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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화성
2024년 10월 09일(수요일)
산행코스 : 팔달문(13:50) - 서장대(14:15) - 화서문(14:30) - 장안문(14:50) - 방화수류정(15:15) - 창룡문(15:30) - 화성행궁(16:05) - 팔달문(16:15)
산행거리 : 9km
팔달문(八達門) (보물 제402호)
이 문은 수원 화성의 남쪽문으로 이름은 서쪽에 있는 팔달산에서 따 왔습니다. 문루는 앞면 5칸, 옆면 2칸의 2층 건물이며,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을 한 우진각지붕입니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윗부분에 짠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습니다. 문의 바깥쪽에는 문을 보호하고 튼튼히 지키기 위해 반원 모양으로 옹성을 쌓았습니다.
이 옹성(甕城)은 1975년 복원공사 때 고증하여 본래의 모습으로 복원한 것입니다. 또한 문의 좌우로 성벽이 연결되어 있었지만 도로를 만들면서 헐어버려 지금은 성문만 남아 있습니다.
수원 화성 안쪽에 있는 여러 건물 중 가장 화려하며, 발달된 조선 후기의 성문 건축형태를 고루 갖추고 있는 문화재입니다.
팔달문(八達門) 편액
문 이름은 정조대왕이 정하였고 편액은 장안문과 마찬가지로 당대의 명필 송하 조윤형(松下 曺允亨 1725~1799) 이 쓰도록 했습니다. 관각체(館閣體)의 대표작으로 꼽힐만한 명작입니다.
팔달문 각자성석(刻字城石)
팔달문 각자성석은 옹성안의 성문 우측에 위치하고 있으며 '감동 전 목사 김낙순, 전 부사 이방운, 패장 가선 이도문, 한상희, 임준창, 전 오위장 신속, 석수가선, 김상득 등 85명(監董 前 牧使 金樂淳, 前 府使 李邦運, 牌將 嘉善 李道文, 韓尙禧, 林俊昌, 前 五衛將 申㬘, 石手 嘉善 金尙得 等 八十五名)'이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팔달문 각자성석은 장방형으로 평평하게 갈아낸 무사석 위에 새겨져 있습니다.
수원화성 4대문 중 가장 보존상태가 양호합니다.
팔달문(八達門)은 1964년 9월 3일 보물 제402호로 지정되었습니다.
1794년(정조 18) 2월 28일 공사를 시작하여 9월 15일에 완공하였습니다.
문루의 규모는 높이 9m, 너비 25m로, 누상에 종이 걸려 있습니다. 수원 화성은 정조(正祖) 18년(1794년)에 이궁(離宮)으로 축성되었습니다. 중국을 거쳐 들어오는 서양문화의 영향을 반영한 점이 중요한데, 이는 전축(塼築)의 보루 같은 구조 면에서나 건축기계 면에서 실측할 수 있습니다. 흥인문에서와 같은 옹성을 앞쪽에 두고 역시 위에는 총안을 뚫었습니다.
팔달문(八達門) (보물 제402호)
수원 화성의 남문입니다. 한양 도성에 있는 다른 성은 남문이 정문이지만 정조대왕이 한양에서 처음 맞이하는 북문이 정문이 되어 남/북 정문과 후문이 다른 독특한 문입니다. 전쟁을 대비해 옹성이 있고 팔달문 주위로 상업이 발달하였습니다.
팔달문관광안내소
남치(南雉)
남치는 남포루와 팔달문 서쪽 남서적대 사이에 성벽을 돌출시켜 쌓은 치성입니다. 성벽 가까이 접근하는 적을 감시하고 공격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화성에는 성벽에 8곳, 용동에 2곳의 치성이 설치되어 있는데 지형에 따라 형태가 조금씩 다릅니다. 남치는 서쪽 경사지에 만들었기 때문에 치성의 길이가 짧고 폭도 좁습니다. 서3치와 마찬가지로 치성 안쪽에 돌로 담을 쌓고 출입구를 냈는데 이 구조는 적대와 비슷합니다. 남치는 원형이 잘 남아 있습니다.
* 적대 : 성문 양옆에 외부로 돌출시켜 옹성과 성문을 적으로부터 지키는 네모꼴의 대
홍난파 노래비
이 노래비는 난파 홍영후가 태어난 지 70년이 되던 해를 기념하여 1968년 건립되었습니다. 명문에는 화홍문화제가 열린 10월 15일 '수원 시민의 날'이 건립일자로 되어있으나 제막식은 23일에 있었습니다.
앞면에는 이원수 작사 홍난파 작곡의 '고향의 봄'악보가 , 뒷면에는 건립 내력이 새겨져 있습니다.
남포루(南砲樓)
남포루는 팔달산 남쪽 기슭 경사지에 지은 화포를 갖춘 시설입니다. 화성에는 동포루, 서포루, 남포루, 북동포루, 북서포루 5곳의 포루가 있는데 주변 지형 조건에 따라 크기를 달리했습니다. 그 중 남포루는 규모가 가장 작습니다.
'화성성역의궤'에는 포루 내부 높이가 균일하게 설계되어 있지만, 지형에 따라 각 층의 높이가 다릅니다. 남포루 1층은 1.7m, 2층 1.25m로 만든 반면 누각이 있는 3층은 높이 3m 이상을 확보하였습니다. 남포루는 포루 중 원형이 가장 잘 남아 있습니다.
남포루
서남암문 서남포루(西南暗門 西南舖舍)
서남암문은 서암문의 남쪽 367보 되는 곳에 있는데 용도(甬道)가 실지로 시작되는 곳이고 화양루의 통로가 됩니다.벽돌로 된 홍예는 안쪽의 너비가 7척 높이가 8척5촌이고 바깥 너비 6척 높이 8척입니다.
위에는 안팎으로 평평한 여장을 설치하였으며 그 안에다 집을 지었는데 이것이 포사(鋪舍)입니다.
서남암문 바깥쪽
용도(甬道)
용도는 좁고 긴 성벽으로 둘러싸인 통로를 가리킵니다. 이곳은 좌우 지형이 급경사를 이루면서도 우뚝 솟아 있어 남쪽 일대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만약 적에게 빼앗기면 성안이 노출될 수 있기 때문에 서남암문 밖으로 좁고 긴 성벽인 용도를 만들었습니다. 용도 중간에는 좌우에 치성을 하나씩 만들어 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게 했습니다. 용도 끝에는 서남각루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서남각루(西南角樓)
서남각루는 화성 서남쪽 요충지에 세운 감시용 시설로 '화양루'라는 별칭을 갖고 있습니다. 화성에는 모두 4곳의 각루가 있습니다. 화성 축성 초기에는 서남각루를 만들 계획이 없었던 듯합니다. 그러나 이곳은 남쪽 일대가 한눈에 들어오는 위치로 적에게 빼앗기면 공격할 수도 있기 때문에 계획을 변경하여 서남암문 바깥으로 길게 용도를 내고 그 끝에 각루를 세웠습니다.
건물 전면은 장수가 군사를 지휘할 수 있도록 벽돌을 깔았고, 후면은 바닥을 높이고 창문을 달아서 실내에서도 주변을 살필 수 있도록 했습니다. 조선 정조 21년(1797) 정월, 화성을 찾은 정조는 화양루에서 시작하여 성곽 일대를 두루 살폈습니다.
화양루(華陽樓) 편액
편액은 정조대왕의 글씨를 집자(集子)한 것으로 행서체로서 자간은 잘 되었으나 관각체의 웅건함을 살리지 못한 아쉬움이 있습니다.
편액 화양루에서 '화(華)'는 화성을 뜻하고 '양(陽)'자는 산의 남쪽을 뜻합니다.
3.1독립운동기념탑
서3치(西三雉)
서3치는 서포루와 서남암문 사이에 성벽을 돌출시켜 쌓은 치성입니다. 성벽 가까이 접근하는 적을 감시하고 공격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성벽에 8곳, 용도에 2곳의 치성이 설치되어 있는데 지형에 따라 형태가 조금씩 다릅니다. 서3치 바깥은 지형이 비교적 평탄하여 팔달산에 설치한 다른 치성에 비해 길이가 길습니다. 치성 안쪽으로는 여장에서 1m 정도 돌출한 담을 쌓고 가운데 출입구를 냈습니다. 적대와 비슷한 구조는 서3치와 남치에서만 볼 수 있습니다.
*적대 : 성문 양옆에 외부로 돌출시켜 옹성과 성문을 적으로부터 지키는 네모꼴의 대
서포루(西舖樓)
서포루(西舖樓)
서포루는 서암문과 서3치 사이에 있는 치성 위에 군사들이 머물 수 있도록 누각을 지은 시설입니다. 치성은 성벽 일부를 돌출시켜 적을 감시하고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든 시설물입니다. 화성에는 모두 15곳의 치성이 있는데 그 중 중요한 5곳의 치성 위에 동1포루, 동2포루, 서포루, 북포루, 동북포루를 만들고 적의 동향을 감시했습니다.
서포루는 서장대 쪽으로 접근하는 적을 감시하기 위해 만들었습니다. "화성성역의궤'에는 동북포루와 형태가 같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서포루 누각은 복원했으나 치성은 원형이 잘 남아 있습니다.
세계문화유산 표지석
세계문화유산 등재(1998년 12월26일) 당시 세운 것입니다.
한글은 월인천강지곡, 한자는 정조대왕 어필 중에서 집자했습니다.
효원의 종 (孝園-鐘)
수원시의 상징물인 시목(은행), 시화(철쭉), 시조(비들기) 그리고 수원화성과 홍화문을 전면을 새겼으며 그 규모는 구경 2.15m, 높이 3.54m이고 총중량이 3,300관(약12.5톤)에 이르는 대형종으로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서암문 안쪽
서암문(西暗門)
서암문은 화성 서쪽 팔달산 꼭대기 성벽에 설치한 비상 출입문입니다. 암문이란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설치하여 적이 모르게 출입하고 군수풍을 조달하던 문을 의미합니다. 화성에는 5곳의 암문이 있는데 모두 벽돌로 만들었습니다.
서암문은 성벽을 안쪽으로 90도 꺽어 들어가도록 쌓고 그 사이에 문을 내 바깥에서 알아차리기 어렵습니다. 화공에 대비하기 위한 오성지나 적을 감시하기 위한 비예 같은 별도의 방어 시설을 두지 않고 지형의 이점을 최대한 살렸습니다.
서장대 (西將臺)
장대란 성곽 일대를 한눈에 바라보며 화성에 주둔했던 장용외영 군사들을 지휘하던 지휘소입니다.
화성에는 서장대와 동장대 두 곳이 있습니다.
1794년(정조18) 8월 11일 공사를 시작하여 9월 29일 완성되었습니다.
채제공의 상량문에는 “화성의 지세는 진실로 우리나라의 관문이자 요새다. 마침내 연기와 아지랑이 높이 일어나는 곳에 깃발 나부끼고 북소리 울리는 장대를 쌓았다”고 하였습니다.
서장대는 수원화성에서 유일하게 어제(御製 왕이 지은글), 어필(御筆 임금이 쓴 글씨) 현판이 함께 게시된 건축물로 수원화성에서 가장 격이 높습니다.
화성장대(華城將臺) 편액은 정조(正祖 재위기간 1776~1800)의 어필(御筆·임금의 글씨)입니다.
국립고궁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편액 원복을 복제했습니다. '화성성역의궤' 기록에 따라 잣나무를 사용했고, 고증 결과에 따라 바탕은 하얀색, 글자는 검은색으로 칠했습니다.
華城將臺親閱城操有詩題于楣上(화성장대친열성조유시제우미상)
정조가 직접쓴 화성장대라는 편액은 2층에 걸려 있으며, 1795년(정조 21) 정조가 직접쓴 시를 새긴 ‘어제화성장대시문(御製華城將臺詩文)’ 의 원래 편액은 2층 내부에 걸려 있었으나 지금은 국립고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고, 2020년 복제된 편액은시민들이 편하게 볼 수 있도록 1층 안쪽에 걸려 있습니다.
'화성성역의궤' 기록 및 고증 결과에 따라 가로 243cm, 세로 765cm, 두께 3.6cm의 잣나무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왕의 시문 현판은 높은 위계의 칠보문(七寶紋)을 작용하는게 타당하다'는 전문가 의견에 따라 테두리에 칠보문을 그렸습니다.
정조는 1795년 수원행차 넷째날인 윤2월 12일에 서장대에 올라 장용영 외영 군사들의 훈련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이틑날 새벽까지 실시된 군사 훈련을 참관한 후 정조는 군사들을 칭찬하고 견고하게 쌓은 화성 성곽에 대해 만족감을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이날의 훈련을 기념하고자 친히 시를 짓고, 이 시를 현판에 새겨 서장대에 걸도록 하였습니다.
*장용영 외영(壯勇營 外營) : 정조의 친위군사조직 중 화성을 지키는 부대
시문(詩文)을 한글로 번역해 보면~~~~~
華城將臺親閱城操有詩題于楣上(화성장대친열성조유시제우미상)
華城將臺(화성장대) ... 화성장대에서
親閱城操(친열성조) ... 친히 군사훈련을 보고
有詩題于(유시제우) ... 시를 지어
楣上(미상) ... 문 위에 걸다
拱護斯爲重(공호사위중) ... 현륭원을 호위하는 일 중대하지만,
經營不費勞(경영불비노) ... 재용을 허비하지도 백성을 수고롭게 하지도 않았네.
城從平地迥(성종평지형) ... 성은 평지를 따라 둘러있고,
臺倚遠天高(대의원천고) ... 장대는 먼 하늘에 기대어 높이 솟았네.
萬垛䂓模壯(만타규모장) ... 수많은 성가퀴는 규모가 장대하고,
三軍意氣豪(삼군의기호) ... 삼군의 의기가 호쾌하네.
大風歌一奏(대풍가일주) ... 한나라 고조의 대풍가 한 곡조를 연주하니,
紅日在鱗袍(홍일재린포) ... 붉은 해가 비늘 갑옷에 있구나.
서장대에서 바라본 광교산 방향 파노라마
저멀리 광교산, 장암문(북문) 방향
화성행궁 방향
동장대에서 바라본 수원시내 방향
팔달문(남문) 우측 동탄 방향
서노대(西弩臺) (사적 제3호)
서노대는 기계식 활인 노(弩)를 쏘기 위해 높게 지은 시설로 군사지휘소인 서장대를 지키는 역할을 합니다. 노대는 적의 도향을 살피고 깃방을 이용해 적의 위치를 알리는 용도로도 쓰였습니다.
화성에는 서노대와 동북노대가 있습니다. 서노대는 화성의 서쪽 일대가 한눈에 들어오는 팔달산 꼭대기에 있어 적을 감시하기에 적합합니다. 팔각형의 몸체가 위로 가면서 줄어드는 안정적인 형태로, 안에는 흙을 채우고 겉은 벽돌을 붙였으며 여덟 방향의 모서리는 돌로 깍아 마감하였습니다.
서노대에서 바라본 광교산
당겨본 관악산
당겨본 광교산
서2치(西二雉)
서2치는 서포루와 서암문 사아에 성벽을 돌출시켜 쌓은 치성입니다. 성벽 가까이 접근하는 적을 감시하고 공격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성벽에 8곳, 용도에 2곳의 치성이 설치되어 있는데 지형에 따라 형태가 조금씩 다릅니다. 서2치는 팔달산 정상으로 향하는 급한 경사지에 자리잡고 있어 규모가 작습니다. 붉은 빛을 띤 다양한 크기의 성돌이 잘 남아 있는데, 평지 성벽보다 규모가 큰 장방형 석재를 하부에 설치하여 하중을 지탱하도록 했습니다.
서포루(西砲樓)
서포루(西砲樓)
서포루는 팔달산 중턱에 설치한 화포를 갖춘 시설입니다. 화성에는 동포루, 서포루, 남포루, 북동포루, 북서포루 5곳의 포루가 있는데 주변 지형 조건에 따라 크기를 달리했습니다. 서포루는 경사지에 지었기 때문에 평지에 설치한 북서포루와 북동포루보다 규모를 작게 만들고 화포와 총을 쏘는 구멍의 숫자도 줄였습니다.
포루는 3층 구조로 아래 두 층에는 화포나 총을 쏠 수 있는 구멍이 있고, 상층에는 누각이 있습니다. 서포루 상부의 누각은 복원했으나 벽돌로 만든 하부에는 창건 당시의 모습이 일부 남아 있습니다.
서포루(西砲樓)
서1치(西一雉)
서1치는 서북각루와 서포루 사이에 성벽을 돌출시켜 쌓은 치성입니다. 성벽 가까이 접근하는 적을 감시하고 공격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성벽에 8곳, 용도에 2곳의 치성이 설치되어 있는데 지형에 따라 형태가 조금씩 다릅니다.
치성은 보통 좌우 방어 시설과 100m 이상 거리를 두고 만들었으나, 서1치는 서북각루에서 약55m 떨어진 지점에 있습니다. 화서문에서 뻗은 성벽이 팔달산 정상을 향해 크게 꺽이는 요충지이기 때문에 치성을 가깝게 설치한 것입니다.
*용도 : 좁고 긴 성벽으로 둘러쌓인 통로로 서남암눈에서 서남각루에 이르는 길
서북각루(西北角樓)
서북각루는 화성 서북쪽 요충지에 세운 감시용 시설입니다. 화성에는 모두 4곳의 각루가 있습니다. 서북각루는 팔달산으로 오르는 경사지에서 성벽이 휘어진 곳에 자리잡아 서북쪽 일대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아래층에는 군사들이 머무는 방에 온돌을 놓았고 위층은 마룻바닥으로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사면에 널빤지 문을 달고 구멍을 내서 적을 감시했습니다.
화서문(華西門)
화서문은 정확히 서쪽에 있는 문이 아닙니다. 서쪽에는 팔달산이 있어 그 보다 위인 서북쪽에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화서문
화서문은 화성의 4대문 중 서쪽 대문입니다.
1795년(정조 19) 7월 21일 공사를 시작하여 1796년(정조 20) 1월 8일 마쳤습니다.
화성 서쪽의 남양만과 서해안 방면으로 연결되는 통로 역할을 하였습니다.
원래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보물 제403호로 지정되었습니다.
편액은 초대 화성유수였던 채제공이 썼으며 옹성안 홍에문 좌측 석벽에는 성문공사를 담당하였던 사람과 책임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화서문(華西門) 편액은 초대 화성유수였던 번암 채제공(樊巖 蔡濟恭 1720~1799)의 글씨입니다.
그의 서체는 준미(俊美)함이 있어 인품과 비유될 만하기에 충분합니다.
옹성 안 석축에는 공사를 담당한 감독관과 우두머리 석공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서울과 개성, 강화도에서 온 석공이 참여했는데 박상길은 축성이 끝난 후 석공 가운데 가장 높은 등급의 상을 받았습니다.
화서문 각자성석(刻字城石)는 창룡문과 마찬가지로 옹성안의 성문 좌측 상단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팔달문, 창룡문과 달리 다듬지 않은 돌 위에 그대로 새겼으며 풍화작용으로 인한 마모가 심해 육안으로 확인하기 쉽지 않으며, 각자의 내용은 ‘별감동 전 부사 김처한, 패장 첨사 김태서, 한량 윤진묵, 석수 박상길(別監董 前 府使金處漢, 牌將 僉使 金泰瑞, 閑良 尹鎭黙, 石手 朴尙吉)’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동원된 인원은 창룡문과 거의 유사할 것으로 추측됩니다.
화서문(華西門)은 좌우 성벽에 연결되는 돌로 된 기부에 홍예문(虹霓門)을 두어 그 위에 단층의 문루를 세웠습니다. 문의 앞부분에는 반달형으로 된 전축(塼築) 옹성(甕城)이 있는데 높이는 안쪽이 2.62m, 바깥쪽이 3.65m, 두께는 3.25m입니다. 이 옹성은 한 평이 트여 있어 문을 출입할 때 통과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1975년 수원 화성을 중수 공사할 때 보수되었습니다.
서북공심돈(보물 제1710호)
서북공심돈은 화서문 밖의 넓은 평야를 지키는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오늘날까지 유지하고 있습니다.
팔달문과 함께 화서문 지역은 한국전쟁때 거의 피해를 입지 않은 곳입니다. 덕분에 간결하면서도 섬세한 18세기 조선시대 건축예술을 볼 수 있습니다.
서북공심돈(北西空心墩) (보물 제1710호)
서북공심돈은 화성 서북쪽에 세운 망루로 주변을 감시하고 공격하는 시설입니다. 공심돈은 속이 빈 돈대라는 뜻으로, 우리나라 성곽 중 화성에서만 볼 수 있습니다. 보통 돈대는 성곽과 떨어진 곳에 세워 적을 감시하는 시설이나, 서북공심돈은 서북쪽 성벽이 꺽이는 위치에 설치했습니다. 치성 위에 벽돌로 3층의 망루를 세우고 꼭대기에는 단층의 누각을 올려 군사들이 머물 수 있도록 했습니다. 외벽에는 화포를 쏠 수 있는 구멍을 뚫어 공격 기능까지 갖추었습니다.
북포루(北砲樓)
북포루는 북서포루와 서북공심돈 사이에 있는 치성 위에 군사들이 머물수 있도록 누각을 지은 시설입니다. 치성은 성벽 일부를 돌출시켜 적을 감시하고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든 시설물입니다. 화성에는 모두 15곳의 치성이 있는데 그중 중요한 5곳의 치성 위에 동1포루, 동2포루, 서포루, 북포루, 동북포루를 만들고, 적의 동향을 감시했습니다.
북포루는 화성에서 가장 평탄하고 시야가 트인 곳에 있어서 주둔하는 군사의 수도 많고 규모도 큽니다. '군포루'라고도 불렸습니다.
수원성곽 복원 기념비(1979년 9월)
진명재자 대통령 박정희, 비문은 최영희 짓고 김응현 썼습니다.
북서포루(北西砲樓)
북서포루는 장안문 서쪽에 설치한 화포를 갖춘 시설입니다. 화성에는 동포루, 서포루, 남포루, 북동포루, 북서포루 5곳의 포루가 있는데 주변 지형 조건에 따라 크기를 달리했습니다. 이 중 평탄한 곳에 지은 북서포루가 가장 높습니다.
포루는 벽돌로 만든 3층 구조로 아래 두 층은 화포나 총을 쏠 수 있도록 만들었고, 상층은 군사들이 적을 감시하고 공격할 수 있도록 누각을 만들었습니다. 북서포루와 북동포루는 안팎의 지붕 형태가 다릅니다. 이는 '화성성역의궤'에 수록되어 있는 각 시설물 자재 목록을 바탕으로 복원된 것입니다.
북서적대(北西敵臺)
북서적대는 장안문 서쪽에서 성문에 접근하는 적을 감시하고 공격하는 방어 시설입니다. 화성에는 장안문과 팔달문 좌우에 적대를 설치했는데 현재 장안문만 남아 있습니다. 장안문 좌우 적대에는 현안(懸眼) 세 줄을 설치한 반면 팔달문 적대에는 두 줄을 설치했습니다. 현안은 성벽 가까이 접근한 적의 동향을 살피고 동시에 공격도 가능하도록 만든 시설입니다. 적대는 우리나라 성곽 중 유일하게 화성에만 있습니다.
장안문(長安門)
장안문은 화성의 4대문 중 북쪽 문으로 수원화성의 정문입니다.
1794년(정조18) 2월 28일 공사를 시작하여 9월 5일 마쳤습니다.
장안이라는 말은 수도를 상징하는 말이자 백성들의 안녕을 의미합니다.
장안문의 우진각 지붕(지붕면이 사방으로 경사지게 되어있는 형태)으로 규모가 웅장합니다.
성문의 바깥에는 반달모양의 옹성을 쌓았는데 이것은 항아리를 반으로 쪼갠 것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성문을 보호하는 역할을 합니다.
장안문(長安門) 편액
장안문이란 이름은 정조가 정하였고 당대의 명필 송하 조휸형(松下 曺允亨 1725~1799)이 썼습니다.
지금 편액은 수원시청에 근무한 소형 양근웅(素馨 梁謹雄)의 해서(楷書)로 준일함이 보입니다.
높이가 170cm, 폭이 403cm나 됩니다
오성지(五星池)가 있는 곳은 수원화성이 유일합니다.
성벽의 불이 붙었을시 불을 끌 수 있도록 설치한 오성지가 옹성 홍예문 윗부분에 있습니다.
다섯개의 구멍은 화재를 진압하기 위하여 물을 흘려보낼 수 있게 설계되었습니다.
오성지가 있는 곳은 장안문의 북옹성, 팔달문의 남옹성, 동암문, 북암문, 서남암문입니다.
*오성지 : 다섯 개의 구멍이 뚫려 있는 물을 담는 통
장안문에서 바라본 옹성 홍예문(甕城 虹霓門)
장안문 문루
성의 안쪽에서 바라보면 장안문의 홍예개판(虹霓蓋板)에 청룡(靑龍)과 황룡(皇龍)이 가운데 여의주(如意珠)를 희롱하는 교룡(交龍)을 그리고 옹성 홍예문(甕城 虹霓門)과 일렬로 배치하였습니다.
장안문의 각자성석
감동 전목사 이백연, 전부사 양원, 패장 절충 서유춘, 김의순 출신 이경배, 한량 이진온, 석수 한시웅 등 92명(監董 前 牧使 李柏然, 前 府使 梁?, 牌將 折衝 徐有春. 金義淳 出身 李敬培, 閑良 李鎭溫 石手 韓時雄 等 九十二名)이라고 새겼습니다. 장안문은 한국 전쟁 때 유실되어 공사 참여자 각자성석도 유실됐습니다.
2006년 근당 양택동(槿堂 梁澤東) 선생의 글을 새겨 옹성 안쪽 바닥에 설치해습니다.
장안문 안쪽
북서적대(北西敵臺)
장안문의 양쪽에는 성문에 접근하는 적을 감시하고 공격하는 방어시설인 돌출된 적대(敵臺)를 설치하였습니다
북서적대에서 바라본 서장대
북서적대에서 바라본 장안문
장안문(長安門)
북옹성(北甕城)
북옹성은 장안문 바깥에 반달모양으로 쌓은 성으로 성문을 이중으로 지키는 시설입니다. 출입문을 옹성 한가운데 내서 출입하기 편하도록 했습니다. 조선 시대에 만든 여러 성곽에도 옹성이 설치되어 있지만 출입문을 중앙에 만든 사례는 장안문과 팔달문이 유일합니다. 문 위에는 물을 저장하는 오성지를 설치하여 화공에 대비했습니다. 오성지는 화성에만 설치한 색다른 방어시설로 정약용이 제안했으나 설계안대로 시공되지 못했습니다.
*오성지 : 다섯 개의 구멍이 뚫려 있는 물을 담는 통
북옹성(北甕城)에서 바라본 장안문(長安門)
장안문의 체성(體城)은 옹성으로 둘러 싸여 있습니다.
북동적대(北東敵臺), 북동치(北東雉)
북동적대는 장안문 동쪽에서 성문에 접근하는 적을 감시하고 공격하는 방어 시설입니다. 화성에는 장안문과 팔달문 좌우에 적대를 설치했는데 현재 장안문에만 남아 있습니다.
안쪽은 성벽과 같은 높이로 대를 쌓아 군사들이 지키고, 바깥쪽에는 현안(懸眼)이라고 하는 세로 방향의 긴 홈을 냈습니다. 현안은 성벽 가까이 접근한 적의 동향을 살피고 동시에 공격도 가능하도록 만든 시설입니다. 적대는 우리나라 성곽 중 유일하게 화성에만 있습니다.
홍이포(紅夷砲)
길이 : 216cm, 구경 : 10cm, 중량 : 1800kg
홍이포는 명나라 말부터 청나라 때까지 사용된 유럽식 화포로 포구쪽에서 화약과 포탄을 정전하여 발사하는 포구장전식 화포이며 사정거리가 700m에 달하는 위력적인 화기로써 성곽 또는 포루 등에 배치하거나 성곽 공격용으로 사용하였습니다.
북동치(北東雉)
북동치는 장안문 동쪽 북동적대에 붙여서 세운 치성입니다. 치성은 성벽의 바깥으로 덧붙여 쌓은 시설로, 성벽 가까이 접근하는 적을 감시하고 공격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성벽에 8곳, 용도에 2곳의 치성이 설치되어 있는데 지형에 따라 형태가 조금씩 다릅니다. 북동적대 위치에서 성곽이 급하게 꺽이기 때문에 북쪽을 방어하기 위해 적대에 치를 덧붙였습니다.
북동치는 장안문을 지키는 중요한 위치이므로 가장 크게 치성을 만들고, 적을 감시하고 공격할 수 있는 총안과 타구를 설치했습니다.
북동포루(北東砲樓)
북동포루는 장안문의 동쪽에 설치한 화포를 갖춘 시설입니다. 화성에는 동포루, 서포루, 남포루, 북동포루, 북서포루 5곳의 포루가 있는데 주변 지형 조건에 따라 크기를 달리했습니다. 포루는 벽돌로 만든 3층 구조로, 아래 두 층은 화포나 총을 쏠 수 있도록 만들었고 상층은 군사들이 적을 감시하고 공격할 수 있도록 누각을 만들었습니다. 정약용은 중국의 제도를 두루 살펴 화성에 발전된 형태의 포루를 설계했는데, 그 모습이 '화성성역의궤'와 '정리의궤'에 그림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북동포루(北東砲樓)
북동적대에서 동쪽으로 조금 가면 성벽을 돌출시킨 치성(雉城) 위에 군사들이 적을 감시하고 공격할 수 있도록 화포(火砲)를 갖춘 북동포루(北東砲樓)가 있습니다.
화성(華城)에는 동포루, 서포루, 남포루, 북동포루, 북서포루 등 5곳의 포루가 있습니다.
북수문(화홍문)과 동북각루(방화수류정)
북수문(화홍문) (北水門 華虹門)
화성을 남북으로 가로질러 흐르는 수원천 위에는 북수문과 남수문 두 개의 수문이 있으며, 북수문은 1794년(정조18) 2월 28일 공사를 시작하여 1795년(정조19) 1월 113일에 완성을 하였습니다.
별칭은 화홍문으로 화(華)자는 화성을 의미하고, 홍(虹)자는 무지개를 뜻하며, 수문을 통해 흘러온 물이 물보라을 일으키며 장쾌하게 떨어지는 모습인 '화홍관창(華虹觀漲)은 화성에서 꼭 보아야 할 아름다운 경치로 손꼽힐 정도로 아름다운 곳입니다.
화홍문(華虹門) 편액은 조선 후기 문인 겸 서예가 기원 유한지(綺園 兪漢芝 1760~1834) 1796년 예서(隸書)로 쓴 글씨입니다. 예서 필획이 용솟음치는 감흥을 흠뻑 주는 보기 드문 예서체입니다.
유한지는 19세기 초 조선의 명필이며 유한지 예서 "기원첩(綺園帖)"은 보물 제1682호(2010년 11월)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북수문(화홍문)과 동북각루(방화수류정)
북수문(화홍문) 안쪽
광교산(光敎山)에서 발원(發源)하여 수원 시내를 남북으로 흐르는 광교천(光敎川, 수원천)에 7개의 홍예(虹霓)를 설치한 다리를 놓고 그 위에 팔작지붕으로 된 누각(樓閣)을 세웠습니다.
이무기상
용연의 넘친 물은 연못 서쪽의 출수구를 통해 수원천으로 흘러든다고 하는데 출수구는 용이 되기 전의 이무기상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이 물은 잡귀(雜鬼)를 걸러내는 역할을 하는 이무기의 입을 거쳐 수원천으로 흘러듭니다.
용연(龍淵)
용연은 화성의 북쪽 성밖에 있는 연못입니다. 금강산 구룡연을 비롯해서 전국의 이름난 명소에 용연이라는 명칭이 두루 쓰였고 갖가지 전설이 있습니다. 화성의 용연은 용머리처럼 생긴 용두 바위에서 유래했습니다. 용두 바위 위에 있는 방화수류정은 '용두각'이라고도 부릅니다.
'화성성역의궤에는 용연이 반달처럼 생겼고, 용두 바위는 물고기를 잡는 조대(釣臺)로 쓸 만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용연의 물이 넘치면 서쪽의 출수구를 통해 수원천으로 흘러 나갑니다. 출수구에는 용이 되기 전 단계의 짐승인 이무기 상을 새겼는데 원형이 잘 남아 있습니다. 용연에 비친 달이 떠오르는 모습인 '용지대월(龍池待月)'은 화성에서 보아야 할 아름다운 경치로 꼽힙니다.
화성의 북쪽 성밖에 있는 연못은 용연(龍淵)이라고 합니다.
이는 용머리처럼 생긴 용두(龍頭) 바위에서 유래하였으며 용두 바위 위에 있는 방화수류정을 용두각(龍頭閣)이라고도 부릅니다.
가야할 동북포루
북암문(北暗門)
북암문은 화성 북쪾에 낸 비상 출입문입니다. 암문이란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설치하여 적이 모르게 출입하고 군수품을 조달하던 문을 의미합니다. 화성에는 5곳의 암문이 있었는데 모두 벽돌로 만들었습니다. 북암문은 지형에 맞춰 좌우 성벽까지 벽돌로 둥글게 만들었습니다. 문 위에는 몸을 숨기고 적을 감시하기 위해 여장을 세웠는데 반원형은 원여장, 장방형은 비예라고 부릅니다. 축성 당시의 모습이 잘 남아 있습니다.
문 위에는 몸을 숨기고 적을 감시하기 위해 반원형여장(半圓形女墻)을 세웠습니다.
북암문(北暗門) 안쪽
동북각루(방화수류정) (東北角樓 訪花隨柳亭) (보물 제1709호)
방화수류정은 1794년(정조 18) 10월 19일 완공되었습니다.
주변을 감시하고 군사를 지휘하는 지휘소와 주변 자연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정자의 기능을 함께 지니고 있습니다.
"꽃을 찾고 버들을 따라 노닌다(訪花隨柳)"라는 뜻을 지닌 방화수류정은 독특한 평면과 지붕형태 때문에 바라보는 위치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화성에서 가장 뛰어나며 다른 성곽에서는 볼 수 없는 독창적인 건축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 편액은 부여 흥산 출신의 서예가 원곡 김기승(原谷 金基昇 1909~2000)이 1956년 (丙申 병신)에 쓴 행서체(行書體)로 송나라 황산곡 서체의 훈향을 느낄 수 있습니다.
동북포루(東北舖樓)
동북포루(東北舖樓)
동북포루는 방화수류정과 동장대 사이 치성 위에 군사들이 머물 수 있도록 지은 시설입니다. 화성에는 모두 5곳의 포루가 있는데, 동북포루는 지붕의 모습이 조선 시대 선비들이 쓰던 각건(角巾)이란 모자와 비슷해보면서 '각건대(角巾臺)'라는 별칭을 갖고 있습니다. 동북포루는 다른 포루에 없는 시설을 갖췄습니다. 여장과 건물사이를 벽돌로 채워서 벽등이라는 단을 만들고, 누각의 계단도 벽돌로 만들었습니다. 지붕 양 끝에 놀리 용머리 모양의 장식 기와 역시 동북포루에서만 볼 수 있습니다. 동북포루의 특징을 살려 2019년에 다시 복원했습니다.
동암문(東暗門)
동암문은 화성 동쪽에 낸 비상 출입문입니다. 암문이란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설치하여 적이 모르게 출입하고 군수품을 조달하던 문을 의미합니다. 화성에는 5곳의 암문이 있었는데 모두 벽돌로 만들었습니다. 동암문 상부에는 윗부분을 둥글게 만든 원여장을 설치했고, 좌우에는 네모난 비예(睥睨)를 세웠습니다. 비예는 암문 위에서 몸을 숨기고 적을 감시하기 위해 만든 여장입니다. 성 안쪽에 도로가 생기면서 지형이 높아져 1976년 동암문 복원시 계단을 추가했습니다.
동암문(東暗門) 안쪽
동장대(연무대)
동장대(東將臺)는 장수가 군사 훈련을 지휘하던 곳으로 '연무대(鍊武臺) '라고도 불립니다. 화성에는 두 곳의 장대가 있는데 동장대는 평상시 군사들이 훈련하는 장소로 쓰고, 서장대는 군사 훈련 지휘소로 썼습니다.동장대는 대지 전체를 3단으로 나누고 마당 한가운데에 장수가 말을 타고 오를 수 있도록 경사로를 만들었습니다. 본래 전면은 개방하고 나머지 삼면은 벽이나 창문을 단 형태였으며, 가장 안쪽에 온돌방 한 칸이 있었습니다. 건물 뒤쪽으로는 수키와로 담장을 꾸민 영롱장(玲瓏墻)이 있습니다.
정조는 동장대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음식을 내려주는 호궤행사를 베풀었습니다. 화성 축성이 마무리되던 시기인 1796년 8월 19일 감독관과 일꾼 등 2,700여 명이 호궤에 참여했습니다.
연무대(鍊武臺) 편액
정조대왕의 글씨에서 집자(集子)하여 걸려있는데 자간(字間)이 맞지 않아 매우 아쉽습니다.
영롱장(玲瓏墻)
수키와를 쌓아 만든 극히 아름다운 담장입니다. 문양이 꽃살문 같이 이쁩니다.
조선 후기에 조정이 특별 행정관청을 만들어 시행한 국책사업이라 가능했을 것입니다.
수원화성을 짓는 공사에서는 기와굽는 가마를 인근 여러 곳에 만들어 놓고 기와를 직접 조달한 기록이 있습니다.
동북공심돈 (東北空心墩)
수원 화성에는 세 개의 공심돈이 있는 데 그 중 남공심돈이 1795년 가장 먼저 세워졌고, 1796년 봄 서북공심돈이 세워지고, 가을에 동북공심돈이 세워졌습니다.
동북공심돈(東北空心墩)
동북공심돈은 화성 동북쪽에 새운 망루로 주변을 감시하고 공격하는 시설입니다. 공심돈은 속이 빈 돈대라는 뜻으로, 우리나라 성곽 중 화성에서만 볼 수 있습니다. 보통 돈대는 성곽과 떨어진 높은 곳에 세워 적을 감시하는 시설이나 동북공심돈은 성벽 안쪽에 설치했습니다. 외벽에는 밖을 감시하고 화포로 공격할 수 있는 구멍을 곳곳에 뚫었습니다.
동북공심돈은 3층으로 이루어진 원통형의 벽돌 건물로서 출입문에서 통로를 따라 빙글빙글 올라가면 꼭대기 망루에 이르는 구조입니다. 이 모습을 빗대서 '소리각'이라고도 부릅니다. 정조 21년(1797) 정월, 좌의정 채제공은 동북공심돈을 올가가 본 뒤 '층계가 구불구불하게 나 있어 기이하다고도 교묘하다.'며 감탄했습니다.
한국전쟁 등을 겪으며 절반 이상 무너졌었는데 1976년에 복원해 모습을 되찾았습니다.
동북노대(東北弩臺)
동북노대(東北弩臺)
동북노대는 기계식 활인 노(弩)를 쏘기 위해 지은 시설입니다. 노대는 적의 동향을 살피고 깃방을 이용해 적의 위치를 알리는 용도로도 쓰였습니다.
화성에는 서노대와 동북노대가 있습니다. 동북노대는 별도의 높다란 대를 만들지 않고 성벽에서 돌출시켜 만들었지만 주변이 평탄해서 시야가 확보되었습니다. 동북노대는 좌우 성벽이 만나는 지점을 살짝 좁혀 쌓았는데 '화성성의궤'에서는 그 모양을 '벌의 허리'와 같다고 표현했습니다.
동북노대(東北弩臺) 안쪽
동북노대(東北弩臺)는 기계식 활인 노(弩, 쇠뇌)를 쏘기 위해 지은 건물입니다.
화성에는 동북노대 외에 팔달산 정상에 서노대(西弩臺)가 하나 더 있습니다.
성벽 뒤로는 열기구(플라잉수원)이 보입니다.
화성 창룡문(蒼龍門) 측면
화성 창룡문(蒼龍門) 안쪽
화성의 동문(東門)인 창룡문(蒼龍門)은 장안문과 팔달문 보다 격(格)이 낮은 1층 문루의 팔작지붕 건물입니다.
화성 창룡문(蒼龍門)
창룡문은 수원 화성의 동문입니다. 창(蒼)은 푸른색을 가리키므로 '동쪽 방향을 지키는 신령한 청룡'을 상징합니다. 창룡문은 바깥쪽에서 보면 안쪽으로 휘어 들어가는 곳에 자리 잡고 있어, 돌출된 좌우 성벽이 자연스럽게 성문을 보호하는 치성 역할을 합니다. 문 안쪽의 넓은 공터는 군사들의 훈령장으로 쓰였습니다.
조선 시대 건축에는 일정한 위계질서가 있습니다. 같은 성문이지만 장안문과 팔달문은 높은 격식을 갖춘 반면 창룡문과 화서문은 한단계 격을 낮춘 형태입니다. 장안문과 팔달문이 2층 문루에 우진각 지붕인 반면 창룡문과 화서문은 1층 문루에 팔작지붕입니다. 옹성은 서울 홍인지문처럼 한쪽 모서리를 열어둔 형태입니다.
창룡문 옹성안 석축에는 공사를 담당한 감독관과 석공 우두머리 이름을 새긴 실명판이 잘 남아 있습니다.
한국전쟁 때 문루가 파괴되어 1976년에 복원했습니다.
*치성 : 성벽 일부를 돌출시켜 적을 감시하고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든 시설
** 옹성 : 성을 지키기 위하여 성문 밖에 샇은 작은 성
창룡문(蒼龍門) 편액은 즉지헌 유언호(則止軒 兪彦鎬 1730~1796) 이 썼으나 없어지고, 복원 당시 경기도부지사로 있던 이규희 글씨입니다. 서체는 해서체로 웅경하고 창일함이 없어 아쉽습니다.
옹성 안 홍예문 좌측 석벽에는 공사를 담당하였던 공사책임자, 중간간부, 기술자의 이름이 새겨 공사에 대한 책임감을 높였습니다.
창룡문 각자성석의 경우 육안으로 식별이 어렵지 않을 만큼 보존 상태가 좋은 편입니다. 각자에는 ‘감동전영장 김기승, 감동전부사 김혁, 패장가선 이필재, 절충 홍이건, 석수 김명한 등 19명(監董 前 營將 金箕昇, 監董 前 府使 金爀, 牌將嘉善 李弼載, 折衝 洪履騫, 石手 金明漢 等 十九名)’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팔달문과 달리 옹성 안의 성문 좌측에 새겨져 있습니다. 창룡문의 각자성석은 팔달문의 것보다 다소 작고 덜 정제되어 있는 무사석 3개에 나뉘어 새겨져 있습니다. 팔달문에 비해 공사에 참여한 인원이 적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수원 화성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될 수 있었던 건 <화성성역의궤>가 남아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론적으로 보자면 완벽한 복원이 가능한 수원 화성에 남겨진 공사실명판은 기록 문화에 충실했던 조선 사회의 단면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해보면 좋은 현장입니다.
수원 화성 창룡문(蒼龍門)
창룡문(蒼龍門)은 화성의 4대문 중 동쪽 문으로 1795년(정조19) 5월 8일 공사를 시작하여 10월 17일 마쳤습니다.
창룡은 곧 청룡으로 풍수지리상 좌청룡이며 동쪽을 의미합니다.
성문을 보호하기 위한 옹성을 반달모양으로 쌓았는데 장안문, 팔달문과 달리 한쪽을 열어놓았습니다.
수원화성 창룡문에서 동포루까지 보수 정비공사 중입니다.
동1포루(東一舖樓)
동1포루는 창룡문 남쪽에 있는 치성 위에 군사들이 머물 수 있도록 누각을 지은 시설입니다. 화성에는 모두 15곳의 치성이 있는데 그중 중요한 5곳의 치성 위에 동1포루, 동2포루, 서포루, 북포루, 동북포루를 만들고 적의 동향을 감시했습니다.
동1포루는 지형이 평탄하고 조망이 트인 곳에 있어서 적의 움직임을 잘 살필 수 있는 구조로 만들었습니다. 치성을 길게 내밀었으며, 다른 포루와 달리 기둥사이에 벽을 치지 않고 사방을 개방했습니다.
동1치(東一雉)
동치는 동1포루와 동포루 사이에 성벽을 돌출시켜 쌓은 치성입니다. 성벽 가까이 접근하는 적을 감시하고 공격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치는 꿩을 말하는데, 꿩이 몸을 잘 숨기고 엿보기 잘하는 특성이 있어 이런 이름을 붙였습니다. 성벽에 8곳, 용도에 2곳의 치성이 설치되어 있는데 지형에 따라 형태가 조금씩 다릅니다. 동1치는 평탄한 지형에 위치하고 있어 주변을 조망하기 위해 규모를 크게 만들었습니다.
동포루(東砲樓)
동포루는 동1치와 동2치 사이에 지은 화포를 갖춘 시설입니다. 화성에는 동포루, 서포루, 남포루, 북동포루, 북서포루 5곳의 포루가 있는데 보통 평지에서는 규모를 키우고 경사지에는 규모를 줄였습니다. "화성성역의궤"에는 균일하게 설계되어 있지만 지형과 여건에 따라 규모와 각 층의 높이를 달리 만든 것입니다.
동포루는 산상 동성구간에서 비교적 평평한 곳에 있지만 주변 성벽이 높지 않아 작게 만들었습니다. 남포루와 마찬가지로 1층과 2층은 낮고 누각이 있는 3층은 높이 3m이상을 확보했습니다.
동포루(東砲樓)
동2치(東二雉)
동2치는 동포루와 봉돈 사이에 성벽을 돌출시켜 쌓은 치성입니다. 성벽 가까이 접근하는 적을 감시하고 공격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성벽에 8곳, 용동에 2곳의 치성이 설치되어 있는데 지형에 따라 형태가 조금씩 다릅니다. 동2치는 1979년에 화성을 복원하면서 다시 쌓았습니다. 본래 성돌이 붉은 색을 띤 반면 새로 쌓은 곳은 가지런히 다듬은 흰색 돌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치성 좌우에 있는 옛 성돌에서 돌을 뜨기 위해 정을 박은 흔적을 볼 수 있습니다.
봉돈(烽墩)
봉돈은 봉화 연기를 올려 신호를 보내는 시설입니다. 보통 봉화대는 높고 인적이 드문 곳에 두었으나 화성에서는 시야가 트인 동쪽에 설치해 화성행궁에서 바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봉동은 외벽과 내부, 계단에 이르기까지 전체를 벽돌로 만든 화성의 대표적인 벽돌 건축물입니다. 높게 쌓은 대 위에 햇불 구멍인 화 (火竇: 횃불구멍) 두 다섯 개가 있습니다. 평소에는 남쪽 끝에 있는 화두 한 곳에만 연기를 올리고, 상황에 따라 연기의 숫자를 증가시켜 전쟁 시에는 다섯 곳 모두 연기를 피웠습니다.
동2포루(東二舖樓)
동2포루(東二舖樓)
동2포루는 봉돈 남쪽 치성 위에 군사들이 머물 수 있도록 누각을 지은 시설입니다. 치성은 성벽 일부를 돌출시켜 적을 감시하고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든 시설물입니다. 화성에는 모두 15곳의 치성이 있는데 그중 중요한 5곳의 치성 위에 동1포루, 동2포루, 서포루 북포루, 동북포루를 만들고 적의 동향을 감시했습니다.
동2포루는 동1포루와 마찬가지로 사방이 개방된 구조입니다. 측면 3칸인 동1포루에 비해 치성이 짧아서 측면 2칸의 건물로 만들어졌습니다. " "화성성의궤" 에는 동1포루의 모습만 실려 있습니다.
동3치(東三雉)
동3치는 동2포루와 동남각루 사이에 성벽을 돌출시켜 쌓은 치성입니다. 성벽에 8곳, 용도에 2곳의 치성이 있는데 지형에 따라 형태가 조금씩 다릅니다. 동3치는 치성 가운데 폭이 가장 넓고 길이가 짤습니다. 성 바깥이 급하게 경사를 이루고 있어 치성 길이는 짧게 만들고, 주변을 멀리 살피기 위해 전면 폭을 넓게 확보한 것입니다. 다른 치에는 현안을 한 줄만 내었지만 동3치는 폭이 넓어서 현안을 두 줄 설치했습니다.
동남각루(東南角樓)
동남각루는 화성 남쪽 요충지에 세운 감시용 시설입니다. 화성에는 모두 4곳의 각루가 있습니다. 동남각루는 남수문에서 동쪽으로 솟아오른 경사지에서 성벽이 휘어진 곳에 있습니다. 이곳은 풍수에서 안산(案山)에 해당하는데, 봉우리가 일자 모양처럼 평평하여 일자문성(一字文星)이라라고 불렀습니다. 서북각루와 같은 구조로 아래층 군사들이 머무는 방에는 온돌을 놓았고, 위층은 마룻바닥으로 만들었습니다. 사면에 짐승 얼굴과 태극무늬를 그린 널빤지 문을 달고 활 쏘는 구멍을 냈습니다.
동남각루의 계단에서 보면 수원천 위로 남수문이 보이고, 좌측으로 팔달문의 상층 문루, 우측으로 서장대가 보입니다.
남수문(南水門) 안쪽
남수문(南水門)
남수문은 화성의 남쪽 성벽이 수원천과 만나는 곳에 설치한 수문입니다. 수원천 상류에 있는 북수문에 일곱 칸의 홍예를 만든 반면 하류에 있는 남수문에는 아홉칸의 홍혜를 두었습니다. 홍예란 무지개같은 반원형 꼴로 쌓은 구조물로 주로 다리나 천장을 지탱하는 역할을 합니다. 남수문의 바깥쪽은 홍예 위로 벽을 놓이 쌓아 적이 넘어오지 못하게 하고, 안쪽에는 군사 수백 명이 수문을 지킬 수 있는 장포(長舖)를 만들었습니다. 아홉 개의 수문에는 철책을 설치하여 적의 침입을 대비했습니다.1922년 큰 홍수로 유실되어 2012년에 "화성성의궤"를 바탕으로 복원했습니다. 복원한 남수문은 홍수에 대비하기 위해 하부에 수로를 설치했습니다.
여민각(與民閣)
화성 중심부에 있는 종각(鐘閣)입니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소실됐다가 수원화성복원사업의 일환으로 2008년 10월에 복원하였습니다.
1795년 화성행차에서 정조대왕의 “사람들이 모두 화합하여 즐거워하고 모든 가정마다 부유함이 충만하라”는 윤음과 맹자의 민유방본 사상인 여민동락(與民同樂)에서 연유해 지어진 이름입니다.
여민각(與民閣) 편액
편액은 근당 양택동(槿堂 梁澤東)이 썼으며 여민동락을 느끼게 하는 부드러운 행초서체입니다.
화성행궁이 보입니다.
화성행궁(華城行宮)
1790년에 세운 2층 구조의 6칸 규모 누문(樓門)이며 화성행궁의 정문입니다. 아래층엔 세 개의 판문이 달린 통행문이 있고, 위층엔 누마루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진남루(鎭南樓)라 하였으나 1795년 정조의 명으로 신풍루(新豊樓)라고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한고조 유방의 고향 풍패(豊沛)로부터 비롯된 이름으로 정조가 화성을 고향처럼 여긴다는 의미입니다.
1795년 을묘 행차시에 신풍루 앞에서는 정조가 친히 참석하여 화성부의 사민(四民 : 원래는 사농공상의 모든 백성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홀아비, 과부, 독신자, 고아 등 의지할 곳 없는 사람을 말합니다)에게 쌀을 나누어주고 굶주린 백성에게는 죽을 끓여 먹이는 진휼 행사가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또한 1796년 행차시에 정조는 7언 절구 한 수를 지어 문루에 걸어 두게 하였습니다. 신풍루에서는 해마다 봄이면 향음주례(鄕飮酒禮)를 거행하여 수원 춘팔경의 하나인‘신풍사주(新豊社酒)’의 무대가 되었습니다. 현재 신풍루 앞에는 상설문화공연을 여는 광장을 비롯해 홍살문과 하마비가 있습니다.
1996년 복원공사가 시작되었고, 2002년에 중심권역의 복원공사를 마쳤습니다. 2016년부터 화성행궁 우화관과 별주의 발굴조사와 복원사업이 2023년에 건축 마무리하였습니다.
신풍루(新豊樓) 편액
1790년(정조 14년)에 누문 6칸을 세우고 진남루(鎭南樓)라 하였습니다. 1795년 정조는 신풍루로 고치라고 명하고, 조윤형으로 하여금 다시 편액을 쓰게 하였습니다.
지금 걸려있는 편액은 원판을 복사하여 새로이 제작한 것으로 원본과 같다하나 고풍을 느낄 수 없어 다소 아쉽습니다.
화성행궁(華城行宮)
화성행군 현판은 본래 정조대왕이 친히 써서 정전인 장남헌(壯南軒)에 걸었던 것으로, 원본은 국립고궁박물관에 있다고 합니다.
화성행궁(華城行宮) 현판 글씨는 해서체로 썼고 화(華)자 우측 상단에는 전서체로 어필(御筆)이라 쓰고, 타원형의 홍재(弘齋)인장을 찍었는데, 어필은 왕의 글씨, 홍재는 정조대왕의 호입니다.
좌측 궁(宮)자 옆에는 전서체로 '여천위십유팔년계축맹춘(予踐位十有八年癸丑孟春)'이라 썼습니다. '내가 왕위에 오른 지 십년하고도 팔년이된 해인 계축년(1793년 정조17) 음력1월(이른 봄)'에 썼다는 뜻입니다. 글씨 아래에는 정방형의 정조대왕 어보인 규장지보(奎章之寶)가 새겨져 있습니다.
정조대왕의 필력이 가장 잘 드러난 현판으로 평가됩니다.
화성행궁 현판의 크기는 105.9 x 319.7cm입니다.
우측 위 어필(御筆) 홍재(弘齋)
좌측 여천위십유팔년계축맹춘(予踐位十有八年癸丑孟春)
그 밑에 규장지보(奎章之寶)
공방거리
팔달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