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의 생활문화사
1. 1980년대는 가장 격렬했던 ‘정치’와 ‘투쟁’의 시대였다. 1980년 ‘광주항쟁’을 피로 물들이며 집권한 군부는 감시와 억압을 통해 민주주의를 통제하였다. 역사가들은 1980년대의 주축이었던 민주화 세력을 1987년 기준으로 ‘386세대’와 ‘후386세대’로 나눈다. 6월 시민운동으로 대통령 직선제와 대의제 정치 프로그램을 획득한 정치권과 운동지도권은 급격하게 보수화로 들어섰고, 이에 반발했던 또 다른 운동권은 더욱 격렬한 정치투쟁에 돌입했지만, 결과적으로 그것은 1991년 5월 대투쟁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정치의 시대였던 1980년대의 막이 내린 것이다. 정치적 투쟁이 시민들의 지지를 이끌어내지 못한 이유는 투쟁 방식의 과도함과 정치적 상황의 변화가 주요 요인이었지만, 근본적으로는 1980년대를 서서히 변화시킨 생활문화의 반영이기도 하였다. 분명 1980년대는 정치적으로는 암흑기라 말할 수 있지만, 생활문화적 측면에서 개방화와 자율화가 확장된 시기였다.
2. 1980년대의 특징은 어쩌면 ‘먹거리’의 풍요로움에서 나타난다. 1970년대까지 유행하던 ‘보릿고개’라는 말이 점차 낭만적인 과거를 회상하는 추억으로 상징되듯이, GDP의 성장은 ‘곡물소비의 감소와 육류 소비의 증가’라는 현상으로 나타났다. 늘어난 생활의 여유는 갈비, 특히 ‘소갈비’의 수요로 표현되었다. 곳곳에 만들어진 ‘가든’ 형태의 소갈비집들은 부의 상징이었고, 생활의 여유를 표현하는 장소였다. 하지만 갈비의 양은 한정되었고, 수요를 감당할 수 없었다. 그 대체품으로 ‘돼지갈비’의 수요 또한 증가했지만, 그 또한 대중들의 소비를 따라갈 수 없었다. 그때 등장한 것이 바로 ‘삼겹살’과 ‘양념치킨’이었다. 삼겹살과 양념치킨은 한국적인 방식으로 만들어지고 사람들이 선호하던 소주와 생맥주와의 연결을 통해 한국인의 최애 음식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특히 양념치킨은 재료의 공급주기가 빨랐고, 한국식 양념과 프로 야구라는 새로운 문화와 결합해 미국에서 진출한 ‘KFC'라는 치킨 체인점을 압도하였다.
3. 1980년대의 문화를 근본적으로 바꾼 사건은 ‘올림픽’이었다. 군부는 민심의 동요를 잠재우고, 사회통합이라는 명분으로 올림릭 유치를 추진하였고 결국 1981년 바덴바덴에서 ‘88 서울 올림픽’ 개최를 확정하였다. 이후 한국 사회는 급격한 올핌픽 준비에 돌입한다. 일명 가시와 감시 그리고 괄시의 정치가 작동한 것이다. ‘가시의 정치’란 외국인의 시선에 포함되는 장소에 대한 현대적인 건설과 공적인 질서 도입이다. ‘올림픽 국가’의 부끄럽지 않게 거리를 깨끗이 정리하고 공중도덕을 지키며, 도심부개발과 주택개량 그리고 한강종합개발 같은 사업이 추진된 것이다. 이때 한강 둔치가 개발되어 현재의 한강 풍경이 완성될 수 있었다. “국가는 가시권의 정비 과정을 도시 및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정화과정과 동일시했다.”
4. 하지만 ‘올림픽’은 엄청난 어둠을 동반했다. 주택개량이라는 명분으로 서울 곳곳의 무허가 주택이 철거되었고 이들은 변두리로 쫓겨나야 했다. 이때 철거된 가구수는 훗날 베이징 올림픽을 제외한다면 최악의 폭력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당시의 처절함은 <상계동 올림픽>이라는 다큐 필림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러한 개발과 정화의 과정 속에서 우리 사회는 급격한 ‘계층적 위화감’이 늘어났고 ‘빈민’이라는 특정한 집단에 대한 사회적 관심도 확산시켰다. “가시권의 무질서와 비위생을 제거하려던 정권의 움직임은 역설적으로 ‘빈민’으로서의 정체성을 탄생시킨 계기가 되었다.”
5. 1980년대의 ‘스포츠 공화국’은 ‘올림픽’ 뿐 아니라 다른 종목의 스포츠에서도 ‘프로화’를 도입시켰다. 프로화된 종목 중에서도 ‘야구’는 압도적인 인기와 국민적 호응을 이끌어내었는데 이것은 1970년대 이미 확립된 지역별 ‘고교야구’의 인기를 고스란히 계승한 덕이었다. ‘프로야구’는 전격적으로 대통령의 지시로 이루어졌다. 소극적이던 대기업을 반강제로 참여시켜 급조된 ‘프로야구’는 1982년 시작되었다. 프로야구의 성공은 여러 가지 요소의 결합으로 완성되었다. 지역적 특색의 강조는 도시로 진출한 지역사람들의 애향심을 자극하였고, 새로 방영된 컬러 TV와 결합되어 거의 매일 방송하는 방송 시스템의 효과를 보았으며, 정치적 억압 속에서 억눌린 사람들의 심리적 해소책으로 작용하였다. “삼엄한 권위주의의 통치에 숨죽이던 이 시기 대중에게 야구 관람은 잠깐이나마 숨통을 틔어주는 바깥 공기였고 야구장은 억눌려온 정치적 울분을 완화된 형태로나마 터뜨릴 수 있는 해소의 공간이었다.”
6. 1980년대는 분명 생활의 향상을 가져온 시간이었다. 소득이 향상되면서 사람들의 욕구는 커졌고, 특히 주거에 대한 욕구도 커져갔다. 하지만 정부의 강력한 ‘투기억제책’과 아직 충분하지 못한 소득은 많은 사람들을 ‘셋방살이’의 설움 상태에 있게 했다. 정부는 ‘주택부금’을 통해 국민주택 보급과 ‘주택예금’을 통한 민간주택 신청 제도를 운영했지만 충분한 이익을 보장하지 못했기 때문에 민간기업의 참여가 적었다. 이때 정부의 새로운 ‘주택법’이 서울의 풍경을 변화시켰다. 1984년 정부는 단독 주택에 별도의 부엌과 화장실, 출입구 등을 설치할 수 있도록 건축법을 바꾸었다. 이 법의 시행 이후 수많은 단독 주택들이 ‘다가구 주택’으로 변모하였다. 통계에 따르면 1980년에서 1990년까지 우리나라 전체 가구 수는 42%가 증가하였는데 이가구수 증가의 대부분이 바로 단독주택에서 개량된 다세대 주택이 차지한 것이다.
7. 주택의 부족과 열악한 생활조건은 정부의 과감한 주택정책의 수립을 가져왔다. 1987년 선거를 통해 집권한 노태우는 1988년 200만호 주택 건설 계획을 발표했지만, 반응이 싸늘하자 곧이어 서울 인근의 30만호 주택 공급의 ‘5개 신도시 계획’을 시행하였다. ‘신도시’의 시작이었다. 분당, 일산, 중동, 평촌 등에 만들어진 신도시는 수도권의 풍경을 변화시켰다. 이와함께 주택기금이 확충되면서 공공주택의 건설이 늘어났고, 1989년 임대차 보호기간이 1년에서 2년으로 늘어났다. ‘택지개발촉집법’이 통과하면서 정부가 토지를 수용하여 민간기업에게 싼 값으로 분양할 수 있게되었다. 일련의 주택관련 정책은 분명 여러 가지 한계와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집값 상승을 억제하고 저소득층의 주거 안정에 어느 정도 효과를 발휘했다. 하지만 ‘주택시장’ 특성상, 언제나 공급과잉과 수요증가에 따른 주거 불안정이 끊임없이 발생하였다. 어쩌면 마르크스가 말한 자본주의의 가장 큰 취약점인 ‘주기적인 공황의 불안’이 바로 주택시장에서 명확하게 작동되는 느낌까지 준다.
8. 1991년을 정점으로 운동권의 투쟁은 시민들의 호응을 받지 못한채 몰락했다. 그것은 운동의 방향과 방식의 부적절함에서 기인할 수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변화된 시민들의 생활에서의 변화와 조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987년의 투쟁에서 형식적으로나마 대의민주제의 원칙을 확보했고, 국민선거를 통한 민주적 정부의 가능성을 확보한 상황에서 나타난 과격한 투쟁은 일상의 삶을 위협하는 폭동으로 인식되었고, 그 과정에서 벌어진 수많은 자발적 ‘죽음’은 안타까움과 함께 운동권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게 만들었다. 이제 시민들의 관심은 좀더 여유롭고 안락한 삶에 대한 욕망으로 향했다. 한국 사회에서 가장 풍요롭고 욕망이 들끓던 90년대로의 진입인 것이다.
첫댓글 - 좀더 여유롭고 안락한 삶에 대한 욕망!!! 정치와 경제, 사회와 문화도 여기에 바탕을 두고 움직인다. 언제나 가장 큰 선거 이슈는 '경제'가 될 수밖에 없는 구조가 오늘날의 모습이다. 먹고 사는 것이 해결된 다음에 다른 문제를 이야기 할 수 있게 된다. 이번 선거 경제 정책들에서 신선함까지야 바랄 수는 없지만, 그래도 조금은 보다 나은 성장과 약자를 배려하는 정당 정책들이 나오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