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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 두륜산 대흥사, 북미륵암
2023년 10월 22일(일요일)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의 두륜산 도립공원 내에 위치한 사찰이며, 대한불교 조계종 제22교구 본사(本寺)입니다.
창건연대는 분명하지 않으나 신라말로 추정됩니다. 지금까지 13명의 대종사(大宗師)와 13명의 대강사(大講師)를 배출한 명찰로 임진왜란 뒤에야 비로소 선교양종(禪敎兩宗)의 대도량으로 면모를 갖추었습니다. 가람배치는 절터의 북쪽에서 흘러내리는 금당천(金塘川)을 중심으로 별원의 성격을 지닌 남원과 북원으로 되어 있습니다. 북원은 대웅전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남원은 천불전과 서산대사의 유물이 있는 표충사(表忠寺) 일곽, 다도로 유명한 초의선사(草衣禪師)가 중건한 대광명전(大光明殿) 일곽으로 나뉜니다.
대웅전은 1665년(현종 6)부터 1667년에 걸쳐 심수(心粹)가 중창했는데 앞면 5칸, 옆면 3칸의 다포집으로 내부는 단조로우며 현판은 조선 후기의 명필 이광사(李匡師)가 썼습니다. 대웅전 앞 백설당에는 김정희가 쓴 '무량수전'이란 편액이 있으며 동쪽 응진전 앞에는 대흥사응진전 3층석탑(大興寺應眞殿 三層石塔:보물 제320호) 1기가 있습니다.
천불전(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48호)은 1811년(순조 11)에 불탄 것을 1813년 중건한 것으로, 6년에 걸쳐 경주 옥돌로 만든 천불상(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52호)이 봉안되어 있고, 천불전 좌우에는 학승들이 기거하는 용화당(龍華堂: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93호)과 강사가 기거하는 건물이 있습니다. 1669년 건립된 표충사(전라남도 기념물 제19호)는 대흥사의 대표적 건물로 앞면 3칸의 맞배집이다. 서산대사·사명대사·처영(處英)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으며, 편액은 정조의 친필입니다.

표충사 갈림길
두륜봉 0.8km, 북미륵암 0.8km, 오소재주차장 2.8km, 표충사 1km

진불암

진불암 응진당

응진당 안에는 조선 초기의 목조 16나한상(羅漢像)이 봉안되어 있는데, 그 조각수법이 특이합니다. 원래 이 나한상은 50m 상방에 위치했던 고진불암(古眞佛庵)에 있었다고 하는데 전설에 의하면 강진에 살던 어부 서씨(徐氏)가 바다에서 고기를 잡다가 서쪽나라의 배를 만났는데, 그 배 안에 16나한상이 실려 있었으므로 두륜산방(頭輪山房)에 봉안하였다고 합니다.

중앙에 석가모니불과 삼세후불탱화가 모셔져 있습니다.

보호수

오심재 0.9km, 북미륵암 0.3km, 진불암 0.8km


북미륵암

용화전
마애여래좌상이 있는 전각의 이름은 용화전(龍華殿)입니다. 그래서인지 이 마애여래좌상이 미륵불로 알려지기도 하였습니다.
용화전(龍華殿) 편액

본래 북미륵암마애여래좌상은 자연의 일부로서 완잔히 노출된 상태에 있었습니다.
1963년 보물로 지정되기 전까지는 아무런 보호시설도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다 1985년에 보호각으로 용화전이 세워졌다고 합니다. 현재의 용화전은 2005년 해체 보수 공사를 하면서 건물 뒤쪽 절반은 햇빛이 들어오는 형태로 고친 것입니다.
사진을 보면 마애암의 주변의 벽체가 유리로 되어 있으며, 천정 역시 자연광을 흡수할 수 있는 구조로 되어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대흥사 북미륵암마애불좌상(국보 제308호)
대흥사 북미륵암의 암벽에 새겨진 마애불은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불상입니다. 전체 높이는 4.85m, 몸길이는 3.5m에 이릅니다. 이 마애불은 2005년에 보물 제48호에서 국보 제308호로 승격되었습니다. 그동안 보호각인 용화전에 가려졌던 일부가 2004년 용화전 해체보수 과정에서 상단부와 하단부 전체가 드러나면서 그 가치를 인정받아 국보로 지정되었습니다.
연화좌(蓮花座)에 결가부좌한 마애불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한 여래좌상입니다. 광배에는 두광과 신광뿐만 아니라, 4구의 천인상이 대칭으로 화려하게 새겨져 있습니다. 특히 아래쪽 2구 공양 천인상은 한쪽 무릎은 세우고 다른 다리는 꿇은 자세를 하고 있습니다. 얼굴은 위를 향하고, 한 손에 지물(持物)을 든 채 연화좌에 앉아 있습니다.


대흥사 북미륵암 삼층석탑(보물 제320호)
북미륵암에 2기의 삼층석탑이 있습니다. 그 중 용화전 바로 옆에 있는 탑이 대흥사 북미륵암 삼층석탑입니다.
이 탑은 전체 높이 4.35m로, 통일신라시대의 석탑 양식에 따른 고려시대의 석탑입니다. 이 탑은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11세기)과 같은 시기인 고려시대 초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다른 석탑 1기는 암자에서 약 50m 떨어진 산등성이에 있습니다. 대흥사 북미륵암 동삼층석탑이라고 합니다.

대웅전 갈림길(대흥사 방향)
두륜봉 1.1km, 천년수 0.6km, 대웅전 1.6km

대웅전 0.9km, 가련봉(오심재경유) 2km, 북미륵암 0.7km

가련봉 2.6km, 북미륵암 1km, 흔들바위 2.06km, 대웅전 0.6km, 두륜봉 2.1km, 가련봉 2.3km, 천년수(만일암터) 1.6km, 일지암 0.5km
임도를 따라갑니다.

대광명전 구역은 불전인 대광명전을 중심으로 수행공간인 동국선원과 생활공간인 벽안당 등의 요사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일반인은 출입금지 입니다.

동국선원(東國禪院)은 정면5칸, 측면3칸 팔작지붕 건물입니다.
동국선원은 선방 스님들이 수행정진하는 곳으로서 초의선사가 개설해 지금껏 남도의 선풍을 이어갔습니다.
동국선원(東國禪院) 편액은 추사 김정희추사(秋史 金正喜, 1786~1856)의 글씨이며, 진본은 성보박물관에 보관하고 있습니다.
동국선원 (7번선방)은 문재인 대통령이 사법시험을 공부한 곳으로 '염원이 결실을 이룬 곳'이라 불리웁니다.
대광명전은 비로자나불을 모시고 있으며, 초의선사(草衣禪師 1786~1866)가 조선 헌종 7년(1841년)에 다시 지은 것입니다. 앞면 3칸, 옆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며, 내부는 불단이 있는 중앙부 위에만 우물 정(井)자 모양의 천장을 높게 달고, 연꽃무늬와 구름·학 등을 그려넣었습니다. 단청과 벽화 모두 초의선사의 작품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대광명전(大光明殿) 편액
대광명전(大光明殿) 편액 글씨는 추사의 제자 위당 신관호(威堂 申觀浩, 1811-1884)선생이 썼습니다.

호국대전(護國大殿)
정면 9칸, 측면 5칸에 다포집 겹처마 팔작지붕의 불사입니다.
대흥사에는 이미 1788년(정조 11) 천묵(天黙)ㆍ계홍(戒洪) 등의 스님이 발의로 서산대사(西山大師) 청허당(清虛堂) 휴정(休靜 1520~1604)을 비롯하여 그의 제자 사명대사(四溟大師) 송운당(松雲堂) 유정(惟政)과 유정의 제자 뇌묵당(雷默堂) 처영(處英)의 영정을 모실 사우(祠宇)의 건립을 모색한 바 있고, 그 소식을 접한 호조판서 서유린(徐有隣 1738~1802)이 서산대사 사적과 사우 건립의 당위성을 정조 임금에게 주청하여 건립 허가와 함께 ‘표충사(表忠祠)’라는 사액(賜額)을 받게 하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대흥사 호국대전은 기존에 세워진 문수전(文殊殿)ㆍ보현전(普賢殿)과 더불어 장차 우리나라 호국 영령들의 정신을 발양(發揚)하는 호국불교의 중심처로서 표충사의 전통을 이어갈 것입니다.
호국대전(護國大殿) 편액은 철농 이기우(鐵農 李基雨 1921~1993)의 제자인 마하 선주선(摩河 宣柱善 1953~ )의 글씨로 편액 뒷면에 “갑진 양력 정월(2024년 1월)에 선주선 삼가 쓰다”"甲辰陽正月 宣柱善謹書(갑진양정월 선주선 근서)"라고 새겼고 , 글씨 모각(摹刻)은 국가무형유산 각자장 송전 정진웅(松田 鄭震雄)이 시행했는데, 그는 국가무형문화재 각자장이던 철재 오옥진(鐵齋 吳玉鎭 1935~2014)의 수제자입니다.

보현전
보현전과 문수전은 호국대성전 앞에 서로 마주 보며 있으며, 남원 쪽 사찰의 가장 윗 쪽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정면 7칸, 측면 4칸의 전각으로 최근에 조성하였으며, 안에는 석가모니 불상이 모셔져 있고, 학술강연, 산중총회, 연수교육, 작은 음악회, 녹차 관련 행사, 수련회 등 다양한 행사 시 사용합니다.
보현전(普賢殿) 편액 글씨는 운암 조용민(雲庵 趙鏞敏 1926~2017)선생이 썼습니다.
문수전(文殊殿) 편액 글씨는 학정 이돈흥(鶴亭 李敦興 1947~2020)선생이 썼습니다.

표충사 호국문
호국문(護國門) 편액
표충사 호국문(表忠祠 護國門)편액 글씨는 심거 임병근(心居 林秉根)선생이 썼습니다.

보련각(寶蓮閣)
초의선사가 1852년 조사들의 진영을 모시기 위해 건립했습니다. 현재22위의 진영을 공동으로 모시고 제사를 지냅니다.
1944년 중수, 대광명전 뒤에 있던 것을 2009년 현 위치로 이전했습니다.
보련각(寶蓮閣) 편액은 일설에 따르면 초의의순(草衣意恂, 1786-1866)선사가 섰다고 전합니다.
보련각(寶蓮閣) 편액

표충사(表忠祠)
전라남도 기념물 제19호. 표충사는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일으켜 왜적 격퇴에 앞장선 서산대사의 영정을 모시는 사당으로서 서산대사의 위국충정을 기리고 그의 선풍이 대흥사에 뿌리내리게 한 은덕을 추모하기 위해 조선 현종 10년(1669년)에 건립되었습니다.
표충사(表忠祠) 편액
표충사 편액은 정조대왕의 친필로 매우 힘있는 글씨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어칸 상부에는 1789년(정조 13)에 정조대왕이 하사한 ‘표충사(表忠祠)’ 편액과 ‘어서각(御書閣)’이란 편액 두 기가 있습니다. 특히 표충사 사액(賜額)은 당시 호조판서 서유린(徐有隣, 1738~·802)이 서산대사의 사적과 사우건립의 정당성을 왕에게 주청하여 건립허가와 함께 ‘표충사’라는 사액을 받게 된 것이며, 나라에서 세금을 면제해주는 특혜까지 받았습니다. 어서각은 위당 신관호의 필적입니다.
어서각(御書閣) 편액
어서각 편액은 추사 김정희의 제자인 위당 신관호(威堂 申觀浩 : 1811~1884 혹은 1810~1888) 의 글씨로 '어서각'이란 '임금이 쓴 글씨가 있는 전각'이란 뜻입니다.

중앙 서산대사 휴정, 좌우로 전란에서 공을 세운 서산대사 제자인 사명당 유정스님과 뇌목당 처영 스님 진영

표충각비
건물은 1860년에 표충사를 이건할 때 지은 것입니다.

조사전
조사전은 3단의 바른층쌓기 방식의 장대한 기단 위에 단촐하게 세워져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1칸의 주심포계의 겹처마 맞배지붕 건물입니다.
조사전 편액은 대흥사 편액 중에서 유일하게한글로 씌여 있는데, 중견 여류 서예가 봄샘 박정자님의 글씨입니다.

조사전 내부에는 3폭의 조사 진영을 봉안하고 있습니다. 진영은 창건주 아도조사를 비롯하여 대흥사 13대종사와 13대강사의 진영을 모신 3폭으로 구분되는데, 6명 1폭, 5명 2폭으로 2단 구성으로 배치하였습니다.

관음33응신전
관음33응신전 편액

관음 33이라는 숫자는 한정된 33이 아니라 무한수를 나타냅니다.
관음전 벽면에는 중생이 원하는 다양한 모습으로 나투신 관음보살을 그린 그림이 걸려있습니다.
관음보살
화려한 보관을 쓴 관음보살이 양손으로 연꽃 가지를 길게 늘여 쥐고 있고,
뒤에 걸려있는 후불탱화는 천수관음도로,
커다란 원형 광배가 화면을 가득 채웠으며, 광배 안에는 버들가지를 꽂은 정병과 책, 연꽃 등을 든 천 개의 손과 눈이 표현되어 있고, 색 띠를 그려 상서로운 기운을 묘사하였습니다.

가허루
가허루는 정면 5칸, 측면 2칸에 풍판이 달린 주심포 겹처마 맞배지붕 건물로, 천불전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출입문입니다.
가허루(駕虛樓) 편액
가허루(駕虛褸)라는 편액 글씨는 전주 출신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 1770~1845)이 쓴 글씨입니다. 창암 선생은 19세기 호남 서예계를 평정하며, 추사 김정희(서울), 눌인 조광진(평양)과 어깨를 나란히 한 당대 조선의 3대 명필입니다.
젊어서 다른 사람들의 글씨를 폄하하던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의 만용은 자기보다 16살이나 나이가 많은 창암에게도 씌워졌습니다. 추사는 창암의 글씨를 보고 ‘밥은 먹고 살만한 서생의 글씨’라고 무시했습니다. 제주에서 귀양살이를 하면서 추사는 그 일을 후회했습니다. 창암의 글씨에도 나름대로의 혼과 뛰어남이 있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제주 귀양에서 돌아오는 길에 추사는 사과 하기위해 창암을 찾았지만 창암은 이미 죽은 뒤였습니다.
천불전(千佛殿) (보물 제1807호)
천불전은 높이 쌓은 석축단(石築壇) 위에 자연석 주초 위에 민흘림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창방과 평방을 놓고,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된 다포계 양식의 팔작지붕 건물입니다. 건물 앞면 어칸에는 삼분합문을, 좌우협칸 (左右夾間) 에는 이분합문을 달았고, 문의 청판에는 안상을 그렸고 정교하게 새긴 국화문양 (菊花紋) 과 연화문양 (蓮華紋) 의 꽃창살문입니다. 이 꽃창살은 내소사 꽃창살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아름다운 꽃창살입니다.
1811년(순조11)에 불탄 것을 완호(玩虎)스님이 순조13년(1813)에 다시 지었다고 합니다. 정면3칸, 측면3칸 규모의 팔작(八作)지붕, 다포(多包) 계통의 목조건물로서 높이 쌓인 장대석 기단 위에 세워졌습니다.
6년에 걸쳐 경주 옥돌로 만든 천불상(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52호)이 봉안되어 있습니다.
천불전(千佛殿) 편액(扁額)
천불전 편액은 원교 이광사(圓嶠 李匡師 1705~1777)의 글씨입니다.
대흥사 천불전 천장
천불전 내부에는 기둥과 들보가 없으며, 용조각, 단청, 공포들이 화려하게 장엄되어 있습니다.

석조천불상(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52호)
조선 순조 11년(1811) 대흥사에 큰불이 일어나 가허루, 천불전, 대장전, 용화당, 팔해당, 적조당, 지장전, 약사전, 향로전 등 아홉 동의 건물이 불에 타고 단지 세 동만 겨우 살아남았습니다.
이에 완호 윤우 스님이 중창 불사를 시작하여 1812년 극락전, 용화당, 지장전 등을 중건하였고, 1순조13년(1813) 천불전을 중건한 완호(玩湖)스님이 천불전에 봉안하기 위한 천불을 쌍봉사 화승(畵僧) 풍계대사(楓溪大師)에게 의뢰해 경주 불석산에서 나오는 옥석(玉石)으로 6년에 걸쳐 만들었다고 전해집니다.
천불이 완성되자 1817년 10월 23일 3척의 배에 나누어 싣고 해남으로 향했는데, 그중 완호 윤우가 탄 배는 오륙도 앞바다에서 표류하여 일본의 나가사키현에 닿았습니다.
일본에서는 이게 웬 떡이냐며 절을 짓고 천불을 봉안하려고 난리를 떠는데, 왜놈 꿈에 이 불상들이 나타나 해남 대흥사에 봉안될 불상이다 하였으므로 1818년 6월 일본을 출발하여 8월 15일 마침내 대흥사 천불전에 봉안하였다고 합니다.
이때의 일로 천불 중에는 어깨에 일(日)자가 찍힌 불상이 있습니다.
이 일을 1821년 일본 표해록(日本漂海錄)으로 남겼다고 합니다.

천불전 목조삼존불
법당 중앙에는 목조 석가모니 부처님과 좌우로는 문수, 보현보살이 모셔져있고, 그 주위에 옥석으로 조각한 천개의 작은 천불상이 봉안되어 있습니다.

용화당(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93호)
전남 유형문화재 제93호 용화당(龍華堂)은 정면 8칸, 측면 3칸에 주심포 익공 양식의 팔작지붕 건물로,
강당 겸 선방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완호 윤우 대사가 순조 13년(1813)에 건립하였습니다.
용화당 편액
‘龍華堂(용화당)’ 편액은 성당 김돈희(惺堂 金敦熙, 1871-1936)의 글씨입니다.
성당 김돈희는 본관 경주. 성당(惺堂). 어려서 안진경 (顔眞卿) 의 서체를 배우다가 황정견 (黃庭堅) 의 행서(行書)를 배웠고, 예서(隸書)에도 능했습니다.
용화는 미래의 부처님, 즉 미륵부처님을 말합니다.
대흥사 봉향각
이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의 단층 건물입니다.
해남 대흥사 봉향각은 강사 스님이나 선원장 등 어른 스님들이 계셨던 곳입니다. '각'은 '당'보다 한단계 높은 의미입니다
奉香閣(봉향각) 편액

연리근
높이가 20m이고, 둘레는 4.4m에 수령은 약 500년 된 느티나무로, 2012년에 보호수로 지정되었습니다
수령이 오백여년 된 느티나무로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오래 세월 담아 왔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왼쪽은 차분한 "음"의 형태이며, 오른쪽은 활발한 "양"의 형태를 가지고 있습니다.

침계루
침계루(枕溪樓)는 맞배지붕의 정면 5칸, 측면 3칸의 2층 누각식 건물이며 북원(北院)의 출입문으로 남, 북원을 가로지르는 계류 금당천(金塘川)에 면하여 자리한 2층 누각(樓閣)건물입니다. 심진교를 지나 누(樓) 아래의 어칸 통로를 통해 중정(中庭)으로 출입하며, 대웅전(大雄殿) 맞은편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대흥사 심진교(尋眞橋)
심진교는 '진리를 찾아 건너는 다리'라는 의미로 해남 대흥사의 북원(北院)과 남원(南院)을 가로지르는 금당천(金塘川)에 놓여있는 다리가 심진교(尋眞橋)입니다. 금당천에 의해 나뉘어진 북원과 남원을 심진교가 연결하고 있습니다.
침계루(枕溪樓) 편액
침계루 어칸에는 용틀임을 하고있는 원교(員嶠) 이광사(李匡師, 1705~1777)가 쓴 동국진체(東國眞體) 글씨 침계루(枕溪樓) 편액과 그 배면에 ‘원종대가람(圓宗大伽藍)’이라 쓴 두 기의 편액이 걸려 있습니다.
대흥사 침계루 2층
침계루 2층에는 예경의식을 할 수 있는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현재는 법고와 목어, 운판이 있고, 2층 좌우벽에는 금어 현암(玄菴)이 조성한 사천왕탱이 있습니다.
원종대가람(圓宗大伽藍) 편액
침계루 뒷쪽 편액, 원종대가람도 편액은 원교 이광사(圓嶠 李匡師 1705~1777) 글씨입니다.
앞쪽 편액과는 달리 부처님 앞이라서 그런지 단정한 글씨체로 썼습니다. 여기서 '원종'은 화엄종을 말합니다.

대웅보전 (大雄寶殿)
대웅보전은 1665년(현종6)부터 1666년에 걸쳐 심수가 중창했는데, 앞면 5칸, 옆면 3칸의 다포집으로 내부는 단조로우며 현판은 조선 후기의 명필 원교 이광사 글씨입니다.
대웅보전에는 원교 이광사(圓嶠 李匡師 1705~1777)의 대웅보전 편액이 걸려 있었는데,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가 1840년에 제주도로 귀양가다가 초의선사를 만나러 대흥사에 들렀습니다. 그때 추사는 대웅보전 편액을 새로 써서 이광사 편액 대신 걸게 했습니다.추사 김정희가 귀양살이가 풀려 제주도에서 돌아오는 길에 다시 대흥사에 들러, 자신의 편액을 떼고 이광사의 글씨를 걸게 했다는 일화가 전해집니다.

대웅보전은 석가모니부처님이 주불로서 중생에게 설법을 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전각입니다.
대웅전과 대웅보전의 차이를 조사해 보니 대웅전은 중앙에 석가모니 부처님, 왼쪽에는 문수보살, 오른쪽에는 보현보살을 모신 곳이고, 대웅보전은 중앙에 석가모니 부처님, 왼쪽에 아미타불 부처님, 오른쪽에 약사여래 부처님의 삼계불을 모신 곳으로 격을 높여 대웅보전이라 부릅니다.
대웅보전(大雄寶殿) 편액
원교 이광사(員嶠 李匡師, 숙종 31년(1705) ~ 정조 1년(1777)는 조선의 문신, 서예가이며, 현대 한국학의 시조입니다. 원교 이광사가 쓴 것으로 전해지는 이 현판은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 때문에 불태워져 사라질 뻔 했습니다. 동국진체를 완성한 원교 이광사의 글씨를 놓고 조선의 글씨를 다 망쳐놓은 장본인이라는 비판을 서슴치 않았던 추사 김정희입니다.
제주도로 유배를 가던 추사 김정희가 자신의 오랜 지기였던 초의를 만나기 위해 해남 대흥사를 들립니다. 추사는 제주도에서 8년 3개월(1840~1848년) 유배를 살았습니다.
귀향 가는 처지였지만 대웅전에 이광사가 쓴 현판이 걸려있는 것을 보고 초의선사에게 "이광사의 글씨는 심서가 아니고, 글씨의 도를 체득하지 못하고 속기가 있다"라고 비판했습니다. 귀양살이로 새롭게 눈을 뜬 추사는 귀양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다시 이 절에 들러 "이광사의 글은 부족함이 없는 명필"이라 말하고 예전에 잘못 보았다며 떼어놓은 이광사의 편액이 있으면 다시 달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때 김정희는 이광사보다 9살 어렸습니다.
현재 이 글씨는 백설당에 걸린 추사의 ‘무량수각’ 편액과 함께 대흥사 명필로 손꼽혀 장성 백양사 및 승주 송광사에서 그 글을 모각할 만큼 뛰어난 필적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대흥사 석가여래삼불좌상(海南 大興寺 釋迦如來三佛坐像) (보물 제1863호)
대흥사 석가여래삼불좌상(釋迦如來三佛坐像)은 임진왜란 전란 과정에서 의승군의 최고 지도자로 활약했던 서산대사의 의발(衣鉢·승려의 가사와 바리때)이 1606년 대흥사에 봉안되고 난 6년 후에 이루어진 불사로 우협시불상(약사여래불)의 크기가 170cm에 이른 대형 불상이라는 점에서 이 시기를 대표하는 기념비적인 불상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또한 좌우의 협시(본존인 여래를 모시는 것) 불상에서 발견된 ‘소성복장기(塑成腹藏記)’에는 1612년이라는 정확한 조성 시기와 태전을 비롯한 제작에 참여한 10명의 조각승, 불상 제작에 필요한 시주 물목(물건의 목록)과 참여했던 380여 명의 사부대중(부처의 가르침을 따르는 비구․ 비구니․ 우바새(거사)․ 우바이(보살)이 모두 기록되어 가치가 더욱 높이 평가되고 있습니다.
석가여래삼불좌상은 우리나라 불상 중 380명이라는 최다 시주기록을 가지고 있는 불상으로도 많이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대흥사 석가여래삼불좌상(보물 제1863호)
수미단 위에는 중앙의 석가모니불 좌우에 약사여래불과 아미타불로 구성된 보물 제1863호 해남 대흥사 석가여래삼불좌상이 봉안되어 있습니다.
석가모니불은 항마촉지인의 수인을 하고 있고, 약사여래불과 아미타여래불은 아미타여래 9품인 중 하품중생(또는 중품하생)의 수인을 하고 있습니다.
삼세불 뒤의 후불탱화는 석가모니불과 약사여래불 및 아미타불을 각각 그린 삼불회도(三佛會圖)가 걸려있습니다.석가모니불을 가운데로 좌우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협시하고, 상단에 마하가섭존자와 아난존자를 배치하였고, 약사여래불을 가운데로 좌우에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이 협시하고, 상단에 4대 제자와 두 신장을 넣었으며, 아미타여래불을 가운데로 좌우에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협시하고, 상단에 4대 제자와 두 신장을 넣었습니다.
해남 대흥사 영산회 괘불탱 (海南 大興寺 靈山會 掛佛幀) (보물 제1552호)
색민(色旻)이 으뜸화원을 맡아 조성한 괘불로서 중앙의 석가모니불을 비롯하여 왼쪽에는 여의를 든 문수보살을, 오른쪽에는 연꽃을 든 보현보살을, 그리고 석가모니불의 두광 좌우로 관음보살과 아미타불을 배치하여 오존도(五尊圖) 형식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도상적 특징은 내소사 괘불을 비롯하여 안정사 괘불, 청곡사 괘불, 운흥사 괘불, 다보사 괘불 등 18세기 호남지역에서 성행한 『오종범음집(五種梵音集)』에 근거한 도상을 간략화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 괘불은 전체적으로 안정감 있는 구도와 다소 살찐 듯한 인물표현, 다양하면서도 화려한 문양 등은 색민이 스승인 의겸(義謙)의 화풍을 충실하게 계승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작품은 선행 도상과 화풍을 잘 계승하고 있는 귀중한 작품이자 색민의 대표작으로 꼽을 수 있습니다.
명부전
명부(冥府)는 사람이 죽은 뒤에 가는 곳이고, 명부를 관리하는 보살이 지장(地藏)보살입니다. 지장(地藏)이 땅(地) 속에 있다(藏)는 뜻이니, 지장보살이 대지(大地)의 덕을 상징하는 보살로서 윤회에 허덕이는 중생을 구제해주는 존재임을 알겠습니다.
명부전(冥府殿) 편액
명부전(冥府殿) 편액은 구한말 서예가인 해사 김성근(海士 金聲根: 1835-1919)의 글씨로, 그가 전라도 관찰사로 재직 중일 때 대흥사와의 교류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건물 내부는 우물마루에 연등천장으로 처리하고, 지장보살과 무독귀왕, 도명존자의 삼존을 중앙 불단에 봉안하고 있습니다.
지장보살 우측에는 짝수(2,4,6,8,10) 대왕과 판관, 녹사, 사자 및 인왕이 배치되어 있고, 좌측에는 홀수(1,3,5,7,9) 대왕과 판관, 녹사, 사자 및 인왕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지장보살
아미타여래 9품인 중 하품중생의 수인을 한 지장보살을 가운데로 좌우에 합장한 도명존자와 두 손을 도포 자락 안에 넣은 무독귀왕이 서서 협시하고 있고, 지장보살 뒤에는 1901년 금어 경선 응석(慶船應釋)이 그린 지장 후불탱화가 걸려있습니다.
대흥사 백설당
백설당은 스님들이 일상사를 해결하고 회의를 하며 대중법요를 가지는 곳입니다. 백설당은 ‘트인 ㅁ자’형 건물로 6칸의 큰방과 큰 부엌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건립시기는 분명치 않으나 대웅보전보다 후대에 건립된 것으로 1899년(광무3) 10월 서상실(西上室)의 화재로 2년 뒤인 1901년에 건립된 것으로 전해집니다.
내부의 한쪽 벽에는 각자의 소임을 나누어 적은 용상방이 붙어 있습니다. 건물에는 중앙에 '무량수각', 우측에 '백설당'이라는 편액이 걸려있습니다.
대흥사 무량수각(無量壽閣) 편액
백설당에는 또 다른 편액이 걸려 있는데, 제주도 유배 가는 길에 대흥사에 들려 초의선사에게 써주고 간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의 ‘무량수각(無量壽閣)' 편액입니다. 또한 동국선원에 걸린 ‘一爐香室(일로향실)’과 ‘東國禪院(동국선원)’ 편액도 추사의 글씨입니다. 백설당 중앙 편액, 무량수각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이며, 진품은 성보박물관에 있습니다. 대웅보전에 걸린 이광사의 글씨를 떼라고 한 추사는 이 '무량수각' 이라는 편액을 써주고 걸라고 하였으나, 귀양에서 돌아온 후, 이것을 떼고 다시 이광사의 대웅보전 편액을 걸라고 하였습니다. 추사는 제주 유배생활에서 많은 것을 깨닫고, 10개의 벼루와 100자루의 붓이 닳아 없어진 결과 추사체를 완성하였다고 합니다.
백설당 편액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우측에 자리하고 있는 백설당 처마에 걸려있는 白雪堂(백설당) 편액은 해사 김성근(海士 金聲根 1835-1919)이 쓴 것입니다.
해사 김성근은 구한말 의정부참정과 탁지부대신을 지낸 인물로 일제에 적극 협력해 1910년 일제로부터 자작직위를 받았습니다.

좌측 응진당, 우측 산신각
대웅보전 좌측에 자리한 이 건물은 왼쪽으로부터 응진당ㆍ산신각을 한 채에 연이어 수용한 점이 특이합니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주심포식 맞배건물로 막돌 바른층쌓기 한 기단 위에 2벌대의 장대석을 쌓고 막돌 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웠습니다. 어칸에는 응진당(應眞堂)과 산신각(山神閣) 두 기의 편액이 걸려 있습니다.
응진당과 산신각은 한 건물에 있으며, 산신각은 정면 3칸, 측면 3칸이고, 산신각은 정면 2칸, 측면 3칸의 주심포식 맞배지붕 건물로 응진당과 산신각은 쪽문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應眞堂(응진당) 편액
해사 김성근(海士 金聲根 1835(헌종 1)∼1919)이 쓴 응진당 편액을 걸었습니다.

정면 3칸, 측면 3칸 건물 내부는 우물마루, 상부에 연등천장을 가설하고 불단을 설치한 모습으로, 천장 상부에는 구름 위를 비천하는 청룡과 황룡도가 장엄되어 있습니다. 응진당에는 목조석가삼존[석가부처님을 중심으로 문수, 보현보살]과 16나한, 판관, 사자, 인왕을 권속으로 모시고, 그 후면에 석가모니후불탱과 16나한탱, 사자탱을 봉안하고 있습니다.

석가모니불을 가운데로 좌우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협시하는 삼존불이 봉안되어 있고,
협시보살 좌우에는 관음과 세지의 보살패가 안치되어 있습니다.
삼존불 뒤의 후불탱화는 1901년 금어 석옹 철유 외 5인이 조성한 영산회상도로,
석가모니불을 가운데로 좌우에 마하가섭존자와 아난존자가 협시하고, 주변에 6대 보살과 8대 제자 및 사천왕을 그렸는데, 누가 속을 썩였는지 영산회상도의 석가모니불 나발이 하얗게 셌습니다.
산신각(山神閣)의 편액은 초의선사(草衣禪師 1786~1866)의 글씨입니다.

정면 2칸, 측면 3칸 건물 내부는 연등천장 상부에 황룡과 청룡도를 단청하고, 불단 위에 1901년 조성된 산신탱화(山神幀畵)와 독성탱화(獨聖幀畵)를 봉안하였습니다. 독성(獨聖)이란 불교계에서는 홀로 진리를 깨치고 중생에게 복을 주고 소원을 성취시켜 준다는 나반존자(那畔尊者)를 지칭합니다.
산신각에는 1901년 금어 석옹 철유 외 5인이 조성한 산왕대신을 그린 산신탱과 나반존자를 그린 독성탱이 봉안되어 있습니다.
대흥사 삼층석탑(海南 大興寺 三層石塔) (보물 제320호)
응진전과 청운당 사이에 서 있는 탑으로, 전하는 말에 의하면 신라 자장 스님이 중국에서 가져온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사리탑이라 한다. 탑의 형태는 2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신라의 일반형 석탑입니다. 탑신은 1층 몸돌에 비해 2층 이상의 몸돌 높이가 크게 줄었으나, 넓이는 거의 줄지 않았습니다. 전체적으로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기단의 가운데 기둥이 하나로 줄어들고 옥개석 받침이 4개인 점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에 세워진 작품으로 추정됩니다.
1967년 1월 보수공사 때 기단 안에서 높이 12cm의 동조여래좌상(銅造如來坐像) 1구(軀)가 발견된 바 있습니다
대흥사 범종루
북원의 대웅보전과 응진당 사이에 있던 범종각을 근래에 천불전 가허루 앞으로 이전하였으며, 범종각이 있던 자리에는 윤장대를 조성하였습니다. 범종루에는 범종만 있고, 나머지 법고, 운판, 목어는 북원 입구의 침계루 2층에 있습니다.
범종루(梵鐘樓) 편액

대흥사 풍광
뒤로 보이는 두륜산이 부처님이 누워있는 형상이라고 합니다.
좌측 부처님발, 중앙 부처님 수인(왼손, 오른손), 우측 부처님 얼굴

해탈문(解脫門)
2002년에 건립된 해탈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 겹처마 맞배지붕 건물입니다. 외부에는 3면에 도륜(道倫) 박태석(朴泰錫)이 그린 ‘부모은중(父母恩重)’ㆍ‘염화신중(拈花神衆)’ㆍ‘점성가제도(占星家濟度)’ 등이 주제별로 그려져 있으며, 2002년 해탈문 건립 당시 단청과 함께 조성되었습니다.
해남 대둔사 해탈문 앞쪽에 걸려있는 '두륜산 대흥사' 편액에는 특이하게도 ‘해사(海士)’, ‘김성근인(金聲根印)’이라는 2과의 방인 도서를 액판 좌, 우측에 나누어 찍었습니다. 해사 김성근(海士 金聲根 1835∼1919)는 두 번에 걸쳐 전라도관찰사를 역임했는데 이 편액의 글씨는 동학혁명이 일어나기 이전 관찰사로 부임했을 때쯤에 쓴 것으로 보입니다. 편액의 글씨는 준일(俊逸)한 필치의 행서로 점획의 비수(肥瘦)와 경중(輕重)을 조화롭게 썼습니다.
원교(員嶠) 이광사(李匡師, 1705~1777)가 쓴 해탈문(解脫門)’ 편액(扁額)입니다.
원교 이광사는 원교체(圓嶠體)를 완성하고, 동국진체를 이룩한 조선시대 대표적 서예가 중에 한 사람입니다. 원교는 나주괘서사건(1755년, 영조 31년에 소론 일파가 역모를 꾀한 사건)에 연류되어 함경도 부령에서 귀양 살다가 1762년 전라도 완도의 신지도로 이배되었습니다. 1777년 8월 26일 73세로 신지도 유배지에서 죽었습니다.
'해탈문' 편액은 원교 이광사의 글씨입니다. 이광사는 왕족이자 양명학자로 동국진체, 즉 조선 고유의 서예체를 완성한 인물입니다. 연려실기술의 저자 이긍익의 아버지로 당파 싸움과 역모사건으로 연루되어 23년의 유배끝에 완주 신지도에서 생을 마쳤습니다. 이광사는 대흥사에 대웅보전, 침계루, 해탈문, 천불전에 편액을 남겼습니다.

대흥사 해탈문에는 사천왕상이 없고 대신에 사자를 탄 문수동자와 코끼리를 탄 보현동자가 있습니다.
연꽃 가지를 길게 쥐고 푸른 사자 등 위에 올라 탄 문수동자는 지혜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북쪽의 영암 월출산, 남쪽의 송지 달마산, 동쪽의 장흥 천관산, 서쪽의 화산 선은산이 대흥사를 감싸고 있기 때문에 풍수적으로 완벽한 형국을 취하고 있어 사천왕상을 세우지 않았다고 합니다.

보현동자는 석가모니의 수행과 행원을 상징합니다. 오른손으로는 연꽃 봉오리를 쥔 모습이고, 코끼리를 타고 있는 모습입니다. 흰 코끼리 등 위에 올라 탄 보현동자는 실천을 상징합니다.
즉, 문수와 보현은 부처님이 지닌 대표적인 두 힘을 형상화한 것입니다.

반야교

부도전(浮屠殿)
낮은 담장 안에는 대흥사 13 대종사(大宗師)와 13 대강사(大講師) 등의 부도와 비를 포함해 대부분 조선 시대 후기에 건립된 여러 형태의 54기 부도와 27기 탑비가 다소 무질서하게 배치되어 있습니다.
초의선사의 부도는 원구형 승탑으로 '초의탑'이 새겨져 있습니다. 서산대사는 대흥사가 "전쟁을 비롯한 삼재가 미치지 못할 곳으로 만년동안 훼손되지 않는 땅"이라고 하며 85세 묘향산에서 입적할 때 선조가 하사한 교지와 금란가사, 옥발우, 신발 등을 두륜산 대흥사에 간직할 것을 제자 사명대사에게 유언으로 남겨 사리도 이 곳에 모시게 되었습니다. 부도는(해남 대흥사 서산대사탑(海南 大興寺 西山大師塔, 보물 제1347호)는 팔각원당형 승탑으로 청허당(淸虛堂)이라 새겨져 있습니다.

대흥사 일주문(一柱門) 뒷쪽
일주문 뒤쪽 편액
禪林敎海滿華道場(선림교해만화도장) 편액은 호남의 서예가 운암 조용민(雲菴 趙鏞敏 1926~2017) 의 글씨이고, 행서와 초서의 명필이라고 합니다.
선림교해만화도장은 선종이 숲을 이루고 교종이 바다를 메우니 모두가 어우러진 도량이라는 뜻입니다.

일주문

頭輪山大興寺(두륜산대흥사) 편액
편액 글씨는 여초 김응현(如初 金膺顯 1927~2007)의 글씨입니다. 그의 형은 일중(一中) 김충현(金忠顯) 선생으로 우리나라 현대 서예를 대표하는 서예가입니다.

장승
대흥사 일주문 앞에 금귀대장(禁鬼大將)과 수조대장(受詔大將)이 세워져 있습니다.
사찰을 수호하는 장승으로, 나주 불회사 입구에 세워져 있는 하원당장군과 주장군과 성격이 유사합니다.

대흥사 13대강사도량탑
해남 대흥사의 고승은 서산대사의 법맥을 이은 13대종사와 13대강사로 대표되는데, 1823년 대흥사에서 간행된 <대둔사지>에 이들의 행적과 사상 등이 약술되어 있습니다.

유선여관
카페 유선으로 변했습니다.

물소리길의 삼나무숲

산문
대흥사 오르는 길에 두륜산 대둔사 편액이 걸린 산문이 새로 세워져 있습니다.
"頭崙山大芚寺(두륜산대둔사)"라는 편액은 강암 송성용(剛菴 宋成鏞, 1913~1999)의 글씨입니다.
원래 사찰명이 대둔사(大芚寺)였기 때문에 산 이름도 대둔산이라고 했는데, 나중에 절 이름이 대흥사(大興寺)로 바뀌자 산 이름도 대흥산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이 편찬한 대둔사지(大芚寺誌)에 백두산의 두(頭)와 중국 곤륜산의 륜(輪)을 따서 두륜산이라고 했다고 소개하면서 지금은 두륜산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煙霞門(연하문) 대흥사 배면
앞쪽에는 '두륜산대흥사', 뒷쪽에는 '연하문'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습니다. 두륜산은 크고 둥글다는 뜻의 '한듬'과 두륜산의 본래 이름인 대둔산이 합쳐서 '한듬산'이라고 불렸고, 대흥사도 한때 '한듬절'이라 불렸다고 합니다. '두륜산대흥사' 편액은 김제 출신 현대서예가 강암 송성용(剛菴 宋成鏞, 1913~1999) 선생의 글씨입니다. 송성용 선생은 학문과 범절을 부친으로 부터 이어 받아 보발을 고집하고, 양복을 입지 않았으며, 다양한 서체를 구사하였습니다. 뒷쪽 편액 연하문에서 '연하'는 안개와 노을을 이르는 말입니다.

대흥사 불교문화유산 안내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