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훈처와 문화일보가 주최한 광복 60주년 기념 ‘대학생 기자단 중국 항일유적 탐방’이 7월31일부터 8월 5일까지 5박6일간의 일정으로 진행됐다. 전국 대학교 학보사, 교지, 방송국 학생기자 30여명이 60년의 세월을 뛰어 넘어 나라를 위한 마음 하나로 낯선 땅에 서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선조들의 발자취를 찾아 나섰다.
독립된 조국의 후예들이 선조의 넋을 기리다
1932년 4월 29일 상해 홍구공원에서 터진 한 한국인 청년의 폭탄은 침략자에게는 치욕을 한국과 중국에게는 쾌거를 안겨줬다. 이를 계기로 임시정부는 상해를 떠나 유주로 떠나게 된다. 현재 ‘루쉰공원’이라고 불리는 이곳은 무더운 날씨를 피해 많은 중국인들이 공원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그 당시 윤봉길 의사가 실제로 폭탄을 투허한 장소에는 중국의 문학사상가인 ‘루쉰’의 묘와 동상, 기념관이 위치해 있으며, 이곳으로부터 30~40m 떨어진 곳에 1994년 ‘윤봉길 의거’를 기념해 세운 기념비와 1997년에 세워진 생애사적전시관 ‘매정’이 있다.
우리 독립역사에서 중요한 영향을 미친 역사의 현장을 중국인 문학사상가에게 빼앗긴 기분이란 말로 표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우린 준비해온 꽃바구니를 기념비 앞에 두고 반세기를 훌쩍 뛰어넘어 독립된 조국의 후예들이 선조의 넋을 기리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마당로(馬當路)에 위치한 3층 벽돌집. 길 위에 초라하게 위치하고 있어 간판에 신경 쓰지 않는 다면 그냥 스쳐지나 칠 만한 이곳이 1926년부터 앞서 언급한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있었던 1932년까지 임시정부 요인들의 근거지였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청사’다. 많은 한국인 관광객들이 줄지어 있는 청사 안으로 들어가니 그 당시 활동했던 다양한 자료와 함께 집무실, 침실 등 옛 임시정부 모습 그대로 보존돼있었다. 사진 촬영이 금지된 이곳에 취재가 몸에 배인 기자들은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고, 우리 일행의 카메라 셔터 소리에 그곳 중국인 안내원은 우릴 쫓아 다니며 서투른 한국말로 ‘사진찍지 마세요’를 연거푸 외쳤다.
드넓은 대지에서 선조들의 발자취를 쫓다 우리 일행은 연변지역의 항일유적지를 둘러보기 위해 연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약4시간 동안의 비행. 앉아있는 것만으로 힘든 이 길을 선조들은 육로를 통해 몇 날 며칠을 걸어서 갔으리라. 독립운동가 양우조 일기의 “중국이 거대하다는 걸 새삼 느낀다. 드넓은 대지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내주기도 하지만 또 그만큼 우리의 갈 길은 멀기만 하다”라는 글귀가 새삼 떠올랐다. 현재 중국에는 약 218만명의 조선족이 살고 있으며, 연변의 경우 85만명이 살고 그 중 60%인 43만명이 연길시에 살고 있다. 중국정부의 소수민족 우대 정책에 따라 연변자치주 내의 정부기관이나 신문 광고 등에 조선족 자체의 문자를 우선적으로 쓰고 있고, 그 때문에 연변의 거의 모든 옥외광고가 한글로 돼 있었다. 예전에는 백두산을 중요시하고 신중한 산이라 하여 ‘불암산’이라 부르며 올라가기 전에 목욕을 하고 제사를 지낸 후 올라 갔었다고 한다. 휴가철을 맞은 많은 한국인들이 중국이라는 제3국을 통해 귀중한 백두산을 찾고 있었다. 많은 비를 맞으며 백두산 등반이후 우리를 처음 반긴 것은 천지물이 흐르는 유일한 물줄기인 ‘장백폭포’였다. 1시간에도 몇 번씩 자신의 얼굴색을 바꾼 백두산은 끝내 아름다운 천지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저 천지 건너 북녘 땅에 우리 동포들이 혹시 보이지나 않을까 더 높은 곳에 올라가 봤지만 보이는 것은 자욱한 안개뿐이었다. 우리에게 마음을 열 듯 하면서 열지 않는 북한처럼 백두산의 천지도 보일 듯하지만 쉽게 정체를 드러내지 않았다. 태극기도 마음대로 펼치지 못하는 백두산 천지에서 우리는 한데 입을 모아 ‘애국가’를 제창했다.
해란강 하류 충적평원의 중심에 자리 잡은 용정은 항일독립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민족학교인 서전서숙, 동흥, 대성학교 등 사립중학교가 이곳에 세워졌다. 용정의 상징인 비암산 정상에는 우리에게 친숙한 ‘일송정’이 있다. 일송정에 오르면 해란강이 용정시를 휘감아 흘러 한눈에 보인다고 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우리는 시간이 없어 멀리서 일송정을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비록 지금은 소나무가 아닌 정자하나만 외롭게 용정시를 내려다보고 있었지만 소나무 밑에서 독립운동가들의 항일의지를 불태웠던 그 열기는 여전히 남아있는 듯 했다. 1921년 용정에 민족학교인 대성중학교가 설립됐다. 그 당시 많은 항일공산주의자들을 배출했던 이곳은 현재 항일운동과 관계되는 많은 자료들이 전시된 전시관으로 복원돼 용정을 찾는 많은 이들이 항일운동의 역사를 되짚어 볼 수 있는 곳이 됐다. 지사들의 마을이라 불리는 명동촌. 1899년 2월 두만강변의 도시에서 거주하던 141명의 대 이민단이 그날 일제히 고향을 떠나 두만강을 건너 명동에 마을을 건설했다. 이곳에서 우리는 옛모습 그대로 복원된 윤동주 생가, 명동교회 등을 둘러보며 문익환, 김약연, 윤동주 시인 등이 민족운동에 일생을 바친 발자취를 엿볼 수 있었다. 1919년 3월 13일 용정시 조선족들은 3·1운동 소식을 뒤늦게 알게 된다. 이날 정오, 용정 북쪽에 위치한 서전대야에는 1만명 가량의 한국인들이 모여들어 만세시위행진에 들어갔다. 하지만 일본의 만세운동 저지로 인해 14명이 희생되고, 30여명이 부상자가 발생했다. 희생자중 13구의 시신을 최근 용정유지들을 주축으로 만들어진 ‘용정 3·13 기념사업회’에서 ‘3·13반일의사릉’이라고 새긴 묘비를 세우고 묘역을 성역화 했다. 최근갑(용정3·13기념사업회 회장)씨는 “민족의 역사를 발굴하고 사적지 성역화 및 정화 등을 통해 선조들의 독립 정신을 후대에 넘겨주기 위해 30여명의 용정시민이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많은 한국인들이 이곳을 방문할 때마다 사명감을 갖고 설명해 주고 있다”며 “특별히 많은 학생기자단이 왔으니 많이 보고 젊은 또래 학생들에게 역사를 잘 알려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중국과 우리나라 사이에 역사적 큰 갈등이 생기고 있는 발해. 하지만 중국의 정부는 발해를 자신들의 역사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옛 발해터에는 그 당시 유물들을 전시해 놓은 그럴듯한 박물관과 터만 존재하던 근처 부근은 인위적으로 성곽을 쌓는 등 조금씩 발해를 자신들만의 역사로 만들고 있었다. 박물관 유물이 모두 중국어로 표기되고, ‘동해’를 ‘일본해’로 적어 놓은 안내판을 보며 역사에 대해 너무 무관심한 우리의 태도를 반성하게 됐다. 중국은 조용히 움직이는 것 같아 보였지만 그것은 겉모습일 뿐이었다. 중국은 치밀하게 역사를 보존하고 밝혀내고 있었다. 발해 옛터인 목당강시 강변공원에 ‘팔녀투강비’가 위치해 있었다. 항일운동 당시 일본군 포위에 든 부대를 구하기 위해 8명의 여인들이 교란 작전으로 목단강에 뛰어들게 된다. 이중 안복순, 이봉선 2명은 조선족 여인인데, 그들을 기리기 위한 비석 및 조각상에서 조선족 여인들은 버선과 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많은 중국인들이 이곳에서 휴식과 함께 자녀들에게 그들의 역사교육을 시키고 있었다. 중국에서 자녀들에게 역사교육을 시키는 모습은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국가보훈처와 백야김좌진장군기념사업회가 건립한 한중우의공원의 임시개관식이 있는 오늘 해림시가 들썩인다. 한중우의공원은 중국 동북 3성에 살고 있는 조선족들의 애국심을 심어주고 그동안 등한시 했던 한국과 중국의 항일전쟁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 조성됐으며, 중국 동북지역 항일독립운동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600여점의 사진자료가 전시돼 있었다. 만주항일역사관의 전시를 맡은 박환(수원대)교수는 “만주항일역사관은 만주지역의 역사를 다룬 국내외 최초의 전시관”이라며 “만주지역에 많은 항일유적지가 있음에도 알려지지 않아 아쉽고, 러시아 지역까지 나가 항일운동을 펼쳤던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지역을 앞으로 더 발굴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기자단이 탐방한 곳은 하얼빈에 위치한 731부대이다. 731부대는 1939년 일본 육국참모본부 이시이 시로(石井四郞)중장이 생물학 무기를 제작하기 위해 만든 곳이다. 일행이 찾은 이곳은 중국 여러 곳에 분포돼 있던 731부대 중 유일하게 흔적이 남아있는 곳으로 731부대와 관련한 다양한 전시물이 마련돼 있었다. 일본군은 중국, 한국, 러시아의 민간인을 ‘마루타’라고 불리며 생체냉동실험, 진공실험, 신경실험, 가스실험 등 약 30여가지의 생체실험을 자행했다. 731부대의 악행으로 약3000여명이 희생됐다고 한다. 1936년부터 자행된 이들의 끔찍한 행동은 일본군이 태평양 전쟁에 패한 후 생체실험의 증거들을 없애기 위해 부대를 폭파를 하면서 끝나게 됐다. 약1 시간 동안 731부대에 대한 설명과 함께 영상물도 보게 됐는데, 그들의 만행은 영상 속에 고스란히 담겨져 돌아가고 있었다. 넓은 땅 중국에서 독립운동가들의 발자취를 따라가기에는 너무 짧았던 일정이었지만 나라를 위하는 선조들의 숭고한 정신만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만주 및 러시아 부근에 아직도 많은 항일유적지들이 독립후예들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역사는 그당시의 아픔, 상처, 그리고 그들의 함성을 기억하고 있다. 이제 우리가 그 기억을 되짚어봐야 할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