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지자의 마음
(렘10:17-25)
하나님만이 영원한 왕이시고
우리의 인생을 주관하시고 다스리시고
책임지시는 분이시라고 외쳐도
남유다 백성들은 꼼짝도 하지 않습니다.
9장에서도
선지자의 애통한 탄식의 소리가 있었지만
본문에서도 다시 선지자는
남유다의 심판을 선포하면서
애통한 마음을 가지지 아니할 수 없었습니다.
패역한 남유다에 임할 하나님의 심판을
선지자는 4가지로 선포합니다.
첫째로 짐을 꾸려 포로로 끌려갈 준비를 하라는 것입니다.
(17-18절)
이것은 곧 남유다의 멸망을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보라 내가 이 땅에 사는 자를
이번에는 내던질 것이라
그들을 괴롭게 하여 깨닫게 하리라”
남유다 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은
멸망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평강하다 평강하다” 고
백성들을 가르쳤습니다. (렘6:14)
그러므로 선지자의 선포는
그들에게 충격적으로 들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선지자의 말은
마음에 두지 아니하였습니다.
외면하고 무시해버렸습니다.
“그들을 괴롭게 하여 깨닫게 하리라” 라는
말씀을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남유다의 심판은 그래도 깨닫게 하기 위한
징계의 목적을 가진 심판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때에 심판은 어떻습니까?
깨달을 수 있는 기회가 없습니다.
깨달을 수 있는 기회는 지금입니다.
지금 마지막 때를 위해 준비해야 합니다.
남유다가 짐을 준비해야 한다면
우리는 믿음을 준비하고
성령의 기름을 준비해야 합니다.
7년 대환난이 들어서면
이러한 믿음과 성령의 기름을 준비하기가
심히도 어렵고 힘이 들 것입니다.
마지막 때를 준비하며 살고 있습니까?
무엇을 준비하고 계십니까?
마태복음 25장에서 나온
미련한 다섯 처녀의 모습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둘째로 그 날을 위해 슬퍼하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19-20절)
선지자는 그 날의 고통이
자신이 당하는 고통처럼 말하고 있고
그 날의 슬픔이
지금 눈 앞에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19절의 말씀을 보세요.
“내가 중상을 당하였도다”
“이는 참으로 고난이라 내가 참아야 하리로다”
선지자의 고통은
그저 막연한 심정적 아픔이 아니라
칼에 맞아 중상을 입은 것처럼
고통스럽다는 것입니다.
20절 말씀도 보세요.
선지자는 남유다의 장막이 무너지는 것은
“내 장막이 무너지고” 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당시에 남유다의 멸망이 몇 년 후에 왔습니까?
40년 후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 선지자가 이토록
실제적으로 당하는 아픔처럼 아파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의 말씀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믿었기 때문에
선지자의 마음이 이토록 아픈 것입니다.
오늘날 이 시대에
마지막 날을 위해 슬퍼하는 자들이
얼마나 있을까요?
창세 이래로 볼 수 없는
환난 앞에 죽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애통해 하며 슬퍼하는 자들이 얼마나 있을까요?
왜 슬퍼하는 마음을 갖지 못하는 것일까요?
하나님 말씀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설마 그런 날이 오겠는가?” 생각하기 때문에
그 날에 대해서 아픔이 없는 것입니다.
그 날은 반드시 올 것입니다.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마24:35)
예레미야 선지자처럼 그 날에 당하는 고통과 슬픔을
내가 당하는 것처럼 느끼면서
마지막 날에 예언의 말씀을 전하는
귀하고 복된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어리석고 무지한 자들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21-22절)
21절을 보세요.
목자들은 어리석었다고 했습니다.
어리석음이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하나님을 찾지 아니한 것이
어리석고 무지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당시에 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을 찾지 아니했습니다.
“양떼” 들은 백성들을 의미하는데
어리석은 목자들의 가르침을 받은 자들은
흩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으로 흩어버리시겠다는 것입니까?
22절을 보세요.
북방에서 오는 세력으로
즉 바벨론 세력으로
그들이 그렇게 믿었던 예루살렘 성이
황폐케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거짓되고 어리석은 가르침은 받은 백성들은
멸망의 문 앞에서야
지도자들의 가르침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화살이
이미 활시위에서 떠난 후 였습니다.
마지막 때에도
어리석은 가르침을 받고
전혀 종말에 대한 준비도 하지 않고 살아간 자들은
휴거의 사건이 일어나고
아무리 땅을 치고 후회를 해도
이미 늦었습니다.
한 번 닫힌 구원의 문은
두 번 다시 열리지 않을 것입니다.
넷째로 선지자는 영원한 왕이신 하나님께
중보 기도를 하였습니다. (23-25절)
남유다 백성들의 완악한 모습 앞에
선지자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 애통하는 마음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 밖에 없었습니다.
선지자의 중보 기도를 3가지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인생의 길이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하였습니다.
선지자가 이처럼 고백한 것은
남유다 백성들의 나약함을 기억하시고
긍휼을 베풀어 달라는 것입니다.
죄인들인 인간은 제 스스로
인생의 길을 걸어갈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하나님이 붙잡아주지 아니하면
죄만을 짓다가
짐승처럼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들입니다.
죄악으로 가득 찬 남유다 백성들을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한 남유다를 위해
선지자가 기도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바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매달리셔서 하신
첫 번째 하신 기도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눅23:34)
하나님의 사랑으로도 깨닫지 못하고,
말씀으로도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고 무지한 자들에게 바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하심 뿐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였습니다. (24절)
선지자는 징계를 면해달라고 기도하지는 않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에 맞지 않을 뿐 아니라
남유다 백성들의 죄악을 생각할 때
합당하지 않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선지자는 남유다의 죄를
자신의 죄처럼 기도하였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셨습니다.
즉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27:46)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인류의 죄를
십자가에서 몸소 감당하시고 죽으셨습니다.
오늘날도 이 시대의 타락 앞에서
세상을 비판만 할 것이 아니라
나의 죄 때문임을 깊이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미혹한 세력들을
멸하여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25절)
남유다 백성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당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남유다 백성들을 타락케 만들어서
우상을 섬기게 한 미혹하는 세력들에게
하나님의 분노를 부어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오늘날도 이 시대 타락한 자들을 미워하기 전에
그 배후에 있는
악한 사탄의 세력들을
미워하고 저주해야 할 것입니다.
(엡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아다니고 있는
어둠의 악한 사탄의 세력들과
싸우는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남유다는 영원한 왕이신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왕으로 섬기며 살았습니다.
선지자의 애끓은 호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어리석은 길을 돌이키지 아니했습니다.
영원한 왕을 버린 남유다의 비극은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길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은 이 땅에 육신으로 오셔서
자신이 만 왕의 왕이시고 만 주의 주가 되심을
온 천하에 증명해 보이셨습니다.
인류 역사상 예수 외에
누가 사망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신 자가 있습니까?
그 누구도 예수 외에
자신의 죽음을 이긴 자가 없습니다.
그들은 모두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갔습니다.
이제 머지않아 만 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다시 오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왕은 누구이십니까?
여러분의 주인은 누구이십니까?
예수 그리스도 만이 우리의 주인이시고
우리의 구원자이시고
영원한 왕이심을 믿고 살아가는
귀하고 복된 자들이 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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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선지자의 마음 예레미야10:17-25절
햇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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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8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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