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선고 부군 유사〔先考府君遺事〕
부군의 휘는 응일(膺一)이고 자는 경언(敬彦)이다. 평강 채씨(平康蔡氏)는 실로 우리 동방의 드러난 성씨이다. 6대조 휘 난종(蘭宗)은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이다. 5대조 휘 경선(慶先)은 호가 죽촌(竹村)이니, 홍문관 응교(弘文館應敎)이다. 고조 휘 충연(忠衍)은 성균 진사(成均進士)이니, 일찍 세상을 떠났고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증조 휘 진후(振後)는 일찍부터 유림(儒林)의 중망을 받았는데, 화순 현감(和順縣監)으로 졸관(卒官)하였고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으며, 태학사(太學士) 문혜공(文惠公) 호주(湖洲) 휘 유후(裕後)의 동생이다. 조(祖) 휘 시상(時祥)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내고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이분이 아들 다섯을 두었으니, 장남 휘 명윤(明胤)은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을 지냈고 호는 오시재(五視齋)이다. 차남 휘 성윤(成胤)은 한림(翰林)을 거쳐 경조 아윤(京兆亞尹)을 지냈으며 호는 구봉(九峯)이다. 삼남 휘 정윤(禎胤)은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으나 일찍 세상을 떠났다. 사남 휘 팽윤(彭胤)은 한림을 거쳐 호당(湖堂)에 선발되었고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을 지냈으며 호는 희암(希菴)이다. 오남의 휘는 굉윤(宏胤)이다.
구봉공(九峯公)은 안동 김씨(安東金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성균 진사 휘 김황(金鎤)의 따님이다. 두 명의 아들을 두었으니, 장남 휘 응만(膺萬)은 시강원 문학(侍講院文學)을 지냈고, 차남이 바로 부군이다.
부군은 숙종 병인년(1686, 숙종12) 12월 19일에 태어났다. 32세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늦은 나이에 벼슬을 시작하여 두 고을의 현감을 지냈으나 자신이 뜻한 바는 아니었다. 불초로 인하여 아경(亞卿)이 되었으며, 국가에서 노인을 우대하는 은전(恩典)을 베풀어 자헌대부(資憲大夫)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올랐다. 을유년(1765, 영조41)에 불초가 정세를 아뢰고 부친의 봉양을 청하여 상께서 해서(海西)의 안악군(安岳郡)에 제수하셨는데, 군에 도임한 지 몇 개월이 지나 8월 1일에 사유헌(四維軒)에서 불초를 버리고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이 80세였다. 오호라, 하늘이여!
부군은 오시재공(五視齋公)에게 수학하였다. 오시재공은 방정하고 엄격하고 간략하고 담담하였으며 매우 지극하게 가르치고 독려하여 한 가지 일과 한마디 말도 검속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대개 어릴 때부터 몸에 밴 교화가 문장의 학업에 있을 뿐만이 아니었다.
이우당(二憂堂) 이공(李公 이만원(李萬元))은 선비(先妣)의 백부인데, 선비께서는 공에게 양육되었다. 당시 공은 호서(湖西)의 별업(別業)으로 물러나 거처하여 덕망(德望)이 조야(朝野)에 자자하였는데, 부군의 기도(氣度)가 응중(凝重)하고 문학(文學)이 일찍 성취된 것을 보고는 크게 기특하게 여겨서 늘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채랑(蔡郞)이 나이가 어리다고 말하지 말라. 지금 호조 판서를 맡기더라도 처리하지 못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부군은 어려서부터 지취(志趣)가 매우 높아 임금을 보좌할 것을 스스로 기약하였다. 이우당공의 계자(季子)인 지성(之晟) 역시 조리(操履)가 독실(篤實)하여 선비들에게 명망이 매우 높았는데 부군과 함께 도의(道義)의 교분을 맺었으니, 영달(榮達)하면 천하를 겸하여 구제하고 곤궁하면 그 몸을 홀로 선하게 하여 함께하기를 기약하였다.
부군에게는 신혼 때 마련한 연갑(硯匣)이 있었는데 붉은색이 아주 선명하였다. 하루는 이공이 연적(硯滴)을 손에 들고 있다가 고의로 앞으로 넘어지며 연갑에 부딪쳐 깨뜨리고 말았다. 그러자 부군이 천천히 말하기를 “그대는 이것으로 나를 시험하려 합니까? 그러나 쓸모 있는 물건을 쓸모없게 만들어 버렸으니, 나는 그것이 옳은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는데, 이공이 더욱 탄복하였다.
부군은 의표가 높아 자신의 뜻을 게시하고 성품이 간항(簡亢)하였으니, 돌아보건대 이 세상에서 그 뜻을 감당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더불어 벗한 사람은 이공뿐이었는데 불행히도 이공이 친상(親喪)을 치르면서 지나치게 애훼(哀毁)한 나머지 세상을 떠나고 말았으니, 부군은 종신토록 애석하게 여기면서 늘 “이언광(李彦光 이지성)이 세상을 떠났으니 이후로 나는 누구와 더불어 벗하겠는가.” 하였다. 언광은 이공의 자이다.
부군은 일찍이 말하기를 “20세 이전에는 오시재공께서 조금도 용납하지 않았으니, 나도 나의 문사(文思)가 과연 어떠한지 알지 못하였다. 하루는 문밖에서 들으니 오시재공께서 희암공(希菴公)을 향해 나의 이름을 거론하면서 이르기를 ‘그 아이의 마음은 반드시 「나의 학업이 비록 여기에 그치지만 금세의 대제학(大提學)은 내가 하지 않으면 누가 하겠는가.」라고 여길 것이다. 아이들은 스스로 만족하는 마음이 생기게 해서는 안 되니, 그대 또한 절대로 그에게 칭찬하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이때부터 비로소 자신감과 자부심이 생겼다.” 하였다.
부군은 남달리 총명하였고 공부하는 과정에 매우 독실하였다. 어릴 적에는 단정히 앉아 책을 읽어서 무더위에도 그만두지 않았으니, 얼굴이 땀에 흠뻑 젖어 갓끈이 헐어 끊어져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몰두하였다. 50세 이후에도 겨울밤이 되면 늘 불초와 마주 앉아 글을 읽었는데, 깊은 밤에 불초는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엎드려 잠이 들었다가 한참 뒤에 놀라 깨어나면 새벽닭이 이미 울었거나 들창에 새벽빛이 밝아 오기도 하였지만, 부군은 전혀 게으른 기색 없이 글 읽는 소리가 더욱 높았다.
정유년(1717, 숙종43)에 부군은 백부(伯父) 문학공(文學公)과 함께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회시(會試)에 응시했을 때 백부가 답안을 작성했지만 서수(書手)가 없어서 부군이 그 답안을 옮겨 적기를 청하니, 백부가 말하기를 “너의 나이도 적지 않으니, 나 때문에 너에게 누가 되는 일은 하고 싶지가 않다.” 하였다. 부군이 말하기를 “제 나이는 형님보다 적습니다. 더구나 형님의 답안을 옮겨 적더라도 제 일은 충분히 할 수 있으니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하고, 백부의 시권(試券)을 신중하게 옮겨 적은 다음 다시 자기의 시권을 옮겨 적어서 저녁 종이 울릴 때에야 제출하였다. 합격자를 발표하자 백부와 함께 합격하였는데, 부군이 지은 답안이 초등(超等)으로 휘장(揮場)하여 장원급제하였다.
기해년(1719)에 부군은 증광 대과(增廣大科)의 양시(兩試)에 합격하였다. 복시(覆試) 때에 어떤 고관(考官)이 부군의 시권을 장원에 발탁하려고 매우 힘을 썼는데, 참고관(參考官)이 사사로이 합격자를 의중에 두고 있다고 자못 의심하였다. 그래서 고관이 크게 화를 내며 급하게 탁명(拆名)하니 바로 부군이었다. 고관이 그 시권을 들어 보이며 “이 사람이 어찌 일찍이 나와 성식(聲息)이 있었던 사람인가.” 하니, 참고관이 크게 부끄러워하고 한스러워하였다. 그러나 이미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이때부터 부군은 왕고(王考)의 명이 있었기 때문에 감히 과거를 그만두지는 않았지만, 마음으로는 대업(大業)을 멀리하였고 심지어 장옥(場屋)을 단지 유희로 여길 뿐이었다. 그리고 세속의 고시관들이 끝내 발탁하지 않았지만 부군은 태연하게 있으면서 염두에 두지 않았다.
왕고께서 누차 주부(州府)를 맡아 다스렸는데, 부군은 따라가서 마치 처자처럼 몸가짐을 공경히 하였으니 관례(官隷)들이 그 말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다. 공주(公州) 관아에 갔을 때 문학공이 부군의 신이 심하게 해진 것을 보고 “공고(工庫)에 신이 많은데 어찌 가져오라 명하지 않느냐.” 하니, 부군이 말하기를 “관부(官府)의 신을 어찌 제 발에 신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끝내 가져와 신지 않았다. 후에 상서(尙書) 윤순(尹淳)이 사람들에게 이 일을 이야기하고는 탄식하기를 “내가 재상이 되었을 때 미처 이 사람을 등용하지 못했으니, 한스러운 일이다.” 하였다.
부군은 천하의 백가서(百家書) 가운데 읽지 않은 책이 없었고 총명이 또한 능히 관통하였으니, 사람들이 혹 의심스러운 것을 가지고 와서 질문하면 비록 구문(鉤文)이나 극자(棘字)라도 그 내력을 분석해 주지 않은 적이 없었다. 중년 이전에는 시(詩) 읊기를 좋아하여 개천(開天)의 음률이 아니면 달갑게 여기지 않았는데, 만년에는 주자서(朱子書)를 좋아하였다. 일찍이 불초를 불러 이르기를 “이 책이 아니면 의리(義理)를 체험할 수 없다. 그리고 세간의 좋은 인재들은 대부분 사장(詞章)을 작은 결실로 여기지만, 너는 반드시 크게 여겨야 한다.” 하였다.
부군은 일찍이 서문(序文)을 지어 조국신(趙國藎)을 송별한 적이 있었는데, 조국신은 바로 약천(藥泉) 남구만(南九萬) 문하의 선비였다. 약천이 그 서문을 보고 경탄하여 이르기를 “이 사람은 문명(文名)이 호당숙(湖堂叔)과 비교하여 어떠한가?” 하니, 조국신이 대답하기를 “이 사람은 나이 어린 유생입니다. 어찌 호당의 큰 명성에 미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그러자 약천이 이르기를 “후생이 두려워할 만하다. 내 생각에 이 사람은 반드시 한 걸음 양보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하였다.
희암공(希菴公)은 부군을 가정의 지음(知音)으로 여겨서 글을 지으면 번번이 부군에게 하문(下問)하였는데, 부군이 간간이 한두 글자를 고쳐서 드리면 따르지 않은 적이 없었다. 다른 자제들이 일찍이 묻기를 “진사(進士) 형의 문장은 오영백(吳永伯)과 비교하여 누가 낫습니까?” 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서로 장점과 단점이 있다.” 하였다. 진사 형은 바로 부군이고, 영백은 약산(藥山)의 자(字)이다.
부군은 일찍이 호주공(湖洲公)의 가장(家狀)을 초(草)하여 재종숙(再從叔)으로 하여금 서당(西堂) 이덕수(李德壽)에게 비문(碑文)을 청하게 하였는데, 이덕수가 “가장은 누구의 손에서 나왔습니까?”라고 물었다. 재종숙이 부군이라고 대답하자 이덕수가 탄식하기를 “호옹(湖翁)의 기상을 모두 잘 묘사하였으니, 문원(文苑)의 큰 고수(高手)입니다.” 하였다.
불초가 어린 시절 “한석봉(韓石峯)이 꿈에 왕 우군(王右軍)을 보았다고 하는데, 이런 말은 거짓에 가깝지 않겠습니까?”라고 물으니, 부군이 이르기를 “그렇지 않다. 나도 일찍이 꿈에 한퇴지(韓退之)를 보았으니, 이치가 실로 그런 점이 있다.” 하였다. 부군은 평소 겸손하여 크게 자랑하는 말을 듣지 못했는데, 자임(自任)하는 점에 이르러서는 이와 같이 의연(毅然)하였다.
국포(菊圃)가 늘 말하기를 “채경언(蔡敬彦)이 곤궁하여 아래에 있었으니, 오도(吾道)를 어찌 논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부군이 지은 시문(詩文)이 매우 많았으나 평소 원고를 모아 놓은 적이 없었는데, 재종(再從) 백공씨(伯恭氏)가 이것을 개탄하여 약간의 시문을 모아 책으로 엮었다. 그러나 그 일을 마무리하지 못한 채 요절하였고, 그 책마저 잃어버렸다. 불초는 부군이 늦게 얻은 아들인데 끝내 흩어져 버린 귀한 글을 수습하여 후학들에게 전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불초의 죄이다.
왕고(王考)께서 공주(公州)를 다스릴 때 병을 앓은 적이 있었는데, 부군은 의원에게 증세를 묻기 위해 큰 눈보라를 맞으며 태령(泰嶺)을 넘어서 하룻밤에 수백 리 길을 왕래하였다. 이때부터 양쪽 눈꺼풀에 흑훈(黑暈)이 깊이 끼었으나, 눈동자는 빛이 나서 눈을 깜박이는 사이에 새벽별처럼 정채(精彩)가 있었다.
왕고께서 일찍이 북읍(北邑)에 있을 때 부군에게 삼(蔘) 한 봉(封)을 주어서 약(藥)으로 쓰게 한 적이 있었는데, 고을의 이웃 사람이 마침 어버이의 병을 부군에게 고한 자가 있었다. 그러자 부군은 뜯어보지도 않고 통째로 싸서 내주었으니, 물건에 대해 인색하지 않았던 것이 대체로 모두 이와 같았다.
부군은 평소 거처할 때 두문불출하여 비록 해가 지나가도 일절 다른 사람의 집을 방문하지 않았고, 만년에 벼슬에 종사할 때는 공적인 일이 아니면 말을 타고 문을 나간 적이 없었다. 또한 성품이 엄격하고 담담하여 종일 담소하는 일이 적었지만, 객을 응접할 때는 온화하게 수작(酬酌)하여 화기가 가득하였으니 기뻐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평소 생계에 연연하지 않아서 아침과 저녁을 제때에 먹지 못했으나, 해가 저물도록 글을 읽어서 다 읽고 나면 편안하게 여겼고 혹시라도 집안 사정을 돌아보지는 않았다. 질문하는 사람이 있으면 시간이 많지 않아도 급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고 급하게 말하지 않았다. 곁에 있는 사람들은 희로(喜怒)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보지 못하였고 복례(僕隷)들은 꾸짖으며 말하는 것을 듣지 못하였다. 벼슬에 종사할 때는 아랫사람을 매우 엄하게 단속하여 아전들이 경외(敬畏)하는 마음을 품었으니, 임기가 다하는 날까지 한결같았다.
부군은 왕고의 상제(喪制)를 지킬 때 나이가 이미 50이었으나, 아침저녁으로 하실(下室)에 올리는 궤식(饋食)에 3년의 상기(喪期)가 다하도록 참석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새벽과 저녁의 참곡(參哭)을 하루도 거르지 않았으며 심한 더위에도 질대(絰帶)를 잠시도 풀지 않았다. 상기를 마치고 나서 문학공(文學公)이 가산(家産)을 나누려는 뜻을 보이니, 부군은 “우리 선인께서는 능히 청빈한 덕을 유지하시어 전답과 소작인이 원래 넉넉하지 않았으니, 만일 가산을 나눈다면 어떻게 선인을 제사 지내겠습니까.”라고 하면서 굳이 사양하여 마침내 그만두게 하였는데, 가난하여 떠돌아다니며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으나 마음에 두지 않았다.
외읍(外邑)의 수령이 되었을 때는 왕고비(王考妣)의 사우(祠宇)와 5대조 증(贈) 판서공(判書公)의 조위(祧位)를 받들고 부임하였으니, 삭망(朔朢)과 명절(名節) 및 기일(忌日)을 만날 때마다 하루 전에 반드시 새벽에 일어나 상복(上服 예복(禮服))을 갖추어 입고 저녁이 다할 때까지 단정히 앉아 있었다. 제기를 씻고 제수를 장만하는 일은 친히 살피지 않은 적이 없었고, 시수(時羞) 여러 가지는 힘써 풍성하게 갖추면서 말하기를 “관직에 있을 때 제사 지내는 것은 집에 있을 때와는 다르다.” 하였다.
늘 오시재공(五視齋公)이 교육해 준 은혜를 생각하여 사시제(四時祭)와 묘제(墓祭)의 제수(祭需)에 특별히 정성과 예법을 지극히 하였다. 문학공의 상을 당해서는 빈렴(殯斂)에 쓰이는 물품과 관곽(棺槨)에 부장(附葬)하는 물품에서부터 우제(虞祭)와 부제(祔祭)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모두 직접 주관하여 사소한 물품이라도 상소(喪所)에서 내게 하지 않았고, 애통해하고 슬퍼하기를 한결같이 부모의 상을 당한 날같이 하였으니, 고을의 이웃들이 모두 감복하였다.
가난한 벗과 어려운 친척이 찾아오면 각각 그들의 기한(飢寒)을 진념하여 문득 방편을 마련해 주었으며, 돌아간다고 고할 때에는 그들이 원하는 것을 스스로 말하게 한 다음 그 수량대로 도와주지 않은 적이 없었고 게다가 더해 주었다.
부군은 7세에 왕모(王母)를 여의어 증왕모(曾王母) 권 부인(權夫人)의 애육(愛育)을 받았다. 그래서 매번 기일(忌日)을 만나면 팔순의 나이로 깊은 병을 앓고 있어도 반드시 3일 동안 소식(素食)하였으니, 불초가 그만두기를 간절히 청해도 듣지 않았다. 집에 증 판서공의 조위(祧位)를 봉안하고 있었는데, 사옥(祠屋)이 층층의 계단 위에 있어서 올라가기가 매우 어려웠다. 그러나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어서는 비록 배궤(拜跪)하지는 못했지만 매일 한 번씩 올라가서 사당의 담장을 한 바퀴 둘러보고서야 돌아왔다.
이씨(李氏) 집안의 며느리가 된 누님이 영남에 살았는데, 비안 현감(比安縣監)으로 있을 때 받들어 맞이하고는 일마다 힘껏 뜻을 따라서 어머니처럼 섬겼다. 그러다가 서쪽으로 돌아온 이래로는 늘 불초를 불러서 “네가 만일 남쪽 고을의 수령이 되어 내가 다시 누님의 안색을 받들 수 있게 된다면 나는 더 이상 유감이 없겠구나.” 하였다. 불초는 이때부터 외읍(外邑)으로 나가기를 청했으나 정성과 효심이 부족하여 끝내 뜻대로 할 수 없었다. 부군은 비록 억지로 서군(西郡)으로 나아갔으나 마음에 울적한 회포를 풀지는 못하였다.
부군은 두 현(縣)의 현감을 지냈는데, 늘 이르기를 “삼대(三代) 이후로 선비가 대략 경륜을 펼친 것은 마땅히 외읍에 있었을 뿐이다.” 하였다. 공무의 여가에는 주자서(朱子書)를 읽었고 정법(政法)이 조금도 구차하지 않아서 매번 도내(道內)에서 최(最)를 받았으며 돌아오는 행장에는 한 가지 물품도 가져오지 않았으니, 백성들이 모두 비석을 세워 거사(去思)의 뜻을 부쳤다.
단성(丹城)에서 임기를 마치고 돌아온 다음 날 아침에 선비(先妣)가 상자 꾸러미에서 무언가를 열심히 찾고 있었다. 불초가 그 까닭을 물으니, 선비가 말하기를 “현(縣)에 있을 때 일찍이 60전(錢)을 얻어서 갈무리해 두었는데, 아침밥을 지을 쌀을 사기 위해 찾는다.” 하였다. 불초가 말하기를 “6년 동안 수령을 지내고 나서 다해 봐야 60전밖에 안 되는 돈을 벌어서 돌아왔으니, 오가는 길이 또한 수고롭지 않았습니까?” 하니, 선비도 크게 웃었다.
부군은 어릴 때부터 《퇴계집(退溪集)》을 익숙하게 강습(講習)하여 한결같이 경전(經傳)처럼 존신(尊信)하고 경모(敬慕)하였으니, 의심나는 예(禮)를 질문하는 사람이 있으면 번번이 노선생(老先生)의 설을 거론하여 대답하였다. 불초가 독서할 때 혹 주자(朱子)의 주(註)에 대해 의심을 일으켜서 불초의 의견으로 질문하면 늘 이르기를 “글에는 의심나는 곳이 없을 수가 없다. 그러나 이미 주자와 퇴계의 정론(定論)을 거쳤으면 오직 존신하여 체험해야 할 뿐이니, 후생들이 망녕되이 신기(新奇)한 의사(意思)를 내어서는 안 된다.” 하였다.
先考府君遺事
府君諱膺一。字敬彦。平康之蔡。實我東著姓。六代祖諱蘭宗。司憲府執義。五代祖諱慶先。號竹村弘文館應敎。高祖諱忠衍。成均進士。早卒。贈吏曹判書。曾祖諱振後。夙負儒林重望。卒官和順縣監贈吏曹參判。實太學士文惠公湖洲諱裕後之弟也。祖諱時祥。同知中樞府事贈吏曹參判。生五子。長諱明胤。弘文館修撰號五視齋。次諱成胤。歷翰林止京兆亞尹號九峯。次諱禎胤。進士早歾。次諱彭胤。翰林選湖堂止藝文館提學號希菴。次諱宏胤。九峯公。娶安東金氏。成均進士諱鎤女。生二子。長諱膺萬。侍講院文學。其次府君是已。府君以肅廟丙寅十二月十九日降。三十二進士。晩而筮仕。典二縣。非其志也。以不肖叨亞卿。國家推優老恩。躋資憲大夫知中樞府事。歲乙酉。不肖陳情乞養。上畀海西之安岳郡。到郡數朔。以八月一日。棄不肖於四維軒。壽八十。嗚呼天乎。府君受學於五視齋公。公方嚴簡冷。敎督甚至。一事一言。靡不檢束。葢自少擩染。不亶在文章之業而已。二憂堂李公諱萬元。先妣之伯父也。先妣養於公。時。公退居湖西別業。德望傾朝野。見府君氣度凝重。文學夙就。大奇之。每語人曰。勿謂蔡郞年少。今雖畀判度支。亦當事無不濟。府君自少志趣甚高。以王佐自期。二憂公季子之晟。亦操履篤實。士望甚殷。與府君爲道義交。達而兼濟。窮而獨善。期與之偕焉。府君有新婚硯匣朱丹正鮮。一日。李公手硯滴。故跌於前撞碎硯。府君徐曰。君欲以此試吾耶。以有用爲無用。吾未見其可也。李公益 歎服焉。府君標高揭己。旣簡且亢。顧斯世無當其意者。所與友獨李公爾。不幸李公執親喪過毁以終。府君終身痛惜之。常曰自李彦光死。吾誰與友。彦光李公字也。府君嘗言二十以前。五視齋公不少假借。雖吾亦未知吾之文思果何如也。一日。從戶外聽之。五視公向希菴而擧府君名曰。渠心必以爲吾業雖止此。今世大提學。非吾爲之而誰爲之云爾。兒輩不可使有自足之心。君亦切勿以稱詡之辭及於渠耳也。自此始乃自信而自負焉。府君聦明特殊。工課至篤。少時嘗端坐讀書。雖盛暑未嘗或輟。汗漬顴頰。笠纓至或爛絶。不省也。雖五十以後。每當冬夜。與不肖相對以讀。至更深。不肖輒不勝睡思。俯伏假寐。久乃驚寤。則或鷄聲已催。或紙牕向曙。府君了無倦色。讀聲益高焉。歲丁酉。府君與伯父文學公俱發司馬解。及赴會闈。伯父篇成而無書手。府君請寫之。伯父曰。君年亦非少。不欲以吾故累君。府君曰。弟年較兄則少。况寫了自足幹吾事耶。於是寫伯父券惟謹。已又自寫己券。犯昏鍾以呈。及拆號。與伯父並中。而府君所製。以超 等揮塲而魁。己亥。府君俱中增廣大科兩塲解。及覆試。一考官欲以府君券擢置魁甚力。參考者頗疑其有物色。考官大怒急拆名。卽府君也。擧手示曰。此豈嘗與吾有聲息者耶。參考者大慙恨。然無奈何矣。自是以有王考命。雖不敢廢擧。乃心遠大業。至塲屋特遊戲爾。世俗考試者終無以簡拔而府君夷然不以爲念。王考累典州府。府君隨往。敬身若處子。官隷未嘗聞聲。其住公州衙也。文學公見府君履甚弊。曰工庫不患無鞋。何不命持來。府君曰。官府鞋豈爲吾設耶。終 不着。後尹尙書淳對人說此事。歎曰。吾爲冢宰。未及收此人。可恨也。府君於天下百家書。無所不讀。而聦明又能貫穿。人或以疑來質。雖鉤文棘字。未或不劈其來歷。中身以前喜吟詩。非開天音不屑也。晩喜朱子書。嘗詔不肖曰。非此無以體驗義理。世間好人才率多以詞章爲小結褁。爾須大之。府君嘗作序送趙生國藎。趙是南藥泉門下士。藥泉見其序。驚歎曰。此子文名與其湖堂叔父何如。趙曰。此是年少儒生。何能及湖堂盛名。藥泉曰。後生可畏。以吾見之。恐不必讓出一頭。希菴公以府君爲家庭知音。有作輒俯問。府君間呈一二字改換。靡不從之。他子弟嘗問曰。進士兄文章與吳永伯孰優。公曰。互有長短。進士兄卽府君永伯藥山字也。府君嘗草湖洲公家狀。使再從叔請碑文於李西堂德壽。李曰。狀出何人手。從叔以府君答。歎曰。描得盡湖翁氣像。大是文苑高手。不肖兒時問曰。韓石峯夢王右軍。此等語得不近誕。府君曰。不然。吾亦嘗夢見韓退之。理固有然者。府君平日謙挹未聞有夸大語。至自任處。毅然如此。菊圃常曰。蔡敬彦窮而在下。吾道何論。府君所著詩文甚多。平生未嘗蓄藁。再從伯恭氏用是慨恨。裒成若干編。未卒而夭。編亦失所在。不肖爲府君晩生。終無以收拾零寶以惠後學。此則不肖之罪也。王考莅公州。嘗有疾恙。府君爲問醫。衝大風雪踰泰嶺。一夜來往數百里。自是兩眼胞深滯黑暈。而眸子燁煜。轉眄之際。精彩如曙星。王考嘗在北邑。予府君以一封蔘。俾資藥用。鄕隣人適有以親病告者。府君不坼視。全一褁投與之。於物無恡惜皆類是。府君平居杜門。雖閱歲絶不作參訪人家。晩年供仕。非公故。未嘗騎馬出門。性又嚴冷。終日寡言笑。至與客相接。酬酢溫溫。和氣藹然。人莫不歡心。平生不以産業置胷中。朝晡飯多不以時。竟晷讀書。讀了晏如。未或顧家。人有問。雖値造次。無急疾容急疾言。傍人不見喜怒。僕隷不遭詬罵。至莅官。束下甚嚴。吏懷凜栗。報瓜如一日。府君持王考制。年已五十。朝晡下室之饋。終三年未 或不與。晨昏參哭。未或一闕。雖劇暑絰帶無蹔卸。服闋。文學公有析産意。府君曰。吾先人克持淸德。田民本自不敷。若析之。何以祀先人。固讓遂已之。貧窶漂泊。不堪其苦。不恤也。宰外邑。奉王考妣祠宇與五代祖贈判書公祧位以赴。則每値朔朢名節與忌日。前一日必晨起具上服。端坐終夕。漑滌割飪。靡不親照。時羞庶品。務在豐腆曰。官享與在家異。每念五視公敎育之恩。則四節墓需。特致誠禮。丁文學公喪。則自附身附棺。以至虞祔。一皆自我幹當。雖毫髮勿令出之喪所。哀慟震怛。一如罹巨刱日。鄕隣皆感服。貧 交窮族之至者。各軫其飢寒。輒有方便。及告歸。使之自列其所欲者。無不如其數副之而抑有加焉。府君七歲失王母。被曾王母權夫人愛育。每値忌日。雖八耋沈病。必食素三日。不肖苦請已之。不聽。家奉贈判書公祧位。祠屋在層砌上。登陟甚艱。望八以來。雖不得拜跪。日輒一上。繞祠垣一匝乃還。有姊李氏婦家嶺南。宰比安奉邀之。事事務順旨意。事之如母。西歸以後。每詔不肖曰。汝若得南邑。使我更奉姊氏顔色。吾無憾矣。不肖由是乞外。誠孝薄。終不克如意。府君雖強赴西郡。意悒悒不釋。府君知二縣。每曰。三代以後。士之略綽展布。惟當在外邑。公餘日看朱子書。政法不少苟治。每最一道。歸裝不持一物。民皆勒石寓去思焉。嘗自丹城瓜熟還。翌朝。先妣力探箱簏。不肖請其故。先妣曰。在縣也。嘗得六十錢藏之。欲得以資朝炊耳。不肖笑曰。作六年宰。都只獲六十錢歸。來往不亦勞乎。先妣亦大笑。府君自少講貫退溪集。尊信敬慕。一如經傳。人有以疑禮質者。輒稱老先生以復之。不肖讀書時。或起疑朱註。仰質已見。每曰。書不可無疑。然旣經朱子退溪定論者。惟當尊信體驗而已。後生不可妄生新奇意思。
