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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대 철종
● 본명: 이원범(이변으로 개명), 정조의 아우인 은언군의 손자, 전계대원군의 셋째아들
● 출생-사망: 1831-1863,
● 재위 기간: 1849년 6월-1863년 12월(14년 6개월)
● 주요 업적: 김문근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이면서 그를 필두로 한 안동 김씨 세도정치 다시 시작, 빈민구호 정책 적극 실시,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이 급속도로 확산되자 이를 탄압, 최제우 체포, 삼정(전정, 군정, 환정)의 문란이 극심하여 전국 곳곳에서 민란 발생(임술농민봉기 등), 33세의 나이로 사망.
[제25대 철종실록]
[1. 농부에서 제왕이 된 강화도령 원범]
철종 시대는 순조 대부터 시작된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가 절정을 이루던 때였으며, 세도정치로 인한 탐관오리들의 전횡으로 삼정의 문란이 극에 달해 백성들의 생활이 도탄에 빠져 있던 시기였다. 안동 김씨가 계속 실권을 잡게 되는 배경에는 대왕대비인 순원왕후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다. 순조의 비인 순원왕후는 손자인 헌종이 후사 없이 죽자 조대비의 척족인 풍양 조씨 일파가 왕위를 세울 것을 염려하여 재빨리 손을 썼다. 그도 그럴 것이 헌종의 6촌 이내에 드는 왕족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7촌 이상의 왕족은 몇 명 있었다.
후대의 왕은 본래 항렬로 따져 동생이나 조카벌이 되는 자로 왕통을 잇게 하는 것이 원칙이다. 왜냐하면 종묘에서 선왕에게 제사를 올릴 때 항렬이 높은 이가 항렬이 낮은 이에게 제사를 올리게 해서는 안 된다는 법도 때문이다. 그러나 안동 김씨 척족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고 지위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서는 헌종의 7촌 아저씨벌이 되는 강화도령 원범이 가장 적당하다고 판단했다. 이렇듯 안동 김씨 척족들은 기왕에 잡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왕가의 법도를 철저하게 무시하는 전횡을 저지른다.
철종은 사도세자의 증손자이자 정조의 아우 은언군의 손자이다. 사도세자가 죽고 정조가 세손이 되자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세력들이 정조가 왕위에 오르면 자기들의 위치가 위험할 것이 염려되어 새 왕자를 추대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그러나 이 일이 발각되자 정조의 이복동생인 막내아들 은전군은 자결하고 은언군과 은신군은 제주도에 유배되나, 은신군은 제주도에서 병사하고 은언군은 강화도로 유배지를 옮긴다.
사도세자와 숙빈 임씨 사이에서 태어난 은언군 인에게는 아들이 셋 있었다. 큰아들인 상계군 담은 1779년 정조 3년 홍국영의 음모로 모반죄로 몰려 강화도에 유배되었다가 자살하였다. 한편 은언군의 아내 송씨와 큰며느리 신씨는 1801년 순조 1년에 천주교 신자로 사사되면서 은언군 인도 사사되었다. 그러던 중 1844년 헌종 10년에 민진용이 반역을 도모하였다. 순조 말기부터 김유근과 김홍근에 의해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가 이루어지다가 헌종 10년에 이들이 물러나자 권력에 틈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 틈을 이용하여 반역을 꾀한 민진용은 우선 자신이 가지고 있는 뛰어난 의술로 은언군의 아들 이광과 은언군의 손자 원경의 신임을 받고 있던 이원덕을 포섭하였다. 그들은 은언군의 손자이자 이광의 아들인 원경을 왕으로 추대하기 위해 모의를 꾸미다가 발각되어 모두 능지처참을 당하고 마는데, 이것을 '민진용의 옥'이라 한다.
여기에 연루되어 전계대원군 이광의 첫째 아들 원경이 사사된다. 여기서 둘째 아들 경응과 셋째아들 원범만이 살아남는데 이들은 또다시 강화도로 유배된다. 이리하여 천애고아가 된 두 사람은 강화도에서 나무를 하고 농사를 짓는 농사꾼으로 살던 중 5년여가 지난 어느 날 갑자기 원범에게 왕통을 이으라는 교지가 내려진다. 그가 바로 후에 대왕대비 순원왕후의 명으로 왕위에 오르게 되는 철종이다. 이때 그의 나이 19세였으며 학문과는 거리가 먼 농부였다. 1849년 6월 6일 헌종이 후사 없이 죽자 별안간 명을 받은 원범은 봉영 의식을 행한 뒤 6월 8일 덕완군에 봉해지고 이튿날인 6월 9일 창덕궁 희정단에서 관례를 행한 뒤 인정문에서 즉위하였다. 나이가 어리고 학문을 연마한 바 없다는 이유로 1851년까지 대왕대비인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철종이 21세 되던 1851년 9월에는 대왕대비의 근친 김문근의 딸을 왕비로 맞게 되었다. 그 뒤 김문근이 영은부원군이 되어 국사를 돕게 되니 순조 대부터 시작된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가 계속되는 셈이었다. 여기서 의문이 되는 것은 둘째를 제치고 셋째인 원범이 왕위에 오르게 된 내력이다. 남아 있는 기록이 없어서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으나 둘째 경응은 아마도 강화도에서 병사하지 않았나 싶다.
[2. 세도 정권하에서의 철종의 친정]
세도 정권의 막강한 힘과 독단 앞에 선 철종은 자신의 뜻을 마음대로 펼 수 없는 불우한 왕이었다. 빈민 구제책이나 이재민 구휼에 남다른 열정을 보이기도 하지만, 짧은 학문과 얕은 경륜에 대한 철종 자신의 자격지심과 순조 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막강한 세도 정권의 바람을 막아내고 삼정의 문란을 혁파할 개혁의 방도를 찾지 못한 채 임술민란 등 전국적인 위기 상황을 맞게 된다. 철종은 사도세자의 증손자이며 전계대원군 광과 용성부대부인 염씨 사이의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은 변, 초명은 원범, 자는 도승, 호는 대용재였다. 철종은 즉위 3년 후인 1852년부터 친정을 하게 되지만 정치의 실권은 여전히 안동 김씨일족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었다. 그러나 철종은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가 기승을 부리는 가운데도 민생을 돌보는 데 남다른 애정과 성의를 보였으며, 철종 말기에 일어난 민란의 수습과 삼정의 문란을 바로잡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친정을 시작한 다음 해인 1853년 봄에는 관서 지방의 기근 대책으로 선혜청전 5만냥과 사역원 삼포세 6만 냥을 민간에 대여해주도록 하였고, 또 그 해 여름에 가뭄이 심하자 재물과곡식이 없어 구휼하지 못하는 실정을 안타까이 여겨 재용의 절약과 탐관오리의 징벌을 엄명하기도 하였다. 1856년 봄에는 화재를 입은 1천여 호의 민간에 은전과 약재를 내려 구휼하게 하였으며, 함흥의 화재민에게도 3천 냥을 지급하였다. 그 해 7월에는 영남의 수재 지역에 내탕금 2천 냥, 단목 2천 근, 호초 200근을 내려주어 구제하게 하는 등 민빈 구제에 성의를 다했다. 그러나 여전히 정치의 실권이 안동 김씨 일파에 있었고 그들의 전횡으로 탐관오리가 득실거리고 삼정(전정, 군정, 환곡)이 문란해져 백성들의 생활이 도탄에 빠지게 되었다.
1862년(철종13년)에 드디어 진주에서 탐관오리의 학정에 반발하여 민란이 일어난 것을 계기로 전국적으로 민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에 철종은 삼정이정청이라는 특별 기구를 설치하여 민란의 원인이 된 삼정구폐를 위한 정책을 시행하게 하는 한편, 모든 관리에게 그 방책을 강구하여 올리게 하는 등 민란 수습에 진력하였다. 그러나 삼정의 문란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우선 세도 정치의 뿌리를 뽑아야 하는데 안동김씨의 강고한 세도 앞에 그 뜻을 펴지 못한다. 안동 김씨의 세도 정권이 절정에 달해 있던 철종 대는 그들에 도전할 만한 다른 정치 세력의 성장이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었다. 안동 김씨 일문은 왕족 중에서도 나중에 왕위에 올라 자신들의 권력에 위협이 될 만한 자가 있으면 미리 처단하기를 서슴치 않았다. 대원군의 형 이하전의 죽음이 바로 그런 예라고 할수있다. 사정이 이러하기에 당시 철종은 이미 세도가의 첩자 등이 온 궁중에 퍼져 있었을 것으로 믿었고, 자칫하면 임금의 목숨이 위태롭다는 것을 감지하고 있었다.
철종은 이렇듯 계속되는 안동 김씨 일파의 전횡에 마땅히 대항할 방법이 없자, 자연히 국사를 등한히 하고 술과 궁녀를 가까이 했다. 술과 여색에 빠지게 되자 본래 튼튼한 몸을 가지고 있었던 철종은 급속도로 쇠약해져서 1863년 12월 8일 재위 14년 만에 33세를 일기로 죽고 말았다. 혈육으로는 숙의 범씨 소생의 영혜옹주가 하나 있어 금릉위 박영효에게 출가시켰다. 철종은 죽은 뒤 경기도 고양의 희릉 오른편에 예장되었으며 능호를 예능이라 하였다.
[3. 60년간 이어진 안동 김씨의 세도 정권]
본디 세도 정치라 함은 조광조가 도학의 원리를 정치사상으로 심화시킨 데서 주창된 것으로 사람들이 표방했던 통치 원리였다. 즉, 천리를 밝히고 인심을 바르게 하며 정학을 북돋는 일 등을 뜻하는 말이었다. 이러한 세도 정치가 성립되기 위한 운영의 기반은 무엇보다도 공정한 언론과 인재의 등용, 그리고 이에 대한 군주의 신임 내지는 위탁 등이었다. 이 때문에 각 계파 간에 시비와 분열이 일어났고 이것이 사화나 당쟁으로까지 비화되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군주의 신임과 위탁을빙자한 변태적인 세도 정치를 낳았다. 이렇게 척신이 권력을 장악하는 정치를 세도정치라 했는데, 이때의 세도는 사림 정치가 지향했던 본래의 '세도(세상 세, 길 도)'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독재 정치였기 때문에 '세도(권세 세, 길 도)'라 표기하였다.
1800년 정조가 죽고 순조가 11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게 되자 정조의 유탁을 받은 김조순이 영조의 계비이며 사도세자 죽임의 주역인 김귀주의 누이이기도 한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에 협조하면서 그의 딸을 순조의 비로 들이는 데 성공한다. 1804년 김대비가 수렴청정을 거두고 1805년 세상을 뜨자, 이때부터 안동 김씨가 본격적인 척족 세도를 시작하게 된다. 김조순은 본래 정조의 신임을 받던 시파이지만 벽파 정권에 협조하면서 겉으로는 전혀 당색을 드러내지 않은 채 모난 짓을 하지 않았다.
정순왕후가 죽자 정순왕후 편에서 세도를 휘둘렀던 벽파 일당이 몰락의 길로 접어들면서 순조의 외척인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가 힘을 쓰게 된다. 여기에는 안동 김씨 이외에 시파의 대가인 남양 홍씨, 풍양 조씨, 여흥 민씨, 동래 정씨, 나주박씨 등이 제휴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순조의 아들인 효명세자의 빈으로 풍양 조씨 만영의 딸이 간택되는데, 효명세자가 일찍 죽자 그 소생인 헌종이 순조의 뒤를 이어 8세의 나이로 등극한다. 그러나 나이가 어린 탓에 순조의 비인 순원왕후의 수렴청정 아래 김조순의 아들 김좌근이 정권을 잡아 여전히 안동 김씨 일문의 독재가 지속된다. 한때 헌종의 외척인 풍양 조씨 일문이 정권에 접근했으나 김조근의 딸이 헌종의 비로 간택됨에 따라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는 그대로 이어진다.
그 이후 순원왕후의 근친인 김문근의 딸이 철종의 비로 간택됨에 따라 1864년 고종이즉위하고 흥선대원군이 섭정을 하기까지 60여 년 동안 안동 김씨가 정국을 휘어잡게 된다.60여 년 동안 안동 김씨의 세도가 어찌나 드셌던지 남자를 여자로 만드는 일 외에는 못하는 일이 없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1851년 철종의 장인이 된 김문근은 철종을 보필한다는 핑계로 거의 모든 국사를 장악하기에 이른다. 그의 조카인 김병학이 대제학을 맡고, 병국이 훈련대장을 맡았으며, 병기가 좌찬성을 차지함으로써 조정을 장악한다. 이렇듯 왕권을 배제시킨 세도 정권은 정치적 견제 세력이 없는 조건하에서 삼정 문란으로 나타나는 수탈 정책의 극을 향해 치닫게 된다. 모든 법도가 안동 김씨 일파에 의해 좌우되고, 뇌물이 성행함은 물론이거니와 벼슬을 사고파는 매관매직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졌다.
관직을 산 수령들은 백성들을 착취하여 그것을 벌충했으며, 이 같은 수령의 부정에 편승한 아전들의횡포 또한 백성들의 고혈을 짜는 것이었다. 도학을 논해야 할 서원은 세도 정치의 외형적인지주로서 노론측 당론의 소굴이 되었으며, 불법적인 수세권을 발동하여 백성을 괴롭히고 왕권을 침해하는가 하면 관령보다 더 위세가 당당한 묵패로 향촌민에 대한 착취를 서슴지 않았다. 또한 무관의 자제들은 활도 쏘아보지 않고 오로지 가문의 덕을 입어 벼슬길에 오르기도 했다. 반세기에 걸쳤던 안동 김씨 시파계 일문의 독재는 세도 정치의 온갖 병폐를 전형적으로 드러내어 전국적으로 삼정의 문란이 극심해졌고 잦은 민란이 발생했는데, 그것이 곧 세도정권을 변질시키고 붕괴시키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4. 철종의 가족들]
영조와 영빈 이씨 사이에서 난 장조(사도세자, 장헌)는 숙빈 임씨와의 사이에서 은언군과 은신군을 두었다. 은언군의 3남 전계대원군과 용성부대부인의 3남이 바로 제25대 임금 철종이다. 철종(1831-1863)의 재위 기간은 1849년 6월부터 1863년 12월까지 14년 6개월이었다. 부인은 8명으로 철인왕후 김씨, 귀인 박씨, 귀인 조씨, 숙의 방씨, 숙의 범씨, 궁인 이씨, 궁인 김씨, 궁인 박씨이고, 자녀는 숙의 범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영혜옹주 하나뿐이었다.
철종의 자식들은 유난히 단명했다. 철인왕후 김씨가 아들 하나를 두었으나 일찍 죽었고, 그외에 후궁과 궁인에게서 아들 넷을 얻었으나 어찌된 셈인지 모두 일찍 죽었다. 그의 유일한 혈육으로는 숙의 범씨에게서 난 영혜옹주가 한 명 있을 뿐인데 그 또한 박영효와 혼인한 지3개월 만에 죽고 말았다.
철인왕후 김씨(1837-1878)
철종 대에 마음껏 권력을 휘둘렀던 영은부원군 김문근의 딸이자 대왕대비 순원왕후의 근친인 그녀는 1851년 열다섯의 나이에 왕비에 간택되어 궁으로 들어온다. 1858년 원자를 낳았으나 곧 죽었다. 왕비 김씨는 탐욕스런 그의 아버지 김문근과는 달리 말수가 적고 즐거움이나 성냄을 얼굴에 잘 나타내지 않는 등 부덕이 높은 것으로 칭송이 자자했다 한다. 1863년 철종이 서른셋의 젊은 나이로 죽자 명순의 존호를 받고 고종이 즉위하자 왕대비가 되었다. 1866년 휘성에 이어 정원, 1873년에 다시 수령의 존호를 받아 명순휘성정원수령대비가 되었다. 1878년 42세의 나이로 창경궁 양화당에서 죽었다. 묘는 경기도 고양시 원당동 서삼릉의 예릉이다.
[5. 삼정의 문란과 민란의 발생]
철종 연간은 지배층에 의한 농민 수탈이 절정을 이룬 시기였다. 농민 수탈의 주내용은 삼정의 문란으로 요약되는데 전정, 군정, 환곡의 문란이 바로 그것이다. 토지세에 대한 징수인 전정은 본래 토지 1결당 전세 4두 내지 6두로 정해진 전세보다도 부가세가 훨씬 많았다. 부가세의 종류만 해도 총 43종류에 달했는데 본래 그것은 토지를 소유한 지주층이 물게 되어 있었으나 전라, 경상 지방은 모두 땅을 빌려 농사짓고 있는 농민들이 물고 있었다.
또한 지방 아전들의 농간으로 빚어지는 허복, 방결, 도결 등이 겹쳐서 전정의 문란이 고질화 되었다. 한편 군정은 균역법의 실시로 군포 부담이 줄긴 하였으나, 양반층의 증가와 군역 부담에서 벗어나는 양민의 증가로 말미암아 계속 가난한 농민에게만 부담이 집중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을의 형세에 따라 차등을 두어 군포를 부과하는 백골징포나 어린 아이에게 부과하는 황구첨정 등을 강행했다. 환곡은 본래 관에서 양민에게 이자 없이 빌려주게 되어 있는 곡식인데 여기에 비싼 이자를 붙이거나 환곡의 양을 속여서 가을에 거두어들일 때 골탕을 먹이는 등의 수법을 사용해 농민생활을 파탄으로 몰아넣는 관리들이 비일비재했다.
이 같은 일은 세도 정권의 공공연한 매관매직을 통한 관기의 문란과 더불어 세도 정권을 뒷받침하고 있는 토호 세력의 횡포 아래 빚어진 일이었다. 이런 삼정의 문란이 겹쳐 백성들이 부담해야 되는 결세가 높아져만 갔고 그것이 결국은 민란의 커다란 원인이 되었다.1862년 철종 13년 단성에서 시작하여 전국에서 37차에 걸쳐 민란이 거세게 일어나는데 이해에 일어난 민란을 통칭해 '임술민란'이라 한다.
당시는 조선 후기의 납속제 실시에 따른 신분제의 붕괴와 더불어 농민층의 분화가 일어나고 있었으며, 아울러 외척 세도 정치의 폐해가 전국 각지에 미치지 않는 데가 없던 시기였다. 또한계속되는 재해로 수입은 감소하는 반면에 구휼 등에 쓰이는 재정 지출은 크게 늘어 국가 재정이 적자를 면치 못하였고, 이에 따른 세수 증가로 관리들의 수탈이 크게 늘어 농촌 사회는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져 있었다. 따라서 농민들은 집과 농지를 버리고 떠도는 유민이 되거나 유민 직전에관에 항의하는 식으로 봉기하였다. 임술년에 일어난 민란이 삼정의 문란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여 흔히 '삼정의 난'이라고도 하는데 그 직접적인 도화선이 된 것은 2월 18일 진주에서 일어난'진주민란'이었다.
진주민란의 직접적인 발생 계기는 경상우병사 백낙신의 탐학과 착취에 있었다. 백낙신이 민란이 일어나기 전 몇 년 동안 착취한 돈만도 약 5만 냥에 달했는데 쌀로 환산하면 약 1만 5천 석이나 되는 엄청난 양이었다. 게다가 당시 진주목에서는 지금까지 지방 관리들이 불법적으로 축낸 공전이나 군포 등을 보충하기 위해 그것을 모두 결세에 부가시켜 해결하려 했는데 그액 수가 2만8천 석에, 축난 환곡만 해도 2만4천 석이나 되어 농민 부담이 급격하게 가중될 처지에 있었다.
이에 농민 봉기군들은 스스로 초군이라 부르면서 머리에 흰띠를 두르고 진주성으로 쳐들어갔는데 그 수가 수만 명에 이르렀다. 이에 당황한 그를 놔주지 않고 죄를 묻는 한편, 악질적인 아전 몇 명을 죽이고 원한을 샀던 토호의 집을 불태웠다. 6일간이나 계속된 진주민란은 그 동안 23개 면을 휩쓸었고, 120여 호의 집이 파괴되고 재물 손실이 10만 냥을 넘었다. 단성을 시작으로 진주에서 폭발한 이 민란은 곧 경상, 충청, 전라, 황해, 함경도의 5도와경기도광주에서 무려 37차에 걸쳐 일어난다. 크게는 수만 명에서 작게는 천여 명에 이르는 규모로 전국각지의 농민들이 악정에 대항하여 민란에 참가했다.
다른 지역에서 일어난 민란의 경위도 대개 이 진주민란과 비슷했다. 농민 봉기는 보통 2일에서 7일간 계속되었으며, 민란이 3월에서 5월 사이 춘궁기에 집중되어 일어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농민들의 생존 문제와 직결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봉기한 농민들은 한결같이 관리들의 횡포와 경제적 수탈을 막고 삼정의 폐해를 거두어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들은 관아를 습격, 수탈의 원흉인 관리와 아전들을 처단하는가 하면 장부를 불태우고 창고를 탈취하였다. 또한 관리와 결탁해 농민을 못 살게 굴던 양반과 토호의 집을 때려 부수고 곡식과 재화를 탈취하는가 하면 죄수들을 풀어주기도 했다.
임술민란의 피해 상황을 보면 지방이속으로서 살해된 자가 15명 이상, 부상자는 수백 명에 달하고 가옥이 불타거나 파괴된 것은 약1천 호, 피해 액수는 100만 냥을 넘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긴급 대책으로 안핵사와 선무사를 파견하여 난을 수습하고 민심을 가라앉히도록 하는 한편, 봉기 지역의 수령은 그 책임을 물어 파직시켰다. 진주에 파견된 안핵사박규수의 상소로 시정책이 건의되고, 그 결과 1862년 5월 26일 민란의 근본 대책을 마련하기위해 조정 대신들로 구성된 '삼정이정청'을 설치하고 그 해 5월부터 윤8월까지 4개월 동안 '삼정이정절목' 41개조를 제정하여 반포, 시행하였다.
그 주요 골자는 전정, 군정은 민의에 따라 현황을 시정하고 환곡은 파환 귀결에 따르기도 한다는 것이었다. 이 교구책으로 민란은 한때 진정되는 듯했으나 5월과 6월의 가뭄과 7월의 심한 물난리 때문에 민심은 계속 흉흉하였다. 그 뒤 삼정이정청의 업무가 비변사로 넘어간 10월에는 새 정책을 폐지시키고 삼정 제도로돌아감으로써 농민군이 바라던 근본적인 제도의 개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후에도 창원,황주,청안, 남해 등지에서 항쟁이 끊임없이 이어진 것도 이 때문이다.
[6. 조선 말기의 사상운동 - 동학의 탄생]
철종 대는 안팎으로 변화가 휘몰아치는 격변기였다. 안으로는 삼정의 문란으로 민생이 도탄에 빠지고 홍수, 지진, 역질 등이 창궐하여 전국적으로 농민 반란의 양상이 나타나던 시기였으며, 밖으로는 이양선의 출현과 천주교의 전래로 왕조 질서가 흔들리고 있었다. 이와 같은 내외적인 위기 시대에 그에 대응할 만한 사상으로 일어난 것이 동학이었다.
민생은 뒷전에 있고 몇몇 세도가들에 의해 좌우되고 있는 왕조에 실망한 백성들에게 인간 평등과 존중의 길을 제시한 동학이 나타나자, 그것은 영호남 지방을 중심으로 급속도로 번지기 시작했다. 동학은 1860년(철종 11년) 4월에 최제우가 창도한 종교로서 그 교지가 시천주 신앙에기초하면서도 보국안민과 광제창생을 내세운 점에서 민족적이고 사회적인 종교라 할 수 있다. 동학이라는 명칭은 교조 최제우가 서교인 천주교에 대항하여 동방의 도를 일으킨다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며, 1905년 손병희에 의해서 천도교로 개칭되었다.
창도 당시 동학은 시천주 신앙을 중심으로 모든 서민이 내 몸에 한울님을 모시는 입신에 의하여 군자가 되고 나아가 보국안민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나라 구제 신앙이었으나, 2대 교주 최시형에 가서는'사람 섬기기를 한울같이 한다'는 사인여천의 가르침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는 인간뿐만 아니라모든 산천초목에 한울님이 내재한다고 보는 범천론적 사상으로서, 백성들이 마음을 사로잡았다. 또한 3대 교주 손병희에 이르러서는 '사람이 곧 한울'이라는 인내천 사상을 교지로 선포하였다.
동학이 널리 서민층의 반 왕조적 민심을 기반으로 하여 보국안민과 광제창생의 사회적 사상운동이자 종교로 대두된 데에는 나라의 시운이 다하였다는 말세관과 사회 변동기의 불안이 크게 작용하였다. 양반 사회의 신분 차별과 적서 차별을 반대하던 서민층에서 신분 평등을 주장하는 동학에 대해 공명하는 자가 많았던 것은 시대적 상황으로 볼 때 당연한 귀결이었다.
최제우 자신 또한 몰락 양반가의 서출로 태어났으니 그러한 교리가 세워진 것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최제우는 1824년 순조 24년에 경주 최씨 옥의 서자로 태어났다. 몰락 양반 가문 출신인 그는 젊은 시절에 의술, 복술 등 여러 방면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세상의 어지러움이 바로 천명을 돌보지 않기 때문에 생긴 것임을 깨닫고 천명을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한다. 1856년 천성산에서 부터 시작된 그의 구도 노력은 1859년 구미산 용담정 수도에서도 계속 이어진다. 그가 파악한 당시의 사회상은 왕조의 기운이 쇠하여 개벽이 필요한 말세라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위기의식에서 최제우는 서학과 서교에 대한 대응으로 동학이라는 새로운 도를 제창하게 되었다. 그가 본래 이름인 제선을 제우로 고친 것도 종교적으로 구국과 제세의 길을 찾겠다는 자각에서 나온 것이다.
1860년 4월 5일 마침내 그는 득도 체험을 하고 동학이라는 새로운 종교를 창제하였다. 그로부터 1년간 가르침에 마땅한 체득하고 이치를 도를 닦는 순서와 방법을 만들어 1861년부터 본격적으로 새로운 신앙을 포교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경주 일대를 중심으로 신도가 많이 모여들었는데 동학이 가지고 있는 민간 신앙적 성격이 신앙적 결집을 촉진하였다. 동학은 기성 종교인 유교와 불교의 쇠운설을 주장하는가 하면, 유교 사상을 비판적으로 흡수하였다.
그는 서민들이 수학 기간을 거치지 않고도 입도할 수 있으며 입도한 그날부터군자가 될 수 있다고 하여 서민이 군자의 인격을 갖추는 길을 열어놓았다. 또한 동학의 교지인'시천주' 사상을 통해, 각 개인이 천주를 모시는 인격적 존재이자 각자 자기 안에 천주를 모신주체임을 강조하였다. 이와 같은 동학사상은 후에 일어날 동학 농민혁명에 사상적 영향을 끼쳤음은 물론이거니와 인간관계가 상하 주종의 지배, 복종 관계가 아니라 누구나 다 같이 천주를 모시고 있는 존엄한 존재이자 평등한 관계임을 가르침으로써 근대적 사상의 선구적 위치에 서게 되었다.
한편 동학교도들의 교세가 날로 커지자 조정에서는 동학도 서학과 같이 민심을 현혹시킨다 하여 나라가 금하는 종교로 규정하고, 1862년 9월 교조 최제우를 백성을 현혹시킨다는 이유로 경주 진영에서 체포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수백 명의 제자들이 석방을 청원하여 무죄 방면되는데 이 사건이 곧 동학의 정당성 입증으로 받아들여져 그 후 교세가 더욱 커졌다. 신도가 늘자 그 해 12월에 각지에 접을 두고 그 지역의 접주가 지역 신도를 이끌게 하는 접주제를 두어 1863년에는 교인 3천여 명, 13개 접소를 확보하였다.
이 해 8월에는 최시형에게 도통을 전수하고 제2대교주로 삼았다. 당시 관헌의 지목을 받고 있었던 최제우가 미리 후계자를 세워놓은 것이다. 한편 조정에서는 동학의 교세 확장에 두려움을 느끼고 최제우를 다시 잡아들일 것을 명하니 그해 11월 20일 최제우는 선전관 정운구에 의하여 경주에서 체포되었다. 최제우가 서울로 압송되는 도중 철종이 죽자 1864년 1월 대구 감영으로 이송되어 3월 10일 사도난정의 죄목으로 효수에 처해졌다. 이때 그의 나이 41세였다. 그러나 한 번 일어난 동학의 불길은 2대 교주 최시형에 이르러 더욱 그 사상적 기반을 다지면서 조선 말기의 국내외 정세에 크나큰 영향을 미치는 민족종교로 발돋움한다.
[7. '철종실록'편찬 경위]
'철종실록'은 총 16권(부록1권)으로 되어 있으며 1849년 6월부터 1863년 12월 8일까지 철종 재위 14년 6개월간의 사실을 편년체로 기술하고 있다. 부록에는 행록, 시책문, 애책문, 비문, 지문, 행장 등을 기록하였다. 이 책은 1864년, 고종 1년 4월 29일에 편찬을 시작하여 1865년 윤5월에 출판되고 각 사고에 봉안되었다. '철종실록'의 편찬을 담당한 실록청 당상은 총재관에 정원용, 김흥근, 김좌근, 조두순, 이경재, 이유원, 김병학, 각방당상에 김병기, 김병국 등이었다.'철종실록'은 어느 면에서 보자면 조선왕조의 마지막 실록이라 할 수 있다. 뒤에 편찬된'고종실록', '순종실록'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이 설치한 이왕직에 의해 편찬됨으로써 사실의 취사선택 기준이 이전의 실록과 달랐으며, 서술의 객관성도 결여되어 있다. 따라서 실록 본래의 편찬 방법 및 기준에 따라 편찬된 실록으로는 '철종실록'이 마지막이다. 편찬 담당자에 철종 대에 권세를 잡았던 안동 김씨 일문이 많아서인지 '철종실록'은 역대 어느 왕보다도 왕에 대한 일화나 칭송을 자자하게 싣고 있다.
철종 시대의 세계 약사
철종 대는 세계사적 전환기에 직면해 있던 시기였기에 수많은 전쟁들이 터지고, 서구열강의 식민지 침략이나 이권 쟁탈이 가속화되는 등 제국주의적 침략주의가 횡행했던 시기다. 청나라가 태평천국의 난 등으로 정국이 혼란에 빠지고 서구 열강들에게 이권을 넘겨주는 등 안팎 곱사등이의 위기에 놓이고, 베트남, 캄보디아 등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열강의 식민지가 된다. 일본은 서구 열강들과 화친을 맺고 문호를 개방함으로써 조선보다 근대화에 한발 앞서게 된다. 유럽에서는 작은 나라들의 합병과 독립전쟁이 끊이지 않고 일어나며, 영국, 프랑스 등의 열강은 새로운 식민지를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미국에서는 남북전쟁의 발발과 더불어 북군의 승리로 노예해방이 선포되어 획기적인 변혁기를 맞게 된다. 한편 다윈의 진화론이 발표되어 세상을 충격 속으로 몰아넣었는가 하면, 파스퇴르의 미생물분석 등 과학적 연구성과들이 많이 나타나 생활의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조선왕조 제25대 철종
안동김씨 세력연장을 위 한 철종의 즉위 배경
안동 김씨가 계속 실권을 잡게 되는 배경에는 대왕대비인 순원왕후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다. 순조의 비인 순원 왕후는 손자 인 헌종이 후사 없이 죽자 조대비의 척족인 풍양 조씨 일파가 왕위를 세울 것을 염려하여 재빨리 손을 썼다. 그도 그럴것이 헌종의 6촌 이 내에 드는 왕족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7촌 이상의 왕족은 몇 명 있 었다. 후대의 왕은 본래 항렬로 따져 동생이나 조카벌이 되는 자로 왕 통을 잇게 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왜냐하면 종묘에 서 선왕에게 제사 를 올릴 때 항렬이 높은 이가 항렬이 낮은 이에게 제사를 올리게 해서 는 안된다는 법도 때문이었 다. 그러나 안동 김씨 척족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고 지위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서는 헌종의 7촌 아저 씨벌 이 되는 강화도령 원범이 가장 적당하다고 판단했다. 이렇듯 안 동 김씨 척족들은 기왕에 잡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 하여 왕가의 법도 를 철저하게 무시하는 전횡을 저지른다.
민진용의 옥
순조 말 기부터 김유근과 김홍근에 의해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가 이루어지다 가 헌종 10년에 이들이 물러나자 권력에 틈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 틈 을 이용하여 반역을 꾀한 민진용은 우선 자신이 가지고 있는 뛰어난 의술로 은언군의 아들 이광과 은언군의 손자 원경의 신임을 받고 있 던 이원덕을 포섭하였다. 그들은 은언군의 손자이자 이광의 아들인 원 경을 왕으로 추대하기 위해 모의를 꾸미다 가 발각되어 모두 능지처참 을 당하고 마는데 이것을 '민진용의 옥'이라 한다.
철종의 대민 노력
친정을 시작한 다음 해인 1853년 봄에는 관서 지방의 기근 대책으로 선혜청 전 5만 냥과 사역원삼포세 6만 냥을 민 간에 대여해주록 하였고 또 그 해 여름에 가뭄이 심하자 재물과 곡식이 없어 구휼하지 못하는 실 정을 안타까이 여 겨 재용의 절약과 탐관오리의 징벌을 엄명하기도 하 였다. 1856년 봄에는 화재를 입은 1천여 호의 민가에 은전과 약 재를 내려 구휼하게 하였으며 함흥의 화재민에게도 3천 냥을 지급하였다. 그 해 7월에는 영남의 수재 지역에 내탕 금 2천 냥, 단목 2천 근, 호 초 200 근을 내려주어 구제하게 하는 등 빈민 구제에 성의를 다했다.
삼정의 문란
토지세에 대한 징수인 전정은 본래 토지 1결당 전세 4두 내지 6두로 정해진 전세보다도 부가세가 훨씬 많았다. 부 가세의 종류 만 해도 총 43종류에 달했는데 본래 그것은 토지를 소유한 지주층이 물게 되어 있었으나 전라, 경상 지 방은 모두 땅을 빌려 농사짓고 있 는 농민들이 물고 있었다. 또한 지방 아전들의 농간으로 빚어지는 허 복, 방결, 도 결 등이 겹쳐서 전정의 문란이 고질화되었다. 한편 군정 은 균역법의 실시로 군포 부담이 줄긴 하였으나 양반층의 증가와 군 역 부담에서 벗어나는 양민의 증가로 말미암아 계속 가난한 농민에게 만 부담이 집중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을의 형세에 따라 차등을 두어 군포를 부과하 기 때문에 지방관은 그 목표량을 채우기 위해 죽은 사 람에게 군포를 부과하는 백골징포나 어린 아이에게 부과하는황구첨정 등을 감행했다.
환곡은 본래 관에서 양민에게 이자 없이 빌려주게 되어 있는 곡식인데 여기 에 비싼 이자를 붙이거나 양곡의 양을 속여서 가을에 거두어들일 때 골탕을 먹이는 등의 수법을 사용해 농민 생활을 파탄으로 몰아넣는 관 리들이 비일비재했다. 이같은 일은 세도 정권의 공공연한 매관매직을 통한 관기의 문란과 더불어 세도 정권을 뒷받침하고 있는 지방 토 호 세력의 횡포 아래 빚어진 일이었다. 이런 삼정의 문란이 겹쳐 백성들 이 부담해야 하는 결세가 높아져만 갔고 그 것이 결국은 민란의 커다 란 원인이 되었다.
진주민란
진주민란의 직접적인 발 생 계기는 경상우병사 백낙신의 탐학과 착취에 있었다. 백낙신이 민란 이 일어나기 전 몇 년 동안 착취한 돈만도 약 5만 냥에 달했는데 쌀 로 환산하면 약 1만 5천 석이나 되는 엄청난 양이었다. 게다가 당 시 진주목에서는 지금까지 지방 관리들이 불법적으로 축낸 공전이나 군 포 등을 보충하기 위해 그것을 모두 결세에 부가시켜 해결하려 했는 데 그 액수가 2만 8천 석에 축난 환곡만 해도 2만 4천 석이나 되어 농 민 부담이 급격하게 가중될 처지에 있었다.
이에 농 민 봉기군들은 스스로 초군이라 부르면서 머리에 흰띠를 두르고 진주 성으로 쳐들어 갔는데 그 수가 수만 명에 이르렀다. 이에 당황한 우병 사 백낙신은 환곡과 도결의 폐단을 시정할 것을 약속했으나 농민들은 그를 놔주지 않고 죄를 묻는 한편 악질적인 아전 몇 명을 죽이고 원한 을 샀던 토호의 집을 불태웠다. 6 일간이나 계속된 진주민란은 그동 안 23개 면을 휩쓸었고 120여 호의 집이 파괴되고 재물 손실이 10만 냥을 넘었다. 단성을 시작으로 진주에서 폭발한 이 민란은 곧 경상, 충청, 전라, 황해, 함경도의 5도와 경기도 광주에서 무려 37차에 걸 쳐 일어난다. 크게는 수만 명에서 작게는 천여 명에 이르는 규모로 전 국 각지의 농민들이 악정에 대항하여 민란에 참가했다.
동학의 탄생
동학은 1860년(철종11년) 4월에 최제우가 창도한 종교로서 그 교지가 시천주 신앙에 기초하면서도 보국안민과 광 제창생을 내세운 점에서 민족적이 고 사회적인 종교라 할 수 있다. 동학이라는 명칭은 교주 최제우가 서 교인 천주교 에 대항하여 동방의 도를 일으킨다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 며 1905년 손병희에 의해서 천도교로 개칭되었다. 창도 당 시 동학은 시천주 신앙을 중심으로 모든 서민이 내 몸에 한울님을 모시는 입신 에 의하여 군자가 되고 나아가 보국 안민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나 라 구제 신앙이었으나 2대 교주 최시형에 가서는 '사람 섬기기를 한울 같이 한다'는 사인여천의 가르침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는 인간 뿐만 아니라 모든 산천초목에 한울님이 내재한다고 보는 범천론 적 사상으 로서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또한 3대 교주 손병희에 이르러서 는 '사람이 곧 한울'이라는 인내천사상을 교지로 선포하였다.
동학의 초대교주 최제우
최제우 는 1824년 순조 24년에 경주 최씨 옥의 서자로 태어났다. 몰락 양반 가문 출신인 그는 젊은 시절에 의술, 복술 등 여러 방면에 관심을 보 이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세상의 어지러움이 바로 천명을 돌보지 않 기 때문에 생긴 것임을 깨닫고 천명을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 작한다. 1856년 천성산에서부터 시작된 그의 구도 노력은 185 9년 구 미산 용담정 수도에서도 계속 이어진다. 그가 파악한 당시의 사회상 은 왕조의 기운이 쇠하여 개벽이 필요한말세라는 것이었다. 이와 같 은 위기 의식에서 최제우는 서학과 서교에 대한 대응으로 동학이라는 새로운 도를 제창하게 되었다. 그가 본래 이름인 제선을 제우로 고친 것도 종교적으로 구국과 제세의 길을 찾겠다는 자각에서 나온 것이 다.
1860년 4월 5일 마침내 그는 득도 체험을 하고 동학이라는 새로운 종교를 창 제하였다. 그로부터 1년간 가르침에 마땅한 이치를 체득하고 도를 닦 는 순서와 방법을 만들어 1861년부터 본격적으로 새로운 신앙을 포교 하기 시작하였 다. 특히 경주 일대를 중심으로 신도가 많이 모여들었 는데 동학이 가지고 있는 민간신앙적 성격이 신앙적 결집을촉진하였 다. 동학은 기성 종교인 유교와 불교의 쇠운설을 주장하는가 하면 유 교 사상을 비판적으로 흡수하였다. 그는 서민들이 수학 기간을 거치 지 않고도 입도할 수 있으며 입도한 그날부터 군자가 될 수 있다고 하 여 서민이 군자의 인격을 갖 추는 길을 열어놓았다. 또한 동학의 교지 인 '시천주' 사상을 통해 각 개인이 천주를 모시는 인격적 존재이자 각자 자기 안에 천주를 모신 주체임을 강조하였다. 이와같은 동학 사 상은 후에 일어날 동학 농민혁명에 사상적 영향을 끼쳤음은 물론이거 니와 인간 관계가 상하 주종 의 지배, 복종 관계가 아니라 누구나 다 같이 천주를 모시고 있는 존엄한 존재이다 평등한 관계임을 가르침으 로써 근대적 사상의 선구적 위치에 서게 되었다. 한편 동학교도들의 교세가 날로 커지자 조정에서는 동학도 서학과 같이 민심을 현혹시킨 다 하여 나라가 금하는 종 교로 규정하고 1862년 9월 교조 최제우를 백성을 현혹시킨다는 이류로 경주 진영에서 체포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수백 명의 제자들이 석방을 청원하여 무죄 방면되는데 이 사건이 곧 동학의 정당성 입증으로 받아들여져 그 후 교 세가 더욱 커졌다. 신도 가 늘자 그 해 12월에 각지에 접을 두고 그 지역의 접주가 지역 신도 를 이끌게 하는 접주제 를 두어 1863년에는 교인 3천여 명, 13개 접소 를 확보하였다. 이 해 8월에는 최시형에게 도통을 전수하고 제2대 교 주로 삼았다. 당시 관헌의 지목을 받고 있었던 최제우가 미리 후계자 를 세워놓은 것이다. 한편 조정에서는 동학의 교세 확장에 두려움을 느끼고 최제우를 다시 잡아들일 것을 명하니 그 해 11월 20일 최제 우 는 선전관 정운구에 의하여 경주에서 체포되었다. 최제우가 한양으로 압송되는 도중 철종이 죽자 1864년 1월 대 구 감영으로 이송되어 3월 10일 사도난정의 죄목으로 효수에 처해졌다. 이때 그의 나이 41세였 다. 그러나 한 번 일 어난 동학의 불길은 2대 교주 최시형에 이르러 더욱 그 사상적 기반을 다지면서 조선 말기의 국내외 정세에 크나큰 영향을 미치는 민족 종교로 발돋움한다.
철인왕후 김씨
철종 대 에 마음껏 권력을 휘둘렀던 영은부원군 김문근의 딸이자 대왕대비 순 원왕후의 근친인 그녀는 1851년 열 다 섯의 나이에 왕비에 간택되어 궁으로 들어온다. 1858년 원자를 낳았으나 곧 죽었다. 왕비 김씨는 탐 욕스러운 그의 아버지 김문근과는 달리 말수가 적고 즐거움이나 성냄 을 얼굴에 잘 나타내지 않는 등 부덕이 높은 것으로 칭송이 자자했다. 1863년 철종이 서른 셋의 젊은 나이로 죽자 명순의 존호를 받고 이듬해 고종이 즉위하자 왕대비가 되었다. 1866년 휘성에 이어 정 원, 1873년에 다시 수령의 존호를 받아 명순휘성정원수령대비가 되었 다. 1878년 42세의 나이로 창경궁 양화당에서 죽었다. 묘는 경기도 고양시 원당동 사삼릉의 예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