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로마서 1:21-23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 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사람이 한 가지 일을 오래 하다 보면 그 일의 전문가가 되어 한번 보면 그 일이 어떻게 진행될 지를 알 수 있다.
미국에 있는 MD 앤더슨에 암센터는 삼성 이건희회장이 암치료를 받아 우리에게 익숙한 병원이 되었다.
이 병원에서 종신교수로 있는 김의신교수는 오래동안 수많은 암환자를 만나면서 누가 나을지를 예측할 수 있게 되었다.
김의신교수를 찾는 암환자 중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많은데, 이들은 대부분이 두 가지 똑같은 질문을 한다.
하나는 자신이 얼마나 살 수 있는지, 또 다른 하나는 치료를 받으면 나을 수 있는지를 물으면 답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낫을 확률이 80%라고 해도 그 사람이 20%에 속할지, 80%에 속할지는 모르기 때문이다.
그의 연구에 의하면 암에 걸리는 가장 큰 이유는 근심과 스트레스 때문인데, 사람들이 병원에 와서 오히려 병을 키운다.
그 이유는 병원에 와서 스스로 얼마 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근심과 스트레스를 더 받기 때문이다.
암환자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암에 걸리지만, 치료하기 위해 제일 중요한 것은 좋은 생각을 가지는 것이다.
어려움이 있을 때에 비관적인 생각을 하거나 우울증에 걸리면, 부신에게 스트레스호르몬을 만들어낸다.
그 호르몬이 아드레날린과 코르티솔이다. 이 호르몬은 암세포의 활동을 증가시키고 암 침투를 돕는다.
이렇게 되면 장의 운동력이 떨어지고 위가 좋아지지 않아 식욕이 떨어지고, 잠을 잘 자지 못한다.
사람들이 몸이 아파서 병원에 가는 이유는 낫기 위함이다. 그런데 낫는 생각이 아니라 아픈 생각을 더 하면 병은 악화된다.
사람의 생각의 방향이 매우 중요하다. 생각의 방향이 낫는다는 사람과 아플 것이라는 생각하는 사람의 결과는 아주 다르다.
아무리 힘든 자리에 있어도 생각의 방향에 따라 건강한 삶을 살기도 하고 건강을 잃어버리는 삶을 살기도 한다.
사람이 좋은 생각을 하면 사람의 뇌에서 자연살해세포가 나온다. 이는 웃는 사람에게서 많이 나온다.
자연살해세포는 암세포를 죽이는 일을 하므로 자연살해세포가 많은 사람은 암치료가 잘되고 암에 잘 걸리지 않는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교회 찬양대원들에게 자연살해세포는 일반인보다 1000배가 더 높다.
김의신교수는 자연살해세포가 많이 나오는 사람을 합창하는 사람이 아닌 찬양하는 사람들이라고 예를 들었다.
그 이유는 기쁨 속에 노래하는 것만이 아니라 감사하는 사람에게서 자연살해세포가 나오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믿고 찬양할 수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왜냐하면, 찬양하는 사람은 영혼의 기쁨과 더불어 건강한 삶의 살 수 있는 길이 열리기 때문이다.
그렇다. 사람이 어느 자리에 있는가 보다는 어느 방향을 향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사람들은 자신이 있는 자리를 많이 생각한다. 어느 자리가 더 좋은가에 관심이 있다. 즉, 환경에 관심이 많다.
물론 환경이 중요하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방향이다. 자신이 무엇을 보고 있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힘든 자리에 있어도 삶의 방향을 바르게 잡은 사람은 힘든 자리에서 벗어난다.
반면에 삶의 방향을 바르게 잡지 못하면, 자신이 있는 자리에 어느 자리이든지 관계없이 삶은 힘들어질 뿐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삶의 방향을 잘 잡는 것인가? 이에 대해 욥기 23:10은 이렇게 답을 준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삶의 방향은 자신이 아닌 하나님이 제일 잘 아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삶의 방향을 바르게 잡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한다.
왜 그런가? 시편 119:5은 이렇게 말씀한다.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계심을 알기에 힘들면 하나님을 찾는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을 따르는 같은 것이 아니다.
삶의 어려움이 있을 때에 방향이 아닌 자리를 먼저 보기에 하나님을 알지만 하나님을 따르지 못할 때가 많다.
창세기 12장을 보면, 아브라함이 나온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삶의 방향을 맞춰나갔다.
그래서 말씀에 따라 자신이 살고 있던 고향 땅을 떠나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 도착했다.
이때에 아브라함의 감격했다. 그래서 단을 쌓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 그는 먼저 하나님을 보았다.
그런데 그 땅이 어느 날인가부터 가뭄이 들었다. 하나님이 약속한 땅에서 어려움이 생긴 것이다.
아브라함은 이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나님이 인도하신 곳은 좋은 것이 넘치고 어려움이 없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런 아브라함의 생각을 오늘날 많은 믿음의 사람도 가지고 있다.
이렇게 가뭄이 들어 삶에 어려움이 생겼을 때에 아브라함이 해야 할 일은 방향을 바르게 잡는 일이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자리를 찾았다. 그래서 애굽으로 내려갔다. 당시 애굽은 제일 살기 좋은 나라요 자리였기 때문이다.
애굽에 내려간 아브라함은 그곳에서 자신의 아내를 누이라고 속인다. 그렇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아내는 애굽의 왕인 바로의 침실로 들어가게 된다. 이것은 아브라함에게는 잊을 수 없는 수치였다.
이후에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의 말을 거절하지 못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지만 삶이 어려울 땐 하나님을 외면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다시 말하면 더 좋은 자리에 가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하나님을 멀리했다.
삶에 어려움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있는 기회이지만, 아브라함은 그 기회를 붙잡지 않았다.
이와 같은 아브라함의 삶은 어떤 삶인가? 오늘 읽은 본문21절은 이렇게 말씀한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하나님을 알지만 하나님을 높이지 않고 감사하지 않았다. 즉, 하나님을 알지만, 자신의 뜻을 앞세운 것이다.
하나님을 안다고 하지만, 자신의 뜻대로 살면 어떻게 되는가? 21절은 이렇게 말씀한다.“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을 높이지 않는 사람은 생각과 마음이 잘못된 방향으로 간다.
물론 이것을 본인은 모른다. 그래서 자신의 뜻대로 사는 것이 지혜롭다고 생각한다. 과연 그럴까?
본문 22절은 이렇게 말씀한다.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사무엘하 11장을 보면, 다윗이 나온다. 다윗은 하나님이 함께 했다. 그는 목동이었지만, 최고의 자리인 왕위에 올랐다.
이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와 인도하심의 결과였다. 그런데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후에 그의 삶이 달라졌다.
다윗은 하나님의 뜻을 알았지만, 하나님을 찾는 방향이 아닌 편안한 자리에 관심을 기울였다.
사무엘하 11:1은 이렇게 말씀한다. “그 해가 돌아와 왕들이 출전할 때가 되매 다윗이 요압과 그에게 있는 그의 부하들과
온 이스라엘 군대를 보내니 그들이 암몬 자손을 멸하고 랍바를 에워쌌고 다윗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더라”
이렇게 보기에 좋아 보이는 편안한 자리에 있던 다윗은 그날 밤에 자신의 신하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불러 동침한다.
그리고는 그의 남편을 전쟁터에서 죽게끔 한다. 다윗은 하나님을 믿었지만 말씀대로 행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 순간 다윗의 생각은 허망하고 마음은 어두워졌다. 하나님을 알지만, 하나님을 높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머리로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감사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 한다. 머리로 가까이 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삶을 살고, 그런 사람이 헛된 삶을 살지 않는다. 시편 127:1-2에서는 이렇게 말씀한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렇다. 사람의 수고가 헛되지 아니하려면, 하나님이 함께 해야 한다. 하나님이 지키셔야 한다.
창세기를 보면, 꿈의 사람 요셉이 나온다. 요셉은 꿈을 잘 꾸는 사람이었다. 그의 꿈은 자신의 앞날에 대한 꿈이었다.
꿈을 잘 꾸었던 요셉을 향해 그의 형제들은 꿈꾸는 자라고 했다. 그를 존중해서가 아니라 조롱해서 한 말이다.
그런 요셉이 나중에는 다른 사람의 꿈을 해몽해주는 사람이 되었다. 다시 말해서 그의 지혜가 발전한다.
그 이유는 요셉이 하나님을 가까이 했기 때문이다. 이런 요셉의 모습은 창세기 39장을 보면 알 수 있다.
요셉은 애굽에 종으로 팔려가서 보디발의 집에 일했다. 보디발에게 인정을 받은 요셉은 그 집 종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그런 요셉에게 어느날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하며 다가왔다. 보디발의 아내는 보는 이가 없으니 동침하자고 한다.
그녀는 눈에 보이는 사람이 없으니 마음껏 즐기자는 것이다. 그녀는 보이는 것만을 믿었기에 마음이 어두웠다.
그러나 요셉은 하나님을 믿었기에 보는 것만을 믿지 않았다. 그래서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거절했다.
그의 생각과 마음은 어둡지 않았고 밝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에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빛이 되신 하나님이 마음에 있는 사람은 마음이 밝고, 생각이 허망해지지 않았다.
하나님을 가까이 한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물리쳤다. 만약에 요셉의 마음에 하나님이 없었다면 넘어졌을 것이다.
그러면 보디발의 아내가 주는 좋은 옷과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는 있었겠지만, 하나님의 인도를 더 이상 받지 못한다.
애굽의 총리가 되어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구원하는 역할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안다고 하지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일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하지도 않는다. 오직 자신의 뜻대로 살려고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알지만, 말씀을 외면한다.
자신의 지혜와 능력과 열심을 통해 이 세상을 헤치고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우물안의 개구리와 같은 생각이다. 우물 안의 개구리는 우물 밖의 세상을 모른다.
우물 안에서 대장이라고 여긴 개구리는 우물 밖을 나가는 순간 자신보다 더 강한 이들이 세상에 많음을 발견한다.
오늘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 자신이 최고로 인정받을 수 있지만, 자리가 바뀌거나 시간이 지나면 더 이상 최고일 순 없다.
세상에서 자신보다 강한 사람이 많다. 그렇기에 자신의 능력으로 사는 사람은 언젠가는 넘어질 수밖에 없다.
이를 잊고 살기에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영광을 버리고 세상의 것을 얻으려는 어리석은 사람이 된다. 23절을 보자.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 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하나님의 것을 버리고 세상의 것을 붙잡는 이유는 세상의 것이 좋아 보이고 화려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세상의 것은 화려하고 좋아 보이지만, 그것은 잠시일 뿐이라는 것이다.
꽃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먼저, 장미처럼 화려한 꽃을 피우는 꽃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이 찾는다.
다음으로 호박꽃처럼 화려하지 못하고 수수한 꽃을 피우는 꽃이 있다. 그러나 이런 꽃은 꽃이 떨어지면서 열매를 맺는다.
화려함을 추구하는 꽃은 아름답지만, 열매가 없다. 반면에 수수한 꽃은 열매가 있다.
세상에서 장미꽃처럼 화려함을 추구하는 사람은 꽃이 지면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
그러나 호박꽃처럼 수순한 꽃을 피우는 사람은 꽃이 진 후에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다.
신앙이 사람은 꽃만 피우는 화려한 삶이 아니라 열매를 맺기 위해 수수한 꽃을 피우는 사람이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감사하는 사람은 화려한 꽃이 아닌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사람이다.
당신은 하나님을 믿는가? 그렇다면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감사하며 살길 바란다.
그리하여 당신의 삶이 수수해 보이지만,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믿음의 삶의 주인공이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