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11. 13
타이거즈 팬들의 '영원한 아기 호랑이'
경기 후반, 교체된 이동국이 경기장에 나서면 항상 무슨 일을 저질러 줄 거라는 예감이 내 안에서 날을 세운다. 지난 10여 년, 짧은 환호와 긴 실망을 번갈아 안겨주는 사이클을 길게 그려 왔음에도 그의 이름은 유별난 느낌으로 나의 시선을 긴장시킨다. 그것은 순전히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네덜란드 전, 이미 5-0으로 승부가 결정지어졌던 경기 끄트머리 몇 분간 그라운드를 밟았던 그가 새겨놓은 오랜 기억의 관성이다.
히딩크가 이끌던 오렌지 군단에 다섯 골을 허용하면서 홍명보의 평정심도 무너지고 서정원의 날쌘 다리도 마비되어가던 순간, 그리고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김병지마저 고개를 떨어뜨리던 그 순간.
그라운드에 등장한 19세 소년 스트라이커 이동국은 저승사자 같이 중원을 버티던 다비즈를 밀쳐내며 공을 보내라는 손짓을 해댔고, 그 나른해져가던 그라운드를 칼처럼 가로질러 질주해 거침없는 포연을 뿜어냈던 것이다. 아, 냉큼 TV를 꺼버리지 못하는 손가락을 원망하며 스스로에게 짜증을 부려야 했던 그 경기에서 유일하게 가슴 뜨겁게 했던 그 시간들.
그 뒤로 10년 간, 대표팀 최전방에 그보다 더 깊은 발자국을 새겨놓은 스트라이커가 몇 되지 않는다 해도, 그는 그 해에 내 가슴에 새겨놓은 그 이미지를 넘어서지 못하는 한 영원한 '게으른 천재'일 뿐이다.
2007년의 김광현을 보며 1997년의 김상진을 떠올리다
▲ 김상진 선수. / ⓒ 김상진 팬카페 '천상비애'
2007년 한국시리즈의 물길을 바꾼 4차전과 일본 야구의 콧대를 뭉개버린 코나미컵 1차전의 김광현을 보며 '김상진'이라는 이름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분명 있었으리라. 굳이 타이거즈의 팬들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김광현. 비록 작지 않은 기대와 주목을 받으며 나타나 고작 한 시즌동안 3승만을 기록하며 악플러들의 조롱감이 되고 말았지만, 그는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할 무렵 돌아와 보여준 단 두 번의 무대에서 이미 그의 깃발을 세워놓고 말았다.
그 역시 훗날 20승 투수가 된다면 '황제가 된 황태자'로 불릴 것이며, 혹시라도 다시는 그 선을 넘어서지 못한 채 밀려가는 썰물이 된다면 '비운의 황태자' 혹은 '게으른 천재'로 기억될 것이다. 바로 2007년 늦가을에 그가 세워놓은 깃발에 견주어서 말이다.
그런데 꼭 그처럼 찬란한 깃발을 팬들의 가슴 속에 깊이 꽂아놓고는 찍을 수 없는 마침표를 품고 사라져버린 소년 투수가 있었다. 그래서 결국 '황제'라거나, '비운의 천재' 같은 이름표를 붙일 겨를도 없이, 그저 '영원한 아기 호랑이'로 마음에 품고 쓰리게 떠올려야 하는 이름, 바로 '김상진'이다.
투수 풍년이었던 1995년, 그 중 가장 돋보였던 유망주
▲ 김상진 선수의 투구모습. / ⓒ 기아 타이거즈
1995년의 고교야구는 임선동, 조성민, 박찬호 등이 주름잡았던 1991년 못지않은 투수 풍년이었다. 그 해 휘문고 3학년 김선우와 충암고 3학년 박명환이 대통령배와 봉황기 MVP를 나누어가졌고, 청룡기와 황금사자기 MVP는 광주일고와 덕수상고의 2학년생들인 김병현과 김민기가 차지했다. (광주일고 3학년 서재응이 청룡기 우수투수상)
하나같이 구위와 제구력, 경기운영능력을 겸비한 '초고교급'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을 어깨 반 개 차이로 뒤따르던 것이 무등기 결승에서 경북고를 상대로 1실점 완투하며 홈런 두 개를 때려내 최우수선수가 된 광주 진흥고의 3학년 김상진이었다.
그들 대부분이 앞 다투어 (때로는 대학을 경유해) 메이저리그로 향했기에, 1996년 곧장 국내프로로 진출한 선수들 중에서는 박명환 다음으로 주목받는 것이 김상진이었다. 그리고 첫 두 해 동안, 박명환이 7승과 8승을 올렸고, 김상진이 각각 9승을 올렸다.
대단할 것까지는 없는 기록이었다. 그러나 특히 김상진의 경우 조금 무뎌졌다고는 해도 조계현을 필두로 이강철, 문희수, 김정수, 이대진으로 이어지는 '별'들이 빼곡히 채우고 있던 선발진에 비집고 들어가 만든 진땀나는 기록이었다.
아직 완전히 만들어지지 않은 고졸신인의 몸으로 시속 140km대 중반의 구속에다가 공 끝이 좋았던 직구를 던졌던, 그리고 슬라이더와 커브를 구사할 줄 알면서 제구력도 안정됐던 투수. 그래서 첫 두 해 동안 평균 130이닝 이상을 던지며 평균자책 3점대로 막아낸 신인. 그는 누구든 그 십 년 뒤의 미래를 궁금하게 하는 유망주였다.
1997년 한국시리즈의 영웅 된 '아기 호랑이'
입단 2년차에 맞이했던 1997년 한국시리즈는 짧고도 강렬했던 김상진 신화의 불꽃이었다. 그 해 타이거즈는 1996년에 이어 2년 연속으로 정규리그 1위에 오르며 투타의 상징적 존재인 선동열과 김성한이 없이는 강팀일 수 없을 것이라는 사람들의 서투른 생각을 일축해버렸다.
그러나 지난해(1996년)의 16승 투수 조계현이 8승으로 반 토막 난데다가 30대 중반에 들어선 이강철, 김정수의 가을 페이스가 예년만 못했던 마운드는 LG 트윈스와의 한국시리즈를 앞둔 타이거즈의 고민이었다.
1차전은 '에이스 오브 에이스' 이대진의 6이닝 1실점 역투와 초보마무리 임창용의 3이닝 1안타 무실점 계투로 6대 1 승리. 그러나 2차전 선발로 내보낼 만 한 투수가 없었다. '9년 연속 10승대 투수' 이강철의 구위가 신통치 않았고, '가을까치' 김정수도 불안했다.
고민 끝에 김응용 감독이 집어든 카드는 고졸 2년차 신인 김상진. 비록 후반기 페이스가 괜찮았지만, 한국시리즈라는 큰 무대에서 그를 2선발로 기용한 '과감한 결단'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러나 사실은 결단의 당사자 김응용 감독 역시 불안감을 채 씻어내지 못한 채 일단 내밀어본 카드에 불과했다.
3회 초, 1사 이후에 주자를 내보내자 감독은 즉시 김상진을 불러들였다. 아직 실점은 없었지만, 위험하다는 ‘감’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보다 구위는 떨어지지만 안정적이었던 강태원을 투입했다. 그리고 4회 초에 먼저 한 점을 얻어내자 곧장 노련한 이강철과 김정수를 투입해 '굳히기'를 시도했다. 그러나 그것은 패착이었다. LG 트윈스는 이강철과 김정수를 상대로 4회와 5회, 연속으로 타자 일순하며 5점씩을 뽑아냈다. 10대 1.
그런 점에서 그 해 한국시리즈의 물길을 결정한 것은 뒷방 늙은이 취급을 받던 조계현과 계투요원 강태원이었다. 1승 1패를 나눈 채 마주한 3차 결전에서 선발로 나선 조계현은 4.2이닝을 1실점으로 버텼고, 강태원은 조계현이 남겨놓은 5회 2사 1, 2루 상황을 해결한 데 이어 8회까지 8타자를 1안타로 막아내며 이종범의 연타석 홈런으로 얻은 결승점을 지켜내 자신의 한국시리즈 첫 승을 기록했다. 2승 1패.
4차전을 다시 에이스 이대진이 7이닝 1실점으로 막아내면서 타이거즈는 3승 1패의 고지에 올라섰다. 이제 마지막 고비를 넘어 최종 목적지에 깃발을 꽂는 일이 남아있었다. 그러나 단 한 명의 에이스에 의존하는 팀들의 한국시리즈가 항상 그렇듯, 5차전 선발은 다시 고민거리였다.
▲ 1997년 우승 확정 순간 1997년 한국시리즈 5차전에서 완투승을 거두며 우승을 확정지은 순간 환호하고 있는 김상진 선수. / ⓒ 한국야구위원회
결국 5차전 선발 마운드에는 김상진이 섰다. 바로 닷새 전 조기강판 당했던 애송이 선발. 넉넉지 못한 계투 물량. 별 수 없는 선택이었고, 트윈스 팬들이 안도하는 순간이었다. 일단 한 숨 돌릴 차례라고 생각할 만 했다.
그리고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예상대로 김상진은 선두 유지현을 볼넷으로 출루시킨 데 이어 도루까지 허용하며 흔들렸고, 서용빈에게 적시타를 맞으며 선취점을 허용하고 말았다. 트윈스 팬들은 다시 2차전을 떠올렸다. 곧, 줄줄이 투수가 교체되어 나올 것이고, 트윈스의 방망이는 춤을 추며 다시 몇 바퀴 타자일순을 하리라.
그러나 그것이 끝이었다. 이종범과 이호성의 그림 같은 수비에 힘을 얻은 김상진은 빠르게 안정을 찾아갔고, 3회에는 최훈재의 적시타로 경기를 뒤집었다. 그리고 4회부터, 김상진은 경기가 끝나는 순간까지 18명의 타자를 상대하며 단 한 명도 살려 보내지 않는 완벽한 투구를 이어갔다.
그 날 김상진이 허용한 것은 두 개의 안타와 두 개의 볼 넷. 한 점. 그것뿐이었다. 마지막 우승을 결정짓던 순간마다 선동열이 포효했던 마운드에서는 두 볼 발갛게 상기된 아기 호랑이가 서 있었다.
만 20세를 막 넘어선 나이에 기록한 한국시리즈 사상 최연소 완투승이었다. 드디어 깃발은 세워졌고, 팬들은 선동열과 조계현을 대신할 이대진과 김상진이라는 두 명의 에이스, 그리고 김성한을 대신할 해결사 이종범이 이끌어갈 새로운 왕조의 한 시대를 확신했다.
1998년 '왕조의 몰락', 그리고 찾아온 위암
이듬해, 그는 121이닝을 던지며 3.87의 평균자책점으로 호투했지만 승리는 여섯 번에 그쳤다. 그리 나쁠 것도 없지만, 기대에는 많이 못 미치는 성적이었다. 사람들은 그 해 갑자기 어수선해진 팀 분위기 탓이리라 생각했지만, 그 누구도 이미 몸속에서 퍼져가던 암세포가 그 목의 신경을 자극하고 있으리라는 상상을 하지는 못했다.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도 목의 통증을 느끼며 2이닝 만에 자진강판 했던 김상진은, 그 해 가을 어느 날 저녁 식사 중에 피를 토하며 쓰러졌고, 병원에서는 말기 위암 진단을 내렸다.
왜 항상 괴롭고 슬픈 일은 한꺼번에 닥쳐오는 것일까. 그 해, 2년 연속 우승의 주인공 타이거즈는 1984년 이후 처음으로 5위로 추락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모기업 해태가 부도를 맞으며 자금난을 겪기 시작했고, 공격력의 30%라던 이종범은 일본으로, 조계현, 이순철, 정회열은 삼성으로 트레이드 되었다.
유망주 안상준 마저 LG로 현금트레이드를 해야 했을 정도로 절박한 형편이었다. 그리고 몰락한 집안, 새 희망이 되어야 할 막내가 피를 토하며 쓰러졌고, 이듬해에는 마지막 에이스 이대진 마저 어깨부상으로 쓰러졌다. 최강의 전설 '해태 왕조'는 그렇게 쓸쓸히 막을 내리고 있었다.
길어야 3개월이라던 병상에서 김상진은 8개월을 버텼다. 카메라 앞에서도 얼굴의 근육에서 힘을 풀지 못할 정도로 고통스러워하면서도 희망을 놓지 않는 그는, '해태 과자 사먹기 운동'을 벌이며 안타까운 하루하루를 지켜보던 타이거즈 팬들의 촛불이었다.
이길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상대와의, 포기할 수 없는 마지막 싸움. 그러나 1999년 6월 10일 오후 3시 55분. 강남 성모병원은 22세 청년 김상진의 사망시간을 기록했다. 유언을 남길 틈도 없었던 절박한 싸움의 끝이었다.
어깨 수술을 위해 미국행 비행기를 타느라 마지막 순간을 함께하지 못했던 진흥고 선배 이대진은 이듬해 유니폼에서 7년 동안 달아 왔던 26번을 떼고 11번, 김상진이 달았던 숫자로 고쳐 달았다. 허무하게 떠나보낸 김상진을 등에 지고 기필코 재기하리라, 그래서 다시 한 번 짜릿한 한국시리즈 우승의 순간을 선물하리라는 각오였다.
그러나 2000년 8승으로 재기했지만 다시 재발한 부상 탓에 2001년과 2002년, 두 해를 통재로 흘려보내고 돌아온 2003년에도 단 1승에 그치자 이대진은 김상진의 11번을 스스로 떼어냈다.
"상진이에게 더 이상 누를 끼칠 수는 없다"
▲ 김상진 선수를 추모하는 대형 펼침막. / ⓒ 김상진 팬클럽 '천상비애'
타이거즈 팬의 마음을 울렁이게 하는 그 이름 '김상진'
마지막 우승 후 10년, 돌아온 이종범은 은퇴설과 싸우고 있으며 7승으로 부활한 이대진은 보다 확실한 재기를 위해 또다시 칼을 갈고 있다. 타이거즈는 '해태'에서 '기아'로 변신했지만, 아직 전설의 호랑이 군단으로 깨어날 조짐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도전은 계속되고 있지만, 그들이 김상진을 떠올리며 환하게 웃을 수 있는 날은 아직 오지 않았다. 이따금 경기장 관중석에 걸리는 김상진의 얼굴이 요상하게 타이거즈 팬들의 마음을 울렁이게 하는 이유다.
단 3년을 머물다 떠난, 그래서 많은 것을 남기지 못하고 떠난 선수를 추억하는 것은 허탈한 일이다. 업적과 기록 대신, 그가 남긴 빈자리와 그가 가졌어야 하는 영광들을 허공 속으로만 곱씹어야 하기 때문이다.
찬란했던 타이거즈 왕조의 전설 맨 마지막 대목에 이름을 묻은 '아기 호랑이' 김상진. 다시 한 번 그 전설이 부활할 때에야 씻김이 될 한의 단편. 이대진과 이종범이 떠나기 전에, 그의 이름 위로 축포가 오를 수 있을까?
김은식(punctum)
오마이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