츠빙글리는 복음으로 변화된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삶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연장선에서 율법을 강조한 바, 믿는 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율법은 복음이며, 좋은 소식이 된다고 하였다. 루터가 지나치게 율법과 복음을 대립시킨다고 비판한 츠빙글리의 사상을 W. P. 스티븐스의 책을 통해서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전략) 루터가 설교에서 공로를 공격했다면, 츠빙글리는 우상숭배, 즉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에 신뢰를 두는 행위를 공격했다. 물론 우상숭배에는 공로가 포함되어 있다.(그들의 신학에서 다른 차이점들의 특징은 그 강조점이 다르다는 것이다.) 츠빙글리는 취리히라는 상황 안에 관심을 쏟아야 하는데, 파르너(O. Farner)에 따르면 종교개혁 이전에 그곳에서는 성상, 행렬, 순례여행이 엄청나게 증가하였다.(중략)
순례여행, 성인들에게 기도하는 것, 심지어 선행이나 성례들까지도 그것들이 그리스도와 그의 죽음을 부차적인 것이나 필요 없는 것으로 만든다면 우상숭배 행위에 해당되거나 혹은 그럴 개연성이 있다. 믿음은 그런 것들이 아니라 하나님께 기초해야 한다.(중략)
츠빙글리 신학에서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강조는 구원이 하나님에게서 오며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이라고 보는 그의 구원론의 특징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택에서 시작되며, 우리가 아닌 하나님의 의지와 목적에 전적으로 달려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선택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데, 단지 영원하신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태어나고, 수난 받고, 죽고, 부활하고, 승천하신 그리스도를 뜻한다. 그러나 구원은 성령이 우리를 믿음으로 인도하시기 전에는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츠빙글리에게 있어서 구원은 아버지, 아들, 성령이 한데 어우러진 하나님 전체의 역사로 보아야만 하는 것이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강조는 모든 종교개혁자들에게 공통되는 것이었다. 이것이 그들로 하여금 자유의지와 공덕을 부인하게 하였으며, 인간의 죄성을 가르치도록 만들었다. 츠빙글리와 루터는 비록 죄에 대한 이해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기는 했지만, 에라스무스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과의 논쟁에서 자유의지와 공덕에 대해서 똑같이 반대하였다. 실제로 자유의지를 공격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츠빙글리의 『주석』 (A Commentary)은 루터가 『노예의지』 (The Bondage of the Will)에서 에라스무스를 공격하기 이전에 출판되었다. 루터와 마찬가지로 츠빙글리가 공격한 것도 소위 선한 행위라 일컬어지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은 행위에 대한 공격이었다. 그 행위들은 믿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거나 순례여행의 경우처럼 하나님이 명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츠빙글리의 공격은 또한 행위를 우리 구원의 근거로 삼으려고 하거나 하나님과 함께 인정하려는 데 대한 공격이었다. 그들은 참된 선행은 믿음에서 나온다고 확신했다. 왜냐하면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는 것처럼, 살아 있는 믿음은 선한 행위라는 열매를 내기 때문이다. 츠빙글리는 반대자들과의 논쟁에서 많은 성서구절들이 구원을 선행에 기인한 것으로, 우리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보답으로 말하고 있음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그는 아우구스티누스를 좇아, 그런 구절들에서 하나님이 보상하고 있는 것은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그분 자신이 행하신 것이며, 그것은 우리로 선을 행하도록 만드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츠빙글리는 결국 모든 것이 창세전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택에 달려 있음을 지적한다.(S IV 62.21-44)(중략)
복음에 대한 츠빙글리의 요약 안에 아버지 뜻의 계시라는 언급이 있는데, 이는 츠빙글리를 루터와 구별하는 표지가 된다. 츠빙글리와 루터 사이에 나타나는 강조와 용어의 차이점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그것들 중 어떤 것들은 루터교회와 개혁교회 신학의 중요한 차이점들로 연결되었다. 처음부터 츠빙글리에게는 새로운 삶을 사는 데 대한 관심이 있었다. 이것은 아마도 에라스무스의 인문주의가 츠빙글리에게 미친 영향과 또 그가 교부들의 글을 읽은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츠빙글리는 가장 초기의 종교개혁적인 저술에서 사람들을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불타게 하는 것이 복음이라고 말했다.(Z I 88.10-89.2) 사람들의 삶의 변화에 대한 관심에서, 그는 심지어 구세주를 보내고도 우리에게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것보다는 아예 구세주를 보내지 않는 편이 나았을 것이라고 말하기까지 했다.(Z III 787.20-7)
이런 점에서 인문주의 그룹에서 대단히 중요한 개념인 그리스도의 모범이 개혁자로서의 츠빙글리의 신학의 한 부분으로 유지되고 있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롬 13:14) 라는 구절을 주석하면서 그는 "자신을 죄인으로 인정하고,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자비를 신뢰하고,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거룩하고 순수한 생활을 확립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기술하였다(S VI ⅱ. 126.12-29) 그러나 이런 삶은 더 이상 인간의 노력 여하에 달린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인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혹은 성령께서 역사하심으로써 끊임없이 주어지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삶을 강조하면서 츠빙글리는 재세례파가 그리스도의 삶을 살기보다 오히려 입으로 떠벌리고만 있다고 공격하였고, 가톨릭들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 원천으로부터 떼어내고 있다고 공격하였다.
츠빙글리는 어떤 중요한 용어들, 특별히 의, 율법, 복음과 같은 용어들을 사용하는 방식에서 루터와 달랐다. 루터에게 있어서 의는 우리에게 전가된(imputed) 그리스도의 의였다. 츠빙글리에게도 그것은 마찬가지였지만 동시에(여기에서 그는 아우구스티누스와 가깝다.) 우리에게 주입된(imparted) 그리스도의 의이기도 했다. 츠빙글리는 그의 초기 저작들에서 율법과 복음이라는 용어를 루터와 비슷한 방식으로 사용하였지만, 1524년 슈트라스부르크에 보낸 편지에서부터 그 강조점을 달리하였다. 순서가 복음과 율법으로 바뀌었는데, 그가 믿음을 "율법이 세워지는 토대" 라고 말했기 때문이다.(Z VII 263.18-265.24) 초기 저작들에서 그는 루터처럼 율법을 완전히 지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부족함을 깨닫고 자신에게서 피난처를 찾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율법을 주셨다고 말했다. 그러나 츠빙글리는 율법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루터에게 비판적이었다. 율법 자체는 거룩하며, 누구라도 루터처럼 율법이 우리를 겁주고, 우리를 절망케 하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미워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절망과 하나님에 대한 미움은 율법의 결과가 아니라, 우리가 약하고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것이다. 츠빙글리는 후에 야고보서 1:25을 주석하면서, 타락한 사람들에게 비치는 빛이 그들을 타락하게 만든 것이 아닌 것처럼 율법이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였다.(S VI . 260.24-261.23)
루터가 율법과 복음을 대립시킨 것과는 달리, 츠빙글리는 율법을 복음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었다. 1523년 16번째 조항을 해설하면서 츠빙글리는 복음을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통해 우리에게 알게 하신 모든 것"이라고 여겼고, 거기에는 "너는 다른 사람에게 분내지 말라"는 명령도 포함된다고 말하였다. 만일 당신이 믿는 자의 입장에서 율법을 본다면 그것은 사실상 복음이거나 좋은 소식이다. “참된 신자는 모든 하나님의 말씀을 비록 그것이 육체의 소욕에 반대된다고 할지라도 즐거워하며 양식으로 삼는다."(Z II 231.33-233.15)
츠빙글리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두 가지 의미에서 율법을 완성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을 보여주었고,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행하심으로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켰다. 그러므로 율법은 그리스도에 의해 더 분명하게 나타남으로써 갱신되었다.(Z I 496.6-22)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율법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이 하시거나 원하시는 것을 행하지 않아도 되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와 호의에서 촉발된 사랑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행하도록 하기 위함이다.(Z I 235.4-236.33)
우리가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그리스도께서 (혹은 성령께서) 율법이 명하는 것을 행하도록 우리 안에서 일하시기 때문이거나, 아니면-이것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 아니다-사랑하는 사람들은 무엇을 하라고 명하는 율법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의 믿음이 약하기 때문에 율법은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은혜뿐만 아니라 율법도 설교한다. 믿는 자들과 택함 받은 자들은 율법에서 하나님의 뜻을 배우고, 악한 자들은 율법에 겁먹어 그 두려움 때문에 이웃을 섬기거나 혹은 자신들의 모든 절망과 불신앙을 드러내게 된다."(S IV 63.31-45; LCC xxiv. 273; Works ⅱ. 269) 여기서 우리는 악을 억제하고 인간의 죄성을 폭로하는 것 이외에 소위 율법의 제3용법을 본다.
츠빙글리는 외적인 인간과 관계된 세속법이나 예전법은 영원한 것이 아니고, 내적인 인간과 관계된 법만이 영원하다고 생각하였다. 츠빙글리는 가톨릭 적대자들과 달리 소위 복음서의 권면들을 모든 그리스도인의 의무라고 간주했다. 권면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혹은 사랑 안에서 요약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와 사랑이 율법의 목적이기 때문이다.(롬 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딤전 1:5 “이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
1) O. Farner, Huldrych Zwingli (Zurich, 1954), ⅲ. 19-20.
<약어표>
LCC The Library of Christian Classics (London, 1953-70).
S M. Schuler and J. Schulthess, Huldreich Zwingli's Werke (Aurich, 1828-42).
Works ii W. j. Hinke, The Latin Works of Huldreich Zwingli, ii (Philadelphia, 1922; repr as Zwingli on Prividence and Other Essays, Durham, NC, 1983).
Works ⅲ C. N. Heller, The Latin Works of Huldreich Zwingli, ⅲ (Philadelphia, 1929; repr. as Commentary on True and False Religion, Durham, NC, 1981).
Z Huldreich Zwinglis Sämtliche Werke (Berlin, Leipzig, Zurich, 1905- ).
W. P. 스티븐스 지음, 박경수 옮김, 『츠빙글리의 생애와 사상』(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7), pp. 118-125.
첫댓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성화이며 개혁주의 구원의 서정이고, 재세례파가 성화 없이 입만 떠벌이는 것이 현대의 구원파와 비슷해 보입니다. 좋은 포스팅입니다.
알겠습니다. 좋은 내용을 배웁니다.
의의 주입(infusion)과 전가(imputation)에서는... 전가 교리가 종교개혁 또는 개신교 전체의 구원론을 대표하고 포괄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는 루터가 더 우세하다고 봅니다.
좋은 설명에 감사합니다.
"루터가 율법과 복음을 대립시킨 것과는 달리, 츠빙글리는 율법을 복음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었다." -->
츠빙글리의 주장처럼 율법과 복음은 첨예한 대립이 아니라 구분되며, 불연속만이 아니라 연속도 있습니다.
가장 좋은 예가 주기도문인데 이는 십계명을 요약한 것입니다.
독자들에게 부연 설명이 도움이 많이 되겠어요~~
네, 잘 알겠습니다.
"츠빙글리는 외적인 인간과 관계된 세속법이나 예전법은 영원한 것이 아니고, 내적인 인간과 관계된 법만이 영원하다고 생각하였다." -->
개혁주의 교리 중 후대에 큰 영향을 끼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서도 하나님의 법을 재판법, 제사법, 도덕법으로 나눈 뒤 재판법과 제사법은 폐하여졌지만 도덕법은 신약교회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며 예수님에 의하여 오히려 더욱 강화되었음을 알려줍니다.
이는 개혁주의가 성화를 강조하는 공통된 특징으로 나타납니다.
OK 👌
알찬 가르침에 경청하고 공감합니다.
너무나 유익한 글을 읽고 공부를 합니다.
기다리던 양질의 포스팅이네요. 잘 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