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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현산성 (동구 윤운동)
대전광역시 동구 용운동에 있는 이 산성은 해발 263m로 산 정상부에 만들었으며, 용운동에서 세
천동으로 넘어가는‘갈고개’에 있다.
산 정상을 둘러쌓은 형태로 되어 있으며, 둘레는 약 350m이다. 높이 2m의 동쪽 성벽은 네모난 돌
로 앞면을 맞추어 쌓았고, 서쪽 성벽은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부분적으로만 쌓았다. 성의 평면형태는
남북으로 긴 타원형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폭 4.8m의 남문터가 남아 있다. 정상부의 가운데에 움푹
파이고 군데군데 돌로 쌓은 듯한 흔적이 보이고 있는데, 이는 저장시설과 관련된 유적으로 짐작된
다.
토기와 기와 조각을 성 안에서 찾아볼 수 있어, 성을 쌓은 시기가 삼국시대임을 알 수 있게 해준다.
견두산성 (동구 효평동)
대전 동구 효평동에 있으며 해발 363m의 개머리산 또는 견두산의 꼭대기를 빙둘러 쌓은 산성으
로, 성의 둘레는 280m 정도이다.
성벽은 자연 암반을 이용하면서 자연석으로 쌓았는데, 남벽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성벽의 대부분이
무너져 내린 상태라 현재는 그 윤곽만을 확인할 수 있다. 성의 동쪽부분에는 지름 6m 정도를 높게
만들어 놓았는데, 지휘자가 망을 볼 수 있게 만들어 놓은 장대가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산성의 바로 밑으로는 신탄진-옥천 간의 도로가 동쪽과 북쪽의 띠를 두른 듯 휘감고 지나고 있으
며, 성의 동쪽으로는 대청호가 내려다 보인다. 이렇듯 이 산성은 도로와 수로를 감시하기 위해서 만
들어진 것으로, 계족산성의 안전을 위한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보이며 삼국시대의 성으로 추측된다.
계족산성 (대덕구 장동)
대전시 대덕구 장동 계족산(해발420m) 정상에서 능선을 따라 축조된 테뫼식 산성이다. 이 산성은
백제가 쌓은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1998∼99년 발굴을 통해 신라에서 쌓은 것으로 밝혀졌다.
산 성의 높이는 약 7∼10m 가량 되며, 동·서·남쪽에 문터를 만들었다. 성 안에서 삼국시대에 만든
큰 우물터가 발견되었고, 성내 건물터에서는 고려시대 기와편과 조선시대 자기편이 발견되어 조선
시대까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성쌓기 방법은 보은에 있는 신라 삼년산성(사적 제235호)과 같은 방식으로 쌓았다는 것이 발굴을
통해 밝혀졌고, 출토된 토기 중 가장 오래된 것이 6세기 중·후반의 신라토기임이 밝혀졌다. 이후에
나온 토기 형태도 백제계는 소수이며 다수의 신라계 토기가 보여, 한 때 백제가 점령하긴 했지만 신
라에 의해 만들어진 산성으로 조사되었다.
그러나 계족산성은 새로운 발굴 결과에 의해 신라가 쌓은 것으로 나타났으나 아직도 논란이 있다.
그러므로 6세기 중·후반 신라인지 백제인지는 분명치 않드라도, 당시 대전지방을 지키기 위한 전
략적상 중요한 위치에는 틀림이 없다.
계현산성 (동구 삼괴동)
대전광역시 동구 삼괴동의 송촌마을에서 옥천군 군서면 금양리로 넘어가는 계현재(닭재) 위의 북
쪽 봉우리(325m)에 축조된 테뫼식 석축산성으로 둘레 220m, 면적 60,793㎡이다. 성벽의 동남쪽은
무너지고 서북쪽이 일부 남아 있는데, 자연석을 깨뜨려 높이 5.2m로 쌓았으며, 성의 네 모퉁이에 치
성(雉城)·망대로 추정되는 높이 3.3m, 너비 6m의 돌출 부분이 있다. 남문·동문 터가 남아 있으며, 동
문터에서 닭재로 통하는 길이 나 있다.
성벽은 서쪽 성벽으로 꺾여 해발 320m의 능선 부분으로 올라가면서 쌓여 있다. 북쪽 성벽은 계속
동벽으로 이어지나 중간 부분부터 다시 해발 315m 지점에서 남벽과 만나고 있다.
축조방법은, 밑에서 1.8m까지는 약간씩 안쪽으로 오므리며 쌓다가 그 위 1.5m 정도는 거의 수직
으로 쌓아 성벽의 단면이 규형(圭形)을 이루고 있다. 동북쪽 성벽 부분도 비교적 잘 남아 있는데 바
깥 높이 4.2m, 안쪽 높이 0.8m, 성벽 아랫부분의 폭이 4.5m 정도이다.
성 안에는 남쪽 성벽 부분에 폭 6∼8m로 평탄지가 조성되어 있는데 이곳에서 백제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토기·기와 조각이 채집되에 백제에서 쌓은 성으로 짐작된다.
고봉산성 (동구 주산동)
대전광역시 동구 주산동 고봉산에 있으며 둘레 약 250m이고 표고 304m의 고봉산(古鳳山) 정상부
에 석축으로 축조된 테뫼식 산성(산 정상을 둘러 쌓은 성)이다.
동쪽의 암석부에는 너비 10m, 길이 30m 정도를 석축으로 보축한 부분이 남아 있다. 서쪽 돌출된
부분에 너비 3.5m, 길이 4m 정도의 치성(雉城 : 성벽에 돌출시켜 쌓은 성벽)이 부설되어 있다.
이 산성의 입지적 조건이 남쪽에 질티고개를 두고 질현성과 마주보고 있으므로 이 고개를 감시하
기 위하여 축조한 산성으로 판단되며, 질현성의 안전을 돕기 위한 구실을 했을 산성으로 판단되고
있다.
구성리 성 (유성구 구성동)
대전광역시 유성구 구성동에 있는 백제시대의 산성.둘레 약 500∼600m, 지정면적 4,760㎡. 순수
한 토축산성으로 동북쪽과 서쪽에 두개의 문지가 남아 있고, 가운데는 오목하게 말안장 모양을 이루
고 있으며, 창고터와 건물터가 있다.
이 산성은 《삼국사기》지리지에 보이는 우술군(雨述郡)에 속해 있던 노사지현(奴斯只縣)의 치소
로 추정되고 있다. 즉, 백제가 멸망한 2년 뒤인 662년 백제부흥군이 내사지성(內斯只城)을 근거로
하여 신라에 대항하였는데, 이는 노사지현과 음이 서로 비슷하여 같은 지점으로 알려져 있다.
백제부흥군은 이 성을 근거로 나당연합군이 웅진(熊津 : 지금의 公州)과 사비(泗沘 : 지금의 扶餘)
로 통하려는 진로를 차단한 것으로 전해진다.
노고산성 (동구 직동)
대전광역시 동구 직동 피골에 산위에 있는 석루(石壘)로서 표고 250m의 산위에 둘레 300m 이다.
이 산성은 테뫼식(산 정상을 둘러 쌓은 성) 석축산성으로, 남북을 장축으로 한 타원형을 하고 있으
나 성체(城體)의 대부분은 무너져 있다.
성안에서는 파상문토기, 적색토기, 격자문토기 등이 수습되고 있으며 백제시대 산성으로 추정되고
있다.
문터는 현재 산성내 통로로 이용되고 있는 남문지만이 확인되고 있으며, 그 너비는 2.3m이다.
능성 (동구 가양동)
대전광역시 동구 가양동에 있는 해발 310m인‘비름들고개’ 산 정상부에 돌로 쌓은 테뫼식 산성으
로 성둘레는 300m 정도이다. 테뫼식은 산의 능선을 따라 거의 수평이 되게 한바퀴 둘러 쌓은 산성
으로 옆에서 본 모습이 테를 맨 모양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성벽의 대부분은 무너져 내렸지만 너비 5.1m의 동문터와 너비 3m의 남문터가 있다. 동쪽 성벽과
남쪽 성벽이 직각으로 만나는 부분에 성벽이 바깥쪽으로 튀어나오도록 쌓은 치성의 흔적이 남아 있
다. 특히 동문터 남쪽에 있는 치성은 성벽 높이가 3.7m로 자연 경사면을 따라 처음 1m 가량은 수직
으로 쌓다가 급히 안쪽으로 경사를 주어 오므려 쌓은 후, 다시 수직으로 쌓았다. 성벽은 앞부분을 약
간 다듬은 돌을 사용하였는데, 이 부분의 치성은 밖으로 5m 가량 튀어나오게 쌓았고 너비는 5.5m이
다.
성안에는 별다른 시설물은 남아있지 않으나, 곳곳에서 삼국시대의 토기편이 발견되고 있다. 동쪽
성벽부분에 남아있는 치성을 통하여 동쪽 방면에 대한 방어를 하기 위해 이 성을 쌓은 것으로 여겨
진다
덕진산성 (대전광역시)
이 산성은 대전시광역시에서는 덕진 산성이라 칭하고 유성구에서는 안산동 산성이라고 각기 다른
주장을 하고 있으며 행사도 각기 다르게 하고 있는 실정이다.
내용은 <안산동산성>을 참고
도솔산 보루 (서구 도안동)
대전광역시 서구 도안동에 있는 백제 보루이며 삼국시대의 소규모 석축 보루로, 백제의 산성 및 군
사시설의 구체적인 양상을 이해할 수 있는 자료이다. 인근 월평산성과 연계하여 삼국시대 방어체계
를 살필수 있는 자료로 대전의 산성 연구에도 가치가 높다.[
마봉재보루 (서구 갈마동)
대전광역시 서구 갈마동 마봉재 보루는 삼국시대의 소규모 석축 보루로, 백제의 산성 및 군사시설
의 구체적인 양상을 이해할 수 있는 자료이다.
인근 월평산성과 연계하여 삼국시대 방어체계를 살필수 있는 자료로 대전의 산성 연구에도 가치가
높으며 또한 무문토기편도 확인되고 있어 선사시대 고지성 취락에 대한 연구에도 활용가치가 높다.
마산동산성 (동구 만산동)
대전광역시 동구 마산동에 있는 백제시대의 성곽으로 해발 220m의 산 정상부에 돌로 쌓은 테뫼
식 산성으로 둘레는 200m이다. 성벽이 무너져 원래의 모습을 찾을 수 없지만 남쪽 성벽 일부에서 9
단 140m 정도가 석축(石築)을 유지하고 있다.
산성의 동북쪽에는 장수가 올라 서서 전투를 지휘하던 장대(將臺)로 추정되는 다른 성벽보다 한층
높은 폭 4m, 높이 2m 규모의 석축이 남아 있다. 또한 서남쪽 성벽의 모서리 부분에도 이와 비슷한
석축이 있는데 산 능선에 위치한 것으로 보아 취약지점을 보강하기 위한 시설로 짐작된다.
삼국시대 삼국간의 직접적인 마찰 및 이해 상충으로 전투가 잦았기 때문에 곳곳에 많은 산성이 축
조되었는데 지형상의 특징으로 평지성에 비해 산성이, 토축(土築)보다 석축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특히 백제의 중심지였던 대전과 충청도 일대에는 당시에 축조된 수 많은 산성이 분포하는데 견두
산성·계현산성·고봉산성·계족산성·백골산성·삼정동 산성 등이 있다. 망원동 산성도 이 중의 하나로
서북쪽으로는 노고산성, 서남쪽으로는 계족산성과 연결된다.
백골산성 (동구 신하동)
대전광역시 동구 신하동에 있는 표고 340m의 백골산 정상부에 축조된 둘레 약 400m의 테뫼식
(산 정상을 둘러 쌓은 성) 석축산성이다. 가파른 지형에 축조된 관계로 성벽은 완전히 무너져 내려
원상을 확인할 수 없을 정도이다.
산세가 대단히 험하므로 지세가 완만한 부분만 군데군데 축조하고 나머지는 자연지세를 이용하고
있다. 이 산성은 서쪽으로는 계족산성(鷄足山城, 사적 제355호), 동쪽으로는 환산성(環山城)과 연결
되는 중간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전략적 요충지이다.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 “백골산은 대전 동쪽 약 4리(里)의 옥천군계(沃川郡界)를 이루고 있
는 산 위에 있는 석루(石壘)로서 둘레는 약 220칸(間)”이라 하였고, 《문화유적총람》에는 “높이 34
4m의 백골산에 있는 산성으로 정상부에 석성이 있는데, 백제시대 축조된 것이라 하며, 둘레는 약39
6m이다.
백제와 신라가 싸워서 사람이 많이 죽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 전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보문(모)산성 (중구 대사동)
대전광역시 중구 대사동의 보문산(해발 406m) 정상 부분의 산세를 이용하여 쌓은 성으로, 둘레는
300m이다.
성벽은 자연지형에 따라 간단하게 다듬은 네모난 돌을 이용하여 쌓았으며, 성벽 바깥면은 조금씩
안쪽으로 둘러쌓아 쉽게 무너지지 않도록 하였다. 암반으로 형성된 동쪽과 북쪽의 급경사면에는 별
도로 성벽을 쌓지 않았다. 발굴조사 결과 남문터가 확인되었고, 현재 통행로로 사용되는 북문을 통
해 고려시대에는 성문폭을 좁혀서 사용한 것을 알 수 있다. 동쪽 성벽 아래에서는 청동기시대 후기
의 주거지 유적과 민무늬토기, 덧띠무늬토기 등이 발견되었다.
이 성은 백제 말에 신라와의 전투가 치열하던 때에 만들어진 것으로, 인근에 있는 산성들과 쉽게
연락을 취하기 위한 목적에서 만든 것으로 보인다
비파산성 (동구 소호동)
대전광역시 동구 소호동의 비파재 북쪽에 표고 300m의 산위에 테뫼식(산 정상을 둘러 쌓은 성)으
로 쌓은 석축산성이다. 고개이름을 따서 비파산성 또는 동네이름을 따서 소호동산성(所好洞山城)이
라고 부르기도 한다.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 “비파치성(琵琶峙城)은 대전 남쪽 약 2리(里)되는 산위에 있는 석루
(石壘)로서 둘레 약220칸(間)”이라 하였고, 《문화유적총람》에는 “비파산성은 산내면 이사리와 대
별리 그리고 소호리의 경계에 있는 산에 석축으로 축조한 성으로 모양이 비파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
름이다. 허물어져 원형을 알 수 없으나 서남쪽에 문지가 있었던 것 같고 봉수대도 있었다.”고 한다.
이 성에는 백제 토기편과 와편이 출토되고 있으며 백제시대의 산성이다.
현재 출입하는 남문지였던 것으로 추정되며 그 너비는 2.2m이다.
이 산성은 보문산성(寶文山城)과 동쪽에 있는 능성(陵城), 삼정동산성(三丁洞山城)과 연계되는 산
성으로 판단된다.
사정동산성 (중구 사정동)
대전광역시 중구 사정동에 있으며 보문산(寶文山) 사정공원 입구에서 서쪽으로 있는 해발 160m의
산 위에 축조되어 있는 테뫼식 산성이다. 백제의 산성으로 추정된다. 둘레 약 350m의 성벽은 거의
허물어졌고, 지금은 그 윤곽만 확인할 수 있다.
성안은 서쪽으로 향하여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다. 동남쪽 높은 곳에서는 건물터가 보인다. 성안
의 규모는 약 6,000㎡이다.
이 성은 대전에서 진산으로 통하는 길목을 지키기 위하여 쌓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남쪽으로는 서
구 봉곡동의 흑석동산성(黑石洞算城:대전기념물 15), 북쪽으로는 유성산성이라고도 불리는 월평동
(月坪洞)의 월평동산성(대전기념물 7)과 연결되고 있으며, 대전 동쪽의보문산성, 삼정동산성 등과도
연결되는 지점이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사정책(沙井柵)이 이 산성이라는 견해도 있다.
삼정동산성 (동구 판암동)
대전광역시 동구 판암동 해발 240m의 산 정상부에 축조되어 있다. 가양동 비름들고개 위에 위치
한 능성(陵城:대전기념물 11)에서는 약 2.5㎞, 용운동 갈현성(碣峴城:대전기념물 12)에서는 약 1.5
㎞ 떨어진 곳이다.
이 산성은 테뫼식 석축 산성으로 성 둘레가 약 200여m이다. 성의 평면 모습은 남북으로 긴 타원형
이고, 내부 면적은 약 3180㎡이다. 성벽은 대부분 허물어져 원래의 모습을 파악하기 힘들다.
남벽에서 일부 협축(夾築)의 흔적이 남아 있는데, 이곳에서의 성벽 폭은 5.2m였다. 산 능선이 지나
고 있는 동북쪽과 서남쪽의 성벽에서 각기 4.5m×5.7m, 7m×4.3m 정도의 돌출부가 있는데, 성의
취약 지점에 설치되는 치성(雉城)의 흔적으로 보여진다. 또한 서쪽 성벽 가까운 곳의 주변을 감시하
기 위하여 설치한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산성은 동구 비파치 옆의 비파산성(琵琶山城)과 마주하고 있으며, 대전 동쪽의 보문산성, 사정성
(沙井城)과 연결된다. 옥천(沃川) 방면으로 통하는 길목을 지키기 위하여 쌓은 것으로 삼국시대 백제
의 성터로 추정된다.
성북동산성 (유성구 성북동)
대전광역시 유성구 성북동 산장산에 원내동에서 넘어오는 남쪽 고개로 표고 230m의 산위에 쌓은
퇴뫼식(산 정상을 둘러 쌓은 성) 석축산성이다.
문지는 동북벽 모퉁이와 북벽 중간에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동쪽 성벽과 남쪽 성벽은 자연
지세를 이용하면서 삭토의 방법으로 축조하였는데 그 형태조차 알아 볼 수 없는 정도이다.
성 안에는 건물터로 보이는 대지와 우물터가 남아 있으며, 백제시대 토기편들을 용이하게 수습할
수 있다. 성 안에는 무연고 묘지가 조성되어 있어 성의 파괴가 심하다.
이 산성은 일명 산장산성(産長山城)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일부 학자에 의하여 두량이성(豆良伊
城)이라고 비정되고 있기도 하다.
성치산성 (동구 직동)
대전광역시 동구 직동에 있으며 계족산성에서 북동쪽으로 6㎞ 떨어진 곳에 해발고도 210m의 성
치산 정상부에 있는 테뫼식 석축산성이다.
산성의 평면형태는 긴 타원형이며, 성의 둘레는 160m이다. 성벽은 대체로 해발 210m의 등고선을
따라 축조되었으며, 거의 다 허물어져 원래의 모습을 파악하기 어렵다. 특히 서쪽 성벽 부분은 완전
히 무너져 성벽의 통과선만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동북쪽 성벽에서 남쪽 성벽에 이르
는 부분은 일부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어 축조방법 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성의 축조방법은 내외협축(內外夾築)이다. 즉 바깥 성벽의 높이는 2.4m이고 안쪽에는 1∼2단의
석축이 있었음이 확인되며, 성벽의 폭은 4.3m였다. 성벽은 반듯하고 납작한 돌의 앞면을 맞추어 가
로쌓기로 쌓았고, 돌의 크기는 50㎝×20㎝ 내외이다.
성안의 시설물로는 남문터가 남아 있다. 즉 서남쪽의 능선을 방어하기 위하여 석루(石壘)를 높게
쌓고 그 옆으로 3m 폭의 문을 만들었다. 한편 성안의 중심부에는 한단 높은 작은 봉우리가 형성되어
있다. 이는 장대가 있었던 흔적으로 보이며, 봉우리 중앙에 지름 6.2m 가량 움푹 들어간 시설이 있
는데, 이는 봉수나 저장시설로 추정된다.
소문산성 (유성구 신동)
대전시 유성구 신동 속골부락의 북쪽 해발 200m의 산 정상에 위치해 있는 산성이다.
성의 평면형은 거의 원형에 가깝고 성의 둘레는 350m 정도로 테뫼식 산성 중에는 비교적 소규모
에 속한다. 성벽 안쪽에 5∼10m의 평탄지가 있으며, 성벽의 바깥쪽 높이는 5m 안팎으로 추정된다.
성벽의 윗부분에는 석재 일부가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따라서 외견상으로는 돌을 쌓아 성을 만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동벽과 남벽의 파괴된 부분에서 1∼4단의 석축 하부가 순수한 토축(土築)으
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처음에는 흙으로 쌓았다는 것이 확인된다. 즉 흙으로 쌓았던 곳에 후대에
돌을 쌓아서 성을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성벽에는 2개소의 문터가 있었던 것으로 조사되었는데 남
문터 폭은 약 4m, 동문터 폭은 3m 정도이다.
성내에는 평탄한 대지가 거의 없는 것으로 보아 건물터가 없었던 듯한데 다만, 동쪽벽 가까운 곳의
정상부에 원형 샘물터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 성내에서는 삼국시대에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
는 토기편이 발견되고 있으며, 백제시대의 대표적 축성법이다.
이 산성은 대전쪽에서 내려오는 갑천지역과 신탄진동을 지나온 금강 본류 지역을 지키던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일대의 육로와 수로를 방어하는 임무를 맡았고 인근의 적오산성, 안산산성
등과도 연계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성봉유적성
대전시 동구 비룡동 신성봉 정상에 이 유적은 돌을 쌓아 만든 둘레 120m의 산성이다.
동, 서, 북벽은 무너져 내렸으나, 남벽은 1.5∼2m 높이의 벽이 남아있다. 평탄한 지형이 거의 없는
유적 내부에는 기이하게 생긴 큰 바위들이 흩어져 있으며, 각종 글을 새긴 흔적을 볼 수 있는데, 산
성의 기능으로 만들었다기보다 신앙 등 특수 목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글들은 조선시대의 것으로 짐작되나 유적 내에서 오래된 토기 파편들이 발견되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그 유래는 삼국시대로 올라갈 것으로 추정된다.
안산동산성 (유성구 안산동)
대전광역시 유성구 안산동에 있는 성으로 유성에서 세종특별자치시 대평동과 조치원으로 가는 국
도를 따라가면 안산교(案山橋)가 나오며 그곳에서 좌측 표고 226m의 정상에 둘레 약 600∼800m의
테뫼식(산 정상을 둘러 쌓은 성) 석축산성이다.
성은 자연지세를 이용하여 내탁외축(內托外築)하였으며, 성안 일부에는 호(壕)가 남아 있다.
서쪽 성벽의 일부는 내벽 높이 1.1m, 외벽 높이 6.3m, 상부 너비 2.3m가 남아 있다. 이 산성은 3층
의 계단형으로 축조하였으며, 석축을 돌려 3중의 산성으로 보인다. 성 중앙에는 약 100m를 원형으
로 쌓은 부분이 남아 있다.
서문지가 뚜렷하게 남아 있는데 너비는 4.9m이고, 문지의 기단 너비는 5.7m이며, 문지 성벽의 높
이는 5m이다. 동쪽 성벽의 끊어진 부분은 현재도 통로로 이용되고 있다.
성안에서는 백제 토기편과 와편을 수습할 수 있었으며 백제시대의 성이다
우술산성 (대덕구 읍내동)
대전광역시 대덕구 읍내동 갑천변에 해발 145m의 테뫼식으로 쌓은 토성이다.
산성의 평면 모습은 삼각형에 가깝고 둘레는 580m이다.
서, 북벽은 석재가 일부 밖으로 나와 있고, 동벽은 토루(土壘)의 모습을 이루며, 바깥면의 높이가
2.2m 정도이다. 남벽은 토석혼축(土石混築)의 형태를 하고 있으며, 안쪽에서의 높이는 2.3m이고,
바깥 벽의 높이는 3.4m이다.
문터는 남문터만 확실히 알 수 있으며 문폭은 3.6m이고, 문을 나서면 평탄한 길이 이어지면서 회
향교가 있는 효자골에 이르게 된다. 이 남문터의 서쪽 10m 되는 곳에 수구(水口)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지금은 무너져 원래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월평동산성 (서구 월평동)
대전광역시 서구 월평동에 있는 해발 137.8m의 야산 정상부를 따라 쌓은 포곡식 산성으로, 성둘레
는 약 710m이다. 포곡식 산성은 성곽이 하나 또는 여러 개의 계곡을 감싸며 쌓은 산성을 일컫는다.
성벽은 거의 붕괴되었지만 성을 쌓은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있고, 산 능선을 따라 축조된 성벽은 자
연석을 이용하여 쌓았으며, 서벽의 일부에서는 바깥벽·안벽이 남아있다.
성문터는 동, 서, 북벽에 각각 한 곳씩 남아있는데, 동문터의 너비는 5m이고, 서문터는 너비 3.6m
로 서벽의 중간 부분에 있다. 북문터는 너비 3m로 성에서 가장 낮은 골짜기에 있는데, 부근에 매우
평탄한 곳이 있어 물길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안에는 성벽을 따라 너비 7∼12m의 물길인 도
랑이 있으며, 곳곳에는 평지가 많아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백제의 집자리, 저장구덩이, 성벽, 말뚝을 박아 생긴 구덩이 등 유구가 확인되었다. 또한 세발토기
(삼족토기), 그릇받침(기대), 기와, 말안장이 출토되어 월평동 산성의 사용시기가 백제시대임을 알
수 있게 하였다.
이현동산성 (대덕구 이현동)
대전광역시 대덕구 이현동에 남북 방향의 봉우리 2개를 중심으로 말안장 모양의 평면형으로 축조
되었다. 테뫼식(머리띠식)으로 석축하였고 내탁외축(內托外築)하였다. 성벽은 높이 1.2m의 남벽 일
부를 제외하고 대부분 무너져 내렸다. 성벽 축조는 조잡하게 편마암으로 약간씩 안쪽으로 물려서 쌓
았다. 북벽의 통과 지점은 능선의 경사도가 완만하여 석루(石壘)를 높게 쌓았다.
저장시설이나 봉수시설로 짐작되는 크기 5m×6m, 깊이 80㎝의 성안 남쪽 봉우리와 크기 4m×5m,
깊이 80㎝ 정도의 북쪽 봉우리가 있다. 계족산성에서 북쪽으로 약 1.3㎞ 떨어진 곳에 있으며 백제시
대의 산성이다.
장동산성 (대덕구 장동)
충청남도 논산시(論山市) 양촌면(陽村面) 산직리(山直里) 장골의 동쪽에 있는 산성으로 높이 2~3
m, 둘레 길이 600m이다. 남북 방향으로 뻗어내린 지맥의 남쪽 끝에 있는 높이 175m의 북쪽 산봉우
리와 143m의 남쪽 봉우리를 에워싸면서 축조된 석축 산성으로 장동산성이라 부르기도 한다. 동고
서저(東高西低)의 지형을 이루고 있어 동벽은 두 산봉우리를 잇는 능선 정상부를 지나는 반면에 서
벽은 산의 중턱까지 내려와 있다. 남벽과 북벽은 경사면에 축조되어 동벽과 서벽을 이어준다.
평면으로 볼 때 말의 안장(鞍裝)형태를 띠고 있다. 성벽 대부분이 붕괴되어 일부의 구간에서 축성
법을 살펴볼 수 있는데 자연할석을 이용한 바른층 쌓기를 하였으며 지형에 따라 성벽 안팎을 쌓은
협축식(夾築式)과 바깥쪽만을 쌓은 편축식(片築式) 축성법을 섞어 축조하였다.
동벽과 북벽이 만나는 모퉁이에는 치(雉, 성벽에 기어오르는 적을 쏘기 위해 성벽 밖으로 내밀어
쌓은 돌출부)를 쌓았던 흔적이 있으며 동문(東門)과 서문(西門), 그리고 건물지도 확인되었다. 성 안
에서는 백제 세발토기 조각과 개배(蓋杯, 뚜껑접시) 조각, 기와 조각, 조선시대 자기 조각 등 다양한
유물이 발견되었다. 황산벌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나야 하는 통로에 있어 황산벌로 침투하는 신
라군을 막기 위해 축조한 백제시대의 성으로 추정된다.
적오산성 (유성구 덕진동)
대전광역시 유성구 덕진동에 있는 대덕연구단지 에너지연구소 남쪽에 위치한 표고 255.1m의 적
오산 정상부에 축조된 산성이다.
행정구역 이름을 따서 일명 ‘덕진산성(德津山城)’이라고 부르고 있다.
산성으로 오르기 위해서는 동남쪽 경사면의 능선을 따라 나 있는 오솔길로 올라가게 되어 있는데
최근 등산로가 개설되어 오르고 내려오기가 편리하게 되어 있다.
성벽은 산의 자연지세를 이용하여 테뫼식으로 축조하였고, 성체(城體)는 거의 붕괴되었으나 윤곽
은 뚜렷이 남아 있다. 성의 평면형태는 마름모꼴이며 둘레는 약 730m이다. 성은 표고 255m의 정상
부를 기점으로 하여 등고선을 따라 축조되어 등고선 230m의 북단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이곳에 북
문지가 있다. 이곳에서 출토되는 유물들은 다양한 기와조각과 토기조각들인데, 이들은 백제시대 후
기부터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에 해당되는 유물들이다. 이 유물들은 이 산성의 존속 연대를 시사해
주는 자료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공주목 고적조에 이 산성이 위치한 곳은 고려시대의 덕진현(德津縣)이었는
데 통일신라 시대에는 적오현(赤烏縣)이라고 하였고 백제시대에는 소비포현(所比浦縣)이라고 불렀
다고 전한다. 따라서 이 산성은 백제시대 소비포현에 소속된 산성이었음을 알 수 있다.
질현산성 (대덕구 비래동)
대전광역시 대덕구 비래동 질티고개 북쪽 정상의 산세를 이용하여 돌과 흙을 섞어 쌓은 산성으로,
둘레는 800m이다. 모서리를 다듬은 사각형의 돌로 성벽을 쌓았는데, 아래에서부터 약간씩 안으로
들여 쌓았고, 군데군데에는 조그만 돌을 끼워넣었다.
동·서·남벽 3곳에 문터가 남아있는데, 이중 남문터는 너비 3.8m로, 성으로 드나드는 가장 중요한
통로로 이용되었다. 남문터 주변에 특별한 시설은 없지만 10m 정도의 땅에 항상 습기가 많은 것으
로 보아, 전에 연못이 있었던 자리로 생각된다.
성 안에서 백제, 신라의 토기조각과 조선시대 자기조각이 출토되어 이 성이 삼국시대부터 조선시
대까지 계속해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성을 중심으로 북쪽 능선에는 6개의 작은 성이 있는데,
이것은 질현성을 보완하기 위해 쌓아진 것으로 보인다."
흑성동산성 (서구 용촌동)
대전광역시 서구 용촌동에 흑석동역(黑石洞驛)의 서쪽에 있는 표고 197m의 고무래봉 정상부에
축조된 둘레 470m의 석축산성이다. 성벽이 거의 무너졌으나 윤곽만은 뚜렷하게 남아 있다.
남쪽 성벽은 표고 185m 능선상에 축조하였는데 서쪽 성벽쪽으로 잠차 내려가 표고 175m 부분까
지 내려가다가 다시 올라가 표고 180m 부분에 이르러 꺾여져 북쪽 성벽을 축조하고 있다.
북쪽 성벽은 거의 일직선으로 올라가 표고 195m의 정상까지 이르렀으며, 여기서 거의 수직으로
꺾여서 이루어진 동쪽 성벽은 표고 181m 부분까지 내려와 남쪽 성벽과 접하고 있다. 북쪽 성벽을
제외한 3면의 성벽에는 너비 6∼9m 가량의 평탄지가 있어 건물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지역에서는 백제시대 개배편(蓋杯片)과 토기편들이 산재해 있으며, 선조문(線條文)·격자문(格
子文) 등의 기와편을 다량 채집할 수 있다. 성벽은 자연할석으로 쌓았는데 거의 붕괴되었으며, 동쪽
성벽의 상부 너비는 5.2m이다. 동쪽으로 약간 치우친 성벽에 너비 2.8m의 남문지가 남아 있다.
이 산성과 관련해서 《삼국사기》를 비롯한 여러 문헌에는 ‘진현성(眞峴城)’으로 표기되어 있어 백
제시대 진현현(眞峴縣)과 관련 있는 산성으로 알려져 있다. 이와 같은 연유로 일명 진현성이라고 부
르고 있다. 이 산성은 백제의 산성이며 이곳을 근거로 해서 백제부흥군이 활약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