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열린시조 1998년 김수엽 작품평>
■ 이 시인을 주목한다 / 김수엽 /
제목; 젊은문학과 금기의 해체작업
이 재 창 (시인)
한국경제가 위기를 맞고 있다. 국가 파산에 직면한 상황에서 그 불똥이 문화계까지 확산된 마당에 현대시조의 위상은 참으로 암담한 것으로 보인다. 대기업들은 본격적으로 대규모 감원을 예고하고, 현장의 근로자들을 명예퇴직 권고사직 대기발령 재택근무 무급휴직 등 갖가지 방법을 동원해 인원 줄이기에 혈안이 돼 있다. 일을 저지른 사람들은 모두 무대 저 편으로 사라지고, 그들은 책임질 것들이 없는 것처럼, 그 공직만 떠나면 그만인 것처럼 태연하다. 경제청문회가 열리면 그 잘잘못은 규명 되겠지만, 거기서 파생된 우리 국민들의 삶은 참담하다. 위정자들의 책임과 고통을 대신 지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불안한 현실의 비관론속에서도 현대시조의 미래는 어둡지만은 않는 것 같다. 90년대 시인군들에게서 확실한 가능성의 징후를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젊은 문학만이 가지는 특징들이 현대시조의 새로운 활력소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시조의 기본 정형은 지키면서 내용이나 형식에서 그 이전에 없었던 낯설고 실험적인 색깔들이 새롭게 자기를 변화시키고, 더 나아가 시조단의 금기들을 하나씩 깨뜨려 가는 것은, 이미 내부의 힘이 고갈되어 버린 현 시조문단의 터무니없는 경계의식까지 발현하게 한다.
그러나 90년대 시조시인군들의 뚜렷한 그들의 문학적 금기의 해체작업이 이제 스스로 힘을 발휘하기 위한 제스처를 보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권력자들이 안심하고 기득권의 성찬을 즐기고 있는 것처럼 현 시조단의 기득권층들은 그들의 관료주의적 소시민적 지식인 문학의 현대시조를 급격한 변화나 새로운 시도를 젊은 세대들의 왜곡된 문학적 취향으로 곡해 하거나 비난을 서슴지 않는다. 갇혀있는 문학의 그 경계를 넘어서려는 그들의 시도와 노력들에 대한 비평적 오류들은 현대시조에 대한 도전의 열망이 고갈된 늙은 문학의식에 불과하다. 늙은 문학은 현시대의 사회적 조건이나 변화에 대한 적응력이나 자기 스스로 변화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타장르와 대결할 힘을 잃어버리고, 현실인식이 배제된 과거답습과 자기표절을 자양분으로 연명하며 제도와 체계에 빌붙어 그 비굴한 문학적 여생을 유지하려 한다. 세계전복의 힘이 없는 문학은 필연적으로 숙주에 기생할 수 밖에 없다. 그렇게 제 몸을 파는, 다름아닌 더러운 매춘에 나서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금기의 경계를 넘어서지 못하는 문학은 결국 그 자생력을 상실하고 더 이상의 세계를 변화시키지 못한다. 젊은 문학만이 세계의 껍질을 찢고 탄생하는 것이다.
90년대 시조시인군의 한 명인 김수엽 시인은 앞에서 이야기 한 젊은 문학의 대표성을 지닌다고 볼수 있다. 현대인의 삶이 대게 도시 공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고 생각하면, 시조에 있어서 도시화 또는 도시체험의 증대는 한국 현대사회와 시의 역사적 변화의 주요한 지표 중의 하나라 이야기 할 수 있다. 김수엽 시인의 그러한 징후들은 도시와 농촌간의 갈등, 개인과 사회, 집단과 집단 사이의 갈등 속에서 발현되는 현상들을 지금 겪고있는 IMF와 대비해 시인의 가슴에 잘 각인돼 있다. 그러면 그의 시조를 한번 살펴 보자.
어머니 가슴팍이 차디차게 식었습니다.
착하디 착하게 받들어 키운 녀석
떠난 지 30년 만에 고향집을 찾습니다.
내 둘레에 포도알처럼 박힌 사람냄새
목까지 차오른 한숨으로 익었습니다.
어쩔까 피뭉치 하나 토해내는 저녁달
달궈진 하늘도 어둑발로 내리고
한 입 바람떼가 바다껍질 물어 뜯는
생명은 파충류 꼬리 자르듯 땅바닥을 기고 있다.
- <아이, 엠, 에프, 지금은> 전문
지금 우리 근로자들은 마음 편한 사람이 없다. 모두가 불안 초조하다. 언제 목이 달아날 지 모를 지경이다. 그러니 하루 하루가 살얼음판을 걷는 생활일 수 밖에 없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될 지 몰라 상사들이 부르면 혹시 내가 해당되지 않나 괜히 가슴이 덜컥거리며 안절부절 하기도 한다. 올 연말이면 실업자가 대략 2백여만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지금의 위기를 극복하고 구조조정에 성공해 경제가 회생길로 접어든다 해도 3~4년간 1백만명 이상의 실업인구가 남는다고 한다. 정말 어려운 시대의 문학의식을 실감나게 한다.
위 시에서는 시골 어머니의 아들에 대한 한숨이 현시대의 배경에 맞게 잘 나타나 있다. 시골에서 농사 지으며 내 아들 만큼은 잘 키우겠노라고 도시로 유학 보낸후 30년만에 실직이라는 아픈 멍에를 지고 낙향한 아들, 한숨으로 익은 포도알처럼 피뭉치 하나 토해내는 저녁달처럼 어머니의 아들에 대한 사랑과 실직의 아픔은 정말 우리 모두의 슬픔처럼 보인다. 그리고 근로자들의 생명을 파충류 꼬리로 비유한 발상과 제 몸이 잘리면서도 다시 살아야겠다고 땅바닥을 기며 꿈틀대는 시인의 상상력과 현실인식이 돋보인다. 셋째수 종장의 비유나 상상력은 감히 그 어떤 장르에서도 발견하지 못했던 김수엽 시인의 탁월한 시적 재능을 나타내 보인 것 같다. 국가의 위기로 치부되는 세기말의 고통, 도시유학-취업-실직-귀농-한숨으로 이어지는 시적 전개와 고향집-포도알-피뭉치 저녁달-파충류 꼬리로 귀결되어 다시 살야야 겠다는 생명력으로 부활하는 시적 이미지는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모성과 잘 조화되어 빛을 발한다. 그러나 위 시의 형식에 문제가 있다. 첫째수의 종장에서 <30년 만에>는 자수의 파괴다. 파괴라기 보다는 당연히 지켜져야할 5자 이상은 그 미만이 되어서는 안된다. 혹시 작가가 실수로 <삼십년 만에>를 잘못 표기한 것이 아니었나 의심이 가지만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괜찮은 가문이다
꽤 그럴싸한 뼈대
내 유년 들춰 보면 투명한 약속들
모두가
속삭임도 없이 등 맞대고 산단다.
하수구로 내뱉어진
쓰디 쓴 마침표들
죽은 송사리떼
참외씨같이 펄럭인다.
낚시꾼 삶을 털어내는
낯익은 풍경 하나
거품을 휘갈겨 논
야윈 강가에서
내 가슴을 친다, 내 눈을 비벼 뜬다
시커먼 눈동자가 터진
내 몸이 쓰러진다.
- <만경강 죽다> 전문
가문의 뼈대와 만경강의 오염, 그리고 낯익은 낚시꾼의 풍경 하나. 내 몸이 쓰러지는 만경강, 만경평야에서의 유소년시절 뛰어 놀던 고향과 막 고개를 내민 푸른 보리 이삭이 세찬 바람에 시달리듯 굶주림과 시인의 가슴에 묻어둔 고향의 낭떠러지와 같은 도시의 학창생활 속에서 체득한 독버섯과도 같은 현실, 그러한 유소년 시절의 상상력을 동원해 현대사회의 생태계파괴와 직장을 잃은 실직자들의 가슴앓이 삶을 털어 내는 낚시꾼의 모습으로 환치시킨 이미지가 독자인 우리 모두의 가슴에 와 닿게 한다. 자연친화적으로 어린시절을 보냈던 추억들이 이제는 죽은 송사리떼로 나타난다. 그리고 시커먼 눈동자가 터진 내 몸이 쓰러지고 만다. 실직자와 낚시꾼, 죽은 송사리떼와 유년의 투명한 약속들, 시커먼 하수구와 우리가슴을 죄는 시대인식의 이미지가 잘 대비되어 작품의 긴장감을 유발한다. 이것은 시인의 의도와 잘 맞아 떨어지면서 현대시조의 현실인식이 어떠한가를 모범적으로 보여 주며, 우리 현대시조도 결국은 자유시에 뒤질 수 없는 형식의 자유로움과 현실을 좌시하지 않는 주제의식은 단순서정을 일삼는 기득권층의 작가들이 배워야 할 중요한 부분으로 생각된다.
결국 환경파괴는 인류를 죽음으로 몰고갈 수밖에 없다는 경각심을 준다.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은 자연질서를 파괴한 주범으로 그 환난의 대가를 치르면서 생태파괴의 전률스런 공포와 강박관념으로 시달릴 수밖에 없다.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게된 쓰레기가 온 천지를 뒤덮고, 모든 하천들이 화학오물로 썩는가 하면 지하수까지 오염되어 먹는 물까지 온전하지 못하다. 이러한 환경위기의 시대에 시인들에게 요구되는 생태학적 상상력은 인간 생존의 근거를 위협하는 환경훼손에 대한 대응으로써 현대시조가 지향해야할 한 분야임이 틀림없어 보인다.
길은 수렁이다.
그늘이 질펀하다.
하늘도 그 길을 따라
직선으로 칼을 간다.
가끔은 사람들보다
볕이 그리운 세상
멸종을 앞둔 공룡의 몸부림인가,
발악인가
번지가 번지만 낳아 깨알처럼 빽빽하다.
그 속에 말없음표만
줄줄이 흔들린다.
- <1997, 서울은> 전문
서울은 발악하는 공룡의 몸부림처럼 위태롭게 보인다. 세계는 무섭게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있고, 그 변화의 중심에 서서 흔들리는 우리들의 삶은 마치 유효일자가 지나 버린 어느 전시 공연의 티켓처럼, 무용지물이 된 인생살이처럼 무겁게 나타난다. 우리들의 현실적 상황이 비인간적이며 진정한 인간성을 상실한 것도 오래된 일이지만, 그의 시에 나타난 도시생활에 대한 부담스러울 정도의 애착은 인간에 대한 애정과 적극적인 관심에 뿌리를 두고 있는 듯하다. 인간은 사회적인 존재일 뿐만 아니라 역사적인 존재이며, 감정과 이성을 지닌 내면적 정신적 존재로 인식함으로서 갈등하고 번민하는 시인 자신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복잡해진 상황 속에 있다는 것과 막막한 도시생활의 한 줌 그리운 햇살을 껴안고 싶은 심정을 토로하는 갈등구조로 위시를 보면 어떻게 사는 것이 인간다운 삶인가 하는 문학적 질문을 갖게 만든다. 이러한 김수엽 시의 질문들에 대한 징후들은 한 시대를 표상하고 지배하는 도시적 욕망과 정서, 억압과 금기들이 가끔은 사람들보다 볕이 그리운 세상으로 표현된다.
제대로 앉거나 서서 숨쉴 공간마저 없이 빽빽이 꽉 차버린 서울. 시인은 여기서 우리 삶을 결정 짓는 새로운 정치 사회적 환경과 문화적 조건보다는 다양한 양태의 동시대적 삶의 내면에 소용돌이 치고 있는 허무와 환멸에 관심을 두고 있다. 그늘진 길의 질펀한 수렁, 하늘까지 맞닿아 칼을 가는 도시구획, 번지와 번지 속에 나타나는 우리 삶의 말없음표. 이것은 밤 서울의 휘황찬란한 네온사인으로 위장된, 기호와 이미지의 소비시대로 접어든 세기말의 풍경이며 종말 없는 종말을 예고하는 발악하는 공룡의 몸부림이다. 바로 오늘의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참모습을 보는 것 같다.
김수엽 시인은 그의 체험적 시론 <대중문학 선언문>에서 그 시대를 이끌어갈 만한 맛과 향을 가진 현대시조를, 굶주림의 삶 속에서 최소한의 숨쉴 수 있는 틈을 마련하고 지탱하게 한 현대시조를, 운명적 소망을 버리지 못하면서도 우리 국민 반쯤은 읽게 만들겠다는 현대시조를, 그러면서도 남들에게 주체할 수 없는 감동을 주는 작품을 영원히 쓰지 못할 것이라는 겸손의 말속에서 우리는 그의 역설적인 희망을 갖을 수밖에 없다. 세기말 문명사적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나아가야 할 시조의 길을 찾으려는 그의 자세나 노력들이 참으로 눈물겹다. 그의 말처럼 우리 시조단의 미래는 결코 어두운 것만은 아니라고 믿는다. 시조의 위기, 시조는 죽었다 라는 말들이 담론의 형식으로 나오기는 했지만 시조의 끈질긴 생명력은 이제부터 그 저력을 발휘하리라 생각한다.
80, 90년대를 지내오면서 우리는 커다란 변화를 겪었다. 혁명은 운동으로, 실천은 욕망으로, 정치 경제학은 문화연구로, 진보주의는 다원주의로, 지배 피지배 논리는 탈중심주의와 해체주의로, 계급에의 논의는 기호에 대한 탐구로, 민중은 대중으로, 민족은 세계화로, 마르크스는 푸코와 보드리야르로 그 중심이 옮겨갔다고 한다. 그 결과 담론의 중심어들도 어느새 컴퓨터, 뉴 또는 멀티미디어, 영상, 사이버, 정보화, 또는 그린, 페미니즘, 다국적 기업, 문화 제국주의와 같은 새로운 용어들로 바뀌었다. 그러한 거대한 변화 속에서 현대시조는 가까스로 나마 명맥을 유지했다고 볼 수 있다. 삶과 세계에 대한 깊은 성찰에서 길어 올려진 진정성의 분위기를 지닌 본격시조 작품들이 몇 몇 그룹들에 의해서 주도적으로 발표되었고, 시조의 위기에 대한 불길한 징후들이 서서히 이야기되어 지고 자각하면서 많은 것들이 이제서야 논의의 대상거리로 인식하게 된 것만도 시조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고 생각된다. 획일적 성향에서 다양한 세계인식을 갖도록 길을 열어 주는 것도 고답적인 시조단에선 필요하기 때문이다.
서두에서 밝혔듯이 90년대 시인들의 문학적 금기의 해체작업이 성과를 이루며 진행하는 것은 김수엽 나순옥 강현덕 권갑하 이달균 문희숙 시인 등등과 같은 역량있는 시인들의 다양한 세계인식의 활발한 문학적 작업들이 익어가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