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斬新의 極致, 現代詩論의 모든 것
ㅡ 金松培 詩論集 <<성찰의 언어>>
新 毫(본명 신규호)
들어가는 말
전해오는 우스운 이야기 한 토막부터 소개한다. 우리말의 기초를 배운 한 외국인이 “없는 것 없다”는 간판이 붙은 가게에 들어갔다. 이중 부정으로 된 간판의 뜻이 “많은 것이 있다”는 광용적 어법임을 알면서도, 주인을 골탕먹일 심산으로 이것저것 묻다가, 흔히 과소 과장의 뜻으로 쓰이는 ‘모갱이 눈물’이 있느냐고 물었것다.
주인이 없다고 대답하자, ‘다 있다고 헤놓고 왜 없느냐’고 항의를 했다. 그래서 아래와 같은 실랑이가 벌어졌다.
“언제 다 있다고 했소?” / “없는 것 없다 안 했소!”
“찬만에! 있는 건 있고, 없는 것은 없다는 뜻이죠.” / “엣?”
이 이야기를 꺼낸 뜻은, 김송배의 시론집 <<성찰의 언어>>를 “시론의 모든 것”이라 표현한 데 대해, 수량적인 개념에만 사로잡혀 혹 이론(異論)을 제기할 독자가 있을지 몰라 미리 알려 두기 위한 것이다. 이런 독자는 이론 제기에 앞서, 세 가지 논증법의 하나인 이른바 ‘귀납법’도, 실은 마지막 단계에 가서는 ‘비약’이 있다는 점을 상기하는 게 좋을 것이다. 아니, ‘모든’의 동의어인 ‘온갖’을 떠올리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온’의 어원이 바로 ‘백(百, 100)’이기 때문이다. 백 가지면 모든 것으로 인정해 주는 것은 무엇보다도 ‘백과사전’이 실천하고 있지 않은가.
표지를 뻬고도 690쪽에 달하는 이 거창한 저서는, 공교롭게도 ‘책머리에’의 <성찰은 체험의 분사(噴射)>와, 여섯 부에 걸쳐 96편의 시론이 들어 있는데다가, 7부에는 부록 세 항목이 있어 모두 합쳐 100이 되므로, ‘온갖’ 것, 즞 ‘시론의 모든 것’이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저서의 뒤쪽 표지를 보면 저자가 연구한 ‘대상 시인’의 수가 자그마치 152명, 그러니까 100의 1,5배가 넘는 것도 아마 유례가 없는 줄 안다.
평설자는 이 많은 시론 중에서 저자의 뜻을 헤아려, 1차적으로 표제에 ‘성찰’이란 어휘가 들어 있는 시론 아홉 편을 골라, 이 저서의 차례대로 독자들에게 평설하기로 한다.
1. <시적 체험과 존재의 성찰>
김송공배 저자가 ‘책머리에’ 적은 <성찰은 체험의 분사>에 의하면 이 저서는, 예총의 <<예술세계>>, 문협의 <<월간문학>>을 비롯한 유수 종합 문예지와 시론집에 이미 발표한 시론을 한데 묶은 것인데, 그 시론들을 꿰뚫은 저자의 신념은 ‘시인의 체험에서 분사된 진실은 위대한 것’이어서, 그를 언어로 표현한 시작품은 ‘인식과 성찰의 순수가 보고(寶庫)로 가득’하다는 뜻이 된다.
따가서 이 저서의 벽두를 장식한 <시적 체험과 존재의 성찰>은 제1부만이 아니라 이 시론 전체를 대표할 만한 시론이라 하겠다. 그다지 오래되지 않은 시기(2003. 8. 30)의 논문이고, 여러 작가들의 창작의 지침이 되고자 ‘한맥작가회의 제12회 세미나에서의 주제 발표문’인 점도 이 시론의 무게를 입증해 준다.
논문의 구성이 3단형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평설자도 소제목을 따라 그 내용을 요약해 보겠다.
(1) 우선 ‘상상력의 근원’에 대해 저자는, 시인의 상상력은 보편적인 개념을 초월하는 생산적 · 창조적이어야 함을 윌리엄 제임스의 학설을 인요하여 밝힌 뒤, 그러한 상상력의 근원이야말로 개인을 정점으로 하여 우주적 · 영혼적인 것마저 포괄하는 인간의 체험에 있음을 리차드의 학설을 빌려 깨우쳐 주었다.
(2) 이어서 ‘주제로서의 성찰’로 넘어가, 체험을 통한 상상력이 이미지의 새로운 변심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는 주제, 곧 존제에 대한 성찰이 필요함을 말한 뒤, 체험의 소산이 시창작에서 절대성을 유지하는 이유를 톨스토이 · 존 듀이 · 레오나르드 다 빈치 · 이광수 등을 통해 입증해 보이고, 체험의 원류가 작품에서 어떻게 형상화되는지를 <그림자>(박후자) · <목숨>(신동집) · <시간에 대하여>(자작시) · <하관>(박목월) · <우리들의 미움도(이창년) 등의 작품을 통해 구체적으로 설명해 보였다.
(3) 마무리인 <체험과의 시적 과제>에서는 시인의 체험이 감상 또는 독백을 지양하여 독자와 교통 공유함으로써 진실 자체로 나타남을 바슐라르의 <물과 꿈>을 빌려 실증해 보이는 한편, 정서만이 아니라 사상의 주제에로의 승화, 진선미의 탐구, 메시지적 기능 강조를 거쳐, 현대시에서의 문명과 사회적 현실을 강조하여 아래와 같이 적었다.
사회와 문명에 대한 비판적인 기능, 통합적인 기능, 교시적인 기능이 함께 병행되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존 듀이가 지적경험으로서 그 자체가 완전한 것이 되려면 미(美)의 빛을 쏘이지
않으면 안된다고 했다. 그래서 경험은 표현 속에서 미적인 것이 되는 것이다. 이런 아름다음의
추구가 시의 기능에 부합하도록 체험을 성찰하도록 존재를 확인하는 길이 곧 체험의 시작이라
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이 시론을, 동양에서의 시문학 기원을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 ‘詩’라는 한자(漢字)와 관련시켜 평설자 나름대로 풀이해 보니, ‘언어(言)’에 의해 존경하는 상대를 ‘모시는(寺+侍)’ 것이 시문학의 기원이고 보면, 자신이 포함된 ‘존재’의 본질을 옳게 파악하여, ‘미(美)를 쏘인 미적인 언어’로 표현해 내는 일이, 발전된 현대 시인의 임무라는 뜻이 되지 않을까 싶다.
그러므로 이 시론은 값진 시의 창작을 위해 노력하는 모든 시인들에게 매우 유익한 지침을 주는 값진 자료가 아닐 수 없다.
다만, 한 가지 재고할 점은, 네 사람을 한꺼번에 인용한 부분 중 마지막 항목 ‘이광수’(저서 15쪽)는 삭제하는 것이 어떨까 싶으니, 그 이유는 민족적 지조를 끝내 지키지 못한 그의 생애가 바로 작품에 나오는 ‘인생의 어리석은 경험’의 실례가 될 것 같은데다가, 흔히 인용에 있어 셋(3)이라는 수는 안정적이며 중용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계제에, 인용자의 탓이 아니라 외국작품 번역자의 책임인 사항을 하나 덧붙이면, 셰익스피어의 <햄릿>에 나오는 “살 것인가 죽을 것인가 이것이 문제이다.”의 앞 부분은 “죽느냐 사느냐”라고 옮겨야 절박감이 드러나 원작은 물론, 이 시론의 취지와도 잘 어울릴 것이다.
2. <사랑의 구조 확인과 그리움의 내적 성찰>
이 시론은 <예술세계>의 신인상 당선자 김지현의 첫 시집 <빈손 흔들기>를 다룬 것인데, ‘사랑’과 ‘그리움’이 중요 화소가 되어 있다.
‘사랑’은 본디 ‘생각’[思]의 뜻이었으나 생각을 자주 되풀이하는 과정을 거쳐 오늘날 ‘애정’으로 바뀌었고, ‘그리움’은 ‘그립다’라는 형용사에서 전성하였으나, 그에 앞서 ‘그리다’[畵]가 어원이다. 이 둘을 한데 이르게 된 것이 ‘연애(戀愛)’이다.
김 저자는 ‘그리움’에 관한 보편적인 개념을 시로 승화시킨 특성이 시인의 내적 성찰의 일단이자 ‘영혼의 간구와 사랑의 확인’에서 출발한 것으로 보고, <달맞이곷>과 <어둠 소묘. 2>를 분석하여, ‘밤’과 ‘어둠’의 이미지가 ‘환영(幻影)’에서 반사되는 ‘그리움’이라는 새로운 상상의 근원으로서 ‘어둠과 꿈 사이’ 또는 ‘무한의 바다’를 지향하고 ‘외로운 넋’을 위무하면서 혼돈의 공간을 탈출하려 하고 있음을 간파하였다.
밤이면 / 이슬에 젖어 / 슬픈 바람 속에 / 떨고 있는 / 외로운 넋이여.
(<달맞이꽃>, 전문)
그런가 하면, 흔히 ‘밤’과 유사한 개념으로 등장하는 ‘섬’에 대해서도, 고립 · 고독 · 죽음이라는 일반적 상징을 뛰어넘어 현실 탈출의 대상물이자 이상향 실현을 위한 동경의 대상물인 ‘기원(祈願)’이라는 사적 상징임도 밝혀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김지현 시학의 상황 전개를 그리움, 흔들림, 기다림, 자아 성찰, 영혼을 통한 화해라는 순서로 정리, 시인의 사랑과 진실, 정서의 향기, 창조의 예지 등이 숭고한 가치관으로 진솔한 자기 실현을 위한 자기만의 해법을 스스로 정의하는 성스러운 속삭임이요 노래인 자성의 시적 결과임도 마저 도출해 냈다.
그리하여 표제시 <빈손 흔들기>에서, 자기 정리와 함께 자아 성찰을 승화시키는 미감의 주제가 바로 ‘영혼’과의 사랑을 인간에게 공감하는 청량제의 맛을 더해 준다며, 그 종교적인 의의를 평가했다.
기적으로 느껴진다 /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일 / 만나는 사람들 그리고 사물들.... / 이 세상
소유의 모든 것 / 나의 것이 진정 아닐진대 / 이승의 그 모든 애착 / 모두 던져버려야 하리 /
언젠가 홀연히 떠나더라도 / 담담히 손 흔들며 / 그렇게 떠나기는 좋을 / 정갈한 영혼을 준지
해야겠다.
김 저자는 이 시론의 내용을 아래와 같이 요약한 뒤, 앞으로의 보다 높은 향상을 위한 애정어린 당부를 잊지 않았다.
김지현 시인은 결론적으로 내적 성찰을 통해서 구조적인 사랑의 확인이라는 거시적인 시혼을
투여하는 한편 의도적으로 성립된 ‘그리움’의 시적 창출을 위한 이중구조의 시법을 구사함으로
써 그동안 현실적인 삶에서 유보되거나 침체되었던 인생관을 지적인 변화로 탐색하는 유연성이
돋보이고 있다.
이 시론을 종합해 보면, 김지현의 시는, <종교문학의 새로운 전망>에서 역설한 ‘인생이란 날줄에 종교란 씨줄이 들어가 있는 문학’을 지향해 나가고 있다고 보여진다.
3. <성찰의 도정과 서정적 주체>
박성채 제2 시집 <<바다는 물결로 말한다>>를 다룬 이 시론은, 아놀드의 ‘시는 인간의 가장 완벽한 이야기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라’를 인용, 21세기에 있어서는 완벽한 이야기와 진리의 성격이 중요한 담론 · 과제가 될 것이므로, 시는 인간 존재의 보편적인 성질의 상상으로부터 출발하여 존재에 대한 인식에서 청출되는 가치관의 정립이 필요함을 말하고 나서, 채근담의 마음 비우기에 언급하여, 박 시인의 자연 친화, 서정성의 구가와 관련지으었다.
우선 ‘바닷가 암벽 틈에서 / 바람과 이슬로 살아온 세월 / 파도가 끝나면 모래톱을 거닐며 / 한 줌의 공적(空寂)을 줍는다 / 황혼길 스쳐가는 / 물결임을 알면서’로 시작되는 <風蘭 (1)>을 통해 현실과의 단절이 박 시인의 심연에서 ‘공허’와 ‘한적’으로 시대적 변화를 이겨내는 ‘곧은 선비정신의 이미지’ 형성이 뛰어나먄서도, 체험적인 상황인식에 의한 사회 비평적 요소의 가미 현상이 있음을 밝혀낸 후, <풍란 (4)>를 통해 ‘자아의 인식을 통한 평범한 순수에 도달하려는 미학이라 규정하고, 또 다른 서정의 순간인 ’향수‘에도 눈을 돌려 친자연에 광의의 원류를 형성하고 있음과 어조가 진한 자아의 인식에서 발현되고 있음을 알아내어, 이렇게 말한다.
시인이 빚어내는 예술과 자연이 생성하는 만유의 조화는 바로 시인의 상상력에 계시를 불어
넣는 촉매체이다. 박성채 시인이 이러한 자연과의 심취는 누구나 그러하듯이 ‘참외밭 한켠에
정겨움으로 서서 / 그때 그 유년의 님을 기다리(<원두막. 1>)’는 향수, 즉 원류에 대한 동경이
충만되어 있다. (중략)
한편 박성채 시인의 자연 서정은 자아의 성찰과 동시에 정감 넘치는 이미지의 조화에도 상
당한 기여를 하고 있는데 ‘흩어진 풍경 하나 주워’ 주는 것이나 ‘피로한 그림자 하나 안고 돌아’
오는 형상 모두 순정의 미학으로서 존재에 대한 발원을 찾고 있으나 그것이 곧 허탈이며 허무
이며 복원될 수 없는 시간성의 회한이 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박 시인의 또 다른 면모인 사회성도 간과하지 않아, 그것이 역사적인 인식이며 대사회관의 명징한 형상화임을 덧붙인다.
서울의 하늘은 검은 구름성 / 분진과 소음으로 숨막히는 이 거리에서 / 무엇을 더 내어 놓으
란 말인가
이어서 저자는 박성채 시인의 작품에서 인간의 ‘업보’를 확인, 그것이 자아를 형성하는 주체로서의 서정성의 팀구임을 규명하고, 자아와 영혼을 성찰하는 심리적 근저에 불심이 자리잡고 있음을 추정하고, 아래와 같이 결론을 내린다.
박성채 시인은 천성적으로 서정의 범주를 벗어날 수 없는 자연 친화의 시인이다. 그가 자연
에서 조화된 순응의 이탈을 근원으로 하여 자아를 긍정하면서 성찰하는 도정(道程)에서 달관의
이치를 정립시킨다. 이것이 근본적으로 삶의 궤적과 그 체험에서 분사하는 그의 진실이지만, 그
체험의 본원은 돈독한 불심이 큰 축으로 우뚝 서 있음을 알 수 있다. 때로는 사회적인 모순과
불합리에 대해서 비판과 분노를 던지지만, 그는 항상 (중략) 기원으로서의 화해 의지도 잊지 않
고 있다. 또한 박성채 시인의 영원한 영혼의 갈망은 정토(淨土)에 이르는 순정적 의지라고 할
수 있다.
4. <서정적 상상과 성찰의 구조>
박천영의 첫 시집 <물에 취해버린 섬 하나>를 다룬 이 시론은, 시인의 의식과 시 정신이 시인의 인식 내면에 침잠된 창조적인 자의식의 동반으로 출발한다는 시의 위의(威儀) 자각하에, 박 시인의 당면한 현실적 삶의 투영인 <갈대 이야기>를 분석하는데, ‘기다림’이 중요 화소가 된다.
억지 웃음으로
괴로움을 이기려 했다
결코 사랑이 아닌데도
바람 부는 날만 더 심한 아픔을
흔들고 있었다
(<갈대 이야기>, 일부 인용, 평설자)
김 저자는 ‘기다림’이 ‘억지 웃음’이거나 ‘괴로움’이며 ‘심한 아픔’이고 ‘차가운 침묵’ 등 존재에 대한 회의(懷疑)이자 좌절 불신의 복원을 위한 것임을 이어령의 저서도 원용하여 밝혀낸다. 그러나 ‘기다림’의 부조리를 설명하는 덴 베케트의 부조리극 <고도를 기다리며>보다 유익한 것은 없을 것 같다. 왜 기다리는지도 모르게 오래오래 기다리기 때문이다.
계제에 검토해 보고 싶은 것은 ‘기다림’이 ‘억지 웃음’이거나 ‘괴로움’이라는 양자택일이니, 시의 1~2행을 살펴보면 문장구조로 보아 ‘억지 웃음’이 ‘괴로움’을 한정하고 있어 쥐쪽으로 무게가 실리는 반면, 시적 표현은 애매모호(엠비규아타)이기 때문에 양쪽과 모두 연관을 맺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어서 저자는 <빈 화분>과 <불면증>에선, ‘그리움’에서의 절제된 감동의 요체가 ‘가난’에서 비롯된 것임을 밝혀낸다.
그렇다면, 박천영 시인이 갈망하는 ‘그리움’과 ‘기다림’은 ‘가난’이란 지극히 현실적인 물질의
타성이 심리적인 갈등으로 분출되었는가 하는 의구심을 떨칠 수가 없겠지만 그의 내면에는 ‘가
난한 바람’과 ‘가난한 베란다’이며 ‘가난한 나로’ 그리고 ‘가난안 밤’(<불면증. 2>)으로 충만되어
이 ‘가난‘이 포괄하는 이미지는 시인의 비장한 정신세계를 예감하게 한다. 대체적으로 시인들이
그들의 시세계를 형성하는 구도를 살펴보면 갈등의 의식은 어떠한 기원을 단초하는 전제조건이
되기도 하는 것을 보게 되는데 박찬영 시인의 갈등도 이러한 형이상학적인 상상력에서 탐색하
는 성찰의 기교적인 매체로 이해할 수 있다. 왜냠하면, ’가난‘이라는 빈도수 잦은 이 시어는 물
질보다도 정신적으로 총체적인 영혼의 갈구가 더욱 그의 인식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기 때문이
이다.
박 시인의 그리움과 기다림을 정신과 영혼에 무게를 둔 ‘가난’의 분출로 본 저자의 견해는, 우리말 ‘가난’의 어원인 한자어 ‘간난(艱難)’에 매우 가깝다 하겠다. 어렵고 힘든 모든 것을 다 포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어서 저자는 <꽃>을 분석하여 아래와 같이 적거니와, 여기서 사용된 용어들은 그 하나하나가 모두 적절하고 논지 전개도 빈틈이 없어 시론의 좋은 본보기가 되어 읽을 맛이 나, 그 결과 박 시인의 <꽃>이 최근 유명을 달리한 한 무의미 시인 작품과는 또 다른 감흥을 느끼게 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 꽃에서 ‘먼저 시들어 기대고 싶어라’고 결론을 제시함으로써 그의 (또는 모든 인간의) 연
약한 단면을 제시하고 인간의 원형으로 돌아가기를 현현하고 있다. ‘그대 남은 세월이’나 ‘내 이
한 송이’의 대칭적 이미지는 현실에 대한 공통성의 제시이며 어저면 우리 모두가 수용하거나
긍정하지 않으면 안되는 성찰의 구조로 공감의 영역이 확대되고 있다.
시론은 <달과 별> · <하산길. 4> · <허수아비> · <단풍놀이> · <진달래> 등의 분석을 통해, ‘이지에 대한 탐구자이며 독창성이 중후한 창조자’인 시인의 한 살함으로서 박 시인이 참회 · 성찰의 전단계인 화해를 위한 신선한 사유의 흐름을 호소력있게 구사함으로써 시인의 생명력을 보여 주었음을 평가하고 이랴와 같이 결론을 내린다.
시인이기 이전에 인간이라는 통념을 배제하더라도 시는 인간의 솔직하면서도 결연한 언어의
몸짓이 필요하다. 시는 감동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따뜻한 가슴 깊숙이 무르익은 진액으
로 곱게 엉겨져야 한다. (중략)
이처럼 이 시집 전체를 관류하는 주제의식은 서정을 주축으로 한 성찰의 졀집으로 순응의 미
학을 도출하는 열정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5. <성찰에 투영된 영혼의 시적 구도>
이번에는 이난호의 첫 시집 <<미완성의 수묵화>>를 다룬 시론으로 넘어간다. 이 글은 본고에서 다룬 시론 중에서는 가장 길어(11쪽에 이름), 저자가 깊은 관심을 기울였음에 짐작이 간다. 인식과 성찰이 다양한 형태의 진실을 분사하게 되므로, 저자 자신에 의해 기왕에 ‘체험의 시학’아라 명명된 내용과도 연관이 있다는 언설도 이를 뒷받침해 준다.
저자는 우선 이난호 시인의 시적 출발이 ‘그리움’에 있음을 <기다림>을 통해 알아낸다.
전화가 온 날은 여왕이 된다 / 어두운 방 뛰쳐나와 / 꽃길을 거닐고 싶었다 // -거울 속에
비추인 금관 / 아무도 모르는 이 기쁨 // 눈치 챈 참새 웃음소리 / 풀숲엔 화음 요란하고 /
푸른 장미 하늘도 둥둥 떠간다 // 함께 거닐던 강뚝엔 / 아카시아 향 외롭고 / 그때 고운 피
리소리 / 가슴에 남아 메아리 친다
‘기다림’의 함축 내용에 의구심이 일고, 관념적 · 감상적인 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래의 지향점에 대한 기원의 의지가 무언의 거대한 상징성에서 분출되어 있음을 평가하고 나서, <길>에서는 생활에서 부각되는 사물들의 모습이 시와 상관관계가 있다고 사유하는 이 시인의 마음을 읽어, 시와 삶과의 동일성 의지를 유추해 낸다.
이어서 그런 그리움 · 기다림에 대한 천착이 단순한 언어 순화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확고한 인생관의 정립이 진실과 영혼과의 교감과 시와의 접목을 위한 향기가 가득 피어오름도 <뜰에. 1~2>를 통해 알아낸다.
(1) 내 상한 마음 속 비치는 / 너의 투명한 얼굴 살피어 / 이제사 내 맑은 영혼 찾아보리
(2) 영원히 어그러운 싸늘한 약속 / 빈 자리 그늘에 잿빛 침묵으로 / 외로운 영혼만 손짓하고
있다
저자는 더 나아가, 지혜의 기다림이 인생 최종의 성취의식을 포함하기 때문에 ‘영혼’의 ‘손짓’이 내밀한 표징에 순응하고 있음을 강조하여 이렇게 말한다.
이런 현상들은 시인 누구에게서나 발현되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지만 이난호 시인에게서는
너무나 순수지향의 순정적이 아닐 수 없다. 이와 같이 시와 영혼의 접맥을 위한 ‘그리움’의 표
징은 <충전>ㅡ <고백. 1>, <고백. 2>, <가을 들녘>, <무궁화> 등의 작품에서도 읽을 수 있
을 수 있을 것이다.(중략)
그렇다. 이난호 시인은 동화가 되었건 투사가 되었선 자연과 혼연일체가 되고 있다. 누군가
말했듯이 인간이 자연과의 조화는 그 자연을 정복하고 인간의 목적에 맞도록 변형시켜서 해결
하려는 위험은 시인에게서는 찾지 않아도 될 것이다. 시인은 오로지 자연과의 동화를 꿈꾼다.
이 대목은 내용의 우수함만큼 표현은 완벽치 못해 아쉬운 곳이 두 군데 있으니, 하나는 첫 단락의 마지막 여섯 자 ‘있을 수 있을 것이다’인데, 이는 아마도 오식이겠지만, 분량상 특대 때문에 이 시인에 대한 찬사에 따른 무의식적 반복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나머지 한 군데는 나중 단략 첫 문장의 ‘누군가 말했듯이’의 ‘누군가’로, 이는 이름을 제대로 밝힌 후속 ‘안병욱’의 <<행복의 미학>>과 비교해 보아도 효과가 줄어듦을 알 수 있다[평설자 역시 이런 인용을 자주 해 왔으나, 이번에 ‘거울’을 바라본 것처럼 깨달았음을 고백한다).
김송배 저자는 시집에 수록된 시편이 100편을 넘어서이기도 하겠지만, 여전히 작품 분석을 계속하여, <물>의 주제가 생명의 존엄성, ‘겸손의 미덕’임을 들어 시인은 오염 · 파괴를 막고자 ‘신열을 앓는’ 고뇌자임을 말하고, <고로쇠나무>와 <대추나무>에서는 자연에 대한 고뇌 이상의 상처를 함축하고 있음을 꿰뚫고 나자, 이번에는 이 시인의 마지막 남은 특징인 공동체 · 합일체인 가정 문제에 영혼이 각인돼 있고, 특히 여성상 · 모성적 사랑을 탐색하는 일을, 가정애를 자애(自愛)와 동일시한 톨스토이의 언술 실천으로 봄으로써, 이미 앞에서도 확인된 바 있고, 또 앞으로 반복될 저자 자신이 받은 톨스토이의 영향을 간접적으로 드러내 보였다.
기나긴 시론의 마지막 대목에 나오는 <미완성의 수묵화>와 <시>는 이 시인의 특성을 집약한 듯하여, 아래에 인용한다.
인생의 짧은 궤적을 세세하게 감지하고 거기에서 탐색된 자아에 대한 존재의 인식을 통한 실
존의 고뇌와 번민이 성찰로로 전환한 일종의 드라마를 그림으로 현상화하고 있다. 이렇게 출발
한 그의 시적구도는 그 성찰에 영혼을 투영하려는 기원의 의지로 전이(轉移)되는 진실을 공감
할 수 있겠지만, 자연이나 가족 등의 모티프(motif)가 모두 그리움의 이미지로 나타나고 있다
는 특징이 있다. (중략)
바로 이것이다. 이난호 시인의 갈망과 기원은 바로 ‘시’에의 동화이다. 그 ‘정열’과 ‘승화’의
궁극적인 지표는 곧 인간과의 갈등이나 번민을 화해하는 근원으로 정착되어야 한다.
이에 이르자, 김송배 저자가 본 시혼을 왜 이렇게 지세히 다루었는가를 알아차리게 되니, 평설자 가 저자의 어투를 빌려 표현한다면 아래와 같이 될 것이다.
그렇다. 바로 이것이다. 적어도 ’시‘를 논하는 사람인 이상, 시인의 갈망과 기원이 ’시‘와 동화하니, 어찌 자세히 다루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말이다.
6. <인식과 성찰의 상보성(相補性)>
조유금의 제2시집 <그대 노을 속으로>를 다룬 이 시론은, 조 시인이 지향하는 회의(懷疑)가 존재와 의식의 근저에서 획득된 불확실성, 불가시적인 가치관 확인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하는 유추와, 그 의문 속에는 진원지로 ‘슬픔’이나 ‘눈물’이라는 시적 분화구가 잠재되어 있을 것이라는 짐작으로 시작된다.
그리하여 본격적인 작업은 연작인 표제시 <그대 노을 속으로>의 분석으로 이루어지는데, 우선 첫 연에서 문제를 제기하여 다음 연에서 인식이나 성찰의 범주를 일치되게 구사하면서 시적인 전개를 해 나간, 의도적으로 의문과 해법을 예비시킨 구조상의 특징이 밝혀진다. 인용된 시 중 자품 <9>는 이러하다.
순간을 사모하는 / 여명의 불빛으로 / 언제까지나 함께 할 수 있는 것일까 / 그대 노을 속으
로 / 실락원의 연인들처럼 / 지상에서 영원에 이르는 사람들 / 못내, 슬프게 하는 것은 / 잊혀
지기 위해 목소리를 지우듯 / 절망하는 고백마저도 / 사라지는 입김으로 / 하얗게 날리고 있다.
이어서, 거시적인 화두에 집착하여 영원으로의 비상을 기원하는 집념의 급류를 타고, 밤복적인 의문의 제기와 처리로 ‘생명 · 신 · 영혼 · 환상’과 ‘인간의 이중성’ 등에 집요한 추적을 계속함으로써, 스스로 존재나 인식의 근저를 확인하거나 증명하려는 상호보완의 의지를 대변하고 있음을 밝혀내어, 삶의 향상과 관조, 세태적인 불합리 요소들의 올바로 유도에 의한 극복 의지를 제대로 평가하였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조 시인의 화두가 여기서 끝나지 않아, 부여된 의문의 진지함이 상당한 진리에 가깝도록 심취되고 있음에 주목하여, 의문과 해법의 시 구조가 조 시인의 시작 원천으로 자리하게 된 점을, 체험의 현실적 괴리에서 파생된 불신이나 이율배반적인 시대상에 따른 고뇌와 분노, 찰출의 예감, 성취의 극적 전환 구축의 한 단면이자, 시 정신에 의한 진실의 추구 · 구현의 정지작업이라는 두 갈래에서 짚어 보고, <개망초처럼 하얗게 핀다 - 버려진 땅에도 꽃은 핀다>를 통해, 자아의 현재를 확연하게 재생하면서 괴리감을 정리하고, 태초의 순진무구에 대한 회귀를 여망하는 기원 의식으로 나아갔음을 밝히는 한편, 그에 따른 부작용 경계도 잊지 않았다.
이러한 조유금 시인의 기원의 의지는 자칫하면 방탕이나 환상을 초래하는 우(愚)가 도사리고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 하기사 ‘제 정신이 지독한 바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까지 너무나 많은
세월을 탕진하며 살아 버렸’다는 언술로 보아 이는 기우에 지나지 않겠지만 ‘끝없이 영혼까지
사랑’하는 시인의 무한한 창조성의 위대함을 새겨야 할 것이다. 그렇다 조유금 시인은 지금 인
식과 성찰의 상호보완성이 무엇인가를 알고 독창적인 의문을 새로 접하고 있다.
끝으로 저자는 조 시인의 시를 ‘형이상학시’라고 결론지은 뒤, 그가 차지하려는 정점을 <홀로 있는 여자>에서 찾을 수 있을 듯하다고 덧붙였다.
7. <‘님’을 통한 자아 성찰과 수용 의지>
최절로 시인의 열두 번째 시집 <<고운님 그리는 것을>>을 다룬 이 시론은, <<예술세계>>(1988. 1)에 발표된 비교적 짧은 글이지만, 물질만능주의로 황폐해 가는 현대사회에서 인간성을 되살리는 데 큰 힘이 되는 내용이라 하겠다.
우선 다루고자 하는 시집을 그 전에 내었던 두 시집 <<억겁을 두고 강물>>과 <<춤추는 허사비>>까지 거슬러 올라가 함께 살펴야 할 까닭을 ‘수맥’으로 비유하여, 정서의 분류는 그대로인 채 표현상의 기법이나 기교에서 약간의 차이만 찾을 수 있을 뿐이라고 하였거니와, 이런 견해는 이미 80여 년 전 김소월이 <시혼(詩魂)>에서 피력했던 것과 일치하여 관심을 끈다.
이어서 저자는 이순(耳順)을 빅겨가는 최 시인의 고향 의식의 공간에서 분출된 이미지가 주제를 이루고 있음을 알아내어, 그 원형적 상징이나 이미지의 주체가 ‘님’ 곧 시인이 절대치로 인격화시킨 창조의 신비이거나 이상향의 기원(祈願)에서 탐색된 새로운 정화의 한 상징, 아니, 차라리 신성불가침의 존재로서 무한한 사랑의 조화를 꿈꾸는 시적 대상물임을 간파한다.
불 밝혀 초롱꽃
흰 색 옷 걸쳐 입고
순백으로 핏기에는 너무 싱거워요
칠팔월 염천 연보라 물들여
송이송이 연 등을 다는 것은
우리들 사랑의 포옹을 향한
진솔한 축복인가”
(<고운님 그리는 것은. V>, 첫 연)
저자는 이 시가 포함된 15편의 연작시가 “최절로 시인이 지고지순의 일생 최대의 가치로 설정한 사랑이라는 순수시학이 허구 없이 분출된 긍지의 새로운 창출이며 공존의 자라를 확인하는 성찰의 다단계에 따른 시적 · 인생적 위의(威儀)라고 할 수 있다”고 규정, “사랑으로 환기시키려는 현실적 불감증이나 적응되지 못하는 사회적인 다양한 병폐들을 극복하고 지향하려는 참된 인간의 속성들을 위대한 사랑의 힘으로 수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함으로써, 연작시의 의의를 간접적으로 평가했다.
김 저자는 그 밖의 작품들, 특히 10편 연작시 <문정동 근린공원>에서, 자연 생식물과 인간을 대비시켜 특유의 서정을 노래한 데 대해 확고한 신념이나 철저한 의식의 내면화에서 찾아야 한다며, “시인은 인간에 의해 / 점지되지 않는다 / 다만 / 이 세상 아름다운 화신으로 / 돋아나기 위해 / 인간의 육신을 빌려 / 명의 끈을 이어감이니 / 무한궤도 위에 우뚝 선다”는 <시인의 자리>와, “본시 정을 나누고자 있음이니 / 멀리 도망가지 않도록 / 베풀어야 한다......”는 <친화를 위한 서곡>을 들어, 정의에 가까운 시인의 의식은 현실적인 위기나 사회적인 모순 등이 사랑으로 수용되고 용해되는 돈존의 가치관으로 형상화되고 있거니와, 지사적인 의지의 일단을 강조함으로써 현대 물질문명의 병폐와 다원화된 사회적 모순의 고뇌가 사랑과 상호 보완적인 지적 혜안으로 해법을 구명하려는 ‘님’의 신화가 최 시인만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시 정신의 본질이라며, 고서 <<예기(禮記)>>의 ‘애인이덕(愛人以德)’의 산 예로 높이 평가했다.
8. <존재의 경외(敬畏) 또는 성찰의 외경(畏敬)>
<<한맥문학>>(2000. 2)에 실은 이 시론은, 문협 신세훈 이사장과 <<월간문학>> 장윤우 발행인, <<문학 21>> 안도섭 발행인 들이 포함된 신춘문예 당선자들을 열거한 뒤, 2000년 시학을 열고 있는 당선작들에 대한 소감을 피력한 글이니, 그 한 예가 조선일보 당선작 <우울>(최영신)이다.
무너진 고향집 흙담 곁에 고요로 멈추어 선 우물 속을 들여다 본다. 물을 퍼올리다 두레박
줄이 끊긴 자리, 우물 둘레는 황망히 뒤엉킨 잡초로 무성하다. 그 오래 올려지고 내려지다 시
신경에 눌린 곳, 깜깜한 어둠만 가득 고여 지루한 여름을 헹구어낸다. 하품이 포물선처럼 그
어졌다 사라진다. 내가 서서 바라보던 맑은 거울은 간데없이 사라지고 몇 겹인지 모를 시간의
더깨만 켜켜이 깊다.
이 작품에 대해 저자는 선고자(選考者)들의 심사평과 함께 우려와 조언을 곁들인 자신의 기대를 아래와 같이 나타내었다.
우선 평범하게 읽어보더라도 언어의 구사능력과 이미지의 결합이 한 눈에 들어온다. 다만 현
대시의 산문화라는 우려가 앞서는 것은 시창작의 조류나 문단기류에 편향하는 작법이 바람직하
지 않다는 조언을 보내게 된다. 그러나 그의 내적인 성찰에서 빚어진 ‘그대 우울은 아직도 갈증
의 덫에 걸려 있는가?’라는 결구처럼 무한의 가능성이 깃들여져 있어서 앞으로 더 좋은 작품응
쏟아낼 것 같은 예감이다.
이어서 시론은 <<한맥문학>> 신년호로 눈을 돌려 수 편의 시작품 평으로 나가니, 우선 <새 천년의 역사>에 대해 “성찰과 지향의 조화를 비장한 어조로 조절하고 있다”고 말한 뒤, <뉴밀레니엄 새 아침에>(장찬영), <아가야ㅡ새 천년에 부쳐>(우숙자), <새 천년을 맞이하여>(신명자), <새헤 아침>(고혜련), <태양은 희망의 빛 되어ㅡ새 천년 새 아침에>(임한철>, <새 천년의 노래>(심은상) 등의 공통점으로 과거에 대한 성찰의식과 미래지향의 소희가 짙게 배어 있음을 지적하한다.
하늘은 쪽빛이고 지상은 맑다
먹이 모자라 조그맣게 자란 까치가 찾아와
어둠이 덮인 마당에서 마지막 눈물진다
서러운 것들이 묻힌 세월은 찬란한 꿈이 내린다
우리들이 살아온 지상만큼 넓어진 이 세상
밀레니엄은 종이 되어 모두 잠을 깨운다
(부분, 일부생략 평설자)
다음에, 작품 공간에 ‘눈물’이 들어 있는 시들을 몇 편 들어 그 의미를 되새겨 본다.
이효녕의 ‘눈물’은 ‘마지막’이라는 수식어를 강조함으로서, 성찰에서 획득한 비상한 예시의
지향성을 보여주고 우숙자의 ‘눈물의 푸른 자존 가슴에 눕혀놓고 / 실향의 반세기에 큰 등을
밝혀두면 / 삼천리 아름다운 강산 / 새 천년의 새벽으로......‘에서 이 ‘눈물’은 가슴 깊이 사무친
한을 기원의 의지로 숭화하는 존재의 필연적인 예감의 제시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이와 같은 ‘눈물’의 형상화 작품 예로 <절망의 끝에서>(엄창섭), <코스모스>(국승윤)을 마저 들어, 톨스토이가 <부활>에서 말한 선 · 악 두 종류의 눈물 중 전자 곧 ‘오랜 동안 그의 마음속에서 잠들고 있었던 정신적 존재의 각성을 기뻐하는 눈물’의 보기로 보았으며, <수평선을 바라보는 라면>(崔銀河)의 마지막 시행에 나오는 “괜시리 눈물이 난다”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家의 형제들> 중의 ‘오히려 자기가 흘린 눈물에 의히야 자기가 행복하다는 것을 느끼려 하는 것’의 예로 보았으니, ‘깨끗함’과 ‘영롱함’의 공통 상관물인 ‘눈물’에 대한 공감은 곧 시인의 존재에 대한 경외이며 존재 성찰에 대한 외경을 말해 준다는 논제를 뒷받침해 준다.
앞에 예시한 톨스토이의 선한 눈물은 <부활> 제1편 제28장에 나오는 것으로, 까츄샤를 타락시킨 네플류도프가 옛 애인을 법원에서 만난 후 뉘우치는 대목인데, 원저자가 하나 더 있다고 한 ‘악(惡)’한 눈물은 시론에 인용된 바와 같이 ‘자기 자신과 자기의 선행에 아첨하는 눈물’인데, 소설 주인공은 그 때 이 두 가지 종류의 눈물을 다 흘린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우리 근대시 중에는 <나의 침실로>(이상화)의 ‘눈으로 유전되는 진주(眞珠)’처럼 아름답게 표현된 눈물은 눈에 띄지만, 윤리 도덕과 관련지은 선한 눈물은 언뜻 떠오르지 않으니, 외국소설작품들과 연관지어 자신의 주장을 효과적으로펴 나가는 김 저자의 뛰어난 솜씨와 해박한 지식은 러시아문학가인 평설가도 부럽다.
9. <전구영의 성찰과 사랑의 시운(始原)>
<<성찰의 언어>>의 마지막을 차지한 이 시론은 최신(2004. 8)의 것이어서, 김송배 저자의 시론의 핵심이 변함 없이 ‘성찰’에 있음을 말해 주는 의미에서 주목을 끈다.
저자는 지금까지 누누이 강조해 온 ‘자아의 성찰’이란 어구가 실은 시인 작가의 ‘정신적인 구원’과 같은 뜻임을 드러내 보였다. 그는 조지훈이 말한 ‘문학이 인간 정신의 이상적, 목적적 요구를 충족시키려는 가치가 되는 것도 작가에게는 문학작품을 창작한다는 것이 그 정신적인 구원 곧 주체유지(主體維持)의 의욕이요, 방법이 되기 때문이며 독자에게도 그 작품의 향수(享受)를 통한, 같은 욕망의 충족적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인용한 뒤, ‘그렇다. 시인의 정신적 구원이다. 그러나 필자는 항상 자아의 성찰이라는 말로 이를 대신하고 있다.’고 털어놓았기 때문이다.
그 뒤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 나오는 ‘카타르시스 작용’이 이어져, 시론은 전구영의 <어부>(<<한맥문학>> 7월호)를 다루어 나간다.
갈매기 기륵끼륵 / 맨 가슴 여는 소리 / 아득한 수편선따라 / 가난한 어부의 꿈이 떠간다 //
파란 그리움이 피어나는 / 물결 위로 / 하늘이 내려와 / 시린 사연 담은 구름들이 흘러간다 //
막연히 허공으로 손을 뻗으면 / 무심히 바람은 / 외로운 어부의 마음도 모르고 / 한 줄기 기다
림으로 가라앉히려 하는데 // 밀려왔다 쓸려가는 소박한 꿈 // 언제쯤 고운 인연 만날까 / 뱃머
리 따라 흔들리는 맑은 영혼 / 아쉬운 하루는 속내를 태우며 / 붉은 하늘 문을 닫는다.
저자는 대사물관에서 발원한 사유의 공간에 ‘그리움’ · ‘기다림’이 내면에 잠재되어 있어 ‘흔들리는 맑은 영혼’과의 교감을 시도하지만 ‘아쉬운 하루’라는 결론에 도달하면서 정서와 시 정신 모두를 관조의 의지로 전환하고 있는 점을 들어, 카타르시스의 영역을 확신하고 있다고 했다.
그와 동시에, <散花되지 않으리> 같은 작품의 분석을 통해, 자문(自問)의 어조에 의해 전 시인이 갈망하는 ‘사랑’에의 진솔한 내면의식으로서 ‘변치 않는 진리’임을 스스로 성찰하고 있음도 규명해 냈고, 시집 <<네가 마중 나오는 달>>의 15편 연작시 <사랑>을 두루 살펴 화자의 간절한 소망을 알아냄은 물론, 숨겨진 ‘당신’의 실체가 ‘삶과 인생에 대한 원대한 순리와 섭리를 성찰하면서 관조하고 달관하는 주체임도 탐색해 냈다.
나아가 전 시인이 선호하는 ‘싶다’라는 시어가, 공존 공유되어야 할 만인의 심성에서 휴머니즘의 원류를 확인하고자 하는 순박성의 소치임도 알아내어, 고차원의 성찰이 어떤 외적인 관련에 의해서 그의 철학으로 굳게 자리하게 된 것임도 맑혀내어, 어머니인 이정원정 시인의 시 정신과 일치되는 특징에도 언급하여, 달관의 의지야말로 전 시인의 성찰이자 사랑의 시원임을 강조하여 시론을 매듭지었다.
ㅇ 나오는 말
지금까지 평설해 온 바와 같이, 다양하고 방대한 내용이면서도 초지일관 시 창작의 요체가 ‘성찰의 언어’임을 강조한 이 저서의 밑바탕에는, 오랜 동안 많은 시를 써 8권의 시집을 낸 데다가, 얼마 전까지 중앙대학 대학원에서 시문학 창작이론을 천착한 끈질긴 노력과, KBS방송문화센터와 청송시원에서의 시창작 강의 등이 3위일체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찌 그뿐인가. 김송배 저자의 시문학에 기울인 깊은 애정과 이론과 실천을 아우른 초인간적인 노력이, ‘티끌 모아 태산’과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두 속담을 동시에 입증해 보이듯, <<성찰의 언어>>라는 성공의 탑 뒤에 채곡채곡 쌓여 있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흔히 메마르기 일쑤인 ‘현실’과 대조적인 ‘흥취’ 있는 경우를 가리켜 ‘시적(詩的)’이라 말하는 것이 단적으로 말해 주듯, 시는 삭막한 현실을 흥취로 삭여 줄 뿐만 아니라 불가지한 미래에 대해서도 희망의 등불을 밝히어 용기를 북돋워 주는 값진 언어 예술이다.
그러므로, 그토록 유익한 시의 향수가 일부 인사들에게만 국한되는 현실은 안타깝기 짝이 없는 일이니, 시인이나 시론자 들은 그 멋진 시가 대중에게 무용지물이 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할 책무가 지워졌다고 볼 때, 평자는 창작과 시론을 아우른 이로서 그 선두에 필시 김송배 저자가 자리할 것을 믿으며, 하고많은 시론집들을 젖치고 이 <<성찰의 언어>>가 단연 수많은 시의 애호인들에게 절찬을 받을 것 또한 굳게 믿어 마지 않는다.
다행히 졸고가 독자로 하여금 이 저서를 읽는 데 도움을 준다면, <<성찰의 언어>>의 ‘언어’에
초점을 맞춘 속편을 쓰고 싶은 생각이면 덧붙여 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