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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텍스트로서의 소설 : 인간의 인간에 의한
1) 이태원(李台元)의 ⟪객사(客舍)⟫론
(1) 탈(脫) 경성의식
“예언자는 자기 고향에서 존경을 받지 못한다.”(요한 4:43)
그런 이유로 대구의 진보적 작가 이태원은 반세기가 지난 지금에도 조명을 받지 못
한 것인가. 이 글은 이러한 명제에서 출발한다.
작가 이태원(李台元,1942-2009)은 그의 연대기로 보아 등굣길이 비슷했던 봉덕동과
삼덕동 또는 반월당 어느 길에서 마주쳤을 법도 한 동시대의 작가다. 작가가 대
구 북구 읍내동 교동마을에 살았으나 불가피하게 고향을 떠나 구로공단을 비롯하
여 전국을 떠돌며 글을 썼다는 사실은 어느 모로나 고독한 입지적 인물이다. 더구
나 장편 ⟪객사⟫(1970)는 동아일보 창간 50주년 기념 공모 당선작으로 TV 삼사에
서 드라마로 방영한터에 반세기가 지난 시점에서 ⟪객사⟫를 논의하게 된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대구 북구 이태원로를 찾는 많은 사람들과 한 번도 ⟪객사⟫를 본격적
으로 논의하지 않았다는 사이에는 무슨 필연성이 깔려 있는가. 이태원 문학의 소외는
자본주의적 부익부 빈익빈의 한 현상 또는 이념적 허명에 가려진 한국문단의 한 단면
인가.
소설가 이태원은 그가 대구출신이라 것 그러나 고향에서는 살 수 없어 고향을 떠남
으로써 작가가 되고 ⟪객사⟫를 안고 귀향한 작가다. 아무리 팔을 벌려도 인연이 없
으면 닿을 수 없는 것이 존재의 ‘관계’인데 고향은 그렇지 않다. 고향은 생명의 모태
문학의 자궁인 어머니의 이미지다. 고향의 의미는 역설적이게도 떠남으로써 다시 보
이는 시⸱공이다. 그것은 모종의 운명적인 신비성 또는 저주의 땅이기도 하다. 하여 인
간은 ‘유랑적 존재임’을 부인하지 못한다. 이태원 작가가 고향을 떠나 서울,경주,단양,
대전 등지를 방랑하고 구로공단에서 노동을 하던 1970년대 전후는 산업화시대로 문
학사적으로는 민족문학이 재론되던 시기다. 작가에게 이향 40년은 늘 ‘떠남’에 대한
부채의식이었고 진정한 귀향은 서사적 탈 경성의식에 있었다. 그것은 식민지시대의
담론이 주로 경성과 식민지 엘리트 계층을 중심으로 조명된 것의 의식적인 반발일 수
있다.
(2) 모순적 담론과 역사의식
역사 ‘흔적’으로서의
루카치의 말을 빌면 역사란 과거와의 만남이며 과거인과의 대화다. 그런 점에서 대성전과 명륜당을 포함한 칠곡읍의 ‘향교’는 과거와 현재의 접점에 놓이게 된다. 이른바 수직선과 수평선상의 한 점이다. 점으로서의 향교는 그러나 고향을 떠났던 작가의 기억의 현장이고 어린 시절로 돌아갈 수 있는 유의미한 공간이다. 거기에는 식민지시대의 아픈 역사도 포함한다. 한국의 근대화는 민족과 식민지라는 두 개념이 충돌하는 현장이고 따라서 이 시대의 형이상학은 이항 대립적(二項對立的) 담론에 의해 그 모순적인 실체를 탐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작가의 인식이다. 그것은 역사를 비트는 것이 아니라 독자로 하여금 역사의 모순을 읽게 하려는 작가의 의도다. 그것은 현재를 구성하고 지배하고 있는 ‘현전적 존재’를 이해하기 위한 식민지시대의 문명론이다. 식민지지배기에 조선인들은 그 야만적인 시대를 어떻게 경험하고 극복하고 동화했는가를 탐구해보자는 것이다. 담론은 일정한 결론을 내리기 위한 노력은 아니다. 식민지시대의 담론은 최종적인 해석을 하는 한 또 다른 모순에 빠진다는 것을 경험한 터에 텍스트로서 ⟪객사⟫의 역사는 전면에 나서지 않고 하나의 연대기적 ‘흔적’으로서 나타나거나 역사의 변죽만 울리는 형식이 된다. 식민지 역사를 지배와 피지배의 도그마로 해석하기보다 어떻게 극복하느냐 또는 양자 간의 상호작용을 생각할 수 있다. 그 어떤 것도 최종적 해석이 될 수 없다면 ⟪객사⟫의 인물들을 단순한 피해자로만 볼 것인가.
소설의 연대기는 동학운동,토지조합,지주회,금융조합,기유년의 보통학교설립(1909년), 동양척식주식회사, 무오년에서 기미년 만세 사건이 있었다는 흔적 등이다. 흔적으로서의 역사는 동학의 인내천 또는 사인여천(事人如天)의 사상이 소설의 배경으로 깔려 있음이 발견된다. 대구의 경상감영에서 사형된 동학의 교주 수운 최제우는 몰락한 경주인이고 소설의 최봉익 역시 경주인으로 최제우의 변신이다. 따라서 ⟪객사⟫의 판돌과 벽순의 가족들은 개벽(開闢)에 의한 구세제민의 시대를 기대하는 것이다. 동학운동은 일차적으로 울진,대구,경주,울산 등 경상도 지방을 중심으로 전파되고 고향 경북 칠곡은 그 범주의 중심에 놓인다.
이항 대립적 담론
소설 ⟪객사⟫에는 두 개의 민족정신이 만난다. 대성전이 있는 향교와 아마데라스를 호출하는 일본의 신사다. 향교와 신사는 정신적인 영역보다 형식상의 민족신 숭배에 불과하지만 조선과 일본은 그 형식을 두고 치열한 투쟁을 벌인다. 종족주의는 배타적인 민족주의이고 거기에 개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제국주의와 파시즘의 역사가 판치는 한 이데올로기의 모순은 이항 대립적이다. 향교를 지켜야 하는 민족적인 구세력과 식민지 땅에 그들의 신사를 지어야하는 제국주의 세력 간의 대립을 위시하여 양반과 서민, 지주와 소작인, 향교와 객사, 향교와 신사, 서당과 보통학교 등 전통과 근대 의식적 양상으로 대립된다. 대립적 양상에는 작가의 이향과 귀향 또는 떠나야하는 것과 떠날 수 없는 내면적 갈등이 포함된다. 현실로서는 고향을 떠났지만 빗새 같은 방랑인으로서는 고향은 떠날 수 없는 의식적 공간이 된다.
⟪객사⟫에서 양반과 천민은 동일한 민족이 아니라 주인과 노예의 관계로 차별된
다. 판돌의 가족은 향교와 신사에 바쳐진 희생양일 뿐이다. 그렇다면 양반은 고귀하고
서민은 비천한 것인가. 스탕달의 지적처럼 욕망은 그 자신의 내부에서부터 나오는 자
질이고 욕망이 모방의 허영으로 빠질 경우 귀족계급이 가장 먼저 쇠퇴한다고 했다.
양반 황보 관, 홍 진사는 고귀한 인물인가, 일제의 주구가 된 이행례, 장치운, 장사공
은 그 시대 진정한 양반인가. 일제와 타협하고 향교의 책임은 전부 판돌 일가에게 덮
씌운 처사는 그들의 욕망인가. 헤겔은 변증법에서 두려움이 없는 자는 누구나 주인
이 될 수 있고 두려워하는 자는 누구든 노예가 될 것이라고 했다. 식민주체를 자처하
는 인물들은 두려워하지 않는 판돌의 가족에 의해서 노예적 타인으로 전락할 수 있음
을 경계한다. 동학은 서학에 대한 저항적 사상인데 동학의 본거지에 일제가 신사를
짓는다는 사실에서 서사적 긴장감은 민족적인 분노가 된다.
(3) 타자의식
소설의 인물을 순전히 소설의 내부구조에서 찾으려 한 이론가는 노드롭⸱프라이(Northrop Flye)다. 그는 원형비평의 입안자로서 고대 희극과 비극에서 인물의 원형을 찾으려 하였다. 프라이의 비극적 인물유형은 신화에서 유추한 것인데 이에 근거하여 ⟪객사⟫의 인물을 양반과 천민, 농민, 버림받은 계층(outcast) 등으로 유형화한다. ⟪객사⟫는 신화적 모티브는 아니나 향교에는 대성전이 있고 일제는 신사(神社)를 세움으로써 그들의 조상을 신격화한다. 신과 신화는 없으나 신의 위패를 둘러싸고 지배와 피지배의 역학이 치열한 현장이다. 사건의 주동인물을 프로메테우스형과 욥형 등으로 접근한다.
양반녀의 지조
그리스 신화의 괴물 키메라(chimera)가 비유하는 바는 한 개체 내에 유전적으로 다른 조직이 공생하는 것이다. 생물학적으로는 가능한 유전학적 기술이나 인간의 경우 그러한 이질적 공동체가 가능한 것인가는 다른 문제다. 뼈대를 중시하는 사회에서 인위적인 결합은 자체의 분열성을 내포한다. 그러나 괴이하고 불가사의하다는 괴물의 탄생과 동거는 억압된 시대를 극복하는 불가피한 선택이란 관점에서 비극적이다.
판돌은 몰락한 양반 최봉익 가의 하인이다. 최봉익은 조부가 전직 관찰사였던 종 2품의 집안이었으나 고부 동학란에도 개입하고 팔공산을 근거지로 하여 동학의병활동을 하다가 사형을 당한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최봉익의 정체는 1864년 대구의 경상감영 관덕정에서 사형당한 최제우의 변형이다. 이에 현순 마님은 몰락한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 하인 판돌을 아이의 아버지로 지목한다.
“이 아이들은 오래전부터 자네를 애비로 알고 있었다네. 애비구경을 한 분도 못하고 자네만 봤으니........더구나 큰 아이가 철없이 그래 일러서 그러이 허물없이 대해주게, 그런데 자네 자슥들도 나를 산너머 어미로 알고 있으니 난 그렇게 대하겠네. 일족으로 행세하게나, 세상도 형편도 그러하니 그렇게 살아감세...”
“마님, 시방 뭐라 캤심니껴예?”
양반의 자식과 천민의 자식이 하나의 가족으로 출발하는 첫 발언이다. 기존의 반상의 윤리를 해체하는 벽순 마님의 발언은 살아야한다는 절박성의 다름 아니다. 동학교주 최제우가 자신의 하인을 가족으로 받아드린 사실과 양반 녀 벽순이가 하인인 판돌을 가족으로 수용하는 것은 닮은꼴이다. 그것은 계급을 뛰어넘는 인간의지로서 평등사상의 실천적 행위다. 판돌의 눈에는 반상의 개념이 실존하는 것이고 현순은 의식적으로도 그러한 개념을 떨쳐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인달은 천민인 아버지와 양반녀 어머니 사이에서 성장하면서 신사건립에 앞장서는 안 목수에게 계속 충고하여 신사를 불태우게 한다. 김벽순은 일관되게 양반의 지조문제를 계속 제기하고 황보 관을 비판하지만 황보 관은 정작 향교와 칠곡을 지켜낸 사람은 판돌과 벽순의 가족임을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천민인 판돌의 가족을 사돈으로 수용, 양가의 화해를 도모한다. 10여 년 간 갈등해온 반상의 문제였다. 인달은 ‘조선땅의 밑바닥은 아직도 유학의 도’가 있다거나 황보의 부자(父子)는 아직도 읍내의 지도자다’라는 태석의 말을 신뢰한다. 현실과 당위성의 괴리 그리고 근대화로 가는 길목은 그렇게 꼬이고 먼 모순의 길이다. 이질적인 두 존재의 화해를 가능케 하고 자신은 희생한 벽순과 인달의 존재를 프로메테우스적 유형으로 유추한다.
향교(鄕校)와 일제 신사(神社)
안 목수, 안영준은 향교 고지기(奴屬,노속) 판돌의 사위다. 안 목수는 새로 부임한 군수와 경찰서장의 읍내에 신사를 세우는데 협조하면 소랫골 ‘산림벌채권’을 주겠다는 말을 믿고 모험을 시작한다. 향교의 오동목을 손 댈 수 있는 사람은 판돌의 사위인 안 목수가 유일하기 때문이다. ‘판돌이-안 목수- 군수’의 삼각관계는 서로 물고 물리는 관계로 발전한다. 왜 신전 건립에 힘없는 안 목수가 개입하는가. 아마데라스 ⸱오미까미(天照大神) 신사를 짓는데 자금이 절대 부족하여 조선인의 노동력이 동원되어야 하고 향교림의 오동목을 다룰 수 있는 사람은 안 목수다. 칠곡읍 내 천망대, 망산 기슭 궁성더미에 신사를 짓는다. 안 목수는 한 때 처가의 반발에 나까무라 경부를 만나 ‘공사를 안 맡겠다.’고 하지만 ‘소좇매’로 능구렁이를 감아야 정신이 들겠느냐는 경부의 위협에 버티지 못한다. 안 목수는 신사준공 전날 군수와 경부 등 고위층 간부들로부터 ’소랫골 산림관리 허가문제‘를 확약 받는데, 같은 날 아내 영달은 아버지가 죽은 이유를 깨달아야한다며 신사의 본당 대들보에 목을 맨다. 놀란 안 목수는 영달의 시신을 신사에서 향교의 은행나무로 옮긴다. 읍민들이 경찰서와 헌병대로 끌려가 고문을 당하자 안 목수는 자기 집의 화재는 죽은 아내의 방화였다고 거짓 자백하여 주의의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그 간의 고통으로 해골이 된 안 목수는 아내의 혼백을 아마데라스 위패 뒤쪽에 숨겨 모든 참배자로 하여금 영달의 혼백에게 머리를 숙이게 만든다. 안 목수는 나까무라 경부와 군수에게 편지를 보낸다.
“이 안영준이가 네놈들의 농간에 그냥 물러 설 줄 알았던가? 이 안영준이가 네놈들의 앞잡이가 되어 행교와 읍내를 팔아먹을 놈으로 알았던가 천만의 말씀이다”(하:196)
안영준의 편지는 총독부와 본국 내각에까지 배달되고 군수와 경부는 졸도한다. 장사공의 신사에서의 죽음도 안영준의 소행임이 그의 편지에서 밝혀지고 마을 사람들은 풀려나지만 장모 벽순이 잡혀가 고문을 당한다. 나까무라 경부는 벽순에게 영달이가 신사가 아닌 은행나무에서 목을 맸다는 자백을 강요한다. 천망대 쪽에서 신사가 불에 탄다. 만세를 부르는 흰옷 입은 사람들, 신사가 타는 연기는 옥봉,영봉, 아시골 공동묘지를 거쳐 소랫골 일대로 퍼져나간다. 안 목수의 극적인 전환에서 획득하는 카타르시스는 ‘두려움이 없는 자만이 시대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의미다. 수운 선생이 일찌기 하늘의 신선으로부터 들었다는 ‘두려워 말고 겁내지 말라.’는 물구물공(勿懼勿恐)의 전언인가. 안 목수는 신사와 향교 사이에서 화해를 시도하고 천석꾼의 꿈을 가졌으나 모두 실패한 욥(Job)형이다. '악의 존재(Thodity)‘는 신의 옹호‘인가, 신은 왜 악을 허용하는가, 악의 존재가 신에 대한 빈정거림이라면 그것은 ’무엇이 옳은지 말하지 않은‘ 인간에 대한 신의 응징일 것이다. 안 목수는 인달에 의해 그가 조선인임을 깨닫는다.
교활한 하인과 사기꾼
알라존(alazon,사기꾼)과 에이론(eiron,교활한하인)형은 희극에 나오는 인물이다. ⟪객사⟫에서 가장 교활한 사기꾼은 홍 서방이다. 안 목수는 상당한 욕망과 신사를 태운 장본이지만 홍 서방은 끝내 비겁한 사기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는 비겁한 익살꾼이다. 그의 익살은 미주와의 추잡한 성(性) 거래에서 드러나는데 양반도 돈이 없으면 무시하는 안하무인의 여인을 능청스럽게 다루는 솜씨가 가관이다. 조피골 이행례 댁에서 기식하는 홍 서방은 조피골의 거간꾼으로 악명이 높다. 특히 조피골에 수리조합과 수리못이 들어선다는 정보를 숨기고 농민들로 하여금 지주들로부터 월 일 할의 고리채를 쓰게 하여 전 농토의 절반이 자본가의 수중으로 들어가게 하는 악역을 담당한다. 홍 서방은 이행례 산지기로 있지만 농토는 전혀 없다. 그는 노름판으로 전전하고 임신 중의 아내는 돌보지 않으면서 거간꾼으로 돈만 생기면 헐레 집 미주를 찾아간다. 홍 사방의 도색행각은 미주와의 거래에서 절정을 이루는데 중달은 그러한 홍 서방을 목격하고도 순달을 위하여 고기를 사서 순달과 같이 먹으라고 주기도 한다. 조피골 농민들의 강제철거 책임자가 홍 서방이고 그 강제 철거된 땅에 미주와 같이 장사판을 벌리다가 조피골 청년들에게 뭇매를 맞고 개천 바닥에 쓰러진다. 분노와 욕설이 난무하는 가운데 붓도랑에서 조리돌림을 당한 것이다. 사기꾼이며 교활한 하인형인 홍 서방은 초기 자본 시장의 밑바닥을 보여주는 거간꾼이다.
죽어야할 판돌과 딸 영달의 지조
고지기 판돌과 딸 영달의 죽음의 의미는 인간은 언제나 죽어야할 존재라는 것이고 그런 의미의 아담형이다. 판돌은 가족의 핏줄 문제, 가난의 문제, 안 서방의 신사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결단해야 한다는 것을 자각한다. 딸 영달은 남편 안 목수가 향교를 팔아 일본인의 신사를 건립하는 것은 반민족적인 행위이고 칠곡 읍민을 팔아먹는 전대미문의 악행이므로 남편의 잘못을 바로잡지 못한 책임이 있다고 믿는다. 판돌과 영달은 자신들이 죽음으로써 가족의 문제와 민족을 배반한 잘못을 씻을 수 있다고 판단한다. 죽어야할 충동은 서민들의 양심이다. 죽어야할 존재는 죽음의 충동을 가장 이성적인 것으로 받아드리게 된다.
(4) 자아상실과 버려진 인물들
서사시의 주인공은 영웅형 인물이고 리얼리즘 문학의 주인공은 희극적인 범속한 인물인 시대가 있었다. ⟪객사⟫의 인물은 프로타고니스트와 안타고니스트로 분류되지만 제3의 인물도 특이하다. 식민지시대의 리얼리티는 제3의 트리타고니스트들에 의해서 증언된다. 선과 악으로만 평가할 수 없는 제3의 존재다.
무녀(巫女) 신 씨와 엑스타시스
과부 무녀 신 씨는 한 번도 무당행세를 하거나 굿을 한 적은 없다. 그럼에도 자식인 태조, 태석은 어머니가 무당노릇을 못하도록 아편을 먹인다든가 류강로가 압력을 넣는다는 소문도 있다. 신 씨는 어는 날 밤 인달이와 대달이가 사다준 징과 북을 두드리며 훨훨 무당춤을 춘다. 요란한 방안에 불상과 양촛불이 켜지고 북과 징소리, 궁글채로 치는 장구 소리, 지폐가 무녀의 허리에 꽂히는 신명은 없지만 아무도 없는 방안에서 황홀에 빠진다. 신 씨의 한풀이다. 황홀한 하룻밤 망아(忘我)에 빠졌던 신 씨는 이튿날 새벽에 승천하듯이 이승을 떠난다. 식민지시대 억압된 조선인의 한풀이다.
한국의 샤머니즘은 고대사회로부터 전승된 무속이다. 그러나 고려의 불교⸱ 조선의 유교시대를 거치면서 무녀와 무격은 천민으로 격하된다. 그럼에도 무속은 유교에 억압된 여성의 신앙으로서 꾸준히 명맥을 유지해 온다. 어느 민족이나 전통적인 샤머니즘은 전승되어 오는 것이며 그것은 민족적인 정신적 자산이기도 하다. 유교 철학은 존재의 철학이면서 오히려 ‘존재의 의미를 은폐한 측면’이 있다. 전통적으로 민족은 무가와 무의에 의해 위안을 받으며 살았던 것도 사실이다. 정소성의 <산그늘>이 그 예다. 누구나 종교를 선택할 수 있고 신탁(神託)은 사람의 힘이 아닌 신의 힘이다. 그것을 인위적으로 막으려한 것은 무속을 모르는 처사다. 신 내림을 약으로 막을 수 있을까. 신 씨는 주변의 위선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었던 인물이다. 그의 징소리와 북소리 그리고 절정에 이르는 무무는 전통적인 억압의 굴레에서 벗어나려는 행동이고 현존재로부터 탈출하려는 자신의 엑스타시스(Ecstasis,忘我)적 행위다. 식민지시대 왜곡된 민족적인 리얼리티를 비판하는 의미가 있다.
헐레 댁과 미주
헐레 댁이란 당나무가 우뚝 선 당나무골의 과부 백정의 집을 말한다. 그녀는 올 해 갓 마흔 살 6년 전에 남편을 잃고 외딸 미주와 단둘이 산다. 모녀의 도색행각은 읍내 안에서도 손꼽히고 있다. 헐레 댁이 주로 찾아다니는데 남정네들은 젊은 머슴들이다. 헐레 댁은 속옷 없는 알몸으로 초당방을 찾아다니는데 누구든 사람을 가리지 않고 숫자를 가리지 않는다. 헐레 댁의 그런 버릇은 과수댁끼리 ‘밴대질(성행위)’을 시작하고부터라는데 그게 사실이거나 한 듯 그녀는 지칠 줄 모르게 남정네들 사이를 쏘다닌다. 헐레 댁의 열아홉 살 딸 미주는 헐레 댁 못지않게 지분냄새를 풍기며 비각거리로 나서서 이름께나 집안이 괜찮은 사내를 고른다. 미모인 미주는 그녀의 유혹에 걸려든 사람만도 스무 명이 넘게 단골로 놀아난다. 홍 서방이 미주를 찾아다니는 것을 목도한 사람은 중달이다. 중달은 쇠고기를 사러 갔다가 미주와 홍 서방이 말다툼하는 것을 듣게 된다.
“체 고까짓 돈, 니가 천석꾼이가 만석꾼이가? 조피골 홍가가 무신 큰 소리고.”
중달의 생각으로는 조피골에서 미주를 사러 올 사람이 없을 것인데 의외로 순달의 남편 홍 서방이 미주와 흥정을 하고 있다. 20원이면 주막에서 한 달은 먹고 살 돈인데도 미주는 조피골 홍가들은 ‘천하 걸뱅이’라고 비하한다. 미주가 홍 서방의 뺨을 때리는 소리가 들리고 홍 서방은 양반의 뺨을 때린다고 욕을 하면서 미주와 부딛친다. 홍 서방과 미주는 그렇게 속옷씨름을 하다가 주머니를 뒤져 집히는 대로 그녀 앞에 던지고 달아난다. 애정이 아니라 애욕적인 육욕성의 시대다. 헐레 댁과 미주의 행각은 근대 자본주의시대 먹고 살아야한다는 것과 신분보다 경제적 여유가 새로운 권력임을 시사한다.
너무나 인간적인
‘각시’라는 젊은 여인은 깨우치지 못한 시대의 희생양이지만 그의 착한 심성은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는다. 각시와 대달은 공히 성불구자다. 대달은 선천적인 성불구자고 각시는 전 남편에 의해 저질러진 성불구자다. 객사는 칠곡 읍에서도 가장 가난하고 힘이 없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각시는 백납병 환자의 아내로서 남편은 아내를 고의적으로 성불구자로 만든다. 대달은 핏자국이 흐르는 각시를 업고 신 씨 집으로 옮겨 정성껏 간호 한다. 각시는 대달에게 돈에 대한 상식과 계산하는 요령을 가르쳐 마침내 ‘도붓장사’를 하게한다. 가을이 되고 외상값으로 받은 것이 벼 열섬이 된다. 벽순과 가족들은 바보 대달이 각시로 하여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것이다. 대달은 이후 일본인 지주들과 경쟁하여 논 열 마지기를 계약한다. 대달은 귀골의 영리한 각시를 만나 바보노릇으로부터 해방되고 이후 벽순의 가문을 이어갈 장남으로 살 것이 기대된다. 대달과 각시는 너무나 인간적이어서 세계로부터 추방당하는 유형이다.
양반의 씨받이 성 씨
황보 관의 외아들 황보 용은 씨받이로 들어온 성 씨가 낳은 아들이다. 황보는 관기 아윤을 만난 적이 있음에도 성 씨는 17세에 황보 관의 작은댁으로 들어온다. 갑오경장 이후 적서의 차별은 없어졌다하나 양자 아닌 서출로 대를 잇는 데는 정실인 유 씨의 동의가 필요했다. 성씨는 아들로 하여금 황보와 유 씨의 가르침에 복종하도록 가르친다. 이해와 복종, 인내와 미덕, 지엄한 존경심을 잊지 말아야한다는 것이다. 성 씨는 두 분의 지시를 어기지 않는 게 아들을 위한 길임을 알고 있다. 유 씨와 성 씨 그리고 벽순 삼인은 가문의 차이로 보류되어 오던 인달과 황보 용의 혼사문제는 젊은이들에게 맡기기로 한다. 인달이가 양반 최봉익의 핏줄이라는 것과 황보가 최봉익의 은혜를 입었다는 사실은 두 가문의 연결고리가 된다. 서출로서 대를 잇는다는 불안심리로 인해 성 씨는 평생 황보가의 씨받이 여인으로 묻혀 살 것이 예상된다.
조피골 사람들
조피골은 홍 진사 등 홍 씨 문중의 세거지이지만 팔거들에 비하면 벼농사를 지을 수 없는 척박한 땅이다. 골이 넓고 깊은 저지대의 밭들로 조와 피가 대부분이어서 조피골이다. 게다가 조피골 사람들은 상황에 대한 무지로 스스로의 잘못과는 무관하게 시대에 의해 희생되는 팔마코스형이다. 조피골 사람들은 척박한 농토를 저당잡히고 고리채에 장리곡식을 얻는다. 농민들은 조피골에 수리조합과 수리못이 생긴다는 정보를 알 수 없었고 양반 홍 진사의 충언도 믿지 않는다. 조피골 사람들은 읍내 사건이 터질 때마다 헌병대와 경찰서에 불려 다닌다. 시대변화에 대한 무지가 빚은 소치다. 그러나 3⸱1운동 만세사건과 안목수집의 방화사건, 향교의 재산을 팔아먹은 판돌가의 부정, 거간꾼 홍 서방의 사기행위에 대해서는 단호한 대응을 하던 사람들이다. 다만 스스로 판단을 하지 못하고 대중심리에 이끌리는 농민들이다.
⟪객사⟫의 인물구성은 민족적인 인물군과 식민지 지배인물 또는 비민족적이거나 현실의 주변인물로 전통과 근내화가 충돌하는 인물들로 다양하지만 그들은 소외된 풍속화적 존재가 아니라 근대사회의 모순적 담론을 증언하는 인물들이다.
(5) 구교육과 신교육의 충돌
- 사또 교장의 위선
칠곡의 간이보통학교는 기유년(1909년)에 객사에서 간판을 달게 되고 설립자는 사또⸱ 에이후(齊勝永學)다. 그는 동경의 아까몬 (赤門,동경제대) 출신으로 학교설립을 한다면서 역둔토는 물론 향교부지, 실습지, 실습림 등 항교 재산을 넘본다. 사또가 세운 간이보통학교의 설립으로 황보관이 운영하는 향교와 유림이 운영하는 30여개의 서당은 유야무야한 존재가 된다. 사또는 조선이 식민지 굴레를 벗으려면 보통학교를 확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부의 유림들 장치운과 이행례 등은 이미 사또의 주장에 동조한 터이고 장사공은 순사주임으로 사또의 일을 돕고 있다. 사또의 음모는 조선에 보통학교를 세워 조선인 학생을 교육한다는 것이 아니라 향교의 재산을 빼앗아 아마데라스⸱오미까미(天祖大神)의 신사를 읍내에 세운다는 계획이다. 이미 그들은 유림회의에서 향교재산 이익금 중 4할을 보통학교 유지비로 헌납하도록 강제한 단계다. 사또는 그간 태조와 인달 중 누군가 일본 동경으로 유학을 갈 것이라고 부추겨 학교일을 맡겼으나 그것도 허위로 드러난다. 사또는 낭인이었던 경부 나까무라 기이찌(中村義一), 군수 스스끼 분치(鈴木文治)를 앞세워 향교 뒤 명당에 일본의 신사를 짓는다는 계획이 확정되자 어느 날 갑자기 학교를 떠난다. 사또는 찾아간 인달에게 ‘교육자로서 기대하기 전에 난 그것에 앞서 일본인이라는 사실을 께닫게 됐다‘고 고백한다.
“숨막히는 정세하의 지성이란 고작 수단의 가치성에 불과하다. 획일적인 절대의 군벌의 횡포 앞에 무력화된 지성과 그 변절자의 표본이다.”(상,254)
사또의 자백에도 불구하고 그가 향교의 재산을 탈취하거나 교육을 빙자한 그간의 횡포를 고려할 때 지성 운운하며 미화한 것은 식민지 조선인을 타자화한 조롱이다. 한편으로는 침략을 정당화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성한다는 제스처는 제국주의자들의 전형적 위선이다. 식민지인으로 경시되던 조선인 강 선생과 인달의 실망보다 사또의 식민지 지성론이 자칫 정당화되는 순간을 목도한다. 조선인 강 선생과 인달이 식민지인으로 충실했던 행적들이 무산되는 순간이다. 사또 교장은 야반에 읍내를 떠나고 학생수는 50명에서 25명으로 다시 10여명으로 줄어든다. 읍민과 유림들은 군청과 경찰서 행사에 비협조적이고 향교보다 못한 학교의 학생들은 비등교로 저항한다. 새로 부임한 면장이 인달에게 소학교 직원이 되어 달라거나 운영을 맡아달라고 요청하기도 한다. 인달은 동경유학을 하고 신교육을 받은 청년들에게서 한때 실망했으나 황보 용이나 태석, 윤관 등 젊은이들의 새로운 결의에 공감을 갖게 된다. 동경제대 출신이라고 떠벌린 사또의 위선은 결과적으로 조선교육을 조롱한 것이 되고 식민지교육 또한 조선 역사의 한 ‘흔적’이었음은 분명하다.
(6)) 식민지 농민과 농토
농민과 가난
주인공 판돌은 향교고지기로 일하게 됨으로써 농사를 짓지는 않는다. 농촌에서 농사를 짓지 않고 신다는 것이 얼마나 고난한 일인가를 시사한다. 영달이 16세에 소목수의 아들 안 목수에게 시집을 가면서 장리곡식 닷 섬을 얻어 혼례를 치른다. 소설에서 농민과 농사짓기는 주된 관심사는 아니지만 어쨌든 농촌은 조선 농민의 삶의 현장이다. 문제는 농민이 농사지을 토지를 소유하지 못하고 소작이나 노동자로 전전한다는 현실이다. 가족 중 소달은 금융조합의 소사로 일하고 중달만이 머슴으로 일한다. 판돌의 가족은 농사지을 땅 한 뼘도 없는 처지다. 식구들은 지주의 농사를 도와주거나 머슴살이, 일일노농으로 버티어 나간다. 농촌은 소작농이 대부분이어서 춘궁기에는 익지 않은 벼나 보리를 거둬드리는 ‘풋바심’이 유행한다. 그런 가운데 팔월 한가위를 만나 흥겨운 농악이 울린다.
오호오오 방해야아 /꼴았네에 골았네에....
큰달이 ⵝ지가 꼴았네에..../기둥같이 꼴았네에....
은행나무같이 꼴았네에....
오호오 방해야아.../부었네네 부었네에
인달이 0지가 부었네에 /읍네 비석이 녹았네에
한양 동경이 녹았네에.../인달이 0지가 녹았네에... (상:82)
남녀의 성기가 농요 속에 등장하는 것은 생산성과 건강성을 의미한다. 머슴 백만이는 장치운의 마름으로 승격한다. 마름은 소작농을 분배하고 수확과 방아 찧는 일까지 맡는 권력이 있다. 그러나 인달을 좋아한다면서 장치운의 아들 장사공이 백만이 보는 앞에서 인달을 껴안아도 한 마디 말을 하지 못한다. 인달은 그러한 백만이에게 ‘머슴은 마누라도 두면 안 되는가’, ‘인간은 평등’한 것이라고 분해한다. 가족 중 유일한 농사꾼인 중달은 농사철이 지나면 머슴살이를 계속 할 것인가 소작을 할 것인가를 걱정한다. 동양척식회사가 설립되자 총독부는 일본농민이민계획과 신사 짓는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세금을 올리게 된다. 중달의 독백처럼 소작인으로서 일 년여 간 ‘뼈아프게 설쳐봐야 기껏 남는 건 허기뿐이었다는 것이다. 벽순 가족은 14,5년간의 빚과 장리곡식에 시달리던 생활에 종지부를 찍게 된다. 중달의 새경 6섬과 판돌의 고지기 새경 12 섬이다. 머슴살이 한 해 더 하기로 작정한 중달은 늪지대에 모를 심으면 한 해 여남 섬의 벼를 기대할 수 있고 그래야 청석골 덕분이를 데리고 올 수 있다고 기대했으나 그것마저 신사문제로 좌절되고 도리어 객사로 쫓겨 가게 된다. 중달은 집안의 장남 역할을 자처하며 머슴살이를 해 왔으나 생쌀을 먹고 구토하다가 그 자리에서 죽게 된다.
조피골의 변화
콩죽으로 끼니를 때우는 판돌과 벽순은 끼니가 겁이 나고 삯일에 근심이 앞서는 것도 사실이지만 나름의 정을 나눌 수 있어 행복한 시절도 있었다. 부뚜막에 앉으면 팔거들판이 눈에 보인다. 자연으로 돌아간 판돌의 모습과 겹쳐진다.
조피골은 골이 넓고 깊다. 십 여리의 개천은 홍수가 잦아 쌀농사가 잘 되지 않고 감나무,고구마, 조와 옥수수가 주산물이다. 조와 피가 대부분이어서 조피골이라 하는 조피골은 이농민이 날로 증가하여 황폐한 마을로 변한다. 그러한 조피골에 돈바람이 불게 된다. 농사가 안 되는 땅에 현금을 대여해주고 장리곡식도 대주자 조피골은 흥청거린다. 주막집이 흥청거리고 초당방이 노름판으로 변한다. 이행례, 장치운, 일본인들에게 월 일할의 고리채로 농토의 절반이 그들 수중으로 들어간다. 조피골 골짜기에 ‘수리못’이 들어선다는 정보를 알게된 농민들은 그제야 속았다는 생각이고 옥답을 빼앗긴 조선농민의 무능하고 무식하다는 비판을 면치 못한다.
홍 진사는 조피골 사람들에게 고리채, 장리곡식을 쓰지 말라고 충고하고 거간꾼 홍 서방은 반대로 부추긴다. 200여 호 중 4할 정도가 전답을 날리게 된다. 모두가 떠나고 싶어 한다. 객사의 사람들과 신 씨, 안 목수도 그 중의 한 사람이다. 조피골 사람들은 ‘쌀밥’을 먹을 수 있다는 희망에 차 있기도 하지만 전답을 잃거나 수리못 공사로 초옥마저 강제철거 당한다. 조피골은 봉건자본과 매판자본에 의해 독점되고 토착 농민들은 소작인 내지 만주로 이산(離散)의 길을 떠난다.
바보 대달의 농지계약
조피골 상답의 땅이 똥값으로 절하된 상황에서 계약하러 간 대달이는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온다. 양복장이가 흥정을 붙이지 못하게 가로 막은 것이다. 대달은 그 동안 땅 한 뼘을 수중에 넣어보지 못한 것이 한이 된다며 ‘미치고 걸신들린 놈’처럼 농지매수의 뜻을 굽히지 않는다. 조피골 작답과 논, 내세에 개간 땅을 사러 간 대달은 계약을 하지만 내세의 일본인 과수원 주인에 의해 도둑놈으로 몰리고 세퍼드의 공격을 받는다. 악질 유끼치(福澤諭吉)는 쓰러진 대달의 지문을 찍고 가마니로 둘둘 말아 버린다. 대달은 팔거천에서 허우적거리며 외친다.
“모두가 소원이 진 논을 큰달이가 가졌데이, 얼매나 좋노,엉이?”
사흘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는 대달에 대하여 사람들은 “소나기가 퍼붓던 날 내세의 과수원 쪽에서 사나운 개소리가 요란하였고 사람의 비명 소리가 한두 번 들렸다 한다.” 는 것으로 대달의 죽음을 암시하지만 ’바보처럼‘ 살아 있을 것으로 기대되기도 한다. 농사꾼이던 중달은 죽고 논 열 마지기를 계약한 대달은 일본인 악질에 의하여 위기를 맞지만 다시 살아 농사꾼으로 살 것이 예상된다.
팔거들의 희비(喜悲)
작가의 고향에는 팔거들과 팔거천이 있다. 팔거천 물이 흔건히 흐를 때는 풍년이 들고 개천 바닥이 말라붙을 때는 흉년이 든다. 팔거들을 낭만적 시선으로 바라보는 고향 팔거들은 이렇게 서사된다.
“남녘으로 넓고 길게 트인 팔거들에는 논갈이하는 농부들의 소모는 소리가 드높게 울렸다. 물길 좋은 논은 겨우 보물을 끌어당겨 모내기 논가리를 하는데 나머지 논들은 답답한 숨을 죽인 채 그냥 엎드려 있었다. 하지를 지난 열흘간이 모내기에 가장 좋다는데 쟁기는 빛도 안 뵌 나머지 대부분의 논은 팔거들이 생긴 이래 처음으로 조를 심어야할 판이었다. 올 가을에는 꽤나 시끄럽겠다. 소작농들의 굶주림에의 아우성도 아우성이지만 몇 뙈기의 자작농들은 전답을 저당잡히기에 바쁘겠고 많은 시원찮은 집들은 농토가 빗쟁이에게 넘어가는 눈물 극이 벌어질 것이다.”(상:325)
(7) 고향, 탈식민화의 요람
이태원 작가는 ‘예언자는 자기 고향에서 존경을 받지 못한다’는 요한의 기록을 의식
이나 하듯이 소설 ⟪객사⟫를 썼다. ‘작가의 말’에서 보듯이 고향 칠곡은 지형상 한
반도의 한 점에 불과한 것이나 이탈리아 라티움처럼 역사적 공간으로 의미화하고 싶
었다. 작가의 고향은 근대화 시대 식민지 권력이 지배하는 변방의 한 공간이지만 그
들의 비천한 삶은 탈식민화(postcolonial)을 위한 저항이었음을 의미한다. 이를 위해
소설은 이항대립적인 모순을 담론으로 택한다. 식민지시대의 야만적인
현실을 저변에서 해체하고 비판하려는 서사적 구조다. 향교의 상
징적 의미는 고향이고 그것은 민족적인 에토스 정신으로 이어진다. 향교와 신사의
갈등에 동원된 인물이 판돌의 가족이고 이들은 고향을 지켜야한다는 정언적 명령
에 의한 유형적 인물이다. 키메라적 가족구성은 동학운동으로 파탄된 가족을 구하
기 위한 불가피한 결단이지만 ‘화해’의 내면에는 동학의 평등사상이 깔려 있다. 소
설의 인물을 순전히 내부구조에서 찾으려한 프라이의 신화적 인물유형을 차용한다.
내부구조의 치명성은 신앙적 자비, ‘사랑’의 화두가 소홀하다는 불가피성에 있다.
가장 인상적인 인물은 사태의 극적인 전환을 가져왔으나 변증법적인 조화에 실패
하고 그의 꿈마저 좌절되는 안 목수를 들 수 있다. 언제나 죽어야할 아담형과 알
라존과 에이론의 홍 서방, 상황에 무지하여 희생된 팔마코스형으로 조피골 사람들
도 있어 다양한 인물들이 형상화된다. 이들을 통해 식민지지배와 피지배간의 상호
작용 또는 타자화된 인물의 민낯을 만나게 된다. 구교육과 신교육의 충돌, 일본
인 사또 교장의 위선, 신사문제를 위요한 식민지농민과 그들의 가난한 삶이 제기
되고 신사가 무너짐으로써 일시적인 승리감을 획득하기도 한다. 하여 두려워하지
않는 자, 시대의 고통을 이겨내는 자가 주인공이 되는 시대는 위대한 시대임을 증
언한다. ⟪객사⟫는 판돌가족의 승리(?)로 하여 민중시대를 예고하는 것은 분명하
다. 그러나 작가의 고향은 향교의 양반과 객사의 가난한 서민들 그리고 팔거들, 조
피골 농민들을 포함한 모두가 하나의 고향인으로 관념되고 그들 각각의 존재로 하
여 거칠게나마 고향을 지킬 수 있었다는 의미다. 식민지 고향은 이미 낯선 고향으로
변했지만 ⟪객사⟫의 인물들에게는 고향을 떠나는 이향(離鄕) 자체가 하나의 패배
(敗北)가 된다. 그들은 패배를 인정하지 않기 위해 부단히 전통적인 권력, 새로운 식
민지주체들과 치열하게 싸웠던 것이다. 다시 정리하면,⟪객사⟫는 전통적인 권력과 근
대화라는 침략외세의 중간지대에서 저항하고 동화하면서 고향을 지켜온 민초들의 지
조를 다룬 이야기다. 1970년대 이태원 작가는 초기엔 한국문협에 후기에는 작가 회
의에서 활동했으나 그는 여타 작가들처럼 이데올로기에 철저했던 것도 아니다. 변방
인으로서 고향 사람들의 시대 순응과 저항이라는 양면을 통하여 인간의 내면을 해체
하고 서민의 심층에 깔린 민족적인 지조를 표면화함으로서 저항적인 민족정신을 일깨
운다. 지조는 흔히 정치적인 지조 또는 양반들의 전유물로 해석하는 경향에서 ⟪객사
⟫의 경우 지조는 천민이든 양반이든 억압의 시대 삶의 한 지독한 윤리였던 것이다.
월간 '문학공간' 2022..12월호-2023.1월호 게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