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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계 박세당이 수락산에 들어와 자리를 잡은 석천동(石泉洞)이다.
그는 이른 나이인 40세(1668)때부터 수락산에 은거하기 시작했다. 석천동(石泉洞)이란 지명 자체가 그가 붙인 이름이다.
석천동은·돌과 샘이 어우러진 동네(石泉洞)라는 의미라고 한다. 그는 말년에 이곳에서 농사를 짓고 후학을 양성한다.
石泉洞 암각문이 있는 언덕바위 근처에서 궤산정 잔해를 멀리서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서계(西溪 )도 수락산의 개울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수락산 주인이라고 자처할 만한 이곳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그는 석천동에서 그 어떤 일보다 중시한 것은 역시 김시습에 대한 추모사업이었다.
박세당의 매월당을 향한 추념은 절실하였다. 이는 그의 정신세계에 대한 공감에서 비롯되었다.
곧 쓰러질 것 같았던 궤산정(簣山亭)이다. 삼태기 궤(簣) 뫼 산(山) 궤산정이다.
“아홉길 산을 만드는데 마지막 한 삼태기의 흙이 모자라면 안 된다.(爲山九 , 功虧一)"
‘궤산’은 『서경(書經)』의 글에서 따온 것이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박세당(1629 ~ 1703은 제자들을 가르치던 정자로 17세기에 건립되었다.
궤산정은 기와로 육각지붕을 얹은 육각형 모양의 작은 정자이다.
이 궤산정은 2014년 5월 현장 답사 때 곧 무너질 것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이번 답사에서는 다 쓸어질 것같아 보이던 낡고 낡은 궤산정은 헐리고 온데 간데 없다.
그 언덕 바위에 새겨진 '石泉洞' 암각문은 여전히 살아있다.
그 앞 넓은 바위 위에는 ‘서계유거(西溪幽居)' 네 글자가 암각되어 있다.
서계유거(西溪幽居)는 곧 '서계가 한적하게 산다'는 뜻으로 말년의 삶을 웅변한다.
石泉洞 西溪幽居 聚勝臺 모두가 서계 박세당의 친필이라고 전한다.
궤산정이 있던 그 언덕 우측의 넓은 바위의 앞면에는 취승대(聚勝臺)라고 암각문이 새겨져 있다.
취승대는·그 뜻이 경치가 좋은 곳( 聚勝臺)이라고 한다.
수락산 취승대(聚勝臺)는 바로 서계 박세당이 스스로 이름을 지은 작은 언덕이다.
벼슬에서 물러나 수락산으로 들어와 살면서 그는 주변의 산 언덕 물 바위 등의 이름을 하나씩 붙였다.
"주인은 각건에 야복을 하고 지팡이를 짚고 신발을 끌면서 바위에 걸터앉아 발을 씻는다.
아침에 노닐고 저녁에도 노닐었다. 동대에서 놀지 않았으면 서대에서 놀고 남대에 오르지 않았으면 서대에 올랐다.
이 네 곳의 석대는 아침저녁 노니는 장소일 뿐만이 아니다. 진실로 사시사철 즐거움이 이곳에 있다. "
서계 박세당은 자신이 살고 있는 삶의 장소에서 즐거움을 찾고 있다.
매월당을 기리기 위해 세운 청풍정 앞 계곡 넓직한 바위에는 웅혼한 필치로 호쾌하게 새겨놓은 암각문 '수락동천(水落洞天)'이다.
서계 박세당이 이곳에 은거를 하자 선생을 따르는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왕래하였다고 한다.
처남 남구만도 자주 찾아와 이곳에서 서계 박세당과 대담을 많이 나눴다고 전한다. 그 남구만이 초서로 남긴 글씨라고 한다.
김시습의 글씨라는 또다른 설도 있다.
작은 계곡을 옆으로 조금 오르면 우측으로 청풍정유지라 쓰인 안내문과 4개의 작은 돌이 보인다.
아마도 저 주춧돌 위에 정자가 자그마하게 올려져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청풍정은 노강서원(鷺江書院) 앞에 있는 정자로 현재는 주춧돌만 남아 있다.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이 삼각산 중흥사(重興寺)에서 공부하다가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했다는 소식을 듣고
책을 불사르고 사육신의 시신을 거둔 후에 처음에는 청풍정에 숨었다가 폭천정사(瀑泉精舍)로 옮겨 은둔하였다고 한다.
청풍정은 서계(西溪) 박세당(朴世堂)선생이 매월당 김시습을 추모하기 위해 영당(影堂)을 짓고 앞에 세운 정자로
제자들과 학문을 강론하던 곳이다. 주추의 크기는 높이 90㎝, 아래 폭 60㎝, 위 폭 38㎝ 정도이며
모두 네 개로 되어 있는데 주추간의 거리는 가로 2.2m, 세로 2.4m인 것으로 보아 정자의 평면적은 1.6평 정도로 추측된다.
박세당이 직접 쓴 <매월당영당권연문>에 그사연이 적혀있다.
"청한자(김시습의호)의 높은 뜻을 세조도 일찍이 알아 그를 모시려했으나 도망하여 일부러 미친척하니 큰뜻이 그속에 있다.
이제 그뜻을 다시 기리려함이여.부자(김시습)는 홍산(부여)무량사에서 일생을 마치니 스스로 초상화를 그려
이절에 모셔두고있다. 이제 영당을 세움에 이곳으로 옮겨 김시습의 고혼을 위로하려한다."
서계 박세당의 묘이다.
조선 후기 최고 문신의 무덤답게 자연 언덕 강(岡) 사초지(沙草地)가 우람하다.
봉분은 둥근 모양을 하고 있는 선비들의 묘와는 달리 사각형(方形)을 하고 있다.
서계 박세당의 묘비에도 '有明'이라는 글자는 없다. 정실부인은 정경부인 의령 남씨 남구만의 누이이다.
계실부인 정경부인 광주 정씨는 전라좌도수군절도사를 지낸 정응규의 5대 손이다. 겸재 정선도 그의 5대 손이다.
서계자천묘표이다.
서계초수는 네 살때 아버지를 여의고 여덟 살에 왜구의 침략을 받아 외롭고 가난하여 학문할 때를 놓쳤다.
10여세가 되어 비로소 중형에게서 수업을 하였으나 또한 스스로 힘쓰지 않았다. 현종이 등극한 해 서른 둘의 나이로 과거에 올라
벼슬을 시작하였다. 8-9년을 해보니, 재주와 힘이 모자라 세상에서 무슨 일을 하기에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 세상사도 나날이 허물어져 바로 잡을 수가 없게 되었다. 이에 벼슬을 버리고 떠나 동대문밖에 살게 되었다.
도성에서 30리 떨어진 수락산 서쪽 골짜기다. 그 골짜기 이름을 석천동이라 하고, 인하여 스스로 서계초수라 하였다.
개울에 임하여 집을 짓고 울타리도 치지 않았다. 복숭아나무 살구나무 배나무 밤나무를 심어 집을 빙 두르게 하였다.
오이를 심고 밭을 일구었다. 땔감을 팔아 생계를 꾸렸다. 농사철이 되면 직접 밭두둑에 나가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호미와 가래를 둘러맨 이들과 어울려 따라 다녔다.
<西溪自撰墓表>
樵叟姓朴。世堂其名也。其先兩世貞憲,忠肅。並顯於仁祖之世。叟生四歲而忠肅公棄背。八歲而遭寇難。孤貧失學。及十餘歲。
始受業於其仲兄。亦不自力。年三十二。當顯宗初元。用科第登仕。列侍從八九年矣。自見才力短弱。不足有爲於世。世又日頹。
不可以救正也。乃解官去。退居東門之外。去都郭三十里水落山西谷中。名其谷石泉洞。因自稱西溪樵叟。臨水爲屋。不治籬樊。
植以桃杏梨栗繞其居。種爪開稻畦。賣樵爲生。當農月。身未嘗不在田間。與荷鋤負耒者相隨行。初亦間赴朝命。後屢召不起。
居三十餘年而終。壽踰七十。葬於其所居宅後百數十步。嘗著通說。明詩書四子之指及註老莊二書以見意。蓋深悅孟子之言。
以爲寧踽踽涼涼無所合以八。終不肯低首下心於生斯世爲斯世。善斯可矣者。此其志然也。
서계 박세당 묘 잉(孕) 뒤쪽에서 바라 본 도봉산은 그 기세(氣勢)가 만만치 않았다.
아들 정재 박태보 묘에서 보던 도봉산의 모양과 느낌과는 또다르게 다가왔다.
서계가문의 탄생
서계가문이 박상충-박소로 이어지는 반남박씨 대종(大宗)에서 분리되어 독자적인 계파를 형성한 것은
박세당의 조부 박동선(朴東善, 1562∼1641) 때부터였다. 박응천의 6자였던 박동선은 ‘동(東)’자 항렬의 16명 가운데
학식이 출중하고 환력도 가장 화려한 인물이었다. 그는 1589년(선조 22)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듬해인 1590년(선조 23)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 설서, 정언, 대사간, 대사헌, 이조참판, 형조판서 등을 거쳐 의정부 좌참찬을 역임하였다.
탁월한 학식과 문장으로 민세백, 이정구, 이시발, 서성, 김세렴 등 당대의 문사들과 교유하였다.
좌참찬을 역임한 후에는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감으로써 신하로서 최고의 명예를 누리기도 했다.
또한 종실 청성군 이걸의 딸과 혼인하여 왕실과도 일정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그에게도 위기와 시련은 있었다.
박동선은 광해군대에 조야를 들끓게 하고 인조반정의 중요한 구실을 제공한 폐모론(廢母論:인목대비폐위 논쟁)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다. 당초 대북계열 대신들은 박동선에게 폐모정청(廢母庭請:폐모건의)에 정식으로 참여할 것을 강요했다.
그러나 그는 두문불출하고 응하지 않았다. 심지어 휘하의 서리들이 그를 위해 문서를 조작하면서까지 정청참여원(庭請參與願)을
제출하였으나, 그는 이를 단호히 부정하고 인목대비에 대한 절의를 맹세하였다.
그 결과 조정에서는 박동선의 유배를 논의하였고, 결국 그는 광진에 별업(別業)을 마련하고 한동안 세상과 단절된 삶을 살았다.
박동선의 이러한 행적은 결국 그의 아들 박정(1596∼1632)이 인조반정에 참여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박동선의 외아들로 태어난 박정은 1615년(광해군 7) 진사시를 거쳐 1619년(광해군 11)에는 문과에 급제하여 조부 이래의 사환가의
전통을 계승하였다. 그는 광해군의 난정(亂政), 대북정권의 전횡, 거기에 따른 아버지의 수난을 목도하면서 인조반정에 참여하였고, 마침내 정사공신(靖社功臣) 3등에 책훈되며 금주군(錦洲君)에 봉해졌다.
인조반정은 향후 전개되는 300년 서인정권의 화려한 서막인 동시에 서계가문에 있어서도 커다란 전환의 계기가 되었다.
관직에 종사하면서도 청빈을 고수하여 가산을 모으지 않았던 서계가문에는 박정의 훈공에 따라 명예와 함께 사패지(賜牌地)를
비롯한 막대한 특전이 내려졌다. 박정의 훈공은 자손들의 삶에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서계가문의 탄생은 <서계문화재단> 홈페이지에서 옮겨온 글이다.
서계 박세당은 수락산 자락에서 실학 사조를 연 <색경>과 <서계집>, <사변록> 시리즈를 완성했다.
<색경(穡經)>은 정치와 유학을 백성복지의 원론으로 삼아 농업기술을 펼 쳐 보인 농서다. <색경(穡經)>의‘색(穡)’은 추수, 즉 거둔다는 뜻이다. 천자문에 ‘치본어농(治本於農) 무자가색(務玆稼穡)’, 농업을 다스림의 근본으로 삼으니 봄에 씨 뿌리고(稼) 가을에 거두어들이는(穡) 것을 힘쓴다는 말이 있다.
따라서 ‘가색’은 농업을 뜻하니 <색경>은 농사에 관한 내용을 담은 경서라는 의미다.
<색경(穡經)>은 상·하 2책으로 구성돼 상권에서는 토지와 식량작물, 원예·화훼·과수, 축산과 양어에 대한 기술을 담고있으며 하권은 뽕나무 재배와 양잠만을 다루고 있다. 이는 <색경>이 중국 원나라의 <농상집요>를 많이 인용했기 때문이다.
박세당은 <색경>의 서문에서 ‘농사의 최고 스승은 경험이 많은 농부’라는 논어의 고사를 인용하면서 “농사기술을 배우려는 사람은 우선 경험이 많은 농부한테 얻어듣고 부족한 부분을 이 책으로 연구한다면 <색경>은 농부의 영원한 스승이 돼 모두가 배고픔과 추위에 대한 걱정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며 진한 애농사상을 보여주고 있다. 서문에 "민생낙업(民生樂業)의 실제적인 방식이 여기에 다 있다"고 일갈할 정도로, 그는 몸소 체득한 농사 기술을 통해 얻은, 백성복지에 대한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내용을 오롯이 담아냈다.
<사변록>은 14년에 걸쳐 순수하게 학문적으로 사색한 결과물로, 교조적인 주자학을 날 세워 비판하고 진보적이며 독자적 견해를 거침없이 밝혔다.
이러한 학문 태도는 이 후 이익과 정약용 등으로 이어져 실학의 큰 꽃을 피우게 되지만 당시에는 용납 못할 이단으로 치부되었다.
실제로 서계 박세당은 당대에 사문난적으로 몰렸으며 훗날에 가서야 실학의 선각자로 평가를 받았다.그가 살았던 사회는 임진란과 병자란을 겪고 당쟁으로 나라가 극도의 혼란에 빠져들었으며, 외국문물이 서서히 들어와 기존의 사고방식에 변화를 요구하던 과도기였다.
이 커다란 고비에서 선생은 백성의 복지를 위하고 나라의 바른 경영을 위하며 사상의 자유로운 체계를 마련하는데 일생을 희사한 것이다.
그는 마흔에 세상 모든 명리로부터 마음을 끊고 수락산 석천동에 들어가 독서와 집필, 강학에 전념한다. 그로부터 73세 죽을 때까지 30년 남짓 석천동을 떠나지 않았으며, 스스로 쓴 행장에 나오듯
"농사철이 되면 직접 밭두둑에 나가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호미와 가래를 둘러멘 이들과 어울려 따라다녔다."
그의 현실 생활은 불우했다. 4살때 아버지를 여의기 시작해서 두 아내와세 아들이 선생 앞에서 먼저 세상을 떠났다.
가족의 잇따른 죽음으로 선생은 늘 심한 슬픔을 앓았다.
그는 자신을 비롯하여 아버지, 형, 아들들이 모두 옳은 일을 위해 직언을
마다 않았다.
"늘 근신하고 천사람 뒤에 종적을 감추라"
후손들에게 끊임없이 당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