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민낯 - 냉장 고차가운 것을 향한 욕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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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jy9713
2023.09.16. 19:18조회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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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의 민낯
냉장고
차가운 것을 향한 욕망
요약 식품이나 약품 따위를 차게 하거나 부패하지 않도록 저온에서 보관하기 위한 상자 모양의 장치. 저장실과 냉각 장치로 이루어지며 얼음, 전기, 가스 따위를 이용해 냉각한다.
전기문명의 대표주자, TV와 냉장고
현대문명을 ‘전기문명’이라고도 한다. 전기의 발견과 활용을 통해 완성되어 20세기에 고도화된 문명이기 때문이다. 이 전기문명을 대표하는 두 개의 기기가 있는데 하나가 TV이고 나머지 하나가 냉장고다. TV를 통해 인류는 앉은 자리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창을 획득했고, 냉장고를 통해 선사시대 이래 처음으로 음식의 보관에 대한 걱정 없이 식품을 가질 수 있게 됐다.
냉장고, 삶에서 뗄 수 없는 필수품이 되다
메트로폴리스(metropolis)를 넘어서 메갈로폴리스(megalopolis)라는 단어가 나올 정도의 현대사회에서 초거대 도시를 운영하는 데는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다. 특히나 천만 단위의 사람들을 먹이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정교한 유통망의 확보와 일정 수준 이상의 식품위생 기준(식품위생법이나 관리 규정에 관한 기준 확보), 식품의 보관 기술이 절실하다. 대도시 내에서는 식량을 생산할 수 없기 때문이다(일본처럼 빌딩에서 벼를 재배하는 곳도 있기는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예외적인 경우다).
미국의 북동부 해안 도시 메갈로폴리스
결론은 도시 바깥에서 식량을 들여와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도로망이 잘 닦여 있어야 하고, 이를 시스템적으로 보완할 유통망의 확보, 유통망을 통해 전달된 식량을 효과적으로 저장하는 보관 시스템이 만들어진 이후에 도시는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만약 TV가 없어진다면 당장 기본적인 삶에 영향을 끼치지는 않지만 냉장고가 사라지면 상당 수준의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미 냉장고는 우리 삶에서 뗄 수 없는 필수품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얼음 냉장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 : 중국 전국시대 <예기>
냉장에 관한 기록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중국 전국시대에 쓰인 <예기(禮記)>이다. 살펴보면 “벌빙지가(伐氷之家)”라는 말을 발견할 수 있다. 이를 해석하자면 주대(周代)에 장사나 제사 때 얼음을 쓸 자격이 있는 높은 관직에 있는 벼슬아치 같은 고위층의 집을 뜻한다. 한마디로 잘나가는 집안이란 소리다. 그때 이미 특별한 계층의 사람들은 얼음을 저장해 썼다.
우리나라 얼음 창고 : 석빙고, 서빙고, 동빙고
경주 석빙고
우리의 역사를 살펴봐도 신라시대에 이미 석빙고(石氷庫)가 있었고, 조선시대에는 동빙고와 서빙고를 만들어 체계적으로 얼음을 생산 관리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관리들, 얼음이 단단하게 얼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다
빙고 관원(氷庫官員)이 와서 아뢰기를 “근자에 날씨가 따뜻하여 얼음이 단단하게 얼지 않으니, 청컨대 장빙(藏氷)의 역사(役事)를 정지하소서.”
하니, 임금이 명하여 주서(注書) 조익정을 서빙고(西氷庫)에 보내고, 병조 정랑(兵曹正郞) 박숙진을 동빙고(東氷庫)에 보내어 살펴보게 하여, 만약 얼음이 단단하게 얼지 않았으면 역사(役事)를 파(罷)하게 하였다. 조익정 등이 복명(復命)하기를 “신 등이 마땅히 밤에 얼음을 보니 얼음이 단단하였으나, 다만 대낮이 되어서 따뜻해지면 얼음이 녹을까 두렵습니다. 그러므로 ‘오전(午前)에 장빙(藏氷)하고 오후(午後)에는 역사(役事)를 정지(停止)하라’고 시켰습니다.”
하니, 또 임금이 예조(禮曹)로 하여금 대낮이 되거든 다시 이를 살펴보게 하였다.
― <조선왕조실록> 세조 13년(1467년) 11월 28일의 기록 중에서
조선시대, 왕이 직접 얼음을 챙기다
조선시대에는 왕이 그 상태를 직접 챙길 정도로 얼음은 중요한 사안이었다(그 당시 얼음은 정치적으로도 유용했다). 조선시대 왕들은 반빙(頒氷)이라 해서 정2품 이상의 관리들에게 얼음을 하사하고는 했다(이를 전직 관리들에게 확대하자는 논의가 기록으로 남아 있다).
당시 얼음은 사치품이었고 주로 왕실의 여름철 제사 때나 궁궐의 음식을 만들 때 사용됐다. 그리고 남은 것은 고위관료들에게 하사되었다. 이렇게 보면 얼음은 소수 지배계층에게만 허용된 것처럼 보이지만 민간에서도 사설 빙고를 만들어 얼음을 저장했다. 이런 얼음은 주로 생선의 냉장 보관을 위해 사용됐다.
피지배층에게 채빙 부역은 피하고 싶은 고역
그러나 대부분의 피지배계층에게 얼음은 고역을 떠올리게 했다. 보온에 대한 마땅한 대책도 없는 상황에서(오늘날처럼 방한, 방수가 가능한 의복이 있었겠는가?) 한강에 있는 얼음을 잘라 빙고로 가지고 가 저장한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때문에 민간에서는 채빙 부역을 피해 도망한 남편을 기다리는 어린 부인을 뜻하는 빙고청상(氷庫靑孀)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조선시대 석빙고가 만든 빙고청상
그도 그럴 것이 한겨울에 여름에 쓸 얼음을 미리 잘라내 저장하는 것은 너무도 힘든 일이었다. 당장 얼음을 자르는 것도 큰일이지만 이를 빙고까지 들고 가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가로 70~80센티미터, 세로 1미터, 높이 60센티미터 얼음의 무게를 생각해 보라. 장정 4명이 들고 가는 것도 버거울 무게였다).
1957년 한강채빙 모습
[출처 : e영상역사관]
들고 가도 문제인 것이 저장하는 것 또한 보통 손이 가는 것이 아니었다. 얼음을 하나 쌓을 때마다 쌀겨나 솔잎 등을 1~2센티미터 정도 두껍게 뿌려놓고 쌓아야 했다(얼음끼리 서로 붙지 않도록). 좁은 빙고 안에서 무겁고 차가운 얼음덩어리들을 차곡차곡 쌓는 일은 꽤나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이러다 보니 채빙 부역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겨울만 되면 한강 인근 민가의 장정들은 도망가기 일쑤였고, 이 장정들을 기다리는 어린 아내들은 말 그대로 청상과부가 되는 것이었다.
그리스와 로마인들, 만년설로 아이스박스를 만들다
노르웨이의 옛 아이스박스
냉장에 대한 욕망은 동양만의 것이 아니었다. 서양도 만만치 않았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인들의 냉장 방법을 보면 인간의 욕망과 그에 반응하는 ‘지식의 활용’이 거의 엇비슷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스와 로마인들은 고산에 쌓여 있는 만년설을 퍼와 이를 뭉쳐 벽 사이에 넣은 다음 짚, 흙, 퇴비 등으로 단열 처리한 저장고를 만들었다. 쉽게 말해 아이스박스를 만든 것이다. 그리고 이곳에 포도주를 넣어 차갑게 보관했다.
미국, 19세기 초반에 오스트레일리아에 얼음을 수출했다
역사 교과서에 종종 등장하는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나 로마의 네로황제도 얼음을 저장해서 썼던 인물로 유명하다. 이들 역시 동양과 엇비슷한 수준의 생산, 보관 방법이었다.
19세기 초반만 하더라도 미국은 오스트레일리아에 얼음을 수출했다. 뉴잉글랜드의 수많은 인부들이 호숫가로 달려와 톱으로 얼음을 잘라 배에 실어 오스트레일리아로 보낸 것이다(봉이 김선달이 물을 팔았다면 미국인들은 얼음을 팔았다!).
인류, 경험학적으로 기화열을 확인하고 활용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