릿터 4호 - 부동산크리피
부루마블의 시작에는 언제나 희망이 있었다. 모든 플레이어들이 동일 금액을 지급받고 동일 선상에서 출발하게 된다. 차이를 만드는 것은 오로지 두 개의 주사위였다. 선공, 후공의 관계는 주사위 속 두 숫자의 조합에 따라 얼마든지 뒤바뀔 수 있었다. 심지어 더블이 나오면 쾌속 질주도 가능했다. 무주공산인 도시들이 플레이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먼저 도착하면 먼저 차지할 수 있었다. 카이로, 베를린, 그리고 우리의 서울까지도. 흥미로운 곳은 역시 서울이었다. 국내 제조사가 만들었기 때문이었을까? 부루마블 내에서 서울의 땅값은 전 세계의 수도와 명승지 중 가장 높았다. 황금열쇠 미션 중에는 서울행이 강제 조건인 경우도 왕왕 있었다. 덕분에 서울은 개발도, 이용료 부과도 용이했다. 사두면 절대 후회할 일 없는 도시였다. 작은아버지는 첫 바퀴에 서울을 먹었다. 그 후 우리 집은 몇 바퀴를 더 돌아 서울에게 먹혔다. 그날 이후 나는 서울의 주인이 되겠다는 꿈을 가졌다. 부동산의 말뜻을 깨치기도 전에 부루마블을 통해 알았다. 땅에도 주인이 있음을, 차지하지 못한 땅 위에서 우리는 언제나 지불할 수밖에 없음을 말이다.
<중략>
아버지는 그 사이 은퇴를 하셨고 이제는 서울로의 이사를 포기한 상태다. 조금 더 늙으면 다 정리하고 한적한 동네로 내려가 살고 싶다 말하신다. 마당에서 뛰노는 강아지 한 마리와 텃밭도 딸려 있는 그런 집의 주인이 되기를 원하신다. 입버릇처럼 하는 그 말씀에 대뜸 "나도 그 집 따라가 살면 안 돼요? 생활비는 꼬박 낼게." 하고 말하자 아버지는 답했다. "젊은 놈은 그래도 서울에 살아야지. 결혼도 하고 직장도 다니고 하려면 서울에 집 한채 마련해야지." 그리고 이어지는 침묵의 시간.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는 그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아버지의 꿈은 과거 완료형이 되었지만, 당분간 내 꿈은 현재 진행형으로 계속될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최근 초등학생의 장래희망 1위가 건물주라 말하는 뉴스를 본 기억이 있다. 크리피하다. 비좁은 반도 위에 플레이어들이 차고 넘친다.
-황현진 <잃어버린 귀갓길>
공부 때문에 몇 년 정도 서울에 살았던 적이 있었다. 집을 나와 처음 구한 방이 눅눅한 반지하방이었지만 오로지 나만의 공간이라는 점이 굉장히 기뻤다. 없는 용돈에 발품을 팔아 빈 공간에 나의 색을 입혀나가는 것이 재미있기도 했다. 그러다 큰 마트를 한번 가보고 싶어 검색해 보니 강 건너 여의도에 E마트가 있었다. 서울 구경이나 하자 싶어 걸어서 가보니 다리 건너편으로 어마어마한 높이의 아파트와 빌딩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처음 보는 외제차들이 무더기로 나오던 한강변의 그 아파트들은 조그마한 창으로 11시쯤이나 되어야 햇빛이 들어오던 내 방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아름다웠다.
저런 아파트는 얼마를 주면 살 수 있을까? 궁금해서 아파트 근처에 부동산을 찾아가 보았다. 유리창에 붙어있는 가격표를 보니 10억이 넘었다. 내가 직장을 구하고 월 100만월을 꼬박꼬박 저금한다면 대략 100년정도 걸릴 가격이었다.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만원이면 이틀을 살고 30만원이면 한 달을 살 수 있었던 나에겐 딴 세상 이야기였다. 사우론을 물리치기 위해 절대반지를 용암에 던지고 오라는 소리 같았다. 멍하게 비닐봉투를 들고 돌아온 반지하 내 방의 모습은 이전과는 달리 왠지 쓸쓸하고 초라해 보였다.
몇 년 뒤 형이 결혼할 나이가 되어서 집을 보러 다니길래 따라간 적이 있었다. 가능하면 신축아파트에서 살고 싶다고 해서 모델하우스에 갔었는데, 친절하신 직원분이 아파트 가격에 대해 설명을 하고 계셨다. 평당 700만원에 확장을 하면 800만원 돈이라고 하면서 27평에 얼마가 되고 계약금을 걸고 중도금을 내고 대출은 70%까지 할 수 있으며 아파트값이 오른다니 어쩌니 하는 이야기를 늘어놓으셨다. 그래서 아파트가 2억 얼마니까 미리 8000만원만 낼 수 있다면 나머지는 10년 동안 천천히 갚아도 된다는 이야기였다. 합리적인 이야기였고 납득이 되긴 했지만, 부모님에게 손을 벌리지 않고는 계약도 못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형은 모아둔 돈에 부모님이 보태준 돈으로 아파트 계약을 하고 결혼을 했고, 지금은 그 아파트 가격이 1억이 올랐다고 했다.
빚을 내서 아파트를 사는 우라나라의 부동산 구조 때문에, 정부에서든 어디에서든 아파트 값을 내리려고 하면 결사적으로 반대한다. 주거를 위한 목적이 아니라 투자를 위한 목적이기 때문이다. 들어가 살 수 있는, 혹은 살아야 하는 젊은 사람들을 위한 아파트가 아니라, 돈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돈을 더 많이 가지기 위해 여러 채의 아파트를 사고 또 아파트 값이 오르길 바란다. 오르는 집값을 바라보고 있자면 내 집 마련의 꿈도 점차 멀어져만 가는 듯해 보였다.
내생각에 우리 세상과 부루마블의 가장 큰 차이점은 아마도 시작지점일 것이다. 내가 20살이 넘어 들어온 이 부루마블 세상은 이미 다른 플레이어들이 모든 땅을 사 놓은 게임판이었다. 한 바퀴 돌면서 내는 통행세는 무수히 많지만 시작지점으로 돌아와 받는 월급은 턱없이 부족했다. 무인도에서 쉬어간다고 해서 내 땅이 늘어나는 것도 아니었다. 내 인생에도 좋은 황금열쇠를 뽑아서 반전의 기회를 노려볼 수 있을까?
첫댓글 후기 잘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