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는 두 줄기의 큰 기운이 흐른다.
한 줄기의 기운이 서울의 조산(祖山)인 북한산에서 큰 기운을 일으켜 대한민국 최고 명당인 수도 서울(한양)이라는 대지를 만든다.
또 다른 한 줄기의 기운이 인왕산과 무악재를 지나 솟아오른 안산(鞍山)을 주산(主山)으로 삼아 용산(龍山)의 줄기에서 만들어진다.
북악산과 인왕산의 줄기가 내려와 수도 인근에 머리 또는 꼬리가 위치해 있는 곳 효창원이다.
앞에는 한강을 바라보인다. 산으로 가로막힌 곳이 없다. 해당 지역에서는 가장 높은 곳에서 한강과 경복궁, 광화문을 바라 볼 수 있는 훌륭한 터라 할 수 있다. 무악에서 뻗어나와 금화산에 이른다. 북아현동과 충정로동의 경계선을 따라가는 남맥이다. 그 남맥은 충정로를 지나 봉래초등학교뒷산에서 서편 담을 타고서 환일중고로 이어진다. 이 학교는 산봉우리 용맥에 그대로 매김되어 있다.
여기서 다시 만리재길을 건너 만리동 시장과 배문중고교 서편을 지나 효창공원에 이른다.
효창원에서 남쪽으로 한강을 바라본다. 이어서 북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효창원 바로 뒤쪽에 있는 용산노인전문요양원
→효창로즈아파트→배문중·고등학교→만리재→환일고등학교→아현'으로 이어진다.
이곳 효창원은 연화도수(蓮花倒水)의 모양을 하고 있다.
연꽃(효창원)이 물(한강)을 보고 고개를 숙인 형국이다. 이때 꽃대는 인왕산에서 효창원으로 이어지는 지맥이다.
"효창원은 무슨 형국일까? 연화도수(蓮花倒水)! 연꽃(효창원)이 물(한강)을 보고 고개를 숙인 형국이다. 이때 꽃대는 인왕산에서
효창원으로 이어지는 지맥이다. 지나치게 주관적인 평가는 아닐까? 이러한 필자의 직관을 고산자 김정호가 그린 '수선전도'(한양고지도:1850년대)가 뒷받침한다. '수선전도'는 효창원의 뒷산(현재 효창원로 93-95길 일대)을 '연화봉(蓮花峯)'으로 표기하고 있다.
고산자 혹은 그 당시 사람들이 이곳을 연꽃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풍수학자 김두규 교수-
효창원은 원래 정조가 잡은 자리다. 아들 문효세자(文孝世子·1782∼86)가 다섯 살 어린 나이에 갑자기 죽은 것이다.
정조는 죽은 아들을 좀더 가까이에 두고 싶어 궁궐에서 가까우면서도 길지(吉地)인 효창원에 아들 문효세자를 묻는다.
바로 삼의사 묘 자리가 문효세자의 효창원 터이다.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옮기기 위해 15년 넘게 풍수를 공부한 정조이다.
자신이 어떻게 고모부 박명원과 함께 풍수 공부를 했는지 <홍재전서>에 이렇게 적고 있다
“처음에는 옛사람이 풍수지리를 논한 여러 가지 책을 취해 전심으로 연구한 결과 종지를 얻은 듯했다.
그래서 역대 조상 왕릉의 용혈사수(龍穴砂水)를 가지고 옛날 방술을 참고해보았더니, 하자가 많고 길격은 하나도 없었다.”
정조 임금에게도 뜻밖의 불행한 일들이 잇따라 일어난다. 가장 큰 불행은 하나밖에 없는 몇 달 뒤 문효세자의 생모인 의빈성씨(宜嬪成氏)가 또 갑자기 죽는다. 더구나 의빈성씨는 임신을 하고 있었다. 정조 임금은 문효세자 바로 옆 능선에 의빈성씨를 묻어 죽어서나마 모자(母子)의 정을 나누기를 바랐다.
임금의 슬픔은 컸다. 10살 때 궁녀로 궁에 들어온 의빈 성씨는 정조에겐 첫 사랑이자 평생 가장 사랑했던 여인이었다.
그와의 사이에 태어난 문효세자는 30살에 처음 얻은 아들로 임금이 ‘이제야 아비 노릇을 하게 됐다’고 기뻐하며 겨우 세살에
데꺽 세자로 책봉할 만큼 아꼈던 혈육이다. 상주가 된 정조는 생전처럼 이들의 안식처를 궁궐 가까이에 두고 싶었다.
여러 신하들과 지관(풍수 전문가)들을 데리고 도성 주위의 길지를 찾았다. 누군가가 도성과 한강 사이의 요지로 솔숲이
울창한 고양 율목동 언덕을 이야기했다.
세번이나 직접 가서 살핀 정조는 뒤로는 깊은 숲이, 앞으로는 한강 물결이 탁트인 풍경으로 펼쳐지는 이 양지바른 언덕이
마음에 들었다. 낙점하고 밤새 장사를 지낸 뒤 ‘효창묘’로 묘 이름을 정했다. 뒤이어 숨진 의빈 성씨의 묘는 세자묘로부터 걸어서
백보 정도 떨어진 왼쪽 산등성이 언덕에 만들었다.
이렇듯 효창공원의 역사는 정조의 슬픈 가족사에서 시작된다. ‘효성스럽고 번성하다’라는 뜻의 효창이란 이름도,
묏자리도 모두 정조의 안목과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애기릉’이라고도 불렀던 당시 효창원의 영역은 북쪽으로 만리동·서계동, 동쪽으로 청파동·남영동, 서쪽으로 공덕동,
남쪽으로 도원동, 도화동, 용문동에 이르러 무려 100여만평의 숲이 묘역을 감쌌다. 숭례문을 지나 도성 남쪽 바깥으로 나오면
바로 눈앞에 아스라히 펼쳐졌던 효창원 숲은 1894년 청일전쟁, 1904년 러일전쟁이 터지면서 일제의 발굽에 짓밟히는 시련의
역사를 겪게 된다.
1894년 5월 서울 도성 밖에 진주한 오시마 소장의 일본군 여단 병력 5천여명이 만리재에 주둔해 숲을 걷어내고 숙영지를 만든 게
발단이다. 러일전쟁 때 서울을 강점한 일제는 1906년 둔지미(현재의 용산 미군 기지)에 조선 주둔 일본군 사령부와 철도 거점을
조성하면서, 효창원 남쪽 영역이던 도원동에 유곽(성매매지역)과 철도 관사를 만들어 성역을 잠식해갔다.
1915년 <매일신보>를 보면 용산 경찰서에서 서장 이임식 잔치를 효창원 일대에서 폭죽을 터뜨리며 열었다는 기록도 보인다.
일본인들은 팽창하던 경성(서울)에서 당시 가장 큰 녹지였던 효창원 일대를 유원지와 공원, 주택지로 개발하려 했다.
이런 의도 아래 효창원 핵심부의 숲을 벌채하고 들어선 것이 1921년 6월 문을 연 경성 최초의 골프장이다. 영국인의 설계로 닦은
이 효창원 골프장은 9홀 규모로 문효세자의 묘를 울타리를 치고 빙 둘러싼 모양새여서 왕실 묘원의 존엄성을 무너뜨린 셈이었다.
<한국골프 100년사>에는, 조선 왕실의 후예인 영친왕도 여기서 골프를 즐겼다고 나와있어 더욱 착잡한 감회를 느끼게 한다.
철도국 산하 조선호텔 이용객들이 주로 이용했다는 이 골프장은 이용객들이 친 골프공이 효창원을 찾아온 조선인들을 맞히는
경우가 많아 민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골프장이 1924년 폐장한 뒤로 효창원은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이재민들의 천막촌이 들어선 수용소가 됐다가,
본격적인 공원으로 개발된다. 일본인 거류민들은 시민대회 등을 열어 땅 소유자인 이왕직(옛 조선 왕실)에 공원터를
내놓게 하라고 총독부, 경성부를 압박했다. 결국 1927년 이왕직이 허락하면서 무상임대 방식으로 효창원의 절반 이상이 공원터로
넘어갔다. 효창원이 공원이 된 기점은 이때부터다. 1930년대 말에는 공원을 유원지로 만들어 아동용 놀이시설 등을 세우고
벚꽃나무, 플라타너스 같은 외래 나무들을 능묘 주변 곳곳에 심었다. 일제는 1940년 ‘효창공원’을 공식 명칭으로 정하고,
급기야 1944년 스스로 일으킨 침략전쟁의 희생자 충령탑을 세운다며 효창원의 모든 무덤을 경기도 고양 서삼릉으로
강제 이장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 자리를 다시 주목한 이가 백범(白凡) 김구(金九)선생이다.
백범은 한때 관상가나 지관이 되고자 한 적이 있었다. 글공부로 양반 되기는 이미 그른 세상인 줄을 깨달은
소년 백범에게 아버지가 풍수나 관상을 공부해보라고 권유했기 때문이다.
“수를 잘 배우면 명당을 얻고 조상님네 산수를 잘 써서 자손이 복록을 누릴 것이요,
관상에 능하면 사람을 잘 알아보아서 성인군자를 만날 수 있는 것이다.-<백범일지>에서
아버지의 뜻에 따라 백범은 관상 공부를 시작하지만 자신의 관상이 흉상임을 알고서 크게 실망한다.
소년 백범은 ‘相好不如身好 身好不如心好(얼굴 좋음이 몸 좋음만 못하고, 몸 좋음이 마음 좋음만 못하다)’라는
문장 하나만을 마음에 새긴 뒤 관상 공부를 그만두고 풍수 공부를 시작한다. 그러나 이것에도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해
풍수서 몇 권 보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해방과 더불어 백범은 이봉창·윤봉길·백정기 의사의 유해를 일본에서 고국 땅으로 모셔 문효세자의 옛 무덤 터에
국민장으로 안장한다. 안중근 의사의 유해도 이곳에 안장하려고 가묘를 만들어두었다.
백범은 자신과 의기투합해 독립투쟁에 목숨을 바친 삼의사의 묘역 기단에 `유방백세’(遺芳百世)란 친필을 새겨넣었다.
삼의사의 이름이 ‘후세까지 길이 향기롭게 전해지라’는 뜻이었다.
일제의 간악한 독수(毒手)도 피해냈던 백범 김구는 1949년 6월 26일 경교장에서 안두희의 흉탄에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감하고 7월 5일 효창원에 안장되었다.
공원 정문 오른쪽 언덕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의 묘역으로, 이동녕(李東寧)·조성환(曺成煥)·차이석(車利錫) 3위의 묘가 있다.
이동녕 김구 차이석 조성환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선생의 7위의 영정을 모신 의열사이다.
이봉창 의사 동상
원효대사동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