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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금지령님'
사실 오늘 연애코치 가져올 생각 없었는데...표지를 정말 오랜만에 받아서 급하게 가져왔어요! 표지가 너무 예뻐요...특히 저 가위 디테일...너무 특이하고 눈에 띄는 것 같아요! 제가 또 그림자 효과를 엄청나게 좋아하지 말입니다! 그것도 너무 예쁘네요ㅠㅠㅠㅠ 좋은 표지 감사합니다!
Juiy - Happiness
연애코치 변백현은 재업로드 글입니다.
말이 좋아 방학이지 지금 이 상황은 평소처럼 아침 등교를 하던 날과 다름없었다. 갈수록 심해지는 추위에 제 몸집만한 패딩들을 껴입고 꾸역꾸역 방과 후 수업을 듣는 아이들의 모습이 각기 개성 뚜렷하게 눈에 들어왔다. 옷도 따뜻하게 입었겠다, 아침밥도 두둑하게 먹었겠다.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졸음현상이었다. 누군가 아래에서 나를 잡아당기는 듯 내 의지와는 다르게 내려가는 고개였다. 눈을 비비고 다시 제대로 펜을 고쳐 잡아도 내 귓가에 살근살근 잠을 속삭이는 악마때문에 또다시 속수무책으로 눈이 감기고야 만다.
“○○○, 변백현 또 안 왔니?”
“네? 아, 네…….”
이걸 고마워해야할까? 뭐, 잠에서 깼으니까 그러는 게 맞겠지. 놈의 이름을 듣자마자 나를 옴짝달싹 못하게 감싸고 있던 악마들이 제자리에서 달아나기라도 한 것처럼 투명해진 정신이었다. 참, 그 이름이 뭐라고……. 금방이라도 맑아진 머릿속이 이젠 다른 문제로 나를 골치 아프게 만들었다. 단합이 끝난 그 날, 침대에 누워 목각인형처럼 천장만 바라보며 한참을 생각했다. 텅하니 빈 천장에 이내 변백현의 얼굴로 그림이 그려졌다. 웃는 얼굴, 슬퍼하는 얼굴, 정색하는 얼굴, 진지한 얼굴, 그리고 나를 바라보는 얼굴도. 물론 진짜는 아니었지만,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아버릴 수밖에 없는 나였다. 누가 나를 해치는 것도 아니지만 그럴수록 더 강하게 눈을 감고 말았다.
“자, 그럼 수업 시작하자.”
방과 후를 시작한지 금세 일주일이 지났다. 물론 선택자유라는 이름을 가장한 의무기도 했다. 이젠 만날 일이 없다며 아련하게 주최한 단합은 모두 무용지물이 돼버렸다. 허나 나에겐 어느 정도 맞는 말이었다. 그 이유인 즉, 일주일이나 지난 지금 변백현은 방과 후에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 허한 옆자리를 내려다봤다. 왜인지는 모르게 오늘따라 유난히 허전한 기분이었다. 아마, 내가 놈의 빈자리를 느껴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무슨 용기인지는 모르겠지만 천천히 휴대폰을 들어 변백현의 이름을 찾느라 바쁜 내 두 손이 느껴졌다. 단순히 소식이 궁금해서가 아닌, 그냥 확인하고픈 마음 때문이었다.
[왜 학교 안나와?]
전송버튼을 누르자마자 미친 듯이 후회가 몰려왔다. 어쩌자고 그랬지? 무슨 생각으로. 방법만 있다면 1분 전으로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폭포처럼 몰려오는 창피함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갑자기 이러는 내가 낯설었다. 정확히 내 심장은 변백현에게서 뛰고 있었다. 분명 지금 내 마음은 그랬다. 어느 순간부터 경수를 볼 때와 놈을 볼 때의 심장소리가 불규칙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이제야 받아들여버린 나였다. 그동안 지독히도 거절하고 거부했다. 경수 때문에 뛰기 시작한 심장이었고 이것도 역시 경수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절대 변백현을 향해 움직이는 일은 없다 생각했다. 분명 놈이 나를 좋아한다 했을 때도 여전히 굳어있던 심장이 언제부턴가 이렇게 된 걸까 싶었다.
[변백현]알바중이야
“오늘 수업 여기까지, 내일 보자.”
황급히 책상을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늘은 한시라도 빨리 집에 가야할 것 같았다. 꽤나 성급하게 짐을 챙기는 내 모습에 의아함을 느낀 유람이가 의문증을 품은 얼굴로 '약속 있어?' 하고 넌지시 질문을 했지만, 꾹 다문 입을 애써 열 수가 없었다. 약속, 그런 건 없다. 내가 마음껏 어떻게 생각해도 상관없는 우리 집으로 가야했다. 대충 아이들에게 형식적인 인사를 건네고 교실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너무 과하다 싶을 정도로 부피가 큰 패딩이었다. 잔뜩 성이 난 날씨 탓에 꾸역꾸역 껴입은 옷에 유도 선수 덩치랑 맞먹을 지경이었다. 다시금 가방을 고치고 중앙계단을 지나기 위해 몸을 돌리는데.
“○○○, 변백현 오늘도 안 왔냐?”
“응? 아, 김종인 안녕.”
“변백현 또 안 왔어?.”
“아, 응…….”
“미친놈, 무슨 돈에 환장했나 무슨 매일 알바야 그 새끼는.”
“……지금 집 가?”
“……응.
확실히, 확실히 경수와 그 날 이후로 멀어진 기분이 들었다. 마치 물 한 방울도 나오지 않는 건조한 수도꼭지 같았다. 정겹게 들리던 물방울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는 그런 삭막하고 무미건조한 느낌. 사실 내가 변백현에게 심장이 요동친다는 걸 일깨워준 건 다름 아닌 경수였다. 그렇게나 어두운 골목길에서 주고받은 말은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난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이끌리는 대로. 경수는 아마 모르는 듯 했지만 난 그랬다. 참 이기적이라 생각했다. 요동치지 않는 심장이 밉기까지 했다. 분명 이전의 투명했던 앞은 자욱한 안개로 덮었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경수에게 느끼는 감정은 불편한 속에 있는 포근함과 익숙함이었다. 참으로 모순적이었지만 이보다 정확한 표현은 없었다. 난 경수가 불편했지만 또 편했다.
“그럼 같이 나가자.”
변백현과 경수가 화해를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그 누구보다 기뻐했던 건 김종인이었다. 안절부절 못하며 마치 인생의 중대한 결정을 앞두고 있는 사람처럼 힘겹게 나를 향해 입을 열던 그 날이 어렴풋이 생각났다. 그러고 보면 변백현과 도경수는 참 복 받은 사람들이었다. 정말 자기를 위해 가슴 쓰린 말도 용기 내어 말할 수 있는 그런 친구가 어디 있겠냐. 내 생각과는 다르게 쓴 웃음이 베어 나왔다. 바로 내 옆에 경수가 있다는 사실이 지독할 만큼 낯설었다. 분명 한두 번이 아닌데도 처음 같았고, 다른 느낌이었다. 오늘만큼은 경수도 내게 선뜻 말을 걸지 않았다. 그렇게 무난하고 또 순탄하게, 남들이 보면 우리 사이 감정 선에 아무런 일도 없었다고 생각할 만큼.
“……뭐야, 시발 내 눈이 잘못됐냐.”
“……뭐야?”
“쟤 김종대 맞지?”
차례대로 김종인, 도경수 그리고 나였다.
“아, 왜 이렇게 늦게 나와.”
“……김종대 연락도 없이 뭐냐?”
“와, 나 이 학교 처음이야! 학교 존나 크네.”
“미친놈아, 내 얘기 안 들리냐?”
“경수야, 나 저번에 너한테 빌린 돈 가져왔어.”
“응? 아니, 고마운데 너 갑자기 왜 왔는데?”
“너 ○○○ 맞지? 저번에 나 당구장에서 봤잖아. 너 진짜 내 친구들이랑 친하구나.”
“응?”
“야, 근데 변백현은 어디다 버리고 셋만 있냐?”
“시발아, 난 안 보이냐고.”
“변백현한테 전화해볼까?”
“아, 김종대 개새끼야.”
이보다 더 뜬금없는 사람이 있을까 싶었다. 아니, 정말 없을지도. 아마 김종인과 도경수에게 조금의 귀띔도 하지 않은 채 막무가내로 학교에 온 모양이었다. 내 양쪽에 서있는 두 명의 남자들 또한 적잖이 당황한 듯 눈만 깜빡거리는 게 그렇게나 웃길 수가 없는 거다. 그런 놈들의 반응에도 뭐가 그리도 신나는지 연신 조소를 띠며 주머니에 넣고 있던 손과 휴대폰을 꺼내 변백현에게 전화를 거는 김종대였다. 아마 꽤나 오랜 시간 밖에 서있었던 건지, 안타까울 정도로 벌겋게 부어오른 손에 반사적으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참, 정상 같지만 정상은 아닌 놈들이다. 꽤나 뜬금없는 생각이었지만 이들의 조합이 새삼스럽다고 느껴졌다. 매사에 부정적인 김종인과 매사에 긍정적인 변백현, 말이 너무 없어서 문제인 도경수와 말이 너무 많아서 문제인 김종대까지. 한 눈에 보기에도 안 맞을 것 같은 반대 극들이 나란히 모이니, 나름대로 시너지를 발휘하나 싶었다.
“야, 변백현 너 어디냐?”
“걔 알바 한다던데.”
“백현이 알바중이래.”
“시발아, 내가 방금 말했잖아.”
“거기 어딘데?”
“그건 절대 안 알려주던데 걔.”
“야, 백현이 룸카페에서 일한대.”
“너한테는 알려줘? 와, 변백현 그 개새끼 안 되겠네.”
“종인아.”
“뭐.”
“변백현이 너 싫어해서 그래.”
마치 간판 예능 프로그램의 덤앤더머 콤비라도 탄생한 것처럼 엄청난 호흡을 자랑하는 김종인과 김종대였다. 장난을 가장한 진심이 담긴 콩트를 가만히 보고 있자니 저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어이없는 실소였다.
“응, 알겠어.”
“변백현이 뭐래냐?”
“우리 백현이 알바하는 곳 가자, 경수야.”
“걔가 오래?”
“아니, 그냥 가자. 어차피 갈 데 없잖아.”
“나 지금 돈 없는데.”
“김종인 넌 내가 빌려줄게. 도경수 넌 있지?”
“아니, 있긴 있는데 갑자기 찾아와서 무슨…….”
“○○○, 너도 돈 있지?”
“응? 나? 나는 집 갈 건데…….”
“아, 뭔 소리야. 나도 너랑 친해지고 싶다고. 나만 안 친하잖아 나만.”
“아…….”
굳이 친해지려고 하지 않아도 이미 친해진 것 같은 이 기분은 뭐지, 나 지금 말리는 건가. 애교라기엔 다소 무리가 있어 보이지만, 연신 말끝을 길게 늘어뜨리며 간절한 표정을 짓는 김종대를 보고 있자니 어색한 미소밖에 지을 수 없었다. 그에 또 저런다며 벌레 씹는 표정으로 휴대폰을 꺼내는 김종인이었고, 여전히 상황파악 안 되는 얼굴로 눈동자를 굴리며 나와 김종대 사이를 연신 눈짓하는 도경수도 보였다. 아무도 나를 도와줄 사람은 없었다. 가만히 생각했다. 가고 싶니? 아니, 난 별로. 근데 왜 거절을 못하고 있니? 그러게, 모르겠다. 그냥 발이 안 떨어져. 혹시 그 자식이 생각나서? 그 자식이 보고 싶어서? 말이라도 한번 해보고 싶어서?
“대답 안 하면 그냥 간다는 의미야, 그치?”
“저 새끼 또 억지 부린다, ○○○ 그냥 꺼지라 해.”
나 정말 그것 때문에 이러는지도 모르겠다.
몇 번이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단순히 용기가 나지 않아 아무 말도 못 했던 놈이 일하는 곳이었다. 겉보기와는 다르게 여자들을 대상으로 영업하는 룸카페라 그런지, 적응 안 되는 공주풍의 분위기를 보자 이상한 헛기침부터 튀어나왔다. 분홍빛 벽지, 분홍색 소파에 분홍색 쿠션까지. 아마 김종인이 그렇게나 물어봐도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던 그 이유가 강하게 꽂혀오는 듯했다.
“미친, 여기 존나 싫어. 왜 다 분홍색이고 난리냐.”
“여기 여자만 오는 데야?”
“……변백현 얘는 왜 이런데서 일하냐.”
“…….”
여자인 나도 이 곳은 낯설기나 마찬가지였다. 커피 하나에 가격이 7000원은 거뜬하게 넘는 이런 등골브레이커 카페에 스스로 발을 들여놓게 될 줄이야. 그렇게 생각하면 놈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내 등골을 남김없이 빼먹었다. 처음 뭣도 모르고 시작한 허술한 연애코치를 시작으로 이 공주풍의 카페까지. 참 사소했지만 그럴수록 기억나는 조각들이었다. 작은 조각 하나하나가 모여 어느새 큰 퍼즐을 이루었다. 그게 지금 내가 기억하고 있는 변백현이었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메뉴판을 보고 있던 경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나 핫초코.”
“…….”
취향 참, 변함없이 똑같다. 난 널 변함없고 한결같은 사람이라고 정의하는데 넌 날 어떻게 생각할까. 그날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며 눈물을 흘렸을 때 경수는 뭐라 생각하고 내게 그런 말을 했던 걸까, 지금 그 말이 나를 이렇게 변화시켰다는 걸 알고 있을까, 그러니까 내가 변백현을 보고 심장이 요동친다는 걸, 넌 알고 있었을까. 그래서 변백현과 내 사이를 유난히도 많이 물어봤던 걸까. 그래, 그럴지도 모르겠다. 아마 이 세상에서 나만 몰랐을지도 모르겠다. 참, 알다가도 모르겠다. 내가 경수가 아닌 변백현에게 심장이 뛸 거라곤. 잔잔했던 파도가 거친 움직임으로 변할 거라곤.
“○○○, 너도 핫초코 먹을 거지.”
“응, 나 핫초코.”
그래, 아마 경수는 정말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주문 받…….”
“이야, 여기 알바생 존나 잘생겼네!”
“오빠, 너무 멋져요! 나 앞으로 여기 매일 올래!”
“……아, 미친 새끼들아 뭔데.”
“…….”
“왜 허락 없이 와.”
“알바생 교육이 잘못됐네, 가게 이 알바생껀줄.”
“컴플레인 걸어, 컴플레인.”
“아니, 고소해 그냥.”
“아, 진짜 뒤지고 싶냐 너네.”
“미친놈들.”
아마 변백현을 이길 강자는 김종인과 김종대 콤비인 듯싶었다. 참, 대단한 연기랍시고 나름 손님 코스프레를 하는 두 사람의 모습에 저절로 한심함에 비례하는 한숨을 뱉어냈다. 그건 나와 마찬가지인지 역시나 치가 떨리는 표정으로 두 사람을 '미친놈들' 이라고 칭하는 경수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이 곳에서 정상인은 나랑 도경수 뿐이구나. 작은 룸 카페 형식이라 그런지 그런 변백현을 아는 체해도 걸릴 분위기는 아니었다. 여전히 최상의 호흡을 자랑하는 김종인과 김종대의 모습에 넋을 놓은 듯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도경수랑 ○○○도 왔네.”
“……안녕, 변백현.”
“안녕 좋아하네, 존나 어색하게 굴고 있어.”
젠장, 인사를 해도 받아먹지를 못하는 새끼였다. 나름대로 내 마음을 알아챈 후, 처음으로 용기를 내어 건넨 인사가 무참히 하늘로 날아가 버린 거였다. 아마 변백현은 나를 피하기보단 예전처럼 편하게 대해보려 노력하는 듯 보였다. 그게 또 서글프게 저려왔다. 작은 바람이 괜찮다고 나를 매만졌지만 역시나 가슴께가 찌릿한 건 변함없었다. 마침내 두 콤비를 무시한 채 주문을 받은 변백현이 꽤나 딱딱한 어조로 '주문 받았습니다’라는 말을 내뱉고 장난스럽게 우리를 흘기며 문을 닫았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 정말 늦은 거라던데 지금 난 늦어도 한참 늦었다 생각했다. 그럼 정말 늦었다는 말이 되지 않느냐. 그토록 일주일 내내 의도치 않게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던 변백현의 얼굴을 보고 제 마음을 정확히 확인할 기회를 단번에 놓쳐버렸다. 정말 내가 변백현을 보고 심장이 반응하는지, 내가 지금 미친 건지 아닌지 대답을 듣고 싶었다.
“○○○.”
“…….”
“야, ○○○.”
“응?”
“여기 원래 다 이렇게 분홍색이냐? 분위기 이상해.”
“아, 여기?”
“공주병 걸린 애들만 올 거 같아.”
“아…….”
“변백현 걔는 왜 이런데서 일하냐? 아니, 아까 보니까 알바생들 다 남자던데 진심 여기 여자들만 오는 카페야?”
“…….”
“야, ○○○ 정신차려.”
“응?”
“정신 차리라고.”
자꾸만 외딴곳으로 방향을 틀어버리는 내 머릿속이었다. 이내 내게 질문을 건네는 김종인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그래, 이렇게 보면 되잖아. 아무런 생각 없이. 아무런 의심 없이. 변백현도 이렇게 보면 되는 거잖아.
“아, 여기 손님이 거의 여자라서 그런 거 아니야……? 알바생 잘생겼으면 막 오고 그러잖아.”
“그래서 지금 변백현이 잘생겼으니까 여기 알바를 한다, 이 말이야?”
“아니, 뭐 그런…….”
“와, 변백현 이 새끼 은근 즐기는 거네.”
“…….”
“김종대, 컴플레인 걸어.”
“고소할까?”
“사장 불러, 알바생 생긴 게 마음에 안 든다고.”
“김종인 존나 쎄다!”
대체 이 새끼들하고 정상적인 대화를 1분이라도 할 수 있을까? 아니, 30초라도? 소용이 없었다, 소용이. 이미 콤비가 돼버린 저 두 명하고 무슨 대화를 할까. 살짝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려 고개를 비스듬히 꺾는데…….
“…….”
“…….”
따끔할 정도로 강한 조명이 경수와 내 사이를 비췄다. 그렇다고 마주하는 눈을 피하지는 않았다. 무언가 내게 할 말이 있는 듯 보였다. 난 여전히 고개를 비스듬히 기운 채로, 경수는 가만히 앉아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린 채로 그렇게 의미 없는 무언가에 의존하며 몇 분간 소리 없는 정적을 지킬 뿐이었다.
“커피 나왔습니다.”
“아니, 알바가 너밖에 없어? 왜 너만 오고 지랄이야.”
“아는 척이나 하지 마 새끼들아, 나 혼나.”
“새끼들아? 아, 여기 알바생이 개념이 없어. 고소해.”
“변백현, 알바 빠이.”
“뒤진다고 진짜로.”
“알바 몇 시에 끝나냐? PC방 가자.”
“무슨 PC방이야, 그럼 ○○○은 어떡…….”
“…….”
“……이따가 말해, 나 진짜 혼나.”
놈의 입에서 내 이름이 나오자 반사적으로 호흡아 짧게 조각났다. 모든 시간이 멈추고 계속해서 그 목소리만 귓가에 맴돌기 시작했다. 아마 제대로 내가 미쳤나 싶었다. 다시금 우리 앞에서 사라진 변백현을 보다 이내 스스로에게 정신을 차리라는 듯 마구잡이로 고개를 흔들었다. 이번에도 보기 좋게 변백현을 볼 기회를 버린 나였다. 이젠 나 자신이 증오스러울 정도였다.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고 눈앞에 있는 달콤한 향기의 핫초코를 바라봤다. 무슨 일인지 쉽게 입을 대기가 어려웠다. 금방이라도 혀가 데일 것만 같았다. 혀가 데일 걸 알면서도 핫초코를 마신다는 건 어딘가 모순적인 상황이었다. 한참을 망설이다 이내 무의식적으로 핫초코를 한입 들이키기 시작하는데.
“근데 변백현은 그거로 대학 가려나.”
“아!”
“뭐야, 데였냐?”
“아…….”
왜 하필 이런 예상은 보기 좋게 들어맞을까. 드라마 속 행복한 상황은 죽어도 안 오더니, 이런 구질구질한 일은 늘 도맡아서 겪는 타고난 운이었다. 거의 반쯤 식도로 넘긴 뜨거운 핫초코가 '변백현' 이름을 듣자마자 제대로 역류를 해버렸다. 이름 하나만 들어도 왜 이렇게 신경이 쓰이고 반응하는지 내가 생각해도 답답하고 난처하기까지 했다. 이내 괜찮다고 머쓱하게 웃으며 다시 핫초코를 들이켰지만, 한번 데인 가슴에 또 상처를 내는 건 나로서도 너무 처절한 일이더라.
“백현이? 걔 예전부터 대학 축구로 간다 했잖아.”
“근데 솔직히 걔 축구 존나 잘하긴 해.”
“그럼 가겠지.”
“그래도 할 거라도 있어서 좋겠다.”
아마 저들이 이이기 하는 건 '축구' 라는 주제인 듯싶었다. 거기에 변백현이 약간 추가된. 그러고 보니 변백현은 초창기부터 꽤나 축구를 잘했다. 축구로 명성이 자자한 우리 학교에서 축구를 잘 한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면 정말 잘 하는 거라며 누군가 내게 흘리듯이 말했던 기억이 났다. 아직 본격적인 고삼에 들어서지는 않았지만 벌써부터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걸 보니 정말 내가 고삼이라는 게 실감나 씁쓸한 미소가 지어졌다. 새삼스레 덜컥 겁이 났다. 인정하기 싫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오고 있었다. 물론 그 뿐만이 아니라 다른 경우에도 지금 내 상황은 그랬다. 나도 모르게 인정할 수밖에 없는, 그래서 계속해서 눈치 없이 다가오는 그런 것.
“나 여기만 마감하고 갈게.”
“응, 천천히 나와라.”
장난스럽게 변백현과 눈짓을 주고받으며 카페를 나서는 우리들이였다. 처음 들어올 땐 발걸음이 천근만근 무거웠는데, 나갈 땐 감옥에서 탈출하는 죄인처럼 누가 날 쫓아오기라도 할까봐 다급하게 문부터 열어버리는 나였다. 나오자마자 폭풍우처럼 올라오는 절망감에 고개부터 숙여졌다. 세상 모든 우울한 색감들이 내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듯했다. 아마 내가 지금 놈을 예전과 같은 감정으로 마주하는 게 아니라 더 그랬다. 자꾸만 나를 감싸오는 속상함은 쉽사리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아마, 변백현의 알바가 끝나면 PC방에 가려는 듯 잔뜩 들뜬 얼굴로 이리저리 장난을 치기 바쁜데, 나만 혼자 우울하게 이게 뭔가 싶었다. 허나 저들과 계속 같이 있기엔 내 용기가 나를 이기지 못했다. 그냥 차라리 집으로 가서 혼자 후회하고 혼자 생각하는 게 나을 뻔했다. 그게 훨씬 더 마음 편할 뻔했다.
“그, 나 먼저 갈게.”
“왜? PC방 같이 가자.”
“어차피 할 것도 없어, 나갈게!”
8층이라는 어마어마한 높이를 내려가려면 엘리베이터를 타는 게 정답이었지만, 조금이라도 시간을 지체했다간 마감을 다 끝내고 나오는 놈과 마주칠까 황급히 비상계단 문을 열어젖혔다. 도망자, 이젠 그 말이 더 익숙했다. 마치 내가 도경수를 보기 위해 늘 숨어있었던 것처럼 지금의 나도 그랬다. 이전과 난 달라진 것 하나 없었다. 누군가에 대한 마음이 싹틀 때, 늘 아무것도 못하는 바보가 될까. 그냥 좋아하는 건데. 좋아하는 건 나쁜 게 아닌데.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건 숨으라는 의미가 아닌데. 왜 늘 누군가를 좋아하는 사람은 약자고, 도망치고, 숨어버릴까. 너도 이랬을까. 너도 나랑 똑같았을까. 사실 경수와는 확연히 다른 케이스기도 했다. 최대한 조심스럽고, 살피고, 솔직히 말하면 무섭기도 하고. 지금 놈의 마음이 어떨지는 전혀 모르는 거니까.
“○○○.”
“아……도경수.”
“왜 엘리베이터 놔두고 계단으로 가.”
“…….”
“난 네가 왜 자꾸 도망치는지 이해가 안 간다. 이럴 거면 여기 왜 왔고, 그때 그렇게 울었어.”
“…….”
“너 변백현 좋아하잖아.”
“뭐?”
“근데 왜 피해, 원래 친구라서 안 받아 줄까 봐? 친구 잃을까 봐? 거절당할 거 같아서? 아니면……내가 신경 쓰여서?”
그동안 너무 안전한 경계선에만 서 있었다. 누가 넘어올까, 혹여나 선을 넘어설까 두려워 그저 바보처럼 멍하니 제자리에만 서 있었다. 그런 내가 답답했는지 먼저 경계선을 넘어 내게 다가온 변백현이었고, 그 뒤를 이어 이번엔 경수가 경계선을 넘어 내게 말을 걸어왔다. 난 너무 태평했다. 그저 경계선이 무섭고 낯설어 넘을까 말까 망설이며 눈치만 보고 있었다. 이젠 내가 먼저 그 경계선을 넘을 때가 된 거 같았다.
“도경수.”
“응, 말해.”
“네가 말한 대로 생각해봤어. 내가 이끌리는 대로, 생각하는 대로.”
“…….”
“그런데도 내가 지금 걔를 피하는 건……내가 자꾸 신경 쓰여서 그래. 자꾸 나쁘게 생각이 들어서…….”
“○○○.”
“……응.”
“왜 쓸데없는 걱정을 해. 나도 너한테 고백했다가 거절당했어, 근데 지금 이렇게 너랑 말하고 있어. 내가 너를 나쁘게 생각하는 거야? 그게 아니라 내가 아직도 널 좋은 애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야.”
“…….”
“내가 좋은 건 반드시 네가 내 고백을 받아주는 게 아니라, 여전히 내 성격을 이해해주는 사람을 만났다는 거야. 아마 내 성격이 진짜 별로라 지금보다는 어색해질 수 있어도 나 후회하는 거 없어.”
“…….”
“고백이라도 하면 적어도 마음은 후련해지거든.”
캄캄했던 서늘한 공간이 경수의 움직임으로 인해 밝게 밝혀졌다. 텅 빈 계단이라 그런지 발자국소리가 유난히도 크고 또 선명하게 울리는 듯싶었다. 잠시 몸을 멈추어 경수가 내게 한 말에 대해 생각해봤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이런저런 깊숙이 박힌 기억들이 많았다. 민망했던 적, 아팠던 적, 화가 났던 적, 슬펐던 적, 행복했던 적. 그토록 많은 시간들이 있었는데 정작 그래, 그때 난 정말 좋은 선택이었어. 참 잘했어. 후회는 없어. 라는 생각들은 이상하리만큼 소수였다. 꽤나 짙게 인상을 쓰고 다시금 같은 기억을 떠올려 봐도 여전히 후회투성이인 일밖에 생각나지 않는 거였다. 아마 앞으로도 이렇겠지. 온통 후회투성이. 아쉬움뿐인 삶. 앞으로 후회 없는 기억을 만들려면 난 어떻게 해야 할까. 무조건 긍정적으로 생각하기? 아니면 조용히 숨어살기? 그게 아니면……내가 하고 싶은 대로 후회 없이 다 말해보기?
[변백현]너 집갔어? 혼자?
[변백현]미쳤냐?
[변백현]어딘데 집이야? 지금 12시야 ㅅㅂ
[변백현]왜 대답을 안하는데 아
[변백현]전화할까?
메시지를 확인함과 동시에 요란스럽게 울리는 휴대폰이다. 뚜렷하리만큼 선명하게 박혀있는 '변백현' 이라는 세 글자에 난 그저 발만 동동 굴릴 뿐 이도저도 못한 채 휴대폰에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한참동안 똑같은 레퍼토리를 반복하며 큰마음을 먹고 손가락을 뻗는 순간 매정하게 끊겨진 전화에 그렇게나 당황스러울 수가 없는 거였다. 아, 너무 늦게 받았나보다. 다시금 용기를 내어 통화버튼을 누르려하지만……참, 전화 걸 타이밍 하나 안 주는 놈이었다.
[변백현]전화 왜 안받냐 뭔일있어?
[변백현]아 대답좀해보라고
[나 받으려하다가 끊겼어...미안해ㅠㅠㅠ]
[변백현]너 그래서 지금 어딘데
[버스기다리는 정류장 나 피씨방가서 할거없어서 그냐 ㅇ왔어]
[변백현]아 알겠어
[변백현]경수보고 데려다주라할까
[?아니야 괜찮아 이제 버스 조그만 기다리면돼]
[변백현]그럼
[응?]
[변백현]내가갈까?
하마터면 약정이 2년이나 남은 휴대폰을 그대로 곤두박질치게 둘 뻔한 순간이었다. 훅하고 들어오는 어퍼컷에 느릿하게 두어 번 눈을 감았다 떴다. 내가 지금 뭘 본 건가 싶었다. 다시금 휴대폰을 고쳐 들고 뚫어져라 메세지창을 응시했다. 혹시나 싶었지만 여전히 같은 말인 거다. 분명 바람은 따갑게도 제 속을 눌러댔지만, 그럴수록 몸의 온도가 올라가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지금 이 상태로 변백현의 얼굴을 본다면 제대로 눈을 마주하지 못 할 건 물론이요, 민망함에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있을까가 문제였다. 처절하게 떨려오는 손끝이 홍시마냥 벌겋게 부어올라 있었다. 초점을 잃은 눈으로 고개를 내리다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시끄러운 소리에 고개를 드니, 내가 타야 할 버스가 보이는 거였다. 하나 둘, 버스에 타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그에 나도 잔뜩 얼어버린 몸을 움직이며 버스로 향했다. 마침내 내 앞사람이 계단 위로 다리를 올렸고, 그럼 나도 휴대폰을 내려놓고 버스카드를 꺼내려했지만…….
“학생, 학생 얼른 타.”
“…….”
“학생!”
“아, 아저씨! 먼저 가세요! 저 다음 꺼 탈게요!”
혹시나 내 소리를 못 들을까봐 핏대까지 세우며 소리를 높였다. 무언가 벅차오르는 느낌에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다시 휴대폰을 꺼내 버스 정류장으로 몸을 돌리는데.
“…….”
“…….”
“뭐해, 밥통.”
“……아.”
“이리와.”
“아, 아저씨! 다음 꺼 탈게요!”
“…….”
“먼저 가세요!”
“…….”
“아, 아저씨!”
“오버 좀 하지 마!”
“아닌데? 너 딱 이랬어.”
지금 누군 민망하고 창피해 죽겠는데 넌 아주 나 놀리는 게 그렇게 신이 나는구나, 젠장. 괜스레 억울한 마음에 잔뜩 뚱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버리는 나였다. 가뜩이나 추운 날씨에 이젠 멀쩡한 발의 감각까지 점차 무뎌지기 시작한다. 이게 다 누구 기다리다가 이런 건데. 그런 내 속을 알 리가 없는 변백현은, 내 굴욕 아닌 굴욕이 그렇게나 유쾌한 듯싶었다. 지금 놈이 내게 하는 행동은 친구 그 자체였다. 마치 처음 연애코치를 시작했을 때 그 느낌처럼. 또 나쁜 생각이었지만, 이젠 변백현이 나를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구나 생각했다. 지금 내가 놈에게로 향해있는 마음을 알게 된 사실이 이미 늦었구나, 생각했다. 이래저래 앞뒤가 꽉 막힌 상황이었다. 난 그렇다면 또 다시 안 좋은 기억을 추억으로 남기게 되는 건가.
“너 나 기다렸지. 그러니까 아, 아저씨! 먼저 가세요! 이랬겠지. 아, 평생 놀림감이다 이건.”
“…….”
“왜, 삐졌어?”
“……변백현.”
“진짜 삐졌어? 아, 장난이잖아.”
“나 너 기다렸어.”
“……응?”
“기다린 거 맞아.”
“…….”
“너 지금도 나 도망치는 거야? 그래서 아무렇지 않게 친구처럼 대하는 거야? 아니면 더 이상 도망칠 이유가 없어서 친구처럼 대할 수 있는 거야?”
“……○○○.”
“만약 여전히 도망치는 거면……그래서 일부러 아무렇지 않게 친하게 대하는 거라면.”
“…….”
“이젠 그만 도망치면 안 될까.”
처음으로 내 앞에 있는 경계선을 스스로 넘었다. 분명 위태위태했지만 간신히 중심을 잡고 내 앞에 있는 놈을 향해 먼저 걸음을 내밀었다. 여전히 달라진 건 없었다. 대답 없이 날 내려다보고 있는 그 얼굴과 함께 달라진 건 없었다. 적어도 짧게나마 지금을 되돌아볼 때, 후회는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제 마음이 탁 트였다. 경수 말이 맞았다. 고백이라도 하면 후회는 없다더니, 지금이 딱 그랬다. 작게 새어져 나오는 숨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들려왔다. 그저 한 발자국 거리인 짧은 간격사이에 무언가 보이지 않는 커다란 투명한 유리막이라도 있는 듯했다.
“너 지금 생각 정리하고 말한 거야?”
“응.”
“그러니까, 지금 이게……지금 네 마음이야?”
“…….”
“똑바로 말해, 네 마음이야?”
“……응.”
“…….”
“내 마음이 그래.”
내가 제일 두려워했던 표정이었다. 웃음기 하나 없는 잔뜩 굳은 얼굴로 그저 가만히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지금 저 표정. 분명 마음속은 사정없이 요동쳤지만 그렇다고 겉으로 티낼 수 없는 답답한 이 상황.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다 여전히 불규칙적으로 울려 퍼지고 있는 숨소리에 놀란 가슴을 진정할 수 없었다. 스스로 한 결정에 후회는 없지만, 지금이 문제였다. 왜 내 말을 듣고도 아무런 반응이 없냐 이거였다. 궁금증은 점점 두려움으로 바뀌어가기 시작했다. 혹여나 이미 나를 싫어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이유 때문이었다.
“대답하지 마, 변백현.”
“…….”
“그냥 하지 마, 나 먼저 갈게.”
“○○○.”
“…….”
“나 그럼 도망치지말까.”
“…….”
“도망치지 말고 옆에 있을까? 그럴까?”
같은 질문이었다. 며칠 내내 내 머릿속을 빙빙 돌려버린 저 질문. 그리고 이번에도 나를 멈추게 만든 저 질문. 마치 독약이라도 탄 것 마냥 지금의 내 감정을 오묘하게 만들어놓는 질문이었다. 놈이 내 마음을 바뀌게 만든 것만큼, 그 만큼의 감정을 표현해야했다. 정말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다.
“변백현.”
“…….”
“좋아해.”
“…….”
“언제부터인지 모르겠…….”
“알겠어, 거기 있어.”
꽤나 장난기 넘치는 표정으로 내게 다가오는 백현이었다. 조금씩 이목구비가 보이고, 너의 목소리가 들리고, 너의 숨소리가 박혀왔다. 하얀 입김이 자꾸만 놈의 얼굴을 사정없이 흐리게 만들었다. 덕분에 지금 놈이 어떤 표정을 가지고 있는지 뚜렷하게 구분하기 어려웠다. 그저 눈만 깜빡이며 차오르는 두근거림만이 지금의 내 심정을 대변해 줄 뿐이었다.
“도망 안 칠게.”
“…….”
“그러니까 가만히 있어.”
추운 바람에 얼었던 몸이 금세 따뜻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고개를 들기도 전에 지금 이 느낌이 뭔지 알아버린 나였다. 나만큼 꽁꽁 언 손으로 하얀 목도리를 풀어 그대로 내 목에 둘러주는 손길이 느껴졌다. 한참을 내 목에 둘러있는 목도리만 응시하다 살짝 입꼬리를 올리는 모습에 저릿한 심장이 야단이었다. 그 모습에 시선을 한 곳에 두지 못하고 이리저리 움직이다 어색한 분위기를 풀기 위해 입을 열지만, 뜬금없이 목도리 양 끝을 잡아 올려 자신의 귀에 덮어버리는 변백현의 행동에 다시금 꿀 먹은 벙어리가 돼버리고 마는 나였다. 아마 귀가 시려 이러나 싶었다. 마침 오늘 아침 챙겨온 귀마개라도 건네 줄 생각으로 고개를 내려 가방으로 시선을 옮기는데.
“움직이지 마.”
“응?”
목도리 끝을 잡아당기는 변백현 때문에 자연스럽게 몸이 앞으로 움직였다. 중심을 잡기도 전에 느껴지는 낯설고 또 두근거리는 무언가다. 건조해졌던 입술이 놈에 의해 따뜻해지기 시작했다. 여전히 하얀 목도리가 우리를 감싸주고 있었고, 계속해서 내 입에 제 입술을 맞춰왔다. 난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요동치는 심장소리에 그저 눈만 깜빡거릴 뿐이었다. 지금 이 순간, 요란스럽게 지나가는 버스도, 수군거리는 사람들도, 아무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내 앞에 서 있는 변백현과 그리고 나 밖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