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3대 청백리 중 한 분인 박수량(朴守良) 선생의 백비(白碑)는 청백리의 상징 - 조선 명종대
박수량(朴守良, 1491년 ~ 1554년)
일화
일찍이 자제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본래 초야의 출신으로 외람되게 성은을 입어 판서의 반열에까지 올랐으니, 분수에 넘치는 영광이다".
죽음에 이르러 후손들에게 "내가 죽거든 절대 시호를 청하거나, 묘비를 세우지 말라"고 유언을 남겼다.
글자를 새기지 않는 비석(碑石), 무자비(無字碑), 곧 백비(白碑)
몰자비(沒字碑)라고도 함
비석(碑石)은 비석인데, 글자가 한 글자도 없는 이상한 비석이 있다. 이런 비석을`무자비(無字碑) 또는백비(白碑)라 부른다.
`무자비'로 유명한 비석은 중국 베이징에 있는 `명 13릉'이라 부르는 유적지에 무자비가 있다.
명나라 임금 13명이 묻혀 있는 `명13릉'에서 대표적인 유적으로 만력제의 `신공성덕비'가 있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무자비'이다.
만력제가 비석을 세워서 자신의 공덕을 기록하라고 명령했지만, 실제로 그가 한 것이라고는 나쁜 짓밖에 없어 그냥`백비'로 남겨서 `무자비'가 되었다고 한다.
이 이외에도 유명한 무자비가 바로 섬서성 함양시에 위치한 당 고종과 측천무후가 함께 묻힌 건릉의 무자비이다.
물론 여기에는 측천무후가 자신의 공덕이 커서 다 기록할 수 없기 때문에 무자비를 세우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기는 하지만 이 역시 반대로 생전에 잘한 업적이 전혀 없어서 비석에 글씨를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정반대의 의미에서 세워진 무자비인`백비'가 있다.
전남 장성군 황룡면 금호리 마을 뒷산에 청백리로 유명한 조선 명종 때 의정부 우찬성을 지낸 박수량의 무덤에 세워진 비석이 바로 무자비(백비)이다.
조선시대 총 217명의 청백리가 있었다고 한다.
이분들 가운데 감사원에서 선정한 조선시대 3대 청백리는 황희, 맹사성, 박수량이다.
박수량 선생은 1546년(명종 1)에 동지춘추관사가 되어 중종실록, 인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했고, 형조판서와 우참찬, 좌참찬의 벼슬을 거친 분이다. 효성이 지극했으며, 40여 년의 관리생활에서도 집을 마련하지 못할 정도로 청렴결백하여 청백리(淸白吏)에 뽑혔던 것이다.
선생이 6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 전“
내가 죽거든 시호도 정하지 말고, 묘비도 세우지 말라.”
는 유언을 했으나,
명종은 그의 죽음 소식에
“수량의 청백한 이름은 이미 세상에 알려진지 오래다.”라고 하고 가정 형편이 어려워 시신을 운구할 여력도 없다는 소식을 듣고 관인들로 호송하도록 지시하고, 장례비용도 국가에서 지급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리고 서해 암석을 골라 비석을 하사하고 그 비에는 한 글자도 쓰지 못하게 하고, 다만 그 맑은 덕을 표시하기 위해 이름을`백비'라고 부르게 하였다고 한다.
박수량 선생의 청렴한 뜻을 이어받기 위해 이곳 장성에는 청렴연수원이 있고, 해마다 수많은 공직자가 이곳에서 선생의 높고 맑은 덕을 배우기 위해 연수를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