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종교 중에 개신교만큼 종말론을 주장하는 교회도 없다.
다미선교회 시한부 종말론 사건은 이장림 목사 등이 1992년 10월 28일에 세계가 종말(終末)하여 휴거(携擧), 즉 예수가 세상에 왔을 때 ‘신도들이 하늘로 들어 올림 받는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종말론을 주장하여 기독교계뿐만 아니라 당시 사회에서도 파란을 일으킨 사건이었다. 그러나 막상 10월 28일에는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휴거’(携擧)라는 말은 이장림 목사가 1978년 어니스트 앵글리(Ernest Angley)의 예수 재림 소설 Raptured를 번역하면서 처음 사용하였다. ‘광희의’, ‘황홀한’이라는 뜻의 Raptured를 의역하여 만들어 낸 단어다. 그들은 1987년에 〈다가올 미래를 대비하라〉는 예언서를 내면서 시한부 종말론을 적극 주장하기 시작했다. 1992년 10월 28일 24시에 휴거 현상이 나타나고, 1999년에 종말이 온다고 주장했다.
맹신도들은 종말론에 세뇌되어 학업이나 생업을 그만두거나 재산을 교회에 바치는 일이 일어났다. 철도공무원이 시한부 종말론의 설교 테이프를 열차 안에서 틀다가 해직된 사례가 있었다. 이 해직된 철도공무원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퇴직금을 종말론 교회에 헌납했을 뿐만 아니라, 두 자녀를 데리고 잠적해 버렸다. 전라북도 완주군 고산면에서는 어린이를 포함한 신도 10여 명이 1991년 10월부터 가정을 내 팽 긴 채 외부와의 접촉을 끊고 기도원에서 생활했다. 그 외에 경찰이 확인한 종말론의 피해는 100여 건에 달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미래학(Futurology)과 종말론(Eschatology)은 미래에 대해서 말한다는 점에서 비슷해 보인다. 미래를 예측하고 그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오늘 무엇을 해야 하는가, 라는 메시지를 전한다는 점에서 유사점이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래학과 종말론은 다음 몇 가지 점 때문에,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들은 ‘종말론에 대해 마태복음 24장’을 자주 인용하기도 한다.
첫째로 미래를 말하는 근거가 다르다. 미래학은 과거와 현재를 기초로 미래를 예측하여 말한다. 다시 말해서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시대 변화의 흐름을 분석하고 그것을 기초로 미래의 변화를 예측하여 미래에 대해 말한다. 이에 비해 종말론은 하나님의 약속을 기초로 미래를 믿음으로 말한다. 다시 말해서 성경이 말씀하는 미래에 대한 하나님 약속의 말씀을 확신하며 미래에 대해 말한다.
둘째로 때를 보는 관점이 다르다. 미래학은 오늘로부터 미래를 바라본다. 다시 말해서 오늘 우리가 서 있는 이 자리에서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바라보는 것이다. 이에 비해서 종말론은 미래로부터 오늘을 거꾸로 바라보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미래를 믿고 그 자리에 서서 오늘을 거꾸로 돌이켜 보는 것이다.
셋째로 오늘에 주는 메시지 자체가 다르다. 미래학은 다가올 미래를 선점하기 위해 오늘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라는 메시지를 전해 준다. 이에 반해 종말론은 종말에 오실 하나님의 심판을 대비하기 위해 오늘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라는 메시지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시기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한마디로 정리하면 재림의 시기를 말한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셔서 이 세상에 임하게 될 종말의 시기를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재림은 종말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종말을 생각하며 살라는 말씀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종말이 가까웠음을 알면서 살라는 말씀이다.
사실, 사람들은 미래학의 관점을 가지고 살아간다. 오늘의 자리에서 미래를 내다보며 사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내일은 오늘보다 나은 삶을 살아갈 것인가, 어떻게 하면 내일도 오늘 누리고 있는 이 자리를 지켜내며 살 것인가를 생각하며 살아간다는 말이다. 그러나 정말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정말 시급히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한 채 허망한 일에 매달리며 살아가고 있다.
여러 해 전 세상을 떠난 법정 스님이 쓴 [무소유]라는 책에 ‘미리 쓰는 유서’라는 글이 실려 있다. 이분이 아직 활발하게 활동할 때 미리 유서를 써본 것을 책에 실었다.
특히 유서의 서언 부분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죽음 쪽에서 보면 한 걸음 한 걸음 죽어 가고 있다는 것임을 상기할 때, 사는 일은 곧 죽는 일이며, 생과 사는 결코 절연된 것이 아니다.
죽음이 언제 어디서 나를 부를지라도 "네" 하고 선뜻 털고 일어설 준비만은 되어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법정 스님의 유서는 남기는 글이기보다 지금 살고 있는 '생의 백서(白書')가 되어야 한다. 그렇다. 우리가 종말을 생각하며 산다는 것은 이렇게 미리 유서를 써보는 것과 같다. 오늘 죽음 앞에 서 있다고 생각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남기는 글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한 생의 백서를 써보는 것도 생각해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