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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 망국 10 - 조선의 1894년(8)
(174) 망국 11 - 조선의 1894년(9)
(175) 망국 12 - 조선의 1894년(10)
<조선왕조실록(166)> 망국 3
- 조선의 1894년(1)
혹세무민의 혐의로 한양으로 압송되던 동학 교주 최제우는 고종 즉위 즈음 효수되었습니다. 그러나 교주의 죽음에도 동학의 교세는 사그라지지 않았습니다.
외세의 접근에 불안해하고 탐관오리의 횡포에 절망하던 백성들은 동학에서 의지할 곳을 찾았습니다.
- 우리 동학은 신분의 귀천도 남녀도 차별하지 않습니다. (위아래가 없다고? 말도 안되는 소리 우린 양반이고 상놈 과 노비는 당연한것인데 이런 반사회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니 이런것이 이단이야)
그러나 동학을 믿는 것은 나라에서 금한 일이었으므로, 지방 수령들은 동학교도들을 붙잡아 탄압했습니다.
- 당장 주리를 틀 것이로되, 스무 냥만 내면 한 번 봐주지. 어쩔래?
동학은 지친 백성들의 폭발적인 지원 속에 충청, 전라지역 으로 확대되어갔고, 이에 고무된 최시형 등 동학 지도자 들은 교주 최제우의 신원을 요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 우리가 왜 불법이고 왜 이단이란 말이냐!
1892년 신도 1천여 명이 공주에 모여 집회를 가졌고, 전라도 삼례에서 더 큰 집회가 열렸으며, 1893년에는 40명의 대표가 상소문을 들고 서울로 올라와 궐문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러나 조정의 반응은 싸늘했습니다.
- 속히 이들을 체포해 조사한 후 괴수에게는 형벌을 내리고 잔당은 잘 깨우쳐 돌아가게 하소서!
복합 상소가 효과를 보지 못하고 도리어 조정의 적극적인 탄압만이 뒤따르자 동학 지도부는 본격적인 실력행사를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 팔도의 모든 교인은 보은으로 모여라!
경기, 강원, 충청, 경상, 전라도의 교도들이 접주의 인솔 하에 모여들었는데, 여기에는 동학교도 외에도 수탈에 이골이 난 농민들, 다 뺏기고 고향을 떠난 유랑민들 등등 세상에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는 많은 이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보은집회는 종전 집회보다 훨씬 더 강력했고, 정치적 색채 역시 훨씬 강했습니다,
- 우리 수만이 죽기로 왜와 양이를 쓸어 대보의 의리를 본받고자 한다.
이에 조정은 서울의 군사를 파견할 계획을 세우고, 어윤중 을 선무사로 파견하는 등 바짝 긴장했으나, 보은집회는 용두사미식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 원인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동학 안에 강력한 정치적 색채를 갖는 세력이 꿈틀거리는데, 교주 최시형이 이를 통제하기 어렵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통제할 수 없는 강력한 세력! 이는 바로 전봉준이었습니다. 전봉준은 실망했습니다.
- 이게 뭐냐. 허무하다!
<조선왕조실록(167)> 망국 4
- 조선의 1894년(2)
1894년 1월 10일 저녁, 전라도 정읍 말목장터에서 울리는 때 아닌 풍물소리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수천을 헤아리는 군중들이 모이자 그들 앞에 5척 단신의 사내 하나가 우뚝 섰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담력은 산같이 컸고 눈은 샛별같이 빛났다던 전봉준입니다.
- 우리가 피땀 흘려 지은 곡식이 저 악랄한 자들에게 들어간 지 오래되었소. 여기에 조병갑마저 다시 부임해와 어제의 행패를 오늘 또 하고자 합니다. 이 기회를 놓치면 영원히 후회할 것이오.
1855년에 태어난 전봉준의 집안은 본디 벼슬을 했던 양반 가문이었으나 아버지 대에 이르러 관직에 진출하지 못하자 몰락해 간 것으로 보입니다.
전봉준은 고창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후 떠돌아 다니다 서른살 즈음 고부 마을로 들어와 서당을 열어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하고 풍수도 보고, 사람들의 길흉사에 날을 잡아주기도 했으며, 편지나 소장도 대필해주면서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호남 지역은 비옥한 농토를 가지고 있었고 서해안의 풍부한 해산물까지 얻을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당시의 부패한 지방 관리들이 이 땅을 한밑천 챙기는 수단으로 여겼다는 데 있었습니다.
당시 군수인 조병갑은 세도가 풍양 조씨 척족(성이 다른 친족, 친족은법률상의 의미로는 피붙이인 혈족과 혼인으로 맺어진 척족인 인척을 말하며 이러한 넓은 의미의 친족은 보통 친척이라고 하는데 이는 관습상의 친족과 척족을 말한다) 으로서 수탈의 달인이었습니다.
- 황무지 개간 시킨 후 징세하고 빼앗기
- 아버지 공덕비를 세울 경비 거두기
- 강제로 만석보를 쌓게 한 다음 물세 거두기
- 죄명 만들어 잡아들인 후 면죄 대가 받기 등 등 등
군수 외에도 양전 사무를 맡아보던 양전사, 세곡 운반을 담당한 전운사 등의 불법 수탈이 더해져 고부 군민의 삶은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었습니다.
- 끼니때인데도 연기 나는 집이 몇 없다!
견디다 못한 군민들은 전봉준을 찾아 소장을 써달라고 한 후 이를 가지고 관아로 갔지만, 돌아온 것은 매질과 구금 이었습니다.
- 어디서 이런 불순한 행태를 배웠느냐! 퍽! 퍽! 퍽!
군민들은 몇 번이고 관아로 달려가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조병갑은 이들을 난민으로 몰아 엄한 형벌로 다스렸고, 전봉준의 아버지 전창혁도 이 일에 앞장섰다가 난민으로 몰려 체포되어 죽기에 이르렀습니다.
군민들의 분노가 극에 달했습니다.
- 젠장,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한바탕 해봤으면 원이라도 없겠네!
예나 지금이나 나랏돈은 눈먼돈이요 국민혈세는 자기배 채우기 일수고, 서민들이야 굶어죽던 말던 온갖 비리를 저지르던 넘들은 세도가를 등에 업고 세상 천지를 주무르니 국민을 위한 공무원을 찾을길이 없다. 쯧쯧~//
<조선왕조실록(168)> 망국 5
- 조선의 1894년(3)
오랫동안 지주와 관리의 수탈에 이를 갈며 기회를 엿보던 전봉준이 드디어 일어섰습니다.
전봉준은 뜻을 함께 해 온 사람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 이제 우리가 꿈꿔 온 일을 펼칠 때가 되었다.
의견을 모은 그들은 사발통문을 만들어 돌렸습니다 (사발통문은 사발 모양으로 발기자들의 이름을 빙 둘러 쓴 통문을 말함)
그 내용은 이전의 민란에서 보였던 주장들과는 질이 달랐습니다.
- 고부성을 함락해 조병갑을 목베어 죽일 것.
- 군기고와 화약고를 점령할 것.
- 군수에게 아부하여 백성을 침탈한 탐리를 엄히 징벌할 것.
- 전주 감영을 함락하고 서울로 나아갈 것.
그동안의 민란은 과격하기는 하였으나 수령을 잡아 죽일 생각을 하지 못하는 등 기본적으로 나라의 틀을 깰 엄두를 내지 못했으나, 전봉준의 사발통문에는 군수 조병갑을 목 베어 죽이고 전주 감영을 함락한 후 서울까지 진격하겠다 는 것이니, 이는 국가적 차원의 변혁을 선언하고 있는 것 입니다.
전봉준이 이런 뜻을 공공연히 밝힌 것은 백성의 등골을 빼는 수탈이 수령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나라의 구조적 문제이어서 절대로 고쳐질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한 데 기인한 것이고, 나아가 동학 조직을 통해 교감한 인물들이 함께하리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1894년 1월, 고부 말목장터에 모인 군중들은 전봉준의 지도 아래 고부 관아로 들이쳤습니다.
조병갑이 이미 달아난 고부 관아를 점령한 이들은 억울 하게 옥에 갇힌 사람들을 풀어주고 무기고를 부수어 무장 을 했고, 곡식 창고를 열어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었으며, 수탈의 상징인 만석보를 헐어버렸습니다.
그렇게 기세를 올린 농민군은 고부 일대를 점령한 채 한 달을 보냈으나, 애초의 선언대로 전주 감영으로 진격할 생각은 하지 못했습니다. 인근 지역과 다른 동학 지도자 들의 호응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 이러다 고립된 채 진압되는 거 아냐?
때마침 고부에서 농민들이 봉기했다는 보고를 받은 조정 에서는 신임군수로 박원명을, 봉기를 진압하고 조사할 안핵사로 이용태를 내려 보냈고, 박원명이 회유책을 쓰자 농민군이 사실상 와해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전봉준의 뜻이 꺽이는 듯 했으나, 그 뒤에 나타난 이용태가 봉기 참가자와 주모자를 색출한다는 명분으로 백성들을 줄줄이 잡아갔고, 특히 농민들이 주축이었던 민란의 책임을 동학교도에게 전가하며 동학을 강력히 탄압하였습니다.
다시 봉기의 불길이 번졌습니다.
- 이번엔 장난 아니다!
<조선왕조실록(169)> 망국 6
- 조선의 1894년(4)
다시 조정의 탄압이 시작되자 전봉준은 무장현의 동학 접주 손화중을 찾았습니다.
- 저 소리를 들어보세. 이제 정말 때가 되었네.
손화중이 봉기에 적극 참여하면서 태인현의 농민들도 접주 김개남의 주도 아래 봉기하자 그 사기가 하늘을 찔렀고, 드디어 3월에 지도부를 조직하는 등 모양을 갖추었으며, 5월 백산면에 모인 군중은 1만 3천명에 달했습니다.
- 총대장 : 전봉준
- 총관령 : 김개남, 손화중 등 등
전봉준은 격문을 손수 지어 봉기의 이유를 널리 알렸습니다.
- 조금도 주저하지 말고 이 시각으로 일어서라. 만일 기회 를 잃으면 후회를 하여도 미치지 못하리라.
또한 네 가지 군율을 정했습니다.
- 1. 사람을 죽이지 말고 물건을 해치지 말 것.
- 2. 충효를 다하여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평안하게 할 것.
- 3. 왜적을 몰아내고 성도(聖道)를 깨끗이 할 것.
- 4. 서울로 진격하여 세도가들을 몰아낼 것.
이로써 처음에 농민들이 주축이 되었던 민란은 동학농민 운동으로 확대되었습니다. 태인과 부안을 점령한 농민군은 황토재에서 처음 관군과 만나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농민군은 계속해 정읍, 흥덕, 영광, 함평, 장성 일대를 점령 하며 세를 키웠고, 장성에서는 양호초토사로 서울에서 내려온 홍계훈의 서울 군대와 싸워 박살을 내는 성과를 내기까지 하였습니다.
더욱 자신감을 얻은 농민군은 마침내 ‘호남제일성’이라는 전주성으로 향했고, 큰 고생 없이 전주성을 함락해 버렸습니다.
- 이겼다 또 이겼다!
전주 감영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은 고종과 조정을 공황 상태로 몰고 갔습니다.
- 서울에서 경군이 내려갔는데도 우리 왕조가 일어난 전주가 함락되었다는 것인가!
결국 조선 조정은 위안스카이[袁世凱(원세개)]와 교섭한 뒤 정식으로 청에 파병요청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 이런 일이 계속되면 중국 정부에 걱정을 끼침이 클 것 입니다. 임오, 갑신년의 두 변란 때에도 중국 군대의 진압에 힘입었는데, 그 때 일을 참작하여 신속히 군대를 파견토록 해 주십시오.
또 다시 외국 군대가 조선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조선은 대단한 정권이야~~
외국에선 이정도 민중 봉기면 정권이 무너져야 정상인데 어찌 그리 똑똑 한지 국민을 작살내기위해 외국군대 까지 동원해서 진압하는걸 보면 이건 뭘까 망해가는 조선 얼마나 더 백성들이 죽어야하고 고난을 받을까. .불쌍한 조선 백성들 . .헐 진실로세상에 공짜는없다.외국군대가 모든일끝내고 공손히 가것나~~~
<조선왕조실록(170)> 망국 7
- 조선의 1894년(5)
조선으로부터 파병 요청을 받은 청군은 일본군의 움직임이 신경 쓰였으나, 달리 길이 없다고 보고 파병을 결정 하였습니다.
- 파병하면 간단히 해결될 것이라는 것이 현지 위안스카이의 전언입니다.
그러나 청군의 파병은 조선침략 더 나아가 대륙침략의 꿈을 꾸고 있는 일본군의 파병을 불러왔습니다.
- 텐진조약 제3조 : 장차 조선에 중대한 일이 일어나 어느 일국이 파병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서로 연락하며, 사태가 진전되면 다시 철수한다.
일본 정부는 이번 사태를 살펴보며 일찌감치 조선 조정이 청군 파병을 요청할 것이라는 것을 예상하고 모든 준비를 갖춰 놓고 있었습니다.
- 무슨 준비? 전쟁준비!
일본은 그동안 대륙침략을 목표로 국력을 강화하고 조선 에서 주도권을 쥐기 위해 노력했으나, 임오군란과 갑신 정변을 통해 중국이 조선의 종주국이라는 현실만 부각시킨 채 물러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직 힘이 부족하다고 느낀 일본은 조선이 잃어버린 그 10여 년간 최신전함을 구입하고 무기현대화에 박차를 가하는 한편 현대식 징병을 통해 군인 수를 대폭 늘리고 훈련을 강화시켜 정예화하였습니다.
- 이제 싸우면 우리가 무조건 이긴다! 전쟁의 명분을 만들어라!
청나라 군대가 아산만에 다다른 후 일본군이 공관과 거류민 보호를 명분으로 인천항에 상륙했습니다.
예기치 못한 일본군의 상륙에 고종과 조정은 당혹 했습니다.
- 아니 일본이 왜... 게다가 서울로 오고 있다고?
이즈음 전주성을 점령한 농민군은 홍계훈의 관군과 밀고 밀리는 전투를 계속하고 있었는데, 이 와중에 청군과 일본군의 상륙 소식이 전해지자 농민군과 홍계훈은 협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 그래야 청일 군대의 철수를 요구할 수 있을 테니까.
이렇게 해서 5월 7일 전봉준은 관군과 화약(和約)을 맺고 다음날 전주성을 나와 농민군을 해산시켰습니다. 이렇게 성립된 것이 전주화약(全州和約)입니다.
이 화약대로 전봉준은 각 지방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폐정 (폐단이많은정치)개혁을 실시했습니다. 집강소는 농민 들의 자치에 의해 운영되었는데, 이것은 우리 역사상 처음 있는 농민 자치였습니다. 주목할 만한 역사적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전주성이 회복되었다는 보고를 받은 조정은 즉각 일본 군대의 철수를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일본 군대가 철수할 리는 만무했습니다.
- 철수같은 소리 하고 있네!
이때부터 1945년 해방때까지 일본 군대가 한국에 주둔 하게 된 것입니다.
세상돌아가는걸 보면 모든 문제는 나한테 있다. 결국 조선 이 힘이 없으니 이를 막을 군사력이 없어 자주국방이 안되는것이고 내나라 국방을 다른나라에 맡기고 조공이나 바치는 현실ㅠ_ㅠ
암튼 목소리 큰놈하고, 힘쎈놈이 장땡은 맞다. ^^
<조선왕조실록(171)> 망국 8
- 조선의 1894년(6)
일본은 조선의 철병 요청을 거부했습니다.
- 동학군이 해산했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고, 청군은 도리어 증강되었다.
그러자 청군이 함께 철병하자 제안했고, 이어서 러시아, 영국, 미국 등이 중재에 나서 철군을 요청했지만 일본은 요지부동이었습니다.
일본은 오히려 중국에 카드를 내밀었습니다.
- 함께 내란을 진압하고 내정개혁에 착수하자.
중국이 일본의 의도를 알아채고 거부하자, 일본이 드디어 막나가기 시작했습니다.
- 조선은 청국과 맺은 모든 조약을 파기하고 청군을 조선 에서 철수시켜 조선이 자주국임을 실증하시오. 기한은 3일 후인 6월 20일!
기한까지 아무런 대답이 없자 일본군은 21일 새벽 경복궁 을 습격했습니다. 궁문을 지키던 병사들이 잠시 대항 했으나 저항이 무의미하다는 판단을 한 고종이 희생을 줄이기 위해 저항 포기를 명하자 일본군은 고종 침전까지 그대로 내달았습니다.
- 전하께서 기침하셨느냐?
일본군은 고종을 협박해 원하는 바를 얻어냈습니다.
- 청국과 맺은 모든 조약을 파기한다.
- 청국군은 모두 조선에서 떠나라.
그리고 이틀 뒤, 청군은 일본군의 도발에 확실한 방침을 정하지 못한 채 영국 국적의 배에 군대를 싣고 아산만 풍도 앞바다를 들어서다가, 일본 군대의 포격에 의해 침몰 당하고 말았습니다.
- 선빵이 최고여!
조선땅에서 일본과 청나라가 한 판 붙게 된 것입니다.
일본의 안하무인적인 태도를 보면서도 청군 리홍장은 일본이 10여년 간 전력을 크게 강화시킨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세상이 다 청나라가 이긴다고 하는데도 싸움을 피하고자 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 그렇다고 풍도에서 선빵을 맞고 싸움을 피할 수도 없는 노릇!
리홍장은 조선 땅 평양에서 승부를 보기로 했습니다.
- 요동의 군대를 평양으로 이동시키고 아산에 주둔 중인 군사도 평양으로 집결시켜라!
그러나 아산에 주둔해 있던 청군은 평택을 지나 내려오는 일본군과 성환에서 만나 박살이 나고 말았습니다.
- 청군 사망 500명, 일본군 사망 82명!
남은 청군은 산 넘고 물 건너 평양으로 향했고 일본군도 병력을 평양으로 집결시켰습니다.
쪽발이들 썬방날리며 들어오는데 청군을 힘으로 밀어 붙이고 그만큼 군사력에 자신이 있단 얘기인데 모든면에서 마음에 안들지만 우리 보다 힘이 센데 어쩌나
<조선왕조실록(172)> 망국 9
- 조선의 1894년(7)
1894년 9월 15일, 평양에 집결한 일본군은 청나라 군대를 기습했고, 청군은 지리멸렬하다 완전히 무너져버렸습니다. 말 그대로 파죽지세였습니다.
- 청군 사망자 2,000명에 부상자가 4,000명, 일본군 사상자 500여명
그 이튿날인 9월 17일에는 압록강 하구에서 청나라 북양 함대와 일본 함대가 맞붙었는데, 청나라 북양함대가 화력 에서 우위에 있었음에도 일본 함대에 무참히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한편, 평양에서 패배한 청나라 군대는 압록강 넘어 강변에 요새를 만들고 일전을 준비했으나, 병력을 보충한 일본군 은 10월 24일 밤 압록강을 건너 청군을 무너뜨렸고, 다음날에는 단둥의 청군 기지를 공격하여 중국 본토에 발판을 마련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곧이어 일본군은 요동반도 남쪽 도시들과 여순항을 점령 하였고, 해를 넘긴 1895년 3월에는 북경이 바라보이는 곳에 진지를 구축했으며, 타이완에도 상륙함으로써 동중국해는 사실상 일본의 수중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1년도 되지 않아 일본에 무참히 패한 청은 1895년 4월 17일 일본에 사실상 항복을 하며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 하였습니다.
- 거액의 전쟁보상금 지급, 랴오둥 반도, 대만 등 할양 등 등
1894년 즈음까지 조선에서 종주국을 자임하며 외견상 일본을 누르고 있던 청은 준비된 군대를 보유한 일본에 이와 같이 무참히 깨졌습니다,
이로 인해 청은 조선과 다름이 없는 신세, 즉 세계열강의 식사꺼리로 완전히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그 넓은 땅덩어리도 그 많은 인구도 아무 짝에 쓸 데가 없었습니다.
한편, 청과의 전쟁 명분을 얻기 위해 경복궁을 습격한 일본 은 반일 여론 무마와 조선 지배의 편의를 위해 두 가지 카드를 사용했습니다.
그 하나는 중국에 억류되었다가 돌아와 아들과 며느리에 의해 가택연금 상태에 있던 대원군을 전면에 등장시킨 것입니다. 녹두장군 전봉준마저도 대원군에게 손을 내밀 정도로 대원군에 대한 국민의 신망이 매우 높은 점을 고려한 것입니다.
- 우리가 힘을 찾아드릴 테니 함께 개혁을 도모해보지 않으시렵니까?
- 좋소!(빠드득)
경복궁을 장악한 일본군은 고종에게 요구했습니다.
- 전권을 대원군에게 넘기시오!
그렇게 돌아 온 대원군은 원성이 높은 민씨 일가를 축출 하고 곧 의욕적 행보를 하기 시작했지만, 대원군이 그 뜻대로 할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일본이 친일적 성향의 내각을 구성해 배후에서 이들을 조종했기 때문이었습니다.
- 뭐냐...난!
<조선왕조실록(173)> 망국 10
- 조선의 1894년(8)
청일전쟁 승리로 조선을 사실상 점령한 일본이 꺼내 든 두 번째 카드는 내정개혁이었습니다. 그것이 이른바 갑오경장 입니다.
일본은 이를 위해 군국기무처를 만들어 3개월 동안 무려 210개의 의안을 심의, 의결하였는데, 그 변화는 조선
봉건주의 에서 생각해 내기는 어려운 실로 획기적인 것들 이었습니다.
대표적인 것들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궁내부를 두어 왕실을 국정과 분리
- 신식화폐를 발행하고 모든 조세는 금납으로 명문화
- 도량형 통일
- 노비제, 백정신분 등 폐지
- 과거제 폐지
- 과부의 재가 허용, 조혼과 인신매매 금지
- 사법관 제도 개시, 연좌제 폐지
유럽의 근대사회는 르네상스 이후 종교개혁, 산업혁명, 프랑스 혁명 등 문화적 혁신과 과학적 문명의 진보를 통해 주체적으로 획기적인 근대화의 과정을 밟아 왔습니다.
그러나 조선의 경우는 실학운동과 동학혁명이 고질적인 봉건왕조의 폐쇄성으로 인하여 개화를 보지 못한 채, 갑오경장이라는 타율적인 힘에 의해 외세 자본주의가 이룩한 서구적 근대화 과정으로 이행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갑오경장은 일본의 조선 침략에 그 목적이 있었던 것일 뿐 조선의 장래를 위한 것은 아니었음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어쨌든 일본에 의해 강제된 갑오경장이 조선의 근대화에 단초가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씁쓸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일본이 일본의 반감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대원군의 복귀와 갑오경장이라는 두 카지 카드를 썼으나, 일본이 기대한 효과는 전혀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 들었어? 왜놈들이 경복궁을 습격했단 얘기.
- 저런 쪽발이 쉐이들!
한편, 앞서 본 바와 같이 청군과 일본군의 입국에 따라 전주화약을 맺고 전주성을 나온 동학 농민군은 일본군과 청나라가 조선 땅에서 전쟁을 벌이는 것을 목도한 후 재집결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김개남, 전봉준이 힘을 합쳤고, 이즈음 이들에게 특별한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 대원군 합하의 뜻을 전하러 왔소!
모든것은 힘의논리 곧 자연의 이치
강대국이 된 일본이 조선을 주무르는것은 당연한것 T-T
어떤 일본 극우주의자 한말이 생각나네. .
역사적으로 식민지가 되면 식민지 국민들은 짐승취급 당했는데 조선은 그래도 잘해준 축에 들어간다나 뭐라나.
언젠가 멀지않은 미래에 꼭값아 주어야할 빚이라 생각 하고. 꼭값아주마. 쁘드득. ..!
<조선왕조실록(174)> 망국 11
- 조선의 1894년(9)
경복궁을 점령한 일본군으로부터 전권을 약속받고 일본 측과 손잡아 왕비 쪽을 눌렀으나, 대원군은 곧 자신이 단순한 이용물에 불과함을 깨닫고, 승부수를 띄웠습니다.
- 어떻게든 왜놈들과 친일관료들을 쓸어버려야 한다...!!!
대원군은 평양에 진을 치고 있던 청군(아직 일본군에 깨지기 전임)과 동학 농민군에 각기 밀서를 보냈습니다.
- 북에서는 청군이, 남에서는 농민군이 협공해 일본군을 쓸어버리자!
이 과정에 대원군은 유림에도 일본을 몰아내기 위한 의병 을 촉구했으나, 유림은 거절했습니다.
- 향기나는 풀은 악취나는 풀과 한 그릇에 담기지 않는 법. 우리의 적은 저 무도한 동학당이다.
책상머리앉아서 책이나읽는 유림(도대체 머리에 뭐가 들었나?)
젤로 힘든건 서민들의삶
작금의 나라 형세를 다시 살펴 본 전봉준이 다시 일어 났습니다. 격문을 만들어 돌리자 농민들이 격하게 호응 했고, 순식간에 앞선 봉기때보다 훨씬 많은 농민이 전봉준 과 김개남의 휘하로 몰려들었습니다.
- 와우 십만도 넘겠어!!!
한편, 보은집회 이후 전봉준과 거리를 두어 온 동학 교주 최시형도 아래로부터의 격렬한 요구를 받고 드디어 결심을 했고, 마침내 충청지역의 동학교도들까지 총궐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 민심이 곧 천심. 좋다!
전봉준이 이끄는 호남 농민군과 최시형, 손병희가 이끄는 충청 농민군이 연락을 취하며 논산 땅으로 집결했고, 김개남은 전주에 남아 다른 사태에 대비했습니다.
그러나 이즈음 대원군의 기대와 달리 평양에 진주해 있던 청군은 앞서 본 바와 같이 일본군에 박살이 났고, 해전 에서마저도 박살이 났습니다.
기세가 오른 일본군은 조선 조정에 농민군 토벌을 돕겠다 는 통보를 하였습니다.
- 그까짓 오합지졸쯤이야!
결국 중앙의 관군과 일본군 1개 대대가 농민군 토벌에 나섰습니다.
논산에 집결한 농민군은 소소한 전초전을 벌인 뒤 드디어 우금치에서 일본군, 관군과 일생일대의 격전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175)> 망국 12
- 조선의 1894년(10)
조선 동학 농민군은 동학농민전쟁에서 가장 큰 전투이자 분수령이었던 12월 5일부터의 우금치[ (牛禁峙--- 충청남도 공주시 금학동 있는 주미산에 걸친 고개] 전투에서 관군, 일본군과 최선을 다해 싸웠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우금치 마루는 농민군의 시체로 뒤덮여갔습니다.
참혹한 패배 였습니다.[우금치란 이름은 고개가 험해서 소를 몰고는 넘을 수 없다는 고개, 즉 우금치(牛禁峙)의 금(禁)자가 금(金)자로 바뀐 것이라고도 하고, 이 고개에 금광맥이 있어 소(牛)만한 금덩어리가 들어있다는 데서 유래한 것이라고도 전한다.]
압도적 수적 우세에서 나오는 자신감과 종교적 신념에서 나오는 용맹성으로 무장한 농민군이었지만, 현대식으로 무장한 소수의 일본군을 당해내지 못했습니다.
- 농민군은 남접 북접 합쳐 2만, 조선군 3천에 일본군 2천.
당시 농민군이 갖고 있던 총은 심지에 불을 붙여 쓰는 화승총으로 사정거리가 불과 100보에 분당 2발을 발사 하는 수준인데다 그마저도 갖지 못한 사람은 죽창으로 싸워야 했습니다.
그에 반해 일본군은, 사정거리가 400-500보를 넘고 분당 12발을 쏠수 있는 소총에다 막강한 화력의 미국제 개틀링 기관포까지 보유하고 있었으니, 화력에서 도저히 싸움의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이런류의 전쟁은 유럽에서도 있었는데. 독일군 최초 장갑차와 탱크앞에 하얀 백마를 타고 나타난 폴란드군 화력이 월등히 앞서니 쪽수가 많아도 계란으로 바위치기네
또한 여러가지 이유로 농민군 정예부대들이 모두 함께 싸우지를 못했고, 훈련받지 못한 농민군과 지도자들의 전투를 지휘하는 기술이 부족했으므로, 역부족이라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래서 제대로 훈련받은 전문가가 필요한거야)
우금치 전투 패배한 후 동학 농민군은 크고 작은 전투를 치러가며 후퇴를 거듭했고, 대오는 갈수록 줄어 들었습니다.
11월 23일 태인 전투에서 또 다시 패한 뒤 전봉준은 세가 기울었음을 인정하고 계속되는 희생을 막기 위해 눈물을 머금고 농민군의 해산을 결정했습니다.
소식을 접한 손화중, 최경선 등의 동학 농민군도 해산령을 내렸습니다. 아울러 황해도, 경상도, 강원도, 경기도 각지 에서 일어난 농민군도 일본군과 관군의 토벌에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반외세, 반일본을 기치로 내건 동학 2차 농민 봉기는 이렇게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일본군은 반일을 기치로 내건 동학당을 완전히 소멸하라는 본국의 명에 따라 마치 비질하듯이 동학 농민군에 대한 대대적인 살육을 이어갔습니다.
- 1895년 1월까지 죽은 농민군이 20만이 넘었다!!!
동학지도자들도 모두 잡혀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김개남은 전주에서 체포되어 바로 처형되었고, 선화중은 고창에서, 전봉준은 순창에서 잡혀 각각 서울로 압송되었으며, 최시형도 체포되어 교형에 처해졌습니다.
전주성 전투를 하면서 농민군으로 최종적 승리를 얻을 수 없음을 진작 알고 있었지만, 피할수 없는 시대의 부름을 받아, 죽더라도 싸워보고 죽겠다는 농민군을 이끌고 외로이 황야에 몸을 내던진 사내 중의 사내 전봉준! 그는 다음과 같은 시를 남기고 1895년 3월 손화중 등과 함께 처형되었습니다.
- 때가 오니 천지가 모두 힘을 합했건만
- 운이 다하니 영웅도 스스로 도모할 수 없구나
- 오로지 백성을 사랑하는 정의였으니
- 나라를 위하는 단심을 누가 있어 알아줄까
외세가 들어와 정사를 참견하고 모든일에 제동 거는것엔 나라가 아무힘을 못쓰면서 인간평등 부르짖는 동학군은 때려잡아죽일 적이되었다.
일본군이 '우리가 잠재워줄까?' 달콤함에 조선조정과 조선군은 그리도 좋았을까?
우리농민을 도륙하는일인데~~
우리가 손잡을때 아무도 못건드린다는걸 왜 몰랐을까? 승리도 못함을~~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