에서는 선을 행하기보다 악을 행하기가 쉽지만, 은혜가 다스리는 곳에서는 죄를 범하는 것보다 의를 행하기가 훨씬 더 쉽다는 사실을 이해해야만 한다. 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에게 속한 특권을 주장하지 못하는가? 성경의 저자들은 제한된 사단의 권위에 도전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바울은 기록하기를,“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롬 5:20~21.
“죄가 ... 왕노릇 한 것 같이”라는 표현을 살펴보도록 하자. 어떻게 죄가 왕 노릇을 하는가? 죄가 다스리는 권세가 왕같이 힘이 있다는 의미이다. 모태로부터 가지고 태어나는 육제적 본성은 선을 행하고자 하는 우리의 모든 노력을 무산시킨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은혜가 죄보다“더욱 넘쳤”다는 사실과“죄가 왕 노릇한 것같이 은혜도 왕 노릇”한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분명히 은혜도, 죄의 모든 세력을 능가하는 압도적인 능력(Power) 임에 틀림없다. 이것이야말로 놀라운 보증이다! 마귀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굴복된 생활 속에 역사하는 복음의 폭발적인 능력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힘을 가지고 있다.
예수를 섬기는 것과 사단을 섬기는 것 중에 어떤 것이 더 어려운가? 우리는, 악한 능력보다는 선한 능력에 접근하기를 더 원하지 않는가? 하나님께서 우리 편이신데, 누가 감히 우리를 대적하겠는가? 아마 여러분은 이렇게 대답할지도 모른다. “사단은 항상 우리를 괴롭히는데요”라고. 그러면 나는 그러한 말에 대해서 항상 이렇게 대답한다. “뭐라고요? 사단은 예수의 이름만 들어도 도망하는데요?” 물론 사단은 여러분이 멸망당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도 여러분이 구원받기를 간절히 원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여러분은 더 강한 자(하나님)의 편에 섬으로서 매 순간마다 승리할 수 있다. 예수께서는 당신께서 사단보다 위대한 능력을 소유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표현하셨다. “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되 더 강한 자가 와서 저를 이길 때에는 저의 믿던 무장을 빼앗고 저의 재물을 나누느니라”눅 11:21,22.
여기서 강한 자는 물론 사단이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 왔던 사람(솔로몬)보다 강하며, 가장 강했던 사람(삼손)보다 강하며, 가장 완전했던 사람(아담)보다도 강하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보다는 강하지 못하다. 그리스도께서는“그를 이기시고”그의 손에서 포로된 자를 구해내시는“더 강한자”이시다. 이것은 얼마나 고무적인 사실인가? 우리의 대장이신 예수께 우리를 대적하는 자보다 더 강하시다니!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아래에 사는 그리스도인마다 구원받기가 멸망받기 보다 더 쉽다.
3. 어떤 그리스도인에게 구원은 쉬운 것인가?
왜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 어렵지 않은 일인가? 이 질문의 뜻을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지금 “거듭난 그리스도인”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나 진실한 그리스도인 생애를 사는 것이 쉽다는 것이 아니다. 사실, 인간의 타고난 이기적 본성과 노력으로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자 애쓰는 것처럼 세상에 힘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순종의 길이 즐겁고 기쁘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일 5:3. 요한은 사랑의 대 원칙을 선언하였다.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하는 것,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랑의 관계에서 맺어지는 열매일 경우에는 힘든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시편의 기자도 요한의 말에 동의하였다.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시 40:8.
진실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무거운 짐이 되지 않는 가장 큰 이유 두가지는, 첫째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시며, 자신을 최선의 길로 인도하실 것이라는 절대적인 확신을 가지고 있다. 둘째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최고로 사랑하며 그분을 결코 슬프게 하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한다. 이런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구원받는 것은 멸망당하는 것보다 쉽다!
죠 크루스
예수께서 싸우신 싸움, 그분께서 당하신 고난과 죽음이 과연 어떤 것인지에 대한 진정한 이해를 가지고 있는가?
우리의 영적 눈이 열려서 그분의 희생의 참된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면, 더 이상 사단에게 협력하거나 굴복하는 비참한 일은 없게 될 것이며, 나약한 상태에서 벗어나 용감하고 담대한 그리스도인들로 변화될 것이다.
예수께서는 어떤 종류의 죽음을 당하셨을까? 성경은,“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셨다고 말하고 있다(히 2:9). 잠시 이것을 생각해 보도록 하자. 그분은, 나의 죽음을, 여러분의 죽음을, 그리고 다른 모든 사람들의 죽음을 대신 죽으셨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그렇다면 우리의 삶의 끝날에 우리가 죽음을 경험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인가? 바로 여기에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이루신 일의 신비와 경이가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대신해서 첫번째 사망(일반적인 죽음)을 당하신 것이 아니다. 그분께서는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의 둘째 사망(영원한 멸망)을 대신 경험하셨던 것이다.
첫째 아담이 남긴 결과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바울의 말에서 우리는 몇가지 의문점을 갖게 된다. 한 사람이 죄를 지었는데 왜 모든 사람이 죽어야 하는가? 왜 우리가 다른 사람의 죄 때문에 우리가 형벌을 치루어야 하는가? 아담이 에덴 동산에 있을 때, 그는 세상에 태어나게 될 모든 사람을 대표했다. 인류의 시조로서, 그는 마치 자신이 모든 사람인 것처럼 하나님 앞에 섰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 독자들도 아담 안에 있었다. 아담의 형상을 닮은 자손들이 태어났는데, 그들은 아담의 유전인자와 염색체를 가지고 태어났으며, 아담의 몸과 본성을 이어받았다. 아담의 모든 후손들은 그들이 받은 영향을 자신들의 후손들에게 똑같이 전수하였다. 아담은 우리의 조상이며, 아담 안에는 세대마다 되풀이 되는 유전법칙이 존재하고 있었다.
아담에게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것이 자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말인가?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에 한 시험을 두셨다. 그 시험은 단순하고 직접적인 것이었다. 순종하면 살고 불순종하면 죽는다는 시험이었다. 우리는 동산 중앙에 있던 나무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다. 하나님께서는“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셨다(창 2:17). 아담이 계속해서 그 완전한 에덴 동산의 환경 가운데서 살 수 있는 것은, 그의 순종에 달려 있었다. 아담의 행복한 미래는 금지된 나무의 열매를 따먹지 않는 것을 조건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했다.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할 경우, 형벌을 제하거나 가볍게 하기 위한 어떠한 대책도 없다. 시험은 분명했다. 순종하여 살든지, 불순종하여 죽든지 둘 중의 하나였다. 아담이 불순종하자, 아담의 나이 930세 때에 그 선고는 집행되었고, 그는 결국 죽어서 땅에 묻혔다.
죄의 결과로 인하여 연약해진 육체를 타고나는 아담의 후손들은 아담처럼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죽음은 아담의 죄로 인해서 받게 되는 형벌이 아니다. 아담의 모든 후손들은 유전법칙에 따라 죽을 수 밖에 없는 본성(mortal nature)을 전수받았기 때문에 죽는 것이다. 그들의 죽음은 아담이 후손들에게 물려준 퇴화된 육체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담의 죽음은 자신의 죄에 대한 형벌이었다.
그때부터 죄는 세상에서 움직일 수 없는 요지부동한 존재가 되었고, 모든 인간은 한번은 죽을 수 밖에 없게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개입하지 않으셨다면, 모든 사람들의 죽음은 영원한 죽음으로 끝났을 것이다. 아담의 생명은 그가 범죄했을 때에 이미 끝났다. 첫번째로 주어진 생명은 사단의 시험에 굴복하는 순간에 끝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죽음 즉, 더 이상 희망이 없는 영원한 죽음이 아담을 기다리고 있었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 후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않으셨다면, 아담과 그의 모든 후손들에게는 그것이 영원한 끝이 되었을 것이다.
다시 주어진 두번째 기회
아담이 범죄한 후, 하나님께서는 즉시 여자의 후손(창 3:15, 동정녀 마리아에게 태어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을 통한 구속의 경륜을 발표하시고 그에게 새로운 시험을 주셨다. 이 두번째 기회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형벌을 대신 짊어지시고 돌아가실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것을 조건으로 하고 있다. 이 두번째 배려를 통하여 아담과 그의 모든 후손들에게 새로운 희망이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첫번째 시험에 실패한 결과를 변경하거나 없애버리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이해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변할 수 없는 우주의 법칙이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매우 엄숙한 질문을 던져준다. 어떻게,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첫번째 실패에 대한 형벌인 죽음을 집행하심으로써 당신 자신의 존엄성과 율법의 권위를 유지하실 뿐 아니라, 동시에 또 한번의 기회를 아담과 그의 후손들에게 제공하심으로써 모든 사람들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실 수 있을까? 하나님께서는 매우 놀랍고도 단순한 방법으로 이 어려운 문제에 대처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의롭게 살든지, 또는 악하게 살든지를 불문하고, 제한된 일정한 삶의 기간을 가진 후에 죽을 수 있도록 계획하심으로써, 또 한번의 영생의 기회를 인류에게 허락하셨다.
사람이 자신의 수(나이)를 채우고 죽는 첫번째 죽음은 첫 시험에서 아담이 실패한 결과로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영원한 운명은 두번째 시험에 의해서 결정될 것이며,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조건을 그들이 충족시키느냐 충족시키지 못하느냐에 따라서 결정될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두번째로 주어진 시험에서 실패한다면, 그는 더 이상의 기회를 갖지 못할 것이며, 둘째 사망(최종적인 영원한 죽음)이라는 죄의 값을 치루게 될 것이다. 이제 사도 바울의 말이 더욱 분명하게 이해될 것이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 15:22.
둘째 아담이 시험에 응함
지금까지는 첫째 죽음과 두번째 기회에 대하여 공부했으므로, 이제는 첫째 아담과 둘째 아담의 역할을 살펴보도록 하자. 에덴 동산에서 아담이 전 인류를 대표했던 것처럼, 둘째 아담이신 예수께서도 모든 사람을 대표하신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 5:18,19.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죄를 범한 첫번째 아담에게 일어났던 것은 무엇이나 그가 대표했던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쳤다. 이와 마찬가지로 둘째 아담의 경험도 모든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것이 바울의 말하고자 하는 바이다. 창조주이신 예수께서는 인류의 가족이 되셔서, 마치 그분 안에 모든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 서셨다.
예수께서는 첫 아담이 실패한 것을 만회하기 위해서 오셨기 때문에, 그분께서는 인류와 동일한 육체를 취하셔야 했다.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히 2:17. 죄를 저항하는 면에 있어서, 예수께서 그분의 형제들보다 어떤 유리한 초자연적 능력을 가지셨었다면, 예수께서는 사단으로부터 공정하지 못하다는 비난을 들으셨을 것이다. 사단은 오래 전부터, 하나님께서는 불합리하고 불가능한 순종을 인간에게 요구하신다고 비난해 왔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육체를 취하신 상태에서, 하나님의 요구들을 충족시켜야 하셨다. 또한 그렇게 함으로써만, 사단의 거짓 고소를 반박하실 수 있었는데, 이는 누구든지 하늘 아버지에 대한 믿음과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서, 죄와 유혹을 승리할 수 있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둘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승리로 인하여, 첫째 아담의 가족들이 구원받을 수 있는 문이 열리게 된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놀라운 소식이 아닌가?
둘째 아담이 남긴 결과
첫째 아담은, 육체적인 출생을 통하여, 죄로 인해 연약하고 타락한 육체와 죽음을 후손들에게 물려주었다. 그러나 둘째 아담은, 영적인 출생(거듭남)을 통하여, 당신의 죄없고 순결한 경험인 신의 성품, 승리,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당신의 영적 자녀들에게 물려주셨다. 첫째 아담이 실패함으로써 발생된 모든 결과와 영향들이, 둘째 아담에 의해서 완전히 회복되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영적인 출생 즉, 새로 태어남을 통해서만 예수 그리스도의 가족의 일원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인간의 마음과 영혼 속에서 재 창조가 일어나게 되는데, 바로 이것이 인간을 희망 없고 속절 없는 상태에서 구원에 이르게 해주는 것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자신이 속해 있는 족보가 바뀌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그리스도인의 경험 중의 하나이다. 모든 아담의 가족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새롭게 태어나는 경험을 갖게 되는데, 이로써 믿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족이 되는 것이다. 새로 태어나는 거듭남의 경험은 어떤 어려운 이론이 아니며 신비적인 경험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과 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실제적인 경험이다. 가족들이 서로 닮은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새로 거듭난 그리스도인도 하늘 아버지의 품성을 닮게 된다. 우리가 하늘 가족에 입적될 때, 우리는 새 아버지와 맏형님을 닮기 시작한다.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골 3:10. 태초에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웠다. 창세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되 ... 아담이 일백삼십세에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았다는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창 5:1~3).
아들이 아버지를 닮듯이, 아담은 하나님을 닮았었다. 그러나 죄 때문에 그 닮음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래서 아담의 아들은 하나님을 닮을 수 없었으며, 죄를 범한 아담을 닮게 되었다. 그러나 참된 거듭남을 통하여, 인간은 범죄한 아담의 모습을 잃어버리게 되며, 자기를 새로 지으신 예수를 닮기 시작한다. 이것은 실제적인 닮음일까? 아니면 상징적인 닮음일까? 이것을 단지 상징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실제적으로 죄를 승리할 수 있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한 생애를 살 수 있음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바울은 매우 분명히 말하고 있다.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 5:19. 하늘 아버지의 자녀가 됨과 동시에, 그리스도인은 아버지 하나님과 맏형님 예수 그리스도를 닮게 되는데, 바로 이 새로운 영적 출생으로 인해서 참된 그리스도인은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본성을 극복할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죄인에게 찾아오는 필연적인 형벌인 둘째 죽음(영원한 멸망)으로부터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첫째 시험에서 아담이 실패함으로써 받게 된 형벌인 첫째 죽음을 취소시키지 않으시고 그대로 집행하셨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둘째 시험에서 그분을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둘째 죽음을 폐하여 주셨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대신하여 둘째 사망의 그 무서운 형벌을 대신 당해 주셨기 때문이다.
어떻게 십자가가 용서를 제공해 주는가?
이제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희생을 좀더 자세하게 설명해 주는 하늘 드라마의 또 다른 면을 살펴 보도록 하자. 어떻게 한 사람, 둘째 아담(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죄지은 모든 사람에게 용서를 제공해 줄 수 있는가? 성경은,“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다고 말한다(히 9:22). 여기서 사함이란 물론 용서를 말한다. 문제는, 어떻게 그리스도의 죽음이, 죄의 용서를 가능하게 만들었는가 하는 것이다. 이 질문이야말로 지금까지 우리가 배운 모든 것들의 핵심이다. 죄인을 용서하는 권리를 얻기 위하여, 예수께서는 죄인들이 당하게 되는 둘째 죽음(영원한 형벌의 죽음)을 당하셔야만 했다.
용서는 죄인이 스스로 할 수 없는 것이다. 만일 한 사람이 물건을 훔치다가 붙잡혀서 감옥에서 십년 징역을 살아야 한다는 선고를 받았다면, 그는 자기의 행위로 의롭게 될 수 있을 것이다. 자기가 선고받은 기간만 감옥에서 채우면, 법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선고된 형을 감옥 속에서 마침으로써, 자신의 행위로 죄의 댓가를 지불하였기 때문에, 의롭다는 인정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자신에게 선고된 형벌의 양이 10년이 아니라 사형이라면, 그 죄인이 행위로 자신을 의롭게 만들 수 있는가? 결코 그럴 수 없다! 왜냐하면 비록 그가 100년동안 열심히 일을 한다고 해도 법은 여전히 그에게 죽음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도 없느니라 ... 이와 같이 그리스도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히 9:22~28.
바로 이것이 죄인이 행위로서는 구원받을 수 없는 이유이다. 죄의 값은 10년 징역이나 50년의 강제 노동이 아니다. 율법은 죄인에게 죽음을 정죄하였기 때문에, 피를 흘리는 일이 없이는 결코 법의 요구가 충족될 수 없다. 하나님의 보좌가 뒤엎어 질 수 없는 것처럼, 율법이 선언한 사형선고 역시 취소될 수 없는 것이다. 과거에 지은 죄를 오늘 내가 행하는 선한 행위로 지울 수 없다. 법이 죽음을 요구하는한, 죄인은 자기의 생명을 영원히 잃어버리지 않고서는 그 요구를 만족시킬 수 없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한 대속의 죽음을 십자가에서 치루실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분의 사랑이 우리에게 내려진 죽음의 선고를 대신 받도록 만드셨던 것이다! 율법은 모든 범죄자들에게 자신이 저지른 것에 비례하여 댓가를 치룰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용서는 범죄자가 받아 마땅한 형벌로부터 그를 구해준다. 그러나 용서하는 자는 범죄자가 형벌을 받지 않고 무사히 생명을 유지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자신이 대신하여 죄의 댓가를 치루어야만 한다.
예를 하나만 더 들겠다. 어떤 아버지가 자신의 아들을 죽인 살인자를 용서해주기를 원한다고 가정해 보자. 살인자가 범법자로서 받아야 할 형벌을 받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법이 살인자에게 요구하고 있는 형벌인 사형을 자신이 떠맡아야만 한다. 자신의 아들에게 저지른 범행에 대한 형벌을 대신 받아들임으로써, 그는 법적으로 살인자에게 가해져야 할 형벌을 대신해서 충족시켜야 한다. 이 예증은 우리로 하여금 대속의 뜻이 무엇인지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준다. 죄에 대한 대속에는 항상 양편이 관련된다. 잘못을 당한 쪽과 잘못을 범한 쪽, 즉 잘못을 당한 쪽은 하나님이시고, 죄를 저지른 쪽은 인간이다. 공의는 죄에 대한 합당한 배상을 요구한다. 이 경우에 있어서 방법은 오직 두 가지 밖에 없다. 법과 공의에 의해서 이미 규정된 형벌을 집행하든지, 아니면 피해자 쪽이 자비로운 용서를 베풀어야 한다. 그런데 만약 용서가 베풀어지기 위해서는, 용서하는 자가 상대방이 저지른 죄의 결과를 대신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에, 상대방을 대신하여 법이 정하고 있는 댓가를 치루어야만 한다. 율법이 정하고 있는 죄의 대한 형벌은 죽음이다. 그러므로 법이 죄인에게 요구하는 형벌인 둘째 사망의 고통을 그리스도께서 기꺼이 당신의 몸으로 당하셔야만 했던 것이다.
죄에 대한 형벌은 첫째 죽음이 아니라 영원한 멸망인 둘째 죽음이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 상에서 그리스도께서 받으셨던 깊은 고뇌를, 일반적인 죽음을 당하는 순교자의 고통과 비교할 수 없는 이유이다. 예수께서는 가장 악한 죄인이 유황불 못으로 던져지는 고뇌와 두려움을 느끼는 무서운 정죄를 경험하셨다. 그분의 예민한 본성은 더러운 강간, 살인, 흉악한 죄들을 대신 지심으로써, 심한 충격과 상처와 수치를 받았다. 그분께서는 죄에 대한 형벌이 멸망받을 자에게 내려지는 것과 똑 같은 방법으로 댓가를 치루시기 위해서, 즉 율법의 두려운 진노가 당신 자신 위에 떨어지도록 하기 위해서 죄 자체가 되셨다.
겟세마네 동산에서부터, 예수께서는 인류가 쌓아놓은 죄를 당신의 찢어진 가슴으로 지셨다. 하늘 아버지께로부터 오는 한 줄기의 빛도 십자가 위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께 닿을 수 없었다. 하늘 아버지와의 완전한 분리된 상태에서, 여러분과 나의 죄를 지시면서 고뇌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을 생각해 보라. 죄인들을 위한 용서를 제공해 주시기 위해서, 죄인들의 죄과를 대신 취하시는 주님의 정신적인 고뇌와, 더 이상의 아무런 소망도 없이 영원한 둘째 사망을 당하는 죄인들이 느끼는 고뇌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어야 했다.
하나님께서는 둘 중의 어느 하나를 택하여야만 하였다. 우리를 법의 정죄 아래에 내주시고 당신의 아들을 살리시든지, 아니면 당신의 아들을 법의 정죄 아래로 내어주시고 우리를 살리시든지 둘 중의 하나였다. 그분께서는 그밖의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왜냐하면 하늘의 법이 범하여졌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품성을 반사하는 거룩하고 완전한 율법은 변경되거나 폐지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율법이 폐지되거나 변경할 수 있는 것이라면,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변경시키거나 폐지시킴으로써 인류도 구원하고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도 죽음의 고통에 내주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분께서는, 그렇게 엄청난 댓가를 치르고 제공된 용서와 구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영원한 생명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아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주 적은 소수가 당신을 사랑하며, 당신의 아들의 대속적 죽음을 감사함과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당신의 말씀에 순종하는 거룩한 생애를 살므로서 영생에 이를 것을 아셨다. 바로 이러한 진짜 그리스도인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의 고통으로부터 돌아설 수 밖에 없으셨으며, 당신의 아들이 짓지도 않은 죄의 짐 아래 눌려서 두번째 사망의 고통 가운데서 죽는 것을 허락하셨던 것이다. 태양마저 그 무서운 장면으로부터 자신의 얼굴을 가리워서 칠흙같은 어두움이 십자가를 에워쌌고, 땅도 저항하여 떨었지만, 예수께서는“다 이루었다”라고 크게 외치시며 당신의 생명을 내어 주셨다(요 19:3).
Once saved, Always saved? Part I
구원받은 이후에는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없어지나요?
“나는 작년 12월 21에 구원받았습니다”라고 확신있게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그들은 자신이 구원받은 날짜와 시간까지 정확하게 말하면서, 자신은 이제 더 이상 멸망당할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능력과 사랑의 하나님께서 자신의 구원을 영원히 불변하는 것으로 보장해 주셨다고 말한다. 정말 그런가? 정말, 한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 것인가?
생각하고 판단하여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놀라운 선물이다. 그러나 사람이 선택할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아무도 타락하고 이기적인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기 싫다고 해서, 자신이 원하는 본성을 선택하여 태어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사람이면 누구나 싫든 좋든 간에 이기적이고 죗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날 수 밖에 없다. 우리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출생에 관한 결정은, 이미 오래 전에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우리가 태어나면서부터 갖게 되는 죄의 본성에 대해서는 아무런 선택의 여지가 없다. 우리 모두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의 본성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능력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이 변화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영원한 죽음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비록 우리가 영생을 잃어버릴 수 밖에 없는 타락한 본성을 가진 사람으로 태어나긴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새로운 마음을 받을 수 있는 선택권을 주셨다. 이것은 그 어느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 없는 당당한 권리이다. 이 선택이야말로,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 하게 되는 가장 중요한 결정이다. 이 선택은, 죄의 본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가 영원히 죽을 것인가, 아니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새로운 마음을 받아서 영원히 살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우리 모두에게 제공된 이 선택에 대해서 어떤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그들에게 하셨다고 생각하는듯 하다; “너희들의 불행한 운명을 바꿀 수 있는 한가지 결정권을 줄께! 일단 네가 한번 구원받기로 선택하기만 하면, 너는 결코 다시는 멸망 당할 수 없단다. 너는 그 결정을 바꿀 수 없어. 네가 그리스도를 너희 구주로 받아들이게 될 때, 그것은 너의 영원한 운명에 대하여 네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선택이다. 나중에 네가 생각을 바꾸어서 너의 결정을 포기하거나 바꾼다고 할지라도, 때는 이미 늦었단다. 아무리 네가 멸망당하기를 원하고, 심지어 네가 과거에 하였던 회개를 후회한다고 할지라도, 너는 결코 영생을 피할 수는 없단다. 네가 아무리 큰 반역을 일으키고 의도적으로 신성을 모독하고 악한 생애를 산다고 할지라도 구원 받기로 한 너의 결정은 바뀔 수 없지. 나는 네가 예수를 너의 구세주로 받아들인 후에는 더 이상의 어떤 선택도 하도록 허락할 수 없단다.” 기본적으로, 이것이 구원에 대한 영원한 보장 즉, “한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 (Once saved, Always saved)라는 교리를 주장하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의 생각이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도는 이와 상반되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언제든지 우리가 한번 했던 선택과 결정을 자의로 바꿀 수 있도록 문을 열어 놓고 계신다는 것이다. 이 가르침을 믿는 사람들은, 구원은 과거에 이루어진 단 한번의 선택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지속적이고 개인적인 관계에 의해서 받게 된다고 믿는다. 고의적인 불순종과 의도적인 반역 정신에 의해서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가 깨어질 때, 신자는 더 이상 참 신자가 아니며 구원에 대한 어떤 보장도 가질 수 없게 된다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진리이다.
수백만명의 구원이 달려 있는 가르침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Once Saved, Always Saved”(예수를 믿음으로서 일단 한번 구원받으면, 품성과 믿음의 영적 성장에 상관없이,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에 상관없이 무조건 구원받게 된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표현)라는 구원론을 받아들이고 있다. 구원의 문제가 이처럼 매혹적으로 제시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것에 기만당하고 있다. 만약 신자들의 구원이 단 한번의 믿음으로 무조건적으로 보장된다고 가르친다면, 그것은 신자들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는 교리가 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면,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오류가 될 것이다. 이 잘못된 가르침의 위험성을 올바로 파악하느냐 하지 못하느냐에 따라서 수백만의 영혼이 구원받을 수도 있으며, 잃어버린 바 될 수도 있다. 이 가르침이 사람들의 운명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예를 하나 들어 보겠다. 언젠가 전도 집회 때였다. 백여명의 사람들이 참석했었는데, 그들은 이 구원에 대한 영원한 보장의 교리에 젖어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 집회에서 나는 청중들에게 매우 중요한 진리를 가르쳤다. 그들은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성서적 진리를 듣게 되자 매우 놀랐다. 그들 대부분은 진리를 분명하게 깨달았으며, 이해하였다. 그러나 그 백여명의 사람들 중에서 단지 몇명만이 그 진리를 따르기로 결심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이 진리를 따르려면 불편과 경제적 어려움, 심지어는 직장을 잃는 것까지도 감수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 때에 진리를 거절했던 사람들은 자신들이 그 진리를 거절하는 이유에 대해서 한결같이 똑같은 말을 하였다; “우리는 이미 구원받았으므로 멸망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그 진리를 지키려고 애씀으로써 어려움을 자초해야 합니까? 우리가 그 진리를 순종한다고 해서 지금보다 더 나은 구원을 받지는 못할 것이며, 그 진리를 거절한다고 해서 멸망당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한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는 가르침이 가지고 있는 치명적인 해이다.
그들의 구원관에 있어서, 구원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나 영적인 성장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구원은 전적으로 과거에 그들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던 단 한번의 선택에 달려 있었다. 인생의 과정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에 의하여 새롭게 주어지는 진리의 빛에 순종하느냐 또는 불순종하느냐 하는 것은, 그들의 운명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고 믿고 있었다. 그들은 한두가지 계명 아니 계명 전부를 범할지라도, 자신들은 여전히 구원받았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다고 믿었다. 그 사람들에게 있어서, 불순종은 주님과의 관계에서 얻어지는 마음의 기쁨이나 평화에 어떤 악영향을 미칠 수는 있어도, 최종적인 구원에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고 믿고 있었다.
오늘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의 영원한 운명이 바로 그 교리의 진위에 달려 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에 대해서 스스로 답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우리가 믿고 있는 신앙과 믿음을 바꾸거나 버릴 수 있는가? 우리가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기로 결정할 때, 우리는 더 이상의 선택권을 포기하는 것인가? 구원은 한 순간의 결정으로 완성되는 것인가? 아니면 그러한 결정 후에도,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 안에서 계속 성장해야 하는가? 하나님께서는 더러운 죄들을 가지고 당신의 왕국 안으로 들어가도록 허락하실까?” 다행스럽게도,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분명한 대답들이 성경에는 많이 있다. 이제부터 그러한 성경 말씀들을 함께 살펴보면서, 아울러“일단 한번 구원 받으면 그것이 끝”이라는 교리를 뒷바침해 주는 것으로 생각되는 몇몇 성경 구절들도 찾아 보도록 하자.
죄를 가지고 하늘에 들어갈 수 있나요?
새 예루살렘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요한은,“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 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한다고 말했다(계 21:27). 예수께서는“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이요”라고 말씀하셨다(마 5:8). 죄는 하나님께서 가증하게 여기시는 유일한 것이다. 의도적으로 죄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바울은 기록하기를,“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숭배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 ... 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전 6:9,10.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아시나요?
성경 어느 곳에서도, 과거에 가졌던 한 순간의 믿음의 경험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문이 된다는 말씀을 찾아볼 수 없다. 구원은 영원한 생명의 공급자이신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에 의한 영적 성장으로 얻어지는 것이다. 구원을 받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끊임없는 접촉과 관계가 지속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은 인간이 나누어 가질 수 있는 것이지만, 그리스도와의 살아있는 연합을 떠나서는 절대 불가능하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 5:12.
우주를 보존하고 원자들을 함께 묶어주기 위해서, 하나님의 계속적인 창조의 에너지가 요구되는 것처럼, 영혼의 영적 생명을 유지시키기 위해서도 하나님의 능력이 끊임없이 요구된다. 그러나 사람이 의도적으로 하나님과 분리되기로 선택하면, 그 연결 관계는 끊어지며 신령한 생명은 사람에게로 흘러들어가지 못하게 된다. 하나님께서도 사람의 그러한 선택을 막으실 수 없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스스로 끊고 멸망당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좀더 잘 이해하기를 원한다면, 요한복음 15장 1~6절을 보아야 한다. 예수께서는 거기서 영생의 최대 신비를 설명하고 계신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요 15:5,6.
계속해서 살아 있으려면, 계속적인 생명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유의해야 한다.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살지 아니하면, 그는 시들어 죽고 결국에는 지옥불에 살라지게 된다. 이 사실은 그리스도와의 구원의 관계가 결코 과거에 이루어진 단 한번의 결정에 기초된 것이 아님을 말해 준다. 그리스도와의 관계란,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골 3:4)께로부터 나오는 생명을 신자가 나누어 받는 것을 말한다. 가지가 포도나무로부터 분리될 때, 생명의 근원이 분리되고 그 결과는 죽음뿐이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이 말씀은 너무나 분명해서 누구나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산 포도나무와 연결된 신실하고 믿음있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할지라도 자신이 원하기만 하면, 포도나무로부터 분리될 수 있다. 그 순간부터, 그들은 죽게 되며 불에 던지워져서 살라지는 운명에 처하게 된다. 이전에는 살아 있었던 것이, 지금은 시들어서 죽어가는 것이다. 영생에 대한 보장은 오직 그들의 믿음이 그리스도께 고정되고, 그들의 마음이“생명이신”그분과 연결된 사람들에게만 영원한 것이 될 수 있다.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아시나요?
예수께서는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리게 되는 상황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가시덤불과 돌짝 밭에 떨어진 씨앗에 대해서 설명하시면서, “길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와서 그들로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 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깐 믿다가 시험을 받을 때에 배배반하는 자”라고 말씀하셨다(눅 8:12~13).
이 비유에서 우리가 유의해야 될 몇가지가 있다. 첫째로, 오직 한 부류의 사람들만이 최종적으로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풍성한 열매를 맺는 사람들만이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 길가와 바위에 떨어진 씨로 비유된 사람들은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 얼마 동안만 신실하였던 사람들은 얼마 동안만 구원받은 상태로 있다가 유혹의 때에 떨어져 나갔다. 물론 결국 그들은 잃어버린바 되었다. 이 비유의 말씀은, 사람들이 얼마 동안 구원하는 믿음을 소유하고 있다가 후에 믿음을 잃으면, 멸망받게 된다는 주님의 분명한 가르침이다.
신실하였던 청지기가 멸망당한 이야기를 아시나요?
복음서를 주의 깊게 읽어보면, “한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라는 가르침을 부인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여러군데에서 찾아볼 수 있다. 누가복음 12장 42~46절에서, 예수께서는 충성스러운 종이 불충성한 종으로 변해가는 과정에 관한 또 하나의 비유를 말씀하셨다. “지혜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를 나눠줄 자가 누구냐”라고 물으신 후에, 그리스도께서는 그 종이 어떻게 자신의 상급을 잃을 수 있는지에 대하여 설명하셨다. “만일 그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오리라 하여 노비를 때리며 먹고 마시고 취하게 되면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이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신실치 아니한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니”
지혜있고 진실한 종이 불신자들과 함께 형벌을 받게 되는 경우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예를 들어서 설명하여 주셨다. 이 성경절은, 예수께서 무거운 책임을 맡기기에 충분할 정도로 신실하게 보이는 사람들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틀림없이, 여기서 나오는 종은 진실된 신자로서 주님을 열심히 섬기는 사람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충성되던 바로 그 종이 충성된 길에서 떠나 영원한 파멸과 죽음을 당했다. 또한 이 비유는 히브리서 10장 38절의 말씀을 상기시켜 주고 있다.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진실한 자라 할지라도 뒷걸음질하여 진리의 길에서 돌아서면 멸망당할 수 있다. 믿음이 그리스도께 계속해서 고정되어 있는 자들만이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될 것이다.
용서에도 조건이 있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그리스도의 비유를 또 하나 읽어보면, 신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는 조건적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예화는 마태복음 18장 21~35절에 나오는 왕과 빚진 종에 대한 이야기이다; 어떤 왕이 자기 종의 간청에 응하여 엄청난 액수의 빚을 탕감해 주었다. 그런데 하루는 그 탕감받은 종이 자기에게 약간의 빛을 진 동료 종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가 자신에게 빚을 당장 갚을 수 없다고 해서, 무자비하게 그를 감옥에 집어 넣었다. 이 사실을 왕이 듣고 나서 분노하여, 왕이 전에 그 종에게 탕감해 주었던 많은 빚을 취소하고, 그 종이 빚을 다 갚을 때까지 옥에 가두어 놓았다. 이 예화의 끝에는 하나님의 용서에도 조건이 있다는 사실이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렇게 하시리라” 마 18:35
아무도 이 비유의 분명한 의미를 부인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용서를 구하는 모든 사람들을 용서해 주시지만, 그 용서가 조건없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대함으로써, 이미 받은 용서를 잃어버릴 수 있다. 이것은 에스겔 33장 13절의 말씀과 일치하는 말씀이다. “가령 내가 의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살리라 하였다 하자 그가 그 의를 스스로 믿고 죄악을 행하면 그 모든 의로운 행위가 하나도 기억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지은 죄악 중 곧 그 중에서 죽으리라.” 이 원칙은 18절에서 다시 되풀이되고 있다. “만일 의인이 돌이켜 그 의에서 떠나 죄악을 지으면, 그가 그 가운데서 죽을 것이”라.
영원한 구원의 비결은 구원의 근원되시는 그리스도와 올바른 관계를 계속해서 유지하는데 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셨던 것이다(마 24:13). 시험과 유혹을 받을 때,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여서 그것을 물리치지 않는 사람들은 결국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 끝까지 견디지 못하는 자들은 그들의 이름이 생명책에서 제거될 것이다.
요한계시록 3장 5절은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이 죄에 대해서 승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다. “이기는 자는 ...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 리라. 이 말씀에 함축되어 있는 의미는 명확하다. 즉, 이기지 못하는 자 - 끝까지 견디지 못하는 자 - 는 그들의 이름이 생명책에서 지워진다는 뜻이다. 앞에서 언급한 이 모든 구절들은 일관성 있게 동일한 진리를 선포하고 있다. 고의적으로 범하는 죄는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구원의 관계를 단절시킨다. 영생에 대한 보장에는 항상 조건이 따른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만일 ...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7.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아들의 안과 아버지의 안에 거하리라”요일 2:24.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히 10:38.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요 15:6.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요 8:51).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도 찍히는 바 되리라”롬 11:22.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치 아니하리라”벧후 1:10.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히 3:14. “참으면 또한 함께 왕노릇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딤후 2:12.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 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히 10:26.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요일 2:15).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 15:14.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롬 8:13.
선택 받을 자들
두려움과 떨림으로 자신의 구원을 이루는 영혼마다 선택된다.
자기 자신과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 영혼마다 선택된다.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에 순종하는 영혼마다 선택된다.
가면과 위선을 버리고 떨리는 손으로 천국문을 잡는 영혼마다 선택된다.
진리가 마음과 양심을 찌를 때에 인간적인 고집과 편견을 버리는 영혼마다 선택된다.
양심 속에 들리는 가장 작고 세미한 그리스도의 음성일지라도,
가장 크고 엄숙한 명령으로 받아들이는 영혼마다 선택된다.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빌 2:12
Once saved, Always saved? Part II
죠 크루스
버림 받을 수 있는 위험을 아시나요?
사도 바울은 육체적 죄의 성향을 재갈먹이지 않는다면, 결국 버림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잘 깨닫고 있었다.
“내가 내 몸을 쳐서 복종케함은 내가 남에게 복음을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바울은 자신의 생애가 다시 죄에 사로잡히도록 허용한다면 멸망당할 수 밖에 없음을 생각한 것이다. 디모데전서 5장12절에는 그리스도인이 되었지만 나중에 믿음을 버리면 심판을 받는다는 직접적인 말씀이 나온다. “처음 믿음을 저버렸으므로 심판을 받느니라” 신자가“처음 믿음을 저버리고” 마지막 때에 심판을 당하게 될 수 있음이 얼마나 분명한가?
부모가 어떻게 자녀를 버릴 수 있나요?
“한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는 가르침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비유로 들면서 자신들의 주장을 입증하려고 애쓴다. “자녀는 가족의 일원으로 태어났으므로, 그들은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항상 자녀이다. 그들은 이미 태어난 존재이다.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는 어떠한 경우에 있어서도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자녀가 순종하든지 불순종하든지를 불문하고, 자식은 항상 부모의 자식인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매우 그럴듯하게 들린다. 그러나 한가지 중대한 문제를 간과하고 있는데, 그 문제는 부모의 말에 불순종하여 부모의 돌봄을 떠난 자녀는 병들어서 죽을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예수님께서는,“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고 하셨던 것이다(요 6: 53). 또한 63절에서는“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만일 그리스도인이 한번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할지라도,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지 않으면 그분께로 나오는 영적 생명을 계속해서 받을 수 없으며, 그 결과 그는 스스로 영적 죽음을 당하게 된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롬 8:14.
자 이제, 구원을 위해서는 계속적인 순종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이해했는가? 바울은,“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 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라고 말했다(롬 6:16). 사람이 그리스도를 순종않기로 선택할 때에 그는 사단에게 순종하기로 선택하는 것이 되며, 더 이상 그리스도께 속한 자녀가 아니라 사단에게 속한 사단의 종이 된다. “의를 행하는 자는 ... 의롭고,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요일 3:7,8.
한번 믿었다가 믿음을 떠나갈 수 있나요?
히브리서 저자는 믿음에서 떠나는 일에 대하여 특별한 경고를 거듭해서 하고 있다. 히브리서 10장 23절은, 일단 한번 구원 받으면 그 구원이 계속되며, 아무도 그 구원을 번복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입장을 곤란하게 만든다.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을 것에 대해서 경고하고 있다. 그 후에, 신자들 중에서 뒤로 물러가도록 유혹 받을 수 있는 사람들에 대한 권면이 나온다.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 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히 10:26~29). 여기에 묘사된 사람들은 진리에 대한 이해와 지식을 가지고 있지만, 고의적으로 배도에 빠진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다.
히브리서 10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는 믿음을 저버리는 일에 대하여 경고한다.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히 10:35~39. 사람의 영원한 구원은 그가 끝까지 믿음에 확고히 남아있을 때에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이보다 더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가? 사람이 자신의 확신을 버리고 멸망에 빠질 가능성이 전혀 없다면, 하나님의 위대한 사도 바울은 왜 이토록 분명한 경고를 남겼겠는가?
한번 믿었다가 떠나가는 자들에게 주는 경고
히브리서 6장 4~6절에서, 우리는 또 다른 두려운 말씀을 볼 수 있다.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중생을 경험했으나 후에 하나님을 거역하고 그리스도를 부인하며 성령을 버린 자들에 대해서 이보다 더 잘 묘사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 성경절이 경고하고 있는 사람은 자신의 행동과 결정에 의해서, 하나님의 영향력 밖에 자기 자신을 두는 사람을 말한다. 그러므로 그러한 사람은, 자신의 불순종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계속해서 십자가에 못박는 한, 구원받을 수 없다.
영생에 대한 보장은 조건적이다. 베드로후서 1장에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생애에 나타나야 할 여러가지 미덕들을 나열하고 있다.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을 자들에게 편지하”면서(1절), 다음과 같은 경고를 주고 있다. “이런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라 원시치 못하고 그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었느니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니라”9~10절.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이 은혜로부터 떨어져 나갈 수 있음을 지적해 준다. 사람들은 예수를 따르는 일에서 돌아설 수 있다. 그들은 심지어 배도자가 될 수도 있다. 다시 3장에서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14절.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 굳센데서 떨어질까 삼가라”17절.
사람이 자신은 구원받았다고 공공연히 말한 후에라도 스스로 그리스도로부터 떠나 멸망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성경의 가장 중요한 구절은 베드로후서 2장 20~22절이다. “만일 저희가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게 되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심하리니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저희에게 나으리니 참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었다 하는 말이 저희에게 응하였도다.” 이 말씀이 주는 교훈은 너무도 명백하다.
그러나 “한번 구원받으면, 그 구원은 어떤 경우에도 잃어버림바 될 수 없다”고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개나 돼지로 비유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말씀이 주는 교훈은 너무도 명백하다. 그들은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통하여 세상의 더러움에서 벗어났었다. 그들은 회개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편에 가담했었다. 그들은 그들의 생애를 주님께 의탁했었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과 죄의 “구덩이”를 다시 생각했다. 애굽에서 나왔던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그들은“고기 가마”와“부추와 파”를 그리워 했다. 그들은 죄의 즐거움을 생각하게 되었고, 마치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로 가서 도로 눕듯이, 그리스도를 떠나서 다시 세상으로 돌아갔다. 이와 같은 베드로의 교훈은, 그것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생길 수 있는 가능한 일임을 보여 준다.
말세의 징조 중 하나
성경은 말세의 징조 중의 하나로, 한번 그리스도를 받아들여서 구원받았던 그리스도인들이 잘못된 가르침에 빠져서 멸망당하게 될 것을 경고하고 있다.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쫓으리라.”딤전 4:1. 말세인 지금, 어떤 사람들은 “미혹케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쫓”아 믿음을 떠나가고 있다. 그들은 함께 교회에 출석하며, 함께 예배드리고, 함께 기도회에 참석하였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열성적으로 복음을 전하며 교회 사업에 헌금을 드리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교회의 목사들이었으며, 제직들이었고, 지도자적 위치에 있어온 평신도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믿음에서 떠나가게 될 것이라고 성경은 경고하고 있다. 그들은 견고하지 못하며 충성되지 못하였다. 이제 마지막 환란의 때에 핍박과 말할 수 없는 어려움들이 올 것인데, 어떤 이들은 굳세게 서있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세상의 사물들에 유혹되고 악한 영에 미혹될 것이다. 슬프게도 그들은 구세주를 향한 충성심을 버릴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사랑한다고 공언하지만,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진리에는 등을 돌릴 것이다. 그들도 전에는 그리스도의 편에 섰었다. 그러나 세상의 유혹과 시련이 왔을 때, 그들은 그리스도의 원수의 편에 가담할 것이다.
유일한 방법
만일 여러분들이“영생의 무조건적 보장”을 진정으로 원하신다면, 그것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매일 매 순간을 그리스도 안에 있음으로써 가능하다. 그리스도를 선택하고, 그분 곁에 머물라. 그리하면 승리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실패가 있을 수 없다. 그분께서는 실패하지 않으신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버리라. 너를 붙드시리라” 시편 55:22. 여러분들이 그분 곁에 서 있는 한, 그분께서는 언제나 여러분 곁에 서 계실 것이다. 여러분이 그분의 손을 놓지 않는 한, 그분께서는 결코 먼저 여러분의 손을 놓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많은 사람들도, 자신들이 어떤 보증을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하늘에 들어가게 해주실 것을 믿는다고 말한다. 그들은,“나는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보다 착하다. 나는 구세주를 믿지 않고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실은 어떤 사람도 자신들의 생각에 기초하여 구원 받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가 착하고 성실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착함과 성실이 그를 구원해 주지 못할 것이다. 그는 정직하고 진실되며 도덕적이고 훌륭한 시민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미덕들이 그를 구원하지는 못한다. 그는 자유를 존중하며 교회를 돕고 불쌍한 자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사람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아름다운 공로들도 그를 구원하지는 못한다. 어떤 사람도 자신의 선한 행위에 의해서 구원받지 못한다.
여러분의 헌물, 여러분의 선행이 구세주가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구세주이시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 그분께서 우리 모두에게 값없는 선물로서 구원을 주셨다. 여러분이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은,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다(요일 5:12). 그러나 아들을 가지지 못하면, 여러분에게는 생명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인 그리스도를 소유하고 지킬 때에야 비로서 여러분들은 영원한 보증을 가질 수 있게 된다.
“처음 사랑”을 버린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는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사랑을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요한계시록 2:4~5).
그리스도인이“처음 사랑”을 버린다는 것은 뒷걸음질 치는것, 떨어져 나가는것, 주님과 그의 봉사를 떠나서 죄와 사단과 세상을 섬기러 가는 것을 뜻한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회개하여“처음 사랑”을 회복하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하신다고 했는가?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이것은 주님께로부터 오는 최후의 통첩이다. 만약 죄인이 이에 응하여 회개하고 처음 사랑으로 돌아가서 그의 처음 행위들을 회복한다면, 그는 구원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그의 선택에 달려 있다. 만약 그가 이렇게 하지 않으면, 그가 받은 빛은 제거되어 없어지며, 뒷걸음질쳐서 결국 멸망하게 될 것이다.
뒷걸음질친 자가 항상 죽기 전에 주님께로 돌아오는가?
이스라엘의 첫번째 왕이었던 사울에 대한 이야기는 그것을 잘 말해준다. 사울에 대하여 성경은, “그가 새 사람이 되”었다고 기록했다. “네게 여호와의 신이 크게 임하리니 그도 그들과 함께 예언을 하고 변하여 새사람이 되리라” 삼상 10:6. 그러나 사울은 그의 높이 들린 위치에서 뒷걸음질 쳐서 하나님을 거역하고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삼상 31:1~6 참고). 사울 왕은 새 사람이 되었으나, 뒤로 물러나서 죄악 속에 빠지게 되었고, 끝까지 하나님께 반역하며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다가 결국에는 아무런 회개도 하지 못한채 죽었다.
어떤 사람도 구원을 빼앗길 필요가 없다!
마지막으로 “한번 구원받았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는 교리를 가장 잘 지지해 주는 것처럼 인용되고 있는 성경 구절을 한번 살펴 보도록 하자.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 10:28~29.
하나님을 신뢰하고 따르는 모든 자녀들에게 이 얼마나 놀라운 약속인가? 언뜻보기에 이것은 영적으로 잃어버릴 가능성이 전혀없는 불변의 보증처럼 보인다. 그러나 문맥 전체를 자세히 읽어 보라. 이 성경 말씀의 바로 앞에 나와 있는 27절을 읽지 않는다면, 이 말씀을 기록한 요한의 의도를 심각하게 왜곡하게 된다. 27절에는 28절과 29절의 약속을 성취시키기 위한 선제 조건이 제시되어 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손길 안에서 거하는 자들은, 오직 그분을 진실하게 따르는 자들임을 잊지 말기 바란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음성을 듣고 당신을 따르는 충성스러운 양들에게만 영생을 주신다. 사단과 그의 부하들에 의해서 흔들려서 나가지 않고 영원히 그분 안에 거할 수 있는 방법은, 그분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것이다. 하나님의 보호는 양우리 안에 있는 양을 훔쳐가려고 기회를 노리고 있는 원수들로부터의 보호를 말하는 것이지, 양우리의 주인되시는 그리스도를 더 이상 따르지 않기로 결정하고 양우리 밖으로 나간 불순종한 양들을 위한 보호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아무도 그들을 하늘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는 없지만, 그들은 언제라도 스스로 아버지의 보호 밖으로 뛰어나갈 수는 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의 선택의 자유를 빼앗지 않으신다. 죄인이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구원을 받아들이기로 선택할 수 있듯이, 그리스도인도 멸망 받기로 선택할 수 있다.
만약 배도가 불가능한 것이라면, 배도에 대해서 경고하고 있는 성경의 수없이 많은 구절들이 얼마나 무용한 것인가를 생각해 보라. 만일 사람이 멸망당할 수 없다면, 왜 바울이나 베드로 혹은 그밖의 사도들이 영원한 멸망에 대해서 그토록 심한 경고와 권면을 남겼는가? 만약 한번 구원받으면 그것이 영원히 보장된다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진리라고 가정한다면, 마귀는 한번 믿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을 멸망시키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이 쓸데없고 불가능한 일임을 잘 알기 때문에 신자들을 유혹하기 위해서 시간을 낭비하는 일을 결코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사단이 성도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따르지 못하게 하고자 더욱 열심히 일하고 있음을 알고 있지 않은가?
이제 우리는, 구원이 과거나 현재에 한 단 한번의 취소할 수 없는 공약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릴 때가 되었다.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입혀주시는 의와 나누어 주시는 의를 계속해서 받아들이는 그리스도의 삶을 사는 경험이다. 그것은 영원한 생명의 원천되시는 그리스도와의 계속적이고도 역동적인 관계가 없이는 결코 현실화 될 수 없다. 구원받는 문제를 성서적으로 온전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원을 과거, 현재, 미래의 세 시제 안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구원은 과거에 일어났고, 현재 일어나고 있으며, 미래에도 계속되어야 한다. 이 말에 대한 설명을 위해서, 다음과 같은 예화가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과거, 현재, 미래의 구원
한번은 어떤 사람이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고기를 잡고 있었다. 그런데 갑작스런 풍랑에 배가 뒤집혀 물속으로 가라 앉게 되었다. 그는 수영을 잘하지 못했다. 바로 그때, 다른 고기잡이 배가 다가왔다. 그러나 그 배는 많은 화물을 실고 있어서 더 이상의 또 다른 승객을 태운다는 것은 불가능 했다. 그러나 그들은 불쌍한 이 사람을 구조해 주고 싶었기 때문에 그에게 로우프를 던졌다. “여기 이 로우프를 잡으시오. 우리가 당신을 해안까지 끌어다 주겠다” 라고 그들은 말했다. 조난당한 사람은 그 로우프를 잡자마자,“하나님, 정말 감사합니다. 저는 구조되었습니다”라고 말했다. 맞다! 그가 로우프를 붙잡고 있는 한, 그는 구조받은 상태에 있는 것이다. 구원은 바로 그런 것이다. 그러나 그 구원 속에서 그가 해야 할 몫이 있다. 그가 언제든지 로우프를 쥐고 있던 손을 놓고 다시 잡기를 거절한다면, 그는 구조되지 못할 것이다. 죄로부터 구원함을 받은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그가 그리스도의 손을 잡고 있는 한, 그는 구원된 상태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가 그리스도의 손을 놓기로 결정하고, 그 대신에 마귀의 손을 잡는다면 그는 멸망당할 수 밖에 없다. 그의 구원은 그가 결정하는 선택에 달려 있다.
실제로 우리는 구원을 세 시제로 나누어서 말할 수 있다. 즉, 과거, 현재, 미래. 그가 로우프를 잡았을 때,“나는 구원 받았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가 배에 매달려서 끌려오고 있을 때,“나는 구원 받고 있다”라고 말할 수 있으며, 그가 해안에 발을 들여 놓으려고 할 때,“나는 구원받은 자가 될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회개한 사람은 죄의 형벌로부터 구원받았다. 신학적으로, 우리는 이것을 칭의라고 말한다. 또한 그가 현재 죄의 세력으로부터 구원받고 있다면, 이것을 성화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그는 죄의 존재인 사단으로부터 구원받을 것이다. 그것을 영화라고 말한다.
성경은 구원에 대하여 설명하면서 이 세가지 시제를 모두 사용하고 있다(영어 성경에는 보다 분명하게 세가지의 시제가 나와 있음). 로마서 8장 24절에“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라는 표현이 있다(과거: we were saved). 고린도전서 1장 18절에는“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이라고 되어 있고(현재: we are being saved), 사도행전 15장 11절에는“우리가 ...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을 믿노라”라고 기록되어 있다(미래: we shall be saved). 이렇게 하여, 성경은 구원에 대하여 설명하면서 세가지 시제 즉,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사용하고 있다.
이 문제를 좀더 상세하게 살펴 보도록 하자. 구조받기 위하여, 그가 로우프를 꽉 붙잡아야만 했던 사실이, 우리가 우리 자신의 행위로 구원을 획득할 수 있다는 뜻인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그는 로우프를 스스로 만들지도 못하며, 다만 배에서 던진 로우프를 붙잡고 있었을 뿐이다. 그 자신이 아닌 다른 힘에 의해서 그가 끌려갔던 사실을 기억하라. 그는 단지 그 끌어당기는 힘에 협력했을 뿐이다. 그는 로우프를 잡고 있었을 뿐이다. 그가 안전하게 끌려오기 위해서는 그렇게 해야만 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도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고백해야 하고, 그분께 계속해서 붙어있어야만 한다. 그분께 확고부동하게 붙어 있음으로써 순종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그것이 그리스도를 붙잡는데 있어서, 우리가 해야 할 몫 이다. 그분은 결코 우리를 내쫓지 않으신다. 그 분께로부터 우리 자신을 분리시킬 수 있는 오직 한가지 방법은, 우리 자신을 그분께로부터 스스로 끊어 버리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그렇게 할 수 있는 선택권이 주어져 있다. 우리는 지성을 사용해서 취사선택할 수 있는 도덕적인 존재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해서, 우리의 의지와 판단력이 제거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생활하는 동안에도, 우리는 언제든지 돌아서기로 결심하고, 하나님과 하늘의 사물들 대신에 세상의 사물들을 선택할 수 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세주로 믿는 믿음을 통하여서만 구원받는다.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게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행위로써 우리의 믿음을 증거하게 된다. 순종은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그분께 대한 우리의 사랑의 표현이다.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고 옳은 일을 행하는 것은, 단지 우리의 마음 속에 성령께서 거하시는 결과이다. 바로 이러한 결과들이 성령의 열매이다. 우리는 구원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받았기 때문에 그런 일들을 행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마음을 다해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그분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께 순종하고자 하는 열망이 끊임없이 샘솟는 것이다. 우리는 결코 로우프를 놓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신 그리스도께 계속하여 굳게 붙어있어야 한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야고보서 3장 17절.
죠 크루스
그리스도인이 거듭난다고 할지라도 타락한 육체의 본성은 사라지거나 제거되지 않는데, 어떻게 승리의 삶을 살 수 있는가?
성경은 그리스도인이 참된 거듭남을 경험할 때에 육체의 죗된 본성이 사라지거나 제거된다고 말하는 대신에, “죽는다”고 표현하고 있다. 죄의 본성이 죽는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이 중요한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인과 독수리 같은 본성 사이에서 벌어지는 대쟁투를 이해해야만 한다. 이 전쟁은 상대방을 죽이지 않으면, 오히려 자신이 죽임을 당하게 되는 매우 치열한 전쟁인데, 바울은 이 전쟁에서 독수리를 죽이고 승리하는 방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로마서 6:6. “옛 사람”은 죗된 본성을 말하는데, 여기서 우리는 그것을 독수리라고 표현하기로 하겠다. 옛 사람(죗된 본성) 즉, 독수리를 죽이기 위해서는 그것을 품고 있는 내 자신이 십자가에 못박혀서 죽는 경험을 해야만 한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죽는 것이 필요합니까?” 또는 “꼭 죽어야 합니까?” 라는 질문을 던지며 죽기를 거절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이 죽기보다는 자기 안에 있는 선한 어떤 것을 계발시킴으로써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악하고 이기적인 존재이므로,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할지라도 악을 행하며 살아가는 것이 당연하다” 라는 결론을 내리면서, 좀더 나은 방향으로 향상시켜 나가기 위해서 애쓰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자아의 죽음과 선의 계발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는 창조와 진화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와 같다. 사도 바울은 자아의 죽음을 통하여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재창조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만, 어떤 사람들은 자신 안에 있는 어떤 것을 선한 것으로 발전시켜 나가는 진화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어떤 것이 하늘가는 길을 걷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참 경험일까?
독수리를 알아야 독수리를 잡는다
“입에서 나오는 것들이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마태복음 15:18~20. 겉으로 나타나는 열매의 출처는 마음이다. 마음 속에 그리스도의 영이 함께 계시면 자연스럽게 성령의 열매가 맺히지만, 사납고 비열하며 이기적인 독수리 같은 본성이 살아서 우리를 지배하면, 독수리와 같은 말과 생각과 행동을 하면서 살게 된다. 독수리를 죽이기 위해서는 먼저 독수리를 잡아야 하는데, 독수리의 본성을 잘 이해해야만 그것을 잡을 수 있다. 독수리를 잡기 위해서는 먼저 독수리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우리는 독수리가 죽은 시체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독수리는 참새나 비둘기 같으면 전혀 관심도 갖지 않은채 지나쳐 버릴 죽은 송장에게 침을 흘리며 달려든다. 왜 그럴까? 왜냐하면 그는 독수리이기 때문이다. 독수리는 바로 그러한 본성을 가지고 있는 동물이다. 그는 신선한 과일이나 야채나 곡식보다는 썩어서 냄새가 나는 죽은 시체를 좋아한다.
한번은 어떤 사람이 독수리를 잡아서 그것의 태도와 습관을 잘 길들여서 온순한 동물로 변화시키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는 먼저 독수리가 들어갈 만한 커다란 새장을 만들어서 그 속에 독수리를 넣었다. 그리고 먼저 독수리의 식생활 습관을 변화시키려고 날마다 사과, 오렌지, 바나나 등을 주었다. 독수리는 여러 주일 동안 주인이 주는대로 잘 받아 먹다가, 어느날 새장 한 구석에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재빨리 그 구멍을 통해 날라가 버렸다. 독수리는 하늘 높은 곳에 떠있다가, 죽어서 쓰러져 있는 당나귀를 발견하고는 쏜살같이 내려가 작고 빨간 혀를 날름거리면서 맛있게 뜯어 먹었다. 주인은 독수리를 위하여 훨씬 더 선하고 아름다운 생활을 준비해 두었지만, 독수리는 자신의 옛 습관을 결코 바꾸지 않았다. 왜 그럴까? 그것은 그가 독수리이기 때문이다.
비둘기가 되어야 비둘기처럼 살 수 있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시여, 우리는 우리 자신 속에 독수리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는 독수리 같은 본성의 형편을 정확하게 이해해야만,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길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동안 비둘기와 함께 먹이통 곁에 앉아 있을 수 있다. 또한 비둘기와 함께 어울려서 주인이 주는 모이를 먹고 놀기를 좋아하는 것처럼 흉내낼 수 있다. 그러나 그 주인이 우리를 지켜보지 않거나, 누군가가 우리 곁에서 지켜보지 않는다는 사실을 느끼게 되면, 가차없이 독수리의 근성을 있는 그대로 나타내어서 주변에 있는 비둘기들에게 날카로운 발톱과 부리를 들이댄다. 바로 그 때, 곁에서 우리를 지키고 있던 천사는 눈물을 흘리며 우리가 다시 독수리로 돌아간 사실에 대해서 하늘 왕께 보고서를 기록하게 된다.
바로 이것이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경고하셨던 말씀이다. “네가 진정으로 회개하여 새로 거듭나지 않는다면, 너는 곧 매우 두려운 일을 당하게 될거야. 그러니 너는 깨어서 기도해야 한다. 너는 깨어 있어야 해!” 주님의 당부에 대해서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했다. “주님, 걱정하지 마세요. 다른 사람들이 모두 당신을 버리고 갈지라도 저는 끝까지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위기가 오자, 베드로는 닭이 두번 울 때, 세번이나 부인하고 말았다. 그렇다면 베드로가 주님께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했단 말인가? 아니다. 적어도 베드로는 정직하게 말했다. 그는 정말 주님을 끝까지 따르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 속에 숨어 있는 독수리의 참 모습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렘 17:9. 여러분들은 여러분 자신의 마음을 알고 있는가? 예수께서 여러분 자신의 마음을 아시고 있는 것처럼 정확하게?
우리의 죗되고 이기적인 본성은 시간이 지나면서 차차 나아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체면과 위선이 좀더 완벽한 가면을 만들어 내는 것일 뿐이다. 독수리는 그가 살아 있는한 언제까지나 독수리일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어린 양같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을까? 그것은 우리가 어린 양으로 다시 태어나는 방법 밖에는 없다. 그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독수리를 길들여서 어린 양 흉내를 잘 낼 수 있게 훈련시키는 그러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한, 우리는 적당한 때가 되면 다시 독수리의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독수리인 우리는 어린 양으로 새롭게 다시 태어나는 경험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러한 거듭남의 경험이 없이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시작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거듭나지 않은 그리스도인은 좀더 완벽하게 위장된 가면과 위선 속에서 이웃과 가족을 속일 뿐 아니라, 결국에는 자신마저 기만하는 깊은 늪에 빠지게 된다.
독수리를 죽이는 방법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거듭날 수 있을까? 유일한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독수리를 죽이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 죽음의 모본을 보여주고 있는데,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다. 예수께서 돌아가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히셨던 것처럼, 우리의 자아도 십자가에 못박혀야만 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여 함이니” 라고 말했던 것이다(롬 6:6). 그분의 죽음은 우리 모두가 동참해야 할 죽음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의 죗된 자아 즉, 독수리의 본성은 십자가에 못박혀야 한다. 그러나 십자가의 죽음은 매우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것이다. 우리 속에 있는 독수리가 원하는 것을 주지 않음으로써 배고픔으로 허덕이게 해야 하며, 외쳐대는 그의 요구를 거절해야 하는 결단이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자아를 죽일 수는 없다. 오직,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써 이 일이 가능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생애와 그분의 죽음을 바라볼 때, 우리 속에서 그분의 희생을 통하여 이루어진 용서와 구원에 대하여 깊이 감사하는 정신이 샘솟게 되며, 동시에 그분처럼 의롭고 경건하며 거룩한 생활을 살고자 하는 소원이 우리의 마음을 채우게 된다. 우리 속에서 생긴 이러한 전격적인 변화는 하늘의 능력에 의해서 이루어진 마음의 재창조인데, 이러한 변화를 날마다 경험하는 그리스도인만이 자신 속에서 올라오는 독수리의 요구를 거절하고 자아를 십자가에 못박을 수 있다. 독수리의 요구에 대해서 “안돼”라고 대답하는 거절이 우리의 생활 속에서 계속해서 이루어질 때, 드디어 독수리는 점점 세력을 잃고 죽어가게 된다. 전에는 커다란 유혹으로 느껴졌던 시험이 이제는 아무런 유혹거리가 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독수리가 우리를 지배하는 힘을 잃어 버렸기 때문이다.
가장 위험한 두가지 오해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이시여, 독수리와 그리스도인 사이에서 벌어지는 대쟁투는 평생을 통하여 계속되는 경험이다. 오늘의 승리가 내일의 승리를 약속해 줄 수 없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자신의 경험을 간증하면서, “나는 매일 죽노라” 라고 말했던 것이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혼돈하고 있는 한가지 경험이 있는데, 그것은 거듭남에 대한 경험이다. 하나님께 마음을 바치고 진심으로 회개하는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마음을 주신다. 그러나 그러한 경험을 한 후일지라도, 때때로 자신 속에서 올라오는 옛 본성으로 인해서 당혹감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경험이 반복됨에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헌신과 회개를 받지 않으셨다고 오해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들은 실망과 좌절 속에서 방황하다가 참된 그리스도인의 길을 떠나고 만다. 옛 본성의 요구에 굴복하는 죗된 생애를 살다보면, 결국에는 성경의 진리를 자신의 죗된 경험에 맞추어서 철저하게 합리화 시키게 된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일단 한번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정죄하지 않으시며, 한번 구원받으면 그 구원은 그 생애가 어떠하던지 간에 결코 잃어버릴 수 없다는 위험천만한 결론을 내리게 된다. 대개 이러한 결론을 내린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두가지 주장을 하게 된다;
1. “십자가에서 율법이 폐하여 졌습니다” : 그리스도께서는 인류를 향하여 율법이 요구하는 죄의 값을 완전하게 치루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 십자가는 죄를 범해도 좋다는 허가증이 아니라, 죄가 요구하는 댓가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보여줌으로써, 인류에게 죄짓기를 중단하라는 그리스도의 피뭇은 호소이다. 십자가는 율법을 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의 권위와 그 의미를 완전하게 세우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던 것이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마 5:17.
2. “한번 구원받았으면 영원히 구원받은 것입니다(Once saved, Always saved)” : 옛 본성의 요구대로 살아가는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경험을 성경적으로 정당한 것으로 합리화시키려고 한다. 그래서 과거에 한번 받은 구원은 어떠한 경우에도 잃어 버릴 수 없으며, 심지어는 구원을 거절할 수도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구원은 날마다 유지되고 지켜져야 한다. 어제 구원받았다고 할지라도, 오늘 내가 그리스도와 그분의 진리를 거절하면, 구원은 더 이상 나의 것이 될 수 없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한번 구원받았으면, 나의 믿음과 생활이 어떻하든지간에 무조건 구원받게 된다” 는 가르침을 믿고 있다.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하늘에 들어오지 못”한다는 사도 요한의 경고를 무시하지 말라(계 21:17). 구원은 과거에 이루어진 한순간의 결정에 의해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한번 결정한 후에도,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계속 성장해 나가는 일이 필요하다. 한번 거듭났다고 할지라도, 옛 본성의 요구를 계속해서 거절하는 선택이 필요하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롬 6:16.
다시 이야기를 계속해 나가자. 그렇다면, 진실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지라도 죄를 지으려는 충동을 느낄 것인가? 그렇다. 왜 그런가?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 기 때문이다(갈 5:17). 거듭남을 경험한 후일지라도, 육체의 소욕 즉 옛 사람(독수리의 본성)이 우리 속에서 계속 부르짖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과나 당근처럼 유익하고 선한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무엇인가 썩고 부패한 것을 원한다. 비록 독수리가 그러한 것들을 강력하게 요구한다고 할지라도, 놀라거나 실망할 필요가 전혀 없다. 왜냐하면 유혹과 충동을 느끼는 자체는 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 유혹에 굴복하여 그것이 요구하는 바에 따라서 끌려다니기로 선택할 때, 바로 그 순간에 죄는 성립된다. 밖으로부터 다가오는 유혹과 우리 속에서 그 유혹에 굴복하라고 종용하는 독수리의 요구에 대하여, 우리가 굴복하느냐 아니면 거절하고 승리하느냐가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는 관건이다. 그런데 성경은 오직 새롭게 거듭난 자들만이 승리할 수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라.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날마다 마음을 그리스도께 바치고 독수리의 요구를 거절하기로 선택해야만 한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
조금 다른 각도에서 이 문제를 다시 살펴보자. 그리스도인의 마음 속 이 쪽에는 십자가가 있고, 저 쪽에는 마음의 보좌가 있다. 우리가 마음의 보좌에 그리스도를 앉도록 모신다면, 옛 사람 즉 독수리 같은 본성은 십자가에 못박히게 된다. 시험과 유혹이 접근해 왔을 때, 우리가 예수께 대하여 “예”라고 대답한다면, 자신 속에 있는 독수리에 대해서는 “안돼”라고 대답하는 것이 되는데,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매일 경험해야 할 생애이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께 대하여 “예”라고 말하면서, 동시에 독수리의 부르짖음에 대해서도 “예”라고 대답하고 있다. 그들은 십자가에는 어떤 것도 못박으려고 하지 않는다. 공개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못박지는 않지만, 독수리 역시 못박아 죽이려고 하지 않는데, 그러한 사람들이야말로 뜨뜻미지근한 라오디게아 교인들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마음 속에 독수리와 예수님과 세상을 함께 모시고 살기를 원한다.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인이란 자신의 마음 속 보좌에는 오직 예수님 한분만 모시며, 십자가에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독수리 같은 본성을 못박는 사람을 의미한다. 바로 이런 사람만이 승리의 생애를 살 수 있다.
십자가에 못박힌 독수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자신을 놓아달라고 소리치고, 협박하는 것일 뿐이다. 못박힌 독수리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달라고 요구하며, 자신이 원하는 곳에 가라고 부르짖고, 자신이 범하기 원하는 죄를 범하라고 졸라댄다. 자신의 날개와 발에 박힌 못을 빼달라고 애원하며 절규한다. “나를 풀어 주세요! 잠시 풀어 놨다가 다음 주에 다시 못박아도 되쟎아요!” 못에 박힌 독수리는 항상 논리적으로 우리 자신을 설득하려고 애쓴다. 이러한 논리에 휘말린 그리스도인은 오늘은 독수리를 못박았다가 내일은 풀어주는 생활을 되풀이 하면서, 독수리의 요구에 끌려 다니는 피곤한 신앙 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내일이면 또 독수리를 풀어줄텐데” 라는 생각 때문에 독수리를 십자가에 못박는 일을 중단하게 된다. “어차피 다시 풀어줄 독수리를 구태어 힘들게 못박을 필요가 어디있나?” 라는 논리에 휘말리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독수리를 십자가에 못박는 일을 중단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기 시작하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자아가 죽는다는 말의 의미
이제, 죽음에 대한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자.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 죽은 ... 자로 여길지어다.” 롬 6:11. 여기서 우리는 “여길지어다(consider)” 이라는 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여길지어다” 라는 말에는 “꼭 그러한 것으로 간주하라” 는 뜻이 담겨 있다. 아마 여러분 중의 어떤 분은 이렇게 항의할 수 있을 것이다. “조금 전에는 죽어야 한다고 말해 놓고서, 이제는 죽지 않았지만 죽은 것으로 여기라고 말하는 것입니까?” 그렇다. 아직 살아 있지만, 죽은 것으로 여기라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바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육체는 예수께서 재강림하시는 그 날까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옛 본성이 십자가에 못박혔을 때, 옛 본성의 손과 발이 십자가에 못박혀 있기 때문에, 그것이 원하는 어떤 것도 이룰 수 없다는 의미에서 죽었다고 말하는 것이지, 그것이 어떠한 것도 요구하지 못하거나 부르짖을 수 없는 상태로 되었기 때문에 죽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수많은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절제와 극기의 생활을 하고 있지만, 사도 바울이 말한“죽은 것으로 여길지어다” 의 의미를 오해하거나 깊이 생각하지 않음으로써, 열심을 잃어버리고 실망하여 뒤로 후퇴해 가고 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영감적인 기록에 깊은 주의를 모아야 할 필요가 있다. “진실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지라도 죄를 지으려는 충동을 느끼게 되는데, 이는 육체의 소욕이 성령을 거스려 싸우기 때문이다. 마음 속에서 성령과 육체 사이에서 벌어지는 대쟁투는 쉼이 없는 투쟁인데, 그리스도의 도우심이 필요되는 곳은 바로 여기이다.” Messages To Young People, 114.
독수리의 요구를 거절하라
우리 속에 항상 독수리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자신에 대해서 결코 자부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 속에서 냄새를 피우고 소리를 지르고 있는 독수리의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나의 진짜 모습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가 자신의 그런 추한 모습을 보면서 자신에 대해 실망하고, 미워하며, 불신하게 될 때, 우리는 비로서 진정으로 선한 어떤 것을 사모하게 되는데, 바로 이 때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리라” 라는 말씀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기 시작한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 속에서 들려주시는 비둘기 같은 성령의 음성과 독수리의 요구를 동시에 받아들일 수 없다. 한 음성에 순종하면, 다른 하나는 자동적으로 거절하게 된다. 우리의 마음 속에는 두마리의 새가 있다. 하나는 죗된 옛 본성을 상징하는 독수리이고, 다른 하나는 성령의 역사를 상징하는 비둘기이다. 우리가 비둘기를 사랑하여 비둘기를 기르기로 선택하였다면, 우리는 비둘기에게만 먹이를 주어야 한다. 반면에 독수리는 굶겨야 한다. 우리는 독수리와 비둘기에게 동일한 먹이를 줄 수 없다. 왜냐하면 비둘기는 죽은 시체나 썩은 고기는 전혀 먹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성령님과 독수리같은 본성을 동시에 만족시킬 수 없다. 우리는 하루를 사는 동안에 어떤 먹이를 선택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우리가 텔레비젼 속에서 튀쳐나오는 각종 썩은 것들을 즐겨 받아 먹을 때, 그리고 각종 책이나 잡지에서 더럽고 추악한 사상들을 즐겨 받아 먹을 때, 독수리는 먹이를 찾은 환희의 소리를 크게 지르며 “바로 이것이 내가 기다리고 원하던 것이야! 좀더 자극적이고, 더러운 것들로 나를 즐겁게 해달라!” 고 외치면서 달려드는데, 이런 경우 우리는 힘없이 독수리의 요구에 굴복하게 된다. 독수리와 비둘기는 우리가 주는 먹이에 비례하여 성장한다. 만일 우리가 독수리가 좋아하는 먹이로 마음과 생각을 가득 채우면, 독수리는 에너지를 얻어서 더욱 활개를 치면서 우리를 자신이 원하는 바대로 끌고 다닐 것이다.
우리는 독수리의 요구를 거절할 때에 매우 단호하게 해야 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어정쩡한 모습으로 독수리에게 끌려다니고 있다. “독수리야, 안돼! 나는 그 사람에게 복수하기 싫어. 그렇지만 그를 은근히 다른 사람들의 눈에 뜨이지 않게 괴롭힐 수는 있지. 독수리야, 나는 결코 네가 원하는대로 그 사람의 뺨을 치지는 않을 거야. 그러나 그의 약점을 아프게 건드림으로써 그를 괴롭힐 수는 있지.” 얼마나 많은 경우에, 이러한 모습으로 독수리와 타협하고 있는가?
우리는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 후일지라도 우리 속에 숨어 있는 독수리의 근성이 그리스도인 생애를 괴롭힐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분명히 이해해야 한다. 우리 속에서 독수리가 다시 머리를 쳐들고 부르짖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가 회개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이해해야 한다. 단지 그것은 독수리의 근성이 여전히 내속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입증할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참된 회개를 통하여 독수리의 근성이 우리를 주장하거나 장악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능력을 하늘로부터 공급받을 수 있다. 참된 회개는 독수리를 못박아서 가두어 놓는다. 비록 독수리가 못박혀지고 가두어진채로 우리에게 자신이 원하는 바를 부르짖을지라도, 그 소리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는 없다. 독수리를 죽은 것으로 여기고, 그리스도인의 삶을 힘차게 살아가면 된다. 독수리의 요구를 거절하거나 무시하기로 선택하고, 비둘기 같은 성령님의 호소에만 귀를 기울이는 삶을 살아갈 때, 드디어 독수리는 십자가에 못박힌채 피를 흘리면서 굶어 죽게 된다. 힘을 잃고 굶어 죽어가는 독수리의 절규와 애원을 추호도 동정하지 말라
“죄가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고 ... 너희 지체를 ... 하나님께 드려라.” 로마서 6:12~13.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이시여,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우리 속에 계신 비둘기 같은 성령의 속성을 살찌우게 하자. 독수리는 십자가 형에 처하고, 오직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영광만이 나타날 수 있도록 믿음으로 전진하자.
자아가 죽는다는 의미
그대가 소홀한 취급을 받거나 의도적으로 따돌림을 당할 때,
화내거나 맘 상함 없이 온유함을 유지하고 그것을 가치있는 고통으로 여기면서
상대방을 웃음으로 대하기로 결심한다면,
그것이 자아를 죽이는 것이다.
그대가 어떤 어려움, 어떤 귀챦음, 어떤 성가심을 이웃으로부터 받고 있을 때,
예수께서 보여주셨던 사랑스러움과 유쾌한 분위기를 이웃에게 계속 선물할 수 있다면,
그것이 자아를 죽이는 것이다.
그대가 어떤 음식, 어떤 외로움, 어떤 직업, 어떤 의복, 어떤 지위,
어떤 방해 하에서도 겸손한 만족과 평안함을 누릴 수 있다면,
그것이 자아를 죽이는 것이다.
그대의 최선의 노력이 오해받고 잘못 전달됨으로서 그대의 소원이 좌절되고,
그대의 충고는 무시되고, 그대의 의견이 비웃음을 당할 때,
그대의 마음 속에서 솟구치는 분노와 억울함을 부인하고
그리스도께서 받으셨던 억울함을 생각하면서
그대의 경험을 자신에게 꼭 필요한 교훈으로 생각할 수 있다면,
그것이 자아를 죽이는 것이다.
가장 혹독한 시련과 형제의 냉정하고 가혹한 대우로 인하여 생긴 가장 암울하고
우울한 감정이 그대의 영혼을 엄습할 때,
힘찬 찬미를 부르며 오히려 슬픔과 낙담에 빠져있는 가족과 이웃을 위로할 수 있다면,
그것이 자아를 죽이는 것이다.
그대가 그대보다 부족해 보이는 사람으로부터 책망과 충고를 받았을 때,
그대의 육체로부터 치밀어 오르는 자존심과 반발심과 고집을 슬픔의 눈으로 내려다 보시는
그리스도께 도움을 청하는 긴급한 기도를 드린 후, 감사와 겸손으로 그것을 받아들인다면,
그것이 자아를 죽이는 것이다.
그대가 인생의 황혼기에서 자신의 영혼을 압도하는 듯한 죽음의 그림자와 외로움과
서러움을 힘있게 밀쳐버리고, 오히려 연약하고 우유부단한 젊은 자들을 꾸짖으며,
그들에게 진리를 위하여 자신의 온 힘과 정력을 불사르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면,
그것이 자아를 죽이는 것이다.
그대가 인생의 청장년기에서,
이기적인 경쟁심과 그대를 자극하고,
물질에 대한 욕망이 그대를 사로잡으려고 으르렁거리며,
세상이 주는 유혹이 그대를 압도하려고 할 때,
또한 그대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그런 것들을 즐기면서 아무런 문제없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유지하는 것처럼 보일 때,
그대가 그대의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무시하고 오히려 진리를 위하여 가난해지고
고난을 당하며 그 가운데서 참된 평화와 행복을 발견하기로 선택한다면,
그것이 자아를 죽이는 것이다.
그대의 타락하고 이기적인 본성으로부터 날마다 솟구쳐 올라오는
죗된 욕망과 절규를 무시하고 날마다 하늘의 거룩한 법을 순종하기로 선택한다면,
바로 그것이 자아를 죽이는 것이다.
데니스 프리비
죄란 무엇인가?
“죄”의 정의를 어떻게 내리는가에 따라서 우리의 신앙은 크게 달라질 수 있다. 만일 그대가 자신의 병에 대한 올바른 진단을 받기 위하여 의사를 찾아 갔는데, 의사의 오진으로 인하여 잘못된 처방과 치료를 받는다면, 그대는 회복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를 “죄”라는 치명적인 질병으로부터 회복시키는 복음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죄”라는 질병에 대하여 오진을 할 경우, 죄의 치료제인 복음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다.
성경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죄”라는 질병을 가지고 있다는 진단을 내리고 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롬 3:23. 죄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한 답 속에는 하나님께서 인류를 어떻게 구원하실 것인가에 대한 방법이 담겨져 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죄와 구원에 대한 견해를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은 두 종류의 견해를 가지고 있는데, 안타깝게도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첫번째 정의를 받아들임으로써 잘못된 복음을 따라가고 있다.
정의 1: “사람은 무엇을 잘못 행하거나 말하거나 생각하기 때문에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타락한 아담과 하와의 자손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죄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류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자동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정죄를 받게 된다” : 이러한 잘못된 교리를 믿는 사람은, 신생아가 태어나자마자 유아세례를 줌으로써 지옥불의 형벌을 면하게 할 수 있다는 또 하나의 오류를 받아들이게 된다. 또한 모태에서 태어날 때에 받은 타락한 본성(육체) 때문에 아무도 죄를 승리할 수 없다는 치명적인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이렇게 믿는 사람들은 “한번 구원받으면 나의 생애가 어떠하든지 간에 절대로 구원을 잃어버릴 수 없다”는 신앙을 받아들이게 된다.
정의 2: “사람은 타락한 본성을 유전적으로 물려받은 상태로 태어난다. 그러나 물려받은 타락한 본성 그 자체 때문에 지옥불의 정죄를 받는 것은 아니다. 오직 타락한 육체의 요구와 사단의 유혹에 스스로 굴복하여 십자가의 은혜를 거절하고 율법의 요구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만이 영원한 파멸에 이르는 죄인으로 정죄를 받게 된다. 죄에 대한 유일한 정의는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는 성경 말씀에서 그 근거를 찾아야 한다(요일 3:4)” :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사람에게 선택할 수 있는 의지를 주셨다. 그러므로 비록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육체가 죗된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인간의 의지에게 악을 행하라고 소리칠지라도, 인간의 의지는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그것을 거절하고 성경 말씀에 일치하는 거룩한 삶을 살기로 선택할 수 있다. 선과 악, 둘 중에서 선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은 그 능력을 간절히 사모하는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에게만 주어지며, 하늘로부터 내려온 능력을 받는 그리스도인마다 타락한 육체의 요구와 사단의 유혹을 거절함으로써 죄를 승리하고 죄의 세력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첫번째 정의를 믿는 사람은 죄를 태어나는 순간부터 받게 되는 자동적인 것으로 믿으며, 두번째 정의를 믿는 사람은 죄를 잘못된 선택의 결과로 믿는다. 첫번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은 비록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지라도 결코 죄에 대하여 승리할 수 없으며, 율법에 순종하는 승리의 삶은 예수께서 재강림하실 때에 의인에게 주시는 영화로운 육체를 받을 때까지 불가능하다는 복음을 가지고 산다. 두번째 정의를 믿는 사람은 선택여하에 따라서 사람은 죄를 승리할 수 있는데, 죄에 대한 승리의 선제 조건은 참된 거듭남(회개)라는 복음을 가지고 산다.
악이 유죄가 되는 조건
만일 집안에서 고양이를 기르고 있다면, 그 고양이는 사람의 발에 자신의 몸을 문지르고 무릅에 올라가서 재롱을 부리기 좋아할 것이다. 훈련을 잘 시키면, 대소변을 가릴 수도 있고,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구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열려진 문틈을 통하여 고양이가 집밖으로 나가게 되었다. 고양이가 비록 잘 길들여져 있다고 할지라도, 고양이의 본성 속에는 야생의 기질이 감추어져 있다. 고양이는 뒷마당에서 쥐를 잡아서 잔인하게 죽였다. 그것도 단번에 죽이는 것이 아니라, 쥐를 가지고 한참 동안 놀다가 서서히 죽인 후에 그것을 물고서 칭찬받기 위하여 주인에게 찾아온 잔혹한 고양이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
주인은 비록 고양이가 잔혹한 악을 범하였다고 할지라도, 고양이에게 유죄를 선언하고 벌을 줄 수 없다. 왜 그런가? 주인은 비록 고양이가 타락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할지라도 고양이의 뇌 속에는 도덕적인 판단력이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도덕적으로 선과 악을 판단할 수 없는 고양이에게 유죄를 선언할 수가 없다. 이제 갓 태어난 신생아가 아담과 하와로부터 유전적으로 이어져 내려온 타락한 본성을 전수받았다고 해서 신생아에게 유죄를 선언하고 영원한 지옥불의 형벌을 가할 수 있는가? 신생아가 젖을 달라고 크게 소리내서 운다고 해서 이기적인 죄를 범했다고 정죄할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 신생아는 악을 행하였지만, 유죄를 선언받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신생아는 아직 도덕적 판단력이 충분하게 발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악이 유죄 선언을 받게 되는 조건이다.
누구의 잘못인가?
판단력(이해력)이 악과 유죄를 구별하는 구분점이 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요 9:41. 바리새인들도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똑같은 본성(육체)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그들이 타락한 육체를 가지고 태어났다는 사실로 인해서 죄인이라는 정죄를 받지 않았다. 그들은 진리에 대한 이해(지식)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들이 저지른 악에 대하여 정죄를 받았던 것이다. 죄의 문제는 이해와 선택의 문제와 결코 분리시킬 수 없다.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 약 4:17. 무지는 악한 행위를 가져올 수 있다. 좀더 잘 알았더라면, 올바르게 행했을 것이지만, 잘 알지 못했기 때문에 잘못을 범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자비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잘못을 죄로 정죄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진리에 대한 지식은 악을 죄로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우리는 우리의 조상이 살았던 타락한 생애나 유전적으로 이어받는 나쁜 본성 때문에 정죄받지 않는다. 우리는 아담과 하와의 죗된 선택 때문에 정죄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결정한 죗된 선택 때문에 정죄받게 된다. 지성과 양심을 가지고 있는 우리가 죄를 범하면, 그것은 아담과 하와의 죄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죄이다.
얼마나 자비로우신 하나님이신가! 얼마나 공정하고 정확한 복음인가! 죄란 무엇인가? 죄는 하나님의 법에 대한 고의적인 불순종이다.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요일 3:4
거절하지 않는 자는 모두 구원받을 것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실 능력이 있으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하기를 소원하신다. 모든 사람이 회개하고 구원을 받는 것이야말로 그분의 진정한 뜻이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보증하기를,“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신”다 라고 하였다(롬 2:4). 그분께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회개로 인도하고 계신가? 물론, 모든 사람을 인도하고 계신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그분의 뜻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고 하셨기 때문이다(요 12:32). 그분의 사랑은 어떤 정해진 자들에게만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호소하신다. 그분의 선하심은 모든 영혼을 회개로 인도하며, 그분의 사랑은 모든 사람을 십자가로 이끌고 있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왜 모든 사람이 구원받지 못하는가? 그것은 그들이 구원받지 않으려고 애를 쓰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자신의 양심과 지성에 호소하시는 성령의 부드러운 인도하심과 호소에 저항하지 않고서는 멸망당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사울에게,“가시채를 뒷발질 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실인가? 구원을 받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대항하여 싸우는 것이 어려운 일이다! 우리가 저항하지만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섭리대로 우리를 당신께 이끄실 것이다.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다(딛 2:11).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났는가?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났다! 히브리서 2장 9절은, 예수께서“모든 사람을 위하여”죽음을 맛보셨다고 말한다. 또한“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하셨다(고후 5:18, 영문 성경역).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 세상이 모두 구원 받지 못하게 되는 오직 한가지 이유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의롭게 하고 거룩하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섭리를 저항하면서 거절하기 때문이다.
회개할 때에 생기는 변화의 경험
죄는 언제나 두가지 결과를 가지고 오는데, 그것은 악과 정죄이다.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이 두가지를 다루시는가? 하나님께서는 죄를 범한 죄인이 진정으로 회개할 경우, 죄인에게 내려진 유죄 선언을 즉시로 제거해 주신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요일 1:9. 죄인에게 내려진 유죄 선언이 제거되면, 죄인에게 내려질 영원한 형벌도 함께 사라지게 된다.
그런데, 회개를 통하여 유죄 선언과 영원한 형벌이 제거될 때에 죄인의 육체 속에 있는 타락한 본성도 함께 제거되는가? 아니다. 죄인이 회개한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육체는 고통과 슬픔과 유혹을 느끼면서 살아가게 된다. 죄가 용서함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인간의 육체 속에 숨겨져 있는 타락한 본성은 예수께서 재강림하시는 그 날까지 제거되지 않는다. 그러나 죄인이 회개할 때에 놀라운 변화가 한가지 일어나는데, 그것은 마음의 변화이다. 죄인이 진정으로 회개하고 마음을 주님께 드릴 때, 타락한 본성이 제거되는 것은 아니지만, 예수께서는 죄인의 마음을 변화시켜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재창조 해주신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 2:5.
바로 이러한 변화를 통하여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타락한 본성(육체)의 요구를 거절하는 승리의 생애를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안으로부터 육체가 죗된 요구를 하고, 밖으로부터 사단이 던지는 유혹이 다가올지라도, 변화된 마음과 의지를 통하여 선을 선택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각 개인의 영생과 멸망에 대한 운명을 이미 결정해 놓으셨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죄에 대한 용서와 구원을 말할 때에, 죄인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변화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는다. 그들은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것에 대해서만 이야기 할 뿐이며,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는 “우리 안”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은 변화될 필요가 있는 죄인이다. 모든 사람은 율법 앞에서 어떠한 은혜나 용서도 받을 수 없는 범법자로서 정죄 받는 존재이다. 율법 앞에 서있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의로움도 찾을 수 없다. 또한 옳은 행동을 할 수 있도록 만드는 어떤 능력도 없다. 죄인은 율법의 저주 하에서 정죄받은 상태로 힘없고 무기력하게 있어야만 하다. 그러나 십자가의 희생과 죽음을 바라보는 자들의 “마음 안”에는 이 모든 저주와 정죄로부터 피할 수 있는 변화가 생기게 된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용서가 죄인의 마음 속에 남기는 변화이다.
받기로 선택해야 주어짐
성경은,“한 범죄로 모든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롬 5:18 영문 성경역)다고 가르치고 있다.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다는 말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영혼들을 의롭게 하기 위한 예비책이 마련되었다. 그분의 죽으심은 온 세상을 다 구원하기에 충분하다. 십자가를 통하여, 지극히 합법적인 구원이 영광스런 구속의 경륜으로써“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다.
그러나 십자가의 구원은, 그것이 개인적으로 인식되고, 개인적인 믿음으로 받아들여져야만 각 개인에게 유효하게 된다. 다시 말하자면,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구원은 그것을 받는 사람의 믿음을 전제 조건으로 주어진다는 것이다. 성경은“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심이니라”롬 3:24~26.
비록 십자가가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제공해 주었다고 할지라도, 오직“예수 믿는”자들만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전기 회사가 충분한 전력과 빛을 각 집에 공급해 주고 있지만, 집안에 있는 각 사람이 스위치들을 누르지 않고서는 아무런 유익도 얻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하나님의 구원하시며, 정결케하시고, 의롭게 하시는 능력을 개인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러한 은혜가 개인에게 아무런 유익도 주지 못하게 된다.
인간은 생각하는 상한 갈대
범죄한 인간은 이미 부러졌고, 하챦은 바람에도 또 다시 부러지는 상한 갈대에 불과하다. 그러나 인간은 상한 이성과 꺽인 의지를 가지고도 여전히 생각하는 갈대로 존재하고 있지 않은가? 이 상한 갈대 위에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성령을 통하여 이슬처럼 임할 때, 놀랍게도 상한 갈대는 반응한다. 구원받기 위해서 반응하고, 반응할 수 있고, 또 반응해야 하는 것이 인간이다. 이것이 반응하는 인간, 곧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책임이 있는 인간의 참 모습인 것이다.
인간의 의지가 죄 때문에 독립할 수 없을만큼 손상되기는 했어도 인간성의 흔적도 없을만큼 파멸되지는 않았다.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하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리로 공의를 베푸”시며(사 42:2),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데 이르기를 원하”셔서(딤전 2:4), “독생자를 주”심으로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하신(요 3:16)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는 사람마다 성령의 음성에 반응하게 된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 나오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구속의 계획이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예정된 계획이 자신의 운명이 되도록 지금 믿음으로 반응해야 한다. 그것은 누구나 피해서는 안될 숙명이다. 그대는 어떤 운명을 선택하겠는가?
콜린 스텐디쉬 박사
A.D. 4세기 경, 기독교계는 종교암흑시대를 돌입하면서 깊은 신학적 혼란 속에 빠지게 되었다. 마리아가 중보자로 등장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세주로서의 위치가 흔들렸으며, 그리스도와 사도들에 의해서 가르쳐지던 원래의 진리가 거의 사라져갔다.
수많은 종류의 교리들이 그 원래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방황하게 되었다. 교회는 여러차례와 회의와 결의문을 통해서 정설을 정립하려고 했지만, 그러한 것들은 교회를 점점 더 그리스도의 단순한 복음으로부터 멀어지게 하였다. 이러한 신학적 혼돈 속에서 한사람이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면서 나타났는데, 그의 이름은 어거스틴이다. 그는 당대에 가장 영향력 있는 신학자였으며, 천주교회가 가지고 있는 신학적 오류 중의 상당 부분이 그에 의해서 시작되었거나 수립되었다. 슬픈 사실은, 그의 가르침과 신학적 영향력의 그림자가 오늘날까지 기독교 전체에 드리워져 있어서 수많은 교회들을 어둡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성장 과정이 미친 영향
어거스틴은 A.D. 354년 북아프리카에서 태어났다. 그의 모친은 기독교인이었고, 부친은 마니교도였다. 마니교는 3세기경에 마니라는 사람에 의해서 창설되었는데, 이 종교는 고대 페르시아의 종교인 배화교(조로아스터교)의 지류로서, 빛과 어두움(선과 악)의 대립을 강조하였다. 즉, 선과 악이 인간의 생애를 함께 다스리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악을 행하면서 살 수 밖에 없다는 교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을 받아들인 사람은 자신이 범한 죄에 대해서 스스로 합리화하고 핑계를 댈 수 있는 논리적 근거를 가지게 되었다.
어거스틴은 이렇게 이단적 신앙의 배경을 가진 부모의 영향 아래에서 성장하다가 20세가 될 무렵에 이태리 밀란에서 비로서 기독교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기독교인이 된 이후에도, 자신이 어렸을 때에 받았던 이교도적 개념을 머리 속에서 지워버릴 수 없었으며, 어린 시절에 마음 속에 뿌리를 내렸던 사상이 후에 그의 신학적 사상에도 크게 영향을 미쳤다. “인간은 결코 죄를 승리할 수 없다”는 어거스틴의 신학적 견해는 어거스틴 이후 700년 동안이나 계속되어 오면서 수많은 성직자들과 신학자들을 교육시키는 지배적인 사상이 되었다. 중세기의 교회 안에서 형성된 수많은 신학적 오류들은 거의 모두 어거스틴에 의해서 시작되었거나 그를 추종하는 신학자들에 의해서 발전되고 확산되었다. 어거스틴에 의해서 만들어진 잘못된 오류를 받아들인 많은 신학자들은 어거스틴의 세워놓은 오류를 전제로 해서 또 따른 오류를 발전시켜 나가게 되었던 것이다. 한가지 오류가 또 다른 오류를 이끌어 들였다. 한가지 오류를 진리로 입증하기 위해서 또 다른 오류를 만들어 내는 잘못을 범했던 것이다.
예정론이 시작된 배경
이교의 사상에 물들은 어거스틴은 성경에 나타난 중요한 사상, 즉 모든 사람은 자기의 의지를 자유롭게 사용해서 선과 악 중에 어떤 하나를 택할 수 있다는 사상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버지가 가졌던 이교의 영향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절대적이고 독재적인 신으로만 이해했던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인간에게 선택의 자유를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은 받아들이기에 너무나 어려운 사상이었다. 그는 성경에서 어떤 사람은 구원을 받고, 어떤 사람은 구원을 얻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러한 장면을 자신이 가지고 있던 신학적 개념에 끼워 맞추기 시작하였는데, 바로 이것이 예정론의 시작이 되었다.
태초 이전에 하나님께서 이미 어떤 사람은 구원받고 어떤 사람은 멸망당하도록 예정해 놓으셨다는 이론인 예정론은 어거스틴의 생존하고 있을 당시에도 많은 도전을 받았는데, 어거스틴은 도전에 대한 응답으로서 누가 구원을 얻던지 간에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일 뿐이며, 연약한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심판과 공의에 대해서 질문할 자격조차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자신의 이러한 주장을 합리화시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에게는 영원한 구원을 지정해 놓으셨으며, 어떤 사람에게는 영원한 저주 가운데 있도록 지정해 두셨다는 예정론을 세울 수 밖에 없었다.
예정론이 만들어낸 또 하나의 오류
어거스틴이 세운 잘못된 견해는 예정론을 만들어 내는데에서 그치지 않았다. 예정론의 오류는 논리적으로 또 다른 오류를 만들어 내었다. 즉, 예정론은 한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게 된다는 개념(once saved, always saved)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초석이 되었다. 예정론은 “절대적인 군주인 하나님께서는 누구를 구원할 것인가를 독단적으로 결정하신다. 그러므로 한번 구원받은 사람은 결코 잃어버림을 당하지 않는다”는 논리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오류를 받아들인 사람들은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 거짓 안전감에 도취되게 된다. 현재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고 비도덕적인 죗된 생활을 살고 있으면서도, 자신은 구원받았다는 깊은 자기 기만 속에 빠지게 만든다. 예정론은 복음을 전파하는 면에 있어서도, 설명할 수 없는 여러가지 의문을 제기한다. 만일 모든 사람들의 구원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결정에 의해서 이미 결정되었다면, 복음을 전파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전도를 해야 하는 이유와 목적이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예정론을 받아들인 사람들의 대답은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라는 궁색한 설명을 한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선언하고 있다(디모데전서 2:4).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구원에 이르게 되기를 원하시지만, 인간인 우리의 죗된 선택과 이기적인 결정으로 인하여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는 것이다.
한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는 오류는 죗된 생활을 살면서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이론으로 발전되어 나갔다. 한가지 오류에 대한 믿음이 또 다른 오류를 받아들이도록 만든 것이다. 이러한 오류를 받아들인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구원과 죄에 대한 승리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문제가 되며, 경건한 그리스도인의 삶 역시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 되어 버리고 만다. 그리하여 비록 그리스도인이 거듭나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 안에 있다고 할지라도 결코 죄를 이길 수는 없다고 주장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오류들은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선택의 자유를 부여하지 않았다는 이단적 견해에 근거를 둔 어거스틴의 주장으로부터 나온 망상에 불과하다.
자신의 죗된 경험을 합리화시키기 위해서 수립된 신학
어거스틴은 성(sex)을 원죄라고 주장하였는데, 그의 그러한 주장은 자신의 죗된 생활을 합리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사생아를 낳음으로써 불법적인 아버지가 되었는데, 이것은 그의 사생활이 경건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폭로한다. 어거스틴의 생활 속에 있는 이러한 약점은 그로 하여금 자신의 죗된 생활을 합리화 시킬 수 있는 신학적 핑계를 찾도록 유도하였다. 자신의 생애에서 죄에 대한 승리의 삶을 살지 못했던 어거스틴은 원죄의 폭을 점차적으로 넓혀서 다른 문제에까지 적용하기에 이르렀다. 즉, 태어나기를 악하게 태어났기 때문에 죗된 생활을 살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그의 신학을 지배하게 되었다. 어떤 목사나 신학자도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것 이상의 설교와 신학적 이론을 발전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어거스틴의 생애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어거스틴은 육과 영 사이에 무서운 투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였다. 그는 영이 육을 이길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사랑을 보았을 때에 생기는 마음의 놀라운 변화 즉, 거듭남의 경험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마음이 새롭게 거듭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죄에 대한 승리는 너무나 자연스런 결과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죄에 대한 승리의 경험을 하지 못했던 어거스틴, 참된 거듭남의 경험을 소유하지 못했던 어거스틴은 자신의 죗된 경험에 맞추어서 자신의 신학을 발전시켜 나갔다. 사람이 태어나면서 유전적으로 물려받는 타락하고 이기적인 본성 자체를 죄로 생각하였던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죄는 결코 이길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 그리하여 그는 죄란 우리가 태어날 때에 이어받는 타락한 본성 자체를 죄라고 정의하게 되었다. 그러나 죄란 우리가 태어나는 죗된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마음과 행위로 범하는 불순종을 말하며, 성령께서 양심 속에서 들려주시는 조용한 음성을 거절하면서 선택하는 부도덕한 결정을 말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온전히 마음을 바치고 성령의 능력을 힘입으면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죄를 승리하고 정복하는 순종의 생애를 살 수 있다. 성령께서 인도해 주시고 깨닫게 해주시는 의로운 선택과 의로운 결정을 통해서 말이다.
첫번째 딜레마
그러나 죄에 대한 승리의 경험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던 어거스틴은 육체를 취하시고 이 땅에 태어나셔서 승리의 생애를 사셨던 그리스도를 생각할 때마다 딜레마에 빠지게 되었다. 왜냐하면 자신과 동일한 육체를 취하셨던 그리스도께서는 승리의 생애를 사셨는데, 어거스틴의 생애에는 승리의 경험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계 3:21. 그리하여 어거스틴은 그리스도께서는 인간과 전혀 다른 몸을 가지고 태어나셨다는 억지 논리를 펼치게 되었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육체를 가지고 태어나신 성육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아니하는자가 아니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는 없으신 분이요.”히 4:15(킹제임스 성경 역). “자녀들이 피와 살을 나누는 자가 되는 것같이 그 역시 같은 모양으로 동일한 것을 함께 나누는 자가 되심은 . . . 주께서 진실로 천사들의 본성을 입지 않으시고 아브라함의 씨를 입으셨음이라. 그러므로 그가 모든 일에 마땅히 자기 형제들과 같이 되셔야 했으니” 히 2:14~18(킹제임스 영어 성경역). 그리스도께서는 천사의 육체를 취하신 것이 아니라, 마리아를 통하여 아브라함의 혈과 육을 유전적으로 받고 태어나셨던 것이다.
어거스틴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타락한 육체를 취하고 태어나셨다는 성육신에 대한 가르침을 뒤집어 엎음으로써, 천주교회를 깊은 암흑 가운데로 이끌어간 무염시태설의 기초를 놓았다. 어거스틴은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신 몸은 우리 인간들의 육체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어머니의 몸 역시 인간의 타락한 본성이 전혀 없는 완전무결한 상태로 바꾸어야만 하였다. 그러한 가르침에 기초하여 교회는 점차적으로 무염시태 즉, 성령께서 마리아의 육체를 완전하게 변화시킨 상태에서 아기 예수를 잉태하였다는 주장을 교리화하게 되었던 것이다. 마리아의 육체가 흠이 없는 완전무결한 상태였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육체도 인간적인 연약함이 전혀 없는 완전 무결한 상태에서 태어날 수 밖에 없다는 논리를 전개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대한 진리를 영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라.” 요일 4:2. 성경에서 육체라는 말은 항상 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도덕적으로 연약한 본성을 가진 몸을 의미한다.
두번째 딜레마
어거스틴이 예수는 인간과는 다른 완전한 육신을 가지고 오셨다는 기상천외한 이론을 세워 놓았지만, 그는 또 하나의 딜레마에 빠지게 되었다. 어거스틴의 이론 때문에 이제 그리스도는 인류로부터 멀어져 버렸다. 그리스도의 육체를 인간의 육체보다 훨씬 높은 자리에 놓음으로써,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이 당하는 시험과 유혹을 당한 일이 없는 분이 되셨다. 왜냐하면 어거스틴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인간들이 시험받고 유혹받는 생애와는 전혀 다른 생애를 사셨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결론은 인간은 결코 죄를 이길 수 없다는 또 하나의 치명적인 결론으로 이끌어 간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다” 히 4:15. 어거스틴이 만들어낸 이러한 이론들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면에 있어서 더 이상 인간의 모본이 될 수 없으셨으며, 그 결과 인류를 위한 중보자로서의 자리를 빼앗기게 되셨다. 그리하여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이외의 다른 중보자를 만들어 내게 되었던 것이다. 교회는 신학적으로 완전한 논리를 정립하기 위해서, 다른 인간들처럼 유혹을 느낄뿐만 아니라, 유혹에 굴복하여 죄를 짓기도 하는 중보자를 만들어 낼 수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교회는 성경이 “하나님은 한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라고 선언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어머니인 마리아를 인류를 위한 새로운 중보자로 교인들에게 소개하기에 이르렀다(디모데전서 2:5). 나중에는 이것이 더욱 발전되어 나가서, 수많은 성인(saints)들을 제정하게 되었으며, 사제들과 신부들에게 중보자의 역할을 맡김으로써 신자들로부터 죄의 고백을 받아서 하나님께 중보하게 만들었다. 교회는 어거스틴의 잘못된 사상과 신학에 기초를 둔 교리의 헛점을 메꾸기 위해서 한번에 한 계단씩 오류에 오류를 더해갈 수 밖에 없었다. 원죄가 인간을 영원한 생명으로부터 분리시킨다는 교회의 신조 때문에 임신이 되는 순간 태아는 영원한 멸망의 정죄를 받게 되었다.
오류에서 오류로!
그런데 이러한 논리는 또 하나의 질문에 부딪히게 되는데, 그것은“어떻게 하면 원죄에 대한 죄책감을 벗어날 수 있는가?”라는 교인들의 질문이었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제시된 것이 “세례(영세)라고 불리우는 의식에 의해서 원죄의 정죄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이었다. 교회 지도자들의 답변에 뒤이어 또 하나의 질문이 들어 왔는데, 그것은 “세례(영세)받지 않은 자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가?”이다. 여기에 대한 답변은 참으로 끔직한 것이었는데, “세례(영세)를 받지 못한 사람들은 저주를 받아서 영원히 타는 지옥불에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생각해 보라. 세례(영세)를 미처 받기 전에 죽은 어린아이를 가진 부모들에게 있어서 교회의 그러한 답변은 참으로 충격적인 것이었을 것이다. 중세기는 어린아기의 사망률이 매우 높던 때였다. 자신들의 아기가 영원한 지옥불에서 끝없이 고통당하고 있을 것을 상상하는 진실하지만 무지한 그리스도인 부모들의 고뇌는 정말 견딜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교회는 즉각적으로 교인들의 고뇌를 해소시킬 수 있는 설득력 있는 해결책을 강구해야만 하였다. 그래서 “연옥”과 “림보”라는 기상천외한 것들이 발명되게 이르렀다. 연옥은 하늘도 아니며 지옥도 아니다. 그것은 하늘과 지옥의 중간에 해당하는 곳이며, 림보는 천당은 아니지만 연옥이나 지옥처럼 불타는 고통은 없는 곳이다. 교회는 이러한 연옥과 림보를 교인들에게 소개함으로써 그들의 마음을 달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교회가 제시하는 그러한 해결책으로도 아기를 잃어버린 부모의 아픈 심정을 완전히 달랠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교회는 드디어 “유아 세례”라는 의식을 만들어 내기로 결정하였다. 출산의 고통 속에서 죽어가는 산모의 배 위에 신부가 물을 뿌리면서 이제 유아와 산모가 모두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선언하는 유아 세례야말로 교인들의 요구를 완전하게 만족시켜 주는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해서, 한 신학자의 잘못된 사상이 오류에서 오류로 발전되게 되었는데, 결국에는 그러한 오류들이 교회의 정식 교리로 채택되기에 이르렀다.
아퀴나스와 바벌라드 같은 신학자에 의해서 어거스틴의 이론이 잠시 주춤거리기도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16세기 초에 위대한 종교 개혁 운동이 일어나고 개혁자들이 교회의 부패와 오류에 대해서 대항하였지만, 천년에 걸쳐서 뿌리 깊이 박혀있던 오류의 근원을 송두리채 뽑아내는 일에는 부족함이 있었다. 구교를 대항하여 개신교 운동이 전개되었지만, 어거스틴의 이론은 개신교회 중심부까지 들어와서 깊이 자리 잡게 되었다. 루터가 죽고 나서 그의 동료 개혁자인 멜랑톤이 루터 교회를 예정론에서 끌어냈지만, 장로교회를 수립한 요한 칼빈이나 요한 낙스는 예정론을 받아 들였다. 그 후에 감리 교회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리에 의해서 예정론이 거절되고, “한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는 가르침이 오류로서 지적되었지만, 여전히 현대 기독교 안에 이러한 가르침들이 넘실거리고 있다. 이기적이고 거듭나지 못한 인간의 본성은 이러한 오류들을 선호할 뿐만 아니라, 성경의 분명한 진리를 거절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어거스틴과 그의 후예들이 수립한 거짓 교리들이 소위 정통이라고 주장하는 교파에서도 공식적인 가르침으로 채택되고 있는 실정에 있다. 오늘날 교파가 갖는 의미는 거의 사라져 버렸다. 자신이 어떤 교파에 속해 있다는 소속감 보다는 자신이 정말 하나님의 진리를 올바로 믿고 있는지를 확인하면서 살아가야 할 때가 되었다.
예정론과 “한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는 가르침, 그리고 십자가에서 율법이 폐하여졌으므로 십계명은 더 이상 그리스도인들이 지켜야 할 도덕률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도덕률 폐기론,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일지라도 결코 죄를 이길 수 없다는 가르침이야말로 교회를 세속적이고 무능력하게 만들어 가는 장본인이다. 누가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진리를 넘어뜨리려고 하는가? 마지막 시대에는 진리 위에 굳건히 서있는 그리스도인들만이 살아남게 될 것이다. 구원에 관한 진리는 이렇게 믿어도 되고 저렇게 믿어도 되는 가르침이 아니다. 인간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진리는 오직 하나뿐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너희가 믿음 위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고린도후서 1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