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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평
풍경으로 살다 배경으로 남는다는 것
— 하영이 시집 『둥근 오후』을 읽고
김부회 문학평론가・시인・수필가
가. 들어가며
풍경이라는 말은 감상의 대상이 되는 자연이나 세상의 모습을 말한다. 배경은 어떤 사물이나 풍경, 사건, 사고 등의 배후에 숨겨진 사정을 말한다.
태어난 이래 사람과 사람이 만나 서로 모종의 관계를 맺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모종의 관계는 때론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때론 부모라는 이름으로, 때론 자식이라는 이름으로 지칭되거나 불리게 되는 관계를 의미한다. 내 눈에 보이는 모든 관계는 풍경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하거나 보이는 것이다.
자연의 풍경과 관계의 풍경은 모두 ‘풍경’이라는 이름으로 피동의 현상을 보인다. 어떤 것에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은 김춘수의 ‘꽃’에서와 같이 의미화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아무리 좋은 풍경도 관심이나 시선에서 한 걸음 뒤에 존재한다면, 그것은 이미 풍경이 아닌 그저 일반적인 삶의 양태일 뿐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내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시의 말처럼 풍경이라는 것 역시 내가 풍경을 풍경이라고 인식하였을 때 비로소 풍경은 내게 풍경으로 인지되고 존재하며 세계가 되는 것이다.
세계를 만들거나 인식하는 것은 모두 같은 맥락을 갖고 있다. 영화 <메멘토>의 대사 중 일부처럼 눈을 감으면 세계는 존재하지 않고 눈을 뜨면 다시 세계가 존재하는 것과 같은 의미가 있다.
다시 한번 인식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자. 시를 쓴다는 것은 인식이라는 것의 상호작용과 같은 것이다. 어떤 현상이나 증명할 수 있는 사물을 보고 내 감정과 경험과 학습효과를 바탕으로 모두에게 다른 느낌으로 인지되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이다. 비근한 예로 구두 판매업을 하는 사람은 상대방을 볼 때 구두 먼저 보게 되는 것이며, 옷을 파는 사람은 상대방의 옷에 가장 먼저 눈이 가는 법이다.
시를 쓴다고 가정해 보자. 살아온 여정이나 살아온 방식과 학습의 축적된 이해도에 따라 주제와 소재는 다를 것이며, 같은 주제와 소재라도 보고 느끼는 사람마다 천변만화의 모습으로 보이게 될 것이다. 그런 이유로 인해 모두의 시가 다른 것이다. 겨울을 보고 가을을 이야기하는 시인, 전봇대를 보고 아버지를 이야기하는 시인, 그림자를 보고 친구 혹은 원수로 생각하는 시인 등등 공감의 영역이 다른 것은 공감의 기준이 되는 풍경에 대한 인식의 저변이 다를 수밖에 없는 각각의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시적 질감이라는 말은 그러한 개별 인식의 전환이 저마다 다른 것에서 기인한다. 한 가지 사물에서 수천 가지의 생각이 윤회하고 각색되고 만들어지는 것이 시의 옷을 입게 되면 전혀 다른 모습이 된다. 시를 쓴다는 것은 풍경으로 산다는 말이다. 좀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풍경을 만들며 사는 일이다. 가족이라는, 이웃이라는, 주변이라는, 직장이라는. 더 광의의 해석을 하면 삶과 세계라는 세계관을 수없이 만들다 부수다 다시 만들고 부수고 공감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인식은 사물을 분별하고 판단하여 아는 일이며, 동시에 심리 자극을 받아들이고 저장하며 인출하는 일련의 정신 과정적 개념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시를 쓰는 행위는 공통으로 보이는 풍경에 대한 심리 자극을 내 것으로 소화하여 나만의 그림으로 채색하는 것을 말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풍경, 나만의 풍경을 만들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배경을 읽는 일이다. 풍경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을 유추하거나 추론하여 나만이 볼 수 있는 환경을 인식의 세계 속에 삽입하여 새로운 정의를 부여하는 일을 배경이라고 말할 수 있다. ‘새로운 정의’는 기존 인식의 틀을 벗어나 시인 자신만이 가진 특별한 경험과 느낌의 프리즘을 통하여 전혀 다른 가치관을 만드는 작업이다.
가을 들녘에 맨드라미가 피었다고 가정해 본다. 왜 하필 저곳에 저 맨드라미가 피었는지, 일부러 심은 것인지, 풀씨가 날아와 자생한 것인지, 바람이 실어 온 것인지에 대한 해석을 모두가 다르게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다른 해석의 기반에는 이야기가 존재해야 한다. 나만이 아는 이야기이며 동시에 독자가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것 역시 시인의 몫이며, 시인이 바라보는 세상이다. 시인이 바라보는 세상은 뭔가 다를 것이라는 선입견이 아닌, 정말 뭔가 다른 무엇을 읽어내야 하는 것이 참시인의 모습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관습적인 사회적 가치관 역시 가장 기본이 되는 통념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아야 한다. 터무니없는 사유의 확장을 도모한다고 오직 자기만의 언어로 구성된 글에서는 상호 소통이라는 말이 무색해진다. 필자가 늘 강조하는 말이지만 시는 소통의 언어로 씌었을 때 가장 시다운 작품이 된다.
소통의 언어는 배경을 읽는 데 필요 불가결한 요소다. 비록 배경을 읽는 원근법은 달라도 피사체에 대한 근본적인 느낌은 동일해야 한다는 점이다. 피사체가 가진 자연적인 요소를 화학적인 요소로 변환하는 등의 무한한 상상력은 자칫 시를 시답지 않은 소리로 만들 소지가 다분하다. 양방 소통이 아닌, 일방 소통의 언어는 방언이나 또 다른 해석적 오해를 불러오게 만든다.
시는 나만의 것이 아니다. 시를 발표하는 순간 독자가 생기는 것이며, 그 독자는 시라는 풍경을 보고 그 시를 쓴 시인의 배경을 읽게 되는 것이다. 정지용의 ‘향수’는 정지용만의 ‘향수’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향수’가 되는 것이다. 정지용 시인이 느낀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는 고향은 시인만의 고향이 아닌, 독자 모두의 가슴 속에 또 다른 고향과 향수가 생성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우리는 모두 풍경으로 살다 배경으로 남게 된다. 인식과 무인식의 경계로 살다 누군가의 배경으로 남게 된다. 배경이 된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나의 후대를 이을 자식들에게 배경이 된다는 것은 가치를 매기는 배경이 아니다. 부모의 삶에서 나를 다지며 공부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아버지가 혹은 어머니가 살아오는 과정을 보거나 추론하여 내 삶의 반듯한 이정표를 만드는 것, 아니 만들게 되는 것. 어쩌면 그것이 우리가 시를 쓰고, 시집을 남기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내가 본 세상이나 내가 만든 가치관이 세상의 정답은 아니다. 세상에는 세 가지가 없다고 한다. 첫 번째는 공짜, 두 번째는 비밀, 세 번째는 정답이다. 시를 쓰는 이유는 정답을 알기 위해서가 아니며 정답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 관계에서 비롯되는 온갖 이유와 나눔과 질시와 구태의 감정들에 대하여 비교적 좀 더 정답에 근접한 나를 보여주는 것이 시를 쓰는 일이라면 적당한 시를 쓰는 이유가 될 것 같다. 내 글을 세상에 발표하고 남겨두는 것은 내가 살아온 것이 정답이라는 말이 아니라, 읽는 독자들이 나름의 정답을 구하기 위해 참고서를 한 권 더 제시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진리를 탐구하기 위한 경전은 많다. 진리를 정확하게 말하는 격언과 명언도 많다. 하지만 온당하게 이해되고 정당하게 인정받을 수 있는 진정한 의미의 진리는 솔직함에 있다. 물론 시에서 문학적 가치를 최우선으로 하는 것 역시 인정한다. 하지만 그 전에 시가 가진 본래의 모습인 소통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솔직함이다.
스스로 먼저 솔직한 작품, 스스로 감동할 수 있는 작품, 스스로 먼저 자신과 대화할 수 있는 작품 속에는 수사적이거나 문학적이거나 시적 질감의 깊이를 논하기 이전에 순박하고 질박한 밑그림이 그려있다. 희미하게 보이는 밑그림을 보고 시인의 궤적을 공감하고 내 삶의 기틀을 반성하거나 성찰하게 된다면, 그것이 시인으로서 가장 보람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그것이 풍경으로 살다 배경으로 남는다는 것의 가장 근접한 정답일지도 모른다.
나는 풍경이며 동시에 배경이다. 좀 더 많은 사연을 가진, 좀 더 많은 지혜를 가진, 좀 더 많은 깊이를 가진 배경으로 남는 것, 하영이 시인의 두 번째 시집 『둥근 오후』를 읽으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영이 시인의 작품 속 이야기들은 보통 사람들이 보통 기준으로 사는 눈높이를 제시하고 있으며, 이야기의 소재와 주제는 사회 통념을 허망하게 이탈하거나 무리하게 확장하여 교언과 영색으로 일관한 가치 없는 문장과는 비교할 수 없다. 나와 같은 지점에서, 위치에서, 크기에서, 깊이에서 하영이 시인이 바라보는 세상과 나의 눈높이가 같다면 그것으로 시는 성공한 것이다.
지근거리에서 발생할 수 있는 관계와 관계가 빚어낸 이야기는 밤하늘의 별처럼 초롱하다. 꾸밈이나 치장이 없이 다만 예지의 눈동자만 빛나는, 그래서 더욱 초롱한 밤의 인도자가 되는 듯하다면 지나친 과례일지 모르나 필자의 눈에는 그렇게 읽힌다. 하영이 시인이 꾸린 총 4부로 구성된 시 세계로 한 발 더 들어가 본다.
나. ‘둥근 오후’의 이야기들
둥근 오후를 생각해 본다. ‘둥글다’는 형용사와 ‘오후’라는 명사를 결합하여 만든 합성어로 읽힌다. 둥글다는 것은 모나지 않는다는 말이며, 동시에 원만하다는 의미이다. 오후는 일반적으로 오후 3시를 40대로 비유하는 것으로 유추할 때 40대 이후의 시간을 의미하는 것 같다.
둥근 오후를 정리하면 하영이 시인이 살아온 시간에 대한 정의가 정립된다. 둥글게 살아온 시간과 둥글게 살아갈 시간, 삶의 궤적을 반추할 때 뾰족하거나 아픈 상처의 흔적조차 감내하며 선하게 살아온 것을 의미하는 듯하다. 그러면서도 어느 시간의 변곡점 앞에서 뒤안길을 되돌아보고 현재보다 진보될 미래를 꿈꾸는 의미를 시집의 제호에 붙인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둥근 오후를 만들기 위해 시인이 본 세상의 이야기와 세상 속 이야기의 상관관계는 작품마다 작품의 길이와 상관없이 삶이라는 긴 여정의 시선을 담고 있다. 서평을 하기 위해 시집 원고를 받고 원고의 면면을 정독하고 나면 확장된 공감의 영역이 독자를 지배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환경, 조건, 방향, 목적 등의 이유를 가지치기하고 나면 누구나 삶이라는 근본적인 시스템과 느낌은 같을 것이다. 아침을 바라보는 시선과 계절을 바라보는 시선의 차이가 아닌, 아침을 받아들이는 마음과 계절을 받아들이는 마음이 같다는 말이다.
시집에 수록된 몇몇 작품을 통하여 하영이 시인이 바라본 세상, 바라볼 세상의 둥근 이유를 따라가다 보면 내 삶의 모습과 살아갈 모습의 또 다른 이미지가 묘하게 겹치는 것을 알게 된다. 어쩌면 그것이 시를 쓰는 이유와 시를 읽는 이유가 동일하다는 정당한 반증이라는 생각에 스스로 몸을 낮추게 되는지도 모른다.
시인의 말에서처럼 “나는 다른 사람의 그늘을 들여다보고 햇빛을 준 적이 있는가”라는 자신을 향한 질문의 요지처럼 세상을 낮추어 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겸손해지는 삶의 지혜를 얻을 수 있는 시집 『둥근 오후』 속 세상 이야기를 하나둘 살펴본다.
살아 있으려면
채찍을 맞아야 해
때로는 누구로부터
때로는 나 자신에게
채찍을 맞고
사정없이 돌아야 팽이지
자칫 흔들리기라도 하면
여지없이 채찍이 날아와
초점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더 빨리 돌아야 팽이지
중심 잃고 넘어지면
나는 팽이가 아니지
— 「팽이」 전문
원심력을 가진 팽이가 돌기 위해선 팽이채로 맞아야 한다. 살아 있는 동안 제 몸을 맞아야 하는 것이 팽이의 운명이다. 어린 시절 팽이 놀이를 하면서 팽이가 꼿꼿하게 서 있는 것이 내 팽이채에 의한 것임을 알지 못했다. 다만, 재미와 놀이의 한 방편이었을 뿐 팽이의 회전과 맞는다는 것의 상관관계가 삶 그 자체임을 인지하지 못했다. 흔들릴 때마다 중심을 잡기 위해 때론 동안거에 들어간 스님의 죽비처럼, 때론 가슴을 서늘하게 만드는 현자의 일갈처럼 채찍이 나의 중심을 잡아주는 것이다.
중심 잃고 넘어지면
나는 팽이가 아니지
팽이는 돌아야 팽이다. 멈춘 것은 팽이가 아니다. 팽이의 목적은 도는 것이다. 쉼 없이 도는 것이 팽이의 속성이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일을 하는 것이다. 끊임없이 사유하는 것이며 반성과 성찰을 하는 것이다. 잠시 비틀거릴 수는 있으나 그럴 때마다 가차 없는 채찍을 맞는다는 것. 그것이 팽이가 존재하는 이유를 연장하는 무기가 되는 것이다.
삶을 팽이에 비유한 시인의 혜안이 놀랍다. 인생은 팽이다. 늘 서 있어야 하며, 늘 돌아야 하며, 늘 자신이 팽이라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 동시에 팽이를 증명하기 위해 나는 내게 채찍을 때린다. 타인의 채찍도 필요하지만 정작 내가 내게 보내는 채찍의 강도가 높아질수록 팽이의 회전수는 올라가고 싱싱한 모습으로 자신의 자릴 굳건하게 지키게 되는 것이다. 둥글다는 것. 둥글어지기 위해서 우린 팽이처럼 자신의 채찍으로 자신에게 맞아야 한다. 맞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삶의 반경은 넓어지고 자전하는 회전수로 인해 당당한 팽이로 남을 수 있을 것이다. 중심을 잃지 않는다는 것은 팽이의 본질을 버리지 않는다는 말이다. 둥글어진다는 것은 내가 나의 본질을 버리지 않기 위해 수많은 채찍을 맞는다는 말이다.
하영이 시인의 팽이는 곧 자신이며 독자인 우리들인 것이다. 그것이 인생이라는 말을 에둘러 팽이와 채찍에 비유하여 표현한 짧은 작품에서 숙련되고 오래된 깊은 성찰을 느낀다. 그것이 하영이 시인의 매력이다.
눈이 시리도록 푸른 가을하늘이
심한 통증을 동반했다
두 팔 벌려 달려가도 달려가도
더 높이 멀어져만 가는 하늘은
갱년기를 동반한 채
통유리 벽을 타고 내려왔다
호르몬 조절을 해볼까
진통제를 먹어볼까
스스로 의사가 되어 진단을 내려 본다
지금 당신의 가슴에 뚫려있는 구멍을
치유할 수 있는 건
진통제가 아니라 사랑이랍니다
잠시 쉼표를 찍고
음악을 들으세요
단
신나는 곡만 골라서
그리고 사랑하는 눈으로 세상을 보세요
— 「처방전」 전문
“눈이 시리도록 푸른 가을 하늘이/ 심한 통증을 동반했다”는 표현에 공감이 간다. 가을앓이와도 같은 계절병이다. 더욱이 갱년기를 마주한 나이가 되면 더 깊은 병을 앓는다. 병원에서 처방을 받고 약을 먹어도, 호르몬 조절을 해도 신체적인 변화에 의한 갱년기는 도무지 나을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물리적인 변화에 감상적인 변화가 겹쳐 노곤하게 만드는 중년의 어떤 날, 하영이 시인의 처방은 사랑이라는 약이다. 사랑이라는 약은 진통제가 아닌 진통제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화학적인 것이 아닌 감상의 한 부분 흉통에 가장 효과적인 것은 사랑이라는 진통제라는 말이다.
더불어 쉼 없이 달려온 생의 어느 지점 즈음에서 쉼표를 찍으라는 제안을 한다. 마침표가 아닌 쉼표는 안식이다. 쉴 수 있는 여유는 다시 달릴 수 있는 촉진제가 된다. 음악을 들으라는 권유를 한다. 느린 음악이나 뒤떨어진 음악이 아닌 신나고 빠른 음악에 맞춰 자신을 힐링하라는 권면을 한다. 그리고 사랑하는 눈으로 세상을 보라는 가장 중요한 말을 빼놓지 않는다.
본다는 것은 가장 감각적인 행위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보는가 하는 문제다. 뾰족하거나 거칠게, 비틀리거나 엇갈린 눈이 아닌 삶의 가장 근본적인 온도를 가진 사랑의 눈으로 세상을 보라고 한다.
치유할 수 있는 건
진통제가 아니라 사랑이랍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눈으로 세상을 보세요
묘약(妙藥)이라는 말이 있다. 어떤 특정한 병에 신통하게 잘 듣는 약을 통칭하는 말이다. 사랑은 묘약이다. 병이나 통증을 유발할 수 있는 것들을 통제하거나 치료할 수 있는 사랑이라는 약은 가장 얻기 쉬우면서도 가장 얻기 힘든 약일 수도 있다. 전제는 세상을 보는 눈이다. 세상을 보는 눈에 사랑을 담아 본다면 가장 얻기 쉬운 약이 된다는 말이다.
하영이 시인의 「처방전」은 단순하고 질박하다. 어려운 단어와 의학적인 용어로 뒤섞인 현대적 어법이 없다. 그 점이 시를 순수하게 만든다. 분석이나 해석이 필요한 행간이나 문장이 아닌, 눈으로 읽는 것으로 이미 치유의 과정을 배울 수 있는 ‘누구나’에 해당하는 처방전이기 때문에 그 가치가 더욱 빛나는 것이다.
시가 그런 것이다. 난삽하거나 화려한 언변의 수사로 치장할수록 공감의 영역이 줄어들며 말하고 싶은 주제가 중언부언이 될 소지가 다분해진다. 지극히 절제된 행간은 나와 너의 관계, 시인과 독자와의 관계를 부정이 아닌 긍정의 관계로 만들며, 만들어진 결과물로 인해 긍정의 힘을 발휘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한 편의 시에서 세계와 우주와 철학을 섭렵하기를 바란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다만,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공감의 언어, 단어, 행간 하나하나가 미래지향적 삶을 윤택하게 만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다. 시를 읽을 때 사랑하는 눈으로 읽는다면 시집의 따듯한 온기가 내게도 전해질 것이며, 그 온기는 이웃과 주변에 부드러운 파스텔 질감으로 전이될 것이다.
성당을 중심으로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작은 마을
성당 옆 묘지에 생화 몇 송이
금방 누군가 다녀간 듯
꽃잎이 생생하다
잎 다 떨군 가지는
겨울을 이겨내기 위해 동면하지만
우리는…
묘지와 집이 공존하는 세계
생(生)과 사(死)의 경계가 어디쯤인지
주검도 삶도 한낮 조각구름인 것을
어쩌면 단단하고 차가운 요람
그곳으로 돌아가기 위해 바둥대는 것일지도
평화로운 작은 마을
국화꽃 환하게 미소 짓고
둥근 오후가 영글어 간다
— 「경계」 전문
삶과 죽음은 늘 공존한다. 지금 이 시간에도 지구 어디선가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고 어디선가 하나의 생명이 소멸하고 있을 것이다. 사람에게 부여된 탄생과 죽음이라는 운명은 누구도 바꿀 수 없는 커다란 명제이면서 동시에 자연의 섭리이다.
시인은 성당에 부속된 작은 마을과 그 옆 묘지를 보았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그것을 경계라고 말한다. 경계는 사물이 어떠한 기준에 의하여 나누어지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시인이 말하는 경계는 그렇게 나뉘는 경계보다는 경계와 경계의 공존을 이야기하는 듯하다. 묘지와 집의 공존, 생과 사의 공존, 경계를 공존이라고 인식하는 것에서 삶은 좀 더 둥글어진다. 극단적인 이분법이 아닌 공존. 함께 존재하는 것을 공존이라고 한다. 그렇기에 그 묘지와 집의 공존을 보며 둥근 오후가 영글어 간다는 표현을 했다.
평화로운 작은 마을
국화꽃 환하게 미소 짓고
둥근 오후가 영글어 간다
하영이 시인의 시집 제목인 ‘둥근 오후’에 대한 시인의 정의가 선명하게 인식되고 부각된다. 둥근 오후의 이미지는 경계와 경계로 인한 경계에 대한 인식의 차이가 아닌, 경계에 대한 공존이다. 경계와 경계가 공존하는 것에 대한 정의는 평화로운 작은 마을과 국화꽃 향기가 환하게 미소 짓는 그곳이다. 그 마을 옆 묘지에 놓인 생화 몇 송이, 누군가 금방 다녀간 듯 꽃잎이 생생한 그런 곳이다. 둥근 오후가 그려낸 이미지는 작은 평화와 소시민적인 안식과 삶과 죽음을 동일시하는, 그런 대승적 관점이다.
하영이 시인이 그린 세상의 모습은 그 질감이 화려한 채색을 바탕에 둔 것이 아닌, 오래 살아본 사람만이 아는 실크와 같은 부드러움이다. 포용이라는 말이다. 주어진 것들에 대한 반항이나 저항이 아닌 순응하는 자세, 받아들이려고 하는 자세, 그 경계마저도 실루엣처럼 보는 눈이 가진 포용성이다.
분주한 일상 속에서 세상의 모든 것들을 포용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누구나 경계선을 긋거나 경계하거나 구분하고 나누는 것이 일상이다. 그렇게 살아야 경쟁사회를 극복할 수 있다는 헛된 믿음을 갖고 사는 것이 우리네 모습이다. 하지만 한 걸음 뒤에서 시인의 눈으로 보는 세상은 전혀 다를 수 있다. 경계를 경계가 아닌 포용의 무한대로 인식한다면 세상은 지금보다 더 둥글게 자신을 만들어나갈 수 있는 공부의 기회를 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관점이다. 세상을 보는 관점에 따라 얼마든지 경계는 둥근 오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하영이 시인의 시집에서 배울 수 있다. 어쩌면 그 점이 『둥근 오후』라는 시집에서 가장 많이 얻을 수 있는 수확이라는 생각이 든다.
둥근 오후의 관점과 상징성을 보여주는 「고드름」과 「장미꽃 한 다발」을 소개해 본다. 두 작품의 중심은 세상 보기다. 세상을 보는 눈의 온도를 말하고 있다.
높은 곳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니
그렇게도
뾰족한 송곳이 되었지
제 몸 녹아내려
물이 되고야
비로소
땅으로 내려앉았다
그렇게
녹아버리고 말 것을
— 「고드름」 전문
「고드름」은 아무리 뾰족하고 날카롭게 송곳처럼 살아도 결국 녹아버리고 말 것들. 둥글게 살라는 말을 하고 있다. 잠시 잠깐 높은 곳에서 아래를 오시하며 살 수도 있지만 긴 삶의 시간 속에서 그것은 잠시일 뿐이라는 말이다.
누군가 장미꽃 한 다발이라 이름 지었다
아름답고 향기롭고 붉은빛이 강렬한
꽃다발이 되기 위하여
수백 송이 안개꽃이 장미를 감싸 안고 있다
제 몸에 있는 습기마저 말려가면서
그렇게 나는 너의 배경이 되어준다
— 「장미꽃 한 다발」 부분
「장미꽃 한 다발」은 장미꽃을 둘러싼 안개꽃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주변이라는 안개꽃과 장미. 안개꽃은 내 몸의 습기까지 말려가면서 장미의 배경이 된다는 말이다. 삶의 방식에 대한 이야기다. 나는 너의 배경이 된다는 것. 이 시집의 서평 서두에 언급한 배경으로 남는다는 것에 대한 나름의 정답을 이야기한다.
배경이 된다는 것은 한편 서글픈 일이면서도 한편 거룩한 일이다. 누군가를 돋보이기 위한 희생은 부모를 언급하지 않아도 충분히 거룩하고 경건한 일이라는 것을 모두 알고 있다. 제 몸을 말려가면서 배경이 되어 준다는 대승적 희생이야말로 현대사회의 각박한 시간과 각박한 정서에 경종을 울리기 가장 적당한 말이다.
둥근 오후가 만든 이야기들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숙성되고 있었으며 숙성될 것이다.
두 개의 심장을
가슴에 품어보지 않았더라면
알지 못했을지도
여자로 태어나서
엄마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만큼의 무게인지
행여
줄을 놓쳐버리기라도 하면
추락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가족이라는 것을
흔들릴 때마다
겁먹지 말고 징징대지도 말고
정면으로 응시하라며
무게에 추를 달아주던 어머니
어머니의 가슴에서 떨어져 나와
하나의 심장이
또 다른 심장을 품게 되었네요
아름다움은
아름다운 방향에서 보아야 보이고
엄마로 살아온 지 30년
이제야
어머니의 참모습이 보이네요
— 「중심」 전문
부모가 되고 나니 부모가 보인다는 말이 있다.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 알았다면”이라는 말도 있다. 산다는 것은 온통 후회와 연민의 연속이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세상. 여자로 태어나서 엄마라는 명찰을 달고 산다는 것의 의미는 매우 크다.
가족이라는 구성원의 핵심이면서도 동시에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막중한 책임감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엄마라는 이름이다.
두 개의 심장을
가슴에 품어보지 않았더라면
알지 못했을지도
두 개의 심장, 내가 어머니가 된 것과 나의 어머니, 그 오버랩을 통해 엄마라는 이름의 무게를 체감했을 시인의 심정을 헤아려 본다. 나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가족이라는 구성원을 통해 내가 만들어지고 내 모습과 성격과 보여주어야 할 모습이 결정된다는 것은 책임 이전에 온전히 나를 버리는 일이다.
태어난 이름과 주어진 이름의 무게는 전혀 다르다. 아파도 아프지 않아야 하며 힘들어도 힘들지 않아야 하는 것이 엄마라는 이름이다.
그것은 중심을 바로잡아야 할 때 바로 잡을 줄 아는 제대로 된 나를 인지하고 나와 함께 견뎌내며 살아야 하는 겸손한 수행과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그렇게 엄마가 되고 내 엄마의 희생이라는 모습을 발견하고, 그 희생의 끝이 가족의 행복으로 귀결된다는 점이 쉬운 일 같으면서도 쉽지 않은 중심 찾기라는 것을 알게 된다.
행여
줄을 놓쳐버리기라도 하면
추락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가족이라는 것을
중심은 중요하고 기본이 되는 부분이다.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중심이며, 가족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중심이며, 삶과 일 모든 지근의 일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중심이다. 가족을 하나의 원으로 가정할 때, 그 원이 원의 형태를 유지하기 위한 필수 요소가 중심이다. 원은 구체이며 동시에 둥글다는 것을 의미한다. 둥근 오후를 유지하기 위한 필수 요소가 중심이라는 말이다.
시 본문에 나온 말처럼 “아름다움은/ 아름다운 방향에서 보아야 보이”는 것이다. 내 어머니에게서 느낀 삶의 중심을 내가 배우고, 배운 그것을 자식에게 올바르게 보여줄 때 중심의 전이가 제대로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나’다. 내 중심이 바로 서고 흔들리지 않을 때, 가족의 삶이 흔들리거나 추락하는 일이 없게 되는 법이다.
아무것도 아닌 일상의 진리 같은 말이 때론 경전의 훌륭한 말씀보다 더 아름다울 때가 있다. 그것이 시라는 매개체를 통하여 독자에게 전달되어 공감의 영역을 넓힐 때 비로소 시인의 가치는 빛나는 것이다. 한순간에 얻어지는 진리가 아니다. 오랜 시간 구증구포(九蒸九曝) 하여 비로소 홍삼이 되듯 세월이라는 시간을 감내하고 견디며 인내하여 만든 내가 되어야 가능한 이야기다.
엄마로 살아온 지 30년
이제야
어머니의 참모습이 보이네요
“엄마로 살아온 지 30년/ 이제야/ 어머니의 참모습”을 본다는 말이 아릿하게 들린다. 그 무수한 인고의 세월을 견디며 혹은 스스로 팽이가 되어 중심을 잡느라 채근하거나 채찍질을 한 시인의 노력이 필자를 반성하게 만든다. “어머니의 가슴에서 떨어져” 나온 “하나의 심장이/ 또 다른 심장을 품게 되었”다는 고백이 여느 고백보다 더 진솔하게 들리는 것은 필자만의 느낌이 아닐 것이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귀감이 되는 삶의 옳은 방향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이런 어머니의 삶에 대한 반추는 시집에 수록된 「감자 2」라는 작품에서 잘 표현되어 있다. 소개한다.
감자 하나에
여러 개의 눈이 박혀
제 몸 야금야금 갉아 먹더니
탱탱하던 살결이
쪼글쪼글해졌다
어미는 젖을 빨리고도
껍질마저 내어 주었다
새 생명 하나 남겨 주었다
— 「감자」 전문
감자와 어머니, 적절한 비유다. “감자 하나에/ 여러 개의 눈이 박혀/ 제 몸 야금야금 갉아 먹더니” “어미는 젖을 빨리고도/ 껍질마저 내어 주었다” 그리고 “새 생명 하나 남겨 주었다”는 감자에 빗댄 어머니의 희생을 시인은 기억하고 또 기억하여 한 편의 시로 남겼다.
기억한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잊지 않는다는 말이다. 현대사회의 이중적 성격과 비교할 때 모두의 몸에 깊이 음각해야 할 말. 기억한다는 말이다. 기억이 사라지면 존재도 없다. 존재가 없으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세계’도 없다. 극단적으로 부모도 자식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웃도 주변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기억 상실에 걸리지 않아야 한다. 기억할 것은 기억해야 하며 고마워할 것은 고마워해야 한다. 그것이 사람의 도리다. 공자, 맹자를 거론하지 않아도 당연히 알아야 할 공동체의 규범이다.
시집에 수록된 몇 편의 작품을 통해 하영이 시인이 그리고자 하는 세계의 밑그림을 살펴보았다. 배경으로 남는다는 것. 누군가의 배경이 되어 주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것은 자기중심을 놓지 않고 흔들림 없이 스스로 다독이며 어루만지며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나’ 개인으로의 내가 아닌 관계의 중심에 선 ‘나’의 모습을, 그 형태가 햇빛에 투영되어 보이는 그림자의 모습은 이래야 한다는 것을 하영이 시인은 말하고 있다.
모든 작품의 배경에 공통으로 존재하는 화두는 배경이 되어 준다는 것이며, 동시에 중년이라는 이름을 가진 둥근 오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둥근 오후』는 이러한 배경 위에 잘 직조된 섬유처럼 윤택한 빛을 머금고 있다.
다. 맺으며
시를 쓰는 것에 대하여 오영록 시인의 말을 잠시 인용하여 경청해 본다.
난 이렇게 생각해요. 시란 우물을 파는 것이다. 예전에 손으로 우물을 팔 때는 석 자 넓이로 파지요. 왜냐하면 사람이 거동할 수 있는 최소한의 넓이며 효과적이기 때문일 겁니다. 아무 곳이나 판다고 다 물이 나오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렇지만 파다가 바위가 나오면 그곳은 더이상 팔 수가 없지요. 하면 다른 곳으로 빨리 옮겨서 파는 것이 상책입니다. 아무리 필요한 부엌 근처라 해도 헛수고니까요. 하고 석 자 이상 구태여 넓게 파기 시작한다면 물이 나오기도 전에 지쳐서 팔 수가 없을 겁니다. 그렇다고 구덩이만 깊다고 샘이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구덩이를 팔 생각은 하지 않고 자꾸만 흙을 모아 구덩이가 깊어 보이게만 하고 있습니다. 우물을 팔 수 있는 땅도 중요하지요. 모래밭에다 구덩이를 파면 물은 쉽게 구할 수 있지만, 그 구덩이는 금세 메워지고 말 수도 있습니다. 파기 힘든 우물일수록 좋은 샘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동네 사람들이 다 즐겨 음용하는 우물이 되겠지요. 너무 많은 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우물의 터전을 넓게 잡는 것이며 아무리 화려한 수사로 덧칠한다 해도 읽히지 않는 시는 반석 위에 흙을 모아 구덩이를 만드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맨손으로 구덩이를 팔 수는 없겠지요. 곡괭이도 있어야 하고 흙을 담아낼 그릇도 있어야 하고 도구가 있어도 어떻게 쓰는지도 알아야 하고 하는 것은 모방, 배움, 흉내 내기 이것이 다독이며 다작이라 생각합니다. 우물을 잘 파는 사람은 그만의 비결이 있을 겁니다. 그것을 배우는 것이 습작이겠지요. 처음부터 잘 팔 수는 없어요. 곡괭이에 발등도 찍혀보고 이마도 부딪혀보고 하는 과정이 있겠지요. 오늘의 결론은 심상을 넓게 잡지 말고 깊게 파라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다독, 다작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중략)
— 『시 쓰기에 대하여』(오영록)에서
위 인용한 오영록 시인의 말을 배경에 깔고 하영이 시인의 두 번째 시집 『둥근 오후』를 읽는 내내 가을이 가을처럼 느껴졌다. 계절의 감상을 가슴에 품고 사람 사는 냄새를 맡는 것은 고된 작업이 아닌, 행복이라는 길을 동행하는 기분을 갖게 했다. 사람 사는 냄새는 별것 아니다. 땀 냄새, 눈물 냄새, 생선 냄새, 아침밥 먹은 냄새, 때론 퀴퀴한 냄새까지 포함한 모든 사람이 품고 있는 냄새다. 간혹 우리는 냄새라는 단어 자체에 현혹되어 냄새에 거부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결국 나 역시 냄새 풍기는 사람이라는 것을 잊곤 한다.
시를 쓴다는 것이 그런 것이다.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이는 것을 보이는 그대로, 느낀 것을 느낀 그대로 표현하고 전달하고 전승하여 나와 동시대를 사는 모두에게 같은 공감의 영역을 선물하는 것이다.
교언영색보다는 진솔에 더 무게를 두고 수사적 덧칠보다는 재료 자체가 가진 고유의 질감을 충분하게 살려 천연의 광택을 내게 만드는 것이 먼저 될 때 한 편의 시가 주는 감동은 질박하지만 깊은 장맛을 내는 것이다.
하영이 시인의 『둥근 오후』는 충분히 맛을 낼 줄 아는 명인이 빚은 유명한 술이 아닐 수도 있지만, 반면에 우리가 익히 아는 이웃에서 빚은 맛깔나는 막걸리와 같은 정(情)과 부드러운 목 넘김이 있다. 거나하지 않게 적당히 가을 노을을 즐길 준비가 되었다면 양지바른 곳에 커피 한 잔과 함께 동석하여 『둥근 오후』를 펴보자. 어느 페이지에서도 나와 다르지 않은 사람 사는 냄새와 이야기들이 오후의 한때를 푸근하고 따듯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하영이 시인의 주변에 있는 가족을 포함한 모두가 시인의 말을 귀 기울여 듣는다면, 이 계절은 더욱 풍성한 은총을 우리에게 나누어 줄 것이다. “사랑하는 눈으로 세상을 보자”는 시인의 말이 오래 가슴에 남을 것 같다. ▨
* 가천문화재단 창작지원금으로 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