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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대교
규모 : 길 이 : 484m, 폭 : 11.7m
소재지 : 진도군 군내면 녹진과 문내면 학동 사이
진도군 군내면 녹진과 해남군 문내면 학동 사이에 놓여진 길이 484m, 폭 11.7m의 사장교로 1984년 10월 18일 준공되어 관광 명소로 각광받고 있으며, 2005년 12월 15일 제 2진도대교가 개통되고 특히 낙조와 야경이 아름답고 다리 아래의 울돌목 물살은 장관을 이룬다.
울돌목은 이충무공의 3대 해전중의 하나인 명량대첩지로 잘 알려진 서해의 길목으로 해남과 진도간의 좁은 해협을 이루며 바다의 폭은 한강 너비 정도의 294m 내외이다. 물길은 동양 최대의 시속을 지닌 11노트의 조수가 흐르며 젊은 사나이가 소리를 지르는 것처럼 물소리가 크며, 거품이 일고 물이 용솟음쳐 배가 거스르기 힘든 곳이다.
바다라기 보다는 홍수진 강물로 보이며 물길이 소용돌이 쳤다가 솟아오르면서 세차게 흘러 내려 그 소리가 해협을 뒤흔든다. 이는 해협의 폭이 좁은데다가 해구가 깊은 절벽을 이루고 있어 흐르는 물살이 이에 부딪쳤다가 솟아오르기 때문이다. 1984년 진도대교의 개통으로 인해 한반도의 최남단 지역이 된 진도는 연간 외국인을 포함하여 약 260만여명이 찾는 국제적 관광 명소가 되었다.
아름다운 경관과 수 많은 특산물 문화예술이 살아 숨쉬는 고장 진도로 오는 첫 번째 관문이다.
운림산방
규모 : 경내 일원
소재지 : 진도군 의신면 사천리 64
운림산방은 첨찰산을 깃봉으로 수 많은 봉우리가 어우러져 있는 깊은 산골에 아침 저녁으로 연무가 운림(雲林)을 이루었을 것이고, '연화부'를 지었던 소치의 사상으로도 운림(雲林)이라는 당호가 걸 맞았을 것이다.
전통남화의 성지라 할 수 있는 운림산방은 조선조 남화의 대가인 소치(小痴) 허유(維)가 말년에 거처하던 화실의 당호로 일명 '운림각'이라고 한다. 소치는 스승인 추사 김정희가 호를 붙여준 것이며 젊었을때는 련(鍊)이라 했고 자는 마힐(痲詰)이다. 운림산방, 쌍계사, 상록수림이 한데 어우러진 이곳을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으며, 운림산방에서 약 150m를 오르면 1995년 8월 15일에 세워진 진도아리랑비가 아담하게 서있다.
소치는 1808년 진도읍 쌍정리에서 허임의 5남매중 장남으로 태어나 1893년 8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소치는 어려서 부터 그림에 재주가 있어 28세 때부터 두륜산방(현, 해남 대흥사)의 초의대사(草衣大師 : 張意恂) 밑에서 공제 윤두서의 화첩을 보면서 그림을 익히기 시작하여 33세때 초의선사의 소개로 추사 김정희 밑에서 본격적인 서화수업을 하게된다. 비록 낙도에서 태어났으나 천부적인 재질과 강한 의지로 시(詩), 서(書), 화(畵)에 능하여 40세 되던 1847년 7월 낙선제에서 헌종을 뵐 수가 있었고 헌종이 쓰는 벼루에 먹을 찍어 그림을 그렸는가 하면 흥선대원군, 권돈인, 민영익, 정학연 등을 비롯하여 권문세가들과 어울리면서 시를 짓고 글을 쓰며 그림을 그렸다. 1856년 추사가 세상을 떠나자 소치는 고향으로 돌아와 자연경관이 아름다운 첨찰산 아래 쌍계사 남쪽에 자리를 잡아 집을 짓고 화실을 만들어 여생을 보냈다.
운림산방 앞에 있는 연못은 한면이 35m 가량되며, 그 중심에는 자연석으로 쌓아 만든 둥근 섬이 있고 여기에는 소치가 심었다는 백일홍 한 그루가 있다. 소치가 서화에 뛰어나 민영익은 '묵신(墨神)'이라 했으며 정문조는 여기에 시를 더하여 삼절(三絶)이라 하였고, 김정희는 중국 원나라 4대화가의 한 사람인 황공망을 '대치(大痴)'라 했는데 그와 견줄만 하다고 소치(小痴)라 했다고 한다.
담당부서 문화관광과 관광안내 ☎ 061-544-0151 최종수정일 : 2009.08.14
소전 미술관
진도군 진도읍 성내리 진도군청사 옆에 위치한 소전 미술관은 5억원의 사업비를 투자하여 2003년 4월부터 내부개조공사를 실시해 방습시설등을 갖춘 4개의 전시실과 영상관, 사무실을 갖추고 2003년 5월 31일 소전선생 탄신 100주년 기념에 맞추어 소전 미술관을 개관하였다.
추사 김정희 이래 서예대가인 소전 손재형 선생의 작품과 그를 위해 작업된 국내 거장들의 작품이 전시되어 남도문화의 새로운 자랑거리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
소전미술관에 전시된 작품들은 소전선생의 유족들이 소장하고 있던 부친의 평생역작과 소전 생전에 그를 위해 국내 거장들이 심혈을 기울인 그림들을 진도군에 기증한 것으로 논산 이은상시비문 등 소전 손재형 선생의 주옥 같은 작품과 소장 그림 300여점을 교대로 전시하고 있다. 제1전시실에는 선생의 청년시절 작품이, 2전시실에는 문인화, 3전시실에는 장년시설등의 작품, 4전시실에는 양지니, 서희환, 박행보 등 제자들의 작품과 의제 허백련선생등 거장들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위 치 : 전남 진도군 진도읍 성내리 63-1
연 락 처 : 061-544-3401, 540-3540
관람시간
3월부터 10월까지 : 09:00~18:00
2월부터 11월까지 : 09:00~17:00
관람요금
어린이(개인 500, 단체 300)f
청소년 및 군경(개인 1,000, 단체 700)
어른(개인1.500, 단체1,000)
휴 관 일 : 매주 월요일, 기타 군수가 지정한 날
오시는 길
소전 선생 연보
연 대 연 보
1903 음 4월 28일 전남 진도군 진도읍 교동리 출생
1914(12세) 진도보통학교 입학
1918(16세) 진도보통학교 졸업
1920(18세) 양정의숙(養正義塾) 입학
1924(22세) 제3회 조선미술전람회 입선 - 隸書 「顔氏家訓」
1925(23세) 제4회 조선미술전람회 입선 - 楷書 「樂志論」
양정고등보통학교 졸업
1926(24세) 제4회 조선미술전람회 입선 - 篆書 「唐詩」
1927(25세) 제6회 조선미술전람회 입선 - 隸書 「山居幽趣」, 楷書 「嗟爾流俗」
1928(26세) 제7회 조선미술전람회 입선 - 楷書 「雪中晏起」, 隸書 「愛吾志盧淸明」
1929(27세) 제8회 조선미술전람회 입선 - 「五體書屛」
1월 19일 홍영식의 3녀 태희(台喜)여사와 결혼
1930(28세) 제9회 조선미술전람회 입선 - 隸書 「和柳揮」특선 및 「集句」
11월 제10회 조선서획협회전에서 특선, 수석상 수상
1931(29세)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草書 「般若心經」, 「十二曲屛」특선 및 草書 「格言」입선
1932(30세) 제1회 조선서도전에서 특선
1933(31세) 제2회 조선서도전 심사위원
1934(32세) 조선서획협회 이사 및 협회전 심사위원
1943(41세) 경성공립제2고등보통학교(현 경복고등학교) 교사
1944(42세) 제2차세계대전중 경성제대 교수 등총련 박사가 가지고
간 원당(院堂) 세한도(歲寒圖)를 도일하여 찾아오다(현 국보 제180호)
1945(43세) 조선서획동연회 초대회장, 조선서획협회전 심사위원장
1947(45세) 재단법인 진도중학교 설립 이사장에 취임
서울특별시 예술위원회 부위원장,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강사
1949(47세)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국전) 심사위원
1951(49세) 진해 이충무공 동상 명문(銘文) 한글 예서체로 쓰심.
1953(51세) 제2회 대한민국미술전 심사위원, 서울특별시 문화상 수상
1954(52세) 제3회 대한민국미술전 심사위원, 篆書 「애착춘산병」출품,
초대 예술원 추천위원(1954~1960), 사육신 묘 비문 육체(六體)로 쓰심
(국ㆍ한문 혼용)
1955(53세) 제4회 대한민국미술전 심사위원, 「磨鐵杵」출품
문교부 교원자격 고시위원, 국보 해외전시 추진위원
1956(54세) 제5회 대한민국미술전 심사위원, 문인화 「임지여묵」출품
이충무공 벽파진 전첩비문을 전예체로 쓰심(국ㆍ한문 혼용)
1957(55세) 제6회 대한민국미술전 서예분과위원장, 行書 「곡병일대」출품
1958(56세) 제7회 대한민국미술전 심사위원, 제4대 민의원 당선
1959(57세) 제8회 대한민국미술전 심사위원, 草書 「대연」출품, 의암 손병희 선생 비문 쓰심.
1960(58세) 제9회 대한민국미술전 서예분과위원장, 저서 「상심락사」,草書「人言」출품
제2대 예술원 추천회원(1960~1966)
1961(59세) 제10회 대한민국미술전 고문, 篆書 「팔마유풍」출품
대한민국예술원상 작품상 수상, 안중근의사 숭모비문 쓰심.
1962(60세) 제11회 대한민국미술전 고문, 「오체십곡병」출품, 한국미술협회 이사
수덕사 일주문 현판 쓰심.
1963(61세) 제12회 대한민국미술전 고문
1964(62세) 제13회 대한민국미술전 서예분과위원장, 「푸른민족」출품
1965(63세) 제14회 대한민국미술전 심사위원장, 「거인행의」출품,
제4대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회장 당선, 민족문화추진위원회 위원
1966(64세) 제3대 예술원 추천회원(1966~1972), 제5대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회장 재선
사단법인 5ㆍ16민족상 종합심사위원장, 5ㆍ16민족상 이사, 예술원 부회장
1967(65세) 제16회 대한민국미술전 심사위원장, 「行書一對」출품
대통령 선거대책위원회 특별고문, 홍익대학 명예교수,
수도여자사범대학 명예교수 육군사관학교 사열대의 「화랑대」쓰심.
1968(66세) 제17회 대한민국미술전 운영위원회 부위원장, 「草書對聯」출품
11월 21일 대한민국 국민훈장 목단장 수훈
대한민국 문예상 심사위원장, 동아대학교 주최 동아국제미술전 심사위원장
1969(67세) 제18회 대한민국미술전 자문위원, 전국 손씨 화수회 회장(8년)
1970(68세) 제19회 대한민국미술전 운영위원장, 行書 「對聯」출품
8ㆍ15 대한민국 국민훈장 무궁화장 수훈, 5ㆍ16민족상 이사겸 종합심사위원장
1971(69세) 제20회 대한민국미술전 운영위원장, 篆書 「對聯」출품
제8대 국회의원 당선
1972(70세) 제21회 대한민국미술전 운영위원장, 隸書 「傳家有道」출품
국립현대미술관 운영위원회 부위원장, 제4대 예술원 추천회원(1972~1978)
1973(71세) 제22회 대한민국미술전 운영위원장, 隸書 「對聯」출품
1974(72세) 제23회 대한민국미술전 운영위원장, 隸書 「筆硏精良人生一樂」출품
불국사 관음전 현판 쓰심.
1975(73세) 제24회 대한민국미술전 운영위원장
1979(77세) 대한민국예술원 종신회원, 손씨 화수회 고문
1981(79세) 6월 15일 오전 7시 30분 서울 홍제동 자택에서 영면(永眼)
쌍계사
쌍계사 대웅전의 건립 연대는 1982년 대웅전을 해체하여 보수할 때 발견된 상량문의 연대가 강희 36년, 즉 숙종 23년이란 기록이 나와 정확히 1697년에 건립된 사실을 알 수 있다.
약 1m의 높이인 자연석 기단에 주춧돌을 놓고 그 위에 원주를 세웠다. 건물은 정면 삼칸, 측면 이칸의 맞배지붕의 다포계양식이다. 중앙문은 사분합(四分閤)이며 양문은 3분합문(三分閤門)인데 양편의 문은 대살문이고 중앙문은 빗살문이다.
공포는 창방 위에 평방을 돌리고 그 위에 포작하였으며, 출목수(出目數)는 내외가 공히 삼출목(三出目)이다. 여기에서 특징있는 것은 참자 형식이 마치 석탑이나 부도의 기단부의 안성에서 보인 장식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도리의 내 외목도와 중도리 및 종도리를 설치하는데 고주를 양편에 세우고 우물 천정을 가구하였으며 대들보가 밖으로 노출되어 있다.
첨찰산 아래 자그마한 고찰, 진도 쌍계사
전남 진도 첨찰산에 가면 볼 수 있는 아름다운 고적 2곳. 바로 운림산방과 쌍계사이다. 이 중 쌍계사는 현재 진도에 있는 유일한 고찰로서, 신라 문성왕 대의 도선국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전래된다. 신라시대에 창건되었다는 것을 확실히 믿기는 어려우나, 이곳의 대웅전을 보수할 때, 상량문이 나왔는데, 그 연대가 “강희삼십육년정축(康熙三十六年丁丑)”이라 되어 있어서 청나라 강희제 36년, 즉 숙종 23년(1697년)에 건축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이를 보고 판단한다면 적어도 조선시대부터 이 쌍계사가 진도에 있었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사실 첨찰산 아래에는 또 다른 아름다운 곳이 한 곳 있다. 바로 의신면의 상록수림으로서 현재 천연기념물 107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상록수림은 쌍계사 옆을 흐르는 개천의 양쪽을 덮고 있는데, 상록수만 있는 게 아니라 낙엽성 넓은 잎나무들도 섞여 있다고 한다. 그러나 시간이 없어서 기자가 따로 그곳을 방문할 수 없었던 게 아쉬움이 남는다.
▲ 진도 쌍계사의 일주문. 주차장에서 운림산방으로 가는 길과 갈라져 있다. 이곳을 넘어가면 쌍계사나 상록수림으로 가게 된다.
주차장에서 운림산방으로 갈라지는 곳에 쌍계사의 일주문이 있다. 첨찰산쌍계사(尖察山雙溪寺)라는 편액이 걸린 일주문은 다섯 개의 다포가 있으며, 최근에 조성된 것이다.
▲ 진도 쌍계사의 해탈문. 일반적으로 해탈문은 금강역사가 자리잡고 있으나, 기자가 갔을 땐 속이 텅텅 비어 있었다.
일주문을 지나 걸어나가면 나무들 사이로 길이 있고, 이 길은 쌍계사와 상록수림으로 이어진다. 쌍계사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반기는 건 해탈문이다. 해탈문도 일주문에 적힌 대로 첨찰산쌍계사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데, 1979년에 건립한 것이라고 한다. 기자가 갔을 땐 해탈문 속에 아무것도 없었다. 일반적으론 해탈문에 금강역사, 즉 나라연금강과 밀적금강이 있고, 그 옆에 또 보현보살과 문수보살이 있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는데, 이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맞배지붕으로 풍판을 달고 있다.
이 쌍계사의 전체적인 가람 배치는 경사진 면을 3단으로 닦아서 거기에 건물이 들어선 모습을 취하고 있다. 첫 번째 단에는 해탈문이 있으며, 마지막 단에는 대웅전과 명부전, 그리고 원통전이 있다. 중간에는 범종각과 우화루(雨花樓)가 자리 잡고 있는데, 우화루의 아래층은 전통찻집으로 쓰고 있다.
▲ 진도 쌍계사의 3층석탑. 약간 조잡하며 조성연대도 얼마 되지 않은 1944년도의 석탑이다. 기단부가 살짝 기울어 있어 전체적으로 기운 모습을 보인다.
우화루 뒤에는 자그마한 석탑이 있다. 일반적으로 사찰에서 볼 수 있는 석탑과는 거리가 있는데, 기단부는 둥그스름한 원기둥 모양으로 명문이 적혀 있으며 살짝 기울어졌다. 그리고 그 위에는 옥개받침과 탑신부가 합쳐진 형태로 3단으로 쌓여 있다. 사실 미학적으론 그다지 뛰어난 것도 아니며, 새겨진 명문을 보면 불기 2971년에 쌓았다고 하는데, 이는 서기 1944년으로 조성된 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
▲ 진도 쌍계사의 대웅전. 특이하게도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는 이 대웅전은 조선숙종 23년(1967년)에 지어진 것이다.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21호)
우화루와 석탑을 지나면 바로 대웅전이 보인다. 대웅이란, 현세불인 석가모니불의 존칭 중 하나이며, 큰 장부라는 뜻이라고 하며, 그래서 석가모니불을 모신 금당을 대웅전이라고 한다고 한다. 쌍계사 대웅전에는 목조삼존불좌상, 즉 석가모니불과 문수보살, 보현보살이 모셔져 있는데, 17세기 후반의 불상으로 보이며,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21호로 지정되어 있다.
쌍계사의 대웅전은 특이하게도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다. 일반적인 사찰은 대웅전의 지붕이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는 점에서 비교하면 흥미롭다. 해탈문처럼 풍판이 달려 있는데, 이 쌍계사의 건물 다수는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해탈문이야 당연히 그렇다고 하더라도, 대웅전의 격을 생각해서인지 명부전과 원통전도 맞배지붕으로 처리해 놓았다.
대웅전의 지붕을 바라보면 희한하게도 가운데 부분만 예전의 기와를 쓰고 있는데, 지붕을 보수하면서 가운데만 남겨 놓고 다른 부분을 갈아서 그렇지 않을까란 생각이 든다. 각 끝에 있는 기둥의 위쪽엔 용이 몸을 꼬고 자리 잡고 있는데, 용이 가냘퍼서 도리어 힘들어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용들이 자리잡고 있기에 300년 동안 대웅전이 예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게 아닐까?
▲ 진도 쌍계사의 대웅전 단청. 다포는 후기양식이며, 그 멋스러움을 단청으로 아름답게 칠해주어 조화를 이루고 있다.
대웅전의 공포는 다포로서 후기양식을 대변해 주고 있다. 활처럼 휘어지며 하늘로 가느다랗게 손짓하는 끝부분이 연이어져 있는 모습과, 그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는 단청의 모습은 단순히 아름답다는 생각을 넘어 위압감을 주고 있다.
▲ 진도 쌍계사의 원통전. 풍판이 없으며 최근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속에는 관음보살이 모셔져 있다.
원통전은 대웅전 옆에 있다. 풍판이 없으며, 약간의 배흘림을 두고 있다. 속에는 관음보살이 인자한 미소를 띠고 앉아있다. 이 원통전은 조성된 지 오래되 보이지 않는 건물이다.
▲ 진도 쌍계사의 반가사유상. 흰 돌로 되어 있으며 이끼가 슬어 초록빛을 띤다. 신비로운 느낌을 주는 관음보살이다.
원통전과 대웅전 뒤쪽엔 반가사유상이 있다. 사실 보살이라고 생각되기보다 성모마리아상과 비슷한 느낌을 주는 이 보살상은 흰 돌로 조각되어 있고, 시무외인을 하고 있으며, 오른쪽 발아래에 연화대좌가 있다. 보관에 화불이 있는 걸 보아 관음보살로 보이며, 이끼가 약간 슬어서인지 초록빛을 띠고 있다. 주위의 초록 풍경과 어우러져 약간의 신비로움 느낌마저도 주는데, 상현좌 아래의 돌 모양의 대좌가 그 아래에 놓인 바위와도 잘 어울린다.
▲ 진도 쌍계사의 명부전. 편액엔 시왕전이라 쓰여있다. 이 속에 있는 조각상들은 17세기의 작품으로서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22호로 지정되었다.
명부전은 시왕전이란 편액을 달고 있다. 명부(冥府)란 쉽게 말해서 지옥이다. 불교에서의 지옥은 총 128개로 되어 있으며 이를 다스리는 게 시왕인데, 이 명부전에 있는 10명의 대왕들이 바로 시왕(十王)이다. 이 중 5번째 왕이 염라대왕이며, 명부전에서 책을 쓰고 있는 대왕이 바로 그이다. 그러나 사실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염라대왕보다, 사실상 명부전의 주인공은 지장보살이다. 지옥에 떨어진 중생을 구제하기 전까진 부처가 되지 않겠다고 맹세하였다는 이 지장보살은 민머리를 하고 있는 게 특징이며, 간혹 두건을 쓰고 있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그 좌우 협시로는 무독귀왕과 도명존자가 자리 잡고 있다.
1993년경 지장삼존, 즉 지장보살과 무독귀왕, 도명존자를 수리하면서 조성기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도명존자상에서 발견된 이 조성기는 “강희오년병오(康熙午年丙午)”라 쓰여있어, 청나라 강희제 5년, 즉 조선 현종 7년(1666년)임을 알 수 있다. 즉 17세기의 조각상으로서, 그 오랜 세월을 그 모습 그대로 지키고 있다.
쌍계사는 진도에서 하나밖에 없는 고찰이다. 그러나 안타까운 점은 그러한 고찰의 면모가 제대로 살아있지 않다는 것이다. 사실 약간 거슬렸던 것은 부처가 모셔진 대웅전, 그리고 보살이 모셔진 명부전과 원통전은 모두 맞배지붕으로 검소한 모습을 보인데 반해서 승방은 그보다 격이 높은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물론 근래의 건축이 다수 팔작지붕으로 되고 기존부터 그렇게 만들어졌다면 지붕 자체를 갈아버릴 수는 없지만, 선인들이 대웅전과 명부전을 맞배지붕으로 만든 것은 검약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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