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30
ㅡ 백제건국 초기 상황 ㅡ
시대를 구분하여 정리하기에는 각 시대 왕조의 왕 순서에 따라 하는 것이 가장 쉽고 또 적당하기도 하다.
하지만 고대국가 시대 왕들은 자료가 너무없어 우리는 이름조차 들어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생소하다.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이 모두 다 마찬가지이다.
오늘 주제 '백제'만 살펴 보자.
어느 정도 고대사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도 백제 왕을 떠 올려보라 한다면 백제 왕 30명 중 <비류, 온조, 개루왕, 고이왕, 근초고왕, 무령왕, 성왕, 무왕, 의자왕> 정도 일 것이다. 나 또한 이 왕들 말고는 아는 왕 이름이 없다.
백제는 BC 18년, 고구려 시조 주몽 아들인 '온조'가 자신 형인 '비류'와 함께 남하해 '위례성'에 백제를 건국했다고 알려졌다.
백제는 4세기 중반에는 전라남도 해안 일대와 황해도 지역 등을 영역으로 삼으며 중국, 왜까지 영향력을 끼치며 해상왕국으로서 전성기를 누렸으나 660년 나당 연합군 공격으로 멸망했다.
백제는 678년 동안 30명 왕들이 왕통을 이었지만 '근초고왕' 이전 초기 왕통은 어느 혈통으로 왕통이 이어져 왔는 지 정확히 알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다.
대략 추정해보면 '소서노'와 함께 고구려에서 내려온 예맥족 일파 '온조, 기루' 집단이 한강 유역에 자리를 잡았고,
'미추홀' (인천부근)에는 '비류, 초고' 집단이 정착을 한다.
이후 비류집단은 온조집단의 '십제'(백제 초기에는 십제국이라 불리움)국에 흡수합병 당했으나 내부에서 은근한 세력을 이루다가 나중에 뻐꾸기처럼 '십제'국을 장악하고 왕위를 차지해 주도권을 잡았다고 보고 있다.
그 이유는 근초고왕 이후 백제 왕실과 왕족들은 비류를 시조로 모시는 일관된 행태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근초고왕계 이후 백제 왕실은 <동명 - 구태(우태) - 비류.. 초고 - 구수 - 사반 - - 비류(시조 비류가 아님) - ... 근초고 ~> 를 하나의 왕통으로 여기고 이를 '후대 백제왕통'이라 칭했다.
즉 <온조, 다루-기루-개루,고이>로 이어지는 '고이왕'계는 철저히 배제했던 것이다.
즉 백제 초기 가장 걸출했던 '고이왕'계와 '근초고왕'계는 일단은 서로 혈통적으로 거리가 있는 듯 하고, 근초고왕 때 이르러서는 고이왕계를 압도하고 백제왕족 혈통이 근초고왕계로만 이어졌다.
근초고왕 혈통이 동명성왕- 우태를 시조로 인식한 점을 보면, '온조설화'랑 '비류설화' 중에 '백제 후대 왕통' 시각과 가까운 '우태'를 조상으로 서술한 '비류설화'를 택한 것으로 보인다.
즉 소서노가 주몽과 결혼하기 전 남편 '우태'를 시조로 삼는 것은 '비류' 만큼은 확실히 동명성왕(주몽) 친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온조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어쨌든 근초고왕이 13대 왕이니 그 이전 12명 왕들은 혈통에 따라 왕위를 이어 받은 것이 아니라 힘에 의해 왕위쟁탈전이 아주 심했다고 보아야 한다.
백제초기 수도로 정한 '위례성' 위치에 대해서는 <삼국유사> 기록에 따라 충청도 '직산'(稷山)일 것이라는 설이 고려와 조선 시대에 걸쳐 정설로 받아 들여 졌다.
그러나 근래들어 서울 송파에서 발굴된 '몽촌토성'(현 올림픽 공원 자리)과 '풍납토성'(현 서울 송파구 풍납동) 일대를 위례성 으로 추정하는 것을 현재 대부분 학자들은 동의하고 있다.
서울특별시 송파구 석촌동·풍납동 일대를 비롯한 한강 하류지역에 산재한 백제초기 '적석총'이 고구려 발상지인 압록강 중류지역 무덤양식과 통하고 있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그러나 이 지역이 위례성임을 확정적으로 입증할 만한 구체적인 유물과 유적이 발견되지 않아 아직도 위례성 위치는 논란대상이 되고 있긴 하다.
'삼국사기'는 온조 당시에 이미 동쪽으로 춘천, 서쪽으로 서해, 북쪽으로 예성강, 남쪽으로 안성 일대까지 영역이 확장되었고, 충청남도 북부 일원 마한세력도 통합한 것으로 전한다. 그러나 이것 또한 확실치 않다. 당시 상황으로 봐서는 '삼국사기'가 잘못된 기록으로 보인다.
3세기 전반 한반도 중남부 상황을 전하는 중국측 기록인〈삼국지위지동이전>에 의하면, 백제는 마한 50여 개 소국 중의 하나에 불과하며 오히려 '목지국'(目支國)이 마한연맹체를 주도해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거의 동시대에 기록된 '진수' '삼국지위지동이전'이 천 년 후에 기록된 '김부식' '삼국사기'보다 더 진실에 가깝다고 보인다. 또 당시 여러 상황으로 봤을 때도 '목지국'이 존재했음이 확실하다.
여기서 '목지국'(目支國)에 대해 잠시 살펴보자.
'목지국'은 삼국시대 이전 고대 한반도 남부에 존재했던 마한 소국 중 하나로, 현재의 전라북도 '익산' 일대에 위치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목지국'에 대한 구체적인 역사적 기록은 많지 않지만, '삼국유사'나 '삼국사기' '삼국지위지동이전' 등 문헌에서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목지국'은 왕을 칭할만큼 고대국가 형태를 갖추었고 백제건국 초기에는 이 지역에서 백제보다 더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더불어, 최근 고고학적 발굴과 연구를 통해 목지국과 관련된 유물들이 발견되면서 그 실체에 대한 이해가 점차 깊어지고 있다.
목지국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는 많지 않고 목지국에 대한 자세한 연구는 아직 진행 중이다.
고고학적 발굴과 연구를 통해 더 많은 정보가 밝혀질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이처럼 백제건국 초기 '십제' 는 마한의 유력한 소국 중 하나였을 뿐, 마한 전체를 통합하는 단계에는 이르지 못했다는 것이 요즘 정설이다.
3세기 '고이왕' 시대가 되어서야 백제는 주변 소국에 대한 통합을 상당한 정도로 이루었을 가능성이 크다. '백제'라는 명칭 사용도 기록으로 보면 고이왕 시기 이전부터 보이고 있어 초기부터 '백제'로 사용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고이왕 시기 중앙집권체제가 강화되면서 공식화되고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십제'(十濟)에 대해 간략히 살펴 보자면, 십제는 초기 백제(百濟)
를 칭하는 명칭으로, 백제 초기 10개 부족이 연합하여 건국 되었다는 의미로 사용된 것으로 본다. 이후 '백제'로 명칭이 변경되면서, 이는 더 많은 부족의 통합과 확장된 영토를 확보했다는 것을 상징하게 된다. '백'은 '많다'는 의미로 해석되어, 백제가 많은 부족을 통합한 강력한 국가임을 표현한 것이다.
온조가 건국한 '십제'는 비류를 시조로하는 '미추홀' 세력을 통합하면서 '십제'를 한반도 중부의 신흥 강국으로 부상시켰을 것이다. 이는 미추홀(인천부근)의 풍부한 해산자원 획득이 가능해졌을 뿐 아니라, 한반도 남부의 마한 소국들이 행하는 중국 군현과 무역을 통제할 수 있는 지리적 요충 확보가 미복속 소국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백제 건국 초기 사회상은 <이주민과 토착민의 융합, 농업 중심의 경제, 부족 연합체적 성격, 왕위계승 다툼, 왕권 강화 노력, 중국 왜와 대외 교류 시작> 등 사회발전과 사회적 불안정성이 혼재된 시기였다.
이러한 불안전한 요소들을 하나 둘 해결해 나가면서 백제는 한반도 서중남부를 통합해 가면서 점차 강력한 국가로 발전해 나갔다.
그리고 백제 제 8대 왕 고이왕(古爾王, 재위 234년~286년) 3세기 때 백제초기 국가체제 확립과 강력한 중앙집권체제 구축에 성공한다.
고이왕 시기의 주요 업적과 사회적 변화는 다음 편에서 정리하겠다.
ㅡ 초롱박철홍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