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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역서화장의 저자 위창 오세창.
율곡 이이의 어머니인 신사임당은 우리나라 역대 여류 예술가 중 단연 으뜸으로 친다. 신사임당은 규방에 매인 몸이었지만 그녀가 살던 당대에도 사대부 사이에서 높은 경지의 예술가로서 명성이 높았다. 이이가 지은 율곡집은 "(어머니가) 어릴 적부터 바느질에 능해 수놓은 것까지 정교하고 묘하지 않은 게 없었다. 7세에 안견의 그림을 모방하기 시작해 산수화, 포도화를 그렸는데 세상에서 견줄 자가 없었다. 어머니가 그린 병풍과 족자가 세상에 수없이 전해졌다"고 기술했다.
이이의 후손들은 세상에 뿔뿔이 흩어진 신사임당의 그림과 글씨를 소장하기를 소원했다. 이이의 후손 이백종은 '추초군접도(秋草群蝶圖)'를 어렵게 손에 넣어 노론의 영수 우암 송시열에게 발제(跋題)를 써 줄 것을 부탁한다. 그러자 송시열은 이를 보고 "손가락으로 그려낸 것이지만 사람의 힘을 쓰지 않은 것 같다"고 감탄하면서 그림을 절대로 허술하게 보존해서는 안될 것이라고 당부했다.
고대부터 근대에 이르는 한국서화가에 관한 기록을 총정리한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은 신사임당을 우리나라 최고 화가 중 한 명으로 분류한다. 근역은 우리나라를 말한다. 책은 위창 오세창이 1917년 편찬했으며 화가 392명, 서가 576명, 서화가 149명 등 총 1117명의 방대한 인명을 수록하고 있다. 삼국사기 등 274종의 서적이 인용되고 있다.
▲ 우리나라 최고 여류예술가로 꼽히는 신사임당의 대표작 조충도.
맨 처음에 등장하는 인물은 신라의 천재화가 솔거다. 황룡사 벽에 그린 노송도에 새들이 날아와 부딪혀 죽었다는 일화의 주인공이다. 동사유고는 "솔거가 농사꾼의 아들로 가난해 바위와 모래에 그림을 그렸다. 꿈에 단군이 나타나 신필을 주겠노라고 해 꿈 속의 단군 초상화를 1000장 가까이 그려 이름난 화가가 됐다"고 소개한다.
백률사 중수기는 그러나 솔거가 중국의 승려라고 말한다. 중수기는 "중국 승려 요(瑤)가 신라에 와서 이름을 솔거로 고쳤다. 신라 32대 신문왕(재위 681~692)은 그에게 관음상 3좌를 그리도록 하고 백률사, 중생사, 민장사를 지어 모시게 했다"고 전한다.
우리나라 역대 서예가 중 최고의 명필은 신라 사람 김생이었다. 동국이상국집은 "중국인들이 서성(書聖)이라고 불리는 왕희지와 동급에 올렸던 김생이 마땅히 신품의 제1인자로 꼽혀야 한다"고 했으며, 동서당집고첩발은 "창림사비 발문에 신라의 승려 김생이 쓴 그 나라 창림사비는 자획이 대단히 전형적이어서 당나라 사람의 이름난 비각이라도 이보다 훨씬 뛰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옛말에 어느 땅엔들 재주 있는 사람이 나지 않겠느냐고 한 것이 참으로 맞는 소리"라고 했다.
삼국사기는 김생이 711년 태어났고 부모가 한미해 집안 내력을 알 수 없다고 서술했다. 고려 최씨 무신정권의 2대 세습자 최우는 글씨에서 따라올 이가 드물었다. 그는 최씨 무신정권을 탄생시킨 최충헌의 아들로 절대 권력을 휘둘렀지만 해서와 행서, 초서 모두에서 독보적이었다. 동국제현서결평론서병찬은 "명필 기상국(奇洪壽)이 최우의 대관전(大觀殿) 편액을 보고 신품이라고 칭송했다"고 적었다.
화가 이녕은 중국 황제 중 가장 뛰어난 예술적 재능을 가졌던 송나라 휘종 황제를 놀라게 한 그림 솜씨를 지녔지만 오늘 그 흔적을 찾기 어려운 잊힌 대가다. 이녕은 사신단에 끼어 송나라를 방문하자 송나라 휘종이 그를 시험하기 위해 우리나라 예성강을 그려보라고 했다.
휘종황제는 이녕이 그림을 그려 바치자 감탄해 "고려 화공 중 이녕이 제일 뛰어나다"고 칭찬했다. 그러면서 중국 화가들에게 명하여 그의 그림을 배우도록 했다. 이녕의 명성을 보여주는 일화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고려 인종은 송나라 상인에게서 그림을 선물 받자 중국의 기품(奇品)을 얻었다고 기뻐하면서 여러 화사들에게 자랑했다.
그림을 보던 이녕이 나서 "그것은 신이 송나라 사람에게 그려준 것"이라고 아뢰었다. 왕이 놀라며 표구를 뜯어내자 과연 뒤에 그의 글씨가 적혀 있었다.
조선 제일의 화가는 안견이다. 궁중 화사였던 안견은 일본 덴리대가 소장하고 있는 '몽유도원도'의 작가로 잘 알려져 있다. 안견은 중국의 명작들을 보고 반복해 그리는 방식으로 그림공부를 했다. 용천담적기는 "곽희를 모방하면 곽희가 되고 이필을 모방하면 이필이 되며 유융도 되고 마원도 되어서 모방한 대로 되지 않는 게 없었다. 그중에서도 산수는 가장 뛰어났다"고 했다.
몽유도원도는 '불후의 명작'으로 분류되지만 사실 안견 그 자신이 가장 아꼈던 작품은 '청산백운도'였다. 안견은 항상 이 그림을 가리키면서 "내 평생의 정력이 모두 여기에 있다"고 했다. 당대 명사들은 안견의 작품을 금과 옥처럼 귀하게 여겼다. 한훤당 김굉필(1454~1504)은 안견의 병풍첩을 소장했다.
후대 남명 조식이 이 병풍첩에 발문(跋文)을 썼다. 조식은 발문에서 "그린 지 백년이 지났지만 묘한 솜씨가 어제 와 그린 것 같다"고 했다. 이 병풍첩은 김굉필이 연산군 때 처형되면서 가산과 함께 적몰돼 도화서에 보관됐다가 이후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다시 김굉필의 손자인 초계군수 김립에게 소장됐다고 남명집은 설명한다.
임금들도 예술가로서의 삶을 살기를 꿈꿨다. 고려 태조 왕건도 글씨에서 일가견이 있었다. 동국제현서결평론서병찬은 "임금으로서는 태조, 인종, 명종이 모두 글씨를 잘 썼다. 왕을 품평할 바가 아니어서 자세한 것은 언급하지 않는다"고 했으며 보한집은 "태조의 문장과 필법은 타고난 것"이라고 썼다.
최초의 혼혈왕인 충선왕은 베이징에 만권당을 짓고 주로 그곳에서 살면서 글과 글씨로 낙을 삼았다. 우리나라 학자로 이제현을 비롯해 원나라 학사인 요수, 염복, 원명선, 조맹부 등이 충선왕의 문하에 머물렀다. 이 중 조맹부는 고려 말·조선 초를 풍미한 송설체의 주인공이다.
▲ 1916년 촬영한 화장사 공민왕 진영. 한국전쟁때 화장사가 불타면서 진영도 함께 소실됐다.
원의 간섭을 뿌리치고 자주국 고려의 위상을 회복한 개혁군주 공민왕은 글씨와 그림에서 천재적 소질을 지녔다. 이제현의 익재집은 "상감이 회암 삼선사에 다섯 글자를 내렸다. 하늘이 내린 솜씨"라고 했다. 또한 수많은 그림을 남겼는데 특히 초상화를 잘 그렸다. 그는 윤해, 염재신 등 신하들의 초상화를 직접 그려 선물했다.
동국여지승람은 "상감이 염제신의 얼굴을 친히 그려주면서 중국에서 공부했고 성품 또한 고결하니 다른 신하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고 적었다. 공민왕은 자신의 얼굴도 자주 화폭에 담았다. 황해도에 있었던 화장사에 공민왕이 거울을 보며 그린 자화상이 있다고 미수기언은 말한다.
경수당집은 "불당 안에 그림이 보이는데 후리후리하게 큰 사람 그 허리 대단히 크구나, 허연 용의 수염을 보자 문 밖에서 깜짝 놀라 다가가면서 얼굴색을 고치며 옷을 매만진다"고 읊었다. 이 초상화를 찍은 유리건판(초기 필름의 형태)이 현전한다.
조선 성종도 글씨와 그림에서 수준급의 실력을 보였다. 글씨는 조맹부의 송설체를 그대로 옮겨왔지만 배우고 익힌 게 정사를 보는 여가에 틈틈이 익힌 솜씨였다. 성종은 가끔씩 붓장난으로 소품을 그리기도 했다. 성종은 종이와 비단 조각이라도 있으면 글씨와 그림을 남겨 주위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인조와 함께 무능한 임금으로 언급되는 선조는 글씨뿐만 아니라 난초와 대 그림에 조예가 깊었다. 홍양호의 이계집은 "참으로 천인의 솜씨요, 세상에 보기 드문 보배"라고 치켜세웠다.
임금의 초상화, 즉 어진을 잘 그려 임금을 흡족하게 하면 신분이 낮더라도 높은 벼슬을 얻는 행운의 주인공이 됐다. 천한 신분의 최경은 성종의 명으로 임금의 아버지인 덕종대왕의 초상화를 그렸다. 임금은 초상화가 완성되자 이를 보고 살아있는 아버지를 본 것처럼 슬퍼하고 존경해 당상관의 벼슬을 제수하려고 했다.
하지만 언관들이 반발해 성사되지는 못했다. 안귀생은 소헌왕후, 세조, 예종, 덕종의 초상을 그려 함께 벼슬을 받았다. 양반이 어진제작에 참여하기도 했다. 풀벌레 그림에 소질이 있었던 채무일은 궁중 화가가 아니라 문과에 급제한 사대부였지만 중종이 승하한 후 천거를 받아 종종의 어진을 그려 많은 상과 벼슬을 받은 사실이 국조인물고에 나타나 있다.
여자로는 이제현의 손녀 경주 이씨가 문장가로 이름을 떨쳤다. 해동명적엔 "그녀의 외손자인 좌의정 홍응이 '집안에 전해 내려오는 외조모의 시문과 필적이 한 상자 가득했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젊었을 적에 쉽게 여겨 잘 보관하지 못했다. 지금 김유가 소장하고 있는 8장의 그림을 보니 진실로 따라갈 수 없는 경지이구나'라고 했다"고 적혀 있다.
조선에서는 신사임당에 필적할 여류 예술가가 거의 드물다. 다만 허균의 누나인 허난설헌이 7세 때 시를 잘 써서 사람들이 '여신동'이라 불렀으며 그림도 곧잘 그렸다.
▶오세창(1864~1953)=서울에서 중국어 역관이자 서화 수집가인 오경석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호는 위창이다. 한말 개화관료와 애국계명지사로 활동했으며 3·1운동 당시 민족 대표 33인에 참여하기도 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미술가 단체인 서화협회 발기인으로 서화계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다
[출처] : 배한철 매일경제 영남본부장 : 고전으로 읽는 우리역사 / 매일경제 프레미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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