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따스한 봄날이었다. 키가 크고 잘생긴 남자 선생님이 "이정호 선생님입니다. 4학년3반 여러분과 같이 일년동안 재미나게 지내면 좋겠습니다."라고 하시는 인사말씀과 함께 나의 초등학교 4학년이 시작되었다. 민주적 투표 절차를 거쳤지만, 당시로는 높은 벼슬같은 지자체장을 하신 아버지 후광에 반장으로 피선되었고, 선생님과 만나는 시간과 기회가 많아졌고, 자연스레 친밀감도 높아졌다. 그림자도 밟으면 안되는 선생님이 어렵지만 편했고 때론 투정을 부리면 "아이구~~우리 종국이가 기분이 안좋았구나"하시며 안아주시곤 했다. 위로 두형이 일찌기 서울로 부산으로 고등학교 대학교로 유학가는 바람에 내가 기대고 누울 곳이 이정호 선생님이 되어버렸다. 어느듯 시간이 흘러 5학년이 되었는데 이정호 선생님 반으로 편성되는 호사를 누리게 되었다. 아마도 요즈음 비난을 받는 '아빠찬스엄마찬스'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선생님은 교무실에서 교실로 당신 책상을 옮기시고 학생들과 밀착도를 높이셨다. 그 결과 나의 할일이 많아졌다. 시험지 채점도 도와주고 가정방문도 함께 다녔다. 두메산골 몇가구 살지않는 화전을 일구는 가정의 장남인 친구가 학교를 며칠 나오지 않아 물어물어 선생님과 그집을 찾아 갔다. 돌아오는 길에 선생님이 물어셨다.
"종국아, 헌구집 보고 나니 어떤 생각이드노?"
아무 말도 못했다. 주루룩 흐르는 눈물이 대답이었다. 머리를 쓰다듬어시여 "이 마음 변치말래이"
머리속에 이 정호선생님의 기억은 세월의 흐름과 같이 흘러가버렸다. 영남대 교수로 부임해 온 첫해 스승의 날, 강의실에 누군가가 꽃 한송이를 올려 놓았다. 고맙다는 말과 함께 부끄럽다는 말로 인사를 했다.
지식 전달자의 역할보다 더 중요한 인생의 모범을 보여주는 언행을 했나? 생각하니 부끄럽다고 학생들에게 고백했다. 언젠가 다음 스승의 날이 되어 꽃을 받을 때 '나 받을 자격있어' 할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존경받고 학생을 존경하는 교수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에 갑자기 이정호 선생님이 떠 올랐다. 왜인지는 나도 모르겠다. 거의 동시 동작으로 무의식적인 기억이었다.
경남 교육청에 문의를 하였다. 옛날 부림국민학교에 선생님으로 계셨던 이정호 선생님을 찾는다고 했다. 며칠이 지났다. 담당자가 전화를 했다. 이정호 선생님은 김해 고등학교 교감선생님으로 계신다는 소식을 전해주며 전화번호도 주었다.
뚜~~뚜~~~
신호와 함께 경상남도 특유의 엑센트로 "여보세요. 교감 이정호입니다."
"선생님, 변종국입니다. 옛날 부림국민학교"
일초의 머뭇거림도 없는 반가움의 목소리
"아이 니가 종국이라 말이제? 하모 기억을 하고 말고. 아이고 우째 나를 찾았노?"
선생님을 찾은 과정과 불현듯 생각난 스승의 날을 이야기하며 찾아 뵙기를 약속했다.
드디어 약속의 날이 되었다.
초등학생인 딸과 아들, 그리고 집사람을 대동하고 김해로 갔다. 선생님댁은 근처에 있는 초등학교 정문 옆 수퍼골목 첫집이라 찾기 쉽다고 하셨다. 약속한 시간에 초등학교 정문에 도착했는데 수퍼가 보이지 않았고, 학교 정문에 내 또래보다 몇살 많은 듯한 남자분과 몇몇 사람들이 서 있었다. 나랑 비슷해보이는 분에게 다가갔다.
"아저씨, 혹시 근처에 수퍼 마켙 어디있는지 아세요?" 대답 대신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종국이 아이가!"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순간 나이가 많이 드셨을 모습을 연상한 내가 우스웠다. "아저씨"라고 부를 정도였으니 일찌기 머리가 백발이된 내 모습이 오히려 나이들어 보였다.
선생님이 우리 반 담임을 하셨을 때가 초임지였고 군대를 가시지 않았다는 것을 말씀하시기에, 당시 선생님의 연세를 간음하니 25-6세셨고, 내 나이 12살이었으니 나랑 띠동갑 정도의 차이였다. 그러나 당시에 선생님은 나에게 하늘만큼 높고 땅만큼 넓은 아량과 인품을 가지신 어른중에도 상어른이셨다. 그런데 같이 세월을 먹고 계셨다.
"너 아버지 어릴 때 눈이 또록또록하고 빛이나는게 영리했다. 그러니 미국서 박사받고 국가정책하고 교수로 왔지. 내가 신문보다가 금융시장 외국인에게 개방하며 변종국 박사라는 기사가 자주 올라오기에 혹시 했다. 그런데 몇해전에 20/20이라는 경제대담 TV 프로에 변종국박사라는 귀에 익은 이름이 나와 자세히 보니 자네라는 걸 딱 알겠더라."
우리 자식들 앞에 조금 면이섰다. 속으로 "봐라 아빠 어릴 때 똑똑했다는 것 들었지?"하며 내 애들을 바라다 보았다. 어린 초등학생에게 희망과 공부의 열정, 주위를 돌아봐야 한다는 사명감을 주시던 선생님이 지금은 내 애들에게 아비의 체면을 세워주시며 내 애들에게 아버지에 대한 자발적 존경을 가르치고 계신다.
하늘 같이 높으신 선생님이 인제 같이 늙어가는 듯하다.
"선생님, 건강관리 잘하셔서 그런지 어디가서 저랑 동년배라해도 믿겠습니다."
"인생 멀리보면 다 친군기라. 인제는 니가 날 가르쳐야 되지. 그럼 사제가 바뀌고 친구되는기라."
영원한 스승이신 이정호 선생님!
사제동행입니다.
감사합니다.
정년을 하며 제자들에게 엄명을했다. 절대로 퇴임식, 논문집, 식사자리 등 일체 하면 안된다. 호텔지나 가다가 교수들 퇴임식 축하연하는 것보면서 각자의 사연이야 있겠지만, 나는 학교 떠나는 순간까지 절대로 어떤 형태의 부담도 주지 않을 것이고, 퇴임식이 결별이 아니며 자주 볼 수 없을지라도 사제지간은 영원하니 절대로 퇴임과 관련된 일체의 모임과 행사는 무의미하므로 내 뜻을 존중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 또한 이정호 선생님의 교훈이었다. 선생님 정년식에 갔더니 피해주지 않겠다고 퇴임식 자리에 계시지 않았고, 전화를 드렸더니 멀리 여행중이시라며 퇴임 축하는 전화로 대신 할 것을 부탁하셨다. 이것이 나에게 준 마지막 교육이셨다.
그래도 제자들이 자리를 만드는지 내 일정을 자꾸 체크했다. 퇴임 전 2월 1일에 미국으로 나가버렸다. 두달을 머물다 귀국했다. 두달간 빈집이었던 현관 문앞에 행운목 자그마한 것이 놓여 있었다.
긴 리본에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다시 태어나도 변종국 교수님의 제자가 되고 싶다." 물론 최고의 미사여구를 동원한 제자들의 재치있는 멘트였지만,
가슴이 뛰었다.
순간 이정호 선생님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 바로 이 말이라는 것을 내 제자들이 나에게 알려주는 교훈이었다. 난 왜 이말을 못했을까? 제자로부터 가르침을 받는 순간이었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그리고 제자들 당신들도 고맙습니다.
모두가 함께 걸으면서 살아가는
아름다운 사제 동행이길 희망합니다.
첫댓글 얏호, 교수님, 감사합니다! 미국에 계시는 동안 오시면 주시리라 믿고 있었는데..... 약속 지켜주셔서 고맙습니다. 더구나 후반부 첫번째 글을 받고, 이제 후반부 원고가 '물밀듯이 밀려 들어올 것만 같은' 기대에 부풀게 됩니다. 보통은 스승, 제자 따로 글이 나오는데, 이번에는 정말 '사제동행'으로 성공하셨네요. 원고 부담에서 벗어나신 것도 축하드립니다. (부담 드려서 죄송합니다. ) 그리고 교수님의 은사님께도 이 글을 링크해서 보내드리셨으면 합니다. 또하나, 은사님 사진이나 .....관련 사진 있으면 주시면 더욱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