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당 탄생 100주년, 문학적 자산 이대로 방치할 것인가 2 미당문학다시보기
- 탁월한 시적 형상화 능력…우리 언어 심미적 정점 보여줘
▲ 동국대학교 중앙도서관 지하 2층에 마련된 미당문고. 이곳에서는 미당 사후 남현동 자택에 있던 그의 유품들을 보관하고 있다. 육필시집부터 소장도서, 일상용품, 흉상 등 다양한 유품이 전시돼있다.
미당은 1000여 편의 작품으로 거대한 오케스트라를 연주했다. 이 오케스트라는 불교적 사유와 영원주의, 신라정신, 전통, 샤머니즘 등 다양한 악기가 뿜어내는 대향연을 감당했다. 그러나 미당이 펼쳐낸 대향연속에는 친일과 독재옹호라는 불협화음도 존재한다. 그래서인지 미당 문학에 대한 평가는 긍정과 부정의 두 지점에 걸쳐있다. 미당의 시적 성취를 높이 평가하는 논조들이 발표되는 만큼 그의 친일 행적과 권력에의 굴종을 문제 삼는 목소리들이 뒤따른다. 윤재웅 교수의 말처럼 그야말로 한국 문학사의 ‘문제적 아버지’다. 미당의 문학세계를 두 차례에 걸쳐 조명한다.
△ 미당시에 살아있는 바람, 그리고 시적 근원= 미당 서정주. 그가 15권의 시집을 통해 보여주었던 우리 언어의 형상화 능력은 탁월하고 특별했다. 〈화사집〉(1941)부터 〈80소년 떠돌이의 시〉(1997)까지 시의 생애동안, 서정주는 예술적 창의와 한국어의 심미적 정점을 선보였다.
“스물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8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중략…)/ 찬란히 틔어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 별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드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스물 세 해 동안 나를 키운건 8할이 바람이다’는 구절로 유명한 ‘자화상’. 한국인의 애송시로 꼽힌다. 생명의 고열한 상태를 지향해 나가는 젊은 시인의 내면 풍경 속에는 바람과 피가 뒤범벅돼 있다. 바람은 청년 미당을 키워준 삶의 원동력이자 에너지이며, 피는 거부할 수 없는 인간 조건의 상징이다. 문학평론가 조연현은 이 작품을 두고 미당 서정주의 운명을 암시하는 작품이라고 했다.
‘바람같은’ 운명처럼, 그는 학창시절에 두 번이나 퇴학을 당한다. 1930년대 중앙고보에서는 광주학생운동지지 시위 주모자로, 1년 뒤 고창고등보통학교에서는 ‘독서회 사건’으로 권고자퇴 당한다. 이후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벽’으로 당선된다.
“덧없이 바라보던 벽에 지치어/ 불과 시계를 나란히 죽이고/ 어제도 내일도 오늘도 아닌/ 여기도 저기도 거기도 아닌/ 꺼져드는 어둠 속 반딧불처럼 까물거려/ 정지한 ‘나’의 / ‘나’의 서름은 벙어리처럼……/ 이제 진달래꽃 벼랑 햇볕에 붉게 타오르는 봄날이 오면 벽차고 나가 목메어 울리라! 벙어리처럼/ 오-벽아”
‘벙어리처럼’, ‘벽차고 나가’ 등 시인의 절망적 상황히 여실히 그려져 있다. 김동수 미당문학회 회장은 “두 번이나 학교에서 쫓아 낸 일제에 대한 저항과 분노, 자신의 운명에 대한 자학 등 미당의 개인사적 아픔과 시대적 고통들이 그의 초기 시에 고스란히 배어있다”고 말했다.
또 미당 시의 근원을 설명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두 여인이 있다. 바로 유년시절 미당에게 영향을 끼쳤던 외할머니와 12살 때 만난 요시무라 아야꼬(吉村綾子) 선생이다.
▲ 김동수 미당문학회 회장이 지난 달 31일 전주시 중화산동 2가의 PIU 갤러리에서 서정주 시인에게 직접 받은 미당 육필시집을 선보이며, 서정주 시인과의 일화를 설명하고 있다.
미당은 어린 시절 마을서당을 다녔는데, 그 서당 옆 조그만 개울가 건너에 바로 외가가 있었다. 거기에는 시 ‘해일’에서와 같이, 일찍이 ‘먼 바다로 고기잡이를 나가 돌아오지 않은 외할아버지’를 기다리며 홀로 살던 외할머니가 계셨다.
서정태 옹의 구술에 따르면 미당은 외할머니의 구수한 옛날얘기가 듣고 싶어서, 때론 맛있는 군음식이 탐이나 서당이 끝나면 곧장 외가로 달려갔다. 외할머니는 미당에게 누룽지나, 고구마 같은 군것질거리를 주면서, 당신의 서러운 마음을 육자뱅이풍의 콧노래로 흥얼거려주거나 장화홍련전과 같은 전래 민담과 고전소설들을 곧잘 들려주었다고 한다. 이런 어린날의 추억과 무궁한 이야기들이 미당 시의 리듬이 되고, 호흡이 되면서 서정주 문학의 한 축을 차지했다.
“내 영원은 물빛 라일락의 빛과 향의 길이로라/ 가다가단 후미진 굴헝이 있어/ 소학교 때 내 여선생님의 키만큼한 굴헝이 있어/ 이쁘 여선생님의 키마늠만 굴헝이 있어/(-중략-)/ 물빛 라일락의 빛과 향의 길이로라/ 내 영원은”
미당이 소학교 때 그에게 글재주가 있다고 칭찬을 했던 요시무라 아야코 선생님과의 추억을 나타내는 시, ‘내 영원은’이다. 이때부터 그 여선생님을 사모하면서 쓴 시다. 선생님에게 드릴 것을 찾아 헤매다 어느 뜰에서 꺾었던 라일락 한가지. 그것을 들고 달려가다가 숨이 차서 잠시 몸을 누이던 굴헝. 언덕과 언덕 사이에 숙 풀 냄새만 자욱하던 그 굴헝에 몸을 누이면서 여 선생님을 떠올리며 아늑히 잠이 들고 싶어했다는 미당의 사랑과 그리움이 이 시의 배경을 이루고 있다.
미당의 술회에 따르면 요시무라 선생님은 1년 만에 일본으로 떠났고, 소년 미당은 처음으로 이별의 아픔을 경험하면서 그 아픔과 추억의 순간을 ‘영원으로 승화’하고 있다.
김동수 미당문학회 회장은 “두 시에서 드러난 여인은 슬프고도 아름다운 미당의 옛적 사랑을 드러낸다”며 “이들은 미당 시의 영원이며 그에게 시적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존재들이다”고 말했다.
△ 1970년대 전·후 미당 시집 모티브 된 산문 ‘만주일기’= 미당 서정주의 만주체험을 그린 〈만주일기(滿洲日記)〉는 ‘질마재 신화’(1975), ‘안 잊히는 일들’(1983), ‘팔할이 바람’(1988) 등 미당 시집의 모티브가 된 산문이다. 이 산문은 지난 해 12월 문예계간지 〈연인〉에서 공개해서 세상에 드러났다. 희귀본이기 때문에 미당시 연구자에게 자료적 가치도 크다.
〈만주일기〉는 매일신보에 1941년 1월 15일부터 21일까지 4회(15일자 석간, 16일자 석간, 17일자 조간, 21일자 조간)에 걸쳐 연재됐다. 실린 이야기는 1940년 10월말부터 11월말까지 작성한 내용 16회분이다.
이 산문은 그가 “유쾌하게 성공하겠다”며 일자리를 얻기 위해 만주로 떠났다가 느낀 고독, 좌절, 방황을 그렸다. 특히 1월 15일 게재된 산문에는 질마재 신화에 있는 시 ‘신부’의 모티브가 된 이야기를 적어 두었다. “첫날밤에 신랑이 변소에 가는데 한 장절에 도포 자락이 걸린 걸 신부의 경솔과 음탕인 줄 오해하고 버렸더라. 10년 후에 돌아와 보니 신부는 거기 10년의 첫날밤을 여전히 앉았더라. 오해가 풀렸거나 말았거나 손목을 잡아 보니 신부는 벌써 새까만 한 줌의 재였다”
미당은 ‘신부’에서도 유사한 이야기를 그려냈다. ‘신부’ 역시 첫날 밤 뒷간에 가는 신랑의 옷이 문고리에 걸렸는데, 신랑은 신부가 음탕해서 그러는 줄 알고 달아났다가 50년이 지나 돌아와 보니 신부가 고스란히 앉아 있었으나 어루만지자 재가 됐다는 내용이다.
지난 해 4월 ‘서정주의 만주일기(滿洲日記)를 읽는 한 방법’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한 최현식 교수는 미당 시집의 모티브가 된 여러 요소들을 조명했다. 최 교수는 논문에서 “미당은 일기에 나온 대로 만주에서 타향살이의 어려움과 가족과 친우와의 갈등, 창작의 어려움 등 예상치 못한 상황에 직면했다” 며 “미당은 수십 년이 흐른 1970년대를 전후하여 만주에의 쓰디쓴 회상과 추억, 일제에 대한 울분과 ’시인부락 ‘ 동인 함형수에 대한 애달픈 회고들을 자전적 산문과 시를 통해 반복적으로 발화·유통시켰다”고 주장했다.
〈만주일기〉는 미당의 전집에서는 찾을 수 없다. 글을 쓰게 된 동기도 알 수 없다. 단지, 젊은 시인의 개척이민(만주국 내 취직)을 널리 선전하고자 했던,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의 기획과 요청에 따른 글쓰기라는 추정만 있을 뿐이다.
김세희 saehee0127@jjan.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